소설리스트

88화.돌풍 용병대의 신위 (89/278)

《돌풍 용병대의 신위》

 트레저 분지에 도착한 지도 일주일이 흘렀다. 그동안 사람들은 매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어느새 분지는 막사로 가득 찼고, 서로가 다 경쟁자이다 보니 시비와 싸움이 예사로 일어났다.

 그래도 엘프라는 공동의 적을 눈앞에 둔 상황이라 큰 규모로 진행되지 않았지만 분지에는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던전이 보이는 산에 잠복했던 진수가 대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존재는 이미 하룬에게 들어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키워 온 호감에 더해 그가 비트에 잠복해 던전 상황을 주시하느라 한동안 풀뿌리와 들쥐를 잡아먹고 지냈다는 사실을 안 대원들은 그를 따듯하게 받아들였다.

 헤니는 자신에게 최고의 행운을 안겨 준 영상의 촬영자가 진수라는 것을 알자 그를 친오빠처럼 대했다. 순진한 진수가 오해할 정도였다.

 진수는 대원들에게 예상하지 않았던 따듯한 환영을 받자 마음이 놓인 듯 만족하며 지냈다. 가족 같은 분위기의 돌풍 용병대의 실체에 감동한 진수는 대원들과 며칠을 같이 지내며 진한 동료애를 즐겼다.

 사건이 터진 것은 진수가 하룬이 따로 부탁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선 다음 날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불청객이 찾아들었던 것이다. 그때 하룬은 헤니와 함께 근처 지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마치 덫에 걸린 멧돼지가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여기가 돌풍 용병대가 머무는 곳이냐?”

 “누구냐?”

 딜런의 차가운 대답이 이어질 때 하룬이 밖으로 나왔다.

 돌풍 용병대는 용병대가 차지한 구획의 가장 바깥쪽, 그러니까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른 용병대와는 거리가 좀 떨어진 한적한 곳이었다.

 엄청난 숫자의 용병들이 돌풍 용병대의 숙영지를 몇 겹으로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 기세가 흉포하기 그지없었다.

 “같잖은 것들이 폼은! 이런 쥐새끼들이 어디서 무게를 잡는 거야?”

 딜런의 묵직한 대응에 듣기 싫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밸이 뒤틀렸는지 욕설을 내뱉었다.

 “누구냐고 물었다!”

 더욱 차가워진 딜런의 대응에 상대는 누런 가래침을 그의 발 앞에 뱉었다. 반백의 머리칼과 티노의 얼굴보다 더한 주름살 그리고 누렇게 변색된 눈알을 번들거리며 시비를 거는 상대는 제법 나이가 있어 보였다.

 “우린 제라츠 용병단에서 나왔다!”

 “그래서?”

 딜런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얼음 덩어리로 변했다. 명색이 세습 귀족에 명예로운 기사 출신인 그가 언제 이런 대우를 받아 보았을까.

 “그래서라니. 이 새끼들 좀 보게. 너희들이 습지에서 우리 제라츠 용병단을 암습했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감히 우리 이름을 듣고도 씹어?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기사 나부랭이를 흉내 내나 본데 오늘 너희 돌풍을 박살내려고 작정하고 왔으니까 돼도 않은 무게 잡지 말고 당장 꿇어. 안 그랬다가는 뼛골도 남지 않게 갈아 마셔 버릴 테니까. 꿇어, 이 새끼들아!”

 “저 씨발 것들을 다 죽여 버리자!”

 “요즘 이름 좀 날린다고 이 새끼들 뻣뻣하게 서 있는 거 보소!”

 “흐흐흐, 안 그래도 사타구니가 딱딱했는데 저년은 돌려버리고 죽이자고. 저 새끼도 반반하니 뒷구멍이나 작살내고 죽이자고, 부단장.”

 수백 명이 단체로 무기를 꺼내 욕설과 음담패설을 하며 대원들을 위협하자 멀리 떨어져 있던 용병들과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습지? 우리가 너희 제라츠를 암습했다고?”

 딜런의 입매가 살짝 뒤틀렸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는 증거였지만 상대는 그것을 비웃음으로 생각했는지 당장 인상이 구겨졌다.

