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의 평원》
이사를 모두 마무리하고 다시 비욘드에 접속한 것은 게임 시간으로 사흘이 흐른 후였다.
고요의 평원은 여전히 평화롭고 고요했다. 좁은 고요의 평원을 끼고 멀리 마주 보는 고요의 땅과 아이리드 산맥에는 수많은 인간들이 욕망에 휘둘려 난리를 치고 있을 것이다.
하룬은 일행이 도착하기 전까지 그동안 수련하지 못했던 메신저 스킬을 익히기로 했다.
‘훗, 굉장한데.’
발바닥을 통해 들어오는 마나량이 엄청났다. 마지막으로 수련했던 캘프란 마을에 비하면 세 배가 넘는 어마어마한 마나가 빠른 속도로 들어와 마나 플로에 의해 마나 로드를 거치며 순화되어 마나 오션으로 향했다.
마나 오션에는 원소석 때문인지 놀랍게 늘어난 마나가 웅크리고 있다가 그 마나들을 들어오는 대로 집어삼키며 덩치를 키워 갔다.
무아지경에서 평원을 걸으며 메신저 스킬을 수련하던 하룬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 앉아 마나 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코를 통해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에 섞여 있는 마나는 마나 오션을 자극했고, 그곳에 자리를 잡았던 마나 덩어리는 그의 의식에 순응해 조금씩 풀어져서 익숙한 마나 로드를 타고 움직였다.
어느 사이에 호흡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마나 플로에 집중한 하룬의 몸 전체에서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몸 전체로 호흡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주변 공기가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과정이 되풀이 되었다.
점차 빨아들이는 공기의 양도 커졌다. 그를 주변으로 반경 10미터가량의 공간이 그의 호흡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로 인해 바람 한 점 없던 주변에 바람이 생성될 정도였다.
‘이제 된다.’
하룬은 드디어 메신저 스킬을 통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의지로 호흡을 통해 마나 플로를 운용해서 마나를 쌓는 데 성공한 것이다. 자세가 안정되어서 그런지 움직이는 동작을 통해 마나를 흡수해서 쌓는 것보다 몇 배나 많은 마나를 쉽게 축적할 수 있었다.
마나량이 폭증한 탓에 처음에는 마나 로드가 비좁게 느껴졌고 통증마저 느낄 정도였지만 계속 마나 플로에 집중하자 어느새 마나 로드가 점점 더 넓어졌다.
투둑! 툭!
상반신의 정중앙 선을 타고 도는 주 마나 로드 외에 그가 발견한 열두 개의 마나 로드가 생생하게 느껴졌고, 일부는 그 입구가 뚫리고 있었다. 농밀한 마나의 이동에 아주 작은 구멍만이 나 있던 그 작은 마나 로드들이 열리는 것이다.
하룬은 기존의 마나 플로에 더해 열두 개의 소마나 로드를 모두 도는 마나 플로를 시험 삼아 돌려 보았다. 이제는 한 호흡 만에 일주를 마칠 수 있었지만 아직 좁디좁은 상태인 소마나 로드 때문에 엄청난 시간이 걸려서야 모두 일주시킬 수 있었다.
그 과정을 통해 몇몇 마나 로드의 벽을 뚫기도 했다. 특히 자주 마나를 이동시키는 양 손바닥까지의 마나 로드는 두꺼운 벽을 허물고 길을 제법 넓힐 수 있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
이 정도면 충분했다. 비로소 집중 상태에서 깨어난 하룬은 길게 숨을 내뱉어 탁기를 몸 밖으로 배출했다.
번쩍!
눈을 뜬 하룬의 눈빛이 섬광처럼 빛을 발했다. 몸과 마음이 새로 태어난 것처럼 상쾌하고 강렬한 활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금방 눈살을 찌푸려야만 했다. 엄청난 악취를 맡은 것이다.
“이런!”
악취의 근원지는 바로 자신의 몸이었다. 주 마나 로드 외에 소마나 로드까지 일주시키는 대회전의 마나 플로를 운용한 결과 상당한 노폐물이 몸 밖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하룬은 나이아를 소환하려다가 멈추었다. 원소석에서 원소력을 흡수해 이제는 거의 인간처럼 느껴지는 그녀인지라 자신의 몸을 씻겨 달라는 부탁을 하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칸젠의 위 속에 있으면서 타림 부자가 만들어 준 방어구는 거의 쓸모가 없을 정도로 상해 있었다. 이참에 다른 방어구로 갈아입어야 했다.
“그럼 어디 한번 수영이나 해 볼까?”
하룬은 옷을 모두 벗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호수는 어느새 지는 해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거의 한나절 동안 수련만 한 것이다.
배리어 안에서만 살았던 터라 수영하는 법도 모르는 하룬이지만 몇 번 물을 먹으며 손발을 열심히 놀린 결과 몸과 근육의 움직임에 따라 부력이 다르게 발생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의 몸은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물에 뜰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수영의 기초였다. 그러자 수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강인한 근력을 가진 그였기에 금방 빠른 속도로 헤엄칠 수도 있고, 다양한 자세로 헤엄치는 것도 가능했다.
잠시 나와 휴식을 하면서 방어구를 물에 세탁한 하룬은 곧 다시 호수로 뛰어들었다. 나이아를 연상시키는 호수 물의 감촉을 알몸으로 느끼며 헤엄치는 기분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마침 새로 마련한 집이 호숫가 지하에 있으니 현실에서도 수영을 취미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화율이 높아 게임에서 몸으로 얻은 능력을 7할 정도는 사용할 수 있으니 수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한참 수영을 즐긴 하룬은 호수를 나왔다. 이제 옷을 갈아입을 참이었다.
“뭐, 뭐야?”
문득 달빛이 머금은 호수에 비친 자신의 알몸을 본 하룬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이게 웬 뿔?”
놀랍게도 호수에 비친 그의 머리에는 작은 뿔 세 개가 솟아있었다. 손으로 직접 만져 보니 정말 뿔이 난 것이 맞았다.
하룬은 도무지 이 현상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내가 럼프 오크들의 저주를 받은 걸까?”
하룬은 그 자리에 서서 계속 머리통 위로 솟아오른 뿔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후크란 산맥에서 럼프 오크들이 모여 어떤 의식을 치를 때가 기억났다. 그때 기사들과 럼프 오크의 기운과 체액이 변한 것으로 추정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광구가 잠시 자신의 몸을 삼켰었던 것이 이렇게 변해 버린 원인일까?
생각해 보니 이상한 일은 또 있었다.
아반 부녀와 조우했을 때 하룬은 분명히 블랙 오크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당시는 크게 이상하다고 생각할 여유나 기회가 없었지만 간혹 그때 일을 생각하면 이상하긴 했다.
