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들이》
아레스 일행이 던전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로그아웃을 하자 뫼비우스가 눈치를 보다가 결심한 듯 하룬에게 다가왔다.
“대장, 저도 그 정보를 좀 거래하면 안 될까요?”
뫼비우스의 얼굴을 보니 간절한 표정이다. 하긴 지금 가진 것이 거의 없을 것이다. 현실에서건 게임에서건 말이다.
하룬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던전의 위치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주었다.
“고맙습니다, 대장. 제대로 거래해서 제대로 챙겨 오겠습니다.”
뫼비우스는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슈미르 일행과 함께 로그아웃했다. 그 모습을 부러운 듯 보고 있는 헤니도 챙겨야 했다.
“헤니도 고생했으니 현실에 다녀와.”
“헤헤. 고마워요, 대장.”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헤니는 뜻밖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깡충거리며 하룬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애인데.’
그래도 하는 짓이 예쁜 헤니였다. 그렇기에 티노는 물론이고 도네이스도 그녀를 여동생처럼 챙겼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던전으로 향하고 싶었지만 이 인원으로 일찍 그곳에 도착한다고 해서 특별히 유리할 것은 없었기 때문에 하룬 역시 현실에 다녀오기로 했다.
그간의 여행으로 많이 지친 상태였기에 나머지 사람들은 근처에서 휴식을 하기로 했고, 하룬은 나부루 부족 마을에 볼일이 있다는 핑계로 빠져나왔다.
현실로 돌아온 하룬은 처음에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헷갈렸다. 캡슐을 나온 그는 천장의 유리를 통해 환한 빛이 들어오는 실내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그나마 벨이 근처에 있다가 달려오지 않았다면 황당했을 것이다.
“벨, 어떻게 된 거야?”
“호호호! 오빠는. 우리 이사 왔잖아요.”
“아, 그렇지!”
이사한 것을 잠시 잊었던 탓에 너무 생소한 주변 환경에 크게 놀랐던 것이다. 그때 또 다른 여인이 실내로 들어왔다. 성숙하면서도 묘한 분위기가 풍기는 그 여인은 아즈만이었다.
“마스터, 나오셨군요.”
“으응? 아! 아즈만이구나.”
“네. 벨과 함께 연구 기지를 정리하던 참이었어요.”
“연……구 기지?”
“네. 이곳이 연구 기지잖아요.”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난다. 무엇을 위한 연구 기지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집채만큼 큰 컴퓨터가 아즈만으로 변환했던 것과 이곳이 다양한 시설을 갖춘 일종의 연구 기지라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다.
‘너무 게임만 하면 안 되겠구나.’
하고 비욘드에 몰입하다 보니 이젠 그곳이 현실이고 이곳이 게임 세상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공지능 컴퓨터들이 이렇게 인간형으로 변환되어 살아 움직이는 것 역시 현실감을 저해하는 큰 요소였다.
“안내를 해 드릴까요?”
“그래. 내 집인데 일단 뭐가 있는지는 알아야겠지?”
하룬은 어떤 시설들이 있는지 궁금했다. 기지라는 명칭으로 보아 숨겨진 시설들이 굉장할 거 같은 기분이 들어 기대가 되었다.
“오빠! 그 꼴로 어딜 가려고.”
“응? 내 꼴이 어때서?”
벨의 황당하다는 시선에 자신을 내려다본 하룬은 자리에서 펄쩍 뛰다가 천장에 머리를 찧고 말았다. 현실감각이 떨어진 탓에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도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화장실 어디야?”
아랫도리를 손바닥으로 가린 하룬이 벌게진 얼굴로 묻자 벨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아즈만은 언제부터인가 얼굴이 빨갛게 변해 하룬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화장실로 후다닥 뛰어 들어간 하룬이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는 벨이 옷을 가져다주었다.
“미안해, 아즈만. 아즈만을 의식하지 못했어.”
“아니요.”
목덜미까지 붉어진 아즈만은 여전히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물론 그것은 하룬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인공지능 컴퓨터라지만 일단 보이는 것은 아름다운 여성체이니 의식이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그녀들이 비록 인공지능체라지만 벨과의 생활을 통해 인간과 거의 똑같은 감수성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런 기분은 더했다.
“자, 일단 내 집 좀 구경해 볼까?”
“네, 마스터. 제가 안내할게요.”
하룬은 벨과 함께 아즈만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있는 곳은 연구 기지가 맞았다. 호숫가 바로 옆에 있는 거대한 바위로 위장된 지상의 건물은 약 60제곱미터의 넓이에 태양열과 수소를 이용한 발전 시설이 설치되었고, 곳곳에 방어 시설들이 있었다. 설명을 듣긴 했지만 각각의 무기들이 어떤 것들인지는 쉽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다만 주로 파동포 종류라는 것과 에너지 파동을 이용해 목표를 파괴하거나 살상하는 거라는 사실만 제대로 이해했을 뿐이다. 그 모든 무기들은 에너지의 발전과 축적 기술 그리고 충전 문제 때문에 현재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지하는 총 스물네 개 층으로 이루어졌는데 주거 시설은 지하 1층과 12층 그리고 23층의 세 곳에 마련되었다. 바위 옆에 따로 입구가 나 있는 지하 1층까지는 외부에서 열 감지 카메라로 파악할 수 있었지만 각별한 회피 장치와 시설이 있는 지하 2층부터는 직접 들어오지 않고서는 전혀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없다고 했다.
다른 층들은 약 200제곱미터의 엄청난 넓이로, 각종 실험실과 작업실들 혹은 창고들이 위치해 있고, 현재는 지하 2층과 3층까지만 가동되는 상황이었다.
지하 2층은 아즈만과 벨의 공동 작업실이 있고, 지하 3층은 기존에 만들어진 물품들이 있다고 했다.
“오빠, 부족한 재료들이 너무 많아요.”
벨의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보니 뭔가에 심취해 있었던 얼굴이다. 이렇게 뭔가에 안달이 난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래? 일단 바란 형에게 구입한 재료들부터 가져오라고 연락해야겠구나.”
“빨리요. 제일 급한 것이 에너지 확보인데 발전 시설을 본격적으로 가동하려면 몇 가지 부품들이 꼭 있어야 해요.”
“알았다.”
특히 지하 3층에는 그간 아즈만이 만들었다는 사이보그와 각종 용도의 작업 로봇들이 널려 있었다. 에너지가 없어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했다.
