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엘저》
트레저 분지는 지름이 약 20킬로미터인 거대한 분지다. 분지 주위를 빙 두른 산들은 분지를 향하면서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었다.
원래는 이름 없는 곳이었지만 던전이 발견된 후 사람들에게 트레저 분지로 명명된 평원은 중앙부의 던전을 중심으로 남서와 남동쪽은 검붉은 황무지였다. 동쪽은 작은 호수가 있었고 북쪽과 동쪽은 거대한 나무들이 자라는 숲 지대였다.
던전의 남쪽 황무지에는 속속 도착하는 인간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던전의 입구를 보고 부채꼴로 각기 영역을 차지한 인간들의 세력은 암중에 치열하게 세 싸움을 하며 눈치를 보았다.
중앙에는 가장 먼저 이곳에 도착한 1황녀 세력이, 그 양쪽으로는 1황자와 3황자 세력이 자리를 잡았다. 그들 진영에는 던전을 먼저 발견하고도 아직 차지하지 못한 이방인 길드들이 합류했다.
그리고 양 끝으로 가면서 매일 새로이 도착하는 세력들이 차례대로 영역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숫자가 얼마 안 되는, 소속 없는 이방인들과 인간들은 그 뒤쪽의 넓은 영역에 무질서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곳까지 안내하는 의뢰를 수행한 용병들도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의뢰를 마쳤기에 돌아가야 했지만 던전에 대한 욕심과 호기심이 그들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일부는 연속해서 장기 계약을 맺은 경우도 있었다.
이곳에 온 용병들은 비록 2급 이상이 대부분이지만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있는 다른 세력들에 비해 무력이 많이 달리기 때문에 각각 연줄이 있는 제국 10대 용병단에 합류했고, 몇몇의 자유 용병들은 눈치를 보며 그 사이에 포진하고 있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무력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들었기에 시끄럽지는 않았지만 인간들이 모이는 곳은 어디나 그렇듯 이곳저곳에 가판 상점들이 열렸다. 무기와 방어구를 팔거나 수리하는 대장간도 차려지고, 식당이나 차를 파는 상점들도 막사를 치고 영업을 했다.
넥컴월에서는 분지의 가장자리에 유저 타운까지 만들어 유저들의 편의를 도모했기에 어느 대도시처럼 활기가 넘쳤다.
계속해서 유입되는 사람들 때문에 이곳은 점점 더 혼잡해지고 활기가 돌았다. 엘프들과의 일전 그리고 던전을 놓고 벌일 쟁투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잔뜩 흥분해서 한 명이라도 더 아는 사람을 규합하기 위해 돌아다니고 있었다.
용병들이 자리 잡은 곳의 한참 뒤 분지 가장자리 끝에 임시 숙영지를 정한 돌풍 용병대도 아침 일찍 활동을 시작했다. 딜런은 새로이 얻은 검에 매료되어 새 검에 익숙해지기 위해 검술 수련에 빠져 있었고, 헤니는 먼저 출발한 아레스 일행을 찾으러 유저들이 자리 잡은 곳으로 향했다.
하룬은 혹시 도착했을지도 모르는 엘저를 찾아보기로 작정하고 이 혼잡한 곳으로 들어왔다.
용병들의 캠프는 넓게 자리하고 있었기에 일일이 발품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티노라도 옆에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도네이스와 함께 다카린 용병단에 갔다. 도네이스를 매개로 연수할 참이었다. 돌풍 용병대 인원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규모가 필요한 법이다.
2급 이상의 용병들이라서 그런지 무식하고 버릇없는 날강도 같은 외형을 가진 자들은 별로 없었다. 원래 인상으로 먹고사는 용병들은 3급 이하의 중하급이다. 그 이상은 실력으로 먹고사는 만큼 굳이 날카롭고 외관상 보기 흉한 꼴을 연출할 필요는 없었다.
이 넓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일일이 물어야 하는지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피엘이나 엘저는 용병계에서 유명했기에 만약 오기만 했다면 찾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대장!”
누가 부르나 싶었더니 뫼비우스였다.
“여기 있었군.”
“네. 언제 도착했습니까?”
“어제 늦게 왔어. 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
하룬은 뫼비우스의 얼굴이 침울해진 것과 당연히 같이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아 주변을 잠시 훑어보았다. 눈치를 알아차린 뫼비우스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야기하자면 긴데…… 사실은 끝났습니다.”
