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도지존의 유물》
잠시 후 충격에서 벗어난 하룬은 시선을 주위로 돌렸다.
“여기는 어디지?”
괴물의 사체와 함께 있는 곳은 분명히 뭍이었지만 바위와 자갈로 이루어진 땅이었다.
“혹시 호수 한가운데에 있는 섬인가?”
그럴 확률이 높았다. 안개 때문에 주변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이놈은 폐로 호흡하는 놈이라 뭍에 서식처가 있었다.
“일단 비수부터 회수하자.”
하룬은 아공간에서 강철검을 꺼내 놈의 입안에 깊이 박아 혹시 입이 닫히는 경우를 대비했다. 투명 비수를 꺼내 마나를 주입한 하룬은 입안 위쪽의 살들을 통째로 발라냈다. 한 번의 경험을 통해 어떻게 하면 쉽게 비수를 회수할 수 있는지 알아낸 것이다.
암기들을 빠르게 회수한 그는 놈의 사체를 통째로 아공간에 넣으려고 했지만 그건 무리였다. 이전에 잡았던 아이언 스네이크들의 사체들로 여유 공간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가죽이라도 챙겨야겠다.”
돈이 목적인 게임은 아니지만 큰돈이 될 수도 있는 가죽을 놓고 가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더구나 놈 때문에 배도 잃고 소화액 속에서 지옥 같은 시간을 겪었으니 놈을 통해 그 손해를 배상받아야 했다.
처음에는 가죽만 벗기려고 했는데 도축하다 보니 뼈의 강도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언 스네이크의 뼈만큼 강도가 높을 뿐 아니라 탄성까지 있어 효용가치가 무척 높아 보였다.
위장을 건드리는 것이 너무 끔찍해 뼈는 주로 머리뼈와 척추, 그리고 긴 꼬리뼈만 발라내었다.
벗겨 낸 가죽과 발라낸 뼈들을 아공간에 넣었다. 이제 여유 공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아공간이 가득 차자 기분이 뿌듯했다.
그렇게 모든 일을 마무리하자 해가 넘어갔다.
암기들을 하나씩 닦아 제자리에 정리하던 하룬은 비도지존의 비수가 강렬하게 발광하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가장 밑에 깔려 있어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흠, 이 정도면 근처 어디에 있다는 이야긴데.”
모든 암기를 챙긴 하룬은 본 소드를 손에 쥔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섬의 바깥쪽을 돌았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곳은 없었다.
사위가 완전히 어둠에 잠기는가 싶더니 휘영청 두 달이 떠올라 낮과는 또 다른 신비한 빛의 세계를 열었다. 결점과 홈을 낱낱이 드러내지 않고 적당히 감출 것은 감추고 드러난 것은 부드럽게 포장해 주는 달빛에 비친 섬의 정경은 그야말로 신비감에 가득 차 있었다.
화산 폭발로 생겨난 섬인 듯 바위가 지천이었다. 수많은 시간이 흘러 일부가 흙으로 풍화되고 그 위에 호수 연안에서 옮겨 온 각종 식물들이 군데군데 자리를 잡았다.
하룬은 섬의 중심부를 오르기 시작했다. 해발 100여 미터 밖에 되지 않지만 거칠고 날카로운 돌들과 바위들이 그의 등장을 싫어하는 듯 시간을 잡아먹게 만들었다.
마침내 섬 중심부의 꼭대기에 오른 하룬은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화아!”
생각대로 섬은 화산 분출로 생겨난 것이 틀림없었다. 중심부에 분화구가 있었는데 물이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육지의 사화산에 오른 것 같았다.
아마 낮에 보았다면 더 굉장한 그림일 거라고 생각하며 하룬은 아래로 내려갔다. 비도가 점점 더 진한 색깔을 띠며 빠르게 발광하고 있었다. 분명히 비도지존의 흔적은 분화구를 향하고 있었다.
섬 중앙의 호수 주변 역시 바위들이 가득했고, 작은 파도까지 이는 것으로 보아 분화구에 해당하는 이 호수와 바깥이 서로 연결된 것 같았다. 아마 섬 지하에는 물길의 통로가 나 있을 것이다.