배움이 짧은 하룬으로서는 벨과 아즈만의 설명을 들어도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다만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현재는 지식과 기술 부족으로 더 이상은 만들지 못하는 각종 사이보그와 로봇들에 대한 연구와 생산 그리고 실험을 하는 기지였다는 점이다.
유니온 초기 시절에 건설된 이 연구 기지는 종말 시대부터 이어진 인조인간들에 대한 관련 지식과 기술을 모두 모아 야심차게 시작했으나 본격적으로 가동도 하기 전에 불행한 일을 겪었다.
한때 유행처럼 번졌던 상대 유니온의 과학자들을 암살하거나 연구 시설과 자료들을 파괴하던 불행한 시기에 관련 연구 인력들이 피살당하거나 행방불명되고, 그 서류마저 유실되어 자연스럽게 유니온에서 잊혀 버린 곳이라고 했다.
재충 시설을 구경한 하룬은 지하 1층의 거주 공간으로 돌아왔다. 방만 다섯 개에 넓은 거실과 벨의 본체인 캡슐이 놓인 특수실이 있는 거주 공간은 안락하고 편안했다. 식구가 하나 더 늘어서 그런지 제대로 사는 것 같았다.
벨과 아즈만이 식사를 준비하겠다고 시시덕거리며 주방에서 움직이는 사이 하룬은 거실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호수와 연결된 천장 한쪽은 유리로 만들어져서 채광이 좋았다. 거기에 더해 각양각색의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장면이 누우면 바로 보이니 정말 이색적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해란과 영상 통화를 시도했다. 마침 그녀들은 게임에 접속해 있었기에 바란이 얼굴을 보였다.
“하룬, 오랜만이네.”
“네, 형. 이사를 해서 연락을 드렸어요.”
“그러니. 한다더니 했구나. 그럼 이제 그곳으로 물건을 가져다주면 되는 거니?”
“네. 부탁한 것들은 어때요?”
“음, 재료둘은 거의 다 구했다. 나인이가 앞장서서 구한 덕분에 빠른 시간 내에 구할 수 있었어. 다른 기계류들도 대부분 구했고, 몇 개는 주문했는데 아직 완성이 안 됐구나.”
다행이다. 현실 시간으로는 그렇게 많이 흐르지 않았는데 나인이 힘을 많이 쓴 모양이다.
“형, 더 필요한 물품들은 주소와 함께 메일로 전송할 테니 잘 부탁드려요.”
“알았다. 그런데 언제 배달할까? 나인이네 마을 사람들이 네가 부탁한 재료 때문에 나인이와 함께 몇 명 들어와 있어서 이참에 옮겼으면 좋겠는데.”
“네, 저도 좋아요. 당장이라도 가능해요.”
“오케이! 그럼 그렇게 하자. 바로 움직이마.”
바란은 벨이 기뻐할 말을 하며 통신을 끊었다.
아즈만이 거실 한쪽의 햇볕 좋은 공간을 이요해서 수경 재배한 신선한 채소로 만든 샐러드와 빵으로 식사한 하룬은 둘을 데리고 이사한 집으로 향했다. 제대로 청소를 해야만 했다. 그래야 손님을 받을 테니 말이다.
“오빠, 신나!”
벨은 자신이 필요한 재료들이 온다는 사실에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청소를 하면서도 연방 폴짝거렸다.
“저렇게 좋을까?”
하룬의 말에 유리창을 닦던 아즈만이 말했다.
“후후, 보기 좋은걸요. 마스터, 벨과 저는 어머니 가이아에게 지적 자아체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주인으로 모시는 분을 위해 유용한 것들을 만들어내고 완성하는 것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과 만족감을 느낀답니다. 저건 당연한 반응이에요. 저도 벨처럼 마스터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고, 할 수 있다면 가족으로 인정받았으면 좋겠어요. 벨이 너무 부러워요.”
아즈만은 자신과는 다르게 여동생으로 인정받은 벨이 부러운 눈치였다. 하룬은 그녀 역시 가족으로 대할까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너무 아름답거든. 살 떨리도록 매력이 넘치는 아즈만은 절대로 가족으로 여길 수 없을 거 같아.’
소녀 같은 외모의 벨에 비해 아즈만은 늘씬한 키에 환상적인 몸매 그리고 고혹적인 분위기와 매혹적인 미모를 가졌다. 보기만 하고 곁에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은 아즈만을 가족으로 여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하룬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아즈만은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는 그를 향해 쓸쓸한 미소를 보내고만 있었다.
청소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미 한 번 대충 청소를 한 것도 있었지만 아즈만이 괴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녀는 지치지 않는 체력과 가구를 한 손으로 드는 괴력으로 금방 실내를 번쩍거리게 만들었다.
청소가 대충 마무리되어 가는 것을 확인한 하룬이 외출할 준비를 했다.
“나 옆집에 들렀다가 마트 다녀올게.”
하룬은 벨과 아즈만에게 집 청소를 맡기고는 집을 나섰다. 먼저 옆집부터 들렀다. 이른 시간이라 게임에 접속하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던전 상황이 궁금했다.
역시 게임에 접속하고 있었는지 홈 컴에 자신의 방문을 알리고 나서 한참이 지나야 문이 열렸다.
“어서 와라.”
진수가 반바지만 입은 채로 그를 반겼다.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거실에 제법 가구가 들어차있어 사람 사는 집 같았다. 벽에는 스크린 터치 컴퓨터까지 설치했고, 집 안 곳곳에 돈을 들인 티가 났다. 역시 사람은 돈이 있고 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수가 음료를 내오는 사이 빠르게 집 안을 구경했다. 구조는 그의 집과 동일했지만 가구나 인테리어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원래 진수는 이렇게 꼼꼼한 성격이었나 보다. 전의 그 작은 집에 살 때도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집 안을 꾸미고 그 귀한 화초까지 키웠던 진수였다.
따사로운 햇빛이 들어오는 거실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차를 마셨다.
“어때?”
“근사한데요.”
“그렇지. 신경 좀 썼어.”
히죽거리며 웃는 폼이 이런 집을 가지게 된 것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것 같아 하룬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네 집은 어때?”
“저야 뭐, 알잖아요.”
하룬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넌 꾸밀 줄도 치장할 줄도 모르니. 그래도 사람 사는 집은 온기가 있어야 해. 나처럼 친구를 불러들이든가 아니면 집안일 도와줄 사람이라도 구해라.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나은 법이다.”
