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대원들》
하룬은 서둘러 일행이 경계하며 쉬는 곳으로 돌아와 사정 이야기를 했다. 중간에 헤니가 그의 말을 거들었는데 그것 때문에 조금 소란이 있었다.
“정말 드워프어를 이해할 수 있단 말이오?”
타니엘라는 그 어느 때보다 놀란 얼굴로 하룬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그게…… 그들의 말을 이해는 합니다. 다만 입으로 말을 하지는 못하고요. 뭐, 굳이 이야기하면 반쪽짜리라고나 할까요.”
“내 평생 살면서 드워프어를 알아듣는 인간이 있다는 건 처음 듣는군. 언제 드워프어까지 익혔소, 대장?”
타니엘라는 그것이 궁금한 모양이지만 하룬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자신도 그런 능력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대답한단 말인가.
하룬은 일단 화제를 돌렸다.
“그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튼 저는 드워프들의 의뢰를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저와 같이 의뢰를 수행할지 아니면 던전으로 먼저 갈지 결정해야 합니다.”
던전이라는 말에 일행의 얼굴들이 급변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드워프들을 도와주고 보수로 드워프제 아이템을 받는단 말인가, 대장?”
딜런의 입이 찢어질 만큼 함박 벌어졌다. 그가 가진 검은 기사로 서임되었을 때 받은 것으로, 비록 유니크 급이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사용해 온 관계로 내구도가 많이 떨어졌다. 정이 들어 바꾸지 못하는 이유도 있지만 사실은 평생 수련만 해 온 그에게 그 정도의 검을 구입할 거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 던전에는요?”
드워프제 아이템에 욕심이 나면서도 던전이 걸리는 아레스였다. 물론 정보가 급한 매그럼과 초른 역시 아레스와 마찬가지로 기묘한 표정이었다.
“대장, 이럴 때가 아니잖아요?”
뫼비우스는 마음이 급했다. 기껏 던전의 위치까지 터트려 놓았으니 던전에 대해서 심층 취재가 이어져야만 했던 것이다.
“나도 드워프를 돕는 것은 나중에 했으면 하네요.”
“저도요.”
초른과 매그럼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던전의 위치를 알아낸 공으로 승진까지 한 그들이지만 계속 고급 정보를 수집해야만 했다.
“나도 웬만하면 대장을 따르고 싶지만 애초에 목표가 던전이니 드워프들에게 시간을 뺏길 수 없습니다.”
“나와 친구들은 우리 뫼가 원하는 대로 할 거예요.”
뫼비우스도 반대였다. 그에게 푹 빠진 슈미르와 그 일행은 당연히 뫼비우스의 의견을 따랐다.
‘현실에서 만났다던가?’
캐릭터의 외양과 분위기까지 환해진 것을 보면 뫼비우스가 슈미르를 제대로 녹인 것 같았다. 뫼비우스와 죽이 잘 맞는 아레스를 통해 들은 바로는 현실에서 뫼비우스를 만난 슈미르가 그의 미모와 매력에 푹 빠졌다고 했다.
“좋습니다. 나도 사실 던전 쪽이 더 급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용병이 의뢰를 받고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고, 여러분은 던전을 목표로 이곳에 왔으니 지금은 헤어지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룬의 선언에 좌중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았지만 어쩌면 그게 더 좋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대원들이 아닌 사람들과 더 동행하는 것도 그리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짐작이지만 이 앞의 산을 넘으면 목적지가 보일 겁니다. 산이 비록 높고 험해 보이지만 넘는 것은 그리 위험할 것 같지 않으니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있으면 우리도 의뢰를 처리하고 뒤따르겠습니다. 나중에 행동을 같이할지 여부는 그때 가서 결정합시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이제까지 같이 움직인 정리를 생각하면 돌풍 용병대의 의뢰를 도와야 도리지만 던전 상황이 너무 궁금해서 어쩔 수가 없군요.”
초른을 비롯한 사람들은 무척 미안해하는 얼굴이었다.
돌풍 용병대원을 제외한 사람들은 따로 자리를 가졌다. 가장 연장자인 타니엘라가 주재한 회의에서는 개별적으로 행동할 것인지 아니면 그래도 이 사람들이라도 같이 움직일 것인지에 대해 논의했다.
회의 결과는 예상대로 같이 움직이는 것으로 나왔다. 강자들이 우글거리는 이곳에서 개별 행동은 전력의 손실은 물론 엄청난 위험까지 가져올 거라는 사실을 다들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룬에게 뜻밖의 일도 생겼다. 딜런이 던전행을 거부하고 돌풍과 함께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딜런 경?”
“하하하! 대장이 크게 마음 쓸 건 없네. 던전도 좋지만 사람이 의리가 있지. 이제까지 동행해 놓고 며칠을 못 참아 따로 행동하긴 싫군. 며칠 빨리 간다고 던전 상황이 어떻게 변할 건 아닐 테고. 난 단지 사람을 끌어들이는 영웅의 풍모를 가진 대장과 인간미 넘치는 돌풍 대원들과 함께하고 싶네.”
딜런이 그 정도로 돌풍 용병대를 생각하는 줄은 몰랐기에 하룬은 무척 기꺼웠다. 드워프제 아이템을 욕심냈다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난 찬성이에요. 딜런 님의 검술 실력이면 그 누구도 우리 돌풍 용병대를 무시할 수 없을 거예요. 그 쓰레기 같은 제국 정보 길드도 바짝 긴장할 거에요. 그러지 말고 이참에 아예 우리 용병대에 들어오는 것은 어때요, 딜런 님?”
티노의 생각도 헤니와 같았다. 다만 딜런을 쳐다보는 그의 눈에는 걱정이 어려 있었다. 귀족, 그것도 최상급 익스퍼트의 경지에 달한 기사 딜런이 한낱 용병대원이 되려고 할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하하하! 그거 묘안이네. 대장, 내가 쓸 만하다고 생각되면 영입해 주게. 다른 용병대라면 내 절대 사절이지만 돌풍이라면 보수를 적게 받더라도 들어가고 싶군.”
“그거야 당연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딜런 경은 기사에다 귀족이신데…….”
하룬 역시 꺼리는 마음이 있었다. 이 세상의 귀족들이나 기사들은 현실의 노블에 못지않은 강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외견상의 신분으로 사람을 대하는 세상이고 보면 딜런은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심지어는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다.
용병 길드가 활성화되고 나서 용병들의 이미지가 많이 올라갔다지만 그래도 귀족들과 기사들에게 용병은 아직 도적이나 부랑아 혹은 폭력배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
“뭐, 나도 호위 의뢰를 하나 처리했으니 이미 용병이 된 것과 다름없지. 어떻게 안 되겠나? 내 손녀 학비를 대려면 돈 많이 벌어야 하는데.”
딜런은 정말 돌풍에 들어오고 싶은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고요의 평원에 도착했을 때 하룬에게 각별한 호의를 가지게 된 것이다. 요즘 간간이 하룬을 언급할 때 영웅이라는 말을 하는 걸로 보아서는 호감과 더불어 일종의 외경심까지 가진 듯 보였다.