 “이 씨발 새끼 봐라. 내 동료들을 죽여 놓고 태연하게 웃어? 비겁하게 암습이나 하는 주제에 죽을 때 죽더라도 분위기 한번 내 보자는 거냐? 너 같은 개새끼는 우리의 사랑을 받아 항문이 파열돼 봐야 살려 달라고 빌 거야. 크크크! 제법 미끈하게 생겼는데 넌 제일 마지막에 죽이마. 숫자로 보면 적어도 백은 감당해야 하는데 어쩌지?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 나 혼자로 끝내고 죽여주마.”

 으드득!

 딜런은 이를 갈았다. 그러고는 하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검을 쥔 그의 손이 부들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치욕을 당해 본 적이 없는 딜런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룬은 대답 대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들을 포위한 제라츠 용병들 뒤로 구경 나온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하룬의 눈은 다른 것을 찾고 있었다. 마침내 주변을 살피던 그의 눈에 산 중턱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세 명이 들어왔다.

 거리가 멀어 자세한 용모는 볼 수 없지만 이들을 사주한 제국 정보 길드의 요인들로 보였다. 그중 한 여자는 작은 거울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뭔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살기에 찬 눈길을 보낸 하룬이 다시 제라츠 용병들과 마주한 딜런에게 시선을 돌렸다.

 “딜런 경, 한 명도 살려두지 않을 겁니다.”

 “바라던 바입니다!”

 딜런의 떨리던 손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그리고 그의 두 눈에서 화염이 흘러나오며 입매가 심하게 뒤틀렸다.

 “티노, 독침 사용을 허락합니다.”

 “이미 준비했습니다.”

 티노의 손에는 이미 수십 개의 독 대롱이 들려 있었다.

 “헤니, 오늘 학살할 것이다. 눈을 감고 있어.”

 헤니는 대답 대신 힘주어 쥔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하룬은 고개를 들고 고함을 질렀다.

 “오늘 제라츠 용병단이 돌풍 용병대에 도전했다!”

 마나가 깃든 하룬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려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본 용병대는 이 도발을 말로 해결할 생각이 전혀 없다. 이들은 우리 용병대가 자신들을 암습했다고 주장하나 우리는 그런 적이 없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시비의 원인을 하룬의 고함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한쪽은 제국 10대 용병단 중 하나이고, 한쪽은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용병계의 화두가 되는 돌풍 용병대이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시비비가 가려질 수 없는 사안에서 힘은 곧 법인 것! 돌풍 용병대는 오늘 이후로 제라츠 용병단과 원수가 되었음을 용병계에 널리 알린다. 향후 제라츠와 연계하거나 비호하는 자나 세력은 본 용병대의 적으로 간주하고 무조건 주살할 것을 천명하는 바이다.”

 하룬의 선언에 당장 제라츠 용병단 사람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겨우 다섯 명이 사백 명도 넘는 자신들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니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는데 그것은 곧 스산한 적개심과 살기로 이어졌다.

 “이런 미친 새끼들, 아주 돌았구나.”

 “저 새끼들 가랑이를 찢어 죽이자고. 그 살점들은 나누어 먹고, 뼈는 갈아서 이쑤시개로 쓰자고.”

 “저 계집은 내게 맡겨 두라고.”

 “죽여랏!”

 제라츠 용병들은 흥분해서 무기를 들고 소리를 지르며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제라츠 부단장의 눈은 산 중턱을 향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이제 우리 돌풍에 포위되었다!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살고 싶으면 팔다리 중 하나를 내놓고 물러가라!”

 하룬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는 듯 제라츠 용병단은 물론이고 구경을 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실소를 터트리고 있었다.

 다섯 명이 무려 사백 명이 넘는 상대를 포위했다고 선언하는 것이 너무 가소로워 보였던 것이다.

 “캬하하하!”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어. 완전히 돌았나 봐!”

 “이런 미친 새끼들이 있나!”

 제라츠의 부단장을 비롯한 용병들이 황당한 표정에 이어 살기를 뿜기 시작했을 때 하룬은 라이피를 소환했다.

 “라이피 소환. 저놈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포위해.”

 -네. 소일 그레이트 월!

 라이피의 대답과 동시에 돌풍 용병대를 포위하고 겹겹이 서 있던 제라츠 용병단원의 뒤쪽에 넓게 흙벽이 올라왔다. 그 높이는 한 번에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헉! 정령 마법이다!”

 “흙벽이 솟아올랐다.”

 제라츠 용병단원들과 구경꾼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구경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흙벽 위로 올라섰다.

 생각지도 못한 정령사의 존재와 한 번에 반경 50여 미터의 공간에 흙벽을 만든 정령 마법의 위력에 놀라 단원들의 기세가 죽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 제라츠 부단장이 검을 높이 들고 외쳤다.