진심이 담긴 말을 들으니 괜히 가슴이 뭉클해진다.
“생각해 볼게요.”
“청소는 다 한 거니?”
“아니요. 오늘 아는 사람들이 오기로 해서 겨우 하고 있어요.”
아는 사람이 방문한다는 말에 진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가 알기로 하룬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눈길이 무척 부담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신을 은둔자로 생각하는 것 같아 조금은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일 때문에 알게 된 사람들이에요.”
“그래. 어쨌든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 게 좋아.”
“던전은 어때요?”
“음, 던전. 여전하지, 뭐. 선발 세력들이 던전을 용케 찾기는 했지만 엘프들의 숫자나 실력과는 차이가 너무 심해서 그들을 뚫고 던전 안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니까. 매일 산발적인 도발과 전투 그리고 후퇴가 이어지고 있어.”
“엘프들 숫자가 많은가 보네요.”
“많지. 내가 대충 눈으로 확인한 것만 해도 어림잡아 오만 이상이야.”
“후아! 정말 많군요.”
고요의 땅에 거주하는 엘프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에 진수에게 대충 들은 엘프 전사들의 전투력을 생각하면 삼십만으로 구성되는 제국의 일개 군단에 맞먹는 전력이다.
다행이다. 이렇게 되면 던전을 먼저 발견한 치들의 이득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물론 각 길드의 배후 세력이 엘프들을 압도하는 많은 실력자들을 그곳에 파견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곳까지의 험난한 지형과 위험을 생각하면 단일 세력으로는 엘프들을 물리치기 힘들 것이다.
“유저들을 포함해서 적어도 십만 이상은 모여야 제대로 공략이 가능할 거야. 그들이 특유의 마법 결계는 물론 지형적으로 수성의 이점까지 가지고 있으니 이십만은 되어야 확실하게 던전은 차지할 수 있을 거야.”
“대단하네요. 당분간은 엘프들을 어쩔 수 없겠는데요.”
“그렇지. 난 잘 모르겠지만 내가 촬영해 온 영상 중 일부를 본 친구들도 그런 소리를 하더라. 인간들의 경우 제국이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이해득실에 따라 세력들이 경쟁하는 구도에서는 삼십만 이상이 모여도 그들을 물리칠 수 없을 거라고.”
힘을 결집해도 될까 말까한데 힘이 나뉘고 결집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말이 옳았다.
“참, 너한테 줄 게 있어.”
“뭔데요?”
“잠깐만.”
진수는 자기 방으로 가서는 외장 메모리칩을 하나 들고 왔다.
“뭐예요?”
“후후, 내가 두더지처럼 숨어 있기만 한 건 아니지. 간간이 벌어지는 전투 장면을 촬영한 칩이야. 어제는 다급했는지 세 길드가 연합해서 엘프들과 싸우는 것을 가까이 가서 직접 촬영했다. 대낮의 전투라서 박진감 넘치고 생생해서 볼만할 거다. 거기에 엘프들의 마법과 궁술의 위력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영상이지.”
“기대되는데요.”
하룬은 무엇보다도 엘프들의 정령 마법이 궁금했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지도를 받지 못하고 싸가지를 얻은 덕분에 정령을 부리게 되었기에 제대로 된 정령 마법은 알지 못했다. 사실 던전의 보물들도 흥미가 있었지만 그것보다 엘프들을 만나 정령 마법을 제대로 보고 싶은 생각이 더 컸다.
“혹시 이번 것도 방송할 수 있을까?”
“아마도요.”
아니, 확실히 대단한 반응을 얻을 것이다. 초대박까지는 몰라도 대박은 확실하다. 전설의 엘프들과 유저들의 생생한 전투 화면은 누구나 보고 싶어 할 것이다.
“이번에 보상받으면 안 줘도 된다.”
“에이, 그럼 안 되죠. 형이 들쥐와 나무뿌리만 먹으며 힘겹게 촬영한 건데요.”
“아니야. 난 네가 나중에 줄 그 돈만 있어도 충분해. 정보 상인들에게 이런 영상을 팔아서 돈을 번 것으로 아는 친구들에게 적당히 인심을 쓰면서 내가 좋아하는 게임도 원 없이 할 수 있게 되어 더 이상 바랄 게 없거든. 아니, 하나는 있다. 싸가지 없는 강혜리 그년 패거리는 꼭, 반드시 박살 내고 말 거다.”
욕심이 없는 진수다. 이 정도에서 만족하기에 그의 얼굴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만족을 아는 인간은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는 말이 맞나 보네.’
워낙 인간관계가 좁아서 아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그래도 돈 욕심은 돈이 많을수록 더욱 커진다는 것쯤은 하룬도 알고 있었다. 자신만 해도 게임을 시작하기 전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강해졌지만 아직도 만족할 수 없어 갈증이 나는 상태였다.
“네 덕분에 이렇게 좋은 집에서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감사 인사를 받으며 살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는데 더 바랄 것이 뭐가 있겠니? 비전 없는 현실 대신 평생 게임하며 내가 좋아하는 모험을 즐길 수 있게 된 것만으로 난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
“그게 다 형 덕분이죠, 뭐.”
“아니야! 다 네 덕분이야. 내가 그러면 그런 줄 알아. 그런데 손님 맞을 준비는 된 거니?”
하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같이 마트나 갔다 오자. 나도 먹을거리도 좀 사야 하니 운동 삼아서 같이 가자.”
하긴 적당한 운동은 필수이니 그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D구역의 마트로 갔다.
“아! 요즘 유니온은 어때요? 통 밖에 나오질 않아 궁금하네. 아는 사람으로부터 최근 배리어가 많이 약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너도 들었구나. 나도 친구들한테 들었어. 최근에 배리어가 약해져서 가끔 에너지 공급이 끊기는 곳이 발생하나 봐. 그 틈으로 사막 전갈들 같은 독물들과 하르크가 심심치 않게 들어와 유니온 공기가 흉흉하대. 특히 F구역의 피해가 큰가본데 방송에서는 아예 보도도 되지 않고 있어. 행여 유언비어 유포죄로 끌려갈까 봐 쉬쉬하지만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밤이 되면 아예 밖에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나 봐.”
“그렇구나.”
“너도 웬만하면 밤에는 외출할 생각 하지 마라. D구역도 위험하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으니까.”
“방위군들은 뭐하고요?”