그럴 사이로 보이진 않았는데 이상했다. 현실에 다녀온 후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으로 알고 있었던 하룬의 눈이 조금 커진 것을 ‘왜?’라는 말로 이해한 뫼비우스가 사연을 간단하게 말해 주었다.
“대장 덕분에 꽤 많은 돈을 벌어 이참에 동거를 할까 했습니다.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는 것도 지겹고 이제는 좋은 여자와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었죠. 그래서 제법 좋은 구역에 좋은 집도 구했고, 가구들도 좋은 것들로 채웠지요. 그런데 슈미르의 오빠라는 작자가 경고를 했다더군요. 노블 망신은 다 시키고 다닌다고. 더 이상 절 만나고 다니면 집안에서 내쫓는다고 위협까지 했답니다. 사실 혼기가 찬 아가씨가 자신의 신분을 그렇게 내놓고 저와 같이 유니온을 돌아다녔으니 소문이 낫겠지요. 그래도 붙잡는 슈미르를 제가 설득했습니다. 저야 잃을 게 없는 하류 인생이지만 그녀는 노블 신분을 잃어버리면 남는 것이 없으니까요. 평생 갈 자신이 없는 사랑에 인생 걸 일이 뭐 있겠습니까? 저도 남자니 절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 주고 싶지만…… 뭐, 능력이 없는 게 죄지요.”
유난히 쓸쓸해 보이는 뫼비우스의 목소리에 하룬은 그 사정을 금방 눈치 챘다. 허우대가 미끈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에 매너까지 갖추었으니 여자들이야 앞뒤 안 가리고 빠져들지만 여동생을 둔 오빠의 눈에는 뭐 하나 볼 것이 없는 뫼비우스였다.
그래도 그런 일을 겪고도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뫼비우스의 성격이 쿨한 것인지 아니면 이런 경험이 많아서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집착하지 않고 여자를 배려하는 건 마음에 든다.
“다른 대원들은요?”
혼자인 것이 궁금한 모양이다. 풀이 죽은 것이 여간 불쌍하지 않았다.
“알아볼 것이 있어 각자 흩어져 조사를 좀 하고 있어.”
“음, 티노도 그렇고 헤니도 보고 싶었는데.”
“나중에 저쪽 용병 지역 후미로 와. 거기 우리 근거지가 있으니까.”
“하하하, 알겠습니다.”
뫼비우스는 나름 바쁜 듯 인사하고는 황급히 대형 막사가 쳐진 곳을 향해 뛰어가다가 뭔가 생각난 듯 되돌아왔다.
“대장, 혹시 엘프들하고도 의사소통이 됩니까?”
아마 일전에 헤니가 한 말 때문에 그런가 보다. 드워프의 말을 알아듣고 대화를 할 수 있으니 엘프들하고도 그렇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거야 알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런 능력이 생겼는지 자신도 모르니 말이다.
“잘 모르겠는데.”
“가능할 수도 있다는 거네요?”
“아직 만나본 적이 없어 자신할 수 없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럼 엘프들과 대화할 수 있는 채널은 만들 수 있나요?”
“그거야 가능하지.”
붉은 모루 부족을 통하면 엘프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고요의 땅에 거주하는 드워프들과 엘프들은 다른 곳과 달리 상당히 가까운 편이었다.
“알겠습니다.”
뫼비우스는 하룬의 대답에 뭔가 떠올린 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건 왜 물어?”
“하하하! 생각한 것이 있어서요. 잘하면 이 판에 제대로 낄 수 있을 거 같군요. 기대하세요. 그럼 이따 저녁에 찾아가겠습니다.”
뫼비우스는 뜻 모를 이야기를 하고는 바쁜 듯 중앙에 자리를 잡은 NPC들의 숙영지로 향했다.
하룬은 한참 용병들 막사를 돌아다니며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묻고 다닌 끝에 엘저가 이곳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아버지 피엘이 결성했다는 어비스 용병대의 부대장이 되어 의뢰를 받아 이곳에 도착했다고 했다.
다시 얼마를 더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어비스 용병대가 숙영하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대형 막사 하나와 중형 막사 네 개를 치고 있었다.
“누구요?”
눈매가 꽤나 날카로운 삼십 대 중반의 용병 하나가 막사 근처로 다가온 하룬을 제지했다.
“난 친구인 엘저를 만나러 온 돌풍 용병대 하룬이오.”
“우리 마녀 부대장을 말이오? 가만. 도, 돌풍 용병대라면? 잠시만 기다리시오.”
