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워프와의 조우》
《던전의 자세한 위치가 알려졌다!》
이제 유저들의 수가 급증한 만큼 던전의 자세한 위치가 호울 비전에서 방송하자 비욘드는 난리가 났다. 이전까지는 자세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아 그 실재 여부를 믿지 않는 이들도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고요의 평원에 대한 자세한 지형도와 함께 던전의 위치가 알려졌다. 더구나 각 방송사들이 경쟁적으로 황도 도서관에서 발견한 역사서들을 근거로 던전에 있을 네 권의 마법서 내용들을 방영하면서 그 반응은 폭발적으로 변했다.
미적거렸던 유저들은 물론이고 그들에게 정보를 입수한 NPC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원Cha-One 유니온이 직접 나섰다!’
‘코원Co-One의 USSA가 파견되었다!’
방송사는 연일 던전으로 향하는 유저들과 NPC들의 동향을 심층 보도했다. 그러는 와중에 수많은 루머들이 퍼지고 있었다.
이미 상급 캡슐 이상 사용자들의 경우 비욘드에서 익히고 수련한 패시브 스킬을 현실에서도 수련 과정을 거치면 어느 정도까지는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시점이다. 이것은 각 유니온의 방위군들이 대거 게임에 접속함으로써 알려졌다.
게임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오크는 현실의 오르그와, 공포의 대상인 하르크는 오우거와 유사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기까지 한 것이다.
비욘드를 개발한 넥컴월과 슈퍼컴들이 어디서 이런 스킬들을 알아냈는지 모르지만 게임에서 익힌 패시브 스킬을 현실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알려지자 유저들의 수는 폭증했다.
-우리의 미래는 어쩌면 비욘드 게임에 들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배리어가 언제까지나 우리를 지켜줄 수 없는 상황에서 유일한 대안은 비욘드에 있을지도 모르지요.
한 유명한 장군의 인터뷰 기사는 그 기폭제가 되었다.
몇몇 기자들이 유니온 정부의 은밀한 움직임을 잡아낸 후 유저들 사이에는 던전에 있는 네 권의 마법서 중 약해져 가는 배리어를 대체할 수 있는 어떤 수단이 들어 있을 거라는 소리가 은밀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번 방송을 통해 호울 비전은 명실상부한 글로벌 대표 게임 채널로 성장했다. 이번 던전 위치 방송은 그 시청률이 무려 26%에 육박했던 것이다. 이 일로 다른 방송사들의 경우 대폭적인 인사가 단행되기도 할 정도로 그 파장이 엄청났다.
‘노라와 친구들’ 프로그램은 이제 호울 비전의 대표 프로그램이자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프로그램으로 성장했고, 노라와 패널들은 엄청난 유명세를 치르며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 했다.
“대박이었습니다!”
가장 늦게 게임에 접속한 아레스는 아직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유저들은 한 시간 간격으로 모두 접속해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대박이라니 다행이네요.”
“대장 덕분에 우리 모두 이젠 정식 기자가 되었습니다. C구역에 있는 새로운 주택과 자장 로드 사용권까지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레스는 감격한 표정으로 몇 번이나 하룬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행운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원고료, 아니 정보료는 이전처럼 처리할까요?”
“얼마나 됩니까?”
“현금으로 10억 원 정도 됩니다.”
“괜찮군요. 그럼 이전과 동일하게 처리하세요.”
“네. 그리고 제가 정식 기자가 되었기 때문에 다음부터는 원고료 대신 기사 한 건당 보너스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장께 드리는 보상금은 시청률 0.1%당 500만 원으로 책정되었습니다. 3% 제한도 없으니 이전보다는 더 좋아진 조건입니다.”
그 조건을 관철하기 위해 쌍둥이는 유한 PD랑 힘겨루기를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하룬의 은혜로 바라던 것을 모두 이룬 그들로서는 그에게 최대한 유리한 방향으로 협상을 끌어낼 수밖에 없었다.
“아레스와 동료들이 많이 고생했겠군요. 그 정도면 만족합니다. 수고했어요.”
하룬은 아레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가 들고 온 성과를 반겼다. 매그럼을 비롯한 사람들이 다가와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제대로 된 직업이 거의 없는 유니온 체제하에서 정식 직원이 되었다는 건 정말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하룬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매그럼과 초른에게 돌아갔다. 그들 역시 결과를 들고 왔을 것이다.
“이번에는 저희가 더 셉니다.”
초른과 매그럼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5만 골드입니다. 지난번에 미지급했던 것까지 포함한 보상금입니다.”
“오우!”
정말 생각지도 않았는데 엄청난 거금을 벌어 왔다. 앞으로 벨과 아즈만이 필요한 자금이 얼마나 될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돈이 싫을 리 없는 하룬이 반기는 것은 당연했다.
“수고했어요!”
하룬이 기뻐하는 모습을 본 두 GM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제 겨우 하룬 앞에 당당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저희들도 정식 직원이 되었습니다.”