‘내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현 시점에서 확실한 것은 그의 머리에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뿔 세 개가 생겨났다는 것과 다른 유저들과는 판이한 놀라운 성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젠 완전히 괴물이 되는 건가?’
뿔 세 개를 가진 그의 모습은 인간이 아니라 악마처럼 보였다. 하지만 묘하게 그런 외모가 싫지는 않았다.
‘뭐, 이것도 괜찮겠지.’
평소 늘 모자까지 세트로 방어구를 착용한 유저들이 머리를 보일 경우는 별로 없다. 생각해 보면 방어구를 입고 나서 머리를 드러낸 적은 씻을 때를 제외하면 한 번도 없었다.
‘마족이 되었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랬다. 어차피 이 모습은 게임 속 화신체, 즉 아바타에 불과할 뿐이다. 남들은 좀 더 멋있는 방향으로 외모를 바꾸려고 했지만 하룬은 외모엔 별 관심이 없었다.
하룬은 몇 번이고 신기한 듯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다가 한참 후에야 옷을 갈아입었다.
티노가 이끄는 사람들이 도착한 것은 혼자 빵과 물로 대충 아침을 챙겨 먹고 새로 배운 비도지존의 스킬을 익히고 있을 때였다. 수백 개가 넘는 비수와 단검이 그가 마음속으로 목표했던 곳까지 정확하게 날아간 것은 열 번이 넘게 암기를 던지고 회수하기를 반복한 후였다.
해가 중천을 지날 무렵 드디어 티노가 이끄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하룬은 메신저 스킬을 펼쳐 새처럼 날아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대장님!”
“티노, 무사했군요.”
비록 지친 얼굴이긴 했지만 모두 건강한 것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그동안 제국 정보 길드의 습격을 몇 차례 받은 탓에 좀 걱정은 했었던 것이다. 딜런이나 타니엘라와 같은 실력자들이 있어 괜찮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가슴 졸이고 있었다.
“대장, 난 안 보여요?”
헤니였다. 반가운 마음에 뛰어와 안기려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는 머쓱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고생 많았어, 헤니.”
“흥. 배 타고 오면 될 것을 걸어오느라고 내 허벅지가 1센티는 더 두꺼워졌을 거예요.”
미리 와 있는 하룬을 보자 내심 고생하며 강행군으로 걸어온 것이 억울했나 보다.
“하하, 헤니는 예쁜 데다 머리까지 좋아서 허벅지는 좀 두꺼워져도 상관없어.”
“헤엥. 치! 말로만 때우려 해. 다들 나 싫다고 안 데려가면 대장이 나 데려갈래요?”
하룬의 위로가 마음에 들었는지 농담까지 하는 헤니였다.
“하하하! 그러지, 뭐.”
“어머, 정말인가 봐. 난 싫은데.”
“싫으면 말고.”
그렇게 헤니와 해후를 나눈 하룬은 다른 사람들과도 반가운 인사를 하고 자신이 도착한 곳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별다른 일은 없었네. 덕분에 호수 풍광도 질리도록 봤지.”
“뭐, 질릴 것까지야. 자연이 좋은 것은 여간해서는 질리지 않는다는 거지.”
딜런과 타니엘라는 그동안 많이 친해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연배가 그리 차이 나지 않는 데다 통하는 것이 제법 많았다.
변화는 또 있었다. 뫼비우스와 슈미르의 관계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한눈에도 슈미르가 뫼비우스에게 푹 빠진 것 같았다. 또 같은 검사인 다미와 매그럼 간에도 묘한 기류가 흘렀고 나이가 비슷한 초른과 로레인도 바짝 붙어 다녔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사람들은 티노와 도네이스였다. 여전히 부딪치기는 하지만 도네이스가 티노를 대하는 모습이 꼭 아내가 남편을 바가지 긁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나 티노와 붙어 다녔는지 이제 일행에게 거의 돌풍 용병대원으로 취급받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여행이 좋은 점은 사람을 친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룬이 천막을 친 곳에 도착한 사람들은 늦은 점심을 준비했다. 여행이 모두 끝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각자 준비했던 음식들 중 최상품을 꺼내 모두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후 오미차를 마시며 하룬이 그간의 여행을 정리했다.
“큰 사고 없이 이곳에 도착하게 되어서 무척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아니, 돌풍 용병대 덕분에 이곳까지 잘 왔으니 우리가 감사해야지. 그동안 고생이 많았네. 대장도 그렇지만 티노 부대장과 헤니 대원도 무척 수고가 많았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고생이 심했던 아반이 노고를 치하하며 약속했던 의뢰비의 잔금을 치렀다. 여행 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샤니는 얼굴이 별로 좋지 않았다. 연방 슈미르와 뫼비우스 쪽을 쳐다보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녀 역시 뫼비우스를 좋아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번 여행을 통해 느낀 것이 많았습니다. 길 안내뿐 아니라 우리의 안위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고생했던 돌풍 용병대를 잊지 않겠습니다. 다시 만날 때는 좀 더 편한 모습으로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발트랑 역시 웃는 얼굴로 잔금을 치렀다.
“저도 감사드려요. 특히 헤니 동생하고는 정이 많이 들었는데 헤어지려니 너무 섭섭해요.”
사예는 그동안 많이 친해진 헤니와 헤어지는 것이 섭섭한지 아직도 잡은 손을 풀지 않고 있었다.
“저희 청소리 길드 역시 감사드려요. 헌신적인 돌풍 용병대원들이 아니었다면 감히 이곳까지 올 수도 없었을 거예요. 역시 돌풍은 소문대로 대단했어요.”
슈미르는 뫼비우스의 손을 꼭 잡은 상태로 인사하며 계약을 마무리했다. 어쩌면 그녀가 이번 여행에서 얻은 성과는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니라 뫼비우스에게 사랑을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부러웠다. 타고난 조각 같은 외모와 부드럽고 달콤한 행동과 말솜씨는 그야말로 여자를 녹여 버릴 정도로 매혹시키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가진 뫼비우스였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질투가 났다. 하룬 역시 게임을 시작하면서 이성을 대함에 있어 무지에 가깝던 상태를 벗어났던 것이다.
‘저 녀석이 당신을 진짜 사랑하는 건지는 모르겠소.“
만약 슈미르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었으면 말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룬은 타니엘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허허허. 소문이란 것이 왕왕 실제보다 부풀려지는 것이지만 돌풍은 달랐소. 그동안 돌보아 준 호의는 절대 잊지 않으리다.”
이미 출발 전에 마나석으로 값을 치른 타니엘라는 감사의 말을 끝내고는 이내 저 멀리 높은 고요의 땅을 보면서 감회에 젖어들었다.