그는 놀란 얼굴로 황급히 대형 막사로 뛰어갔다. 그사이 다른 용병 둘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하룬이 더 접근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있었다. 위압적이거나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긴장을 유발해서 상대를 견제하는 노련한 움직임에 하룬은 감탄했다.
역시 심연의 용병이라는 피엘이 키워 낸 용병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잠시 후 막사 입구가 열리고 엘저가 달려 나왔다. 방어구를 착용하고 무장한 그녀의 모습은 전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얼굴은 무척이나 밝았다.
“하루운!”
그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오는 엘저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덕분에 치렁거리는 은발로 가렸던 깊은 흉터가 드러났지만 그에게는 전혀 흉하지 않았다.
“하하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이렇게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니 정말 좋은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룬은 크게 웃으며, 달려오는 엘저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엘저는 거의 날아와 그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순간 건강한 그녀의 몸무게 때문에 뒤로 쓰러질 뻔했지만 간신히 중심을 잡아 망신살은 면했다. 목덜미에 단단히 깍지 낀 그녀의 뜨거운 호흡과 특유의 체향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잘 있었어?”
“응. 넌?”
“잘 있었지.”
“얼굴은 좋아졌네. 몸도 많이 좋아진 거 같고.”
용병 길드와의 계약이 끝나고 자신들만의 용병대를 만들어서 그런지 얼굴은 정말 좋아 보였다.
“네 덕분이야.”
“왜?”
“걱정했을 거 아니야.”
“그거야 그렇지. 푸웃! 이렇게 안겨 있으니까 기분이 이상한데. 꼭 이렇게 해 보고 싶었거든. 근데 할 사람이 없었어.”
엘저는 누군가에게 처음 안긴 것처럼 하룬의 목에 두른 손을 깍지 끼고 속삭였다.
“이제 내가 항상 해줄게.”
“호홋! 약속한 거다?”
“그래. 명색이 첫 친구인데 그 정도도 못 해주겠니?”
“고마워. 훗. 근데 네 가슴, 생각보다 꽤 넓고 편안하네.”
“그래도 남자잖아. 넌 여자고.”
“그러네.”
두 사람이 소곤거리는 사이 막사에서 피엘과 매킨을 비롯한 용병들이 나와 그들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이 안고 있는 것을 본 사람들의 얼굴은 마치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기이하게 일그러졌지만 피엘과 매킨은 입이 찢어질 것처럼 웃고 있었다.
“일단 인사부터 해야지.”
“그래. 근데 떨어지기 싫은데.”
“대원들이 흉보겠다. 너 부대장이라며?”
“까짓! 부대장은 남자 친구에게 안겨 보지도 못하니?”
“그래도 체통이 있잖아.”
“난 체통 같은 거하고 안 친해. 까짓 흉보려면 보라지.”
말은 그래도 주변의 눈치가 보이는지 이내 하룬의 품을 벗어났지만 많이 아쉬운 얼굴이었다. 물러난 그녀의 뒤로 피엘과 매킨이 다가왔다.
“드디어 용병계의 새로운 영웅인 하룬이 왔군. 반갑네.”
지난번 용병 수료식 때는 외출복을 입었지만 방어구를 제대로 갖춰 입은 피엘은 세월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강렬한 위세와 중후함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네, 어르신. 오랜만입니다. 그간 신수가 훤해지셨습니다.”
“껄껄걸. 내가 본래 한 인물 하네. 자네도 많이 변한 것 같군.”
“네. 여러 가지 일이 많았습니다.”
피엘과 악수를 나눈 하룬은 매킨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엘저와 함께 그가 용병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게 도와준 고마운 존재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반가워. 안 그래도 대장과 자네 이야기를 많이 했었네.”
그는 용병 아카데미에서 행정 사무를 보던 때와는 달리 방어구를 입어서 그런지 훨씬 보기가 좋았다. 원래 근육질의 몸매를 가진 매킨은 지금은 누구보다 용병다운 외모와 분위기를 가진 인물이었다.
“보기가 좋군요.”
매킨은 하룬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고는 활짝 웃었다. 그의 벗겨진 민머리만큼이나 빛나는 웃음이었다.
“그동안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가 이제 제대로 제 옷을 갖춰 입은 덕분이지. 안 그래도 서류와 씨름하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니 펄펄 날 것 같은 기분이라네.”
“자, 반가운 사람이 왔는데 여기다 세워 둘 수는 없잖아. 다들 막사로 가서 인사를 나누세.”
