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의 괴물 칸젠》
하룬은 어부들의 배로 꼬박 이틀 노를 저어야 호수를 건널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호수의 형태가 서 있는 계란형이고 목적지인 고요의 평원까지는 가장 먼 거리였다.
장기전이니만큼 한결같은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또 호수에 산다는 괴물이 언제 나올지 모르니 힘을 비축해 놔야 했다. 이래저래 속도를 내는 것은 안 될 말이었다.
바람이 밀어 주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이놈의 바람은 쉴 새 없이 방향만 바꾸며 짙은 안개만 이리저리 옮기고 있었다. 벌써 해가 뜬 지 오래지만 안개는 걷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호수 중간으로 가는 도중에 고기잡이를 나온 배 몇 척을 보았지만 안개 때문에 어부들의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노를 저은 지 두 시간이 넘어가자 더 이상 어부들이 탄 배도 볼 수 없었다. 이제 위험한 구역에 진입한 것이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호수의 풍취는 별로였따. 뭔가 사물이 보여야 그림이 되는데 보이는 거라고는 안개뿐이니 왈칵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아무리 노를 저어도 똑같은 자리에 멈춰 선 느낌이었다.
언제부턴가 시간과 공간이 마치 정지해 있는 것 같았다. 왜 이런 곳에 혼자 있는지, 무엇 때문에 열심히 노를 젓고 있는지 순간적으로 잊어버려서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현실에서 오랫동안 혼자 지내 온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하룬은 고독을 친구처럼 생각했다.
‘며칠 동안 사람들과 어울려 번잡하게 살았더니 오히려 지금이 더 좋은걸.’
시공이 멈추어 선 호수 위에 작은 통나무배를 타고 느릿하게 노를 젓는 하룬은 가슴을 활짝 열고 습기 가득한 공기를 흡입했다. 눈을 감고 호흡을 하노라니 습기를 머금고 있는 서늘한 공기 때문에 마치 딴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염된 공기를 마시고 살다가 비욘드에 접속해 처음으로 마음껏 호흡하던 그때처럼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신선하고 서늘한 호수의 공기는 아주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배를 모는 느낌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점심때가 다 되었다. 이제 중천 가까이 떠오른 태양으로 호수의 안개는 많이 사라져서 꽤 멀리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없었다.
가운데 햄을 끼운 빵과 물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하룬은 마침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잔잔하던 호수 면에 작은 파랑이 일어 배가 나아가는 북쪽으로 퍼져가는 것이 보였다.
바람을 등진 터라 이전에 비해 두 배는 더 속도가 났다. 비록 돛 없이 순수하게 노를 젓는 힘으로 움직이는 배지만 워낙 가벼운 데다 바람의 힘까지 빌리니 그 속도감이 제법 즐길 정도가 된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를 더 갔을 때 마침내 호수를 감싸 안았던 안개 옷이 모두 벗겨졌다. 햇살에 일렁이는 작은 파도가 만들어내는 그림은 꽤 운치 있었다. 비록 다른 배경이 될 사물이 하나도 없지만 푸른 하늘과 호수 그리고 작은 파랑이 만들어 내는 단순한 그림은 그 어느 그림보다 더 깊은 감흥을 선사했다.
어느덧 해가 중천까지 떠올랐다. 대충 오후 두 시에서 세 시 사이인 모양이었다. 아침녘에는 조금 쌀쌀하게 느껴지던 공기가 이제 따듯하게 데워졌고,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그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였다.
출렁! 출렁!
갑자기 먼 곳에서부터 큰 파도가 밀려왔다. 눈으로 보면서도 어찌할 생각을 하지 못하던 하룬의 몸이 배와 함께 높은 파도를 타고 솟구쳤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순간 속에서 뭔가 나올 것처럼 구토감이 느껴졌다.
‘뭐지?’
몇 번이고 뒤이어 밀려오는 높은 파도가 배에 심하게 요동치자 머리가 빙빙 도는 감각과 함께 속이 뒤집혔다. 적당히 먹었기에 망정이지 양껏 먹었으면 분명히 토했을 것이다.
파악!
