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이사 (79/278)

《이사》

 접속을 해제한 하룬은 허공에 떴던 자신의 몸이 부드럽게 바닥으로 착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기다렸어, 오빠.

 무언가 바쁘게 체크하던 벨이 그를 반겼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어?”

 -호호호! 맞혀 봐, 오빠.

 “뭘?”

 벨이 활짝 웃는 것을 보니 자신도 기분이 좋아졌지만 왜 그렇게 기쁜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뭔데?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잖아.”

 -호호호. 뜸을 들이고 싶지만 오빠가 바쁜 거 같으니 실토해야지. 실은 인공위성과 접속을 했어.

 “정말? 하하하, 우리 벨이 드디어 원하던 것을 하나 이뤘네.”

 최근에 벨이 가장 신경 쓰는 일 중 하나가 바로 위성과 접속하는 것이었다. 지구 궤도를 돌고 있는 위성들 중에는 아직도 작동 가능한 것들이 꽤 있었다. 종말 시대 말에 우주 개발과 군사용으로 띄운 위성들 중 대형 유니온들이 쓰지 않는 위성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이다.

 일단 위성과 접속하면 실시간으로 유니온 밖의 지역들에 대해 정밀한 각종 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다. 유니온 밖에 있는 새로운 거주지에 대한 정보 떄문이라도 꼭 필요한 일을 드디어 벨이 해낸 것이다.

 “그래, 근처에 위험한 곳은 없고?”

 -몇 군데 있었어. 그곳으로 가는 도중에 지진 때문에 땅이 갈라진 좁고 깊은 협곡들도 있었고, 하르크를 비롯해서 종류를 알 수 없는 변종 생물들도 다수 발견됐어. 아마 물이 있는 곳이라 변종 생물들이 많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버려진 곳 같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사용 가능하다면 유니온 측에서 버릴 리도 없고, 영흥 마을에서 쓰지 않을 리가 없었다.

 -후훗. 내가 뭘 알아냈는지 알아, 오빠?

 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녀석의 큰 눈에 뭔가 말하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후후, 우리 벨이 뭔가 굉장한 것을 발견했나 본데, 뭐야?”

 -안 가르쳐 주지.

 벨이 가볍게 앙탈을 부렸다. 그러는 녀석의 얼굴에 기쁜 표정이 가득한 것을 보니 뭔가 제대로 된 정보를 건진 것 같았다.

 “뭐야? 뭔데 그래?”

 하룬은 벨의 옆구리를 간질였다. 비록 외형이지만 이미 인간의 육체를 가지게 된 벨은 이상하게 간지럼을 잘 탔다. 신경세포를 너무 예민하게 만든 거 아닌지 모르겠다.

 -하아, 하악! 그, 그만. 그만, 오빠. 항복! 항복이야!

 벨은 깔깔거리고 웃으며 그의 품을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하룬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몸을 풀어 준 후에도 부르르 몸을 떠는 녀석의 눈에는 눈물 한 방울이 맺혀 있었다.

 “뭐야?”

 -칫, 나빠!

 벨이 짐짓 토라진 얼굴로 잠시 애를 태우더니 배시시 웃으며 귀여운 입을 몇 번 오물거리고는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다.

 -오빠, 우리 새집까지 뚫린 지하 도로를 찾았어.

 “으응, 그게 무슨 소리야? 지하 도로라니?”

 -여길 봐, 오빠.

 벨은 둘의 앞쪽에 홀로그램 영상을 띄웠다.

 -유니온 초기에 변종 생물들의 위협 때문에 다른 유니온이나 광산과 같은 중요한 곳까지 지하 도로를 건설하는 일이 많았어.

 “흠, 그렇구나.”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변종 생물들의 위협과 수시로 바뀌는 자장의 변화로 지상로와 공중로가 막히면서 대안으로 지하도로가 건설되었을 것이다.

 “그럼 지금 유니온들도 지하 도로를 통해 다 연결되어 있는 거야?

 -응, 당연하지. 안 그러면 유니온 간 무역을 할 수 없으니 말이야. 하지만 유니온 체제가 고착되면서 그 이동 횟수는 현저하게 줄었어. 특별히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지하 도로를 이용하는 것을 유니온 지도층이 꺼리니까 말이야.

 그러면서 벨은 몇 가지 자료를 보여 주었다. 그것은 일급비밀로 분류된 정보들이었다. 벨이 위성과 접속하면서 새로운 자료들을 많이 입수할 수 있었다.