“여기에서 강줄기를 따라 한 시간 정도 올라가면 고요의 땅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올 겁니다. 미리 살펴보았는데 길이 조금 좁은 것이 마음에 걸릴 뿐 딱히 위험한 것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 언제 이동하시렵니까?”
하룬은 샤니를 채근해서 배낭을 챙기는 아반에게 물었다. 던전의 위치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바로 출발하겠네.”
“두 사람으로는 무리예요. 차라리 다른 분들과 함께 가시죠.”
헤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권유했지만 그동안 입었던 방어구를 내밀며 아반은 고개를 흔들었다. 하룬은 걱정되었지만 당사자인 아반 부녀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이 좀 서운할 뿐 걱정은 없는 편안한 얼굴이었다.
그동안 정든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천천히 강줄기를 따라 올라가는 아반과 샤니의 뒷모습을 보면서 걱정 어린 눈길을 떼지 못하던 헤니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어머! 뭐지?”
그녀의 시선에 홀연히 나타난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검을 찬 검사들과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이 하나둘씩 아반 부녀의 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화아! 절묘하다!”
상황을 알아차린 아레스가 감탄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차례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을 이해한 것이다.
이곳까지 온 것은 아반 부녀였지만 그들의 주변으로 길드원들이 부활하는 것이다. 접속 지점이야 로그아웃한 곳으로 고정되었지만 부활하는 장소는 다를 수 있다. 길드장의 주변으로 부활 지점을 설정한 상태에서 사망하면 저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치잇! 약았어. 이럴 줄 알았으면 의뢰비를 올려 받는 건데.”
헤니가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벌써 꽤 멀리까지 간 아반 부녀의 주변에는 어느새 십여 명이 넘는 유저들이 부활한 상태였다.
만약 동행했다면 틀림없이 꽤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테지만 사망에 대한 페널티만 각오하면 이렇게 안전하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헤니야, 사실은 우리도…….”
어느새 헤니의 손을 슬쩍 푼 사예가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으응? 언니네도?”
“응. 나름대로 기발한 발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분들도 같은 생각을 했었네.”
방어구를 반납한 발트랑과 사예 역시 일일이 인사를 했다. 특히 오래전부터 호위를 맡았던 딜런과는 헤어지기가 아쉬운 듯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서야 고요의 땅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무심한 표정의 발트랑과 약간은 수다스러운 사예는 약혼 상태라고 했는데 여행 전에 비해 달라진 것은 없었다. 지금도 한 걸음 정도씩 떨어져 걸어가는 두 사람의 주변으로 새로운 인물들이 하나둘씩 나타나 인사를 하고 있었다.
“어째 군부 인물들 같지?”
“그러게. 사예는 모르지만 발트랑과 그 길드원들은 영락없는 군인들이야. 그것도 군기가 무척이나 센.”
아레스와 매그럼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정체를 추측해 보았다.
“제길. 부럽네. 저들은 던전의 위치를 제대로 알고 있겠지?”
“당연히 그렇겠지.”
돈과 권력을 쥔 자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정보를 입수할 것이다. 자신들처럼 몸으로 부딪쳐 가며 움직이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에고, 삭신이야. 너무 걸어서 그런지 난 좀 쉬고 나서 생각해 보려네. 괜찮은가, 하룬 대장?”
타니엘라는 다시 자리에 앉아 남은 오미차를 마셨다.
“그러시죠.”
“나도 일이 끝났으니 당분간은 대장에게 신세를 좀 질 생각이네. 괜찮겠나?”
“타니엘라 님과 딜런 님이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하룬의 말에 두 사람은 만족한 미소를 띠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딜런에게 가끔 검술 지도를 받고 있던 다미와, 도네이스의 제자를 자처하는 로레인이 슈미르와 뫼비우스의 눈치를 보았다.
“저희도 오늘은 여기서 쉴까 해요. 뫼, 어떻게 생각해?”
“괜찮은 생각이네요, 슈! 대장, 괜찮죠?”
뫼비우스의 말에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울 거야 없었다.
떠날 사람이 모두 떠났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많았다.
돌풍 용병대원들과 남은 사람들은 호숫가에서 평화로운 오후를 보냈다.
몇몇은 몸을 씻을 겸 해서 호수로 들어가 수영을 즐겼고, 딜런과 타니엘라는 어디서 구했는지 낚싯바늘을 만들어 낚시를 시작했다.
뫼비우스를 비롯한 젊은 사람들은 쌍쌍이 짝을 이루어 물장난을 치거나 수영 실력을 겨루기도 하면서 물 밖으로 좀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물놀이를 나온 것처럼 청춘의 아름다운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딜런과 타니엘라는 낚시보다는 대화에 열중하는 바람에 미끼만 따먹히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팔뚝만 한 레인보우 피시는 쉽게 낚을 수 있었다.
티노와 도네이스가 나서 고기를 손질하고 소스를 얹어 꼬치에 꽂아 모닥불에 구웠다.
석양이 지고 물고기 익는 냄새가 퍼지자 물놀이에 빠졌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불가로 보여들었다. 그렇게 모여 앉아 식사를 하니 항상 시끄러웠던 지난 여정의 식사 시간이 자연스럽게 생각났다.
“대장, 이젠 어쩔 겁니까?”
팔뚝만 한 물고기를 반이나 뜯어 먹은 아레스가 볼을 잔뜩 부풀린 채 물었다. 대원들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질문이었지만 하룬의 심각한 표정에 여태 묻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갈 거죠?”
헤니 역시 궁금했나 보다. 하룬은 탄 껍질 부위를 뜯어내 김이 올라오는 살점을 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에 다들 안심하면서도 기대하는 얼굴들이었다.
명색이 고대 문명이 남긴 던전인데 그냥 돌아가면 어쩌나 하고 마음들을 졸인 것이다. 매그럼 일행은 당연한 것이었음에도 왠지 하룬의 얼굴이 어두워 보여 행여 던전행이 취소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하룬은 빵과 생선구이를 다 먹었을 때에야 사람들이 자신의 눈치를 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심각한 생각에 빠져 있느라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자세한 말을 해 주지 않아 일행이 불안해하는 것이다.
“아반과 같은 인물이 마법서에 왜 그렇게 목매는지 누가 한번 추측해 보시오.”
그것이 바로여행하는 내내 하룬을 고민하게 만든 화두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던 것이다.
현실에서 더 이상 가질 것이 별로 없을 거 같은 노블들이 왜 젊은이들이나 즐기는 가상현실 게임에 들어와, 그것도 길드원들을 일부러 사망시켜 가면서까지 자신의 세력을 데리고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는지 그 사정이 궁금했다.
하룬은 아레스를 쳐다보았다. 일단 기자이니 무슨 정보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 거지만 그는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역시 그게 궁금하던 참이었다.