그 순간 10미터 정도 되는 곳에서 거대한 머리통 하나가 나타났다. 그 길이가 무려 그가 탄 배만큼 길었는데 크게 벌린 입 안으로 30센티미터가 넘는 날카로운 이빨들이 쭉 이어나 있었고, 머리통 위쪽에 큰 구멍 두 개가 뚫려 있었다.
가죽은 매끈했지만 뼈가 단단한 듯 돌출된 곳이 많았다. 파도로 잠깐 드러난 꼬리는 동체에 비하면 짧은 편이었다.
푸앗!
물 위로 솟아난 지느러미 네 개를 보지 못했다면 거대한 악어로 착각했을 것이다. 엄청난 크기의 머리 부분은 영락없이 악어와 닮았던 것이다. 턱 힘은 강하지만 이빨로 씹어 먹는 것이 아니라 몸을 돌려 먹이를 잘게 찢어 삼키는 악어와 달리 날카롭게 난 놈의 이빨을 보면 먹이를 씹어 먹는 종으로 보였다.
빠르게 통나무배를 향해 물살을 헤치고 다가오는 놈의 동체는 무려 30미터에 육박했다. 외형으로는 아이언 스네이크는 가볍게 씹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턱과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넓고 거대한 지느러미를 가진 괴물이다.
놈이 바로 이 호수의 지배자 ‘칸젠’이었다.
하룬은 어떻게든 검을 들고 휘두르려고 했지만 높은 파도 때문에 제대로 중심을 잡는 것도 힘들었다. 비수를 던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놈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더욱더 커지는 파도로 그 어떤 행동을 하는 것도 어려웠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위기의 순간 생각나는 것은 싸가지뿐이다. 하룬은 해독약을 꺼내 먹고는 싸가지를 소환했다.
“싸가지, 정령 합체 암기술.”
녀석을 소환하자마자 힘겹게 암기대에서 뺀 비수를 날렸다. 그 직후 하룬의 몸은 작은 통나무배와 함께 높은 파도에 솟구쳤다가 거꾸로 호수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래도 정령력이높고 의식을 잃지 않은 탓에 몸에서 마나가 지속적으로 빠져나가는 것으로보아 싸가지가 합체한 비수는 여전히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푸핫!”
호수 깊이 빠진 하룬이 숨을 참으며 두 다리를 빠르게 놀리자 부력과 합세해 호수 위로 머리를 내놓을 수 있었다. 그래도 의식을 집중하지 않아도 마나와 정령력만 있으면 혼자서도 잘(?) 싸우는 싸가지가 있어서 다행이다.
하지만 그가 두 팔과 두 다리를 필사적으로 움직여서 수면 위에 머리를 올리고 볼 수 있었던 것은 싸가지와 합체한 비수가 괴물의 단단한 가죽을 뚫지 못하고 연방 튕겨 나오는 광경밖에 없었다.
정령의 힘은 마나만큼 강해서 이제까지 관통하지 못한 적이 없었는데, 저 괴물은 끄덕도 하지 않고 귀찮다는 듯 몸을 휘둘러 비수를 물려고까지 했다.
‘기회다!’
하룬은 본능적으로 메신저 워킹 3단계 스킬인 점핑을 펼쳤다.
순간 그의 몸이 수면을 박차고 나와 괴물의 등에 올랐다. 수면 위로 드러난 괴물의 등은 긴 척추로 마치 거대한 가시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앞지느러미는 방향타 역할을 하는 듯 짧고 가는 편이지만 뒷지느러미는 크고 넓을 뿐 아니라 그 끝이 뾰족하게 서 있었다.
“이놈!”
심하게 요동치던 통나무배와 달리 상당히 안정된 놈의 등에 오른 하룬은 본소드를 빼서 놈의 등을 강하게 찔렀다.
“허업!”
비록 급해서 마나를 주입하진 못했지만 예리한 절삭력을 가진 본 소드가 놈의 가죽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아니, 그 끝부분만 약간 들어갔을 뿐이다. 철광석을 집어삼킨 아이언 스네이크의 가죽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몇 번 더 본 소드로 이곳저곳을 찔러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등 쪽은 뼈가 넓게 분포한 것 같았다. 본 소드는 가죽을 뚫었지만 뼈는 관통하지 못했다.
