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넌 호수》
티넌 호수와 연결된 테이런 강은 유속이 무척이나 세고 수량도 많았다. 강을 다라 험준한 절벽들과 바위들 그리고 각종 흡혈어들과 전기뱀장어 같은 위험한 생물들이 있어 위험한 길이었지만 하루를 푹 쉰 사람들은 배 대신 강변을 따라 힘차게 거슬러 올라갔다.
지난 여정을 통해 걷는 것에는 제법 이력이 난 사람들은 목적지가 가까워졌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피곤함도 잊고 빠르게 발을 놀렸다.
물가라서 그런지 중간에 고블린을 비롯해 맹수들과 자주 부딪쳤지만 이미 습지에서 처절한 전투를 치르고 온지라 손쉽게 맹수들과 몬스터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발이 쑥쑥 빠지는 늪도 아니고 싸우다 보면 어느새 몸속까지 파고들려는 거머리가 있는 것도 아니니 마음 놓고 싸울 수 있었다.
더구나 여행하면서 몇 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의 실력이 급상승한 것도 몬스터들을 쉽게 처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되었다. 이제 샤니마저 방어구의 효력을 빌려 고블린쯤은 가볍게 처리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험준한 지형은 티노와 하룬이 해결했다. 아무리 보아도 길이 없을 것 같은 지형이지만 두 사람은 용케도 지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었고, 너비가 4미터 이상인 곳은 사람을 업고도 뛸 수 있는 능력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렇게 사흘을 꼬박 이동한 하룬 일행은 오후 늦은 시간에 드디어 테이런 강과 이어진 거대한 호수를 볼 수 있었다. 마치 바다처럼 그 건너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호수는 멀리 동부의 매스트 평야의 젖줄인 테이런 강의 발원지였다.
“가슴이 툭 터지는 느낌이네.”
하룬은 이렇게 광대한 호수는 처음이었다. 물론 다른 가상현실 게임을 통해 호수나 바다를 본 적은 있지만 그것들은 현실감이 없어서 그런지 이런 느낌을 주지 못했다.
다른 일행도 저마다 탄성을 지르거나 말을 잊은 채 호수의 정경에 푹 빠져 있었다. 안개가 피어나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안개 속의 황혼은 아주 각별한 어떤 영감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제국의 북쪽과 그 너머 광대한 툰드라(한대 초원 지대)를 경계로 가로로 길게 뻗은 스카이루프 산맥의 고산 지대에서 흘러내린 물이 해발 2,000미터 이상의 고워 지대인 고요의 땅을 거쳐 모인 것이 바로 이 티넌 호수였다.
1년 중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 호수 주변의 기후는 고원지대에 비해서는 온화한 편이었다. 호수 연안과 그 주위의 초지에는 어업과 목축을 생업으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그들은 ‘나부루’ 부족으로, 제국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제국 문화와는 전혀 다른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유지했다.
제국 시대 이전에는 독자적인 왕국을 가지고 있기도 했던 나부루 부족은 광대하게 펼쳐진 초지에서 좋은 말을 잘 키우고 말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며 용맹하고 호전적인 기질을 가졌다.
사실 황도가 있는 제국 중동부를 제외하면 말이 제국이지 지난 천 년 이래 독자적인 문화와 언어를 가진 소수민족들이 부족 형태로 산재한 상황이었다. 특히 요른 평야의 서쪽과 북쪽은 거의 고산 지대와 고원 지대로, 제국의 행정력이 못 미치는 지역이 대부분이었다.
한참 티넌 호수를 구경하고 난 하룬은 호숫가로 내려갔다. 시퍼렇게 보이는 물이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없으면 수영이라는 것을 한번 해 볼 생각도 있었다.
호수는 너무 맑아서 그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작은 돌들과 물풀 그리고 손가락만 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헤엄쳐 다니는 호숫가의 풍광은 정말 근사했다.