“몰라! 그 작자들이야 원래 사고가 나면 10분이 지나야 출동하는 놈들이니까. 은밀하게 도는 소문에 의하면 방위군들 중 특수군이 비욘드를 하고 있다더라. 비욘드에 뭔가 있긴 있나 봐.”
‘아마 나처럼 현실에서 사용이 가능한 스킬들을 배우거나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서겠지. 그도 아니면 발트랑이나 아반 부녀처럼 마법서를 얻기 위해서든지.’
아는 것이 있지만 추측에 불과하니 진수에게 당장 이야기를 해 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두런두런 유니온의 현실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마트로 향했다.
“이런, 오지게 크네. F구역 마트와는 차원이 다른데.”
구역이 달라서 그런지 벌써 물건의 수량이나 품질부터 달랐다. 비록 유니온법이 통상적인 경우한 단계 위 지역까지는 통행이 가능하지만 마트는 해당 거주 지역의 것만을 이용해야 했기에 하룬이나 진수는 처음 오는 곳이었다.
“제길, A구역에 있는 마트 물건들은 더 좋을 거 아니야.”
“그렇겠죠.”
F구역보다는 삶이 여유로워서 그런지 이곳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옷차람도 훨씬 더 낫고, 얼굴에도 어느 정도의 여유가 묻어 나왔다.
진수는 빌붙어 사는 친구들과 자신이 먹을 식료품들과 주류를 잔뜩 샀다. 그래도 마냥 퍼 주는 것이 아니라 매달 일정 액수를 받는다고 하니 영 맹탕은 아니었다. 하룬 그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진수는 큰돈을 가지고도 크게 티를 내지 않았다.
하룬은 벨이 말한 대로 식료품을 구입했다. 또다시 몇 달을 버틸 분량이라서 커다란 자루로 네 개나 사야만 했고 그 대금도 엄청났다.
아마 바란이 가져올 식료품을 합하면 어마어마할 것이다.
“이게 다 네가 먹을 거냐?”
진수는 뜨악한 얼굴이었다. 지난번 마트에서도 이 정도를 구입한 것을 봤던 그로서는 이해가 안 갔을 것이다. 사실 진수나 하룬은 먹는 것에는 그리 욕심이 없는 편이었다.
하룬은 이참에 벨과 이즈만의 존재를 진수에게 알리기로 했다.
“사실은 같이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누구? 내가 모르는 친구가 있었어?”
“아니요. 양부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인데 어찌하다 보니 같이 살게 됐어요.”
“음, 캡슐을 선물로 보냈다는 그 양부 말이지?”
“네.”
“네가 스트레스만 받지 않는다면 누군가와 같이 사는 것도 좋아.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같이 살다 보면 부딪치기도 하고 기분도 상할 일이 다반사지만 그게 사람 사는 모습이니 서로 양보하고 정을 주다 보면 의지할 수 있고 힘들 때는 위안도 될 거야.”
사람 좋아하는 진수다운 조언에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벨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사는 것이 재미있다고 느끼기 시작한 하룬이라 그 말이 가슴에 쏙쏙 들어왔다.
“그나저나 너 정말 많이 변했다.”
“뭐가요?”
“체력이 엄청 좋아진 거 같아. 그 무거운 자루를 네 개나 들고도 걸음이 가볍잖아. 난 이거 하나를 간신히 드는데 말이야. 거기다 너 체격도 좋아지고 은근히 멋있어진 거 아니?”
하룬은 대답 대신 실소를 지었다. 진수의 말이 칭찬으로 들려서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네 개는 고사하고 하나도 제대로 들지 못했을 것이다. 무게가 30킬로그램이 넘는 자루 네 개가 이제는 가뿐하다.
“나도 너한테 자극받아서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있다만 넌 정말 불가사의하다. 하긴 네 키와 골격을 보면 힘과 체력은 타고난 것 같은데 워낙 먹는 것도 부실하고 제대로 운동을 하지 못해서 그동안 그렇게 비실거렸나 보다.”
‘그런가?’
진수의 말을 들이니 그것도 일리가 있었다. 마트 1층의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보였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얼굴은 광대뼈가 흉하게 나올 정도로 말랐던 예전과 달리 적당히 살이 붙어 이제는 제법 봐줄 만한 용모가 되었다. 그리고 낡은 외투 안에 입은 얇은 티를 통해 잘 발달된 근육이 보였다.
끊임없이 강함을 추구한 결과물이다. 그의 눈물과 땀 그리고 가열 찬 노력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에 하룬은 충분히 만족했다. 사실 외모야 뫼비우스처럼 타고나지 않은 이상 타인에게 혐오감이나 동정심을 유발할 정도만 아니면 별 상관없다.
하룬과 진수는 소소한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누구는 의미 없는 시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인간관계가 극도로 좁았던 하룬에게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나중에 밥 한번 같이 먹자.”
집 앞에 도착한 진수가 들어가기 전 작별 인사를 했다.
“그래요, 형. 일단 빨리 형이 있는 곳으로 갈게요.”
“그래. 요즘은 들쥐 잡는 데 귀신이 되어서 그렇게 배를 곯지는 않는데 쥐를 먹다 보면 내 꼴이 너무 한심하더라.”
“하하하!”
갑자기 쥐를 뜯어 먹는 모습이 연상되어 하룬이 소리 내어 웃었다. 이젠 부자가 되어 원하는 것은 뭐든지 구해서 먹을 수 있는 진수가 게임에서는 들쥐를 먹고 있는 것을 생각하니 너무 우스웠다.
“하하하, 그래도 현실이 여유 있으니까 그렇게 비참한 기분은 아니야.”
“아무튼 빨리 갈게요. 혹시 모르니까 열심히 촬영이나 해주세요.”
“그래. 그런 거라도 해서 너에게 은혜를 갚아야지.”
진수와 하룬은 다음에 던전 근처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고는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가족과 같은 친군한 사람이 이웃에 살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했다.
지글지글. 보글보글.
아즈만과 벨이 레시피를 보며 음식을 하는 동안 하룬은 말끔해진 거실에 앉아 두 사람이 음식을 만드는 광경과 소리를 눈과 귀 그리고 코를 통해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게 사는 건가?’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과 함께 진수가 한 말이 떠올랐다. 마음에 드는 사람들과 함께 한 공간을 공유하고 부대끼며 사는 것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벨과 아즈만이 완벽한 인간은 아니니 부대끼며 사는 것과는 좀 달랐지만 여동생으로 정을 주어 왔던 벨과, 거의 이상형에 가까운 아즈만과 이렇게 지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아즈만은 이전에도 요리를 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기지가 폐쇄되기 전에는 가끔 연구자들이 그녀에게 음식을 부탁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손도 무지 빠르고 한꺼번에 서너 가지 요리를 금방 만들어 냈다.