그렇게 몇 번 놈에게 가벼운 상처를 주는 데 성공했지만 결정적인 상처는 입히지 못했다. 그사이 괴물은 그 거대한 동체에도 몇 번의 시도 끝에 눈과 입안의 연약한 살을 노리던 싸가지의 비수를 이빨로 무는 데 성공했다.
하룬이 싸가지에게 신경 쓰지 못하고 본 소드에 마나를 주입하려는 탓에 마나의 유입이 순간적으로 끊어진 것이다.
와드득!
강철로 만든 비수가 놈의 날카로운 이빨에 씹혀 산산조각이 났다. 하룬은 순간 공황 상태에 빠졌다. 오로지 생각나는 것은 수면 밑으로 들어가 뼈로 보호되지 않았을 거라고 추측되는 배 부분을 본 소드로 찔러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파앗!
본 소드를 쥔 하룬이 물보라를 튀기며 놈의 지느러미 사이로 들어갔다. 놈의 거대한 동체에 햇빛이 가려져 마치 어둠 속에 빠진 것 같았지만 하룬은 미리 생각한 대로 메신저 워킹 3단계 스킬을 펼치며 본 소드를 위로 치켜든 상태에서 놈의 배 부분으로 솟구쳤다.
빠각!
‘실패다! 놈의 배 역시 뼈로 보호되고 있어.’
하룬은 달려들었던 기세보다 더 빠르게 수면 아래로 튕겼다. 본 소드를 쥔 그의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충돌의 여파로 수면 깊숙이 내려가던 하룬은 자신을 향해 커다란 입을 쩍 벌리고 빠르게 내려오는 괴물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아이언 스네이크를 상대했던 때를 떠올린 하룬은 진탕된 마나 때문에 엉망으로 변한 몸 상태를 고려할 여유도 없이 다시 메신저 워킹 3단계를 펼쳤다.
‘놈이 내 몸을 씹기 전에 입안으로 들어가며 본 소드를 찔러 넣어야 해.’
온몸이 본 소드보다 더 단단한 뼈로 보호되고 있으니 달리 방도가 없었다. 어차피 이번 공격이 실패하면 놈의 밥이 되고 말 것이다. 사정없이 흔들린 마나 때문에 입과 코 그리고 귀와 눈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파앗!
호수 바닥을 향해 천천히 내려가던 하룬의 몸이 갑자기 괴물의 입을 향해 솟구쳐 날아갔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괴물이 헤엄치던 것도 잊을 정도였다.
쿠웅!
“크윽!”
하룬은 비명을 질렀다. 순간 입안으로 물이 사정없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급하게 입을 다문 하룬은 자신이 너무 빠르게 움직인 탓에 놈의 입안은 물론 식도까지 들어와 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방금 놈의 목구멍에 심하게 머리를 박았다.
그의 몸은 물과 함께 놈의 위장 속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둥!
마침내 놈의 거대한 위장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룬은 놈의 목구멍에 부딪친 충격으로 여전히 제정신을 찾기 힘들었지만 필사적으로 일어나 밟고 올라설 수 있는 것을 찾았다. 하지만 칠흙 같은 어둠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어 그런 시도는 물거품이 되었다.
하룬은 정신을 차리려고 이를 악물었다. 참기 힘든 고통과 함께 혀를 통해 따듯한 핏물이 느껴지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순간 시금털털하면서도 코를 찌르는 악취로 인상을 써야만 했다. 필시 산성 위액과 소화되다가 만 물고기의 잔해가 뿜어내는 냄새일 것이다. 코가 마비되는 것처럼 강한 악취지만 지금은 냄새가 문제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원초적인 공포감을 안겨 주었다. 이곳이 괴물의 위 속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상황을 모르니 이제까지 느껴 본 적이 없는 두려움이 찾아왔다. 허리까지 차오른 액체는 위액이 틀림없었다.
아이언 스네이크 방어구 때문에 지금 당장은 강력한 산성 위액을 견뎌 내고 있지만 언제까지 소화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위액 밖으로 나가야 했다.
‘생각! 생각을 해야 해!’
하룬은 필사적으로 이 상황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왜 마법을 익히지 못했나 하는 후회뿐이었다. 1서클 마법인 라이트 마법만 익혔어도 엄청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먹이가 들어와서인지 위액이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벌써 목 바로 밑까지 강렬한 냄새를 풍기는 위액이 올라왔다.