‘혹시 이게 영웅 포인트H.P.의 효과는 아닐까?’
그럴 수도 있다. 유저인 아레스 일행과 뫼비우스 일행은 그렇지 않았지만 타니엘라와 딜런 그리고 도네이스는 처음으로 H.P.를 얻은 바람의 계곡을 기점으로 하룬과 돌풍 용병대에 각별한 호감과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당연히 대원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저러나 대장 자리를 딜런 경에게 양보해야 할 것 같은데요.”
“허어, 이런! 안 될 말이지. 난 용병으로는 초짜란 말이네. 게다가 골치 아픈 대가리 짓은 딱 질색이고. 영지 일도 보기 싫어 머리통도 덜 여문 아들놈과 마누라에게 맡기고 수련만 했는데. 일 없네, 대장.”
딜런은 정말 싫은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역시 타고난 기사 체질이다.
“좋습니다. 딜런 경을 돌풍 용병대 대원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환영합니다.”
“고맙네, 대장! 내 열심히 할 테니 강자들이랑 싸울 수 있게 도와주게.”
딜런의 진정한 노림수는 이것이었다. 세상을 떠돌며 강자들과 겨룰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용병이 되는 것도 불사하는 것이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설사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해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헤니는 어떻게 할래?”
티노가 하룬의 눈치를 보는 헤니에게 물었다. 헤니는 다른 유저들과 함께 던전으로 가고 싶은 심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것이다.
“그게…….”
단박에 말을 못 하는 것을 보니 던전을 놓고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다른 용병대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하룬은 애초부터 가입과 탈퇴를 자유롭게 하겠다고 헤니에게 말한 바 있었다.
“그쪽에 마음이 동하면 탈퇴해도 상관없어. 다만 다시 들어오는 것은 안 될 일이니 잘 생각해.”
티노의 말에 잠시 더 고민하던 헤니는 결국 결론을 내렸다.
“나, 난 대장하고 같이 움직일래요. 사실 던전과 마법서 때문에 잠시 흔들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용병대를 나가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에요. 한 명쯤은 던전에 가까이 가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쪽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다가 알려 주려고요.”
“하하하. 기특한 생각을 한 건 좋은데 헤니는 대장이나 돌풍을 나보다 더 모르는군.”
딜런이 대소를 터트렸다. 그의 말에 헤니와 도네이스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무슨 의미인지 감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도 모르겠나? 대장이 던전을 지척에 놔두고 드워프들의 의뢰를 받아들였다는 건 이미 던전 쪽에 파견된 대원이 있고, 그쪽 상황이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지.”
딜런의 말에 티노를 비롯한 세 사람의 눈이 커지며 하룬에게 향했다.
‘능구렁이! 연륜이라는 건 무시할 수 없는 거구나.’
사실 딜런의 말이 맞았다. 이미 진수를 통해 그곳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하룬이었다. 티노야 워낙 하룬을 믿는 사람이니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딜런 경의 혜안은 못 속이겠군요. 맞습니다. 이미 다른 대원이 던전 가까이 자리를 잡고 그곳 상황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별다른 일이 없기에 아직 보고는 없고요. 졌습니다!”
하룬은 부러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진수의 존재를 드러냈다.
“치잇! 나도 사실 그렇지 않을까 의심은 했는데…….”
명석한 두뇌를 지닌 헤니 역시 그 생각을 했었나 보다. 얼굴을 보니 공연히 용병대 탈퇴 운운하는 말까지 듣게 된 것이 억울한 듯했다.
“아무렴 내가 던전 때문에 별다른 조건도 없이 대원으로 받아 주고 이곳까지 데려와 준 대장과 티노의 정을 배신할 생각을 했겠어요? 미리 그런 사정을 얘기해 주면 좋았잖아요. 이게 뭐예요, 창피하게!”
정말 창피했는지 귀뿌리까지 새빨갛게 변해 버린 헤니의 얼굴이 귀여웠다.
“하하하! 그럴 줄 알았어. 아무렴 헤니가 우릴 떠날 생각을 했으려고.”
티노는 일전에 다른 대원들의 배신을 눈앞에서 경험한 터라 혹시 몰라 긴장했다가 헤니의 말을 듣고 입이 헤 벌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입가를 씰룩거리던 도네이스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런 푼수 덩어리. 헤니가 자기 딸이라도 되는 거 같네. 무슨 용병대가 꼭 가족 같아? 나도 이참에 가족이 될래. 대장, 나도 대원으로 받아 줘요!”
“넌 안 돼. 곧 너희 용병단도 이곳으로 온다면서 왜 우리 용병대에 들어오려고 하는데?”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도네이스의 제안에 티노가 눈을 크게 떴다. 사실 타 용병단의 부단주씩이나 되는 도네이스가 보수도 받지 않고 자신들을 따라 이곳까지 온갖 고생을 하면서 온 것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녀는 티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어울리지 않게 하룬의 눈치를 보았다. 하룬 역시 티노처럼 당황하고 있던 터라 금방 대답하지 못하고 티노를 쳐다보았다. 사실 이곳까지 도네이스를 동행한 이유는 티노 때문이었다. 그가 책임을 지기로 했기 때문에 동행을 허락한 것이다.
티노와 도네이스는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하지 못했다. 그 꼴을 보던 헤니가 갑자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언니는 티노 부대장이랑 떨어지기가 싫은 거구나. 매일 툭탁거리며 싸우더니 정이 든 거야.”
“무, 무슨…… 그런 흉악한 말을…….”
도네이스로부터 고개를 돌린 티노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부인했지만 말을 더듬거렸다.
“헤니! 어떻게…… 날 이런 늙은이랑…… 어머, 분해!”
도네이스는 뜨거운 콧김을 연방 내뿜으며 길길이 날뛰었다. 티노랑 엮은 것이 말도 안 된다는 행동이었지만 어째 두 사람의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고, 허둥대는 것을 보니 이상하기도 했다.
“호호호, 아니면 말고. 근데 왜 얼굴들은 그렇게 빨개지시나?”
“그……건 네 말이 하도 황당해서지 뭐겠니?”
“크흠. 그건 도네이스 말이 맞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그런 거지.”
두 사람이 해명했지만 헤니는 여전히 짓궂은 미소와 묘한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그런 헤니의 시선을 두 사람은 자꾸 피하고 있었다.
“대장, 아무래도 도네이스 언니를 우리 용병대에 받아줘야 할 거 같은데요. 언니 말을 들으니 단주의 딸이기 때문에 부단주라고 불리는 것일 뿐 사실 용병단에서 정식으로 부단주 직함을 받거나 역할을 한 적은 없대요. 그러니 우리 용병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아무 하자가 없어요. 더구나 티노 부대장이 저리 좋아하니 불쌍해서라도 받아주죠?”
방금 전까지 자신이 창피해했던 것은 완전히 잊어버린 듯 생글거리며 두 사람을 놀리는 헤니의 말에 하룬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헤니의 말이 진담인지 아니면 농담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던 딜런이 싱긋 웃으며 결정적인 말을 던졌다.