매그럼과 초른 역시 아는 것이 없어 보였다. 다른 유저들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이곳 비욘드의 주민인 티노와 딜런 그리고 도네이스와 타니엘라의 경우는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하룬의 눈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바로 뫼비우스와 헤니였다. 뫼비우스와 그녀는 뭔가 알고 있는 듯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들의 눈은 아레스 일행을 향하고 있었다. 여행하면서 알게 된 그들의 존재를 꺼려 하는 것이다.
“추측하는 것이 혹시 널리 알려지면 곤란한 일인가?”
“네, 추측이니까요. 저들의 직업을 고려하면 추측이라도 함부로 말할 수가 없어요.”
“나야 별 상관은 없지만 알고 있는 정보가 너무 제한적이라서요.”
반응을 보니 뫼비우스보다는 헤니가 더 많이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매그럼과 초른 그리고 아레스를 경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기자와 게임의 GM이니 말이다. 기자란 포장하는 데 선수들이고, GM은 이 게임을 개발한 넥컴월의 하수인이니까.
“절대 발설하지 않을게, 헤니. 믿어 줘.”
아레스는 정말로 궁금한지 헤니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우리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겠소. 어차피 확실한 게 아니면 보고하는 것이 무의미하니까.”
초른의 말이지만 헤니는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그녀의 태도를 믿을 수 없다는 것으로 간주한 초른이 쓴웃음과 함께 부언해서 설명했다.
“잘 모르겠지만 비욘드의 GM은 다른 게임과는 다르오. 우리 넥컴월은 이 게임을 개발하긴 했지만 모종의 제약으로 게임 내용을 전혀 모니터링할 수 없는 처지요. 또한 자체적으로 게임의 스토리에 변경을 가하거나 특정 사건에 대해 유저들 이상으로 알 수가 없지요. 그래서 넥컴월은 코원 지부에만 무려 백 명 이상의 GM들을 투입했소. 우리의 임무는 게임에서 일어나는 굵직한 사건들에 대해 조사와 몇 가지에 국한되어 있소. 그리고 우리의 보수도 그런 사건들에 대한 보고 내용의 등급에 달려 있고.”
그의 말에 헤니의 눈이 커졌다. 그녀 역시 넥컴월에 근무했었지만 그런 사실까지는 몰랐다. 물론 추측은 했지만 말이다.
“그 말은 현재 넥컴월이 비욘드를 전혀 통제하지 못한다는 건가요?”
이제야 그 사실을 확인하고는 믿을 수 없다는 헤니의 질문에 초른과 매그럼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운 일이군요. 어떻게?”
“이런 사실에 대해서는 넥컴월 본사라면 모를까 우리 코원 지부에도 자세한 사정을 아는 인물은 없는 것 같아요. 물론 우리 시각에서 판단한 것이지만.”
헤니의 눈이 반짝거렸다.
‘역시 내 생각대로였어!’
그녀 역시 넥컴월이 자금을 지원하는 비밀 연구소에서 근무하며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다른 게임을 많이 해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 흔한 패치도 한 번밖에는, 버그 신고라든가 밸런스 조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넥컴월은 유저들의 불만 사항이나 의문 사항에 거의 무대응으로 일관해 왔던 것이다.
“좋아요. 일단 내가 하는 말은 사견이며 추측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심해 주세요. 특히 아레스는 절대로 이 이야기를 기사로 쓰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계정과 이름을 걸고 말이에요.”
“좋아요, 그러지요. 성격상 궁금한 것이 있으면 견디질 못하니까.”
아레스가 마법사 유저들이나 하는 마나의 맹세에 준하는 맹세를 하자 드디어 헤니가입을 열었다. 이방인들에 대해 자세하게 모르는 티노와 딜런까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헤니를 주시했다.
“이 고요의 땅에서 발견된 던전은 보통 던전이 아니에요.”
“그야 당연하지.”
맞장구를 치던 초른은 헤니의 질책 어린 시선에 황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아마 최고의 정보 라인을 가지고 있는 강력한 조직들은 던전에 있는 마법서의 내용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을 거예요. 황실 도서관에 그것들에 대한 단초가 있었거든요.”
“황실 도서관에 그에 대한 언급이 적힌 책이라도 있었다는 말이오?”
호기심 많은 초른답게 헤니의 주의에도 참지 못하고 그렇게 묻자 이번에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맞아요. 그에 대해 언급한 것은 유명한 책의 저자인 살라인 갈쉬예요. 제국 이전에 존재했던 난국 시대의 부쿠레 왕국의 대현자인 그는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모아 여섯 권의 책으로 엮었는데 제목이 ‘지혜의 서’라고 해요.”
“지혜의 서?”
누군가 책 제목을 중얼거렸다.
“그 책을 보면 고대 문명을 완성시킨 ‘라’ 제국에 대한 언급이 나와 있어요. 그리고 이번에 방영되었던 영상 중에 나오는 블루 선더 마탑에 대한 내용도 몇 줄 나오지요. 그 내용을 보면 블루 선더 마탑은 당시 흑마법 계열의 마탑들을 제외한 모든 마탑과 학파들을 통일한 강력한 세력으로 현재와는 완전히 다른 체계의 마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요. 그들은 마법을 모두 네 가지 체계로 완성시켰는데 공교롭게도 차기 황제를 위한 선물로 마련한 마법서는 모두 네 권이에요.”
“흠. 그럼 네 권의 마법서에는 각기 다른 체계를 가진 마법들이 수록되어 있다는 말이군.”
딜런이 흥미로운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문제는 마탑이 완성한 네 가지 체계죠, ‘지혜의 서’에는 그것에 대한 짧은 언급이 있어요.”
언급이라는 말에 사람들의 눈과 귀가 헤니에게 쏠렸다. 그녀는 그런 관심과 주의를 잠시 즐기고는 입을 열었다.
“하나는 정통 마법이에요. 체내에 서클 수를 알리는 마나 고리를 만들어 대자연의 마나와 공명시키는 것이죠. 다른 한 가지는 명치 어름에 존재한다고 알려진 가상의 마나 오션에 마나를 쌓아 마법을 구사하는 것이에요. 지금은 전혀 맥이 끊긴 마법 체계지요.”
그녀의 말대로 지금은 마나 고리를 만들어 서클을 따지는 마법 체계였다.
‘혹시?’
나이아로 인해 삼킨 원소석이 자리를 잡은 곳이 명치 부근이라 하룬은 그녀의 말이 특히 귀에 들어왔다.
하지만 헤니도 자세한 것은 알지 못했다. 마저 설명을 더 들어야 했다.