순간 퍼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아, 그거! 발광석!’
아이언 스네이크의 동굴에서 몇 덩이 떼어 온 발광석이 생각난 것이다. 하룬은 서둘러 아공간에서 발광석을 꺼냈다.
팟!
비록 흐릿하지만 완전히 어둠 속에 있던 그는 더할 수 없이 밝게 느껴졌다.
흐릿한 발광석의 빛을 받은 괴물의 위 속이 드러났다. 누런 위액으로 가득 찬 위에는 별게 다 들어있었다. 돌고래로 추축되는 사체가 반쯤 소화된 상태로 형용할 수 없는 악취를 뿜어냈고, 먹이의 잔해로 추측되는 갖가지 잔해들이 위액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저건?’
인간들의 시체로 짐작되는 것들이 보였다. 갈기갈기 찢어진 방어구와 녹다가 말아 하얀 뼈가 드러난 머리통, 팔다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욱!”
그 역시 요른 백작성 인근에서 잔인한 학살을 벌인 적이 있지만 그때는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그런데 이렇게 수십 구 이상의 해체된 시체를 보니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어부는 분명히 아니다. 게다가 아직 다 소화가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놈의 공격을 받은 것은 얼마 전이다. 그렇다면?’
1황녀 세력이 틀림없었다. 다시 보니 위액 위를 떠다니는 방어구 조각들과 로브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레인저 기사단과 마법사들이 포함되었다던 그 세력이 맞았다.
위액 속에는 얼마나 많은 사체들이 녹고 있을지 몰랐다. 이거야말로 완전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하룬은 욕지기를 계속하며 이곳을 벗어날 궁리를 해야만 했다.
발광석을 위로 높이 들어보니 위벽에 몇 개의 혹이 나 있었다. 아마도 이놈에게 잡아먹힌 것들 중에 가시를 가진 것들이 위벽에 상처를 내고, 그것이 반복되며 상처 부위가 커지고 굳어진 것으로 보였다.
일단 끔찍한 지옥도가 펼쳐진 위액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순서였다. 하룬은 메신저 워킹 스킬을 펼쳤지만 마나는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마나 오션에는 물론 어느 곳에서도 마나의 흔적이 없었다. 그래도 마나를 느끼기 위해 안간힘을 쓰자 마나 로드가 끊어질 듯 아파 왔다.
“크윽!”
너무 위급한 상황이라 이제까지는 잘 느끼지 못했던 고통이 갑자기 물밀 듯 찾아왔다. 차라리 기절하는 게 나을 것처럼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송곳으로 전신을 찌르고, 온몸이 불구덩이 속과 얼음 굴에 번갈아 빠지는 듯 열기와 한기가 교차하며 그를 괴롭혔다.
하룬은 극렬한 고통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위벽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휘익!
괴물이 물속에서 갑자기 방향을 틀었는지 몸이 위액과 함께 옆으로 급속하게 쏠리더니 한쪽 벽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푸악!
얼굴이 화끈거렸다. 급하게 자시를 잡아 위액 속에서 머리를 꺼냈지만 이미 산성 위액을 뒤집어쓴 얼굴과 방어구 밖으로 노출된 부위가 금세 타는 것처럼 따가웠다.
휘익!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몸이 쓸려 내려갔다. 그 바람에 위액 속에 또다시 빠지긴 했지만 허우적거리던 손에 큰 혹이 잡혔다. 다시 괴물이 움직였지만 이번에는 혹을 단단히 잡은 덕분에 위액 속에 빠지지는 않았다.
“크아악!”
살짝 눈을 뜬 하룬은 비명부터 질렀다. 눈알이 타는 것처럼 따갑고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던 것이다. 어지간해서는 비명 따위는 지르지 않는 그였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잠시 비명을 지르던 하룬은 눈물 때문에 위액이 씻겨 나갔는지 통증이 조금 완화되는 틈을 이용해 왼손으로 혹을 단단히 잡고 오른손으로 인벤토리를 열어 물건들을 훑었다.
인벤토리에는 타우스트 성에서 후크란 산맥으로 대원들을 만나러 갔을 때 혹시 몰라 사 두었던 하급 포션들이 들어 있었다. 약초의 집산지로 유명한 곳답게 포션 가격이 다른 곳보다 훨씬 쌌던 것이다.