“왜,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만. 도네이스라면 나도 찬성이네, 대장. 요즘 세상에 티노처럼 속이 꽉 찬 사내가 얼마나 있을 거 같나? 용병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들은 죄 일정 수준 이상인 데다 성격도 좋고 다정다감한 저런 남자, 그것도 술도 여자도 별로 찾지 않는 성실한 남자에다 명성이 중천의 태양처럼 빛나는 우리 돌풍 용병대의 부대장이니 시간만 좀 지나면 용병 노처녀들이 가만히 두지 않을 걸세.”
노골적인 칭찬의 말에 티노의 얼굴이 다시 벌게졌다. 그런 티노를 훔쳐보는 도네이스의 눈에 묘한 광채가 일렁였다.
“어머, 우리 도네이스 언니는 어디 떨어지는 줄 알아요. 힘은 오우거가 울고 갈 정도에 얼굴도 예쁘지, 거기다 요리 솜씨는 환상이고 활 솜씨까지 다들 엄지를 치켜세울 정도로 끝내주니 최고의 신붓감이죠.”
헤니의 말에 도네이스가 어울리지 않게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말도 맞는 소리였다. 사실 용병 생활을 하면서 입에서 목까지 이르는 굵고 긴 흉터가 있기는 하지만 도네이스의 본판은 제법 오밀조밀하게 잘 조화된 얼굴이었다. 또 언제부턴가 티노와 같이 시작한 요리도 그 솜씨가 꽤 그럴싸해서 하룬도 입이 호강하는 중이었다.
하룬은 그들의 말이 정말인 거 같아 두 사람을 번갈아 살펴보았는데 그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하하하! 우리 대장은 다른 것은 다 잘하는데 총각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원체 성격이 그런지 여자관계는 너무 무심하단 말이야. 난 진작 두 사람 사이에 봄바람이 부는 것을 알았는데 대장은 전혀 몰랐나 보네.”
“호호! 대장이 그런 구석이 있죠. 맹하다고 해야 하나? 좀 모자란 구석이 있어요.”
공연히 불똥이 자신에게까지 튀자 하룬은 뜨악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성인이 될 때까지 이성에 전혀 관심도 없었다가 게임하면서 겨우 여자들을 만나고 연정 비슷한 감정을 경험했던 하룬이고 보니 할 말이 없었다
아무튼 화제를 돌려야 했다.
“도네이스, 아까 한 말이 진심입니까? 그리고 헤니가 한 말도?”
그제야 도네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그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장. 난 아직 정식으로 소속을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용병적傭兵籍에 올라 있지도 않고요.”
그럴 수도 있나 싶었다. 아버지가 제국 10대 용병단 중 하나의 단주인데 딸이 그 용병단에 소속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건 도네이스의 말이 맞습니다. 저도 소문으로 들은 거지만 이 화상이 워낙 어릴 때부터 사고를 많이 쳐서 용병단에 자리를 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제발 시집으로 가라는 단주의 성화가 이제는 애원으로 바뀌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미친! 내가 안 한다고 한 거야! 내 실력을 어떻게 보고 말단부터 뛰라는 건데? 한참 윗대가리까지 다 나한테 깨진 놈들인데. 난 죽으면 죽었지 나보다 약한 놈 밑에서 수발이나 드는 쫄짜는 안 한다고.”
도네이스가 펄쩍 뛰면서 하는 소리로 대충 사정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엘저처럼 꽤나 어두운(?) 유명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말단부터 경험을 쌓게 하려고 했지만 도네이스는 실력이 한참 달리는 상사를 인정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좋아요. 그럼 도네이스를 받아들이기로 하죠. 다만 다카린 용병단에서 항의할 경우는 알아서 처신하세요.”
하룬의 허락이 떨어지자 도네이스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물론 툭탁거리던 티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대장. 이젠 다카린 용병단을 능가하는 유명세를 가진 돌풍 용병대원이 된 것만으로도 대장에게 감사할 테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자, 그럼 식구도 늘었으니 정식으로 계약을 하지요. 헤니 역시 급하게 용병대에 들어오느라고 보수에 대한 것도 결정하지 않았으니 이참에 말을 해 봅시다.”
하룬의 말에 대원들의 눈이 밝게 빛났다. 이 통이 큰 대장이 얼마나 쓸지 기대가 되었다.
“다른 용병대처럼 의뢰당 수당 지급이 아니고 연봉으로 보수를 지급하겠습니다. 물론 특별한 가외 수입의 경우는 공헌도에 따라 차등 지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요. 받아들이겠습니까?”
하룬의 질문에 모두 동의했다.
“그럼 헤니를 비롯한 세 명의 연봉은 당분간 2천 골드로 하겠습니다. 부산물과 같은 가외 수입은 말씀드렸다시피 공헌도에 따라 차등으로 지급하겠습니다.”
“흐읍!”
“헙!”
“으음.”
당장에 헤니와 도네이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연봉 2천 골드라면 특급 용병에 준하는 보수인 것이다. 물론 다른 용병단의 경우 건당 보수를 지급하기에 비교하기는 힘들지만 첫 보수치고는 엄청난 돈이다.
반면 딜런에게는 조금 약한 보수이기는 했다. 그가 첫 호위 임무로 번 돈이 1만 골드이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물론 방어구와 무기는 용병대 자금으로 준비해 줄 겁니다. 경비도 마찬가지고요.”
“최고예요!”
“마음에 드네, 대장!”
이어진 제안은 딜런의 마음까지 흡족하게 만들었다. 사실 용병들이 가장 크게 지출하는 항목은 목숨과 직접 관계된 무기와 방어구 등의 구입이었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 수입의 5할 이상은 방어구와 무기의 구입 그리고 수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정말 파격적인 입단 조건에 딜런과 도네이스의 입이 귀에까지 찢어졌다. 사실 이런 조건이라면 연봉 2천 골드가 아니라 천 골드만 해도 들어올 특급 용병들이 널렸다.
“티노, 선금을 지급하세요.”
“네, 대장.”
티노는 군말 없이 하룬이 운영비 조로 맡긴 돈에서 1천 골드씩을 꺼내 새 대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00골드짜리 미스릴 주화 열 개가 준 마음의 행복은 그 어느 것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컸다.
“감사해요, 대장.”
이런 거금을 처음 만져 보는 헤니는 허리를 91도로 숙이며 좋아했다. 안 그래도 생활비가 떨어져 가는 상황에서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난 느낌일 것이다. 헤니의 반응은 그렇다 치고 도네이스의 눈가엔 물기가 잔뜩 어려 있었다.
“푸훗. 매번 사고만 쳐서 돈 한 푼 못 받고 의뢰만 수행하다가 이런 큰돈을 받으니 감동스럽지?”
“뭐얏? 이 얍삽한 늙은이가! 내가 언제 그랬다고 없는 얘기를 나불거리는 거야?”
“다 알아. 네 이야기를 모르는 용병은 한 명도 없을 거야. 무슨 여자가 툭하면 의뢰인이랑 붙어서 패기 일쑤에 의뢰 중에도 몇 명이나 병신을 만들어서 네 아버지가 그거 보상하느라 허리가 휜다는 소문이 제국에 쫙 깔렸어.”
“그, 그건…….”
