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테베 백작령에서 (75/278)

《테베 백작령에서》

 악전고투 끝에 라투엘 습지를 벗어난 하룬 일행이 고요의 땅과 가장 가까운 영지인 테베 백작령에 도착한 것은 길을 떠난 지 열흘이 지난 후였다.

 “빨리 여관부터 잡아요.”

 “그럽시다. 몸이 근질근질해서 미치겠소.”

 아반 부녀의 재촉이 아니더라도 모두의 생각은 똑같았다. 일행은 지친 몸이지만 멀리 보이는 백작성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습지를 통과하며 씻을 기회가 있었지만 그놈의 ‘뺨’ 때문에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한 것이다. 전신에 구석구석 시트로넬라 기름을 바른 후로 한 번도 씻지 않았던 사람들의 몸에서는 시큼털털한 냄새부터 시작해 방어구에서는 심한 악취까지 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높이 5미터가량의 석벽으로 둘러진 백작성에 도착했다. 해자도 없고 기사 한 명에 병사 열 명이 근무하는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여기 백작성 아니야?”

 성문에 들어선 초른은 의아함을 드러냈다. 다들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말은 백작성인데 성안은 너무 초라했다. 마치 오지에 위치한 남작성을 보는 것 같았다. 집도 드문드문하고 대로라고는 달랑 하나였다. 게다가 대로상에 위치한 상점들 숫자도 그리 많지 않았다.

 휘이잉!

 차고 건조한 바람이 먼지를 끌고 대로를 활보할 뿐 인적을 찾기가 힘들었다. 오후 늦은 시간을 고려하면 시장을 보러 나왔을 사람들이라도 많아야 할 텐데 한적하기만 했다.

 “무슨 일이 있나?”

 호기심이 동한 아레스가 기자 의식을 발휘해 보지만 그냥 보는 것만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일행은 지친 몸을 이끌고 여관을 찾아 발길을 옮겼다.

 대로에 몇 개 없는 여관 중에서 그나마 외관이 가장 깨끗해 보이는 ‘카르의 휴식처’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식당 건물과 숙박 건물이 따로 떨어진, 규모가 제법 큰 여관이었다.

 우락부락한 얼굴의 주인이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안을 둘러보니 사람의 인적은 여기서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숙소를 안내받아 들어가자 손님이라곤 그들밖에는 없을 정도였다.

 “뭐, 그래도 우리만 있으니 편하긴 하겠군.”

 “그래, 복잡한 것보다야 낫지.”

 짐을 정리하며 나누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하룬은 주인에게 목욕을 부탁했다. 따로 탕이 없어 따듯한 물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푸짐한 저녁을 준비해 주시오. 수고스럽겠지만 식사는 이곳에서 하겠소.”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준비하죠. 식사하시는 동안 목욕 준비를 해 놓겠습니다.”

 주인은 인상과 달리 사근사근했다.

 목욕물을 준비하는 사이에 이른 저녁을 먹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았다. 어차피 내일 일찍 호수로 향하는 강변을 올라갈 생각이었다.

 주인이 물러난 후 티노와 헤니가 다가왔다.

 “대장, 티넌 호수까지는 어떻게 갈 겁니까?”

 하룬은 미리 지도 내용을 꼼꼼히 살폈지만 확실히 결정을 내리지는 않고 있었다. 문제가 좀 있었던 것이다.

 “일단 배를 알아볼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 테베 백작령부터는 테이런 강이 배를 타고 오르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해서 그게 걱정입니다. 다른 좋은 생각이라도 있습니까?”

 “일전에 이곳에 두 번 들른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티넌 호수까지 가기도 했지요. 배를 타고요. 그런데 이게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폭포를 만나면 내려서 걸어올라 다른 배로 갈아타야 했는데 물살은 물론 경사가 높아 엄청나게 고생을 했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차라리 걸어서 강변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더 나아 보입니다.”

 티넌 호수에서 발원하는 테이런 강은 고요의 땅과 아이리드 산맥을 끼고 길게 돌아 다른 강과 합류해 황도 인근까지 흘렀다. 강폭도 넓고 수량도 많은 편이지만 테베 백작령에서 호수까지의 구간은 배를 타기에는 무리가 좀 있었다.

 고요의 땅처럼 해발 고도가 높은 고원은 아니지만 호수 역시 상당한 고지에 있거니와 이곳과 호수 사이의 구간은 낙차가 크고 중간에 폭포들까지 있어 배를 타고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에고! 또 내 다리가 굵어지겠네.”

 걷는다는 말에 툴툴거리던 헤니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하체를 내려다보았다.

 “푸훗.”

 “후후후.”

 그녀의 모습에 티노와 하룬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따. 역사학을 전공해서 이미 박사 학위까지 딴 그녀는 평소 해박한 지식과 명석한 판단력으로 그들을 감탄시켰지만 이럴 때 보면 완전히 소녀 같았다.