가구가 없어 썰렁했던 거실에 길게 놓인 판자 상에 어느새 종류별로 음식이 빼곡하게 들어차고 있었다. 이전 종말 시대에서 유래된 음식들은 한식이라고 부르는 것들로, 주로 신선한 채소와 고기 그리고 각종 향신료로 맛과 향, 색감까지 만족시키는 뛰어난 요리들이었다.
평소 먹는 것에 별 관심이 없던 하룬마저 침이 고이고 코를 벌름거리게 만드는 요리들이 그의 눈을 유혹하고 있었지만 손님들을 생각해서 꾹 참았다. 벌써 정오인데 바란은 아직 소식이 없었다.
‘어서 와야 이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을 시식할 텐데.’
자신도 모르게 조급증을 보이는 하룬의 심경을 알기라도 한 듯 차임벨이 울렸다.
“왔다!”
하룬은 반가운 마음에 밖으로 뛰어나갔다. 정원에 가득 쌓여 있던 먼지와 모래들은 어느새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아무튼 아즈만의 능력은 대단했다.
“어서 와요, 형.”
“하하, 집이 꽤 좋네.”
바란은 혼자가 아니었다. 다른 때라면 한창 게임하고 있을 헤란과 세란도 함께였다.
“우리 왔어.”
“네 나이에 이런 2층 집이라니. 정말 몸만 오면 되겠네. 신혼살림 차리기에는 딱이야.”
세란은 여전히 농담을 하며 말끔하지만 살풍경한 모습의 정원을 유심히 보았다.
“어서들 와. 어, 나인도 왔네. 반가워, 들어와. 로수 님도 왔군요. 들어오세요.”
나인과 로수를 비롯해 낯이 익은 영흥 마을 전사들이 모두 왔다. 바란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의 어깨에는 엄청난 크기의 짐이 들려 있고, 일부는 부피가 너무 커서 카트에 실려 있었다.
하룬은 짐을 받아 정원 한쪽에 쌓아 놓고는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화아! 이게 다 뭐야?”
“세상에! 이게 다 음식이야?”
집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넓은 거실을 가득 채운 음식에 눈을 고정했다.
이런 요리는 이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바란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비록 힘든 대장장이 일을 하지만 돈은 꽤 잘 버는 편이고 사람 만나는 것을 즐기는 바란이라 많은 음식들을 먹어 볼 기회가 있었지만 이런 요리들은 처음 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들은 생소한 찌개류부터 시작해 각종 채소를 이용한 샐러드와 인공 고기를 이용한 무침, 회 그리고 전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다. 다양한 색감과 향을 가진 음식들이 사람들의 이목을 단숨에 휘어잡았다.
“자, 모두 앉으세요.”
사람들은 홀린 듯 음식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자리를 잡았다.
“불고기도 있어!”
누군가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건 육회야.”
“이건 신선로인가? 종말 시대에 유행했다는 귀한 요리로 알고 있었는데…….”
저마다 탄성과 경악성을 토해 내며 음식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히 고기는 무척이나 귀한 음식 재료이다. 천연 육류가 아닌 인공 육류도 가격이 비싸서 쉽게 먹지 못하는 것이다.
유니온에는 S나 A구역의 특별 주민들을 위한 목장도 있지만 대부분은 대규모 수경 재배를 통해 키운 콩류를 이용해 인공 고기를 만들었다. 당연히 그 맛과 질감은 방목한 가축으로부터 얻은 고기와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하룬은 흡족한 얼굴로 사람들의 주위를 끌었다.
“잠시만 소개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이 하룬과 그 곁에 있는 두 여자에게 향했다.
“이쪽은 벨, 내 동생입니다.”
“하룬 오빠 동생 벨이에요. 저희 집에 오신 걸 환영해요. 맛있게 드시고 즐겁게 노시다 가세요.”
벨이 귀여운 표정으로 인사했다. 이미 화상을 통해 몇 번 본 적이 있는 바란 남매가 눈으로 인사했다.
“이쪽은 내 친구인 아즈만입니다. 오늘요리를 기획하고 감독에 직접 조리까지 한 훌륭한 요리사이기도 하지요.”
“아즈만이라고 해요. 마스터의 손님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많이 드시고 즐거운 시간 되시면 좋겠습니다.”
아즈만은 앞치마를 두른 상태에서 일행에게 인사했다. 하룬의 이마까지 오는 큰 키와 늘씬한 몸매 그리고 고아한 품격이 느껴지는 미소가 감도는 아름다운 미모에 바란을 비롯한 남자들의 눈이 요리를 봤을 때보다 더 커졌다.
하지만 해란과 세란의 눈은 세로로 길게 늘어났다. 이십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아즈만의 미모가 너무 뛰어날 뿐 아니라 기품도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하룬을 향해 정겨운 눈길을 보내는 것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마스터라고요? 무슨 마스터죠?”
음식 대신 아즈만에게 주의를 돌린 해란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은은한 청색 빛이 흘러나오는 윤기 있는 긴 검은 머리에 오뚝한 콧날, 깊고 맑은 큰 눈, 붉은 입술과 작은 보조개를 가진 아즈만의 미모는 한순간 실내 남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정도로 뛰어났다.
그뿐이 아니었다. 180센티가 넘는 큰 키와 들어가고 나올 데가 확실한 볼륨 넘치는 몸매에 성숙한 여인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기품은 부드러우면서도 은은한 매력을 풍겨냈다.
‘이런 여자가 왜 하룬 곁에 있는 거야? 게다가 마스터라니, 무슨 소리지?’
아즈만은 대답 대신 빙긋 미소 지으며 하룬을 돌아보았다. 대답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하룬으로서는 난감한 일이다. 있는 그대로 설명한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 게 있어. 이 요리들은 모두 아즈만과 벨이 만든 거야. 일단 시장할 테니 먼저 먹고 나서 천천히 이야기하지요.”
하룬은 서둘려 몇 사람의 의문을 차단하고는 바란에게 음식을 권했다.
“응, 먹어야지. 그런데 색깔도 그렇고 모양도 그렇게 예술 작품을 망치는 것 같아서 영 불편하네.”
“하하하, 일단 눈으로 감상했으니 이제는 혀와 입으로 맛을 봐야죠.”