하룬은 호수에 손을 넣었다. 시원한 감각이 느껴졌다. 마치 물의 정령 나이아가 자신을 씻겨 줄 때와 비슷한 감각이어서 무척 친숙했다. 손바닥으로 물을 떠서 세수하던 하룬은 몸을 굽히는 바람에 살과 맞닿은 암기대에서 미약한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뭐지?’
혹시나 싶어 재게 손을 놀려 암기대 가장 깊숙한 곳에 꽂힌 비도지존의 비수를 꺼냈다. 비수에서는 흐릿하지만 광채가 났고, 아주 가늘게 진동하고 있었다. 게다가 물기에 닿자 비수의 진동이 조금 더 빨라졌다.
“찾았다!”
기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하룬은 금방 실태를 인식하고 입을 다물었다. 돌아보니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심지어 초른은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하룬은 서둘러 비수를 그 자리에 다시 꽂았다. 너무 미약한 진동이라 그동안은 느끼지 못했지만 이젠 확실하게 느껴졌다. 비도지존의 유물이 이 근처 어딘가에 있는 것이다.
‘반드시 찾아야 해.’
설사 이것 때문에 고대 던전의 유물을 놓친다 해도 이것만은 포기할 수가 없다. 하룬은 주먹을 굳게 쥐었다.
“대장, 뭐가 있어요?”
“아니, 아니야.”
하룬은 초른을 지나쳐 일행을 향해 걸어갔다. 그사이 비수의 진동은 다시 미약해졌다.
‘혹시?’
고개를 돌려 바다처럼 넓은 호수를 바라본 하룬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과 멀어지니 비수의 진동이 미약해진다는 이야기는 호수 어딘가에 비도지존의 유물이 있다는 뜻이었다. 시험 삼아 호수를 향해 다시 걸어가자 진동이 조금씩 더 강해지고 빨라졌다.
‘확실하군.’
하룬은 호수 어딘가에 있을 유물을 찾기라도 하듯 한동안 호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호숫가를 한참 오가며 물속과 주변을 살피던 초른이 입술을 삐쭉이며 돌아올 때에야 하룬은 일행을 향해 다시 걸었다.
언덕 위로 올라온 그는 벌써 숙영할 곳을 찾아다니는 티노를 볼 수 있었다. 아무튼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워낙 오래 세상을 떠돌아다닌 탓에 이런 풍경을 자주 봤을 테니 그 감흥이 다른 사람과는 다를지도 모르지만, 하룬이 아는 한 그는 이런 자연의 풍광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다만 지금은 할 일이 있어 그러지 못할 터였다.
“일단 배를 구해야겠군요.”
웬일인지 늘 붙어 다니던 사예와 떨어진 발트랑이 말을 걸어왔다. 장중한 기도를 가진 발트랑은 과묵한 성정의 유저였다.
하지만 돌산 지대와 습지를 건너오는 동안 하룬에게 예의를 잃지 않으면서도 각별한 호기심과 관심은 물론 친근감까지 보여 왔다.
“네, 그래야지요.”
“정령술은 어디에서 배운 건가요?”
역시나 시간만 나면 정령술에 관심을 가지는 그의 질문에 하룬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익히게 되었습니다.”
“허허!”
하룬이 대답을 꺼리는 것을 알아챈 발트랑이 민망해하는 얼굴로 떨어져 나갔다. 사실 그런 것은 아무리 친인이라고 해도 함부로 말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었지만 워낙 희귀한 정령사를 만나고 보니 호기심을 억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령술도 어디 보통 정령술인가?
비수를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부릴 수 있는 정령술이다. 한눈에도 하급 정령의 힘은 절대 아니었다. 무생물에 정령의 힘을 넣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혁신적인 시도였다. 더구나 그 불가능한 시도를 눈앞에서 생생하게 시전하는 능력을 보였으니 흥미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비록 실전을 많이 겪지 못해 무늬만 하이 랭커지만 이미 익스퍼트에 발을 확실하게 담근 발트랑은 하룬이 비수를 날릴 때 홀연히 생겨났던 정령의 기척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비수에 정령이 깃들었다고 확신했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무생물인 비수에 정령을 심어 마음대로 그 궤도며 빠르기를 조종할 수 있다니, 그에게는 너무나 파격적인 발상이자 시도였다.