“세 번째는 이방인들이 흔히 염력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정신력을 사용한 마법이에요. 주로 정수리 부위에 존재한다고만 알려졌을 뿐 그 실재實在 여부는 확인되지 않은 마나 오션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마나를 쌓아 의지를 매개로 발현하는 마법 체계이지요.”
‘초능력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룬은 나인을 떠올렸다. 분명히 그녀는 염동력을 발휘해서 하르크의 몸을 순간적으로 멈추게 만들었다. 이곳도 그렇지만 현실에서도 분명 실제로 존재하는 힘인 것이다.
“네 번째는 신체 강화 마법이에요.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몸을 만드는 마법으로, 마법진과 약간의 신체 조작을 이용한다는 사실만 알려졌어요. 그것을 통해 신체의 능력을 강화시키는 것은 물론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마법이래요.”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흑마법을 제외한 마법의 큰 줄기가 하나가 아니라 무려 넷이라는 사실도 놀랍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마법 체계는 현재에도 마법이 아닌 다른 불가사의한 힘으로 종종 회자되는 것이었다. 그런 놀라운 힘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니 정말 놀라웠다.
“어쩌면 아반 씨나 발트랑과 같은 이방인들은 그들이 처한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벗어나거나 새로운 힘을 가진 전사들을 양성하기 위해 그 마법서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알다시피 이방인들의 환경은 무척 위험하고 최근에는 배리어가 약해지는 등 상황이 약화되고 있거든요.”
헤니의 말이 끝났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방인들은 이방인들대로, NPC들은 그들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뭔가 생각에 빠졌던 매그럼이 어느 순간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있어요. 언젠가 아버지가 친구분들과 집에서 한담을 나눌 때 들은 이야긴데 특수 방위군 중에는 신체는 보통이지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도 바로 앞에서 보는 것처럼 알 수 있는 특이한 능력자들이 섞여 있대요.”
그 말을 들은 초른은 잠시 주저했으나 이내 뭔가 결심한 얼굴이었다.
“사실 우리 GM들의 1차적인 목표는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숨은 실력자들을 찾아내는 겁니다. 대상은 하이 랭커들이고 전투 계열의 직업을 선택한 유저들이죠. 다른 동료들에게 들은 바로는 이곳 기사들이 운용하는 마나 플로가 현실에서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즉, 현실에서도 마나를 쓰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죠. 아마 곧 유니온에서 공식적인 발표가 있겠지만 이런 하이 랭커들은 각 유니온에 특별 채용이 될 겁니다.”
“하이 랭커들이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때가 되면 그런 사실이 발표될 겁니다. 넥컴월에서는 패시브 스킬로 마나를 생성시키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하이 랭커들이 일정 기간 수련을 거치면 현실에서도 그 능력을 쓸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 같습니다.”
매그럼의 추가적인 설명이 이어지자 이방인들은 이 비욘드 게임과 관련된 뭔가 큰 틀이 있음을 깨달았다.
“흠. 그래서 군부 인물들이 이 게임에 접속하는 거군. 다른 게임과 달리 비욘드에는 현실 직업이 군인이나 무술가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엄청나게 많았거든. 그래서 작업장에서도 은밀하게 이 게임이 군수용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소문이 돌고 있어.”
뫼비우스의 말은 앞서 말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확신을 주기 충분했다.
“새로운 체계를 가진 마법들의 존재는 비단 이방인들에게만 보물이 아니에요. 사실 이방인들이 그런 마법들을 현실에서 사용 가능한지는 검증되지 않았지만 이곳은 달라요. 이미 최고의 문명을 가졌고, 수천 년이 넘도록 영화를 누렸던 ‘라’ 제국이 그것이 실재함을 증명했거든요. 이곳 세상에서도 그 마법서들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내 생각으로는 이 마법서들을 손에 넣는 자가 황자라면 골든 배틀을 통해 황권을 가지게 될 것이고, 만약 황자가 아닌 자라면 대륙을 아우르는 최고의 세력가로 부상하게 될 거예요.”
헤니의 목소리에는 강한 확신이 어려 있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또한 황자를 위한 마법서라면 입문서일 텐데 그 점이 더욱 중요해요. 사실 높은 수준의 마법이라면 그 기본을 알 수 없어 오랜 시간을 들여 많은 인력이 연구해야 하지요. 이 비욘드의 마법 역시 현재 그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것이고요. 하지만 입문서라면 이야기가 다르지요. 바로 사용이 가능할 테니까요.”
사람들은 헤니의 추론을 거의 확신을 가지고 받아들였다. 어디서 이런 정보를 입수했는지 모르겠지만 ‘지혜의 서’라는 책에 언급된 내용이 사실이라면 지금 유저들과 NPC들은 실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보물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반드시 우리가 얻어야 해요.”
“당연하지.”
“누가 뭐래도 그 마법서들은 우리 거야.”
헤니가 말하는 우리가 누군지 잘 생각해 보지도 않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소리 높여 마법서들을 향한 의지를 불태웠다. 헤니의 추측을 듣고 보니 더욱더 탐이 나는 보물들이었다.
사람들의 눈에 진한 욕화慾火가 이글거리며 불길을 키우고 있었다.
“아무래도이 고요의 땅에 있는 던전 때문에 제국이 요동을 치겠군. 아까운 인재들이 많이 상하게 될 거야.”
타니엘라였다. 보물 때문에 아깝게 스러져 갈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 그의 노안은 안타까움과 쓸쓸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찌 되었건 던전을 두고 피 보라가 일긴 할 테지. 이곳에서의 죽음이 커질수록 어쩌면 민초들을 위해서는 더 나을지도 몰라.”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딜런의 말에 헤니가 물었다.
“골든 배틀 때문에 또다시 고통을 겪어야 하는 민초들의 입장에서는 골든 배틀을 치를 주역들이 이곳 던전에서 상진하면 가족이나 이웃을 잃지 않아도 되기에 하는 이야기라네.”
딜런은 귀족답지 않게 골든 배틀에 무척이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골든 배틀 때문에 제국이 특별한 내전이나 반란 없이 평화롭게 천 년 동안 번영을 구가해 온 것 아닙니까?”
제국 정보 길드에서 일할 때 그런 소리를 많이 들었던 뫼비우스였다. 물론 그런 생각은 유저들이 골든 배틀을 바라보는 공통적인 시각이었다.
“아니, 아니지. 그런 것은 정보와 언로言路를 쥐고 있는 정보 길드들과 황실 그리고 원로원 전승 귀족들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의견에 불과하네.”
처음 듣는 소리에 다들 딜런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는 이런 관심이 조금 불편한지 헛기침을 했지만 곧 작심한 듯 굳은 얼굴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사실 골든 배틀 때문에 제국은 지난 천 년 동안 아주 천천히 퇴보를 거듭해 왔지. 그것은 이 제도를 받아들인 다른 제국들도 마찬가지야. 있다면 삼백 년 전에 여섯 개의 왕국으로 쪼개져 버린 애슬론 제국만이 번성하고 있을 뿐이지.”