 두 사람의 웃음에 헤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다리 굵어져도 헤니 좋아할 남자들은 많을 테니 걱정 마.”

 티노의 말에 살포시 미소 지으며 좋아하던 헤니가 하룬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장도 그렇게 생각해요?”

 “물론. 제대로 눈 박힌 사내라면 헤니를 싫다고 하는 남자는 없을 거야.”

 해맑은 미소와 따듯한 마음을 가진 헤니다. 비록 미모는 뛰어나지 않지만 명석한 머리와 뜨거운 의지력을 가진 이 여인이라면 충분히 남자들의 관심을 끌 자격이 있었다.

 “정말요? 그럼 대장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달아오른 얼굴로 물어보는 헤니의 태도에 하룬은 순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무슨 의미인지 순간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눈빛에서 묘한 감정이 전해진 탓이리라.

 흥미, 호의, 관심 등의 낱말로 정의할 수 있는 묘한 감정이 자신을 향하는 것이야 한 남자로서 기쁜 일이다. 비록 미모는 떨어지는 편이지만 각별한 매력을 지닌 헤니가 그 대상이면 가슴이 살짝 두근대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번에 포옹한 이후 헤니가 하룬을 쳐다보는 시선은 어느 사이에 변해 있었다.

 “치잇! 거봐요, 대장은 아니잖아.”

 하룬의 대답이 끝내 나오지 않자 헤니는 식식대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머쓱해진 얼굴의 하룬과 달리 고개를 돌린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 한 조각이 떠올라 있었다.

 “후유, 여자들이란.”

 다행히 티노는 하룬의 난처한 태도를 흉볼 생각이 없는 듯했다.

 당장에 그 역시 일정이 확정되면 도네이스의 투정을 들을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풍만하다 못해 푸짐한 몸매를 가졌으면서도 허벅지 굵어지는 것에 예민한 도네이스라면 헤니보다 더 격렬한 반응이 나올 것이다.

 “대장, 뭐부터 해야 하는가?”

 그새 타니엘라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세탁을 위해 방어구를 벗고 산뜻한 새 로브를 걸친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이곳에 들어섰을 때와 달리 중후한 원로 마법사 티가 줄줄 흐르는 모습이었다.

 “일단 식사부터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일행이 많아 목욕물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답니다.”

 “잘했군. 안 그래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자주 입이 궁금하네. 그럼 먹고 씻으면 되겠군.”

 하긴 그동안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기억이 없으니 더할 것이다.

 “네, 식당으로 가시죠.”

 하룬은 타니엘라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뒤에 남은 티노가 나머지 사람들을 이끌고 올 것이다.

 식사는 풍성했다. 새끼 통돼지 바비큐에 맵고 강한 북쪽 특유의 소스에 버무린 야채, 매콤한 고기 수프는 피곤에 지친 일행의 입맛을 돋우고 포만감을 주었다. 모두 최상급 캡슐 사용자인 이방인들도 그 맛에 감탄하며 즐길 정도였다.

 식사하는 동안 화제는 그간의 여행에서 일어났던 일들이었다. 누구는 하룬의 상황 대처 능력을 이야기했고, 누구는 뛰어난 치료 솜씨를 발휘한 헤니를 이야기했다. 또 누구는 길잡이로서 최선을 다한 티노를 이야기하고, 누구는 모두가 힘을 합쳐 위험을 벗어난 것을 이야기하면서 식사 자리를 훈훈하게 만들었다.

 여행을 하며 일행은 빠른 속도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모두가 만족해하는 식사가 끝나자 서둘러 목욕을 시작했다. 이방인들도 목욕을 반기기는 마찬가지였다. 게임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캐릭터의 지저분해진 행색은 물론 악취까지 구현하고 있으니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룬은 티노를 따로 불렀다.

 “우리는 정보를 좀 알아봅시다. 난 정보 길드를 찾을 테니 티노는 돌아다니며 용병이나 술집 주인들과 이야기를 좀 나눠 봐요. 이곳과 고요의 땅 그리고 이곳을 지나친 세력들에 대한 정보를 구해 봅시다.”

 하룬은 제국 정보 길드에서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면 이곳에서부터 그들을 지워 버릴 작정을 하고 있었다.

 “네, 그러죠. 알아보는 김에 배를 이용하는 것도 알아보겠습니다.”

 티노는 부대장이 된 이후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었다. 이전에 보였던 수동적이고 굴종적인 태도가 아닌 적극적이고 자신감 있는 태도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특히 도네이스를 대할 때 더욱 강하게 드러났다. 다카린 용병단의 부단주인 도네이스를 대할 때는 일부러 자신 있고 당당한 태도를 견지하며 돌풍 용병대의 위상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그런데 꼴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티노는 좀 곤혹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려면 악취가 나는 상태는 피해야 했던 것이다.