발광석을 들고 한 시간 넘게 호수 주변을 살피던 하룬은 결국 한 동굴을 찾을 수 있었다. 호수에서 3미터 정도 위쪽에 자리 잡은 동굴은 앞을 막은 거대한 바위 때문에 언뜻 보아서는 발견하기가 힘들었다.
발광석을 들고 동굴로 진입한 하룬은 처음에는 무척 조심스럽게 이동했지만 최근 들어 놀랍도록 확장된 기감氣感으로 안에 특별한 생명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네와 같은 다각류 몇 종과 바닥에 떨어진 배설물로 미루어 박쥐가 서식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박쥐들은 먹이 활동을 위해 나갔는지 50미터 정도나 되는 긴 동굴의 끝까지 갔지만 보이지 않았다.
“흐읍!”
마침내 목적한 것을 찾았을 때 하룬은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죽인 괴수보다 더 거대한 동체를 가진 괴수의 뼈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괴수의 가죽은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해 썩고 삭아버렸지만 뼈는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흠, 완전히 공룡이군.”
공룡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거대한 동체를 가진 녀석의 뼈가 동굴 끝의 직경 50미터가 넘는 거대한 동공에 자리를 잡고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채 기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뼈로 보아서는 척추 동물이 틀림없었다.
하룬은 거대한 뼈들이 여태껏 그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놀라웠다. 그의 생각대로 비도지존이 이 녀석을 죽였다면 적어도 천 년이 흘렀다는 이야긴데,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룬은 비도지존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비수로 놈을 죽였다면 아마도 머리 부위를 노렸을 가능성이 컸다.
“있다!”
바닥에 옆으로 놓인 괴수의 머리뼈 사이에서 비수 한 자루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길이는 약 20센티미터이고 폭은 손바닥 정도에 두께가 얇은 비수는 마치 두꺼운 나뭇잎처럼 보였다. 경고라도 하는 것처럼 시퍼런 기운을 양날과 몸통에 두르고 있는 것을 보니 과연 비도지존이 쓸 만한 명품이었다. 그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예기 또한 뼛속이 시리게 할 정도로 차갑고 날카로웠다.
하룬은 감개무량한 얼굴로 비수를 잡았다. 보는 순간부터 억제하기 힘든 강렬한 인력을 발산하는 비수였다.
‘흑!’
지지짓! 추르릇!
그 순간 한 줄기 벼락이 그의 손을 통해 몸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전류의 강함과 세기는 그가 감당할 수준을 벗어났기에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얗게 변한 하룬은 비명을 지르거나 고통을 느낄 수도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룬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도대체 비수에서 어떤 것이 나와 몸속으로 들어왔는지, 그것이 몸 안에서 무슨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처음으로 느낀 것은 동굴 안이 마치 대낮처럼 환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몸의 다른 부위를 살펴보았지만 눈만 그랬다. 마치 안경을 쓰던 사람의 눈이 갑자기 좋아진 것과 같은 느낌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서 급하게 마나 플로를 돌려 보았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그럼 그 전류 같은 것이 이미 내 몸을 빠져나간 건가?’
물론 전기라면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 사고할 수 없었던 상황이긴 했지만 첫 느낌은 마치 감전된 것처럼 저릿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방어구라든가 수염을 살펴본 하룬은 그것이 전류라는 것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혀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내심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손에 쥐인 비수를 살피던 그는 비수에서 풍기던 날카로운 예기가 어느 사이에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고색창연한 그 외양도 마치 오래되어 고물 취급받기 직전처럼 변해 있었다.
어쨌든 지난번에 얻은 황혼의 킨드잘처럼 녹이 슬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는 더 대단할 수도 있는 아이템이었다. 비도지존의 비수가 확실하니 정보부터 살펴야 했다.
『블리츠 대거(전격의 비수)
등급: 미공개
내용: 일부 공개. 재료는 신비의 금속인 바르타늄
옵션: 일부 공개. 전격의 비수를 맞은 상대는 벼락에 맞은 상태가 되어 버린다.』
정보 창의 내용은 전부 미공개 상태였던 황혼의 킨드잘과는 달리 일부 공개로 되어 있었다.
‘그럼 이 비수를 통해 번개가 내 몸속으로 들어온 것은 사실이군.’
