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니의 사정》
저녁 늦게 식사를 겸해, 다른 두 방향으로 정찰을 나갔던 대원들의 이야기를 들은 하룬은 결국 자신이 향했던 계곡 쪽으로 새 길을 내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걸릴 텐데요.”
이미 계곡 쪽 상황은 다들 알고 있는 상태였다. 굳이 티노의 말이 아니더라도 모두 마찬가지 마음이었다.
“드워프들과 힘을 합치면 별로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장기간 사용할 길이 아니라 임시로 사용할 길을 뚫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붉은 모로 부족의 전체 숫자는 약 일천. 그중 일을 할 수 있는 나이의 드워프는 어림잡아 절반은 될 것이다.
“길은 어떻게 낼 생각입니까?”
“아무래도 나무를 베어 길을 뚫고, 절벽을 만나면 잔도棧道를 내야 할 겁니다. 벤 나무를 이용하면 그리 어렵진 않을 겁니다. 그보다는 일손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당장 부족장을 만나야겠습니다.”
시일이 급하니 아무리 의뢰라도 드워프들의 참여가 필요했다.
“좋네! 상황이 어떨지 모르니 한시라도 빨리 새 길을 만드는 게 최선이지. 더구나 숯을 만들려면 어차피 나무도 필요하니 우리도 돕겠네. 다만 이쪽 일도 쉽지 않으니 동굴을 파는 인원들과 노약자만 빼고는 다 돕지.”
다행히 타루가와 원로들은 인간들의 접근을 두려워했다. 인간들의 탐욕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들이 자신들을 발견한다면 필연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밤늦게 숙영지로 돌아온 하루은 아직 자지 않고 달빛을 즐기는 헤니를 보았다. 큰 바위에 앉아 물끄러미 달빛을 받으며 하늘을 바라보는 헤니의 얼굴에는 진한 근심이 떠올라 있었다.
“여기서 뭐해?”
“아, 대장!”
헤니가 깜짝 놀라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하룬은 가볍게 몸을 날려 그녀의 곁에 앉았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요. 생활비가 좀 문제지만 그거야 대장에게 거금을 받았으니 당분간은 걱정이 없어요. 그 정도라면 제가 사는 현실에서도 꽤 큰돈이거든요. 나름 인정을 받는 편인데도 그런 급여는 못 받을걸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헤니는 웃는 얼굴이 좋아. 그런 찡그린 얼굴은 보기도 흉하고 주름살 생기니까 다시는 짓지 마.”
“헤헤, 내가 그랬어요? 난 단지 생각한 것이 잘 안 돼서…….”
하룬의 말에 금방 생글거리는 헤니의 얼굴은 확실히 보기 좋았다. 큰 키에 단발머리 그리고 묘하게 중성적인 매력을 풍기는 그녀는 활발하게 움직이는 밝은 모습이 어울렸다.
“생각한 것이 뭔데? 말해 봐.”
헤니가 고개를 흔들었다.
“대장은 들어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우리 이방인들이 사는 세상 이야기거든요.”
“그래도 혹시 알아? 내가 해결할 수 있을지. 그게 아니더라도 혼자서 끙끙거리는 것보다는 낫잖아. 왜, 내가 못 미더워?”
“아니, 그건 아니에요. 대장을 못 믿으면 누굴 믿는다고! 사실은요…….”
헤니는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녀와 세 친구들은 백사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휴먼력 104년에 인공수정체로 출생했다는 공통분모를 가진 네 친구들은 자신들의 성장 과정과 경험을 통해 제대로 양육받지 못하고 유니온 사회의 하류 인생으로 몰락해 버린 대부분의 인공수정체들의 권익을 위해 힘을 모으기로 했다.
하지만 그들 넷의 힘으로는 그 거창한 목표는 고사하고 같은 인공수정체 출신을 찾아내고 결집하는 것도 힘에 부쳤다.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자금이 마련되어야 카페 활동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는데 유니넷은 물론이고 글로벌넷도 홍보에는 많은 돈이 들었다. 몇 번의 시도와 의논 끝에 그나마 자신들의 나이 또래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가상현실 게임에서 카페 활동을 하는 게 최선이라는 것을 찾았지만 그 방법이 문제였다.
이놈의 넥컴월 시스템상 홍보에도 많은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유저들의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홍보하는 프리미엄 홍보의 경우 월 천만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가 들었다.