 벨이 찾아낸 자료를 보면 초기에는 유니온 간 이동이 굉장히 잦았다. 정치적 군사적 만남이 많았던 것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지식의 교류였다. 특히 한꺼번에 사라진 많은 과학 지식 때문에 과학자들의 교류는 중요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유니오 정부가 의도하지 못했던 일들이 발생했다. 초기라서 아직 유니온 간의 경제력이나 거주 환경이 판이하게 달랐던 때라 과학자들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보다 더 좋은 조건들을 제시하는 유니온으로 망명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잦아지면서 유니온들은 처음의 협력 관계에서 벗어나 서로 자기 유니온의 인재들을 납치하고나 금고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강경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부정적인 현상도 있었다. 생활환경이나 정치체제가 더 자유롭고 민주적인 다른 유니온들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주민들에게 소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던 것이다.

 종말 시대를 거치면서 파괴력이 강한 일부 무기들이 남아 있었지만 전쟁까지 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소수의 핵무기와 양자포나 중성자포와 같은 강력한 무기들은 아직 쓸 수 있었지만 한 번 더 전쟁을 하면 정말 종말이라는 인식 때문에 자제한 덕분이었다.

 시간이 더 흐르면서 각 유니온들을 장악한 지도층은 권력의 세습을 고착화시켰다. 처음의 혼란과 경쟁에서 살아남은 그들은 유니온의 주민들을 손쉽게 관리하고 권력응ㄹ 세습하기 위해 변종 생물의 위협을 들어 유니온 간 이동을 최소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럼 유니온 안에 그 도로의 시작점이 있겠네?”

 -응. D-4구역에 있는 버려진 공장 지역의 한 작은 공장 안 지하 500미터에 있어. 예전 기록을 보니 그곳에 궤도 자장 카 기지가 건설되다가 말았더라고. 그 주택 지하를 정밀 스캔해 보았는데 지하로 이동할 때 쓰는 자장 엘리베이터와 자장 로드 카도 그대로 있었어.

 마음이 급했다.

 “그곳은 어때?”

 그 말은 현재 그 집을 구입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지만 벨은 금방 알아들었다.

 -가능해. 유니온 주택 관리국에 접속해 보니 매물로 나와 있어.

 버려진 공장 지대는 하룬도 잘 알고 있었다. 유니온 초기까지 남아 있었던 로봇들을 이용해서 물건을 생산하던 공장들이 밀집한 지역이다. 하지만 로봇들에 대한 대부분의 지식들이 사라져 한번 고장이 나면 다시 수리하거나 생산할 수 없게 되자 가동을 멈춘 곳이었다.

 물론 살아남은 유니온의 과학자들이 모두 나서 로봇들을 연구한다면 몇십 년이면 수리할 정도의 지식을 쌓을 수 있겠지만 과학자들의 수는 한정되어 있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안전한 유니온에 자리를 잡은 휴먼들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연구와 생산 과정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로봇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자리가 없어 심각한 소요 사태까지 일어났던 대부분의 유니온들은 로봇 대신 싸고 부려 먹기 쉬운 인간들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주로 C구역에 건설된 수백 층 높이의 대형 공장들 때문에 현재는 공장이 아니라 거주지로 사용되는 그 지역은 넓은 공간을 원하는 일부 주민들과 혹은 대형 기업의 기숙사로 재건축되었다.

 사실 살 수 있는 형편이 안 되어 주택을 사지 못하는 것이지 특수한 용도를 가진 곳을 빼면 주민들은 D와 F구역에서 어떤 지역의 집이라도 살 수 있었다.

 물론 C구역 이상은 유니온 정부로부터 신분과 직업에 대한 정밀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곳 주민들은 소위 말하는 엘리트, 즉 유니온 정부가 인정하는 능력자가 아니면 사는 것은 고사하고 임대조차 할 수 없었다.

 “좋아! 얼마야?”

 -건물들이 많이 노화되었고 소음을 비롯한 생활환경이 좋지 않아 가격은 매물은 2억 그리고 임대는 월 40만 원에 나와 있어.

 그 정도면 충분했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이미 아레스로부터 해란에게 거액의 원고료가 전해졌다는 말을 들었으니 자금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하룬은 이제 갓 성년이 되어 직업도 없는 처지라 유니온의 눈길을 의식해서 매매가 아니라 임대 조건으로 비어 있는 그 작은 공장을 계약했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곳의 임대 계약을 취소했다. 빈 곳이니 당장 몇 가지만 들고 이사 가면 끝인 것이다. 이곳이야 붙박이 가구를 제외하면 옷가지와 그릇 등 개인적인 물건은 거의 없었다.