아까 그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 밝아진 눈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기에 자신의 감각을 의심했던 것이다.
그 순간 예전에 한 번 들었던 안내음이 들려왔다.
-비도지존의 네 무기 중 하나인 ‘전격의 비수’를 얻었습니다. 전격의 비수에는 비도지존이 심령으로 새긴 스킬이 영상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스킬을 익히시려면 S.P. 100이 필요합니다. 익히시겠습니까?
하룬은 이번에도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앞에 영상이 떠올랐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한 인물의 몸속이 영상을 통해 드러났고, 몸 안에 있는 마나 로드도 자세하게 보였다.
‘이번에는 머리?’
마나 오션이 아니라 정수리 부위에서부터 시작하는 마나 플로였다. 정수리에서 양미간을 타고 내려와 혀뿌리를 거친 마나는 결국 양손으로 향하고 있었다. 굉장히 속도가 빠르고 그 경유 길이도 짧았다.
지난번에 배운 커브 피치와는 사뭇 다른 마나 플로였지만 거기에 더해 특징적인 것이 하나 있었다. 특유의 마나 플로를 운용한 영상의 인물이 비수를 던지자 마치 끈처럼 마나가 이어졌고, 그가 손을 움직이자 비수가 그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하룬 자신이 싸가지를 소환해서 정령 합체술을 운용하는 것과 비슷했다.
더불어 돌아오게 하는 것도 가능했다. 질긴 밧줄처럼 끈끈하게 이어진 마나의 연결 때문이었다. 영상의 인물이 거꾸로 마나 플로를 운용하자 비수가 그에게 돌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일정 거리가 넘어가면 그 연결은 끊어지고 비수 본연으로 돌아갔다.
『블리츠 컨트롤
레벨 등급: 상급
벼락의 빠르고 파괴적인 힘을 몸속에 담고 있다가 매개체를 통해 뿜어내는 스킬이다. 그 힘은 원래 통제가 불가능한 것이지만 고대 슘베르인들은 순수한 번개의 힘을 담을 수 있는 신비의 합금 바르타늄을 통해 그 힘을 정제해서 몸 안에 저장할 수 있었고, 후대에게 전할 수도 있었다.
어퍼 마나 오션을 사용하기에 섬세하고 치밀한 컨트롤은 물론 집중력이 높아야 이 스킬을 마스터할 수 있다.
소요 마나: 초당 30
필요 S.P.: 100
사용 제한: 집중 30 이상』
‘오오! 벼락을!’
굉장했다. 벼락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니. 이런 스킬이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번개처럼 빠르고 강력한 힘을 암기술에 쓴다면 정말 최상이 아닐 수 없다. 가히 5서클 마법인 라이트닝 쇼크나 6서클 마법인 라이트닝 웨이브에 견줄 수 있는 암기술이니 대단하지 않은가.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하룬이 어퍼 마나 오션이라고 부르는 정수리 부위에 번개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곳에도 마나를 쌓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그림의 떡인가? 어째 커브 피치보다 한참 효용이 떨어지는 것 같네.’
기대하고 기뻐한 것만큼 실망도 컸다. 비록 그 무엇보다 강력한 힘인 정령을 싸가지까지 포함해서 넷이나 계약한 상태지만 하룬은 웬만하면 그 힘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하룬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이다. 이 비욘드의 세상은 그에게 현실에서 보다 당당하게 살아가고 강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는 것에 그친다. 정령의 힘은 워낙 그 쓰임이 무궁무진하고 강력해서 한번 쓰면 자꾸 쓰고 싶지만 현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벌써 몇 번이나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ㅡㅡ)
그것이 바로 하룬이 사기적인 능력을 가진 정령들을 굳이 위험한 순간이 아니면 소환하지 않는 이유였다. 많은 유저들은 게임의 지존이 되고 싶어 하지만 하룬은 또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굳이 지존이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게임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는 것이 목표였다.
현실에서도 그렇지만 이 비욘드에서도 쓸 수 없다고 생각하니 급격하게 실망스러웠지만 조금 더 생각하니 블리츠 대거를 잡았을 때 몸 안으로 들어왔던 힘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그래, 일단 마나 플로나 한번 돌려 보자.’
하룬은 정신을 집중하고 의식을 정수리 부위로 옮겼다.