구입한 포션은 생명력 포션과 마나 포션 그리고 치료 포션 세 가지지만 지금은 그걸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어느 것이나 상처에는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에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손가락 끝으로 뚜껑을 땄다.
주르르!
하룬은 눈을 중심으로 얼굴 전체에 포션을 뿌렸다. 마침 치료 포션이었는지 단번에 포션에 닿은 부분에서 서늘한 감각이 느껴지며 통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눈을 뜨니 한결 고통이 약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발광석!”
괴물이 몸을 틀 때 손에 들고 있던 발광석을 놓친 것 같았다. 다시 칠흑 같은 어둠밖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지만 한 번 내부를 보았기 때문에 이전처럼 두렵지는 않았다.
하룬은 다른 발광석을 꺼내 입에 물었다.
화악!
사방이 환해졌다. 바로 발밑에까지 차오른 위액이 출렁거리는 것이 보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 번 더 위액에 빠지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다. 얼굴과 눈에 뿌린 포션 때문에 통증은 좀 누그러들었지만 따끔거리는 감각은 여전했다.
하룬은 인벤토리에서 치료 포션을 몇 개 더 꺼내 얼굴과 눈 그리고 이제야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목덜미 부분을 비롯해 머리 전체에 골고루 뿌렸다. 환부의 통증이나 따끔거리는 감각이 약해지자 이제 제대로 괴물의 위장 내부를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괴물은 거대한 동체만큼 위장도 컸다. 마치 큰 배의 선실처럼 넓었다. 머리를 들어 위쪽을 쳐다보자 몇 개의 혹들이 더 보였다. 위장 벽 곳곳에 그가 잡고 있는 것과 같은 혹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이놈은 아무것이나 다 잡아먹는 폭식성을 가졌구나.’
가시가 달린 고기고 뭐고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녀석이 틀림없었다. 그 증거가 바로 이런 위벽의 상처였다. 강력한 소화액을 믿고 무엇이든 삼켜 버리는 것이다. 이제는 코가 마비가 되었는지 악취도 한결 덜했다.
하룬은 일단 바로 위에 난 혹을 잡고 발로 디디면서 위쪽으로 올라갔다. 머리가 위장 끝에 닿고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쉰 하룬은 한 혹을 발로 딛고 손으로 다른 혹을 잡고서야 안정적인 상태가 될 수 있었다.
인간들과 물고기들의 사체로 곤죽이 된 아래를 내려다보니 저절로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어떻게 이놈의 뱃속에서 빠져나가지?’
일단은 암기로 놈의 위장을 찌르는 방법을 떠올렸지만 별로 좋은 생각 같지는 않았다. 괴물을 찔렀을 때의 충격으로 마나가 어디론가 사라진 데다 몸 상태도 극히 좋지 않았다. 포션을 종류별로 두 개씩이나 복용했지만 마나는 채워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가 막혔다. 지난번 아이언 스네이크와 싸웠을 때는 입안이었는데 이번에는 드디어 먹혀 버리고 만 것이다. 다행히 날카로운 이빨을 피하긴 햇지만 곧 다른 먹이가 들어와 위가 가득 차면 소화액이 더 분비될 테고, 그럼 결국 놈의 영양분으로 소화되고 말 것이다.
‘차라리 자살해 버릴까?’
지금 상태에서는 그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벨과 스텟이 대폭 깎이기는 하겠지만 이대로 강한 산성 소화액에 녹아버리는 것보다야 더 나을 것이다. 일행이 좀 기다리긴 하겠지만 메신저 워킹 스킬을 최고로 쓴다면 사망 페널티인 사흘 후에 접속하더라도 하루나 이틀 정도밖에 늦지 않을 것이다.
“빌어먹을! 비도지존의 비수는 왜 울어가지고…….”
혼잣말을 하던 하룬의 눈에 광채가 돌았다. 분명히 미약하긴 하지만 호숫가에 도착하면서 비수가 진동을 시작했었다.