정말 천금을 주고라도 평생 곁에 두고 싶은 능력자였다.더구나 돈에 휘둘리는 용병이니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며칠 동안 지켜본 바로는 돈으로도 어쩔 수 없는 아주 독특하고 능력 있는 용병이었다.
‘일단 여기까지. 지금은 호감만 주면 돼.’
하룬은 발트랑의 은근한 눈길을 의식하며 티노에게 다가갔다. 뭔가 수상한 냄새가 짙게 풍기는 인물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언덕 위에 있는 관목 사이에서 야영을 준비하는 사이 하룬의 지시를 받은 티노는 빠른 걸음으로 근처 마을로 갔다. 어디서 배를 타거나 구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티노가 없으니 하룬이 대신 식사를 준비했다. 이제 마지막이 될 티넌 호수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잔뜩 흥분한 사람들은 어제보다는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식사 준비를 하는 하룬을 거들었다.
같이 여행한 지 어느덧 보름여가 흘렀다. 기간은 비록 짧지만 험한 길을 헤치고 고난을 함께한 덕분인지 꽤 친숙한 분위기였다. 각자의 정체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서로 도와 가며 일을 하는 재미를 느꼈다.
우습게도 가장 신비하고 귀족적인 분위기를 가진 딜런 일행이 이런 야영 생활을 제일 즐기는 것 같았다. 호위라는 사실이 알려진 딜런도 그랬고, 발트랑이나 사예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천막을 치는 것도 그렇고 모든 면에서 서투르고 실수투성이였지만 지금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빠르게 천막을 치고 모닥불을 피우거나 식기 같은 물건들을 정리했다.
“후후. 저 사람들, 아마 이런 건 처음 해 보는 거 같지 않아?”
아레스가 딜런 일행의 즐거워하는 얼굴을 보며 매그럼에게 말했다.
“그러게. 이런 분위기를 무척 즐기는 것 같은데.”
“발트랑이란 유저는 풍기는 분위기도 그렇고 아무래도 노블 같지?”
발트랑의 약혼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사예 역시 평범한 여자는 아니었다. 두 사람 다 오랫동안 턱이나 눈짓으로 사람을 부려 온 분위기를 풍겼다.
“내 생각도 그래.”
끓기 시작하는 수프를 나무 숟가락으로 젓던 하룬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준수한 외모부터 기품 있는 분위기까지 평범한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저 여자, 며칠 뜸하더니 오늘은 작정하고 또 수련이네.”
매그럼이 가리키는 사람은 묘였다. 돌산이나 습지는 수련을 하고 싶어도 진력이 빠진 데다 마땅한 장소도 없었지만 이곳은 달랐다. 특히 언덕 밑 호숫가는 풀이 무성한 평지여서 수련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헉! 익스퍼트? 정말이었네.”
매그럼의 놀라는 소리에 시선을 돌려 보니 묘의 검 전체가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신의 키만큼이나 길고 무거운 바스타드 종류의 중검을 두 손으로 쥐고 눈앞에 선 가상의 적을 노리는 것처럼 두 다리를 엇갈려 달려 나가려는 그녀의 자세는 무척이나 안정되어 보였다.
몸에 축적한 마나를 손바닥을 통해 검신에 주입할 수 있는 초급 경지가 틀림없었다.
저런 상태에서 검날을 통해 아지랑이처럼 보이는 오러를 뿜어내면 중급이다. 거기에 실이나 검첨 모양의 유형화된 마나, 즉 오러를 검 밖으로 꺼낼 수 있으면 상급 경지가 되며 그 오러를 자유로이 수발할 수 있고 오러를 날릴 수 있으면 최상급이 된다.