네 명 다 그저 그런 직업에, 게임에서도 제대로 된 랭커가 아닌 상황에서 자금까지 없는 상황이니 그들의 의지는 한낱 꿈에 불과해지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헤니는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며 우울해하고 있었다.
하룬은 그녀를 돕고 싶었다. 굳이 나서서 자신도 인공수정체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그저 모른 척하고 관심이 없는 자신에 비해 아주 훌륭한 생각을 가지고 직접 행동하는 멋진 여자였다.
‘흠. 그냥 준다고 하면 받을까? 아니, 그건 헤니를 욕보이는 거야.’
하룬은 잠시 고민하다가 방법을 하나 생각해 냈다.
“헤니, 혹시 아레스가 하는 일 알아?”
“아레스요? 당연히 기자 일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기삿거리나 정보를 방송사에 넘기고 협상할 수 있겠냐는 말이야.”
“그거야 당연하죠.”
그녀처럼 똑똑한 인물이 그 정도를 못 할 리가 없었다.
“그럼 내가 기삿거리를 줄 테니까 방송사와 거래를 해 봐. 넉넉하게 챙겨 줄 테니까.”
“정말요? 그건 아레스와 매그럼 일행에게만 해당되는 거 아니었어요?”
“그거야 내 마음이지. 그들과는 단지 거래를 하는 것뿐이니까. 헤니는 소중한 내 동료잖아.”
헤니는 하룬의 제안을 금방 알아들었다. 사실 그동안 무척 부러워하고 있었다. 아레스와 매그럼이 정식 직원이 된 것도, 엄청난 돈을 버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몇만 골드가 오가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그 일을 대신 했으면 하고 바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다른 대원이 그동안 던전 주위에 잠복하면서 던전을 발견한 이들과 엘프들이 싸우는 전투 장면을 촬영한 영상이니까 제대로 협상하면 큰돈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어디 한번 제대로 해 봐. 여기 상황은 나머지 대원들이 처리할 테니까.”
어차피 공개할 영상인데 뜻하지 않게 아레스와 매그럼 일행이 던전에 정신이 팔려 미처 하룬이 그 칩을 넘기기도 전에 떠나 버렸다.
유저들은 지금 한창 이 던전으로 향하면서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지 무척이나 궁금해할 터였다.이런 때 터트리면 대박이 될 영상인 것이다. 신뢰 부분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자신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가 자신과 똑같은 인공수정체라는 사실이다.
“대, 대장! 고마워요.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요.”
헤니는 금세 눈물을 글썽거리며 하룬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찌 할 수 없는 무력감에 시달리던 헤니의 가슴은 벅찬 감동으로 울컥거리고 있었다.
이제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 방송사와 협상만 잘 하면 아레스를 능가하는 대박을 터트릴 수 있는 것이다. 기껏 세운 목표인데 해 보지도 못하고 스러지는 줄 알고 노심초사했던 마음이 눈 녹듯 풀어지자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룬은 축축해지는 가슴팍에 얼굴을 대고 흐느끼는 헤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이렇게 힘이 부족한 여자도 큰 뜻을 세우고 열심히 살고 있는데 자신은 그저 불행한 현실에 좌절하고 길들여져서 마치 좀비처럼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살았다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요즘 화두가 되는 극도의 리얼리티를 가진 가상현실 게임 비욘드에 관한 한 선두 방송사라는 타이틀을 호울 비전에 넘기고 절치부심했던 버추얼 비전사가 마침내 회심의 일격을 터트렸다.
그것은 바로 비욘드 유저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던전의 상황이 담긴 영상이었다. 보통 유저들이 플레이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던 밤 12시에 방영된 영상은 그야말로 최고의 대박을 터트렸다.
누군가 촬영한 영상 속에는 던전이 위치한 분지의 모습과 던전을 점거한 엘프 그리고 엘프들에게서 던전을 차지하려는 인간들의 전투 장면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혜련 역시 자신이 넘긴 영상을 세 친구와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저게 정말 네 대장이 넘긴 영상이야?”
게임에서도 그렇지만 현실에서도 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는 보라가 믿을 수 없다는 말투로 물었다.
“그렇다니까! 내가 그 유명한 돌풍 용병대원이라고.”