 “정령사 따위는 죽여 버리면 그만이다. 다 쓸어버려!”

 “와아!”

 “죽여랏!”

 제라츠 용병단원들은 기성을 지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제 상황은 누구도 제어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기강도 없고 진형도 갖추지 않은 그야말로 무식과 무질서의 전형을 보여 주는 제라츠 용병단이었다.

 “위신느 소환. 윈드 크레모어.”

 -다 쓸어버릴게요.

 곧 하룬의 앞에 거대한 바람구가 생겨나더니 회전을 하며 그 덩치를 줄여 갔다.

 최초의 접전은 딜런부터였다.

 싸악!

 선기를 제압하려는 듯 딜런을 향해 달려오던 제라츠의 부단장은 오러가 깃든 딜런의 검에 의해 검과 함께 몸통이 순식간에 절반으로 갈렸다.

 자신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듯 두 쪽으로 갈라진 놈의 눈과 입이 뭔가 보고 말하려는 듯 경련을 일으켰지만 딜런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예 작심한 딜런의 검에서는 오러가 훨훨 불타오르고 있었는데 마치 사슴 무리에 뛰어든 사자처럼 그의 거침없는 공격에 제라츠 떨거지들의 사지와 머리통이 날아가고 있었다.

 차앙! 창!

 “아악!”

 “악! 내 팔!”

 “안 돼!”

 딜런의 검에서 솟아난 오러는 무서운 기세로 사방으로 날아갔다. 아직 검의 형상을 갖추지 못한 오러지만 흔하게 볼 수 있는 검기는 아니었다. 이글거리는 화염의 형상을 닮은 오러는 검에 머무르지 않고 사방으로 비산하며 그에게 모욕을 준 제라츠 용병단원들을 도살했다.

 하룬도 준비가 끝났다. 그를 향해 달려들던 제라츠 용병단원 하나가 바람의 영향권에 들어서는 순간 어른 머리통 크기로 줄어들었던 바람구가 폭발한 것이다.

 꽈앙!

 바람구는 굉음과 함께 터지며 수백 개의 파편으로 나뉘어 전방을 향해 부채꼴 각도로 섬광처럼 날아갔다.

 “으악!”

 “컥!”

 여기저기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윈드 크레모어가 터진 곳에는 스무 명도 넘는 상대가 온몸에 구멍이 뚫려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구멍으로부터 분수처럼 솟구치는 붉은 피처럼 하룬의 두 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이아 소환. 워터 밤.”

 -죽어!

 “소일 스파이크. 윈드 커터.”

 하룬은 연거푸 정령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하룬의 마음 상태를 공유하는 귀족 정령들은 마치 악귀처럼 제라츠 단원들을 향해 하룬이 이미지화시킨 정령 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차앙!

 기세를 타며 이미 수십 명의 사지를 베어 버린 딜런의 검이 마침내 멈추었다. 놈들의 중간에 포진한 제라츠 용병단의 조장 셋의 검이 그의 검과 오러를 힘겹게 막아 세운 것이다.

 “이…… 악마 같은 놈들! 어떻게 이런 짓을!”

 그들의 눈에는 마치 악마처럼 단원들을 학살하는 돌풍 용병대원들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피를 뒤집어쓰고 아직도 활활 타오르는 오러를 유지하는 이 차가운 얼굴의 검사도 두렵지만 정령 마법으로 벌써 백 명 넘게 학살한 긴 머리칼의 용병은 더 무서웠다.

 정령술을 펼치는 사이에 간간이 던지는 암기에 여지없이 쓰러지는 부하들의 모습이 꿈처럼 비현실적이다. 흙이 창으로 변하고, 바람이 검으로 그리고 물 덩어리가 화살로 변해 부하들을 도륙하는 모습은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 학살자의 기세는 더 무서웠다. 얼굴을 가린 긴 머리카락 사이로 번뜩이는 붉은 눈은 닿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리는 무시무시한 살기와 투기를 발산했다. 그 눈이 향하는 공간은 곧 죽음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나마 뒤쪽은 조용한 편이었지만 그곳에서도 부하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마치 바람처럼 가볍게 날아다니는 중년의 왜소한 용병은 긴 대롱을 수시로 바꿔 가며 불었는데 독침이 들었는지 대원들이 맞는 즉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다른 한쪽에서는 세 개의 활을 번갈아 사용하며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화살을 날리는 여궁사에게 단원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헤니가 건네주는 그녀의 화살을 백발백중이었다. 익스퍼트에 오른 단원도 그 화살을 막아내질 못했다. 그녀의 화살촉에는 붉은 오러가 솟아 있었다.