피엘이 적당히 이야기를 끊고는 하룬을 대형 막사로 안내했다. 그 뒤를 삼십여 명에 가까운 용병들이 모두 따라 들어왔다.
사람들은 막사의 가운데에 피워진 모닥불을 중심으로 쭉 둘러앉았다. 피엘은 하룬을 자신의 옆에 앉혔고 그 옆에 엘저가 자리했다.
작은 화덕이 있는 막사의 가운데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카펫이 깔려 있고, 구석에는 짐들이 쌓여 있었다. 아마 이곳에서 용병대의 중요한 회의가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다들 소개하지. 이쪽은 엘저의 친구이자 요즘 이름을 떨치고 있는 돌풍 용병대 대장 하룬이라네.”
하룬은 팔뚝을 들어 용병식으로 인사했다. 그에게 마주 인사하는 어비스 용병대원들의 시선은 호기심과 호의로 가득했다. 이미 하룬에 대해서는 꽤 많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 쭉 둘러앉은 친구들은 나와 생사를 같이하기로 약속한 어비스 용병대 식구들이네. 이 친구는 나와 20년을 같이 보낸 1조장 아물란이고, 이 친구는 용병 기사로 이름 높은 2조장 발킨 그리고 저 친구는 ‘괴력의 보푸란’으로 명성이 자자한 3조장 보푸란일세.”
“반갑습니다. 돌풍 용병대를 맡고 있는 하룬이라고 합니다.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용병 아카데미 시절 이들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특히 아물란 같은 경우는 익스퍼트 상급 실력의 특급 용병으로, ‘전장의 악마’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잔혹하고 살벌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허허허! 그 유명한 돌풍 용병대장이 우리 부대장의 친구라기에 무척 보고 싶었소.”
2미터가 훨씬 넘는 키에 사지가 모두 길쭉길쭉한 아물란은 광대뼈가 심하게 나올 정도로 마른 체구였다. 하지만 전장의 악마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부드러운 얼굴과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해 왔다.
“저 역시 용병계의 전설을 만나 뵙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인사하며 손을 마주잡은 하룬의 얼굴이 살짝 변했다. 반가운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악력이 손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엄습했던 것이다. 손의 크기만 해도 하룬의 두 배는 될 것 같았는데 그 힘이 얼마나 센지 금방이라도 손뼈가 부러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시험인가? 그렇다면 받아줘야 도리지.’
제 표정을 찾은 하룬은 마주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우드득!
서로의 뼈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나며 두 사람의 얼굴에 굵은 힘줄이 솟아올랐다. 제대로 부딪친 순수한 힘의 격돌은 형용할 수 없는 강한 고통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잠시 맞잡은 손과 팔 그리고 어깨를 떨어가며 아랫입술을 깨물던 두 사람은 약속한 듯 힘을 풀었다.
“아물란이오. 이름이 헛되지 않음을 확인했소이다. 돌풍 용병대장을 만나 영광이오.”
일단 상대의 기량을 확인한 아물란은 지체 없이 마음을 열고 미소 지으며 다시 확인했다. 그런 아물란의 태도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에 강한 불신과 함께 놀람의 빛이 일렁였다.
그 모습을 보던 사람들 중 작은 키에 폭발할 것 같은 근육을 가진 이가 하룬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런! 아물란을 순수한 힘으로 감탄시키는 인물이 있을 줄이야. 난 괴력의 보푸란이오. 뭐, 그런 눈길로 볼 거 없소. 하프 드워프니까.”
“아, 반갑습니다. 얼마 전 드워프 일족을 만난 일이 있어 순간적으로 반가워서 쳐다본 겁니다.”
하룬의 말에 보푸란의 작은 눈이 커졌다.
“어느 일족이오? 이 근처에는 우리 일족이 없는데?”
“붉은 모루 부족입니다. 최근에 이 고요의 땅으로 이주했다더군요. 고향의 광맥이 말라서 할 수 없이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요. 이곳으로 오는 길에 그들의 의뢰를 하나 처리했습니다.”
“하하하! 이렇게 반가울 데가. 나를 보고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오. 반갑소.”
턱에 흰 수염이 반이 넘은 것을 보면 나이가 꽤 든 것 같은 보푸란은 드워프 이야기가 나오자 흥분해서 하룬의 손을 놓질 않았다.