 이제 진수만 만나면 이곳에서의 삶도 끝이다. 몇 년을 살아온 곳을 떠난다면 다른 이들은 아쉬움이 많을 테지만 하룬은 막장까지 몰려 할 수 없이 온 곳이기에 시원함이 더했다.

 여느 때라면 한창 게임할 시간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진수는 게임에 접속하진 않았다.

 “좁은 곳에서 하루 종일 있으려니 힘들어서 말이지. 완전히 미쳐 죽기 일보 직전이야. 그나저나 넌 언제 오는 거냐?”

 진수는 최근 며칠 동안 거의 접속을 끊고 산다고 했다. 하지만 수시로 들락날락거리며 하룬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형, 나 오늘 이사하려고요.”

 “정말?”

 일전에도 이사 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기에 진수는 무척 궁금해했다.

 “네, 캡슐도 바꿔야 하는데 집이 너무 좁아서 돈이 생긴 김에 조금 넓은 곳으로 이사하려고요.”

 “그래? 어디로 가는데?”

 “D구역의 폐공장 지대에 있는 작은 폐공장이에요. 폐쇄한 공장을 주택으로 개조하긴 했는데 우리 방 다섯 개 정도 크기밖에 안 돼요. 다만 오래되긴 했지만 넓어서 운동할 공간도 충분하고 오염되긴 했지만 작은 정원도 있으니 땅도 밟을 수 있을 거예요.”

 하룬의 말을 듣던 진수의 눈이 몽롱해진다. 넓고 정원이 있는 집은 유니온 주민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곳이다.

 “일단 지금 형에게 3천 골드만 먼저 입금할게요. 나도 지금 형에게 가느라고 유저 타운이 있는 마을이나 영주성에 들르지 못해서 입금을 못 했어요.”

 “괜찮아. 나중에 주면 되는데, 뭐. 가만있자, 천 골드면 지금 환율이 골드당 28,000원 선이니까…… 후압!”

 가만히 계산하던 진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엄청난 거액이었던 것이다.

 “하하하. 그래도 아직 형에게 줄 돈이 한참 더 남았는데요.”

 진수의 홈 컴을 통해 입금을 완료한 하룬이 하는 말에 옆에서 지켜보던 진수의 눈이 몽롱하게 변했다.

 “흐흐흐, 난 이제 정말 부자다! 흐흐흐.”

 진수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들이 스쳐 가고 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이상하게 물질에는 그다지 욕심이 없는 하룬과 달리 평범한 진수는 가지고 싶은 것들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일단 임대료를 내고 나면 나도 최상급 캡슐부터 사야지. 흐흐, 친구 녀석들이 부러워서 죽으려고 할 거다. 아무튼 넌 내가 만난 최고의 행운이다.”

 잠시 그 기분을 만끽하던 진수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

 “흐음, 가만. 그럼 이참에 나도 같이 이사할까?”

 “뭐, 그래도 좋고요.”

 비록 그 대상이 진수이긴 하지만 원래 혼자 오래 살아왔고, 특수한 존재인 벨 때문에 꺼리는 바는 있었지만 앞에서 대놓고 거절하긴 좀 그랬다. 한편으로는 진수라면 같이 사는 것도 기대가 되긴 했다.

 “그러자. 난 친구들도 수시로 들락거리고 천성이 지저분해서 나랑 같이 살면 네가 너무 스트레스 받을 거다. 그러니까 같이 사는 것은 좀 그렇고, 네 옆집 혹시 비지 않았냐? 그 동네 거주 지역으로는 별로 인기가 없는 것으로 아는데.”

 진수가 그렇게 이야기해 주니 마음이 편했다. 이사를 가서도 수시로 이렇게 왕래하면 좋을 것 같았다.

 “검색해 보면 알죠.”

 둘은 유니온 주택 관리국에 조회를 해 보았다.

 “오케이!”

 마침 하룬이 계약한 공장 바로 옆 공장도 비어 있었다. 비록 공간이 넓긴 하지만 주거용으로 쓰기에는 어정쩡하고, 서민들에게는 월 임대료가 만만치 않아 빈 곳이 많았다.

 말이 나오자마자 화상으로 주택 관리국 직원과 잠시 상담하고 하룬에게 입금받은 돈으로 1년 임대료를 계좌를 통해 이체한 진수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흐흐, 내게도 이런 봄날이 올 줄이야. 흐흐흐. 넌 정말내 보물이다. 크크크! 이젠 우리 집이 완전히 아지트가 되겠어.”