그 위의 경지가 바로 검사들이 꿈에도 바라 마지않는 소드 마스터였다. 오러의 밀도가 강해져서 마치 검과 같은 형상을 이루면 그것을 오러 소드라 부르며, 소드 마스터가 된 증거로 여겼다.
하룬은 묘를 유저로 보았다. 어딘지 이곳 주민들과는 다른 분위기가 풍겼던 것이다. 그런데 판단이 틀린 것 같다. 익스퍼트 급이라면 레벨이 최소 100에 근접해야 하는데 유저들 중에 그런 진경을 이룬 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하긴 나 같은 사람도 있는데.’
보통 유저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 그도 이미 익스퍼트에 입문한 상태다.
“정체가 뭘까?”
아레스의 말에 매그럼은 대답하지 못했다. 같은 검사로서 꿈꾸던 경지를 본 그의 두 눈에서 투지의 불꽃이 활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와 똑같은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그는 바로 딜런의 일행인 발트랑이었다.
검사인 그 역시 묘의 검술 수련을 뜨거운 눈길로 지켜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이글거리는 투기가 솟아나왔다.
주변 마을로 정찰을 나갔던 티노가 돌아온 것은 식사 준비가 다 되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어서 와요. 일단 식사하면서 이야기합시다.”
하룬은 티노를 끌어 옆자리에 앉혔다.
“네, 대장.”
저녁은 오래간만에 스튜와 흰 밀빵이었다. 하룬은 식사하는 자세만 보아도 대충 유저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있었다. 식사를 맛있게 하면 이곳 주민이고 맛없게 하면 유저일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딜런과 타니엘라 그리고 도네이스는 이곳 주민이 확실했다.
반면 단순히 허기를 채우기 위해 뭔가 먹는 시늉을 하는 티가 나는 나머지 사람들은 유저였다. 하지만 자신처럼 특수한 캡슐 사용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그 정도로 장담할 수는 없다.
하룬은 제법 배를 채운 다음 티노에게 물었다. 그 역시 배가 고팠는지 스튜 한 접시를 벌써 해치우고 밀빵을 세 개째 먹는 중이었다.
“그래, 근처 마을의 사정은 어때요?”
“상황이 좀 어렵게 됐습니다. 얼마 전에, 수십 년 전부터 나타나지 않아 호수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해 온 칸젠이라는 괴물이 최근에 출몰해서 이미 수십 척의 배가 부서지고 많은 어부들이 실종되거나 죽는 일이 일어났답니다.”
대답하는 티노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칸젠? 그건 또 무슨 몬스터인데요?”
호기심이 많은 초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호수에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기이한 물고기들과 수중 몬스터들이 살았다고 합니다. 그것들 중에는 일반 상선보다 더 큰 물고기도 있고, 전설로 전해지는 머메이드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나타나 어부들을 공격한 칸젠은 수천 년 전부터 이 호수의 제왕으로 군림해 온 괴물로, 엄청나게 강력한 가죽을 가지고 있으며 강력한 턱을 가진 머리통과 다소 긴 목, 거구의 몸통 그리고 옆구리와 꼬리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나 있는 지느러미가 달렸다고 합니다.”
“공룡이다!”
티노의 말에 대뜸 공룡이라는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은 아레스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 말은 현실에서나 쓰는 용어인 것이다.
“공룡이 뭔가?”
호기심 어린 눈길로 대화를 듣던 타니엘라가 묻자 아레스가 잠시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사실 우리 이방인들이 사는 세계에서 아주 오래 전, 즉 몇억 년 전에 살았다가 홀연히 사라진 공룡이라는 거대한 동물이 있었는데, 그 형상이 바로 티노 부대장이 말한 것과 비슷합니다. 큰 것은 무게가 수백 톤에 몸길이만 50미터가 넘고 키는 10미터가 훨씬 넘는 녀석들도 있었답니다. 하지만 이 세계에 그런 동물이 있을 리 없지요.”