“정말? 굉장하네요. 그 나이에 정식 GM이라니?”
누구보다 GM 사정을 잘 아는 헤니가 반색하며 두 사람을 축하해 주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두 사람의 승진을 축하해 주었다. 경사가 겹치고 있었다. 타니엘라를 비롯한 NPC들은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좋은 일인 것은 확신했기에 같이 축하해 주었다.
“대장, 저도 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뫼비우스였다. 사람들의 주의가 자신에게 향하자 뫼비우스는 어울리지 않게 부끄러움을 탔다.
“사실은 던전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몇 군데와 거래했습니다. 지난번 일도 있고 해서 코원 길드와 이전의 인연으로 알고 지냈던 몇몇 다크 게이머 길드에 정보를 주었습니다.”
하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방식대로 치열하게 사는 그가 싫은 것도 아니었다.
“아레스와 같은 조건으로 대장 몫을 셈하니 3만 골드가 조금 넘습니다.”
그러면서 돈주머니를 꺼내 주는데 정말 묵직했다. 미스릴 주화가 무려 삼백 개나 든 주머니이니 무겁지 않을 리가 없었다. 굳이 자신이 챙겨도 되는데 이렇게 따로 준비한 것을 보니 앞으로도 아레스나 매그럼처럼 정보를 다룰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거야 하룬하고는 상관없다. 그를 적대하거나 나쁜 생각을 하지만 않는다면 그와 동행하는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가는 자금의 규모를 보는 사람들의 눈이 뜨거워졌다. 타니엘라와 딜런 그리고 슈미르 일행은 물론이고 대원인 티노와 헤니도 크게 놀랐다.
한자리에서 무려 11만 골드를 벌어들인 것이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지난번 아레스와 초른 일행에게 이야기한 대로라면 그 정보를 얻는 데 10만 골드를 썼다고 하니 크게 이익을 본 것은 없지만 그래도 이런 규모의 용병대가 다루기엔 말도 안 되는 거금인 것이다.
‘우리 대장 정말 대단해.’
‘돌풍의 이름값이 어느 정도인지 알겠군.’
‘아도 이참에 돌풍 용병대나 들어가 볼까? 설마 저렇게 많은 돈을 버는데 쩨쩨하게 굴진 않겠지?’
지켜보는 사람들의 심중에는 갖가지 생각들이 떠올라 있었다.
뫼비우스와 슈미르 일행을 마지막으로 모두가 비욘드에 접속했을 때까지 이루어진 수련은 비록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얻은 것들이 많았다. 특히 티노의 경우 제대로 된 가르침을 거의 받지 못했던 터라 딜런의 상세한 설명과 지도 그리고 실전에 가까운 대련으로 얻은 것이 가장 많았다.
하룬 일행은 호숫가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던전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고요의 땅으로 향하는 가파른 길을 올라가야 했다.
고원으로 올라가는 오르막길은 경사가 제법 높았지만 이미 앞서 간 사람들로 인해 잘 다져진 상태라 반나절 만에 아무 사고 없이 올라갈 수 있었다.
해발 1,000미터가 넘는 고원이지만 이전에 한 여행 덕분에 마법사들이 조금 숨 쉬는 것을 곤란해할 뿐 별다른 증상은 없었다.
티노와 헤니가 식사 준비를 서둘렀다.
“후아, 정말 대단하네.”
아레스는 끝없이 이어진 산들을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따. 후크란 산맥이 그랬듯 험준한 산들이 북쪽으로 끝없이 펼쳐진 풍경은 그야말로 그림처럼 보였던 것이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겁니까, 대장?”
숨을 몰아쉬던 초른이 물었다.
“나도 처음 와 보는 곳이라 가늠하기는 힘들지만 대충 열흘 정도 걸리지 않을까 싶은데. 별다른 일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말이야.”
“휴우, 죽었다고 복창해야겠군.”
초른은 인상을 찡그렸다. 아레스처럼 전투 마법사가 아니라 체력이나 지구력 쪽에 투자를 하지 않은 탓에 빠른 이동이 힘겨웠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른 백작성을 출발하고 나서 느는 것은 마법과 관련이 없는 그쪽 스텟밖에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 하룬과 티노는 빠른 걸음으로 주변을 꽤 멀리까지 정찰했다. 구역을 나누어 움직인 덕분에 정찰을 끝낸 두 사람이 중간에서 다시 만난 것은 한 시간 정도가 흐른 후였다.
“어때요?”
“흔적은 모두 네 개입니다. 두 개는 꽤 오래전에 난 것이지고 두 개는 최근에 생긴 겁니다.”
티노의 말에 하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래되었다는 흔적 두 개는 아마도 던전을 발견한 길드들이 남긴 것이리라. 그리고 나머지 두 개는 발트랑 일행과 아반 일행의 것이리라.