 사람들을 좋아하는 진수는 갈 데가 없는 친구들의 아지트로 자신의 집을 제공할 생각인가 보다. 입이 헤벌쭉 벌어져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하룬이 다 기분이 좋아졌다.

 진수는 생각만으로도 좋은지 하룬을 안고 방방 뛰었다.

 “이럴 게 아니지. 어서 청소부터 해야지. 오늘 방 비우려면 서둘러야 해. 친구 놈들 전부 다 불러야지.”

 들뜬 진수는 하룬의 존재도 잊어버리고 영상 폰을 누르기 시작했다.

 “형, 난 먼저 갈게요.”

 “야, 인마! 정말이라니까. 내가 대박 아이템 하나를 건졌다니까. 무려 3천 골드짜리야. 흐흐흐, 맞다니까. 옆집에 사는 동생이랑 같이 말이야. 그래서 오늘 당장 이사하려고 계약까지 했다니까.”

 진수는 통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손을 들어 인사를 대신할 정도로 기쁨과 흥분에 겨워 찢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빨리 왔네, 오빠.”

 집으로 돌아온 하룬은 입을 쩍 벌렸다. 어느새 벨이 이사할 준비를 끝낸 것이다. 사실 옷가지 몇 개를 빼면 이사할 짐도 거의 없지만 그래도 살다 보면 살림살이가 조금씩 늘기 마련인데 어느새 벨이 그 모두를 다 캡슐에 넣은 것이다.

 “자, 이제 캡슐만 줄이면 되는 거지? 짜안!”

 벨이 장난스럽게 말하는 순간 캡슐이 서류 가방 크기로 줄어 버렸다.

 “으응?”

 하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캡슐이 크게 확장되는 것은 내부에서 직접 보았지만 이렇게 작게 축소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더구나 벨은 아직 그대로 옆에 있는 상태였다.

 “이젠 캡슐과 네 몸이 분리 가능한 거야?”

 “호호. 아직은 아니야, 오빠. 본체와 떨어질 수 있는 거리는 고작해야 50미터가 한계니까. 하지만 작업실만 완성되면 내 몸을 완전히 휴먼체로 바꿀 수 있을 거야. 기대해, 오빠.”

 곧 휴먼체가 된다니 기대가 된다. 녀석이 완전한 휴먼체가 되면 같이 밖에도 나가고 또래 친구들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줄 생각이었다.

 “자, 이제 가자. 넌 어떻게 할래?”

 “관리인이 오고 있어. 난 본체로 돌아갈게, 오빠.”

 그 말과 함께 벨은 마치 이전의 홀로그램 영상이었던 때처럼 순간적으로 캡슐과 융합되었다.

 “후우, 굉장하군.”

 새로 이사한 폐공장에 도착해 근처 관리국에 들러 인증 절차를 마치고 공장으로 들어선 하룬은 혀를 내둘렀다.

 그야말로 쓰레기 천지였던 것이다. 쓰레기와 먼지 그리고 모래가 무릎 높이로 쌓인 마당은 최소 몇 년 이상 이 상태로 방치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동안 관리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어쩐지 청소기와 압착 쓰레기봉투를 말하기도 전에 빌려주더라니.’

 정기적으로 관리를 했어야 했는데 관리 직원들이 귀찮아 방치한 것이리라. 입주하는 사람들 입장에서야 대충 청소를 한 거나 이렇게 놔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새집에 입주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아주 깨끗하게 구석구석까지 청소하기 마련이니 말이다.

 하룬은 쓰레기 더미를 헤치고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푸악! 커억!”

 세상에 먼지가 그리도 많을 수 있는지 처음 봤다. 약 20제곱미터의 공간에는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놓고 간 물건들과 그 위에 내려앉은 먼지들이 가득했다.

 하룬은 바닥 한구석을 치우고는 일단 캡슐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벨, 다 도착했다.”

 그의 말과 함께 서류 가방 크기의 캡슐에서 액체가 흘러나오더니 이내 벨의 형상을 만들었다. 어떻게 세포 단위의 육체를 만들 수 있는지 몰라도 아무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웃, 정말 너무 지저분해.”

 벨은 입부터 가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보기에도 상태가 좀 심했던 것이다. 주택 관리국에서 촬영한 영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우선은 청소부터 해야겠다.”