하룬이 먼저 불고기를 접시에 담아 먹기 시작했다.
정말 맛이 좋았다. 이런 것은 비욘드에서나 맛봤지 현실에서는 먹어 본 적이 없었다. 하룬이 맛있게 음식을 먹는 것을 본 바란이 포크를 들어 잠시 망설이다가 음식을 덜었다.
불고기를 입에 넣는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고는 사정없이 입안에 넣은 음식을 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얼굴 표정은 이 불고기가 얼마나 맛이 좋은지 여실하게 보여 주었다.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너도 나도 가까이 있는 음식들을 덜어 먹기 시작했다. 씹는 순간 느껴지는 맛과 향은 한순간에 그들을 사로잡았다. 먹고 있는 음식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느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한동안 실내는 먹는 데 열중한 사람들 때문에 맛있는 침묵이 흘렀다. 원래 소식을 하는 하룬은 몇 가지 음식을 즐기고는 아즈만에게 벨에게 엄지를 들어 음식 솜씨를 칭찬해 주었다.
“맛있나봐, 언니?”
“호호호, 우리 벨 솜씨이니 당연히 맛있겠지.”
“뿌듯해.”
“음식을 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찬사는 이렇게 맛있게 먹어주는 거야.”
“앞으로 자주 해야겠어. 오빠가 저렇게 맛있게 먹는 건 처음 봐.”
“그랬니? 마스터가 입이 좀 짧은가 보구나. 우리가 신경을 좀 써야겠어.”
“응, 나도 도울게. 열심히 배우고.”
“그래.”
아즈만은 벨의 마음이 기특하게 느껴졌는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마스터, 우린 밖에서 볼일 좀 볼게요. 손님들과 편안한 시간 나누세요.”
비록 인간과 거의 유사한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녀들은 아직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했다. 더구나 벨은 학수고대하던 물건들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것을 잘 아는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오빠. 차는 준비되어 있으니까 따라 마시면 돼.”
“알았어.”
아즈만과 벨은 마당으로 나갔다. 벨이 재료들을 무척 궁금해했다.
하룬은 벌써 다 비어 가는 그릇들을 보면서 차를 준비했다. 차는 배리어에서는 귀한 기호식품이다. 그래도 아까 마트에서 질이 좀 많이 떨어지지만 찻잎을 살 수 있어 이렇게 손님들에게 낼 수 있으니 다행이다.
“와우, 배불러.”
“정말 너무 맛있었어.”
“맛있게 먹었…… 응? 어디 갔지?”
찻물을 다 준비했을 때 사람들은 식사를 마쳤다. 이제야 아즈만과 벨이 없어진 걸 안 것을 보니 음식에 정신을 쏙 빼고 있었나 보다.
“두 사람은 일이 있어 마당에 나갔어요. 해란, 치우는 것 좀 도와줄래?”
“알았어. 너무 맛있어서 양껏 먹었더니 배가 불러서 안 그래도 움직여야 해.”
해란이 흔쾌히 일어나 그릇 치우는 것을 도왔다. 나인도 말없이 일어나 도왔고, 세란은 느긋하게 포만감을 즐기다가 마지못해 일손을 도왔다.
맛있는 요리를 배불리 먹고 귀한 차를 마시자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늘어졌다.
“정말 이렇게 맛있는 걸 먹은 건 오랜만이야. 언젠가 상약초 마을에 갔다가 멧돼지 통구이에 나물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보다 더 맛있게 먹은거 같아.”
바란은 아직도 미련이 남았는지 혀로 입술을 핥았다.
“맛있게 먹었다니 다행이네요.”
“널 마스터라고 부르는 그 미인은 정말 누구냐? 미모도 그렇게 요리 솜씨도 그렇고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일 관계로 날 그렇게 부르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요.”
바란 역시 사내인지라 아즈만의 정체가 궁금한 모양인데 과도한 관심은 사절이다.
“그래, 게임과 수련은 잘돼 가요?”
“네, 덕분에 좋은 경험을 하고 있어요.”
하룬의 물음에 나인이 대답하며 로수를 바라보았다.
“조언대로 전직하는 즉시 전사의 전당에 들어가 각자에게 꼭 맞는 스킬을 열심히 익히고 있어. 이렇게 신경 써 주어서 고마워.”
로수가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를 따라 나머지 전사들도 고마워하는 눈길로 하룬을 쳐다보며 인사했다.
사실 지난번에 나인에게 각자에게 가장 효율적이고 잘 맞는 스킬을 익힐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이 하룬이었다. 전사의 전당이라면 배우는 비용이 비싸고, 적절한 자질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긴 하지만 현실에서도 통할 수 있는 패시브 스킬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곳이기에 추천했던 것이다.
“다행이네요.”
아마 로수가 이끄는 영흥 마을 전사들의 마음가짐이라면 좋은 결과를 끌어낼 것이다.
“그런데 넌 어떻게 그런 정보를 안 거니? 전사의 전당에서 적합한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스킬을 전수해 준다는 사실은 이제야 슬슬 유저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세란이 궁금한 모양이었지만 굳이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 생각을 하면 재수 4인방에게 배신당한 일이 떠올라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얘는. 명색이 돌풍 용병대원인데 그것도 모를까 봐. 돌풍 용병대가 제국 정보 길드에 준하는 막강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니? 그 정도야 당연히 알겠지.”
해란의 말에 세란과 나인은 이해가 간다는 얼굴이었다.
“고마워요. 전사들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되었어요. 이제 게임에서 실전 경험만 제대로 쌓고 현실에서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고련苦練 과정을 겪고 나면 머지않아 아우터 세계에서 명성을 떨쳤던 조상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전사들이 탄생할 거예요.”
나인이 다시 감사 인사를 했다. 하룬은 정당한 거래, 아니 외관만 그럴 뿐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자신에게 엄청난 이득을 안겨 준 배리어 밖 거주지를 소개해 준 나인에게 그런 인사를 받기엔 마음이 불편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하룬은 현재 어디 있나요? 가까이 있다면 수련할 때 도움을 좀 받고 싶은데요.”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듯 얼굴을 붉히며 묻는 나인의 모습이 귀여웠다. 아마 해란 자매가 그의 실력을 과도하게 띄운 것은 아닐지.
“지금은 고요의 땅 입구에 있습니다.”
“어머! 정말?”
“거봐, 내가 그랬지. 돌풍 용병대는 벌써 고요의 땅에 다 갔을 거라고.”