‘제대로 정보를 얻은 것인가?’
자신이 둘러본 쪽은 흔적이 두 개였다. 하나는 오래된 것이고, 또 하나는 시간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희미한 것이라 정확히 측정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길은 티노가 둘러본 쪽인 것 같네요. 내가 둘러본 쪽은 흔적이 두 개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예감은 이쪽이 덜 위험한 것 같은데…….”
티노는 하룬이 결정 내리기를 주저하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기다렸다. 비록 나이도 경험도 그보다 부족하지만 하룬의 판단을 믿기로 한 것이다. 자신이 캠프에 있는 동안 후크란 산맥 중서부까지 대규모 인원을 안내한 대장의 역량을 그는 믿었다.
“아무래도 이쪽을 선택하는 것이 낫겠네요. 좀 돌아가는 것이 단점이지만 위험은 적을 겁니다.”
하룬의 눈이 향하는 곳은 폭포가 있는 고원의 남쪽이었다. 티노는 일단 결정이 내려지자 마음이 편한 듯했다. 역시 결정을 내리는 자보다는 따르는 자가 마음이 편한 법이다.
고원지대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일행이 느낀 가장 큰 변화는 바로 날씨였다. 아열대거나 온대에 속하는 테론 제국이지만 이 지역은 특별히 고도가 높고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 때문에 낮 동안은 견딜 만했지만 밤에는 불을 많이 피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상당히 추웠다.
하룬은 매그럼에게도 방어구를 지급했다. 럼프 오크의 가죽은 질기고 단단할 뿐 아니라 보온력도 뛰어나 밤새 한기를 어느 정도는 막아 주었다.
다행히도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고원 중북부의 삼림지대는 트롤과 오크 그리고 맹수들의 서식지였지만 숲이 별로 없고 황무지와 작은 관목들이 띄엄띄엄 있는 남쪽은 위험 요소가 별로 없었다.
밤사이 흑표범과 늑대들이 몇 번 습격하긴 했지만 하룬까지 나설 필요도 없이 일행 중 몇 명이 처리할 수 있었다. 이럴 때는 마법사가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두 명의 마법사는 알람 마법을 꼼꼼하게 설치해서 위험한 존재가 500미터 반경 안에 들어오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척후를 맡은 티노의 이동이 빨라서 일행 전체의 속도도 무척 빠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고도가 높은 산들을 피해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특별한 일은 일주일이 되던 날 오후에 일어났다. 지도상으로 보면 던전이 지척인 곳이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높이 솟은 산들과 파란 하늘이 그림처럼 펼쳐진 곳에 도착했을 때였다.
사람의 허리 위까지 자란 들풀들이 가득한 작은 개활지를 통과하며 산 쪽으로 멀리까지 나가 척후를 보던 티노가 새소리를 냈다.
“초르릉, 호르릉!”
티노의 뒤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따르던 일행은 일제히 몸을 낮추고 주변을 경계했다. 그러고 보니 새소리가 뚝 끊겼다. 후미에 있던 하룬이 몸을 낮춘 자세로 빠르게 이동했다.
앞으로 가 보니 바짝 몸을 낮춘 티노가 코를 벌름거리며 바람이 실어 온 냄새를 맡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저기 우리가 오르려는 산 쪽으로 이어진 이 앞의 숲 속에 상당한 숫자의 뭔가가 포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티노는 대답을 하면서도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뭔가요?”
“너무 진한 냄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체향과 땀 냄새가 섞여 있는데 몬스터나 맹수의 그것은 분명히 아니고 인간도 역시 아닙니다.”
위험을 감지하는 본능이 탁월한 티노의 말이기에 우려가 되었다. 앞쪽을 살펴보니 정면에 있는 산을 통과하지 않으면 깎아지른 절벽 지대나 아니면 옆에 있는 더 높고 험준한 바위산을 넘어야 했다.
돌아갈 길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물론 길을 찾으면 못 찾을 것은 없지만 던전이 위치한 곳이 지척일 거 같아 마음의 여유가 별로 없었다.
“그래요?”
하룬은 의념으로 위신느를 소환했다.
-위신느, 우리 앞쪽에 있는 숲 안에 어떤 존재들이 얼마나 있는지 좀 살펴보고 와 줄래?
-알았어요. 선금부터 받을게요.
쪼옥!
위신느는 이제 버릇처럼 하룬의 다리 쪽부터 위로 올라와 그의 머리칼을 위로 날리며 뽀뽀하고는 앞쪽을 향해 날아갔다.
“바람의 정령입니까, 대장?”
“네, 맞습니다.”
“정말 신기하군요. 예전에 정령사를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그 정령사가 소환한 바람의 정령은 이 정도가 아니라 무척 가볍고 약한 바람이었는데.”