“아마 네 손으로 처음 번 돈일 테니까 고이 간직했다가 아버지에게 드려. 많이 좋아하실 거야.”
티노의 말에 뭐라고 대꾸하려던 도네이스는 끝내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몇 방울 떨어뜨렸다.
“그래. 그 이야기는 나도 들었네. 다카린 용병단주의 외동딸이 사고뭉치에 남자 몇은 가볍게 찜 쪄 먹는다고 하던가?”
딜런의 말까지 이어지자 재빨리 눈물을 훔친 도네이스가 성난 얼굴로 티노를 노려보았다.
“이쿠! 대장, 빨리 서약식을 하세요. 일단 대원이 되기만 하면 이렇게 눈빛으로 부대장을 잡아먹으려고 하지는 않겠죠.”
티노가 익살스럽게 찔끔한 표정을 지으며 보챘다.
“하하하. 그러죠.”
하룬은 용병대장의 팔찌를 풀어 도네이스와 딜런의 이름을 새기고 서명을 받았다. 그것이 두 사람이 돌풍 용병대원이 되었다는 서약식의 전부였다.
정식으로 돌풍 용병대원이 된 딜런과 도네이스는 물론 기존 대원들도 얼굴이 밝게 빛났다. 이제야 제대로 된 진용이 슬슬 갖추어지는 것 같아 하룬도 무척 만족스러웠다.
‘어디 정보 좀 확인해 볼까?’
하룬은 네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두 사람의 정보를 차례로 확인해 보았다.
『이름: 딜런
종족: 인간 NPC
직업: 기사, 귀족(남작)
레벨: 178
칭호: 돌풍 용병대원(은둔의 기사 외 3개)
생명력: 3,245
마나: 3,080
힘: 101(+15) 체력: 124(+10)
지식: 51 지혜: 93
행운: 18 민첩: 84
지구력: 84 심안: 27
집중: 14 명성: 532
통솔력: 210
[스킬]
서지Serge(해일) 검술: 초급 마스터, 중급 마스터,
상급 Lv.4(67.80%)/Lv.5』
딜런의 레벨은 무려 178. 하룬으로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레벨이었다. 평생 검술만 수련했다는 증거로 스킬은 달랑 하나, 그의 가전 검술로 짐작되는 서지 검술밖에 없었다. 그 경지가 무려 상급 4단계였다.
‘이 양반, 엄청난 강자잖아.’
하긴 아직 그가 전력을 기울이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물론 바람의 계곡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하긴 했지만 그것으로서는 검사로서의 능력을 추정할 수 없었다. 아무튼 굉장한 강자를 대원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어디, 이번에는 도네이스의 정보를 볼까?’
『이름: 도네이스
종족: 인간 NPC
직업: 특급 용병
칭호: 돌풍 용병대원(외 5개)
레벨: 117
생명력: 2,850
마나: 2,050
힘: 110(+5) 체력: 114
지식: 32 지혜: 54
행운: 8 민첩: 46
지구력: 54 심안: 18
집중: 30(+5) 명성: -450
[스킬]
마상 궁술: 중급 Lv.3(40.50%)/Lv.5
마나 궁술: 초급Lv.3(24.50%)/Lv.5
연사: 중급 Lv.5(17.40%)/Lv.5
속사: 중급 Lv.5(32.12%)/Lv.5
도끼 투척술: 초급 Lv.3(34.22%)/Lv.5
러시 소드 스킬: 중급 Lv.2(20.80%)/Lv.5
요리: 중급 Lv.4(44.40%)/Lv.5』
‘흠. 정말 엄청나군. 꽤 도움이 되겠어.’
도네이스도 상당한 실력자였다. 스킬의 레벨이나 숙련도로 보아 티노를 능가하는 실력이었다. 이제 갓 익스퍼트에 발을 걸친 티노와 달리 검사로 치면 익스퍼트 중급에 달했다. 달리 특급 용병이 아니었다. 더욱이 일반 궁술은 완전히 마스터하고 이제 마나가 깃든 궁술에 몸을 붙인 상태였기에 더욱더 효용가치가 높았다.
특히 도네이스를 영입한 이유는 단지 전력의 중강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제까지 힘들게 살아왔던 티노가 가정을 꾸릴 만한 짝을 찾았다는 점이 가장 고무적이었다. 하룬은 정말 티노가 행복해지기를 원했다.
거기에 더해 용병대 전용 방어구까지 지급받아 당장 착용한 딜런과 도네이스는 입이 귀에까지 걸려 있었다.
“흐흐, 내가 이 방어구 때문에 돌풍에 들어오고 싶었다니까. 하나 빌려달라는 말은 못하고 얼마나 욕심이 나던지.”
“딜런 경도 그랬어요? 저도 무지하게 부럽더라고요. 과연 대단한 방어구네요. 이런 방어구를 입었으니 티노가 그렇게 날아다닌 거로군요.”
두 사람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연방 뛰고 움직이며 방어구의 효능에 감탄했다.
“허허! 이거 경사로군. 결국 딜런 경과 도네이스까지 돌풍에 합류했군. 정말 용병계에 진정한 돌풍이 불겠어.”
열심히 논의하는 회의에서 빠져나온 타니엘라가 사정을 알고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다른 대원들이 얼마나 더 있는지 모르지만 현재 여기 있는 인원들만 해도 굉장한 전력이 된 것이다. 비록 마법사가 빠졌지만 하룬이 정령사라는 것을 감안하면 거의 완벽한 조합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명색이 귀족에 익스퍼트 최상급의 이 딜런이 속한 곳이라면 제국을 호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자네 말이 맞네. 자네 같은 강자가 자리를 틀 정도면 그것만으로 엄청난 용병대지.”
타니엘라는 신분이나 자리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사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딜런이 무척 부러운 듯했다.
“나도 마탑에 매인 신세만 아니라면 돌풍 용병대에 들어가고 싶네만…… 아쉽네.”
평생 가정도 꾸리지 못하고 마법에만 빠져 살아왔던 그로서는 마치 가족과 같은 정이 물씬 풍기는 돌풍 용병대원들의 모습이 정말 부러웠다. 비록 나이는 먹었지만 자유로운 삶을 희구하는 마음만은 여전했던 것이다.
타니엘라 마법사를 임시 수장으로 정한 아레스 일행과 뫼비우스 일행은 딜런과 도네이스가 돌풍 용병대에 가입한 것을 모른 채 바삐 길을 재촉했다. 꽤 높은 산이었기에 서둘러야만 했던 것이다. 드워프들이 쉬는 곳까지 동행한 하룬 일행은 그들과 작별했다.
하룬은 새로운 대원들과 함께 드워프들이 머무는 곳으로 갔다. 이미 부족장이 모든 사실을 알린 탓에 그들은 드워프들에게 호감과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합류할 수 있었다.
이번에 두 번째로 드워프를 보는 하룬은 족장의 거처로 가면서 아까와는 달리 좀 더 그들을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거의 오백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드워프들은 가족 단위로 쉬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호기심이 강한 어린 드워프들만이 그들이 지나는 것을 놀란 눈길로 쳐다볼 뿐 성인 드워프들은 짐에 기대앉아 눈을 감거나 늘어져 있었다.