 “나이아 소환.”

 하룬은 일부러 나이아의 모습이 보이도록 소환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눈에 정령을 드러내려면 소모되는 마나와 정령력이 두 배 이상 들지만 티노에게는 보여주고 싶었다.

 “이것이 물의 정령이군요.”

 티노는 나이아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간 들어왔던 정령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던 것이다. 사람 키의 절반 정도 크기에 반트명한 워터 드레스를 입은 정령의 모습은 정말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이아라고 해요. 절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아, 안녕, 나이아. 만나서 반가워.”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티노라고 해.”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머릿속으로 직접 전해지는 나이아의 말을 들은 티노가 뛸 듯이 놀라며 물었다.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겁니까?”

 “나이아는 좀 특별한 존재라서요.”

 “저야 정령은 잘 모르지만 괴, 굉장히 예쁘고 멋진 정령 같습니다.”

 티노의 말에 나이아가 기쁜 듯 환하게 웃었다.

 “칭찬해줘서 기뻐요.”

 “아, 아니,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고 예쁘고……. 아무튼 무지하게 좋은 정령 같아, 나이아.”

 정령을 직접 보는 것은 물론 의사소통까지 하게 된 티노는 무척이나 들떠 보였다. 사실 나이아의 미모는 그의 상상 이상이었던 것이다.

 “나이아. 우리를 좀 씻겨 줄래? 옷도.”

 “네, 그러죠.”

 나이아는 화사한 미소를 띠고 두 사람의 몸을 크게 감쌌다. 그리고 부드럽게 진동하더니 이내 제자리로 돌아갔다.

 기분 좋은 감각과 함께 눈을 뜬 티노는 어느새 자신의 방어구는 물론 몸까지도 깨끗하게 바뀐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수고했어, 나이아. 다음에 또 부를게.”

 “별말씀을요. 항상 불러 주기를 고대하고 있어요. 티노, 다음에 또 봐요.”

 “아, 응. 고마워.”

 티노는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정령과 함께했던 짧은 시간이 믿기지 않았지만 깨끗해진 몸과 방어구를 연방 살펴보는 그의 얼굴은 놀람이 가득했다.

 “대단하군요, 대장. 정령이란 존재가 이렇게 놀라운 힘을 가진 줄은 대장님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겁니다.”

 그는 정령에 대한 감탄과 아울러 그 정령을 부리는 하룬에게 다시금 경탄과 존경의 시선을 던졌다.

 “하하하, 그렇지요.”

 하룬은 놀란 티노를 두고 먼저 밖으로 나왔다.

 정보 길드의 위치는 허벌 길드의 지도책에 나와 있어 물어보거나 찾을 필요가 없었다. 비록 이름에 비해서 너무나 한산하고 작은 성이었지만 마탑 지부도 있고 용병 길드를 비롯한 길드들은 모두 다 있는 곳이었다.

 아이리드 산맥의 끝자락에 있어 이제 곧 고요의 땅을 찾아올 사람들의 발길로 엄청난 혼란을 겪을 곳이었다. 뛰어난 영주라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마지막 보급을 할 테니 말이다.

 직물 길드 사무실에 제국 정보 길드가 있었다. 다른 정보 길드들은 어디에 있는지 표기되지 않았지만 아마 제국 정보 길드 때문에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다.

 하룬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길드 사무실이라기보다 카페를 연상하게 만드는 곳에는 몇 개의 테이블들과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장식되어 있어 편안하고 따듯한 느낌을 주었다. 단지 사람들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좀 어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정보 길드의 안내를 맡은 에이미라고 해요. 어떤 일을 도와드릴까요?”

 카운터에 앉은 아가씨가 미소 지으며 물어봤다. 미소가 없다면 차라리 더 나았을 것을 그 미소 때문에 기분이 으스스해졌다. 전직이 뭐지는 모르겠지만 한쪽 팔이 없고, 눈도 이상했다. 한쪽 눈동자가 허연 것이 개눈이라도 박은 모양이다.

 “길드장을 만나고 싶소만.”

 그 소리에 소름끼치는 눈으로 그를 탐색하던 여자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정말 기분 나쁜 얼굴이었다. 안내하는 자리에 이런 사람을 앉히는 것을 보아서는 제대로 된 곳은 아닌 듯했다.

 들어올 때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실내와 사람의 분위기가 너무 부자연스러웠던 것이다. 그래도 목소리 하나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다만 길드장을 만나려면 A급이나 포괄적인 정보라야 하죠. 기본 거래 비용이 최소 100골드 이상인데 괜찮겠어요?”

 하룬의 지금 행색은 영락없는 용병의 그것이었다. 몇 골드에도 생명을 거는 거친 용병에게 정보 길드는 사실 어울리는 곳이 아니었다.