티노는 은근히 하룬의 경지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정령이란 존재는 정령사가 일부러 모습을 드러나게 하지 않으면 해당 정령사만 볼 수 있는지라 일반인들은 그 생김새나 크기조차도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바람의 정령인 경우 그 세기로 경지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나와 계약을 맺은 정령들은 좀 특이한 존재들입니다. 다른 정령사들을 만난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크기나 능력에서는 꽤 차이가 많은 납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보여드리죠.”
“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일전에 바람의 계곡에서 저와 도네이스를 지켜 준 바람 방패를 만들었다는 것을 나중에 듣고 일반적인 정령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기대하겠습니다.”
그사이 한 줄기 바람이 숲 속에서 나와 다시 하룬의 몸을 휘감았다.
-드워프들이에요. 눈에 보이는 숫자는 대략 오백이고 짐이 아주 많아요.
-드워프? 이상한 일이네. 이 고요의 땅은 엘프들의 영역에 속하는 곳이데. 아무튼 수고했어.
하룬은 한 덩이로 뭉쳐 얼굴 앞에 떠오른 바람을 향해 가벼운 키스를 해 주었다. 선금에 해당하는 뽀뽀는 녀석이 하고 보수는 항상 하룬이 키스로 마무리하는 것이 거의 원칙이 되어 버렸다.
“드워프들이랍니다.”
“드워프요?”
티노는 너무 놀랐는지 큰 소리로 반문했다가 황급히 자신의 입을 가렸다.
“이곳은 엘프들의 영역인데 왜 드워프들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정체를 알 수 없었던 흔적은 바로 드워프들이 남긴 것이었다. 크고 깊은 발자국들 말이다.
“드워프들이라면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될 거 같습니다. 인간이나 다크 엘프들과 달리 호전적인 종족은 아니니까요.”
“그러기를 바라야죠. 우리와 같은 길을 가는 걸로 보아서는 목적지도 같을 수 있는데 일단 일행과 의논해 봅시다.”
“네.”
하룬과 티노는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 일행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왔다.
티노로부터 사정을 들은 일행은 드워프라는 말에 크게 흥분했다. 장인 종족으로 알려진 드워프들은 엘프들과 함께 대표적인 이종족으로, 제국 시대의 개막과 함께 인간들에게 쫓겨 오지로 밀려나 세상과 거의 교류가 끊어진 전설의 종족이다.
그나마 제국 북부에는 드워프들이나 엘프들이 거주하는 곳이 별로 없어 거대한 숲이 널려 있는 남부나 서부처럼 자주 보거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없었다.
지적 욕구가 강한 헤니와 타니엘라 그리고 뫼비우스 일행은 잔뜩 흥분했다. 전설의 존재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얼굴이었다.
“일단 그들을 만나는 것이 좋을 거 같아요.”
“말이 통할지나 모르겠네.”
아레스가 문제를 제기했다.
“힘들기는 하지만 가능할 거야. 깊은 숲 속에서 자급자족하는 엘프들과 달리 드워프들은 무기나 아이템들을 판매하고 식량을 사는 식으로 인간 상인들과 거래하기 때문에 그들 중에 대륙 공용어를 알고 있는 이가 있을 거야.”
세상 경험이 많은 티노가 한 말이니 맞을 것이다.
“일단 만나서 그들의 목적을 알아야 해요. 굳이 싸울 일이 없다면 그들과 동행할 수도 있고, 혹은 거래할 수도 있잖아요.”
헤니의 말에 일행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의 말은 드워프가 최고의 장인 종족이며 그들의 손에 만들어진 아이템들은 거의 유니크 등급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쉽지 않을 던전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니 아이템을 구할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룬은 일행의 기대 어린 얼굴을 한번 훑어보고는 결론을 내렸다.
“좋습니다. 일단 그들을 만나 봅시다.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는지 어느 곳으로 가는지 물어보고 우리의 입장을 정합시다. 공연히 적대하지는 않을 테니 일단 나와 헤니가 가겠습니다.”
“대장, 나도 가고 싶은데요.”
“저도요.”
호기심이 유난히 많은 초른과 직업 때문에 아레스가 동행을 부탁했지만 하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체적인 정황을 모르는 상황이니 많이 갈 필요는 없었다.
“그럼 헤드 캠을 끼고 가세요. 좋은 영상 부탁드릴게요. 아직 드워프를 만났다는 정보가 올라온 적이 없으니 제법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아레스의 부탁은 기꺼이 수락했다. 아레스에게 돈이 되는 일이면 하룬 그에게도 좋은 일인 것이다.
하룬은 헤니를 데리고 드워프들이 있는 숲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 중에도 전사가 있어 경계를 하고 있었기에 곧 그들의 종적이 발견되었다.
“부루가다스 카밀이엣츠!”
거대한 나무 뒤, 바위틈에서 나온 드워프 셋이 하룬과 헤니를 막아서고 무기를 겨누었다.
“다맛이슈냐?”