“꼭 그렇게만 볼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아니, 헤니. 나도 돌아다니며 골든 배틀 때문에 죽겠다는 사람들의 원성을 많이 들었어. 심지어 용병들 중에도 좀 배우고 세상을 경험한 이들은 골든 배틀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술자리에서 목소리를 높이곤 한다고.”
티노가 딜런의 의견에 동조했다.
제국, 아니 대륙의 정세 따위는 관심 없는 하룬이지만 현실에서도 역사학을 전공한 헤니는 달랐다. 또한 티노 역시 돌아다니며 자연스럽게 듣고 본 것들이 많아 세 사람은 제법 심도 있는 토론을 할 수 있었다.
의외로 타니엘라는 평생 마법만 연구해 온 터라 현실 문제에는 상당히 어두웠다. 그는 하룬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처럼 토론의 국외자일 뿐이었다.
“일단 역사적으로도 골든 배틀은 황제가 원한 제도가 아니라오. 또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하급 귀족들도 원하질 않지.”
딜런이 뜻밖의 사실을 발설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헤니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하자 딜런은 심각한 얼굴로 설명했다.
“이 제도의 역사는 제국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네. 당시에는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던 시기이니 황권이 안정되지 못했기에 몇 대에 걸쳐 황자들이 황권을 둘러싸고 처절한 살육전을 벌였네. 당대 황제를 제외한 모든 동년배, 아니 그 윗대 황족들까지 모두 말살되는 끔찍하고 잔인한 일들이 반복해서 벌어졌지.”
그것은 이곳이나 현실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었다. 어느 왕조든지 왕통이 안정될 때까지는 그런 골육상쟁이나 반란이 수시로 일어났었다.
“그래서 천 년의 역사 중에서 가장 영명하다는 평가를 받는 5대 황제 크라우스 폰 테론이 그 악습을 끊어내기 위해 당시 황실 마탑주와 건국 공신가인 3대 공작과 몇 년을 두고 고민한 끝에 이 제도를 만들었네.”
헤니는 그런 역사를 알고 있었지만 강해지는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일정 기간을 정해 두고 공정하게 세를 겨루어 승리하는 황자가 황제 위에 오르고 나머지 황자들은 직할령을 맡아 정치활동을 금하게 한 이 제도로 한동안은 쓸데없는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었지. 그래서 300년이 넘게 제국은 평화로웠고 번영을 이루었기에 대륙에 있는 다른 두 제국도 이 제도를 받아들인 거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제도는 새로운 지배자들을 만들고 말았네. 바로 골든 배틀 제도를 주관하게 된 보리스 공작가와 아이브러드 공작가를 중심으로 한 원로원이었지. 그들은 골든 배틀에 참가하지 않고 중립의 입장을 지키는 대신 황제에 준하는 권력을 가지게 되었네. 골든 배틀을 주관하기 위해 원로원만의 기사단 창설은 물론 마탑까지 소유할 수 있는 구너리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않아도 되는 원로원 직할의 영지까지 야금야금 얻게 된 것이지. 안정적인 황위 계승을 할 수 없었던 황제들은 골든 배틀로 심각한 전력 누수가 있었기에 안정적인 정국 운영을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기대거나 손을 잡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거지.”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다. 단지 비욘드 홈피에 간략하게 설명된 대로 그저 반복되는 내전 때문에 생긴 나름 괜찮은 제도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런 양강 체제가 지속되자 주군을 향한 충성심으로 무장된 기사들도 두 세력으로 갈리고 말았네. 마법사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말일세. 그래서 14대 황제와 19대 황제 그리고 23대 황제는 원로원과 직접 일전까지 불사해 승리한 전례가 있지만 그들의 뿌리는 강인하게 살아남았지. 제국 경제력의 근간을 쥐고 있는 8대 상단 중 세 개가 바로 원로원에 속하는 가문의 세력이고, 정보를 한 손에 쥔 제국 정보 길드와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어 비록 승리는 했으되 압도적인 승리를 하지 못한 탓에 그들의 존재와 힘을 완전하게 지워 버리지는 못했네. 그리고 언젠가부터 강성 성향의 황제들이 원인 모르게 죽는 일이 반복되고, 승냥이처럼 작위를 탐하는 귀족들과 기사들이 늘어나면서 골든 배틀이 심각하게 변질되었지.”
“그렇다면 틀림없이 원로원의 공작이 있었겠군요.”
헤니의 말에 딜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원래 왕정을 택한 어떤 정치형태든 신권과 황권은 대립 구조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황권이 두 개가 되어 버리니 기사와 귀족을 포함하는 신권 역시 두 개로 갈라지고 말았네. 원로원을 추종하는 세력들은 군부를 선택해서 중립을 표명하며 골든 배틀에서 벗어난 반면 작위 상승을 원하는 귀족들과 신분 상승을 원하는 기사들은 골든 배틀에 더욱더 극렬하게 끼어들게 되었지.”
인간의 욕심이 문제였다. 원로원은 신분 상승을 포기하는 대신 실리를 얻었다. 쓸데없는 전력의 낭비 없이 온전한 세력을 유지해서 재물과 실질적인 권리를 키워 나갔던 것이다.
“물론 원로원들이 그렇게 바라던 세력 구도는 유지할 수 없었네. 그들의 암암리의 견제에도 골든 배틀에서 연속해서 승리를 거두어 원로원들이 위협을 느낄 정도로 성장한 가문들도 나왔네. 네 번이나 연속해서 골든 배틀에서 승리한 포멤 공작가나 세 번 승리한 휴고 공작가는 최고 귀족 회의라는 기구를통해 원로원처럼 막강한 힘과 권력을 손에 넣었네. 그들 역시 원로원의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골든 배틀에는 참가하지 않지만 황제파라는 이름으로 황제를 좌지우지하게 되었지.”
복잡했다. 제국이라는 그 거대한 이름만큼이나 다양한 욕망을 품은 군상들이 온갖 모략과 술수를 쓰는 거대한 무대가 연상되었다.
“문제는 그사이 피폐해진 대부분의 제국민들이지. 귀족들의 삶이야 제국 초기에 비해 별로 달라진 것이 없지만 제국민들은 반복되는 골든 배틀 때문에 완전히 농노의 신세로 전락해 버렸네.”
“맞아요. 제국 초기에는 80%가 넘었던 자작농의 비율이 현재는 10%도 되지 않으니까요. 더구나 농업 생산성은 그 당시와 비교하면 절반 수준으로, 노동 가능한 남성의 숫자는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어요.”
헤니가 맞장구를 쳤다.