 “알고 있으니 불러 주시오.”

 하룬은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흔들었다. 에이미는 100골드짜리 미스릴 주화 소리를 제대로 들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 앞에 있는 많은 줄들 중 황금색 줄을 몇 번 잡아당겼다.

 “절 따라오세요.”

 그녀는 접수대를 비우고 하룬을 실내로 안내했다. 1층의 가장 안쪽에 있는 사무실이었다. 아마도 거래를 위한 용도로 쓰이는 듯 넓지는 않았지만 작은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와 음침하지도 않았다. 창가에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일단 저 창가로 가세요. 길드장에게 연락드리고 곧 차를 준비해 드리죠.”

 하룬은 에이미가 말한 창가로 가 앉았다.

 마침 창밖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창가에 앉아 노을을 보고 있노라니 묘한 감회가 솟아올랐다. 새로운 곳이 주는 흥분과 감동이 여행의 맛이라면 이렇게 낯선 곳에서 보는 노을 역시 여행의 또 다른 맛 중 하나일 것이다.

 ‘언젠가 이 게임을 통해 현실에서 홀로 설 수 있게 된다면 꼭 여행을 해 보고 싶어.“

 배리어를 한 번 나가보니 그 생각이 더 간절했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하룬에게 배리어는 감옥과 다름없는 곳이었다. 획일적인 사상을 주입당하고 무리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배척받는 배리어에서는 그가 원하는 자유를 꿈꿀 수 없었다.

 능력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는 것이야 어느 시대 어느 세상이건 마찬가지이고 진리이지만 소수의 지배층은 그 원칙에서 벗어나 능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세습하는 지배 구조만은 타파하고 싶었다. 아니, 타파하고 싶다기보다는 그런 곳에서는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하룬은 누군가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을 느끼며 상념에서 벗어났다.

 손수 차를 들고 온 사람은 오십 대 중반에 머리숱이 적은 사내였다. 옆머리에는 흰 머리칼이 솟기 시작했지만 잘 다듬은 터라 오히려 관록이 묻어 나오는 그의 눈길은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보였다.

 “노을이 참 좋죠? 저도 시간이 날 때는 언제나 이 창가에서 노을을 보곤 한답니다.”

 말은 그럴싸한데 무표정한 눈빛과는 너무 맞지가 않았다.

 “이곳이라서 더 각별하게 보이는군요.”

 따듯한 차를 한 모금 마신 하룬은 은은한 향을 즐기며 이제 석양이 남긴 붉고 노란 치맛자락을 한 번 더 눈에 담았다.

 “제국 정보 길드 테베 백작성 지부장 바후론이라고 합니다.”

 “알고 싶은 정보가 있어 방문했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물론 원칙은 잘 알고 계시죠. 신원을 밝히면 비공개에 비해 절반의 가격에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요컨대 비공개로는 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뫼비우스를 통해 그런 사정은 이미 알고 있었다.

 “돌풍 용병대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용병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바후론의 눈이 커졌다.

 상대의 반응을 보니 익히 들은 것 같았다. 아니,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척살령이 내려진 데다 유저들도 다 아는 이름이니 말이다.

 용병대 이름을 확인한 바후론은 지체하지 않고 은밀하게 테이블 밑에 설치된 줄을 잡아당겼다.

 ‘후후후, 내게 이런 행운이 오다니.’

 길드 몰래 정보를 거래한 일 때문에 이곳 낙후된 테베 백작령으로 좌천되어 온 지 5년 만에 다시 중앙으로 돌아갈 기회를 잡았다는 기쁨으로 뺨이 푸들거렸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낼 만큼 풋내기는 아니었다.

 감정을 내색하지 않고 예의 그 심유한 눈빛으로 하룬을 보았다.

 “그 유명한 돌풍 용병대를 만나게 되어 영광이오. 그래, 무슨 일로 이곳까지 방문하셨습니까?”

 하룬은 처음 인사했을 때와는 뭔가 다른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히 말투도 예의를 잃지 않았지만 너무 당연하게 돌풍을 언급하는 것도 그렇고 눈빛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의 몸 전체에서 엷은 긴장의 빛을 읽을 수 있었다.

 “던전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호오, 던전의 위치를요? 이미 알고 있지 않았던가요?”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는 그의 모습에서 어딘지 비꼬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반문하는 그의 목소리에서도 숨길 수 없는 적대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여유로움도 함께 묻어나는 것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

 하룬은 은밀히 라이피를 소환했다.

 -라이피, 주변의 동정을 좀 살펴 줘.

 -알았어, 친구.

 사실 위신느를 불러도 되지만 과도한 스킨십을 좋아하는 그녀는 이런 밀폐된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잘못하면 바람 소리 때문에 기척을 들킬 수도 있다.

 라이피는 금방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상황을 알려 주었다.