“난 돌풍 용병대 대장 하룬이라고 합니다. 지나가던 길인데 목적지가 같은 방향인 것 같아서 친교를 나눌 수 있을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이, 인간……. 우리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거냐?”
한 전사가 놀란 듯 대륙 공용어로 다시 물었다. 하룬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끄덕였다. 지난번 아반 부녀 덕분에 블랙 오크들과 조우했을 때도 그들의 언어를 알아들은 적이 있었다.
“어느 정도는 가능합니다.”
하룬이 자신들의 언어를 이해하자 그들은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지만 적의는 한결 사라졌다. 다른 드워프들과 교류가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더구나 용병이니 그럴 소지가 어느 정도 있었다.
전혀 예상치 않게 나타난 하룬과 헤니 때문에 창졸간에 드워프어로 ‘당장 그 자리에 서라!’, ‘누구냐?’라고 물었던 전사는 적의 대신 호기심과 약간의 반가움을 담은 시선으로 하룬에게 말했다.
“난 붉은 모루 부족의 전사 돌킨이다. 일단 족장에게 물어보고 올 테니 여기서 대기해라.”
돌킨은 한눈에도 대단한 힘을 가진 용사로 보였다. 다른 두 드워프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돌킨의 키는 헤니와 비슷할 정도였고, 덩치 역시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푼 근육질이었지만 눈빛은 아주 깊고 강렬했다.
“대장, 드워프어는 또 언제 배운 거예요?”
“응? 아! 그런 게 있어.”
“칫! 비밀도 많아.”
헤니는 하룬이 역시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인간들과의 교류가 거의 끊어진 엘프들도 그렇지만 드워프들 역시 깊은 산속에 자리 잡고 인간들과 거리를 둔 지 몇백 년이나 지났던 것이다.
그런데 드워프어를 할 줄 알다니 정말 대단했다. 사실 하룬은 그 연유를 알지 못했지만 헤니에게는 점점 더 대단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하룬과 헤니는 오래지 않아 돌아온 돌킨의 안내로 작은 옹달샘 주변에 모여 식사하는 드워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주변에 수많은 커다란 짐들을 풀어놓은 상태로 멀겋게 보이는 수프 같은 것을 먹고 있는 그들은 하룬과 헤니를 향해 호기심에 찬 시선을 던졌지만 그렇다고 그 정도가 심한 것은 아니었다.
‘인간과 주기적으로 거래를 하던 부족이군.’
그들의 반응으로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돌킨이 그들을 데려간 곳은 임시 천막이었는데 그곳에는 부족장과 원로들로 보이는 드워프 열 명이 식사를 막 끝낸 상태였다.
“반갑습니다.”
하룬이 용병식으로 정중하게 인사하자 잡티 하나 없는 흰 턱수염이 길게 나 있는 늙은 드워프가 두 주먹을 맞대며 인사를 해 왔다.
“다부지어 알쿠마얌 타루가 아불리시윰!”
헤니로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언어였지만 하룬은 그 말을 잘도 알아들었다. 다만 말하는 것은 인간 언어였다.
“붉은 모루 부족을 만나 기쁩니다. 부족장이신 타루가 님에게 인사드립니다. 돌풍 용병대의 대장 하룬이라고 합니다.”
하룬이 드워프어를 알아듣는 것이 확실해지자 부족장과 원로들은 신기하다는 듯 강한 호기심과 함께 호감을 드러냈다.
“알아듣긴 하는데 말은 못 하는 것 같으니 대륙 공용어로 다시 말하지. 붉은 모루 부족을 대표해서 나 타루가가 인사를 하네. 우리말을 할 줄 안다니 정말 신기한 일일세. 내가 좀 오래 산 편인데 우리말을 알아듣는 인간은 처음이야. 상인들이나 용병들은 가끔 만난 적이 있지. 재료 때문에 의뢰를 한 적도 있었지. 일단 이쪽으로 앉게.”
부족장 타루가의 태도는 호의적이었다. 마음을 놓은 하룬과 헤니는 그가 가리키는 자리에 앉았다. 돌킨 역시 돌아가지 않고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직책을 맡은 모양이다.
원로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지만 하룬은 당황하지 않았고 헤니는 도리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원로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자신보다 더 작은 키에 잘 발달된 상체에 비해 하제가 짧아 걸으면 우스꽝스러울 것 같은 체형이며 우락부락한 얼굴이 소설이나 다른 게임에서 보았던 외모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인간들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아온 그들의 눈은 현기가 어려 있었다.
“그래, 이곳에는 무슨 일인가?”
“이곳 고요의 땅에서 던전이 발견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곳을 찾아가던 중이었습니다.”
“아아!”
하룬의 대답에 타루가와 원로들은 시선을 교환하며 뭔가를 깨달은 얼굴이었다. 그러면서 일제히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붉은 모루 부족이 우리가 넘으려는 산 앞에 있는 것을 보고 인사를 청하게 된 겁니다.”
“그렇군. 역시!”