“그래, 이젠 믿을 테니까 소리 좀 지르지 마. 누가 안 믿을까 봐 몇 번이나 말하는 거니?”
역정을 내는 나투의 목소리에는 진한 부러움이 담겨 있었다. 친구 중 가장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이미 박사 학위까지 딴 혜련이야 늘 인정하고 있었지만 게임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사실 중급 치료사이긴 하지만 그 정도 칭호를 가진 유저는 널리고 널렸다. 아니, NPC들 중에는 그녀보다 더 높은 경지의 치료사며 치료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마법사들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새 그녀는 유저들에게는 거의 전설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 돌풍 용병대에 들어간 것이다. 연봉 6천에 방어구와 무기는 무료 지급, 거기다 부가 수입까지 보장되는 최고의 조건에 말이다.
‘제기랄!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
친구가 잘된 것이 배가 아픈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은 현실이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그녀가이번 거래로 벌어들인 몫이 백사회의 자금이 된다니 기쁘기는 했다.
“자, 이제 방송된다.”
게임 자키의 장황한 설명에 이어 유저들이 기다리던 영상이 공개되었다.
산 정상에서 잡은 영상에는 기대하던 던전의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마치 피라미드에 흙이 쌓이고 나무가 자라면 그렇게 변했을 법한 던전이 넓은 분지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와아! 멋있다.”
보라가 탄성을 터트렸다. 다른 사람들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던전이 위치한 피라미드 형상의 산 주위에는 엘프들이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포진했고, 그 주위로 수많은 인간들이 넓게 포위망을 치고 있었다.
“흠. 드디어 야합을 한 모양이군요.”
다호의 말에 혜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었겠지. 곧 있으면 다른 인간들이 벌 떼처럼 이곳으로 몰려올 테니 말이야.”
보라도 혜련의 말에 동의했다.
자기 같아도 언제까지나 서로 경계하고 반목하면서 엘프들과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뭐라도 수를 내야 했는데 이종족과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결판을 내든가 아니면 마법서를 나누어 갖는 것으로 협의했을 것이다.
이 프로그램의 게임 자키 역시 같은 의견인 듯 패널들과 함께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쉽지는 않았을 텐데…….”
욕심 때문에 번영과 멸망을 반복해 온 인간의 역사를 떠올려 보면 이런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 수 있다.
‘어쩌면 제국 정보 길드에서 중간 역할을 했을지도 몰라.’
그들의 촉수는 이방인들만 있는 길드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귀족가의 기사단에 미쳐 있었다. 어느 경우는 그들마저 자신이 그런 역할을 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그들의 행사는 은밀했다.
“공격하려나 봐!”
보라의 말에 화면에 집중한 세 친구는 캠의 화면이 던전을 중심으로 크게 확장된 것을 볼 수 있었다. 드디어 인간들이 던전을 향해 공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각 열과 오당 열 명, 즉 백 명으로 구성된 진형을 수십 개나 이루어 목표물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사면의 외곽에 선 인간들은 온 몸을 가릴 수 있는 거대한 방패를 들었고, 그 안에는 머리 위로 사각형의 방패를 들었는데 맞추기라도 했는지 틈 하나 보이지 않았다.
발 구르는 소리까지 척척 맞는 것을 보면 이미 훈련까지 몇 번 한 모양이다. 산 아래 펼쳐진 넓은 분지는 순식간에 땅이 울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마치 잘 훈련된 군대가 진군하는 듯 절도 있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다른 전략 게임에서 집단전 경험이 꽤 있는 나투는 감탄한 눈치였다.
“준비를 많이 했네.”
“그러게. 엘프들의 화살은 정말 무섭지. 아마 적지 않은 희생을 치르고서 만들어 낸 진형일 거야.”
이런 전투 장면을 처음 보는 터라 보라는 잔뜩 흥분한 것 같았다.
“하지만 저 정도로 엘프들의 화살 공격을 막을 수 있을까?”
“그거야 모르지. 방패의 재질이나 방어력 그리고 얼마나 잘 훈련되었는지가 중요하니까. 일단 피라미드 산까지만 접근할 수 있다면 개개인의 능력이 뛰어난 인간들에게도 기회가 올 테니 좋은 전략이네.”