‘으응? 이건 뭐지?’
그냥 마나 로드 상에 존재하는 곳인 줄 알았는데 의식을 집중해서 자세하게 살펴보니 마나 오션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큰 공간이 통로와 맞닿아 있었다.
‘그럼 이곳이 바로 어퍼 마나 오션?’
아마 번개의 힘을 이곳에 담는 것 같았다. 의식을 그곳으로 옮겼다.
지지지직!
태고의 지구가 그랬듯 그곳에는 시퍼런 뇌전이 치고 있었다. 물론 그 공간 밖으로 빠져나가지는 않았지만 작은 구처럼 느껴지는 어퍼 마나 오션에는 무수히 많은 번개들이 서로 이어지고 나뉘며 작렬하고 있었다.
‘그럼?’
아까 정신을 놓았을 때 이 번개의 힘이 몸 안으로 들어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다른 이에게도 전이轉移할 수 있다고 하더니 전격의 비수가 그 역할을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젠 사용할 수 있다는 거군.’
하룬은 영상에서 보여준 마나 로드를 통해 마나 플로를 돌렸다. 하지만 어퍼 마나 오션에 자리를 잡은 번개의 힘은 처음 마나 오션의 마나들을 의식적으로 이끌어 내려고 했을 때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용을 써 봤지만 허사였다.
‘아무래도 수련을 더 해야겠구나.’
굳이 현실에서 쓸 수도 없는 스킬을 수련해야 하느냐는 의문이 스쳐 갔다. 그리고 지금은 수련할 생각이 없었다. 일단 쉬고 나서 그다음에는 호수를 건널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더 급했다.
칸젠의 뼈가 있는 동굴에서 하룻밤을 푹 자고 난 하룬은 맑아진 머리 때문인지 얼마 생각하지 않아 호수를 건널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이아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명색이 물의 정령이니 물 위에서 이동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하룬의 정령력이 너무 작아요.”
소환된 나이아의 말에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이 섬이 호수의 중심부에 있다고 해도 하루 반을 움직여야 하는데 그럴 정령력이 자신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 어쩌지?”
그렇게 물어보고는 아차 싶었다. 나이아에게 무슨 방도가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혹시 정령석이 있나요?”
“아니, 정령석을 구할 기회가 없었어.”
아마 구할 기회가 있었다면 당연히 구했을 것이다.
‘가만! 원소석이라면 어떨까?’
캘프란 마을 촌장에게 받은 원소석은 마나석이나 정령석은 아니지만 설명에 따르면 순수한 원소의 힘을 간직한 아이템이었다.
하룬은 아공간에서 원소석을 꺼내 나이아에게 보여 주었다.
“이건 어때? 원소석이라는 건데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 이건…….”
나이아가 한순간 말을 잊었다. 잠시 후 그녀의 얼굴에서 강렬한 환희의 미소가 피어났다.
“이건 마나와 정령력의 근원이 되는 원소력이 깃든 돌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마나와 정령력은 모두 이 세계의 근원이 되는 에너지예요. 단지 발현 방식이 다를 뿐이에요. 마나와 정령력은 모두 원소력에서 유래해요.”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원자와 분자가 생각났다. 같은 원자나 분자를 가지고 있어도 그 결합 상태에 따라 생성되는 물질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이다. 내용을 잘 모르지만 하룬은 그렇게 이해했다.
“그래? 그럼 네가 쓸 수 있는 거야?”
문제는 바로 그거였다. 부족한 정령력을 이 원소석이 보충할 수 있는지 여부가 가장 궁금했다.
“당연히요. 이 원소력을 모두 흡수할 수만 있다면 내 힘은 정령왕에 버금갈 거예요. 물론 흡수하기까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요.”
“그렇다면 잘됐네. 흡수해.”
“고, 고마워요. 그럼 원소석을 입에 넣고 삼켜 주세요.”
“으응.”
하룬은 그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기대 어린 나이아의 눈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원소석을 입안에 넣고 삼켰다. 필시 무슨 이유가 있어서 부탁한 것이리라. 이제까지 나이아가 그에게 해가 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었기도 했지만 반쯤은 홀린 상태로 한 일이었다.