공룡이라는 말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은 그 설명을 듣고 충분히 이해할 것 같았다.
“아니, 우리 세계에도 있네. 아니, 있었네.”
타니엘라가 막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분위기를 잡아 세웠다. 그의 말에 유저들의 안색이 확 변했다.
“수만 년 전이라고도 하고 수십, 아니 수백만 년 전이라고도 전해지네. 무게가 수 톤이 넘어가고 덩치는 영주성만큼 거대한 동물들이 존재했다는 증거는 대륙 전체에 걸쳐 화석으로 발견되었네. 그중에는 아직도 살아남은 것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악어지. 또 물고기 중에서도 그 정도로 오래 살아남은 놈들이 흔치는 않지만 제국 남부 습지에 사는 악풀피시를 비롯해서 제법 되지.”
“오, 이럴 수가!”
아레스가 탄성을 지르며 놀라워했다. 정말로 놀라운 가상현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세계의 역사가 그렇게 오래되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이 게임을 만든 개발자들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나기에 역사적인 사실까지도 이렇게 세세하게 설정해 놓았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유저들도 마찬가지로 놀라고 있었다. 그들이 이제까지 해 온 가상현실 게임들은 유저의 플레이를 위한 것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단지 배경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비욘드는 너무나 달랐다. 그들이 접하는 생동감 넘치는 NPC들은 물론 그들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실제처럼 구현해 놓은 것이다.
“자네가 말한 그 거대한 생물체를 우리는 ‘드레드 드래곤’이라고 부르네. 무서운 드래곤이란 뜻이지. 드래곤은 최근 수천 년 사이에는 현신한 적이 없지만 왕국이 난립해서 전란을 거듭하던 난국亂國 시대에는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는, 실재한다고 믿는 강력한 존재일세. 우리 테론 제국의 역사학계는 드레드 드래곤들이 수천만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진화를 거듭해 오면서 지성을 획득하고, 1만 년에 가까운 수명을 얻은 것은 물론 마나에 대한 근본 원리를 터득한 것으로 생각하고 잇네.”
그가 말하는 것은 NPC들은 물론 유저들에게도 무척이나 흥미로운 이론이었다.
거대한 몸체에 비해 두뇌는 극히 작은 용량이던 공룡이 어떤 일을 계기로 두뇌의 크기가 커지고 지성을 획득하면서 그 능력을 발전시켰고, 우주 만물의 근원인 마나의 비밀을 손에 넣어 중간계 최강의 존재로 진화했다는 이야기였다.
아레스를 비롯한 유저들은 그 이론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휴먼들의 역사를 보면 원인 불명의 일로 원시인에 불과하던 인류가 비약적인 지적 성장을 이룩했고, 수천 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종말을 이끌어 낼 정도로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보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세계에도 진화 이론은 있구나.’
아레스는 비욘드의 역사를 알면 알수록 더욱 신기했다. 지구에만 존재할 거라고 생각한 여러 가지 지식들이 이 세계에도 비록 귀족이나 마법사들을 비롯한 소수 계층이긴 하지만 그사이에 꽤 널리 알려지고 연구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개발자가 휴먼일 테니 말이다. 이 가상현실 게임의 몬스터들이 북유럽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으니 당연히 이 세계에 대한 가설도 지구적인 사고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룬은 지금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고대 던전에 하루라도 빨리 도착하는 것이 더 시급했다.
“그래서 배를 띄울 수 없다는 겁니까?”
“네. 마을 전체가 칸젠이라는 괴물 때문에 풍비박산이 난 상태더군요. 심지어 고기를 잡는 성인 남자들이 거의 남아나질 않았을 정도니까요. 호수 주변의 마을들은 대부분 비슷한 사정일 거라고 생각됩니다.”
“으음.”
생각지도 않았던 난관에 봉착하자 하룬은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이 호수를 돌아가면 일주일이 넘게 걸릴 겁니다.”