그들의 말대로 엘프들의 위력적인 화살 공격은 곧 볼 수 있었다. 인간들의 진형이 일정 거리까지 접근하자 기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풀피리 소리 같았지만 높은 산 정상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삐이이익!
슈슈슈윳!
시위를 놓는 소리와 화살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진군하는 말발굽 소리처럼 강렬한 투기를 일으켰다.
타다닥! 투두득!
-아악!
-흑! 으윽!
삽시간에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엘프들의 화살을 막기에는 부족한 방패였던 것 같다. 위로 들어 올린 방패들에는 화살이 새까맣게 박혀 있고, 전방과 측방에서 전진하던 인원들 중 상당수가 방패를 관통한 화살에 상처를 입거나 죽었다.
각 진형은 한차례 화살 공격이 그치자 걸음을 멈추고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 신속하게 진형을 재정비했다. 부상자는 안으로 들이고 다른 인원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보조 인원들이 있었네.”
“그러게.”
다호의 말대로 사각형의 방패 아래에는 중간에 보조 인원이 있다가 부상을 당하거나 죽은 자들의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비록 부상자들이나 사망자들을 진형 밖으로 밀쳐 버리는 것이 보기 좋지 않았지만 금방 진형을 다시 짤 수 있었다.
그렇게 네 번의 화살 공격을 받은 후에 인간들은 피라미드와 제법 가까워질 수 있었다. 물론 그동안 수많은 사상자를 낸 후였지만 엘프들도 화살이 떨어져 가는지 점차 화살을 날리는 간격이 길어졌다.
하긴 분지는 화살 밭이라고 부를 정도로 무수한 화살이 바닥에 꽂혀 있거나 혹은 떨어져 있었다. 하룬이 진수에게 영상을 넘겨받은 후 한 달이 넘었으니 그동안 인간과 엘프들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전투가 있었는지 알 만했다.
둥! 둥! 둥!
인간들이 포진한 곳에서 큰 북소리가 연속해서 들렸다.
-총공격이닷! 달려라!
-와아!
-죽이자! 씹어 버리자!
방패를 떨쳐 버린 인간들은 야수와 같이 소리를 지르며 엘프들이 포진한 피라미드 산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무려 수천이 넘는 엄청난 인원이 파상적으로 달리는 광경은 가슴이 뛰고 피가 끓어오를 정도로 뜨거웠다.
그들 중 일부는 벌써 산 가까이 접근할 정도로 다른 병력에 비해 배는 더 빨랐다. 그 수는 무려 수백 명이나 되었는데 최소한 기사에 근접하는 실력을 가진 것 같았다. 다만 정식 갑주가 아니라 사슬 갑옷과 다양한 종류의 하드 레더를 착용했기에 이방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떻게? 저 정도 몸놀림이라면 레벨이 최소한 80대 후반에서 90대까지는 되어야 하는데…….”
“버그라도 있는 거 아니야?”
얼마 동안 확인을 못 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하이 랭커들, 즉 전체 유저들 중 상위 천 명의 평균 레벨은 80대 초반이었다. 혜련과 친구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레벨 70을 찍은 후부터는 경험치를 쌓는 것이 너무 극악해서 레벨 업을 하기란 그야말로 불굴의 의지와 생노가다가 아니면 어려웠다. 하루에 게임 가능한 시간이 최대 시간인 14시간 동안 사냥만 한다고 해도 저런 레벨을 가진 강자들이 수백 명씩 출현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혜련과 보라는 금방 그 가능성을 떠올렸다.
“저들은 틀림없이 군인들일 거야. 그것도 특수군 계열의…….”
“맞아. 현실의 육체와 그 능력이 최대한 반영되는 걸 생각하면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는 저런 레벨이나 몸놀림을 보이기는 힘들 거야.”
이방인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잘 훈련된 인물들이다. 개개인의 능력 역시 발군이다.
진형을 짜고 이동하면서 화살 공격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야 부활이 가능해서 그렇다지만 명령에 즉각 반응하는 신속함과 전원 검을 착용한 점 그리고 전투를 즐기는 행동은 영락없이 군인들이다.
하지만 왜 그들이 현실에서 유니온을 지키고나 고유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이 게임 속에 들어와 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단의 전사들이 던전에 거의 도착했을 때, 수많은 엘프 전사들이 산기슭의 숲에서 뛰어나와 선두 행렬을 막았다.