 “우리가 누군지 모르고 왔는가? 우린 돌풍 용병대야! 우리 실력도 제대로 모르고 개죽음 당하라고 보낸 작자가 누군가?”

 차가운 딜런의 말에 세 사람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곧 소드 마스터가 될 익스퍼트 최상급 검사의 존재는 듣지도 못했다. 바람처럼 날아다니며 우습게 독침으로 부하들을 죽이는 중늙은이와 마법사들만 쏙쏙 화살로 저격하는 신기의 궁술을 가진 여자 궁자의 존재 역시 금시초문이다.

 정령사의 존재는 들었지만 이런 수준이라고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중급 정령사라고 했다. 4서클 마법사 열둘에 5서클 마법사 셋이라면 그를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게 뭔가? 반경 50미터를 아우르는 거대한 흙벽을 한 번에 세우게 만드는 정령 마법이 웬 말인가? 바람구가 터져 한 번에 수십 명의 몸에 구멍을 뚫는 정령술은 들어 보지도 못했다.

 마법사들은 개전 초기에 이미 도네이스의 마나가 실린 화살에 머리통이 뚫려 버렸고, 쓸 만한 실력자들은 딜런의 검이 찾아 도륙을 내었다.

 “불쌍한 놈들. 차라리 내 검에 죽으면 편하기라도 할 것을. 우리 대장의 정령술에 당한 놈들은 편히 죽지도 못하고 온몸의 피란 피는 다 쏟아 내고 온갖 고통을 다 겪은 후에야 죽을 것이다. 너희도 이만 가라!”

 차갑게 말한 딜런은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서지 검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름 그대로 마치 해일처럼 검로가 늘어날수록 위력이 증대되는 그의 가전 검술이었다.

 깡!

 까앙! 깡!

 세 번의 격돌 끝에 세 조장의 검은 수수깡처럼 부서지고 그들의 몸은 덮쳐 온 검의 해일 속에 부서지고 말았다. 그나마 가장 강한 세 조장이 쓰러지자 나머지는 겁에 질려 상대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살려 줘!”

 “살려 줘요!”

 살아남은 자들은 무기를 던지고 바닥에 엎드려 선처를 구했다.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자들이라고 자각하자 납작 엎드린 것이다. 이렇게 비굴하게 목숨을 구하는 것은 간혹 있는 일이다.

 예상대로 딜런의 검과 티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도네이스의 손가락이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눈은 하룬을 향했다.

 “제발! 대장, 이제 충분하잖아요.”

 정신없이 도네이스에게 화살을 건네주다가 전투가 멈춘 후 사방에 널린 잔혹한 주검과 피를 보고 공황 상태에 빠진 헤니가 두 손을 모아 빌었다.

 처음에는 끓어오르는 분노로 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헤니지만 제대로 대항도 하지 못하고 사지가 잘리고 머리를 잃은 시체들이 늘어나고 끔찍한 비명이 난무하자 두 눈을 질끈 감고 귀를 틀어막은 것이다.

 “읻르은 죄 없는 양민들을 학살한 자들이다. 폭행과 살인은 물론 남녀를 가리지 않고 강간하고, 그것도 모자라 인육까지 먹은 놈들이다. 이들은 용병도 아니고 심지어 인간이 되기를 포기한 놈들이다. 정신 차려! 이들 한 명을 죽이는 것이 백 명의 죄 없는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다.”

 하룬의 말에 딜런의 검에서 다시 오러가 솟아났다. 멈추었던 티노의 몸이 다시 바람처럼 날았다. 연방 화살통에서 화살을 뽑고 시위를 당기는 도네이스의 손가락은 다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헤니는 땅에 얼굴을 박고 울고 싶었지만 손은 본능적으로 화살통에 들어 있는 화살을 꺼내 도네이스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하룬의 친구들은 그에게 동조되어 다시 살벌한 살수를 날리기 시작했다.

 “악!”

 그렇게 외마디 비명과 함께 끝이 났다.

 더 이상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애절한 소리도 없고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멈추어진 듯 모든 것이 진공처럼 사라져 버렸다. 헤니는 얼굴을 들기가 두려웠지만 용기를 냈다.