하룬은 그들을 맞이한 타루가와 인사를 나눈 직후 은밀하게 물었다.
“혹시 식량이 부족합니까?”
“헛! 자네가 그것을 어덯게?”
사실이었다. 타루가는 지난 일주일 동안 자신의 일족들이 하루에 한 끼를 겨우 먹으며 이동해 왔다는 것을 실토했다.
짧은 설명을 통해 하룬은 그들이 벌써 한 달 반이나 이동했다는 것과 준비한 식량이 동이 난 것은 물론 이곳에 오는 도중에도 식량을 구입하지 못해 굶주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막 안으로 안내받은 하룬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티노에게 식량을 내놓게 한 일이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풍족하게 준비했기에 아직도 상당한 식량이 남아 있었다. 티노는 일행이 한동안 먹을 것을 뺀 나머지를 모두 꺼내 주었다.
다 꺼내 세어 보니 밀이 스물세 자루에 보리 열두 자루, 호밀 스물네 자루, 야채 건조분 두 자루, 육포 한 자루 그리고 고기를 말려 가루를 낸 것이 세 자루나 되었다. 타루가와 원로들이 미칠 듯이 좋아한 것은 물론이다.
서둘러 전사들에게 식량을 배급하도록 시키는 타루가와 원로들의 눈에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마움이 깃들었다.
“고맙네. 사실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식량을 구입하려고 했으나, 나부루족도 추수기지만 올해는 흉년이라 가지고 있는 식량이 거의 없더군. 그래서 그들도 목숨 걸고 요른 평야로 대상을 나선다며 식량을 팔지 않았어. 안 그래도 오늘 저녁이면 모든 식량이다 떨어져 한동안은 엘프들처럼 풀뿌리와 야생 과일만 먹고 살아야 할 형편이었네.”
일족을 책임진 타루가는 그동안 마음고생이 많았는지 살짝 눈물을 내비치기까지 했다. 일단 그들의 호감을 얻는 것은 확실하게 성공한 것이다.
천막 안에 피운 작은 모닥불 위에 끓고 있던 주전자의 물을 본 티노가 차까지 꺼내 들자 원로들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어리고 젊은 드워프들은 작업 중 이외에는 차를 즐기지 않았지만 장년 이상이 되면 집중력을 위해 버릇처럼 마셔왔던 차의 제맛을 아는 것이다.
찻잔을 돌리자 대번에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걱정거리 중 하나였던 식량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따듯한 차까지 마시게 되자 근심 걱정이 멀리 날아간 것 같았다.
“일단 지세와 지형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이곳은 웬만한 길잡이들이나 산길을 아는 사람들이면 반드시 지나가는 길목입니다. 왼쪽의 산은 이 산보다 경사가 더 가파른 데다 험준하고, 오른쪽은 절벽이니 필연적으로 오를 수밖에 없는 구조지만 살펴보면 무슨 방도가 나올 겁니다.”
“미리 정찰했던 전사들의 의견도 그래서 사실 우린 원래 이 옆 산에 거주지를 만들 생각이었네. 하지만 이곳에 도착해서 보니 곳곳에 크고 작은 샘들이 있어 식수나 작업에 물을 얻기가 편리해 이곳이 적지라는 판단을 내렸다네.”
광맥만 보자면 옆에 있는 험준한 돌산이 제격이지만 이 산은 물이 풍부한 곳이라 이곳에 거주지를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하룬과 티노 그리고 헤니는 돌킨과 다른 두 전사의 도움을 받아 근방을ㅇ 살펴보기로 했다. 구역을 나누어 이 산과 계곡 그리고 옆의 험준한 돌산을 면밀하게 수색한 사람들은 다시 숙영지로 돌아왔다.
먼저 헤니가 고개를 저었다. 돌킨과 동행했던 티노는 거주지로 쓸 만한 동굴 몇 개와 채광할 곳을 찾기는 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옆의 돌산으로 수색을 나갔던 하룬도 소득이 없었다. 바람의 정령까지 소환했지만 돌과 바위 사이로 작은 나무 몇 그루가 고작인 돌산 그 어디에도 길을 만들 수 있는 지형은 없었다.
“그럼 계곡을 따라 길을 만들어야겠군요. 물이 흐르는 곳이라 일단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쏠릴 테니 산을 돌아갈 수 있는 길만 어느 정도 뚫어 준다면 사람들은 공연히 이 산을 오를 생각은 하지 않을 겁니다.”
티노의 말을 들은 헤니가 문제점 몇 가지를 제시했다.
첫 번째 문제는 일단 계곡을 따라 산을 돌아 올라가는 길이 너무 험준하다는 것이다. 계곡으로 이어진 돌산은 이곳과 마주 보는 옆면의 경사가 굉장히 가파르고, 계곡 자체는 옆의 돌산에서 굴러 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바위들 때문에 손대기가 힘들었다. 뿐만 아니라 계곡 양쪽으로는 물기를 좋아하는 거대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고 있어 한 사람이 지나는 것도 힘들 정도라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그런 지형에 길을 뚫기 위해서는 엄청난 인원과 도르래 같은 기계장치들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드워프들의 역량을 고려한다면 별일 아닐 수도 있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인간들은 불과 얼마 후면 일부는 이쪽 길로 오게 될 것이다.
세 번째는 드워프들이은신할 거처였다. 밤이 되면 매서운 한기가 있는 이곳에서 언제까지 천막을 치고 생활할 수도 없고, 인간들과 마주쳐서는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회의는 자연히 길어졌지만 특별한 결론이 나질 않았다. 벌써 해가 넘어가려고 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다시 방법을 찾아보도록 합시다. 우리 일족들이 오랫동안 굶주린 터라 체력도 좀 회복해야 하고 당신들은 여행으로 피곤해 보이니 오늘내일은 푹 쉬는 게 좋겠소.”
한 원로의 제안이 있고서야 회의는 끝났다.
사정은 강행군을 했던 하룬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드워프들이 자리를 잡았던 곳 중 하나를 양보 받아 모닥불을 피울 수 있었다. 높은 지대라서 밤이 일찍 찾아들었고, 꽤 쌀쌀한 한기가 한층 더 피로하게 만들었다.
티노가 잰 손으로 야채 분말과 고기 분말을 섞어 수프를 끓이는 사이 헤니와 도네이스가 빵과 햄을 준비했다. 덕분에 식사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지난 십여 일의 강행군에 녹초가 된 사람들은 모닥불의 열기에 노곤한 몸을 눕혔다.
이내 코 고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렸다. 드워프들 역시 오랜만의 포만감과 그동안의 피로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하룬 역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잠을 청하지는 못했다. 의뢰를 받아들인 이상 끝을 봐야 마음이 편했다. 수장이라는 자리는 이래서 편하지가 않다. 물론 불편함과 비교할 수 없는 장점들도 많지만 하룬은 인간관계가 좁은 성장기를 겪어서 그런지 아직은 혼자가 편했다.