 -친구, 뭔가 위험한데. 살기를 품은 작자들이 이곳을 포위하고 있어. 천장에 셋, 바닥에 둘, 사방 벽에 둘씩이 습격을 준비하고 있고, 통로에는 마법사 넷을 포함한 검사들이 들이칠 준비를 하고 있어.

 그럴 줄 알았다. 이런 것이 아마 티노가 가진 위험 본능일 것이다. 길드장에게 돌풍 용병대라는 사실을 밝히는 순간부터 이런 따가운 감각이 느껴졌었다. 아마 살기를 감지하고 육체가 본능적으로 반응했을 것이다.

 -저들이 행동을 시작하면 바닥에 있는 자들부터 처리해 줘.

 -알았어. 하지만 먼저 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 건물을 통째로 무너뜨릴 수 있는데.

 라이피의 능력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럴 수만 있다면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좋아. 신호를 보내면 건물을 통째로 무너뜨려.

 -준비할게.

 “소문으로는 돌풍 용병대가 던전을 발견했고 이방인들에게 널리 퍼뜨렸다고 하던데, 아닌가?”

 하룬이 잠시 침묵을 지키자 자신의 기세에 압도당한 것으로 생각했는지 바후론은 마치 수하를 다루듯 태도를 바꾸었다.

 “후후후, 그랬다면 굳이 이곳에 찾아올 일이 없겠지.”

 오는 말이 곱지 않으니 자연히 가는 말도 곱지 않다. 하지만 바후론은 그런 하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비릿한 미소와 함께 본색을 드러냈다.

 “허허, 이런.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말토막이 짧네. 네가 이름 좀 날리는 돌풍 용병대원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난 제국 정보 길드 테베 길드장이야. 본업도 아닌 정보를 거래하는 시장에 뒤늦게 끼어들었으면 어른에게 인사도 하고, 어떤 일을 하면 안 되는지 물어보기도 하면서 행동해야지 말이야. 대가리에 똥만 든 용병 새끼들이 감히 우리 길드의 사업을 방해해 놓고는 위도 몰라보고 꼴값을 떨어. 이런 애새끼들은 한번 제대로 맛 좀 봐야 정신을 차리지.”

 음침하게 웃은 바후론이 금니를 드러내며 협박했다.

 “우리가 너희 사업을 방해했다 이건가? 그래서 길드 본부에서 우리 용병대에 척살령이라도 떨어진 건가? 그런 거야?”

 “흐흐흐, 애새끼가 눈치 하나는 빠르군. 역시 정보 시장에 끼어들 정도는 되는군. 예상되는 동선에 길드의 어쌔신들을 포함해서 몇 세력에 척살 조를 파견했다고 들었는데 용케 피해서 여기까지 온 모양이군. 흐흐흐! 죽기 전에 이거만 알아 둬. 너희 돌풍 용병대 때문에 길드가 입은 손실이 최소 천만 골드가 넘는다는 걸 말이야.”

 “천만 골드라! 호오, 대단하네.”

 감탄하는 것은 진심이었다. 천만 골드라니, 현실로 치면 얼마나 되는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아무튼 엄청난 돈이다. 놈들은 이런 정보를 독점해 이방인들과 골든 배틀 참가자들에게 팔아먹을 작정이었다.

 “그러니까 섣불리 죽을 생각은 하지 마라. 너부터 시작해서 돌풍 애새끼들을 모두 잡아들여 손해를 벌충할 생각이니까.”

 바후론은 벌써 하룬이 잡혔다고 간주했다. 그의 표정에서 숨길 수 없는 여유가 묻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던전 때문에 얼마 전 길드 본부에서 상당한 실력자들을 보내 준 것이다.

 익스퍼트 급 검사가 열에 4서클 이상의 마법사 넷, 1급 이상의 어쌔신 열둘에 자신이 키운 길드원들도 어딜 내놔도 뒤떨어지는 실력은 아니다. 본부에서 전해 온 정보대로라면 상당한 실력을 가진 것 같지만 그래도 용병은 용병이다. 전장을 떠돌거나 몬스터를 상대하며 키운 실력은 정통 수련을 거친 실력자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자신이 있나 보네? 그런데 돌풍 용병대의 실력에 대한 정보도 내려온 건가, 어떻게 우리에 대해 그렇게 잘 알지?”

 “흐흐흐. 용병 새끼답게 끝까지 건방지군. 뭐, 그 정도는 미리 이야기해 주지. 앞으로 지하 밀실에서 너희에 대해 낱낱이 말해 줄 테니까.”

 “고맙군.”

