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의 공포》
라투엘 습지는 티넌 호수의 하구 쪽에 위치한 방대한 지역이다. 높고 험준한 후크란 산맥과 아이리드 산맥이 만나는 경계에 위치한 분지는 티넌 호수보다 지대가 낮아 지하로 연결된 수로를 통해 호수의 물이 주기적으로 유입되었지만 빠져나갈 곳이 없어 결국 습지가 되었다.
몬스터가 지천인 험준한 아이리드 산맥을 타는 대신 이 습지를 통과하거나 그 경계를 돌아가더라도 테베 백작성까지 갈 수 있다. 다만 습지는 원주민들도 두려워하는 공포의 땅이어서 자신들만의 루트를 가진 나부루 대상이 아니면 감히 지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하룬 일행에게 라투엘 습지의 첫인상은 아름답고 신비하기만 했다.
키 높은 무화과나무들과 물버들과에 속하는 윌로우 트리 그리고 물을 좋아하는 키 큰 풀들이 군집한 습지는 거의 모두 발목에서 허벅지 높이의 물로 채워져 있었다. 풍부한 물과 강렬한 햇빛으로 무수한 종류의 수목이 자라는 곳이었다.
“호오, 장관이군.”
타니엘라의 말대로 장관이긴 했지만 이 엄청난 지역을 통과하려는 여행자에게는 곤혹스러운 곳이기도 했다. 일단 마른 땅이 있는 지역이 별로 없어 직접 물속을 헤치고 걸어야 하는 것에 더해 낮은 지형에 공기의 유동이 별로 없는 곳이라 무척 무더웠던 것이다.
하룬은 사람들의 허리에 다시 밧줄을 감았다. 티노의 조언 때문이었다. 라투엘 습지 곳곳에는 쑥 꺼지는 지형도 많고 개중에는 늪도 있다고 했다.
“가지요.”
사람들은 발목에 닿는 맑은 물의 감촉에 즐거워했다. 돌산 지대와 바람의 계곡을 지나면서 제대로 씻지도 못했던 탓에 물이 그리웠던 것이다. 첨벙거리며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이전보다 한층 가벼웠다.
그것도 잠시,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발걸음은 비록 적은 양의 물이지만 저항 때문에 느려지기 시작했다. 부츠에 스며든 물 때문에 무게감이 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물뿐이 아니었다. 허벅지 이상 자란 풀들은 전진하는 데 방해가 되었을 뿐 아니라 풀잎이 날카로워 잘못하면 노출된 살을 베이기 십상이었다. 때문에 체력이 약한 사람들은 뒤쪽에 배치되어 앞선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곳을 따라가야 했다.
습지를 따라 두 시간여를 움직인 일행은 얕은 가지가 사방으로 넓게 펼쳐진 봉고나무 숲에서 휴식을 가졌다. 처음에는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던 물이건만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 고개를 젓게 만들었다. 물에 젖은 부츠를 신고 이동하는 것은 평지를 걷는 것에 비해 훨씬 더 힘들었던 것이다.
“티노, 이곳에서 주의할 몬스터는 뭔가?”
바람의 계곡을 건너면서 티노와 많이 친해진 딜런이 물었다. 외관만 보면 비슷한 나이지만 실은 딜런이 훨씬 더 나이가 많았다.
“저도 이곳에 온 적이 한 번 있었지만 깊이 들어가지는 않아서 자세한 것은 잘 모릅니다. 근처 원주민들에게 들은 바로는 악어 종류와 다양한 롱 스네이크들이 산다고 합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뺨’이라고 했는데 습지 안쪽에 사는 아주 작은 날개 달린 벌레로, 흡혈은 물론 물릴 시 심한 피부 발진을 일으킨다고 들었습니다.”
“허헛, 참. 이름 한번 희한하군. 뺨이라.”
그때까지만 해도 뺨이 얼마나 무서운지 일행 중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습지를 돌아가는 데 열흘이 넘게 걸리고 통과하는 데는 이틀밖에 걸리지 않지만 근처에 사는 어느 누구도 이 습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이유를 몰랐던 것이다.
짝!
그 순간 다미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쳤다.
“아앗!”
얼굴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어 손바닥으로 친 그녀는 어느새 벌겋게 변해 버린 손바닥을 보면서 비명을 질렀다.
“뭐, 뭐야, 이거?”
피범벅이 된 손바닥에는 작으 벌레의 사체가 짓이겨져 있었는데 마치 모기처럼 보였다.
“얘, 네 얼굴 왜 그래?”
슈미르가 깜짝 놀라 쳐다봤지만 다미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바닥의 흙탕물에 피범벅이 된 손을 씻고 얼굴을 만져 보았다.
“으악!”
비명이 절로 터졌다. 삽시간에 왼쪽 얼굴이 두 배는 커져 버린 것이다.
그게 시작이었다. 특별한 무술 스킬을 익히지 않은 아반과 샤니 부녀의 팔뚝과 얼굴이 마치 빵처럼 부풀어 올랐다. 이어 마법사들도 연이어 방어구와 옷 밖으로 드러난 부위가 심하게 붓기 시작했다.
“감각이 없어. 내 얼굴이 아닌 것 같아.”
“맞아. 더구나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도 않아.”
붓는 것은 약과였다. 문제는 부기가 빠지지도 않을뿐더러 시간이 지나면서 빠르게 곪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부위였지만 점차 그 범위가 확장되어 순식간에 고름이 줄줄 흐를 정도가 되어 버렸다.