차앙! 창!
궁술로 유명했지만 실제로는 검술도 능숙한 엘프들의 거센 공격을 받은 선두는 발길을 멈추고 난전에 돌입했다.
그 순간 선두 행렬에 곧 합류하려던 뒤쪽 병력에 정령 마법이 쏟아졌다. 산 중턱으로부터 분지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주문이 메이라를 만들어 사방을 진동했다.
-대지의 정령이여! 몸을 일으켜 위용을 드러내 주시오!
-불의 정령이여! 지옥의 겁화를 저들에게 선사하기를!
-바람의 정령이여! 바람의 칼날을 저들에게 날려 주시오.
-초목의 정령이여! 대지에 단단히 박은 뿌리를 들어 올려 저들의 발길을 묶어 주시오!
-물의 정령이여! 물의 화살을 저들의 머리 위로 뿌려 주시오!
땅이 흔들리며 갈라지고 솟아올랐다. 그 속에서 화염이 솟구쳐 나와 지진에 흔들리고 갈라진 땅을 피하던 인간들을 삼켰다. 바람은 화염을 사방으로 퍼트리는 것은 물론 수많은 칼날을 만들어 인간들에게 날아갔다.
-아악! 내 팔!
-살려 줘! 내 얼굴이, 눈이 보이지 않아!
-끄악!
공포에 질려 도망치려던 인간들은 다리를 휘어감은 단단한 뿌리들 때문에 넘어졌고, 더러는 무기로 잘라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홀연히 그들 앞에 생성된 수천수만 발의 워터 애로우는 무참하게 인간들의 사지와 몸통을 꿰뚫었다.
-크아악!
-제, 제발! 난 죽으면 안 돼!
두둥! 두둥! 두둥!
급박한 북소리와 함께 후발대와 거리를 두고 따르던 일단의 인간들이 둥글게 모야 주문을 영창했다. 바로 마법사들이었다.
-파워 플레임 밤!
-매직 미사일!
-파이어 애로우!
수백 발의 마법 공격이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엘프 정령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정령이여! 우리를 막아 주오!
엘프 정령사들은 정령들에게 보내던 정령력을 신속하게 회수했다. 그들의 앞에는 순식간에 각종 정령이 만들어 낸 수십 겹의 실드가 생성되었다. 인간 마법사들이 날린 마법 공격이 도착하기 바로 직전이었다.
꽈과광!
굉음이 연속해서 들려왔다.
엄청난 먼지가 일어났다가 정령의 힘에 빠르게 날아가자 엘프 쪽 진영이 보였다. 정령사들은 멀쩡했다.
물론 인간 마법사들은 추가적인 마법 공격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삐이익! 삑! 삑!
기이한 호각음과 함께 피라미드 산 초입의 관목 숲에서 무수한 엘프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아까와는 다른 무척이나 큰 대궁을 들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들보다 훨씬 더 큰 그들의 키만큼이나 큰 활이었는데 그 사이에는 거무튀튀한 화살이 재워져 있었다.
-아이언 애로우다! 마법사들은 빨리 후퇴해!
북을 칠 시간도 없이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주문을 외우느라 정신을 집중했던 마법사들이 마법을 해제하고 일부는 실드를 치고 나머지는 뒤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쐐액! 쌕! 쌕!
무시무시한 파공성과 함께 엘프들의 화살이 하늘 높이 날았다. 멀리 떨어져 거리를 헤아리기는 힘들었지만 철시鐵矢들은 대충 잡아도 거의 1,000미터 정도는 떨어져 있는 마법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실드! 실드! 실드!
-헤이스트!
-으아악!
헤이스트 마법으로 전권을 벗어난 마법사들은 그래도 피해가 적었지만 실드를 믿거나 당황한 나머지 마구 도망치던 마법사들은 그야말로 횡액을 당하고 말았다. 그들을 보호할 전사들이 없는 상황에서 일정 범위로 한꺼번에 쏟아진 철시의 위력은 실드 몇십 개 정도는 간단히 무력화시키고 말았다.
마법사들 대부분이 장맛비처럼 쏟아진 화살 비에 죽어 버리자 안 그래도 인간들에게 불리했던 전장이 더욱 아비규환으로 바뀌고 말았다.