 “사실 길드 본부도 너희 돌풍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어. 용병 길드에 등록된 돌풍 용병대야 용병 수련소를 갓 수료한 얼치기 녀석들이 만든 것이니 그놈들은 아닐 거고, 아마 비등록으로 활동하는 음지의 용병대겠지. 대장으로 추측되는 놈의 검술 실력은 보통, 특징은 신기에 가까운 암기 실력과 길을 찾아내는 능력이 있다는 것. 물론 후크란을 안방처럼 돌아다닌 것을 생각하면 또 다른 능력도 있겠지만 잘 해 봐야 1급 아니면 특급 용병 정도, 소수 정예로 활동하는 놈들이라는 정도지.”

 하룬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판정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4급으로 판정받고 용병 아카데미를 나온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그 정도로 취급받다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대로 제대로 정보를 파악했군. 수고했어.”

 하룬은 마치 바후론을 치하하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허어! 이런 미친 새끼가.”

 바후론은 황당한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아무리 멍청하다지만 제대로 검술도 익히지 않은 자신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살기가 제 놈 하나에 집중된 상황에서도 저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황당함에 이어 자신을 수하 다루듯 하는 하룬의 태도에 분기가 차오른 바후론이 막 공격 명령을 내리려고 손을 들었을 때 하룬이 상체를 내밀고 나직이 속삭였다.

 “그런데 빠진 정보가 하나 있는데.”

 “뭐, 뭔데?”

 정보를 다루는 직업 때문에 자연스럽게 흥미를 보이는 바후론이었다.

 “돌풍 용병대원들이 정령을 부린다는 것은 몰랐지?”

 “정령? 그럼 너희들이 모두 정령사란 말이야?”

 바후론은 크게 놀랐다. 한순간 상황을 잊을 정도로 말이다. 그것은 대단한 정보였다. 길드 본부에서는 지금 던전과는 별도로 극비리에 정령사를 찾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던전과 돌풍 용병대 건에 준하는 특급 지령이었다.

 “그걸 몰랐으니 이런 쓸데없는 짓을 했겠지.”

 “무, 무슨……. 공격……!”

 하룬의 말에 뭔가를 떠올린 바후론이 황급히 생포 명령을 내리려던 찰나 하룬의 지시를 받은 라이피가 정령력을 발휘했다.

 꽈르릉 꽝!

 한순간에 굉음과 함께 2층 건물이 푹석 주저앉았다.

 “아악!”

 “살려 줘!”

 삽시에 주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미리 습격하려고 대기했던 인물들의 실력은 흔하게 볼 수 없는 것이었지만 긴장감을 끌어 올려 막 행동에 옮기려던 순간에 땅이 밑으로 쑥 꺼지고 건물이 통째로 무너지자 쉽게 대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법사들과 검사들 그리고 길드원들은 건물 방어를 위해 일부러 두텁게 만든 건물 잔해에 깔리거나 혹은 만약을 위해 설치해 놓았던 각종 함정들과 트랩이 부서지는 와중에 발사된 무기들 때문에 몰살을 당하고 말았다.

 물론 하룬과 바후론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라이피가 그들 주변만 건드리지 않은 것이다. 주변으로 건물 잔해와 함께 푹 꺼져 버린 땅이 보였지만 그들이 앉은 곳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허억!”

 “후후후.”

 하룬은 찢어져라 눈을 부릅뜨고 격한 신음을 토하는 바후론에게 미소 지었다.

 “이제는 제대로 된 정보를 들을 수 있겠군. 그렇지 않나?”

 “이, 이게…….”

 바후론의 눈빛에는 생기가 없었다. 완전히 공황 상태에 빠져 버린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욱한 먼지가 피어나는 곳을 홀린 듯 응시하던 그의 눈빛에 살짝 생기가 돌았다.

 생존자가 있었다. 본부에서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어쌔신 중 두 명이 먼지와 함께 유령처럼 이동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를 통해 그 사실을 하룬이 알고 있다는 것을 바후론은 알 수 없었다.

 쉭! 쉭!

 하룬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수 두 자루를 날렸다. 놀란 어쌔신들이 짙은 먼지 속으로 황급히 몸을 날렸지만 싸가지가 합체한 비수 두 자루는 그들을 놓치지 않았다.

 “큭!”

 “흐윽!”

 연속해서 열 번 이상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싸가지가 합체한 비수는그 어느 어쌔신도 놓치지 않은 것이다.

 비명을 들은 바후론의 눈에서 다시 빛이 꺼져 버렸다.

 “차라리 죽은 척했다면 그나마 살 수도 있었을 것을, 쯔쯧.”

 자연스럽게 품속에 손을 넣은 하룬은 해독약을 꺼내 먹었다. 공포를 안겨 주기 위해 싸가지까지 소환해서 자욱한 먼지 속에 숨어 습격을 준비하던 어쌔신들을 비수로 처리한 것이다.

 하룬의 눈길이 어쌔신들의 시체 위로 먼지가 내려앉고 있는 쑥 꺼져 버린 바닥을 향했다가 다시 바후론에게 꽂혔다.