“이 난쟁이 친구야, 나도 인사는 해야 할 거 아니야. 제국 용병들의 위상을 올린 용병계의 영웅이 이렇게 젊을 줄은 몰랐소. 더욱이 우리 마녀 부대장을 서슴없이 품에 안기게 하는 사내다운 매력까지 갖추었을 줄은 더더욱 몰랐고. 반갑소. 난 발킨이오.”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를 등에 멘 발킨의 기도는 딜런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대단했다. 이런 인물이 용병이라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의 기품은 잘 정제되었고, 마치 잘 벼린 검날을 대하는 것처럼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반갑습니다. 명성은 항상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대원 중에도 기사 출신이 있습니다. 딜런 경이라면 좋은 친구가 될 것 같군요.”
얼핏 추측하기로 나이도 비슷하지 않나 싶었다. 소문으로 그의 경지는 익스퍼트 최상급이라고 하니 좋은 친구는 몰라도 좋은 상대가 될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렇소? 조만간 꼭 만나게 해 주시오.”
비록 얼굴은 부드러운 표정이었지만 무감했던 눈빛에 열기가 돌았다. 호승심인지 아니면 순수한 호기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입매가 슬쩍 뒤틀리는 폼이 웃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뒤로도 호기심에 찬 눈빛을 가진 대원들과도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너 굉장히 유명해졌더라.”
엘저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래?”
사실 하룬은 그런 점을 생생하게 느끼지는 못했다. 그의 이름보다는 돌풍 용병대의 이름이 더 유명해진 탓도 있고, 유저들과 거의 접촉하지 않아 실감하지 못했다.
“근데 후크란 산맥에는 어떻게 가게 된 거야?”
“응. 우연히 이방인을 만나 의뢰를 받았는데 그 전에 이미 의뢰 때문에 후크란 산맥에 들어간 적이 있거든. 우리 용병대 부대장이 길 하나는 귀신처럼 잘 찾는 사람이야. 위험 본능도 특출하게 발달되어 있고, 운도 좋았고 말이야.”
하룬은 굳이 혼자서 그곳에 갔으며 허벌 길드에 대해 알리고 싶지 않았다. 만약 허벌 길드의 보물인 지도책의 존재가 알려진다면 제국의 약초꾼들은 물론이고 여러 사람이 욕심 때문에 희생당할 수도 있다.
“아, 그렇구나. 부대장 이름이 뭔데?”
“2급 용병 티노야.”
“티노? 흔한 이름이네. 누구지?”
엘저가 이름을 듣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피엘이나 매킨은 그 이름을 알지 못했다. 2급 용병이니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한쪽에서 그를 아는 인물이 나타났다.
“호오!”
“뭐야, 뵈르윙은 그 사람을 아는 거야?”
뵈르윙은 사십 대 중반의 나이에 호리호리한 몸을 가진 용병이었다. 서열에서는 크게 밀리는 듯 입구 쪽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어비스 용병대가 소수 정예를 지향하는 만큼 상당한 실력자였다.
“그 친구라면 내가 좀 알지. 몇 번 같이 일한 적이 있거든. 마수의 숲과 스카이 루프 산맥 너머의 초원 지대에 있는 고대 던전 탐사에 같이 참여한 적이 있어. 하룬 대장의 말대로 길을 찾아내는 능력과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탁월한 친구야. 그 친구 덕분에 그때 같이 갔던 친구들이 많아 살아 나올 수 있었지. 검술은 별로지만 다양한 지식과 스킬을 가진 대단한 친구였어.”
“흠, 마수의 숲에서 살아 나왔다면 대단한 친구네. 근데 왜 아직 2급이지?”
엘저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궁금함을 드러냈다.
마수의 숲은 제국 남동부에 있는 광대한 숲으로, 마계와 통로가 이어졌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는 위험한 곳이다. 그곳에는 마나석의 일종인 마정석이 출토되는 지역으로 마탑들은 정기적으로 그곳에 들어가곤 했다. 물론 그들의 호위는 용병들의 몫이다.
그곳에 들어갔다가 살아 나왔다는 이야기는 실력이 최소한 1급 이상이라는 소리였다.
“그게,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그 친구가 모시는 분이 있는데 그 사람 때문에 활동에 제약이 많은 것 같더라고. 그때 같이 일했던 사람ㄷ르 말이 다른 제국에서는 꽤 유명하다는데 우리 테론 제국에 와서는 세 건인가밖에 의뢰를 받지 않았다고 하더군.”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데브론 때문에 용병 생활도 제약을 받았을 테니 말이다. 데브론은 용병이라기보다는 방랑 기사 생활을 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기사 출신일라는 점 때문에 본격적인 용병 생활은 하지 않은 듯했다.