하룬의 설명에 모두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물론 지금까지만 해도 일정을 엄청나게 단축한 것이지만 사흘이면 될 것을 일주일이나 걸린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안 그래도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다. 엄청난 집중을 요구했던 돌산 지대도 그렇지만 습지는 정말 끔찍했다. 차라리 몬스터가 낫지 독충들과 벌레들 때문에 아직도 몸 곳곳에는 물린 흔적이 선연하게 남아 있는 상태였다.
“난 뗏목이라도 만들어서 타고 가겠습니다.”
하룬은 여기서 미적거리고 싶지 않았다. 언제 던전이 클리어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더구나 비도지존이 남긴 비수가 미약하지만 진동하며 울고 있었다. 분명 호수 안에 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배를 타고 가도 사흘이 꼬박 걸린다면서요? 거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도 출몰하는 상황이고요.”
샤니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지난 여정의 강행군으로 진이 빠진 모습이었다. 다들 제대로 몸조차 가누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체력이 좀 되는 사람들은 오랜 용병 생활로 단련된 티노와 도네이스 그리고 경지가 남다른 딜런 정도가 고작이었다.
일행의 반응을 예의 주시하던 하룬은 잠시 생각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 좋습니다. 호수를 끼고 돌아가는 길은 우리 전력으로 보아 큰 위험은 없을 겁니다. 티노가 인솔하세요. 딜런 님과 도네이스가 도와줄 겁니다.”
그 말에 티노가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 하룬과 따로 움직이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이 지역 토박이들조차 호수 깊숙한 곳까지는 들어가지 않았을 정도로 위험하니 하룬의 말을 듣는 편이 나았다.
“알겠습니다, 대장.”
어찌 되었건 의뢰는 성공해야만 한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먼저 호수를 건너가서 그쪽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지금쯤이면 테베 백작령 인근에서 플레이하던 유저들이나 제국 북부군 그리고 인접한 영지에서 파견한 사람들이 고요의 땅 입구인 고요의 평원 근처에 도착했을 겁니다. 물론 이미 고대 던전을 먼저 발견한 세력들도 가만히 앉아서 접근을 허락하지는 않을 테니 상황이 복잡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룬의 말이 맞았다. 자세한 사정이야 자신할 수 없지만 그가 말한 대로 지금쯤이면 발 빠른 사람들이 고요의 땅으로 올라가는 고요의 평원 지대에 도착했을 것이고, 평원에서 고요의 땅으로 올라가는 오르막 경계면에서 대치 상황이 벌어졌을 확률이 아주 높았다. 상황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호수를 건너가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호기를 부려 하룬을 따라가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에게 오랜 시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은 사실을 무시할 수도 없다.
하룬은 티노에게 자세한 길을 설명해 주었다. 사실 길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 호수 연안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룬이 중점적으로 설명한 것은 그중에서도 몬스터들이 출몰하거나 지반이 약하거나 위험한 구역이었다.
“같이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대장? 좀 돌아서 가면 될 일을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잖아요.”
여태 계속 속을 태우던 헤니가 참지 못하고 하룬을 말렸다.
“내 생각도 그렇다네. 대장의 놀라운 능력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배도 없이 혼자서 이 넓고 위험한 호수를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세. 거기 상황이야 같이 가서 파악해도 늦지 않을 거 같은데 같이 가세나.”
타니엘라도 같은 생각이었다. 나흘 더 빨리 간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바뀔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 것이다.
사실 하룬도 이렇게 무리할 생각은 없었다. 모험을 좋아하지만 위험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일부러 위험 속에 뛰어들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비도지존의 비수가 울기 시작했다. 그 진동은 너무 미약했지만 분명 이 호수 어딘가에 비도지존의 흔적이 있을 것이다. 찾을 수 있을지 어떨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가 봐야 했다.
“아닙니다. 굳이 던전이 아니더라도 이곳에서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꼭 가야합니다.”