후발대가 정령 마법에 거의 초토화되고 믿었던 마법사들도 대거 학살당하자 선두 역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마나를 검에 주입시켜 강도와 절삭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익스퍼트 초급의 실력자들이 상당히 많았지만 엘프들의 전력은 그 이상이었다.
설사 마나를 쓸 수 없는 엘프들이라 할지라도 몸놀림이 인간들보다 훨씬 빨랐던 것이다. 더구나 그들을 상대하던 엘프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삐이익! 삐이익!
이제는 공포의 전주곡처럼 들리는 호각음과 함께 또 다른 엘프 전사들이 산을 내려와 전황에 가담하자 전세는 완전히 엘프들 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거의 비등한 숫자로도 단숨에 밀어 버리지 못했는데 지원군까지 합세하자 선발대에서도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정령 마법으로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일부는 선발대를 향하고 일부는 후퇴하던 후발대는 극심한 두려움이 깃든 눈길로 피라미드 산을 쳐다보았다. 호각음이 걸렸던 것이다. 역시 그 호각음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까 아이언 애로우로 마법사들을 대거 학살했던 산 중턱의 엘프들이 다시 활을 들고 그들을 향해 시위를 당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둥! 둥둥! 둥! 둥둥!
급박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후퇴하라! 후퇴하라!
-뭉치지 마라! 산개해서 도망쳐라!
일부 지휘자들의 명령과 함께 일제히 몸을 돌려 달아나는 인간들이지만 마지막 공격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대지의 정령이여! 가슴을 열어 저들을 안아 주시오!
일단의 정령사들이 일제히 주문을 외치자 피라미드 산을 기점으로 100미터 정도의 땅이 한꺼번에 아래로 쑥 꺼졌다.
-아악!
-우아아악!
능력이 떨어지는 후발대는 물론 투기를 잃고 달리던 선발대 대부분이 대지의 품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너비 100미터에 깊이가 무려 10여 미터나 될 정도였기에 피한 인간들의 숫자는 극히 적었다.
그 위로 엘프 전사들이 날린 화살 비가 쏟아졌다. 이른바 확인 사살인데 그 화살을 피하고 다시 위로 올라 도망친 인간의 숫자는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엘프들의 대승이었다.
“무섭군! 인간들이 거의 전멸하고 말았어.”
다호가 경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엘프들은 시기적절한 공격을 톱니바퀴처럼 잘 연결해서 인간들을 거의 전멸시켜 버린 것이다.
“후아, 비록 인간들이 패한 싸움이긴 하지만 멋지긴 하군. 가슴이 벌벌 떨리는 거 같아.”
넋을 잃고 전투의 상황 전개를 시청하던 나투가 큰 한숨을 내쉬며 감회를 내뱉는 순간 나머지 사람들도 내내 참고 있었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주먹 쥔 손에 생긴 물기를 느끼면서 보라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 엘프들 정말 대단하네. 이 전투로 인간은 거의 오천에 달하는 전사들이 죽었지만 엘프들은 화살 이외에는 거의 손실이 없었어.”
“그래. 이 정도면 기사들이라고 해도 자신할 수 없는 상대야. 적어도열 개 이상의 기사단과 세 개 이상의 마법 병단이 아니라면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을 정도야. 다크 엘프들의 성정이 다른 엘프들과는 달리 강인하고 전투적이라고 들었지만 믿지는 않았는데 새로이 눈을 뜬 기분이야.”
나투의 얼굴은 어느새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마치 자신이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것처럼 몰입한 것이다.
방송은 폭발적이었다. 비욘드 유저들의 요청으로 며칠 동안 계속 재방송을 해야 했지만 매번 시청률이 30%를 넘나들 정도였따. 심지어 이제까지 비욘드를 즐기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박진감 넘치는 전투에 매료되어 비욘드에 접속할 정도였다.
험준한 아이리드 산맥을 넘으면서도 혹시나 던전이 클리어된 것은 아닌지 궁금해했던 유저들은 이제 거침없이 던전으로 향했다. 엘프들의 전력이 무서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때문에 던전이 쉽게 깨질 리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호울 비전의 약진 속에 인사 조치를 당한 것은 물론이고 연봉까지 깎였던 버추얼 비전의 PD들은 환한 얼굴로 축하 인사를 받았고, 혜련은 은밀하게 20억 원 가까운 원고료 중 40%를 챙겨 친구들과 함께 그렇게 원하던 백사회의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아레스의 호울 방송사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고요의 땅으로 가는 빠르고 안전한 루트를 공개했던 것이다. 그 루트는 위험 요소들이 있긴 하지만 고레벨의 유저들이라면 충분히 지날 수 있는 곳이었다.