“아무튼 좋은 사람을 구했네.”
“응. 능력도 그렇지만 마음 씀씀이가 참 좋은 사람이야.”
그렇게 말하는 하룬의 얼굴에서 깊은 신뢰가 드러났는지 엘저와 피엘은 기꺼운 얼굴이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하룬 곁에 있다는 것이 안심이 되었다.
“이곳에 있을 테니 곧 만날 수 있겠지?”
“그럼. 언제 한번 인사시켜 줄게.”
그렇게 인사하는 시간이 끝나자 일반 대원들이 나갔다. 일단 자리가 정리되자 피엘은 손수 끓인 차를 사람들에게 돌렸다. 생각보다는 괜찮은 차였다. 차를 즐기는 용병은 거의 없는 것을 생각하면 피엘은 나름 엘리트 용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아마 던전에 대한 것을 묻는 것이리라.
“일단 관망하는 중입니다. 생각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욕심 부릴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피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긴 하지. 욕심을 부린다고 던전에 입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 문제는 엘프들이 점거한 던전부터 확보해야 하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눈치를 볼 수밖에.”
그렇다. 수만에 달하는 엘프 전사들도 문제지만 섣불리 그들과 상대했다가 큰 손실이라도 입는다면 던전을 점거하더라도 소용이 없었다.
“누군가 나서지 않겠습니까, 사부?”
매킨이 피엘에게 물었다.
“그렇겠지. 이대로 사람들이 계속 모여드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작자들이 많을 테니 말이야.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제국의 거의 모든 실력자들이 전부 모여들 거야. 던전의 보물은 그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까.”
매킨의 말에 피엘이 보충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후으. 그럼 이곳에서 골든 배틀이 거의 결정되겠군.”
2조장 발킨의 말에 다들 동의했다. 던전의 보물을 얻는 자 혹은 그 진영이 골든 배틀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다만 그것을 끝까지 지킬 수 있는 실력을 겸비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이번 골든 배틀은 일반인들의 피해가 없어서 다행이군요. 웬만한 병사들도 이곳까지 오는 것은 무리이니 말입니다.”
“난 그게 제일 맘에 들어, 매킨. 쓸데없이 힘없는 백성들이 죽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야.”
모든 용병들은 엘저의 말에 공감하고 있었다. 용병들이야 대부분 평민이나 농노 출신이니 누구보다 골든 배틀의 폐해를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누가 던전의 위치를 자세하게 터트렸는지 몰라도 참 잘한 거야. 정보를 미리 알고 있던 놈들이야 미칠 노릇이겠지만 이렇게 공개되어 버렸으니 사람들이 안전하게 올 수 있고, 굳이 비싼 정보료를 물지 않아도 되니 말이야.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알려지겠지만 한꺼번에 이렇게 사람들이 몰리니 어떤 음흉한 수작을 부리기도 힘들겠지.”
3조장의 말에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을 본 하룬은 내심 뿌듯했다. 아는 사람은 아는 사실이지만 이들은 자신의 돌풍 용병대가 그 정보를 공개했다는 것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 모두가 그가 의도했다는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일단 생각한 대로 일이 잘 진행되어 만족스러웠다.
두서없이 시작된 이야기는 언젠가부터 보푸란의 호기심 때문에 드워프 일족을 만난 것까지 진행되어 있었다.
“그럼 드워프의 말을 알아들었으며 엘프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거네?”
처음 돌킨을 만났을 때 드워프어를 알아들었다는 이야기가 무심코 나오자 놀란 엘저가 물었다.
“그건 몰라. 알아듣기는 하는데 내 쪽에서 할 수는 없으니까. 사실 반쪽짜리지. 엘프어는 어떨지 모르겠어.”
언제 어떻게 그런 능력을 얻은 것인지는 하룬도 몰랐다.
“야, 너 정말 대단하다.”
엘저는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보푸란의 설명에 따르면 드워프어는 표의 문자에 속하는 언어로, 한 음이 그 높이에 따라 무려 여덟 개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 차이는 인간들의 성대로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미세했고, 인간의 귀로 그 차이를 분간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때문에 통역 마법이 아니면 이종족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통역 마법은 무려 7서클의 마법이며 지금은 실전된 상태로, 그마저도 인간끼리가 아닌 이종족과는 호환이 쉽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이종족들은 오랜 옛날 인간과 동등한 입장에서 교류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고, 언제부턴가 그 모습이 사라지고 말았다.