 “우리 할 이야기가 많지?”

 “무, 물론이오.”

 바후론은 이제 사색이 된 얼굴로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일단 자리를 피하지. 사람들 눈에 띄는 것은 별로 좋지 않으니까 말이야. 아! 비밀 서류들과 자금이 있는 금고는 가지고 가야겠지?”

 “네에?”

 하룬은 바후론 앞에 놓인 탁자를 한 손으로 들어 옆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바닥에 깔린 융단을 걷어 내고 바후론을 쳐다보았다.

 ‘귀신같은 놈! 언제 이걸 알아낸 거지?’

 바후론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완전히 당한 것이다. 돌풍 놈들이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곳 지부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어디서 정보가 샜는지는 몰라도 돌풍 용병대의 힘은 본부에서 파악한 것과는 천양지차였다. 대원이라는 놈이 이럴진대 그 몸통을 생각하면 소름이 쫙 끼쳤다.

 바후론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중 금제를 해제했다. 일단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먼저였다. 지부 운영 자금이며 1급 이상의 정보가 담긴 극비 서류들을 꺼내 하룬에게 건네는 그의 손길은 주저함이 없었다. 다행히 특급 정보는 오로지 그의 머릿속에만 들어 있는 것이다.

 “고맙군. 근데 저 밑에 있는 건 왜 안 꺼내나?”

 하룬은 텅 빈 금고 바닥을 가리켰다. 라이피에게 이미 또 하나의 작은 금고의 존재를 전해 받은 것이다.

 “후유.”

 바후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이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곳에는 그가 오래전부터 길드 몰래 거래를 통해 벌어들인 개인 자금과 몇 개의 아이템들이 들어 있었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반응하는 마법진을 열어야 알아챌 수 있는 금고였지만 하룬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바후론은 떨리는 손으로 마법진을 해제하고 내용물을 꺼내 하룬에게 건넸다. 아깝다는 듯 손이 떨렸지만 하룬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그것들을 받아 품속에 넣었다.

 ‘저 품속에 마법 아이템이 들어 있군.’

 바후론은 물건이 한없이 들어가는 하룬의 품을 바라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후후후. 뭐, 내가 직접 움직이고 생명을 위협받은 대가로는 조금 부족한 거 같지만 이 정도로 봐주지. 일단 너희들이 먼저 도발했으니 이제는 전쟁만 남은 건가?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 대가는 다른 대원들이 다른 지부들과 본부에서 받아내겠지.”

 하룬의 혼잣말을 듣는 순간 바후론은 머리칼이 곤두서는 공포를 느꼈다. 이 일로 제국 정보 길드가 돌풍 용병대와 완전히 척지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사실 본부의 훈령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정체도 실력도 파악하지 못한 암중의 세력이니 섣불리 부딪칠 생각은 하지 말고 정체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라. 그들의 정보력이 우리에게 못지않은 것을 보면 배후에 강력한 세력이 웅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니 절대 드러내서 적대하지 마라. 특히 그들이 직접 접촉해 오면 척살 조를 파견한 사실을 은폐하거나 강력 부인하고 지급으로 본부와 연락해서 핫라인을 개통하라.》

 본부의 입장은 간단했다. 척살 명령과는 별도로 길드 단위들은 그들이접촉해 오면 지급으로 본부에 연락하라는 것이었다.

 뼈아픈 실수였다.

 이 일의 여파는 본부에서 관리하는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미칠 것이다. 절대 좋은 쪽은 아닐 것이다.

 하룬은 바후론의 몸을 잡아채 민가가 없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별로 인적이 없는 테베 백작령이지만 2층 건물이 폭삭 주저앉는 사고에 이제까지 실내에 있던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룬은 순식간에 바후론의 멱살을 쥐고 성벽을 넘어가 적당한 곳을 찾았다.

 굳이 고문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필요하다면 그럴 용의도 있었다. 휙휙 지나가는 사물과 어지러울 정도의 빠른 움직임에 정신이 나간 바후론은 몸이 땅바닥에 닿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빌어먹을! 제대로 정보나 주지. 이런 놈들을 어떻게 우리보고 상대하라고.’

 도무지 일개 용병대원으로는 믿기지 않는 실력이었다.

 “이제 대화를 해 볼까?”

 “좋소. 일이 이 지경까지 되었는데 쓸데없이 버티다가 죽을 필요는 없겠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다 말할 테니 그냥 조용히 죽게 해 주시오.”

 바후론은 마음을 정한 듯 떨리기는 했지만 차츰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좋아. 대답이 마음에 들면 그러지. 일단 던전 주변의 상황은 어떤가?”