 하룬은 팔부터 걷었다. 일단 바닥의 먼지들부터 어떻게 해야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먼지가 풀풀 날리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청소는 반나절이 꼬박 걸리고 나서야 겨우 끝났다. 그동안 게임의 영향과 수련으로 몰라보게 체력이 좋아진 그와 지칠 줄 모르는 벨이 아니었다면 이삼일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먼지를 다 제거하고 나니 실내가 좀 그럴듯해졌다. 방으로 쓸 만한 공간과 거실로 쓸 공간으로 분리된 내부는 그럭저럭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

 다행히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가구를 버리고 가서 제법 구색이 맞았다.

 마당 청소는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하려면 하겠지만 굳이 꽃과 같은 식물을 재배할 것도 아닌데 힘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사람이출입은 해야 할 것 같아 대문에서 집까지 오가는 길만 청소기로 대충 먼지와 모래를 빨아들였다.

 그사이 마침내 진수도 이사를 왔다. 친구 일곱 명이랑 같이 온 진수는 그들에게 하룬을 소개하고는 청소를 위해 청소기를 가지고 갔다. 이사 때문에 들뜬 것은 진수만이 아니었다. 친구들도 모두 흥분한 기색이 완연했다.

 집으로 들어온 하룬에게 벨이 손을 흔들며 불렀다.

 “오빠, 여기야!”

 “어디?”

 벨이 드디어 지하 공간과 연결되는 지점을 찾은 모양이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다름 아닌 방이었다. 방으로 들어간 하룬은 그녀가 가리키는 벽을 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벽인데?”

 “한번 만져 봐.”

 벨의 말대로 손으로 벽을 쓸자 작은 혹들이 느껴졌다. 눈으로는 분간할 수 없는 작은 혹들이 무려 일곱 개나 있었다.

 “혹시 북두칠성?”

 혹들이 튀어나와 있는 위치가 그랬다. 그 크기도 얼추 들어맞았다.

 “맞아. 그런데 열 수 있을 거 같아?”

 벨이 생글거리며 물었지만 하룬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유니온 초창기에 많이 쓰이던 일종의 시건장치인데 순서대로 눌러야만 열리는 특별한 장치야. 오빠, 가장 큰 별부터 차례로 힘을 주어 봐.”

 하룬은 벨이 말하는 대로 국자의 자루부터 시작해서 일곱 개의 혹을 차례로 힘주어 눌렀다. 그러자 소음과 함께 벽이 아래로 빠지며 사람 세넷이 나란히 설 수 있는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아마 이게 자장 이동기일 거야.”

 벨의 말과 함께 그 공간에 작은 불이 켜지더니 뭔가 구동되는 소리가 들렸다.

 “맞네. 정격 자장 발생기가 구동하는 소리야.”

 “그럼 한번 타 볼까?”

 서류 가방을 가진 벨과 함께 그 작은 공간으로 들어가자 아래쪽으로 사라졌던 벽이 올라갔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던 실내에 작은 영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수백 층 높이의 건물이면 어디에나 있는 자장 엘리베이터에서 익히 보았던 조종 판이었다.

 다른 것은 단지 위아래를 가리키는 화살표와 스타트 버튼으로만 구성된 간단한 조종 판이라는 것밖에는 없었다. 아래로 향하는 화살표와 녹색 스타트 버튼을 누르자 둘의 몸이 약간의 진동과 함께 빠른 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탑승감이 좋은데.”

 “그러게. 최소 150년은 운행하지 않았는데도 잘되네.”

 유니온 초기의 기술력이 현재보다 훨씬 좋았다는 것을 지금 이 자장 이동기가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정상적으로 가동하는 것은 물론  탑승 감각도 탁월했다.

 벨의 말에 따르면 지하 500미터라고 했지만 20초도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현재 유니온에서 운행하는 것들과는 달리 귀의 감각도 문제없었고, 울렁거리는 것도 없었다.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오니 흐릿한 불빛 사이로 자동차 같은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와아! 마그네틱 슈퍼 카야!”

 벨이 탄성을 질렀다. 바퀴가 없는 곳을 보니 슈퍼 카가 맞았다. 현재 시판 중인 최고급 자장 자동차, 즉 마그네틱 슈퍼 카와 비슷한 형태의 자동차가 그들의 눈앞에 있었다.

 강화 유리를 비롯한 차체에 먼지가 거의 없는 것을 보면 이 엄청난 공간이 진공 상태로 보존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시간의 힘이 이렇게까지 작용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유니온 초기의 기술력은 지금에 비해 몇 배나 더 뛰어났을 것이다.