“헤니 말대로 지금 제국은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기사들 역시 세 개, 아니 나처럼 정치에 염증을 느낀 기사들까지 합하면 네 조각으로 갈라진 상황이지. 이 정도면 제국이라고 볼 수도 없게 되었네.”
딜런은 제국의 현 상황을 아주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다. 아마 그와 같은 영주들이나 기사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룬은 딜런의 말을 통해 이제까지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제국민들의 고단한 삶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지난번 요른 백작성 인근에서 농노의 어린 딸 때문에 벌였던 살육의 순간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마치 내가 한 일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는 걸까?’
미스터리였다. 분명히 자신이 했지만 꼭 남이 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물론 그때의 모든 시간들이 영화를 보는 것처럼 방관자적 시각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여기나 현실이나 힘없는 주민들만 죽어나는군.’
더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그런 대우를 과감히 떨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오랜 시간 동안 세뇌되고 생각 자체를 할 수 없도록 이런 가상현실 게임과 같은 놀이터가 제공된 것만으로 그런 부당한 대우를 거부할 의욕이나 거부감조차 쉽사리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에잇! 아무튼 있는 것들은 어딜 가나 똑같아.”
헤니가 한 소리에 일행은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각자 나름대로의 경험을 통해 이런 현실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심각한 얘기도 잠시, 호수에 비친 달빛의 향연을 본 사람들은 경치에 빠져 심각한 주제는 잊어버리고 각자 좋아하는 사람들과 산책을 하거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하룬은 여전히 딜런이 한 이야기가 떠올라 호수의 풍광을 제대로 완상할 수 없었다. 아무런 힘도 없는 보더러에 지나지 않는 그는 이 시간을 통해 현실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고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단지 문제 제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확실히 이런 문제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하룬에게는 실로 의미 있는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경험을 통해 심각함을 인식한 딜런과 해박한 지식으로 상황을 푸는 헤니의 대화를 통해 하룬은 강해지겠다는 목표만이 아닌 다른 생각을 마음속에 품게 되었다.
이 테론 제국의 현실을 심도 있게 생각하고 현실과 연계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하긴 테베 백작성도 마찬가지였지.’
자신과 인연이 있는 브리엘라 황녀의 후원자 중 한 명인 테베 백작령만 해도 최근 10년 이상 가혹한 세금을 거두어 영지민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피폐라는 단어로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나름 인자한 영주로 소문난 테베 백작령이 그럴 정도이면 다른 영지들은 더 심할 것이다. 물론 딜런처럼 아예 낙후되고 고립된 영지를 가지거나 권력 욕심이 없는 영주들이 다스리는 곳은 덜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형평성의 문제 때문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경우도 많았던 것이다.
더구나 영주의 입장에서는 세금을 더 많이 거둘수록 좋기 때문에 이웃 영지를 핑계로 동일하거나 약간 적은 세금을 거두는 영지들이 태반이었다.
‘이거야 원, 현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네. 0.1%의 상위 계층이 95% 이상의 재화를 가지고 있으니.’
유니온 정부에 세뇌되어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자신들이나 주기적인 골든 배틀로 죽도록 일하고도 겨우 입에 풀칠만 할 수 있는 이 테론 제국의 대다수 사람들이나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뭔가 생각에 잠겼던 헤니가 숙영지를 둘러보고 온 티노에게 뜬금없이 물었다.
“난 언젠가는 사회를 바꾸고 말 거예요. 희망의 반대말이 무엇인지 알아요, 티노?”
“절망이겠지. 우리 같은 하류 인생들이 평생 떠올리고 사는.”
“아니요. 희망의 반대말은 절망이 아니에요. 그것은 포기랍니다. 절망은 그래도 다시 일어날 희망의 싹이라도 있지만 포기하면 아예 잠재적인 가능성까지 사라지고 마는 거지요.”
“후후, 그런가? 아무리 봐도 우리 헤니는 정말 똑똑해. 난 못 배워서 그런지 똑똑한 사람이 좋더라. 아니지. 그냥 똑똑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똑똑한 거 말이야. 사실 높은 놈들 중에 멍청한 놈은 없을 테니까.”
티노의 말에 하룬은 가슴 깊이 공감했다. 사실 배운 것이 없기로는 동년배 중에 그가 가장 처질 것이다. 의무 교육조차 제대로 다 받지 못했고, 학교를 다닐 때도 공부하거나 수업을 들은 기억이 별로 없었다.
자신이 진짜 뭔가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이 비욘드 게임을 시작하고 나서였다.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가상의 세상을 살아가면서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들을 스스로 깨닫고나 듣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성에 대해서도 그랬다. 심지어 친동생과 다름없는 벨과의 접촉을 통해 이상야릇한 감정까지 느꼈을 정도로 이성에 무지하고, 경험도 전혀 없었던 그는 이 비욘드를 통해 여러 여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투박하지만 순수한 정을 주었던 엘저, 아름답고 똑똑하며 카리스마까지 있는 세류, 처음에는 까칠했지만 오랜 시간을 같이하며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자 잔잔한 열정을 느끼게 했던 홀 그리고 같이하면 같이할수록 호감이 생기는 이 헤니에 이르기까지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여자를 만났다.
그중에 가장 편한 사람은 당연히 엘저지만 여자로 인식한 것은 홀이 처음이었다. 첫사랑이라는 말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던 홀이지만 그는 그녀가 NPC라서가 아니라 뭔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다.
세류도 그렇고 지금의 헤니까지 한결같이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여자들이다. 홀과 세류는 아름다운 외모까지 갖추었지만 하룬은 그녀들이 자신에게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여자는 이제까지 만난 사람 중에서 헤니가 유일할지도 모른다. 비록 용모는 평범하지만 그가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려 주고, 그가 가는 길에 제대로 조언해 줄 수 있는 동료이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똑똑한 여자는 부담스러워. 헤니는 자신만의 신념과 강한 의지가 있어 더욱더 빛나고 매력적이지만 어쩐지 난 부담스러워. 잘난 것 하나 없는 난 그저 나만 바라보고 내게 의지할 수 있는 평범한 여자가 더 좋아.’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신이 우습게 여겨졌다.
‘후훗,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나 혼자 머릿속으로 난리굿을 치는군.’
하룬은 피식 웃었다. 앞서 가는 세 사람이 열나게 제국의 현실에 대해 토론하는 사이 그는 뒤로 처져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나저나 이놈의 세상 한번 확 뒤집어 버릴까?’
현실이야 능력이 없어 마땅한 방법이 없지만 이 세계라면 뭔가 수가 있을 것도 같았다. 아레스를 시켜 던전의 위치에 대해 터트려도 난리가 날 것이다. 물론 정보 길드들이야 이 기회에 어마어마한 돈을 벌려고 했던 터라 제대로 맛이 가겠지만 말이다.