그동안 일행이 있어 마음껏 수련하지 못 해서 마음이 좀 불편했던 하룬은 자지 않고 계곡으로 향했다. 하지만 방향을 잘못 잡았다. 계곡 근처는 평탄한 땅이 없어 스킬을 수련할 수 없었다.
‘아까 지나쳐 왔던 풀밭까지 가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하룬은 복잡한 머리도 식힐 겸 계곡으로 내려갔다. 계곡에는 옆의 돌산에서 굴러 떨어진 커다란 바위들 때문에 물줄기가 많이 꺾이기는 했지만 제법 수량이 많은 개울이 있었다.
물을 보니 그동안 땀을 흘려 지저분해진 자신의 몸이 생각났다. 생각난 김에 방어구와 속옷까지 다 벗고 계곡물로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차지는 않았다. 서늘하고 상쾌한 감각에 피곤이 다 풀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몸에 물을 담그고 있으니 가끔 나이아에게 몸을 씻겨 달라고 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나이아를 소환한 적이 없었다. 갑자기 그녀와 나누었던 미묘했던 감정이 떠올랐다.
그녀, 정령이니 그녀라고 해도 될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자신의 말로는 귀속되면서 정령의 질서를 벗어나 자의로 여성체를 택했다고 하니 그녀가 맞았다.
나이아와의 달콤했던 교감의 순간을 떠올리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녀가 보고 싶었다. 씻겨 달라는 핑계를 대면 되지만 일단 여성체로 의식하고 나니 이런 꼴을 보이기가 창피해서 애써 그런 마음을 누르고 몸을 씻었다.
그렇게 한참 몸을 씻고 밖으로 나온 하룬은 땀과 먼지로 더럽혀진 속옷과 방어구들을 보고는 혀를 찼다.
“이런! 갈아입을 속옷을 가져오는 건데.”
깨끗하게 씻은 후에 더러워진 옷을 입으려니 그것만큼 고역도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하룬은 결국 나이아를 소환하고 말았다.
-헤에, 보기가 너무 좋은걸요.
나이아는 알몸의 하룬을 보고는 눈을 동그렇게 떴다. 하지만 하룬의 붉어진 얼굴과 더러워진 옷들을 보고는 상황을 대충 눈치채고는 콧등을 찡그리며 그를 놀렸다.
-오, 이 옷들과 방어구들을 좀 깨끗이 해줄래?
-호호호.
나이아는 맑고 고운 웃음소리와 함께 속옷과 방어구들을 말끔히 세탁해 주었다. 창피한 마음에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돌려보낸 하룬은 급하게 옷을 입고 나서야 겨우 긴 한숨과 함께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자꾸 정령에게 이상한 감정이 드는 거지?’
하룬은 자책하며 계곡을 따라 걸었다. 하지만 이내 계곡 양편에 밀생한 물푸레나무 숲을 만났다. 물가에서 자라는 이 나무의 키는 20미터가 풀쩍 넘었고, 굵기는 어른 허리 두께만큼이나 두꺼웠다.
그렇다고 계곡의 물을 거슬러 올라가자니 물에 빠지는 것은 물론이고 아주 오래 전 옆의 돌산에서 굴러 떨어져 땅에 박힌 거대한 바위들 때문에 제대로 올라갈 수도 없었다.
‘이거 정말 문제네.’
계곡에 박힌 바위는 작은 건물 크기에서 머리통만 한 것까지 다양했고, 그 숫자가 너무 많아 손을 대기가 힘들었다.
‘결국 이 나무들을 처리하는 것이 관건이로군.’
다 베어 낼 필요도 없었다. 다만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만 되어도 굳이 산을 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숲가를 이리저리 걸으며 고민하던 하룬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대지의 정령 라이피를 소환했다.
-오랜만에 불러 주네.
라이피는 반가운지 환하게 웃었다.
-응. 그동안 잘 있었어?
-나이아와 위신느에게서 이야기는 들었어.
정령들끼리 서로 이야기할 줄은 짐작조차 못 했기에 하룬은 눈을 크게 뜨고 라이피를 보았다.
-무슨 이야기?
-이번 계약자가 너무 좋다나. 축하해. 그 녀석들, 정령왕들도 기대할 정도로 잠재력이 뛰어난 존재들이거든.
하긴 그 능력을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안 그래도 정령계는 심심하다며 노래를 부르던 녀석들인데 내가 계약하고 나서는 부름이 있자마자 다른 정령들을 죄다 날려 보내고는 혼자 나간 거야. 우리가 워낙 계급을 초월한지라 하급 정령 정도는 손가락만 움직여도 치울 수 있거든.
-하하하!
하룬은 그녀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활짝 웃었다.
‘하긴 나라도 언제까지나 죽지 않는다면 많이 심심할 거 같긴 하군.’
-친구의 정령력은 별로 높지 않은데도 친화력만은 엄청나기에 의사소통도 원활할 것 같고 재미있을 거 같아서 다들 계약을 기다리고 있었다. 불 속성을 가진 정령들도 기회만 보고 있는 중이야.
하룬은 자신이 왜 하급 정령이 아니라 엄청난 능력을 지닌 정령들과 계약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독 때문에 웬만하면 소환할 엄두도 내지 않는 싸가지 때문이었다. 아직도 그 의미를 잘 모르기는 하지만 자칭 에센셜 정령인 녀석의 정령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녀석 때문에 친화력만은 엘프들을 뛰어넘었던 것이다.
-아, 참! 근데 저 나무들 좀 어떻게 할 수 없을까?
-어떻게 하다니?
의미 전달이 잘 안 된 모양이다. 하룬은 눈을 감고 빽빽하게 자라는 나무들 사이로 사람 두셋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나가는 장면을 떠올렸다. 소환한 상태에서는 생각을 집중하는 것만으로 의시소통이 되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흠, 가능해. 나무의 뿌리까지 같이 옮기고 밑에 있던 흙을 위로 올리면 되니까. 그런데 나무 자체의 무게가 엄청나서 그냥 옮기는 것은 무리인데. 거기다 마나와 정령력이 상당히 많이 필요할 테고.
-오케이! 좋아. 일단은 돌아가고. 내가 방법을 생각해 내고 다시 부를게.
-꼭 불러 줘. 오랜만에 힘쓸 생각을 하니까 신나는데.
대지의 정령은 그렇게 신이 나서 돌아갔다.
‘흠. 마나는 포션으로 채운다고 치지만 정령력이 문제네. 싸가지 녀석하고 의논을 해 봐야겠다.’
하룬은 미리 해독약을 먹고 오랜만에 싸가지를 소환했다.
-오랜만이네, 주인.
-그래. 뭐하고 지냈니?
전직하고 난 후로는 양방향 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에 그동안 왜 녀석이 죽은 듯 아공간에 처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수련 중이야. 난 밖이 좋은데 능력이 부족한 주인은 마나 부족과 독 때문에 날 자주 소환하지 않으니까 그걸 억제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어.
‘허어! 이 녀석, 기특하네. 그렇게 구박으 하는데도 내 생각을 다 하고.’
-그래야 나도 세상 구경을 자주 하고, 또 주인과 계약한 녀석들을 쫄따구로 만들어 부리고 살고 싶다고.