 마그네틱 슈퍼 카의 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앉고 보니뒤쪽에 모두 여섯 개의 좌석이 있었다. 실내 공간도 넓고 의자 사이의 간격도 넓어 무척 편안해 보였다. 오래되었지만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터라 깨끗하고 냄새도 나지 않았다.

 “흐음. 솔라튬 합금으로 만든 거네.”

 벨이 감탄했지만 하룬은 그런 전혀 들어보지 못한 합금 대신 손잡이를 잡았다. 운전대를 잡은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사실 유니온의 모든 이동 수단은 지정된 자장 로드를 이용하고 그 궤도와 운행 속도가 미리 입력되어 자동으로 운행되지만 극히 일부의 차들은 종말 시대의 자동차처럼 엑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달아 직접 운전이 가능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 슈퍼 카라고 불렀다. 가격은 무려 5억이 넘을뿐더러 노블을 비롯한 유니온의 중요 인사가 아니면 살 자격조차 없어 일반 주민은 평생 한 번 탈 기회도 없었다.

 그렇게 운전대를 잡고 나니 계기판과 실내에 불이 들어왔다.

 “호오, 진짠데!”

 “호호호, 오빠가 이렇게 흥분하는 건 처음 보네.”

 “꼭 한 번 타 보고 싶었거든.”

 하룬은 혀로 마른 입술을 핥으며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우우웅.

 소음과 함께 슈퍼 카가 지면에서 일정한 높이까지 떠올랐다. 그와 함꼐 전면 유리에 홀로그램으로 글자가 생성되었다가 사라져 갔다.

 -자장 로드를 활성화합니다. 3, 2, 1. 활성화되었습니다. 이제 편안한 운행 하십시오.

 액셀을 밟자 슈퍼 카가 앞으로 쑥 튀어 나갔다.

 “오우!”

 하룬은 경악성을 질렀다. 차가 앞으로 튀어 나가는 속도가 생각보다 너무 맹렬했기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하룬은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급정거하는 바람에 몸이 심하게 앞으로 쏠렸다. 벨이 그의 허리를 꼭 감았다.

 “이거 아주 물건인데.”

 “호호호, 너무 즐거워 보여. 나도 신나고.”

 “자, 그럼 다시 가자고.”

 이번에는 부드럽게 액셀을 밟았다. 역시 생각대로 천천히 앞으로 운행하는 슈퍼 카였다.

 엄청난 빠르기로 날아가는 슈퍼 카의 속도감은 전신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심장이 사정없이 박동하고 동공은 두 배는 더 커진 것 같다. 휙휙 지나가는 통로에 박힌 불빛들이 순간적으로 연결될 정도의 엄청난 빠르기에 온몸에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며 흥분도와 쾌감을 끌어 올렸다.

 “죽인다!”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좋아하던 하룬은 속도 게이지가 최고치인 520Km/Hour를 가리키자 서서히 발에서 힘을 풀었다.

 “그렇게 좋아?”

 허리를 단단하게 감은 벨이 옆구리에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 완전한 휴먼체가 되지 않은 그녀로서는 신기한가 보다.

 “응. 기분이 끝내줘.”

 하룬은 이후로도 10여 분 정도 더 운행했다. 이대로 아주 먼 지구 반대편까지 운전해서 가고 싶었지만 속도가 워낙 빠른 터라 하루 반을 걸을 거리를 십몇 분 만에 온 것이다.

 “여기구나.”

 차가 도착한 곳은 작은 격납고였다. 그곳에는 붉은 외장을 가진 마그네틱 슈퍼 카가 한 대 더 서 있었다. 그리고 방 한 칸 크기의 거대한 컴퓨터도 보였다.

 하룬과 벨은 거대한 컴퓨터 앞으로 갔다. 막 컴퓨터가 작동하는지 살펴보려고 했을 때 컴퓨터의 곳곳에 불이 켜지며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아즈만의 기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아즈만이라고 합니다. 휴먼력 53년에 에이션트 마더컴 ‘가이아’가 제조했으며 용도는 연구소와 자장 로드를 비롯한 부속 시설들의 관리와 주인의 연구를 돕는 것입니다. 마스터 인증을 해 주십시오. 인증 방법은 유전자 정보 스캔이니 제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하룬이 벨을 돌아보자 그녀가 생글거리며 그의 옆구리를 밀었다.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 후일을 기약한 채 아즈만을 남겨 연구소가 포함된 기지와 지하에 건설된 자장 로드를 관리하게 하고 철수했나 봐. 오빠가 마스터 인증을 해.”