갑자기 나이아의 몸이 한 줄기 물이 되어 그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원소석만이 아니라 그녀까지 삼키고 만 것이다.
“나이아!”
-걱정 마요. 호수를 건널 정도의 원소력만 흡수하면 돌아올게요. 아, 그리고 이걸 흡수하는 동안은 더 이상 하룬의 정령력이나 마나를 소모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하룬의 몸 안이 아니라 다른 어느 곳으로 간 것처럼 의지를 전해 왔다.
“알았어. 빨리 와.”
-네, 하룬.
하룬은 몸속에 정신을 집중했다. 감각을 끌어 올리고 의식을 몸 내부로 돌렸다. 마나석은 위장 속에 있었다.
그것도 잠시, 어느 순간 몸의 정중앙으로 이동했다. 장기에서 갑자기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명치 안쪽에 자리 잡은 마나석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다른 어떤 변화도 감지되지 않았다. 아무리 나이아의 흔적을 찾으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룬은 나이아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는 시간을 두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동안 비도지존이 남긴 스킬을 수련할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집중이 잘 되지 않았지만 이내 수련에 집중한 하룬은 꼬박 하루 동안 이번에 새로 배운 스킬을 수련했다.
나이아가 다시 모습을 보인 것은 만 하루가 훨씬 지난 후였다. 수련하다가 지쳐 잠이 든 하룬은 뭉클한 감촉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부드럽고 따듯하며 안온한 느낌을 주는 감촉이 너무 좋아 무의식중에 팔을 뻗은 하룬은 그 대상이 여체라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누구? 나이아?”
놀라웠다.
나이아는 인간과 비슷할 정도로 몸체가 컸다. 키도 어느새 거의 목까지 올 정도였다. 굴곡이 뚜렷한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나이아가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몸의 크기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그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완전히 성숙한 여인으로 변모한 것이다.
“아주 조금 원소력을 흡수했는데 이렇게 변했어요.”
“그래, 그새 많이 커졌네.”
하룬의 말에 나이아는 자신의 몸을 살펴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고마워요. 하룬 덕분에 인간의 육체와 비슷한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되었어요.”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턱을 간질이는 그녀의 머리카락과 은은하고 달콤한 체향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젠 호수를 건널 수 있는 거야?”
“그럼요. 원소석을 아주 조금 흡수한 것만으로 능력이 열 배 이상 늘었어요. 내가 흡수한 원소력은 계약자에게도 영향을 미치니까 아마 하룬도 마찬가지일걸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나이아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던 하룬은 자신의 상태가 못 견디게 궁금했다. 한동안 상태 창을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일단은 돌아가 있어. 난 몸 상태를 좀 확인할 테니까.”
“금방 다시 불러 줘요. 물질계는 너무 좋아요. 하룬이 있어서 더욱더.”
나이아는 햇살처럼 눈부신 미소를 남기고 정령계로 돌아갔다.
‘이런 정령까지 구현할 수 있다니 정말 너무나 근사한 게임인걸.’
하룬은 현실에서도 이렇게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상태 창을 열었다.
『이름: 하룬
종족: 인간
직업: 검사
레벨: 87
칭호: 킨젠 슬레이어(외 9개)
생명력: 3,320
마나:4,190
정령력: 3,280
힘: 110(+30) 체력: 118(+10)
지식: 88 지혜: 96(+5)
행운: 41 민첩: 102(+20)
지구력: 46 심안: 27
집중: 42 의지: 12
S.P.: 1,040 명성: 3,640
통솔력: 320 카리스마: 54(+10)
H.P.: 1,000
물리 방어력: 400
마법 방어력: 450
남은 보너스 스텟: 22』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그간 여행하면서 레벨 업 안내음을 꺼 놓아서 몰랐는데 레벨도 11이나 상승했고, 스텟들도 전반적으로 고루 크게 올랐다. 무엇보다도 고무적인 변화는 바로 마나와 정령력이었다. 마나는 거의 700이 올라갔고, 정령력은 무려 2,000 가까이 상승한 것이다.
‘원소력이 마나와 정령력으로 변환되어 흡수되는구나.’