아니면 스토리 퀘스트 자체를 박살 낼 수도 있다. 적당한 후보 몇을 설득하고 세력을 결집해서 골든 배틀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왕국으로 분리해 버리는 것이다.
물론 전쟁은 필수겠지만 어차피 골든 배틀도 전쟁이 아닌가? 황자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동시에 그렇게 독립해버리면 민중의 적들-원로원, 황실, 최고 귀족 회의와 제국 정보 길드-역시 세력이 분산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이 던전으로 제국의 힘깨나 쓴다는 세력들과 랭커 급 유저들을 모두 끌어들여 한 번에 끝장을 보는 것이다. 어차피 이 고요의 땅은 평범한 능력을 가진 자들은 오기가 힘든 곳이니 여기에 오는 자들을 모두 몰살시켜 버리면 골든 배틀 따위처럼 주기적으로 힘을 소진하는 제도는 사라져 버릴 것이다. 다른 제국들이 좌시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딜런의 말대로라면 다른 제국들도 어쩌면 비슷한 상황을 겪느라 테론 제국을 침범할 생각조차 못 할지도 모른다.
‘완전 공상이네.’
하룬은 피식 웃으면서도 이 정도로 스케일이 커진 자신이 약간은 대견스러웠다. 생각해 보면 비욘드를 하기 전까지는 사고의 범위가 이 정도로 넓지 않았다. 그저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누군가를 원망하는 데 그쳤을 뿐 이렇게 체제 자체를 왕창 흔들 정도의 상상은 떠올릴 수 없었다고 보면 된다.
‘가만. 꼭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던전의 위치와 던전에 있는 마법서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드러난다면 꼼짝하지 않았던 원로원이나최고 귀족 회의도 지금처럼 팔짱만 끼고 있지는 못할걸. 더구나 만에 하나라도 내가 유물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면 박 터지게 싸우는 사이에 재빠르게 행동하는 것밖에 없을지도.’
하룬은 처음에는 공상에서 시작된 생각에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현실이라면 어떨지 모르지만 이곳 비욘드라면 자신의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현실을 고려해서 무의식중에 소환하기를 꺼렸던 싸가지의 능력까지 고려하면 그의 능력은 꽤 높이 올라간다.
호숫가에서 하룻밤을 머문 사람들은 다시 하루의 휴식을 더 가지기로 했다. 그동안 제대로 로그아웃하지 못했던 이방인들도 그렇지만 체력이 약한 타니엘라가 무척 힘들어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하룬은 아레스와 매그럼 그리고 초른을 따로 불렀다.
“아레스, 던전의 위치를 알려 주지요.”
“네? 정말입니까? 대충의 위치만 겨우 알 뿐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레스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
먼저 떠난 아반 일행이나 발트랑 일행을 부러워했던 이유가 바로 던전의 위치 때문이었다. 여행 도중 몇 번이나 물었지만 하룬은 자세하게는 모른다고 대답했었다. 물론 영상을 통해 몇 가지 단서가 있어 대충의 위치가 알려지긴 했지만 실제 던전을 찾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곳을 탐색해야만 했다.
영상에 나온 장소들을 근거로 방송사에서 추측한 던전의 위치는 사방 60킬로미터가 넘는 엄청난 범위에 들어 있었다. 그 안에 산들이 자리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사실 이 정도 범위를 수색하는 것은 엄청난 인력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정확한 위치를 안다면 그런 노고와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테베 백작령에 있는 제국 정보 길드를 찾아간 적이 있었소.”
그걸로 대답은 충분했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하룬은 그곳에서 정보를 얻은 것이다. 대충의 위치가 밝혀지긴 했지만 자세한 위치는 또 다른 가치를 지닌다. 또 하나의 대박 정보인 것이다.
아레스는 물론이고 두 GM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빨리 현실, 아니 우리 세계에 다녀오겠습니다. 이 정보 역시 큰돈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대장!”
“저희도 당장 갔다 오겠습니다. 상부에서 알면 무척 좋아할 겁니다.”
매그럼과 초른은 엄청난 정보에 신이 났다. 이 정보까지 올라간다면 그들은 승진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덤으로 엄청난 보상금도 바랄 수 있다.
“부탁이 있소.”
“네, 말씀하십시오.”
세 사람은 현실과 게임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 복덩이가 되어 버린 하룬의 부탁에 귀를 기울였다.
“지난번 던전의 존재에 대한 정보 때문에 우리 돌풍 용병대는 제국 정보 길드와 몇 개의 세력으로부터 척살령을 받았소.”
그의 말에 세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사실 그들이 정보의 출처를 밝힌 것 때문에 야기된 상황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보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으면 좋겠소. 만약 구체적으로 물으면 돌풍이 다리를 놓아 소개해 준 정체를 모르는 정보 상인에게서 거액을 주고 입수한 것이라고 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저희도 잘 알겠습니다.”
세 사람은 지은 죄가 있기에 두말없이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지금 많은 사람ㄷ르이 아이리드 산맥을 향하거나 넘고 있을 거요. 그들이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습지 외곽을 돌아 테베를 거쳐 이곳으로 오는 길까지 알리도록 하시오. 굳이 아이리드 산맥을 넘을 필요가 없으니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올 수 있을 거요. 아레스는 방송 시점을 그들의 선발대가 이 고요의 평원에 도착하는 시기에 맞추도록 동료들에게 말해 놓으시오.”
아이리드 산맥을 넘지 않아도 테베 백작령과 이어지는 습지의 존재를 아는 이는 별로 없다. 아마 이 정보가 알려진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안전하게 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일정 수준 이상의 무력은 갖추어야겠지만 말이다.
“알겠습니다.”
세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마음의 여유도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로그아웃했다. 한시라도 이 정보를 넘겨야 했다.
‘이곳에서 골든 배틀을 끝장내 보자.’
하룬은 단단히 마음을 그러잡았다. 사고를 치기로 결정한 것이다. 제국 정보 길드와 던전을 발견한 세력들의 뒤통수를 제대로 한번 갈기기로 작정했다.
마법서의 내용이야 헤니의 말에 의하면 추측에 불과하니 터트릴 수 없겠지만 던전의 위치는 언젠가 드러날 일이다. 다만 그는 빠른 시간 내에 이 세계의 강자들이 이곳에 결집하게 만드는 것이 일조할 뿐이다.
쓸데없이 힘없는 민초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대규모 전쟁보다는 기준 이상의 실력자들끼리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어차피 용병대도 키우지 못한 판에 골든 배틀에 참가해서 좋은 성적을 올려 보상을 받는 스토리 퀘스트는 이미 안중에도 없는 하룬이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