하룬의 대답에 나인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해란 자매가 깜짝 놀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역시 대단하네요. 거기까지는 요른 백작성에서도 두 달 가까이 걸리는 먼 거리라는데 벌써 그곳에 도착했다니.”
뒤늦게 나인이 감탄했다.
비욘드 게임에서는 이제 초보자에 불과하지만 돌풍 용병대의 이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현재 나인이 플레이하는 테론 제국에서는 거의 영웅처럼 받들어지는 존재들이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돌풍이 있다는 말이 돌 정도로 그 이름이 유저나 제국민들에게 유명했던 것이다.
“힝. 나도 좀 데려가지.”
해란이 짐짓 우는 양을 하며 하룬을 보았다.
“왜?”
“지금 동료들과 함께 두 번째 사막을 막 건넌 참인데 언제 그 위험하다는 아이리드 산맥을 건너가겠어? 거기다 고요의 땅에 도착해도 자세한 위치를 몰라서 그 넓은 지역을 뒤질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고.”
아마 처음 던전을 발견한 길드들과 제국 정보 길드와 거래를 한 세력들이 아닌 대부분의 유저들이 처한 상황은 해란과 비슷할 것이다. 욕심 때문에 나서긴 했지만 두 개의 강과 사막을 건너 아이리드 산맥에 도착했거나 산맥에 진입했을 것이다.
“곧 던전의 자세한 위치가 방송으로 알려질 거야.”
굳이 이들에게까지 비밀로 할 필요는 없었다.
“정말? 그럼 그것도 너희 용병대가?”
해란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응, 우리 용병대가 관여했어. 물론 정보의 원천은 따로 있지만. 그래서 이번에도 정보료가 대장간으로 전해질 거야.”
“그게 다 네 몫인 거야?”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룬의 말에 해란과 세란은 의혹 어린 눈으로 입을 덕 벌렸다. 돌풍 용병대에서 하룬이 어떤 위치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던 것이다. 돌풍 용병대에게 직접 정보료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하룬에게 정보료를 전부 준다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칫! 뭐가 이렇게 비밀이 많은지 모르겠어. 아무튼 잘난 것들은…….’
해란이 그를 잘난 것으로 편입시킨 것은 꿈에도 모르는 하룬은 바란에게 주의를 돌렸다.
“바란 형, 구매와 자금 상황은 어때요?”
“응. 네가 부탁한 식료품들과 약초들은 모두 다 구했는데 기계류들 중 몇 개하고 금속들을 비롯한 재료들을 구하려면 아직 좀 부족해. 나인이가 열심히 움직이고 있고, 또 적당한 장인들에게 주문해 두었으니까 차례로 납품될 거야. 자세한 품목별 구입 가격과 수량 그리고 진척 상황은 해란이 가지고 있으니까 받아서 확인해 봐.”
해란이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움찔거렸지만 결국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준비했던 것을 꺼내 하룬에게 주었다.
“고마워요. 아마 정기적인 거래가 될 거 같으니까 중개 수수료는 제대로 챙겨요. 이번에 자금이또 들어올 테지만 혹시라도 부족하면 연락하세요. 저도 중간에서 다리를 놓는 것에 불과하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말고요.”
벨이 원하는 재료들 중에는 극히 희귀한 광물들이 포함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가격이 천문학적이라는 사실도 말이다.
“알았다. 그런 희귀한 물품들이 대량으로 필요한 곳이 어딘지는 감이 안 오지만 네가 관여하고 있으니 신경 써서 끝까지 처리해 주마. 어차피 우리에게도 엄청난 중개 수수료가 떨어지니까 최선을 다해 물품들은 제대로 공급해 주마.”
바란은 생김새는 영락없이 대장장이지만 의외로 섬세하고 철저한 데가 있을뿐더러 책임감이 강해서 믿을 만했다.
바란과 대충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나인이 다가왔다.
“저 잠시 따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이쪽으로 와요.”
하룬은 해란 자매의 따가운 눈길을 의식하며 빈방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가구가 하나도 없는 살풍경한 실내에 달랑 의자 두 개만 가져온 하룬이 그녀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내가 부탁한 물건들을 구하느라 나인 씨가 수고가 많았다고 하더군요. 감사드립니다. 제게는 꼭 필요한 물건들입니다.”
“별말씀을요. 그 귀한 최상급 캡슐들을 열 개나 구입할 자금을 대 주셨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요. 예전부터 거래해 왔던 광산 마을들과 제철 마을들에서 제 부탁을 들어주어서 다행이에요.”
“나중에 곤란한 일이 생기면 말씀하세요. 웬만하면 들어드릴 테니까요.”
“정말요?”
하룬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인과 영흥 마을 전사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원하는 물건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바란에게 들은 것이다.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 돕고 싶었다.
“그럼 지금 말해도 될까요?”
“말해 봐요.”
“전사들의 수련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직접 하르크를 상대하러 나설 거예요. 최근 놈들의 숫자가 많이 늘어났거든요. 무슨 이유인지 상당한 숫자가 북쪽에서 내려왔어요. 그래서 배리어 근처는 물론이고 멀리 떨어진 아우터 마을들이 난리도 아니에요. 우리도 위험해서 호위를 못 할 정도니까요. 시급히 놈들을 처치하지 않으면 식량 사정이 열악한 산 속 마을들은 생존에 위협을 느낄 수도 있어요.”
그런 거라면 하룬쪽에서 먼저 나서고 싶었다. 사이언스 마을 주변에 서식하는 하르크를 처치해야만 양부의 은혜를 제대로 갚을 수 있어 마음의 부담이 없어질 것이다.
‘비욘드에서 제대로 된 검술 하나만 좀 배우면 좋을 텐데. 아니지, 비도지존의 비도술도 아직 제대로 익히지 못한 마당에 무슨 욕심이냐.’
현재 그의 검술 실력으로 하르크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더구나 센스 소드 스킬은 실전을 통해 익히는 것이라 현실에서는 수련하기가 힘들었다.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만 지금은 게임 속에서 중요한 일이 있으니 그게 일단락되는 대로 동행하겠습니다.”
“고마워요. 하룬 님이 원거리에서 하르크의 위협을 어느 정도 막아 준다면 전사들이 무척 안심할 거예요. 이제 막 전사의 전당에서 나온 참이니 스킬들을 수련하고 또 미리 실전도 치르려면 이 주 정도는 있어야 할 거예요.”