타루가는 뜻 모를 탄성과 함께 하룬과 헤니에게 좋은 정보를 얻어서 고맙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들은 이런 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 발견되었다는 던전은 어느 곳에 있는가?”
“이곳에서 북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는 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만 자세한 위치는 아직 모릅니다. 아마 이 산을 넘으면 모습을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흐음. 위험할 수도 있겠는걸.”
하룬의 대답에 타루가가 뜬금없는 소리를 하며 부족 원로들을 쳐다보았다. 그들 역시 우려 어린 얼굴로 변했다.
“혹시 이 근처에 자리를 잡을 생각인가요?”
“에엣!”
“그걸 어떻게?”
헤니의 물음에 드워프들은 깜짝 놀란 눈치였다. 아직 자신들이 왜 이곳에 왔는지는 언급조차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린 인간 여자가 그걸 알아봤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짐을 보고 짐작했어요. 그리고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확신했고요. 또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에 이 근처에 새로운 주거지를 건설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지요.”
“호오, 대단히 영리한 인간 아가씨로군.”
타루가를 비롯한 드워프 원로들은 헤니를 향해 감탄의 눈빛을 보냈다.
“맞네. 우리는 거주지를 옮기려고 이동하는 중이네. 우리 부족이 지난 400년 동안 머물렀던 ‘라칸의 땅’에는 더 이상 유용한 광물들이 나오지 않는 상태라서 말이지. 우리가 고른 곳은 이 앞산이네. 이 지역은 다크 엘프들의 영역이라서 미리 협상을 했네. 질 좋은 무기를 정기적으로 공급해 주는 조건으로 우리의 거주를 허락받았네.”
라칸의 땅이 어딘지 모르겠지만 초췌하고 피로에 지친 그들의 얼굴로 보아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찾아온 이 땅은 공교롭게도 인간들과 이방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땅으로 변해버렸다.
“위험합니다.”
“뭐가 말인가?”
하룬의 말에 타루가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 연유를 물었다.
“수만, 아니 수십만을 헤아리는 인간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던전의 보물을 차지하려고 오는 만큼 그들 대다수는 강력한 힘을 가진 기사들이나 마법사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더구나 그들 중에는 힘과 폭력을 숭앙하는 작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 산을 포함한 상당 지역이 인간들의 영향권에 들어갈 겁니다. 적어도 던전의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말입니다.”
하룬의 말에 타루가를 비롯한 원로들이 크게 놀랐다. 그중 몇 명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수십만이나 말인가? 그 던전의 가치가 그렇게 큰 거야?”
“마법이 극도로 발달했다는 고대 문명의 마법서가 무려 네 권이나 봉인된 던전입니다. 현시대의 마법이 고대 문명의 작은 파편에서 발아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 던전은 그 이상의 인간들을 욕망의 화신으로 만들어 버리고도 남을 정도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던전을 찾아가는 인간들의 마음 상태와 귀 종족이 가진 아이템과 무기를 생각한다면 자못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걱정해 줄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주의는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타루가를 비롯한 원로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심지어 곁에 있던 동료와 귀엣말을 나누던 것도 딱 끊겨 버렸다.
하룬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예견하는 상황 역시 사실이 될 거라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은 언제나 그들 종족이 가진 장인 기술과 그들이 만든 예술 작품이나 무기를 욕심내 왔다.
대지의 드워프, 숲의 엘프, 창공의 사루피, 강과 호수의 라엘 종족들을 제치고 인간들이 이 세계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게 된 이유가 바로 그 끝없이 불타오르는 욕망에 있다는 것을 이들은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허허허! 우리가 죽을 자리를 잘못 찾아온 모양이군. 엘프들에게 통사정해서 겨우 거주 허락을 받아 낸 곳이건만.”
타루가가 허탈한 얼굴로 독백했다. 좌중의 분위기는 어느새 무겁게 가라앉아 버렸다.
“허어. 엘프들이 우리를 이용한 거로군. 우리가 이 자리를 차지하면 인간들과 부딪칠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야.”
한 원로의 말에 다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들은 쉽게 타협하는 종족이 아니다. 특히 고요의 땅을 지배하는 다크 엘프들은 드워프를 자신들의 영역에 쉽게 들여놓을 종족이 아니었기에 거주 허락을 받은 것에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찜찜했던 것이다.
하지만 돌킨은 그런 분위기를 인정할 수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피를 토하듯 의지를 밝혔다.
“우리 부족을 공격한다면 그 어느 존재라도 그에 상응하는 피해를 입을 겁니다. 우리 붉은 모루 부족의 전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함과 바위를 들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마을의 장인들이 만들어 낸 질 좋은 무기들과 아이템들이 그득합니다. 두려워하거나 의기소침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말에는 뜨거운 의지가 깃들어 있어 듣는 이에게 단단하고 강한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원로들 중 나이가 젊은 몇몇은 얼굴이 밝아졌지만 타루가는 고개를 저으며 매서운 눈빛으로 돌킨을 쏘아보았다.