하룬의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이 너른 호수에서 볼일이 있을 턱이 없었다. 있다면 고요의 평원이나 고요의 땅에서일 것이다.
“고요의 땅으로 들어가자면 아무래도 혼자보다는 다수가 유리할 걸세. 자네 혼자는 무리야.”
“그래요, 같이 갑시다.”
평소에는 별로 말이 없던 발트랑까지 나서 한 번 더 말렸지만 하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완강한 모습에 다들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으쓱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일행이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하룬은 근처 산으로 갔다. 약초학을 배우며 책에 언급된 나무를 찾으러 간 것이다.
그가 찾는 나무의 이름은 ‘발사’였다. 다른 나무에 비해 기건비중(어떤 물건의 질량과 그것과 같은 체적을 가진 표준물질의 질량 비율)이 20~30%에 불과한 발사나무는 가벼우면서도 단단해서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특별한 나무였다.
테론 제국의 거의 모든 지역이 아열대에서 온대에 걸쳐 있기 때문에 이 지역 역시 이 발사나무가 자라기에는 충분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근처의 야산을 뒤진 끝에 마침내 발사나무를 찾을 수 있었다. 높이가 30미터가 훨씬 넘고 직경이 1미터가 넘는 거대한 발사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숲을 이루어 자라고 있었다.
도끼가 있으면 좋으련만 없으니 그냥 강철검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신 마나를 날에 주입해 절삭력을 최대한 높였다. 마지막에 나무가 쓰러질 때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해 좀 곤란했지만 결국 발사나무 한 그루를 베어내는 데 성공했다.
길이를 4미터 정도로 자르고 아래에서 4분의 3 정도의 높이로 윗부분을 잘라냈다. 다음은 사람이 탈 수 있도록 나무의 속을 파내는 작업이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전문적인 장비가 없어 일일이 검으로 하다 보니 시행착오를 꽤 겪은 것이다.
하룬은 대여섯 번이나 실패를 거듭했다. 검을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아무리 마나를 주입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또 한 그루의 나무를 자르고 나서야 제대로 된 통나무배를 만들 수 있었다.
밤이 이슥해서 숙영지로 돌아오니 티노가 아직 자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침번을 번갈아 설 정도의 체력도 없는 사람들은 알람 마법으로 도배하고 정신없이 뻗어 버렸다. 천막마다 코를 고는 소리가 요란했다. 심신이 얼마나 지쳤는지 알 만 했다.
“대장, 왜 이렇게 늦었어요?”
“할 일이 있어서요.”
티노는 먼지와 흙 그리고 나무의 잔해가 묻은 그의 옷을 보고는 대충 짐작했는지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티노, 최대한 서둘러야 해요. 소식을 듣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방어선을 만들 수도 있으니 강행군이 필요해요.”
“알고 있습니다. 뺨에 물린 후유증이 심한 다미와 사예 양이 좀 걱정이지만 헤니 말이 오늘만 자고 나면 미열까지 다 내릴 거라고 하니 내일부터는 정상으로 돌아올 겁니다.”
하룬과 티노는 남은 일정과 넘어야 하는 지형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고는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은 하룬과 티노가 소리를 질러 깨우고 나서야 겨우 일어났다. 푸석푸석해진 얼굴과 부은 눈 그리고 눈 밑에 생긴 다크서클을 보아하니 그렇게 자고도 피로가 덜 풀린 것 같았다.
“하-암! 어째 자기는 많이 잔 것 같은데 온몸이 천근만근이네.”
제일 먼저 호숫가로 내려가 세수하고 온 타니엘라가 밤새 굳은 노쇠한 뼈와 근육을 간단한 체조를 통해 가볍게 풀었다.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피로감이 커서 그럴 거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내 눈에 핏발이 서고 근육에 쥐가 나도록 집중했으니 탈이 나지 않을 리가 없지요. 그래도 예전에는 이 정도 강행군에 끄덕도 하지 않았는데 이제 저도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이놈의 눈두덩이 자꾸 아래로 내려가는군요.”