돌풍 용병대를 따라 직접 이 루트를 지나간 아레스가 촬영한 영상을 쌍둥이가 정성을 다해 편집해서 상세한 지도와 함께 제작해 방영한 이 영상의 시청률 역시 30%에 육박했다.
이렇게 버추얼과 호울사가 연속해서 던전에 대한 특종을 터트리자 신이 난 것은 유저들이었다. 수많은 유저들이 NPC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던전을 향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혜련은 버추얼 방송사로부터 막대한 원고료를 챙긴 것은 물론이고 특별 기자로 채용되기까지 했다. 이제 현실에서도 안정적인 직업을 구한 것이다.
혜련은 백사회의 활동은 세 친구에게 맡기고 하룬 몫의 돈을 챙겨 암시장에 있는 박살 대장간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전 돌풍 용병대원 헤니라고 해요.”
마침 게임에 접속하지 않았던 해란은 지금껏 두 번 돈을 가져왔던 쌍둥이 대신 찾아온 혜련의 정체가 궁금했다.
“아!”
“하룬 대장이 이 돈을 여기로 전해 달라고 해서요.”
“일단 들어오세요. 차라도 한 잔 해요.”
해란은 혜련의 중성적인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더구나 늘 말을 아끼는 쌍둥이 대신 이 기회에 하룬의 비밀을 캐보고 싶어 그녀를 붙잡았다.
대장간 사무실로 들어간 혜련은 뜻밖의 인물을 보고 그 큰 눈을 몇 번이나 문질렀다. 익숙한 얼굴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너 혹시 나인이 아니니?”
마침 대장간에 놀러 온 나인은 어제 방영된 던전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누……구?”
“나야, 혜련이. 생각 안 나? 네가 날 구해 줬잖아.”
“아!”
나인은 그 말을 듣고서야 혜련을 기억해 냈다. 작년에 지질 조사를 하겠다고 배리어 밖으로 나왔던 혜련을 비롯한 몇 명이 사막에서 탈진해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을 보고 구해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정말 인연이네. 그래, 여긴 웬일이야?”
나인이 반가운 얼굴로 혜련을 자리로 끌었다.
“응, 심부름. 대장이 돈을 전해 달라고 해서 왔는데 네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대장?”
나인이 아우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혜련은 대답이 길어질 것 같아 화제를 돌렸다. 마음이 급해 얼른 돈을 전해 주고 비욘드에 접속해야만 했다.
“응, 그런 게 있어. 그나저나 넌 잘 지냈어? 어떻게 이곳에 들어온 거야?”
혜련의 질문에 나인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해란이 끼어들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아 온 사이처럼 편하게 말이다.
“쟤 요즘 유니온에 들어와 살아. 비욘드 게임 때문에.”
“그래? 너도 게임하는 거야? 상행은 어쩌고?”
“사정이 좀 있어.”
해란이 차를 준비하는 사이 나인이 사정을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혜련의 시계에서 빛이 주기적으로 점멸했다.
“이런! 가야 해. 친구들에게 급한 일이 생겼나 봐.”
혜련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주문한 최상급 캡슐이 왔나 보다. 이제 나인이 있는 곳은 알았으니 한가해지면 들러서 밀린 이야기를 하면 된다.
“얘, 혜련아. 그냥 가면 어떡해?”
“아무튼 다시 올게. 그때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자. 급해서 그래.”
혜련은 막 찻잔을 든 해란과 나인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급하게 집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돈의 전달지에 왜 아우터인 나인이 있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것은 하룬에게 물으면 될 일이다.
“그런데 쟤가 어떻게 돌풍 용병대에 들어간 거지? 가만, 아까 뭐라고 했더라? 하룬 대장? 뭐야, 이거?”
깜짝 놀란 해란이 찻잔을 떨어뜨렸다.
‘그 사람이 그럼 대원이 아니고 대장이었어? 그 유명한 돌풍 용병대의?’
남은 두 사람은 풀리지 않는 의혹에 입을 벌리고 한동안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