“인간 기사들의 위력을 모르느냐? 셋밖에 없는 전사장들을 뺀 나머지 전사들은 고작해야 셋 이상이 모여야 인간 기사 하나를 대적할 수 있을 뿐이다. 기사들의 숫자가 수십이 아니라 수천, 아니 수만이 넘는다는데 그렇게 싸우려고만 하면 우리 일족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 일족의 안녕을 책임진 전사장들의 수장으로서 과연 넌 제대로 고민을 하고 의견을 말하고 있는 것이냐?”
돌킨은 지지 않겠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이내 눈을 아래로 깔고 말았다. 그 역시 자신의 말이 다분히 감정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전사장인 만큼 인간 기사들의 역량을 잘 알고 있었다.
“휴우, 더 늦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 비록 폐광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곳이라면 우리를 따듯하게 보살펴 줄 테니까.”
테루가의 말에 원로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정적으로는 돌킨과 같은 원로들도 있었지만 일족의 목숨 값은 그리 하찮은 감정에 맡길 수 없는 것이다. 돌킨 역시 마찬가지였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니 자신의 말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깨달았던 것이다.
“고향이 만일 고요의 땅 밖이라면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을 겁니다. 이미 인간들의 선봉대가 고요의 땅으로 오르고 있습니다. 만일 움직이려면 차라리 엘프의 영역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나을 겁니다.”
하룬의 말에 드워프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곳의 엘프들은 상당히 호전적이면서 폐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 그들을 자신들의 영역 안으로 들여놓을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것이다.
좌중은 깊은 침묵 속에 잠겨 들고 말았다. 드워프 원로들의 눈에는 고민과 좌절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순간 헤니가 말을 꺼냈다.
“어쩌면 방법이 있을 수도 있어요.”
드워프들이 일제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뭔가?”
“길을 만들면 돼요. 인간들이 이 산을 넘지 않고 자연스럽게 지날 수 있는 새로운 길을요.”
그녀의 말에 몇 명은 심유한 눈빛이 되었고, 몇 명은 어리둥절한 눈빛이 되었다.
“무슨 말인가, 인간 여자?”
자책감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은 돌킨이 날카롭게 물었다. 80세가 되어야 겨우 성인식을 치르는 자신들에 비하면 갓난아기와 같은 어린 여자가 놀리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 문제는 여러분이 자리를 잡으려는 산이 던전을 찾아올 인간들이 지나갈 통로라는 점이에요. 그렇다면 산기슭이나 좀 떨어진 곳에 자연스럽게 인간들이 지날 수 있는 통로를 만들고, 여러분은 산에 올라 여러분이 거주하는 흔적을 지우면 해결될 일이라는 말이죠.”
드워프들은 이제야 모두 헤니의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돌킨과 드워프 원로들이 눈을 빛내며 헤니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드워프들 때문에 조금은 겁먹은 눈치였다.
“전 단지 의견을 제시한 것뿐이에요. 자연스럽게 인간들이 향할 통로를 만들거나 기존 통로를 은폐할 재주는 없답니다.”
“좋은 의견이군.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보게.”
타루가가 부드럽게 물었다. 어차피 돌아가도 광물들을 포함한 재료들을 구할 수 없고 당연히 작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천생 장인인 그들의 정체성까지 잃을 수도 있다.
헤니가 곤란한 얼굴로 하룬을 쳐다보았다.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기는 했는데 좀 더 깊이 들어가려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간절한 눈빛에 하룬은 가볍게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인간들에게 쉽게 노출되지 않는 은밀한 주거지의 건설과 함께 먼저 인간들이 이 산을 오르는 대신 자연스럽게 향할 수 있는 길을 만들자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주거지로 정한 이 산은 한눈에 보아도 높고 험한데 그 옆을 지나갈 수 있는 평탄하고 좋은 길이 있다면 굳이 산을 오를 인간은 없을 겁니다. 물론 시간을 줄이거나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산에 오르는 인간들이 있다면 약간의 은폐만으로도 마음이 바쁜 그들에게 주의를 받지는 않겠지요.”
하룬의 보충 설명에 타루가와 원로들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그대의 말이 옳은 것 같군. 우리는 인간들이 이곳을 떠날 때까지 당분간 채광을 위해 파야 하는 동굴에서 생활하면 되니까. 그게 낫겠어.”
원로들과 눈빛을 교환한 타루가는 마음을 정했다.
“현명한 판단입니다. 곧 인간들 중 상당수가 이 길을 통해 던전으로 갈 겁니다.”
하룬은 던전의 위치를 이미 공개했고, 지름길 역시 아레스에게 알려 유저들에게 공개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자신이 알리지 않더라도 장차 던전 위치가 알려지면 자연스럽게 이 길이 발견될 것이다.