하룬은 재빨리 정신을 집중했다. 속옷과 밀착된 부분에 꽂혀 있는 비수의 진동이 느껴졌다. 진동은 이제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빨라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괴물이 비도지존의 유물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재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수가 좋은 것이다. 하룬은 이제 딴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기다리며 몸 상태를 빨리 회복하는 거만이 최선이었다.
‘이런 자세로도 되려나?’
마나 플로를 시도하려고 했지만 괴물의 유영으로 몸이 쉴 새 없이 흔들려서 할 수가 없었다. 하룬은 초조하게 이 괴물이 멈추기를 기다리며 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빠르게 움직이는 놈의 위장 속으로 몇 구의 시체가 더 들어온 것이다. 날카로운 이빨에 씹힌 시체는 끔찍했다. 찢긴 사지와 뼈에 붙은 살들은 물속에 오래 있었는지 퉁퉁 부어 있었다.
아마도 자신 이전에 놈의 공격을 받았던 1황녀 세력에 속하는 인간들의 시신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가 이번에 먹힌 것 같았다.
몇십 구가 넘는 시체는 모두 적당한 크기로 찢겨 위 속으로 들어왔다. 끔찍한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은 하룬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위험한 순간이 도래하고 있었다.
“안 돼!”
나중에 먹힌 시체들 때문에 위 속 내용물이 어느덧 자신의 발까지 올라왔고, 위벽을 통해 엄청난 양의 소화액이 분비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장 하룬이 매달린 벽에서도 소화액이 분비되었는데 그 질긴 럼프 오크의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가 흐물흐물 녹고 있었다.
‘생각을!’
점점 더 차올라 오는 소화액 때문에 필사적으로 다리를 위로 올렸지만 마나도 없이 근력만으로 견디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휘청!
그 순간 칸젠이 몸을 한번 뒤집은 듯 하룬의 몸이 빙글 뒤집혀 사체 수프라고 할 수 있는 소화액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필사적으로 참았지만 얼굴 주위로 끊어진 팔다리가 느껴지자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고 말았다.
소화액이 코를 통해 들어오자 격렬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이젠 죽는다 싶었을 때 홀연 생각나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나이아였다.
“나이아, 어디 있어?”
“여기요.”
나이아의 대답과 함께 그의 몸 주위로 둥근 막이 생성되어 소화액을 밀어냈다. 막의 한쪽에서 반가운 나이아의 얼굴이 드러났다.
“괜찮아요?”
쿨럭! 쿨럭!
놈의 소화액을 몇 번 들이마신 터라 격렬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타는 것 같은 눈도 그렇지만 이번에는 코와 입을 시작으로 목구멍과 위장에 이르기까지 마치 불길에 닿은 듯 뜨거운 감각과 함께 타는 듯 고통스러웠다. 강한 소화액이 연약한 살에 닿은 탓이다.
“안 되겠어. 세척을 좀 해 줄래.”
“알았어요.”
나이아는 둥근 막을 유지한 상태로 일부를 떼어 내 하룬의 입안으로 향하게 했다. 한 덩어리의 물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의 입과 목구멍을 지나 위장 안으로 들어가서 남은 소화액을 말끔하게 끌고 나왔다.
하지만 하룬은 여전히 괴로운 얼굴이었다. 이미 산성 소화액에 닿은 살들이 녹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던 나이아는 이번에는 하룬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독단으로 움직였다.
“해독! 정화!”
나이아의 작은 기합성과 함께 또 한 덩어리의 물이 하룬의 몸속으로 들어가 소화액이 닿은 부위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휴우, 살았다.”
하룬은 고통이 사라지자 그제야 겨우 정신을차릴 수 있었다. 강산성을 띤 괴물의 소화액에 살이 녹아내리는 것은 정말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따. 차라리 검에 베이는 것이 더 나을 정도였다.
“고마워, 덕분에 이젠 살 거 같아.”
“호호호, 걱정 많이 했어요. 불러 주질 않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거든요.”
정령들이 거주하는 정령계는 멀리 떨어진 공간이 아니라 물질계와 겹쳐진 공간이라고 들었다. 마나는 모두 사라졌지만 정령력은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이제는 자주 불러 주세요. 특별히 뭘 시키지 않아도 곁에 머무르고 싶으니까요.”
“그래, 알았어.”