제국에도 드워프들이나 엘프들이 거주한다고 알려진 지역은 몇 군데가 있지만 모두 인간들의 발길을 거부하는 금지였다. 특히 이곳 고요의 땅에 거주하는 엘프들은 호전적인 전투 성향이 강한 다크 엘프족으로 알려졌는데 현재 던전을 점거하고 있었다.
“언제 드워프어를 배운 거야?”
하룬은 그 질문에 대답하기가 난처했다. 어떻게 이런 능력이 생겼는지는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다. 난감한 그의 얼굴을 보던 엘저가 갑자기 예전에 하룬이 했던 거짓말을 떠올렸다.
“아, 알았다! 너 어릴 때 약초꾼인 할아버지와 함께 성인이 될 때까지 산에서 살았다고 했지?”
“응.”
자신이 그랬나 싶었지만 거짓말이란 한 사람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법이다.
“아마 그때 배웠을 수도 있겠다. 네가 어렸을 때 말이야. 깊은 산속에는 드워프들이나 엘프족들이 인간들을 피해 산다고 하더라. 너희 할아버지가 그들을 구했을지도 몰라. 뛰어난 약초꾼들은 대개 치료사들이니까 말이야. 그래서 교류하는 가운데 네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드워프들과 엘프들이 자신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마법을 걸어 놓았을 수도 있어.”
‘아주 소설을 써라!’
하룬은 내심 기가 막혔지만 엘저는 자신이 생각해 낸 내용에 푹 빠졌고, 피엘과 매킨도 어느 정도는 동의하는 것 같았다.
이 비욘드의 전설 중에는 숲에 들어갔다가 엘프나 드워프를 구해주고 마법 아이템이나 보물을 받았다는 이야기들이 종종 있었다. 정령사들 중에도 어릴 때 엘프와 같이 살았다거나 혹은 엘프를 구해주고 정령 마법을 배웠다는 이들의 이야기도 전해 오고 있었다.
“아무튼 대단하네. 정령사에 이종족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용병은 세상에 자네밖에 없을 거야.”
매킨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윙크를 했다.
“내 친구야!”
그런 하룬이 자랑스러웠는지 엘저가 팔짱을 꼈다.
“유치하긴.”
삐친 듯한 매킨의 목소리에 다들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비록 배운 것이 없어 목숨을 내놓고 일을 하는 용병들이지만 순수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낸 하룬은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어비스 용병대의 막사를 나올 수 있었다. 엘저가 한사코 보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앞으로 자주 볼 것을 약속하고 나서야 간신히 그녀의 팔을 떼어 낼 수 있었다.
“후훗. 그럴 때 보면 꼭 어린애 같다니까.”
하지만 좋았다. 그를 자랑스러워하고 그가 유명해지는 것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주는 엘저는 마치 어린 시절부터 사귄 것처럼 정겨웠다. 그리고 그런 엘저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보낸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충실하고 만족스러웠다.
‘현실에도 그런 친구가 있으면 정말 좋겠다.’
결론은 그렇게 나 버리고 말았다.
친구란 존재는 만든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자신만 잘한다고 해서 좋은 관계가 되는 것도 아니고 우연한 때, 우연한 기회에 마음이 통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에 아쉬움이 더 컸다.
그렇게 마음이 통하는, 같이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친구가 있다면 좁은 배리어일지라도 불만 없이 살았을 거 같다.
숙영지로 돌아오니 티노와 도네이스는 아직이었다. 하루 종일 검을 휘둘렀을 딜런이 조용히 명상하며 심상 수련을 했고, 헤니는 심심했는지 뭔가를 잔뜩 쓰다가 말고 식량 주머니에 기대앉아 졸고 있었다.
지난번 버추얼사에서 거액의 원고료를 받은 후부터는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헤니였다.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옆으로 심하게 기울어진 얼굴이 미소 짓고 있었다.
맛있는 거라도 먹고 있는 걸까?
그녀의 입이 수시로 쩝쩝거리는 것이 여간 재미나질 않았다. 게다가 많지는 않지만 침을 흘리는 모습 또한 더럽다거나 지저분한 것이 아니라 귀엽기까지 했다.
더 있다가는 옆으로 쓰러질 것 같아 하룬은 가만히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어깨를 빌려 주었다. 어깨로 가벼운 헤니의 머리가 얹어지고 그녀는 꿈속에서도 안정이 되는지 헤 하고 입을 벌리며 웃는다.
한참 그런 헤니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하룬은 바닥에 놓인 종이에 관심이 갔다.
‘뭘 하고 있었지?’