역시나! 그를 생각해서 그런 마음을 품을 리가 없었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라. 그런데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야.
-뭔데?
-내가 대지의 정령을 이용해서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데 그 녀석 말이 내 정령력이 한참 부족하다는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주인이 그렇지, 뭐. 영 함량 미달이라니까. 그러면서 내 주인 노릇을 하려니 힘도 들겠지. 그렇게 얼굴 붉히지 않아도 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금방 거들먹거리는 싸가지를 때문에 또 속에서 불이 올라온다. 참으려고 긴 한숨을 내뱉어 보지만 끓어오르는 것을 참기가 힘들어 하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눈치가 빠른 녀석은 금방 하룬의 기분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내가 정령력을 빌려 줄게. 하지만 독이 함유된 정령력이라 그 녀석이 좀 힘들걸.
‘빌어먹을.’
들으나 마나 한 대답이었다. 결론은 정령력을 빌려줄 수 있지만 대신 대지의 정령이 중독된다는 말이었다.
-아니,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은?
-음. 정령석을 구할 수 있으면 방법이 있는데. 정령석을 손에 쥐고 정령을 소환하면 정령석에 담긴 정령력을 끌어다 쓸 수 있거든. 물론 그런 경우에 더 이상 정령석을 쓸 수 없지만 말이야. 정령석은 마나석처럼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스스로 채워지지 않거든.
하룬의 말이 절박하게 들렸을까 아니면 그의 기분을 알아채고는 더 이상 도발하지 않기로 작정할 것일까, 싸가지가 한층 공손해진 말투로 대답했다.
정령석을 구할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그런 대답을 듣자 기운이 빠졌다.
-알았어.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겠다. 이만 돌아가.
-너무 기죽지 말라고. 나도 방법을 한번 생각해 볼 테니까. 요즘 날 오염시킨 물질들을 따로 분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래도 같이 걱정해 주는 것을 보면 본성이 싸가지 없는 녀석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오염된 물질들을 받아들여서 저런 성격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정령의 힘을 쓸 수 없다고 결론이 나자 갑자기 피로감이 확 몰려왔다. 수련이고 뭐고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때 나이아가 원소력을 흡수하고 능력이 올라갔던 것이 떠올랐다. 하룬은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쳤다.
‘에고! 이 생각이 왜 이제야 나는 거야.’
너무 길을 뚫는 것만 의식했나 보다. 라이피의 능력을 올릴 수 있는 지름길이 있었다.
하룬은 원소석 중 대지 속성이 느껴지는 것을 꺼내 손에 쥐고 다시 라이피를 소환했다.
-라이피!
-또 불러…… 어! 그건 원소석?
-그래, 맞아. 이게 있었는데 까먹고 있었어. 이것이라면 네 능력을 올려 줄 수 있을 거야.
-흐흐흐.
라이피는 말없이 원소석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하룬은 눈을 딱 감고 대지의 속성이 느껴지는 원소석을 삼켰다. 일단 입안으로 들어간 원소석은 말랑말랑한 젤리 상태로 변해 목을 쉽게 통과했다.
‘역시.’
이번에도 원소석은 명치 어름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물 속성의 원소석이 자리한 곳이었다. 어쩌면 이곳이 또 다른 마나 오션일 확률이 높았다.
-라이피, 이젠 원소력을 흡수해!
-알았어, 친구.
라이피는 하룬의 발바닥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와 명치로 올라갔다. 나이아처럼 입을 통해 들어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그땐 정말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정령을 잡아먹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지난번 경험을 토대로 딱히 할 일이 없던 하룬은 오랜만에 지혜의 파편을 꺼내 영상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호오, 그런 뜻이 숨어 있었군.’
어찌 된 일인지 들을 때마다 그 내용이 달라지는 것 같아 연방 감탄하며 강의를 들었다. 아직 내용을 확실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강의에 집중했다.
내용을 더 많이 이해할수록 단단했던 벽이 무너지고 딱딱하게 굳었던 껍질이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까지 현실에서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깨달음의 희열은 그 어느 것보다 더 크고 감동적이었다.
결국 하룬은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그의 집중 상태는 해가 뜨기 시작해서야 깨졌다. 부지런한 드워프들 중 일부가 씻기 위해 개울가로 오는 기척을 느낀 것이다.
-라이피, 나와 봐.
라이피는 명치에서 순식간에 발을 통해 빠져나오더니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 멋진걸!”
절로 감탄이 나왔다. 이전처럼 주름진 얼굴이 아니라 황토색의 강건하고 생기가 넘치는 얼굴을 가진 라이피는 몸체 역시 하룬을 능가할 정도로 커져 있었다. 마치 동화에 나오는 램프의 거인 요정처럼 불끈거리는 근육질의 몸을 가지게 된 것이다.
-진짜 너무 좋아, 친구. 이렇게 순수한 원소력이 있다니. 조금밖에 흡수하지 못했는데도 내 능력이 몇 배는 올라간 거 같아.
-다행이다. 그럼 이젠 내가 이야기한 대로 일할 수 있겠어?
-응. 친구의 마나량만 따라 준다면 가능할 거 같아.
-좋아. 일단은 들어가고 나중에 부르면 나와.
-고마워, 친구.
라이피를 돌려보낸 하룬은 세수를 했다. 밤새 이슬을 맞은 터라 방어구가 젖어 있었다.
‘덕분에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네.’
라이피에게도 좋은 시간이었지만 하룬에게도 깨닫는 것이 무척 많았던 유용한 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밤을 꼬박 새웠음에도 몸과 마음은 신성한 활력이 넘쳤다. 깨끗하고 서늘한 새벽 공기는 그 어느 음식보다 더 맛있었다.
“허허! 일찍 나왔군. 아직 잘 줄 알았는데.”
부족장 타루가였다. 해발고도가 높은 곳이라 이침저녁으로는 쌀쌀했지만 그는 세수를 하기 위해 얇은 홑겹의 옷만 입고 있었는데 단단한 근육이 비쳐 보였다.
“일어나셨군요.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방법은 좀 생각해 놓았나?”
“몇 가지 생각한 것들이 있는데 일단 오늘까지 주변을 정찰해 보고 말씀드리지요.”
“부탁하네.”
캠프로 돌아와 보니 아직 일어난 대원들은 없었다. 드워프들도 그렇고 하룬 일행도 피로가 많이 쌓였던 것이다. 엘프의 영역이라서 그런지 근처에서 몬스터의 기척을 전혀 찾을 수 없어 마음 편하게 잘 수 있었다.
그나마 부지런한 티노와 딜런이 먼저 일어나 아침 준비를 했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은 후에 오늘 일정을 정했다.
“일단 오늘 한번 다시 주변을 정찰해 봅시다. 헤니의 말대로 길을 낼 수 있는 곳을 중점적으로 찾아봅시다.”
하룬은 자신을 포함해 일행을 세 무리로 나누어 정찰하기로 했다. 오래 걸릴 것을 생각해서 먹을 것까지 챙겼다.