그 정도라면 괜찮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게임 시간으로 한 달 반이면 얼추 던전 쪽 일이 마무리되지 않을까 싶다. 그게아니더라도게임의 던전보다는 현실이 더 중요하니 시간을 낼 것이다.
‘이제부터 시간을 내서 비도술을 제대로 수련해야겠구나. 정령들의 힘을 가급적 빌리지 않고 비도술을 익혀야 해.’
새롭게 각오를 다지는 하룬이다. 게임도 좋지만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던전의 보물이 욕심나기는 하지만 날고뛰는 하이 랭커들이며 엄청난 규모의 대길드들 그리고 테론 제국의 강자들이 모여들 테니 그것은 욕심에 그칠 공산이 거의 100%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미리 연락해 줘요.”
하룬이 망설임도 없이 부탁을 받아들이자 나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룬이 게임에 깊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터라 혹여 그가 거절하거나 곤란해할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흔쾌히 수락해 주어서 감사해요. 전사들이 무척 좋아할 거예요.”
“그런데 현재는 어디서 지내요?”
“배리어 밖에 은밀한 곳이 있어요. 예전에 해란이 할아버지와 우리 마을의 어른 한 분과 같이 발견한 곳인데 종말 시대에 벙커로 사용했던 곳이라더군요. 배리어와 멀지 않은 곳이고 전력이라든가 수도까지 연결되어 있어 그곳에서 지내고 있어요.”
“다행이군요. 아무튼 좋은 결과 얻기를 바랄게요.”
배리어 밖의 위험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은 강한 사람들이니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그들과 손을 맞추어 하르크를 상대할 생각을 하니 흥분이 되었다. 이번에야말로 하르크를 제대로 상대해 볼 참이다.
“그리고…….”
나인은 뭔가 할 이야기가 더 있는 것 같았지만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룬은 재촉하지 않고 그녀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꼭 해야 할 이야기라면 하게 될 것인데 굳이 채근할 필요는 없었다.
“하룬 님은 유명한 용병대에 계시고 세상 경험이 많을 테니까 혹시 다니시다가 사이킥 에너지를 쓰는 방법을 알게 되거나 그런 사람을 만나면 저에게 좀 알려 주세요.”
“음, 그렇게 하지요.”
일전 배리어 밖에서 하르크와 싸울 때 그녀가 보였던 능력은 분명히 초능력이었다. 흔히 염력이라고 부르는 힘으로, 하르크의 움직임을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정지시켰던 것이다. 아마 그 능력을 올리고 싶은 모양이다.
“내가 가진 능력을 좀 더 발전시키고 싶은데 도움을 받을 길이 없어요. 유니온 내에서는 나 같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훈련을 시킨다고 하던데……. 물론 그곳에 가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고, 고아인 나를 거두어 준 아빠와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전사 마을이고 그녀의 아버지가 전대의 전사장이었다니 그건 당연한 바람일 것이다. 하지만 뜻밖의 사실도 있었다.
“고……아였어요?”
“네. 배리어 밖에 버려진 절 아빠가 거두어 길러 주셨어요.”
아이를 버리는 것은 흔한 일이다. 특히 직업이 일정하지 않은 F구역의 주민들은 아이를 키울 능력이 거의 없으니 말이다.
‘특별한 사연이 있나?’
굳이 배리어 밖에 버린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런 경우 유니온 주민 센터나 병원에 마련된 기아棄兒 바구니에 놓고 가면 유니온 정부가 보육 시설로 보내거나 부양 가정을 지정해 주기 때문이다.
‘정말 내 주위에는 고아들이 참 많구나. 형제와 같은 인공수정체들도 많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왠지 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기분이다. 특히 인공수정체들이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인에게도 각별한 감정이 생겨났다.
같은 고아라도 해란과 세란은 구김살 없이 밝은 성격이다. 정을 주고받을 가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인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있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강한 책임감과 지혜로움이 돋보이는 그녀지만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많은 책임을 지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지.
“그런데 나인은 마을에서 어떤 존잽니까?”
“그냥…… 마을 사람이죠.”
그녀는 질문의 요지를 잘 모르고 대답했지만 마침 나인을 찾아 집 안을 돌아다니다가 방으로 들어오던 로수가 그 요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나인은 차기 촌장이야. 그녀가 아니었다면 전대의 뛰어난 전사들이 몰살한 후 우리 마을은 명맥을 잇지 못하고 흩어졌을지도 몰라. 비록 어린 나이지만 우리 전사들도 추스르고 마을 사람들을 다독여 살아 나갈 의지를 가지게 만들었지.”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로수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배리어 밖의 혹독한 자연환경 때문에 나이 마흔이 평균 수명인 것을 생각하면, 전대의 전사들이 후대를 제대로 육성하지 못하고 예비 전사들과 함께 하르크에게 몰살당한 것은 마을로서는 엄청난 충격이고 재기하기 힘든 상황을 초래했을 것이다.
“나인은 비록 어린 나이지만 마을 사람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는 우리의 지도자야. 하룬이 부디 그녀를 많이 도와줬으면 좋겠어. 내 그 은혜는 목숨을 바쳐 갚지.”
“알겠습니다. 어차피 저도 배리어 밖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했으니 근처의 변종 생물들을 몰아내야 하는 등 앞으로 서로의 힘을 필요로 할 경우가 많을 겁니다.”
“나도 그 이야기는 들었어. 지금까지도 이래저래 신경을 많이 써 주어서 고맙게 생각하지만 차후로도 우릴 도와주면 좋겠어. 비록 아우터들이 거칠게 살고 있지만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 거야.”
이들의 성정에 대해서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먼저 알게 된 해란 자매보다 나인과 전사들에게 더 마음이 쓰이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살아왔고 현재 살고 있는 고단한 삶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순수한 마음을 가져 본다.
강한 의지로 고통과 외로움을 이겨 내고 불굴의 정신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러울뿐더러 같이하고 싶었다. 예전의 무력했던 자신의 삶을 떠올리면 정말 부끄러웠다.
물론 그때는 그 생활이 세상의 전부이고 앞날이 너무 캄캄했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로 시도는 해 보았어야만 했다는 반성을 해 본다. 캡슐 하나가 생긴 변화로 이렇게 자신이 변하지 않았던가.
해답이 나오지 않고 미래가 보이지 않았어도 절망하지 않고 돌파구를 찾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 물론 그래도 실패할 수는 있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최소한 자신에게 실망하지는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