 “아직 별다른 변화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소. 고요의 땅에 거주하는 엘프들은 천 년 전 인간들에게 춥고 생활이 열악한 고요의 땅으로 쫓겨난 것 때문에 우리 인간들의 침입을 아주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소. 또한 그곳을 비밀리에 먼저 찾아낸 이방인 길드들이 근처에서 엘프들을 학살한 것 때문에 절대 영역에서 물러날 생각은 없는 걸로 보이오. 또 메스 기사단이 엘프들을 잡아 강간하고 죽인 일 까지 발생하자 고요의 땅 곳곳에 살고 있던 모든 엘프 종족이 집결한 상태라 각 세력의 인원이 불과 천 명을 넘지 않는 현재 상황에서는 그들을 물리치고 던전으로 진입할 수 없는 상황이오.”

 좋은 것을 알았다. 이방인 길드 세 곳 외에 드러나지 않았던 한 세력을 드디어 안 것이다. 메스 기사단이 바로 그 비밀 세력이었다.

 “제국 정보 길드는 앞으로의 상황을 어떻게 예견하는가?”

 그것은 무척 포괄적인 질문이었는지 잠시 생각하던 바후론이 대답했다.

 “일단 1황자 측과 연결된 골드 스톰 길드와 3황자 진영에 참여한 피닉스 길드 그리고 1황녀에게 투신한 암흑 전선 길드는 조용히 대기하고 있소. 각자 자신들을 받쳐 줄 추가 병력을 기다리는 것이지. 이미 1황자 측에 속하는 여섯 개의 기사단이 현재 아이리드 산맥을 넘어오고 있소. 2황자 측도 발 빠르게 움직여 다섯 개의 기사단과 마법 병단 하나가 아이리드 산맥에 깊숙한 곳까지 들어선 상태요. 암흑 전선 길드를 파견하는 동시에 행동을 개시한 1황녀 측은 이미 고요의 땅 초입의 티넌 호수 가까이 세 개의 레인저 기사단과 다수의 마법사들을 접근시킨 상태요. 아마 제대로 움직인다면 가장 먼저 던전에 진입할 수 있을 거요. 사실 반경 5킬로미터가 넘는 던전 지역에 포진한 엘프들의 숫자는 기껏해야 오천에서 이만 정도이니 그 정도면 소수는 충분히 뚫을 수 있을 거요.”

 생각만큼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엘프들의 경우 모든 부족이 봉기했다지만 본거지를 떠나 합류한 전사들의 숫자는 최대 이만에 불과했다. 그 정도라면 모두 죽이는 것은 어렵겠지만 특출한 기량을 가진 소수의 특공 조가 조력자들이 포위망을 흔드는 사이에 잠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원로원 직속인 메스 기사단의 행보는 전혀 입수되지 않았소. 원래 골든 배틀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인 원로원에 소속된 기사단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은밀한 목적이나 동향이 있는지는 몰라도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하오.”

 문제는 1황녀 진영이었다. 그들이 먼저 던전에 진입한다면 상황이 돌변하는 것이다. 후속 병력을 기다리던 골드 스톰이나 피닉스 길드는 선기를 잃지 않으려고 무리수를 둘 것이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전황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할 것이다.

 편안한 죽음을 원하는 듯 바후론은 하룬이 원하는 몇 가지 정보를 순순히 털어놓았다. 하지만 던전의 위치에 대해서는 자신도 모른다며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이미 진수를 통해 어느 정도 위치를 파악한 하룬이지만 확실히 확인하고 싶어 집요하게 물었으나 그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죽음을 담보로 한 그 태도에 하룬은 그가 던전의 위치는 정말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제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다 말했으니 자진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시오. 죽음만은 내 스스로 선택하고 싶소. 더불어 내 시체는 동물들이 뜯어 먹게 해 주시오.”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었다. 하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검 한 자루를 건넸다. 단검을 받는 바후론의 얼굴은 담담해서 하룬도 감탄할 정도였다.

 “부탁을 들어주어서 고맙소. 고문은 정말 싫어서 말이오.”

 바후론이 자신의 심장에 단검을 힘껏 꽂고 뜨거운 피와 함께 천천히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하룬이 서둘러 자리를 떴다.

 “잘 가시오. 개인적으로 감정은 없었소.”

 하룬이 떠나고 한참이 흐른 후 하얗게 질렸던 바후론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단검이 박힌 자리에서 흘러나오던 피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두어 시간이 흐르자 바후론의 손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밤이 다 새기 전에 그의 몸은 정상까지는 아니었지만 혼자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돌풍 용병대, 내 심장이 다른 쪽에 있다는 것과 내가 잠시 가사 상태를 유발하는 아이템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몰랐을 거다. 아얏! 이 짓도 세 번째라 많이 아프군. 일단 빨리 본부와 연락을 취하자. 돌풍 용병대 놈들이 던전의 자세한 위치를 모르고 있다는 것만 해도 내 실수를 만회할 큰 정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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