 “내가?”

 “아마 처음 이곳에 오는 사람을 주인으로 인증하는 시스템일 테니까 마음 놓아도 돼.”

 “그럴까?”

 과연 그럴지는 알 수 없지만 하룬은 벨이 권하는 대로 아즈만의 앞에 섰다. 아즈만의 동체로부터 수없이 많은 광선이 쏘아져 그의 유전 정보를 확인했다.

 -마스터 인증이 끝났습니다. 임시 마스터가 아니라 히든 마스터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럼 각인된 마더컴의 지시대로 휴먼 변환을 하겠습니다.

 히든 마스터라느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벨을 쳐다보니 그녀 역시 모르는 눈치였다. 거기에 휴먼 변환이라니.

 지이이잉.

 격납고 전체에 기이한 소리가 울리더니 환한 빛과 함께 아즈만의 거대한 동체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하룬은 눈이 부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예민해진 감각을 통해 뭔가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진 것을 느끼고 눈을 뜬 하룬의 앞에는 흰 가운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청초함과 섹시함 그리고 지적이면서도 육감적인 여러 가지 느낌을 동시에 주는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그 여성은 하룬과 비슷한 나이였다.

 “호, 혹시 아즈만?”

 “네, 마스터. 제가 아즈만이랍니다. 놀라셨죠?”

 “응, 아니 네. 그런데 어떻게?”

 “호호호. 엄마께서 미리 각인해 주셨거든요. 마스터가 나타나면 휴먼체로 변환해도 좋다고요.”

 난데없이 컴퓨터가 휴먼으로 변한 것도 놀라운데 엄마라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캡슐에서 휴먼형 분신을 만든 벨 때문에 놀라 기절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엄마요?”

 “네. 엄마 ‘가이아’께서는 언젠가 당신의 아들이 나타나면 제가 휴먼으로 살아도 된다는 말씀을 각인해 주셨어요.”

 그 말에 하룬은 벨을 돌아보았다. 벨도 처음에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벨은 이상한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혹시 둘이 자매로 추정되는 인공지능체들인가?

 휴먼체로 변환한 아즈만을 기묘한 시선으로 잠시 바라보던 벨이 앞으로 나섰다. 그런 벨을 향해 아즈만이 하룬에게 말하던 다정한 말투가 아닌 사무적이고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누구세요? 휴먼은 아니고 그렇다고 사이보그나 홀로그램 영상체도 아닌데 그 정체가 의심스럽네요.”

 벨에게 정체를 묻는 아즈만의 시선은 별로 호의적이지가 않았다. 하지만 벨은 그녀의 정체를 짐작하는지 반가운 얼굴이었다.

 “블러드 인증을 원해요. 제 이름은 벨, 자아는 어머니 ‘가이아’에 의해 휴먼력 201년에 제조되었어요.”

 그녀의 말에 아즈만의 눈이 커졌다. 흑백이 뚜렷하고 반달형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는 모습은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진탕될 정도의 매력이 흘렀다.

 “그럼?”

 아즈만은 벨의 손을 잡아 손바닥을 마주했다.

 파르르.

 가는 진동음과 함께 둘 사이에 진동파가 흘렀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진동파였지만 이내 하나로 맞추어졌다. 진동음이 멈춘 후 둘의 얼굴에는 다정하고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언니!”

 “벨!”

 둘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했다. 무슨 일인지 곁에 서 있던 하룬은 멍한 얼굴로 둘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니까 아즈만 언니가 나의 프로토 타입이란 말이에요.”

 벨의 긴 설명 중에서 유일하게 알아들은 것은 그 말 한마디였다. 믿을 수 없는 말이지만 마너컴 ‘가이아’는 처음에 아즈만을 만들었고, 그 기술과 지식을 바탕으로 벨을 다시 만들었다는 말이다.

 이런 엄청난 존재들이니 만들거나 제조했다기보다 창조했다는 말이 더 어울리지만 어쨌든 아즈만은 벨처럼 인공지능을 가졌고, 거기에 완벽한 휴먼체로 변환할 수 있는 신기한 존재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히든 마스터란 건 뭐야, 아즈만?”

 “호호호, 그건 아직 마스터의 보안 등급이 낮아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아무튼 좋은 거예요. 여기 있는 저와 벨의 생사여탈권은 물론이고 얼마가 더 있을지 모르는 우리 같은 존재들을 이끌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만 기억하면 돼요.”