이제 그의 마나와 정령력은 싸가지를 소환해 마음 놓고 정령 마법을 펼쳐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영웅 포인트가 500 늘었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칸젠이라는 괴수도 티넌 호수 일대에서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인명을 살상해 왔던 존재라서 영웅 포인트가 주어진 것 같았다. 불특정 다수를 위한 공적을 쌓을 때 영웅 포인트가 주어지는 시스템인가 보다.
‘문제는 이것으로 뭘 할 수 있는지를 내가 모른다는 거지.’
답답한 노릇이지만 언젠가 알 날이 올 터였다. 지금은 고난을 이겨 내고 훈장처럼 받은 레벨 업과 스텟 상승만 기뻐하기로 했다. 하룬은 보너스 스텟치를 행운에 모두 배정하고 상태 창을 해제했다.
‘조금만 쉬었다가 출발하자.’
하룬이 삼킨 원소석을 통해 원소력을 흡수한 나이아의 능력은 크게 늘어났다. 하룬은 나이아가 만든 투명하고 둥근 구 안에 앉아 편안하게 호수를 건널 수 있었다. 호수라 파도가 높지 않기도 했지만 나이아가 몸체를 변화시켜 만든 막은 아주 안정적이었다.
햇빛에 비친 호수의 모습은 평화롭고 빛이 가득했다. 아마 물로 이루어진 둥근 막 때문에 빛이 굴절되고 산란되어 더욱더 빛의 향연으로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진짜 멋지다!”
연방 감탄성을 토해 내는 하룬이지만 그 이동속도는 노잡이 열 명이 젓는 배보다 훨씬 더 빨랐다. 배를 타고 하루 반이 넘게 가야하는 거리였지만 나이아는 겨우 네 시간 만에 그를 호수 건너편까지 데려다 놓은 것이다.
“덕분에 잘 왔어, 나이아.”
“나도 즐거웠어요, 하룬. 이제 정령계로 돌아가서 이전에는 능력이 부족해서 배울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들을 배우고 익힐 거예요.”
“그래. 또 부를게.”
“안녕.”
하룬이 도착한 호숫가는 고원인 고요의 땅에서 흘러내리는 얼음처럼 맑고 차가운 물이 호수로 유입되는 지점이었다. 지도에 따르면 스카이루프 산맥에서 발원하여 고요의 땅을 두루 흘러 티넌 호수로 내려오는 ‘도루쿠’ 강이 끝나는 지점이다.
도루쿠 강의 왼쪽으로는 나부루 부족이 넓게 퍼져 살고 있는 나부루 자치 구역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평균 고도가 해발 2,000미터가 넘는 고원지대인 고요의 땅과 그곳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이 평원의 이름은 고요의 평원. 적지 않은 종류의 동식물이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땅이다. 이름과 달리 생생한 자연의 질서가 매순간 일어나는 역동적인 곳이다.
하룬은 일단 주변을 순찰했다. 오랜만에 밟은 대지의 느낌은 어머니의 품처럼 따듯하고 편안했다. 지질 상태가 나빠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몰라도 고요의 평원은 키가 무릎을 넘지 못하고 짧고 억센 풀들만 자라고 있었다. 그 때문에 몸집이 큰 동물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꽤 멀리까지 돌아봤지만 그동안 본 동물은 토끼와 들쥐 그리고 사슴과 들소가 고작이었고, 제국 전체에 흔하게 분포하는 고블린이나 오크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포식자로는 늑대과의 동물 발자국과 하늘 높이 선회하는 맹금류 몇 종이 다였다.
이곳이 고요의 평원이라고 이름 지어진 것을 알 것도 같았다. 정말 평화로운, 고요함이 가득한 곳이었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하룬은 날짜를 따져 보았다. 이제 출발한 지 사흘째니 일행이 순조롭게 온다면 나흘 후에나 도착할 것이다. 멀리 마중을 나갈까도 생각해 보았는데 이곳 주변을 살펴보니 인간을 제외하면 별다른 위험은 없을 것 같았다.
메신저 스킬을 수련할까도 싶었지만 그간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서인지 좀 쉬고 싶었다. 육체적으로는 엄청난 발전을 했지만 정신적으로 좀 지쳐 있었다.
“이제 나흘간은 휴식인가?”
하룬은 오랜만에 현실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한동안 벨을 보지 못한 터라 궁금하기도 했고, 현실의 일들도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