이제는 아무 걱정이 없었다. 놈이 아무리 발광해도 나이아가 만들어 낸 구가 평형을 유지해서 흔들리거나 뒤집힐 걱정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이아를 귀속시킨 이래 이렇게 오래 대화한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필요할 때 부르기만 했을 뿐 그녀에 대해서 제대로 뭘 아는 것이 없었다.
싸가지와 마찬가지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기이한 정령들이건만 시간이 없거나 생각을 못 해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더구나 지금 이곳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둘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다.
“그런데 나이아는 운디네가 맞아?”
“음,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무슨 소리야?”
“원래 운디네가 맞지만 계약을 맺은 후에는 정령계의 질서에서 벗어나 계급이 없어지죠.”
“그래? 좀 더 자세히 말해봐.”
“네.”
나이아는 하룬과 대화를 하게 되어 기쁜 듯 그가 궁금해하는 것들을 설명해 주었다. 나이아와 꽤 오랫동안 나눈 대화를 통해 하룬은 몰랐던 것들을 많이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정령계 외의 존재와 귀속의 계약을 한 정령들은 정령계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대신 주인의 능력에 따라 등급의 경계가 없는 정령 마법을 구사할 수 있다. 대신 주인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 소멸되어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도 전 운이 좋아요. 이렇게 좋은 주인과 계약했으니까요. 예전에 간혹 드래곤에게 강압적으로 계약당한 경우를 보면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하면서도 구박을 받고나 성적으로 학대를 받기도 했대요.”
“그래?”
성적으로 학대를 받다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원래 정령이란 성이 없지 않아? 내가 알기로는 중성中性이나 무성無性이라고 들었는데.”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에요. 하지만 귀속의 계약을 하면 정령계의 질서를 벗어나는 대신 물질계의 질서에 순응하게 돼요. 물질계에도 정령은 존재해요. 오래된 나무나 호수, 산과 같은 경우 마나와는 다른 정령력을 품으면 그 속에서 정령이 탄생하지요. 그런 정령들과 저같이 물질계의 존재에게 귀속된 정령들은 불사의 수명 대신 소멸을 선택한 대가로 스스로 성을 택할 수 있어요.”
“그럼 넌 정말 여성체란 말이야?”
하룬은 눈이 자신도 모르게 나이아의 가슴과 하복부로 향했다.
“어머!”
나이아가 깜짝 놀라 구형의 수막을 풀었다가 급하게 재생시켰다. 순간 하룬의 몸이 소화액 속에 빠질 뻔했다. 미안한 표정으로 하룬을 바라보는 나이아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미안! 순간적으로 호기심이 생겨서.”
하룬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전까지는 성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담담하게 볼 수 있었던 나이아의 굴곡 있는 몸매를 이제는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괘, 괜찮아요. 당신이라면.”
떨리는 목소리였다. 묘하게 열기가 느껴지는 나이아의 청아한 목소리에 하룬은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자신의 상체 크기에 불과한 나이아였지만 물로 만든 드레스를 입고 수줍은 얼굴로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옷자락만 매만지는 자태는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성결하면서도 사정없이 마음을 끌어당기는 발간 얼굴이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크고 맑은 눈, 오뚝한 코와 작은 입, 수줍은 미소가 떠오른 주홍색 얼굴, 반투명한 워터 드레스를 통해 봉긋하게 솟은 젖가슴의 윤곽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둥근 엉덩이 라인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왜 이러지?’
이 비욘드라는 게임을 하기 전까지 하룬은 이성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사춘기 때도 그랬고 성인이 되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게임을 시작한 이후로는 이상하게 벨에게도 그렇고 NPC인 홀과 정령인 나이아와 위신느에게도 강렬한 이끌림을 느꼈다.
특히 개성 있는 매력을 가진 나이아와 위신느에게 느끼는 감정은 좀 각별했다. 흠이 있는 인간이 아닌 순수한 아름다움을 가진 존재라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가 인간 여자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가 지금 나이아에게 달콤하면서도 몸이 뜨거워지는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또 보고 싶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눈과 마음이 사정없이 그녀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쿠웅!
그 순간 갑자기 어딘가와 충돌하는 소리 때문에 정신을 차린 하룬은 더 이상 빨개질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붉어진 나이아의 감은 눈과 작고 하늘거리는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지만 눈에 들어온 상황은 지금 어딘가에 멈추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도착했나 봐.”