딜런이 우두둑 소리를내며 몸을 심하게 구부렸다가 일어나며 굳은 몸을 풀었다.
따듯한 고기 수프와 빵으로 아침을 해결한 사람들은 출발 준비를 했다. 모두들 일정을 단축하기 위해 강행군이 필요하다는 점은 잘 알고 있기에 각오를 새로이 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지형의 위험만 피하면 되는 것이다.
그때 하룬이 인근 숲에서 발사나무로 만든 통나무배를 끌고 나왔다.
“화아, 배다!”
호기심이 많은 사예부터 시작해서 사람들이 하룬 근처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하룬이 어제저녁부터 밤까지 만든 베에 강한 흥미를 가지고 이곳저곳을 만져 보았다.
“허어, 언제 이 배를 만들었소? 재질이 뭐지는 모르지만 무척 가볍네.”
로레인이 탄성을 지르며 하룬에게 물었다.
“발사나무라는 겁니다. 무게가 여느 나무의 3분의 1정도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가볍고 단단해서 소수의 사람이 탈 수 있는 작은 통나무배를 만들기엔 그만이지요.”
“대단합니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만들 줄 아는 거죠? 용병들은 다 하룬 대장과 같은 거예요?”
그녀는 동행하면서 어지간히 하룬에게 놀랐지만 이번에는 더욱더 크게 놀랐다. 용병을 향한 인식 자체가 확 바뀔 정도로 하룬과 티노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다. 어제저녁 내내 안 보인다 싶더니만 그새 이렇게 멋진 통나무배까지 만들어 놓다니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리가! 돌풍 용병대와 하룬 대장이 워낙 특별한 거요. 나도 용병들은 꽤 만나 보았지만 이렇게 박학다식하고 다양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처음이오. 막막한 곳에서도 안전한 길을 찾아내고 몬스터들의 기척을 귀신처럼 알아채는 티노 부대장의 능력도그렇지만, 정령까지 자유자재로 부리는 하룬 대장의 능력은 어디가 끝인지 모를 정도요.”
타니엘라의 말에 하룬이 쓴웃음을 지었다. 옆을 보니 도네이스가 콧방귀를 뀌며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입을 열어 반론을 주장하지 않는 것을 보니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것 같았다.
‘다양한 것보다는 한 우물을 파는 것이 더 나은데.’
제국 정보 길드에 한해서 싸가지와 정령들의 힘을 전부 쓰겠다고 작정한 하룬이지만 아직도 정령의 힘을 쓰는 것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정령의 힘은 본연의 능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령의 힘이 비록 이 비욘드에서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지만 현실에서도 쓸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비도지존의 흔적을 찾는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사용 가능한 것들 중 가장 강력한 위력을 가진 것이 암기술이었다. 센스 소드는 정해진 검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전을 통해 수련하는 것이기에 배리어 안에 거주하는 현실에서는 그 수련이 불가능했다.
“오늘은 피곤을 한 번 풀어야 할 필요가 있어서 늦게 기상했지만 내일부터는 다를 겁니다. 새벽부터 오밤중까지 걸어야 할 겁니다. 하루라도 일찍 고요의 땅에 도착해야 경쟁에서 앞서 나갈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그럼 먼저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하룬은 작별 인사를 하고 배를 안개가 자욱하게 낀 호수에 띄웠다. 폭이 1미터가 넘는 나무를 고른 덕에 그가 앉고도 좁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힘차게 노를 저어 안개 낀 호수 안쪽으로 나아가는 하룬의 모습을 일행은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제기랄! 같이 갔어야 하는데.’
아레스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특히 무시무시한 괴물이 산다는 말을 듣고 강렬한 투기를 느꼈던 매그럼과 발트랑 그리고 묘와 딜런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그들은 물을 모른다. 거대한 물의 집합체인 호수는 그들과 같은 검사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