하룬은 가장 힘든 계곡 코스를 맡았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굴러 떨어져 깨지고 부서져 계곡 가장자리와 안에 빠져 있어 물줄기를 이리저리 틀고 있었다. 두 개의 방어구를 겹쳐 입어 민첩성이 높아진 데다 메신저 점핑 스킬을 적절하게 써 가며 계곡을 오르던 하룬은 그 끝이 작은 폭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돌산 쪽은 높지는 않지만 거의 낭떠러지였고, 드워프들이 보금자리를 마련하려는 산 쪽 계곡가는 버드나무 혹은 물푸레나무로 추정되는 아름드리나무가 밀생했거나 혹은 길이 끊겨 있었다. 나무들을 어떻게 한다고 해도 몇 군데 새로 길을 내야 할 곳이 보였다.
‘일단 올라가 보자.’
허벌 길드의 지도로 보면 거의 다 왔으니 저 위쪽의 툭 터진 하늘이 보이는 고갯마루에 서면 뭔가 보일 것 같았다.
폭포를 우회해서 한참 올라가자 산과 산 사이의 고개가 나왔다. 벌써 반나절이 다 되어 가니 길이 제대로 뚫린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하루가 꼬박 걸릴 거리였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시야가 시원하게 트였다.
하룬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분지였다. 빙 둘러 산들이 감싸고 있는 안쪽에는 직경이 어림잡아 20킬로미터는 되는 분지가 있었다. 그리고 서쪽에는 작은 호수와 중심부에는 다섯 개의 작은 산이 솟아 있었다.
“멋진 곳이네.”
해발 2,000미터가 넘는 고지인 이 고요의 땅에 이런 지형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규모만 작았다면 화산의 분화구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희한한 지형이었다.
푸른 초지와 하늘을 담은 호수 그리고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다섯 개의 작은 산이 자리한 분지는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뭐지?”
칸젠을 잡고 나서 눈이 좋아진 덕분에 꽤 먼 곳인데도 움직이는 인영들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분지 중심에 위치한 다섯 개의 산 중 남서쪽, 즉 자신의 왼쪽 앞에 있는 작은 산과 그 주변 그리고 그 산을 바라보는 풀밭에 자리를 잡은 인영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던전이다!”
확실했다.
작은 산 주변에서 움직이는 인영들은 엘프들일 것이고, 풀밭 쪽에 세 군데로 나뉘어 진영을 친 인영들은 던전을 먼저 발견한 이방인 길드들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인간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빨리 오긴 한 셈이군.”
그들보다 나흘 먼저 출발한 아반 일행과 사예 일행은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서슴없이 고요의 땅으로 향한 것으로 보아서는 던전의 자세한 위치를 모를 리가 없었다. 어쩌면 그들은 사망 페널티로 레벨 하락을 보충하기 위해 일부러 서쪽의 트롤 서식지를 지나치는 노정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바로 하루 거리에 던전이 있는 줄 알았으면 드워프들의 의뢰를 거절할 걸 그랬나? 아니지. 기왕에 와 있는 세력들이 있으니 우리 인원수 가지고는 힘들 거야. 그럼 일단 진수 형부터 찾아보자.’
진수를 찾아 그동안의 상황을 듣는 것이 먼저였다.
전에 진수가 한 설명에 따르면 그가 있는 곳은 옆 산이었다. 그는 던전이 북서쪽으로 비스듬히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고 했다.
“가 보자!”
오르는 것은 비록 험하고 경사가 가파르지만 일단 능선만 올라가면 이동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제 경지에 이른 메신저 스킬 덕분에 산중임에도 그의 몸은 마치 날다람쥐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진수가 말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능선을 타고 산 두 개를 넘는 데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여기다!”
던전의 입구가 비스듬하게 북서쪽으로 보이는 봉우리에 오른 하룬은 진수가 팠다는 비트를 찾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원래 이 지역은 엘프들의 영역이지만 지금은 인간들과 전쟁 아닌 전쟁 상태에 돌입한 터라 이곳까지 살피기는 힘들 것이다. 그걸 증명하듯 하룬은 아직 하나의 엘프 전사도 조우하거나 보지 못했다.
분지를 향해 뻗은 경사는 반대편보다 훨씬 낮았다. 그리고 특별히 험한 지형도 없어 내려가는 것은 무척 수월했다.
하룬은 진수가 말한 곳을 드디어 찾을 수 있었다. 무성하지 않은 숲의 한가운데에 멧돼지들이 목욕을 한다는 작은 진흙탕이 대여섯 개 줄지어 늘어선 곳이었다. 하지만 비트는 좀체 찾을 수가 없었다. 워낙 위장을 잘한 모양이다.
던전 주변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위치를 찾아 돌아다니던 하룬은 나무 두 그루가 거의 붙어 자라는 곳의 뒤쪽에서 묘하게 이질감이 드는 땅을 찾아낼 수 있었다. 작은 풀들이 선을 이루어 죽어있는 것이 보였다.
“진수 형! 진수 형!”
하룬은 그곳에서 작게 소리 내 진수를 불렀다. 마침 안에 있었는지 조심스럽게 땅거죽이 들썩이더니 위로 올라오며 진수의 얼굴이 보였다.
외모 보정을 했는지 처음에는 좀 생소했지만 윤곽은 그대로라서 이내 알아볼 수 있었다.
“하하! 정민, 아니 하룬이가 드디어 왔구나!”
비트에서 기어 나온 진수의 얼굴은 무척 초췌했다. 옷도 흙투성이였고 머리는 떡이 져 있었다.
“넌 얼굴 보정을 거의 안 했구나.”
“응. 근데 형은 좀 했네.”
“하하! 너야 말라서 그런지 본판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지만 난 달라서. 근데 혹시 먹을 거 없냐? 공복도가 또 최저 수준으로 내려갔다.”
“있어요. 잠깐만요.”
하룬은 등에 멘 작은 배낭에서 빵과 과일 말린 것을 꺼내주었다. 진수는 먹을 것을 보자마자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어요, 형.”
하룬은 물주머니를 건넸다.
“에고, 너 때문에 살았다. 이젠 들쥐 잡아먹는 것도 질려서 그냥 죽으려고 했다니까. 손에 거금이 있는데 이러고 있으니 미칠 것 같더라. 네가 온다고 했으니 기다렸지 안 그랬음 그냥 저기 매일 싸우는 녀석들 틈에 끼어들어 일부러 죽었을 거다.”
너스레를 떤 진수는 간간이 물을 마시며 고열량의 말린 과일과 빵을 꾸역꾸역 먹었다. 그의 심정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그가 대충 배를 채운 것을 확인한 하룬이 궁금한 것을 물었다.
“형, 지금 상황은 어때요?”
그 질문에 물을 한 모금 마신 진수가 히죽 웃었다.
“히힛. 저 녀석들 완전히 헛물만 켜고 있어. 엘프들한테는 상대도 안 되거든. 아마 지금까지 한 번씩은 다 죽었을걸. 엘프 정령사들이나 전사들이 얼마나 살벌하게 센데. 매일 산발적으로 공격해 보지만 어림도 없어. 던전이 있는 산은 물론이고 저 다섯 개의 산 주변에 특별한 결계가 쳐져 있어서 침입했다가는 금방 노출되니 숨어들어 갈 수도 없고,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