 “흐음.”

 하룬은 앓는 소리와 비슷한 한숨을 내쉬었다.

 벨을 처음 만났을 때도 사실 어느 정도 이상한 것이 있었다. 분명히 벨을 양부가 만들어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별이 한 말 중에는 그의 존재가 이미 각인되어 있었다고 했던 것이다.

 시간이 없어 물어보지 못했는데 아즈만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아즈만의 히든 마스터로 내정되어 있었다니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물어도 둘은 묘하게 웃을 뿐 비밀을 가르쳐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룬과 벨은 아즈만의 안내를 받아 자장 이동기를 타고 원래 나인이 말하던 곳으로 올라갔다.

 “호오, 멋진걸.”

 “화아, 너무 좋아요!”

 지하 2층이라는 주거 시설로 들어간 하룬과 벨은 탄성을 질렀다. 벽 한쪽이 특수 강화유리로 되어 있어 호수 안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유리 바로 옆에서 지느러미와 꼬리를 부드럽게 움직여 헤엄치는 물고기들은 물론 흐느적거리는 수초들과 굴절되어 물속으로 들어오는 햇빛까지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오빠, 우리 집 구경해요.”

 “그러자.”

 벨은 신이 나서 거의 깡충거리며 실내를 구경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밀폐되었지만 특별한 장치가 설치된 듯 먼지 한 점 보이지 않는 실내는 깨끗했다.

 빛이 잘 조절되는 거실은 아주 넓었고, 방도 네 개나 되었다. 벨은 그중 가장 넓은 방에 캡슐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화장실까지 모든 곳을 안내한 아즈만이 말했다.

 “마스터, 다른 곳들도 구경하셔야죠.”

 “다른 곳들?”

 “네, 연구실과 작업실 그리고 특별한 기기들이 있는 시설물들을 둘러보셔야죠.”

 아즈만의 말에 하룬은 곤란해 하는 표정이 되었다. 무슨 과학자나 기술자도 아닌데 그런 것까지 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 거라면 벨이랑 함께 둘러봐. 그건 벨 전공이니까. 난 비욘드로 갈 테니 둘이 알아서 잘 지내라고.”

 하룬의 말에 아즈만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그러죠.”

 “접속 준비할게, 오빠.”

 벨이 금방 서류 가방처럼 축소시킨 캡슐을 확장시키고 뚜껑을 열었다.

 “잘 다녀오세요. 기다릴게요, 마스터.”

 아즈만이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으응, 갔다 올게.”

 그녀의 인사를 받은 하룬은 얼굴이 붉어졌다. 벨과 달리 완벽한 성인 여성의 모습인 아즈만의 얼굴을 보거나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심장 박동이 빨라질 만큼 강하게 자극을 받고 있었다.

 그동안 오래 같이 지내 온 벨 때문에 휴먼과 인공지능 컴퓨터에 대한 차이도 거의 느끼지 않은 그인지라 아까 지하 격납고에서 보았던 그 거대한 외형은 이제 떠오르지도 않았다.

 ‘이거 기분이 정말 이상한데.’

 하룬은 마치 아내가 일 나가는 남편을 배웅하는 듯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아즈만 때문에 얼굴을 붉혔다. 공연히 가슴이 쿵쾅거리고 묘하게 달콤한 기분이 들어 자꾸 아즈만을 쳐다보게 된다.

 그것도 잠시, 캡슐로 들어간 하룬은 비욘드에 접속하는 순간 현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룬이 접속한 것을 확인한 아즈만이 벨에게 물었다.

 “널 많이 아끼는 거 같네.”

 “응. 너무 동생처럼만 생각해서 이젠 화가 나려던 참이야, 언니.”

 벨의 투정에 아즈만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완전히 각성하면 달라질 거야.”

 “그럴까? 그럼 오빠, 아니 마스터가 나한테도 언니한테 느끼는 그런 이상한 감정을 느낄까?”

 “그럼. 어서 부지런히 각성하라고. 아, 그런데 어느 정도 각성한 거야, 우리 멋진 마스터는?”

 “1단계는 거의 완성되어 가.”

 벨의 대답에 아즈만이 환하게 웃었다.

 “호오, 빠르네. 과연 우리의 히든 마스터야.”

 “응. 나도 놀라고 있었어.”

 둘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대화와 환한 웃음을 나누며 각자 할 일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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