종이에는 몇 가지 단어들이 쓰여 있고, 낙서인 듯 의미 없는 그림 몇 개가 그려져 있었다.
‘던전, 5, 분화구 또는 운석공? 엘프와 드워프, 골든 배틀, 유적, 제국, 멸망, 인공수정체, 인권, 배리어, 파괴, 자유로운 삶과 행복. 이게 다 무슨 의미지?’
의미가 있는 단어들일 텐데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쉽게 짐작되지 않았다. 다만 분화구라는 단어와 인공수정체라는 단어가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분화구? 설마?’
일전에 진수를 찾으러 갔다가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본 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던전이 있는 이 땅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거의 원형으로 직경은 약 20킬로미터 정도였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바닥으로부터 약 700미터의 높이로 거의 균일하게 산이 솟아오른 형세였다.
규모가 생각 이상으로 거대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마치 화산이 분출한 분화구나 운석이 떨어져 생긴 운석공과 비슷하질 않은가.
‘어쩌면 그럴 수도.’
고요의 땅과 아이리드 산맥 사이에 존재하는 고요의 평원은 열지熱地다. 즉, 곳곳이 갈라진 땅이라는 소리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덩이나 갈라진 곳이 곳곳에 널린 거대한 땅이다.
기후가 온화하고 바람의 유동이 적으며 강수량이 많아 식생이 좋을 법도 한데 기껏 자라는 식물은 키 작은 풀들이나 이끼류가 고작이다.
멀리서 보면 끝없이 펼쳐진 초지 같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두텁게 자란 이끼류와 키 작은 풀 아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갈라진 지반이 곳곳이 널려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몬스터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인간들도 마찬가지였다.
식물이 자랄 수 있는 표토층이 거의 없는 암반 지대인 것이다. 이렇게 넓게 암반 지대가 펼쳐진 곳은 흔하지 않다. 거의 요른 평야의 두 배에 달하는 엄청난 지역 전체가 암반 지대라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단어들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헤니가 움직였다.
“아웅!”
그녀는 꿈속에서 먹는 것을 그치고 이번에는 애완동물과 놀기라도 하는 듯 두 팔을 벌려 하룬의 옆구리를 안았다. 귀여운 동물이라도 안은 듯 얼굴을 어깨에 비비고 한참 난리를 치더니 뭔가 이상하다는 듯 하룬의 가슴이며 얼굴을 더듬더니 갑자기 눈을 떴다.
“끼악!”
헤니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놀란 토끼처럼 귀가 꿈틀거리는 모양이 너무 귀여웠다. 그녀가 놀라 뭐라고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하룬이 손가락 하나를 입술에 대었다.
“쉿!”
벌렸던 입술을 황급히 앞으로 모은 헤니의 얼굴이 너무 귀여워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소녀다.
“언제 왔어요, 대장?”
소리 죽여 묻는 헤니의 시선은 명상에 잠긴 딜런에게 향해 있었다. 그런 그녀의 입가에는 아까 잘 때 흘렸던 침이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본인은 느끼지 못하는 듯 무심결에 손으로 입가를 훔친다.
“방금. 곤하게 자는 것 같기에 어깨를 빌려 줬어.”
“고마워요.”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헤니는 감사 인사를 하다가 입가에 남아 있는 침의 감촉을 떠올렸는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벌겋게 달아올랐따.
한참이 지난 후에 눈을 뜬 헤니는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 봤죠?”
“뭘?”
“나…… 자는 모습……요.”
쇳소리를 냈지만 차마 침 흘리며 자는 모습을 봤냐고는 묻지 못하는 헤니였다.
“아니! 헤니가 쓴 이 단어들을 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는걸.”
조금은 놀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았다. 자라면서는 여자애들과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왠지 악동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그 마음을 눌렀다.
“저, 정말이죠?”
기쁨과 안도의 마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라 아니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응. 나도 사실 이곳이 거대한 화산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었거든. 화산으로 보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 크고 여러모로 증거는 부족하지만 말이야.”
“그, 그렇죠? 상상이겠지만 충분히 가능성은 있어 보여요. 주변의 지질을 좀 조사해 봐야겠지만 말이에요.”
“그런데 그게 우리와 무슨 관계지?”
문득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드는 딜런이었다.
“아직은 잘 몰라요. 그저 의심스러우니 조사를 해 보자는 거지요.”
“그래?”
딜런은 금세 관심을 끊고 밖으로 향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막사 앞에서 명상을 겸해 번초를 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