 그래도 대원들이 다쳤을지 모른다. 대장 말대로 이들이 한 말이나 그동안 돌아다니며 들은 평판으로는 살려 주는 것보다 죽이는 것이 나은 무리들이다.

 “허업”

 두 눈을 뜬 순간 다시 지옥도를 볼 수 있었다. 굳은 얼굴로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딜런과 독 대롱을 품에 갈무리하고 태연하게 자신에게 걸어오는 티노가 보였다. 도네이스가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화살을 수거하기 시작했다.

 대장은 지옥의 불길처럼 붉게 변한 눈으로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들은?’

 그곳은 뒤쪽 산 중턱이었는데 검은 옷을 입은 세 명이 정상 쪽으로 빠르게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이 사태의 주재자인 듯했다.

 -라이피, 이곳을 정리해 줄래?

 -알았어, 친구.

 라이피는 한 번에 흙벽 내의 공간을 꺼지게 만들고 새로운 흙을 위로 올렸다. 처참했던 전장이 한순간에 말끔해졌다.

 헤니는 높게 치솟았던 흙벽들이 사라지고 거짓말처럼 모든 시체들이 흙 속으로 없어지고 난 후에도 한동안 그 자세를 풀지 못했다.

 “괜찮아, 이제 다 끝났어.”

 어깨를 두드리며 가볍게 안아주는 하룬의 다정한 말에 겨우 온몸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녀는 따듯하고 단단한 하룬의 품속에서 오랫동안 서럽게 울었다.

 돌풍 용병대가 제라츠 용병단을 상대로 벌인 사건은 생각보다 굉장히 큰 반향을 일으켰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라이피가 만든 흙벽 위까지 올라가 모든 장면을 목격했던 용병들이나 유저들, 그리고 기사들은 꽤 많았다.

 그들의 입을 통해 돌풍 용병대의 무위가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확인한 용병들은 앞다투어 돌풍 용병대와 안면을 트기 위해 찾아오기 시작했다. 제라츠 용병단원 사백여 명을 단 넷이 도살해 버린 사건은 용병들에게 강렬한 자극이 되었다.

 “흐흐. 돌풍 용병대의 실력이라면 웬만한 기사단 하나랑 붙어도 밀리지 않을 거야.”

 “그야 당연하지. 그 정령사 봤냐? 엘프들의 정령 마법이 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그만큼은 아닐 걸세. 으으! 바람이 뭉쳐진 구가 폭발해서 오십 명을 한 방에 날려 버리는 거 자네도 봤지? 이구, 살 떨려서 원!”

 “그 딜런이라는 작자는 어떻고. 제라츠의 부단장 놈이 한 방에 반쪽이 나 버렸잖아. 오러 소드가 그렇게 선명하고 굵은 것은 난 처음 보네. 그 정도 실력자는 황실 근위 기사단에도 몇 명 없을걸. 아마 익스퍼트 최상급은 될 거야.”

 “이 사람아, 도네이스는 어떻고. 세 개의 활을 자유자재로 쏘며 정확히 머리통만 꿰뚫는데 피하는 놈들이 없더만. 다카린의 망나니라고 알려졌더니 언제 돌풍에 들어간 거지?”

 “난 그 중늙은이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움직이면서도 정확하게 독침을 쏘는 것도 놀랍지만 그 바람처럼 가볍고 표홀한 움직임은 정말 발군이더라고.”

 그날 이후 돌풍은 트레저 분지에 모인 사람들에게 화제의 중심이 되어 버렸다.

 4 대 400!

 그야말로 일당백의 무위를 가진 엄청난 용병대! 후크란의 보석 광산까지 이방인들을 무사히 안내했으며, 이곳 트레저 분지에 있는 고대 던전의 위치를 밝힌 그들은 용병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누구나 돌풍 용병대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싶어 했고, 그들과 인연을 맺길 원했다. 심지어 기사들 중에서도 돌풍 용병대원들에게 감탄하는 인물들도 많았다.

 엘저는 피엘을 움직여 돌풍 용병대 옆으로 아예 자리를 잡았고, 다카린 용병단도 도네이스와의 관계를 내세워 자연스럽게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 광경을 보거나 들은 기사들은 이전처럼 쉽게 용병들을 놀리거나 시비를 걸지 못했다. 너무 잔인하고 빠르게 이루어진 일장의 학살극은 안 그래도 잔뜩 당겨졌던 긴장의 끈을 더욱더 강하게 조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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