“고맙네. 그대들의 의견이 아니었다면 우리 일족은 참화를 면하지 못했을 거야.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인간들의 심성은 개인에 따라서 아주 다양한 거 같군.”
타루가와 원로들이 두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정중하게 인사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우리는 좀 앞질러 가겠습니다.”
조금 쑥스러웠지만 하룬은 기분 좋게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의견을 내놓고 그냥 가버리면 어떻게 하나. 자네들이 말한 새로운 길에 대해 조언이나 도움을 주어야 할 거 아닌가? 우리는 인간들의 판단 양식이나 행동 양식을 모르네.”
역시 나서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 같아도 타루가처럼 그들을 잡았을 것이다. 하룬은 마땅찮은 눈길로 헤니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찔끔한 얼굴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돕고 싶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 인원이라 봐야 겨우 일곱 명밖에 되질 않습니다. 더구나 지금만 해도 이천이 넘는 인간들이 다른 길을 통해 우리보다 먼저 던전으로 향했습니다.”
하룬은 자신들의 처지를 드러내며 미안해하는 얼굴로 그들의 부탁을 거부했다.
타루가와 원로들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위험은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데 자신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고, 더구나 기본적인 대책 외에는 구체적인 사항을 궁리하지도 못했다.
‘이들을 잡아야 한다.’
모두의 마음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당장 돌킨이 등에 멘 도낏자루를 잡았다. 강제로라도 그들을 억류할 생각이었지만 타루가의 차고 매서운 눈빛이 그의 손길을 막았다. 돌킨은 그 눈빛이 두려운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곧 고개를 든 돌킨은 어느새 하룬의 손가락에 끼워진 여덟 자루의 단검을 보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분명히 빈손이었는데 그 짧은 사이에 단검들이 생겨났다는 것은 그만큼 빠른 손을 가졌다는 말이다.
‘빌어먹을. 부족장님의 말씀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 마나의 유동까지 느껴지는 것을 보니 익스퍼트 실력인데 내가 너무 성급했어.’
자신과 전대 전사장들 그리고 부족장 타루가를 제외한 나머지 원로들은 장인이었던 관계로 마나가 실린 비수들을 절대로 피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그의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착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필사적으로 궁리하던 한 원로가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다급한 마음에 혀로 마른 입술을 적시던 한 원로에게 이 난관을 타개할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잠깐! 그대들은 분명히 용병이라고 하지 않았소?”
“맞습니다.”
하룬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럼 의뢰를 하겠소.”
“의뢰요?”
의뢰라는 말에 하룬의 단호했던 얼굴이 조금 흔들렸다. 용병이라면 의뢰에 무의식중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부족이 만들거나 모은 것들 중에 쓸 만한 아이템을 줄 수 있소, 안 그렇소, 타루가 족장?”
그 말에 헤니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드워프의 아이템은 정말 굉장하다는 것을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마법 무구만 해도 드워프가 세공한 것은 같은 등급이라도 그 옵션이나 기능이 확 달랐다.
타루가가 반색하며 나섰다.
“밀타인 원로의 말대로 아이템을 대원 수대로 주겠소.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으로.”
부족장 타루가의 말이 이어지자 하룬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인간들에게는 보물로 통하는 드워프제 무구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에 하룬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흠, 일단 대원들과 상의를 좀 해야 할 것 같군요. 던전의 보물 때문에 그들이 어떤 결정을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룬이 일단 결정을 미루었다. 사실 돌풍 용병대원들이야 던전에 욕심이 크지 않기 때문에 그의 결정에 바로 따를 테지만 나머지 사람들이 문제였다. 그들은 지금 던전에 온 신경이 다 쏠려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 말을 곡해한 것인지 타루가가 말을 덧붙였다.
“우리의 의뢰를 들어주면 자네 용병대가 던전을 탐사하는 데 도움을 주지. 던전이라면 아마도 돌을 깎아 만들었거나 벽돌 혹은 흙으로 만들었을 텐데 그런 구조물에 관한 한 우리 종족을 따라올 존재는 없을 걸세.”
“흐음.”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사실이 그랬다. 안에 어떤 장치나 트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드워프들의 건축 지식은 전설로 회자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영상에서 본 던전이 촬영자의 말처럼 거대한 피라미드가 맞는다면 전문가의 지식과 힘 그리고 경험이 필요할 것이다.
하룬은 미소 지으며 그 제안을 수락했다.
“좋습니다. 거절할 수 없도록 만드시는군요. 그럼 의뢰를 받아들이겠습니다.”
“크하하! 좋아!”
타루가 역시 흡족한 얼굴로 대소를 터트렸다. 이제까지 근심과 우려로 가라앉았던 실내가 모처럼 밝아졌다.
“그럼 우리 일행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다녀와서 자세한 방안을 의논하도록 하지요.”
“그러세. 우리도 준비하겠네.”
타루가와 원로들은 한시름 놓은 얼굴로 하룬과 헤니를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