“그, 그러네요.”
진한 아쉬움이 담긴 나이아의 마음이 전해져 왔다. 그 역시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이아는 위장 입구까지 하룬이 들어 있는 구를 움직였다. 그제야 하룬은 나이아를 정령계로 돌려보냈다.
“다음에는 내 이름을 불러 줘. 넌 내 친구니까.”
“네에…… 하룬.”
나이아는 여전히 달아오른 얼굴로 잠시 뜨거운 시선을 보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사라졌다. 나이아가 있던 자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하룬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제 움직여야 했다. 발광석이 아직 손에 쥐여 있어 시야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놈의 목구멍은 아주 넓었다. 튀어나온 뼈들이 많아 그것들을 잡고 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입을 향해 이동하던 하룬은 목구멍을 완전히 통과해 입안으로 나갈 수 있었다.
놈은 입을 다문 상태였지만 발광석의 빛을 통해 이빨이 얼마나 날카롭고 많은지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이빨 사이의 공간으로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지금 있는 곳은 물이었다.
‘확실히 물고기는 아니었군.’
하룬은 조심스럽게 암기대를 점검했다. 한 번 경험했기에 자루가 있는 단검은 제외했다. 자루가 없는 비수 종류만 꺼낸 하룬은 놈의 뇌가 있을 법한 곳을 미리 살폈다.
이제 목표는 정해졌다.
쉬익! 쉭! 슈욱!
다양한 길이와 모양을 가진 비수들이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연속적으로 놈의 머리통을 향해 연약한 입안의 살을 뚫고 들어갔다.
꾸어웍!
쿠웅!
놈의 비명과 함께 비수를 날리던 하룬의 몸이 나동그라졌다. 그와 동시에 어둡던 실내에 빛이 가득 들어왔다. 놈이 고통에 못 이겨 요동치다가 입을 벌린 것이다.
‘너무 밝아!’
갑자기 쏟아진 빛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었지만 누운 상태에서 손에 잡히는 비수들을 위쪽으로 던진 하룬은 빛 속으로 황급히 기어 나갔다. 놈이 발광하며 몸을 트는 바람에 미끄러져 다시 목구멍 속으로 들어갈 뻔했지만 이럴 때는 많은 이빨이 도움을 주었다.
쿵!
심각한 고통이 느껴지는 주둥이를 사정없이 흔들어대는 놈 때문에 하룬의 몸이 운 좋게 밖으로 튕겨 나왔지만 무언가 단단한 것과 충돌하는 바람에 등짝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크윽!”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한 채 간신히 손을 움직여 포션을 마신 하룬은 가능하면 놈과 멀리 떨어지기 위해 누운 상태로 뒤로 물러났다.
꾸어억! 꺽!
비명이 그치지 않는 것을 보면 하룬이 날린 비수들이 놈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초조해졌다. 놈의 분노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뒤로 물러나던 하룬은 어느새 놈의 비명이 그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살며시 눈을 뜬 그는 아직도 좀 눈이 부셨지만 그래도 사물을 알아볼 수는 있었다. 다행히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포션 때문에 몸 상태가 훨씬 호전되었다.
그가 있는 곳은 호수가 바로 옆에 보이는 뭍이었다. 그 뭍은 지금 칸젠이 난리를 치는 바람에 엉망이 되어 있었다. 푹푹 파인 바닥은 땅이 아니라 바위였으니 놈의 괴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디?”
하룬은 괴물에게 눈을 돌렸다가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이건 아이언 스네이크와 비교할 수 없는 정말 엄청난 괴물이었다. 긴 주둥이를 가진 머리통은 아이언 스네이크의 세 배가 넘었다.
마치 마지막 포효를 하듯 턱을 벌린 채로 죽어 있는 놈의 입은 거대한 동굴처럼 보였다.
아이언 스네이크와 길이는 비슷했지만 그 크기가 세 배에서 네 배 정도로 거대했다. 이런 놈이니 지나가는 배를 한입에 물어뜯어 박살냈을 것이다.
그래서 어부들에게는 지옥의 사자처럼 두려운 존재였을 것이고, 신앙의 대상까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