“뺨입니다. 이놈이죠.”
티노가 풀 섶으로 손을 빠르게 날려 잡은 녀석은 모기처럼 생겼지만 주둥이의 길이는 제 몸의 세 배가 넘어 사람 손톱 크기에 달할 정도였다. 온몸에 작은 솜털이 나 있어 무척이나 징그러운 외양에 기름기 있는 투명에 가까운 얇은 날개는 네 쌍이나 되었다.
“아얏!”
구경을 하다가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팔뚝을 친 사예가 손을 빠르게 놀려 다시 한 마리를 잡았다.
“세상에!”
사예가 잡은 뺨의 몸집은 방금 티노가 잡은 것보다 다섯 배는 커서 마치 말벌 같았다. 호기심이 동한 헤니가 날카로운 침으로 놈의 몸을 찌르자 엄청난 피가 흘러나왔고, 모든 피가 빠진 놈의 몸집은 티노가 잡은 놈의 그것으로 돌아왔다.
“이건 완전히 흡혈 악마로군. 내 살면서 제 몸의 다섯 배나 되는 피를 빨아 먹은 놈은 처음 봤어. 달라붙거나 피를 빨아 먹을 때는 아무 느낌이 없다가 떨어질 때 통증이 느껴지는 것도 무척 신기하군.”
목덜미에 커다란 물혹을 달고 있는 흉한 외양으로 변한 타니엘라가 감탄했다.
“흡혈이 문제가 아니에요. 피가 응고되지 않도록 몸에 주입하는 물질이 근처 피부 세포를 곪게 만들고 괴사시키는 것이 문제지요. 하지만 제 능력으로는 이 뺨이란 독충의 독은 해독할 수가 없어요. 적어도 독은 아닌 것 같은데.”
헤니는 치료약을 만들기 위해 모든 지식과 경험을 동원해서 궁리해 보지만 무력한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랑스러운 돌풍 용병대원으로 임무를 멋지게 해결하고 싶었지만 중급 치료사인 자신의 역량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한숨만 나왔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조심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일단 쉴 곳을 찾아봅시다.”
이제 뺨에게 물리지 않은 사람은 하룬과 딜런 그리고 티노가 전부였다. 그들은 모두 감각이 극히 예민한 인물들이었다. 풀잎 뒤에 붙어살면서 아주 작은 몸짓에 날갯짓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고 잘 보이지도 않는 뺨의 접근을 피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일행은 이동속도를 올렸다. 마른 땅을 찾는 것이 시급했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습지가 벌써 두려워진 것이다. 뺨에게 물린 곳이 부어오르고 곪기 시작했지만 특별한 통증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람들은 두 눈만 겨우 내놓을 정도로 각자 천으로 몸을 둘둘 만 상태에서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저어 혹시 모를 뺨의 접근을 차단하려고 했다.
이동속도가 빨라지자 자연히 피의 순환도 빨라지고 체온도 올라갔다. 그러면서 알지 못했던 현상이 일어나고 말았다.
“으으으!”
처음 뺨에게 얼굴을 물렸던 다미가 돌연 신음과 함께 쓰러지고 만 것이다.
“뭐야? 헤니, 어서 와 봐!”
다미 바로 뒤에서 걷던 슈미르가 쓰러지는 다미의 몸을 간신히 붙잡고 헤니를 찾았다. 급히 달려온 헤니가 그녀의 몸 곳곳을 만지고 눈꺼풀을 까 보는 등 사태를 확인했다.
“정신을 잃었어요. 체온이 너무 높아요.”
헤니의 말대로 다미의 전신은 마치 열탕 속에 담겨 있는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뺨 때문이군. 어디!”
타니엘라가 다가와 상태를 다시 확인하고는 정화와 치료 마법을 연겨푸 펼쳤다. 하지만 다미의 상태는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이럴 리가? 퓨리파이! 큐어!”
타니엘라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다시 치료 마법을 펼쳐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아까 헤니가 한 말대로 일반적인 독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는 천생 나무 위에서 밤을 지새워야 할 판이었다.
하룬은 다미를 업었다. 지도상으로 보면 마른 땅은 한 30분 정도 거리에 있으니 서둘러야 했다. 이렇게 정신을 잃은 사람이 나온 상태에서 밤까지 찾아온다면 또 다른 독충들이나 수생 몬스터들의 위협을 적절히 막아낼 수 없다.
“자, 속도를 냅시다. 혹시 또 쓰러지는 사람이 나오면 딜런과 티노가 맡으세요.”
하룬은 발걸음을 재게 늘렸다.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어쩐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오크나 오우거와 같은 몬스터나 어쌔신들이라면 상대하기가 더 쉬웠을 텐데 눈에도 잘 보이지 않고 날갯짓 소리도 거의 들을 수 없는 이런 독충을 상대하는 것은 훨씬 더 힘들었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마른 땅에 기어코 도착한 것은 두 명이 더 쓰러지고, 그들을 업은 딜런과 티노 역시 뺨에게 물려 얼굴이 두 배로 커지고 난 다음이었다. 물론 하룬 역시 이마 부위를 물렸고, 어느새 큰 혹이 나온 기괴한 꼴이 되어 버렸다.
손톱 길이나 되는 날카로운 대롱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감았던 천도 소용이 없어 다른 사람들도 몇 번 더 흡혈을 당했고, 마른 땅에 도착한 사람들의 상태는 모두 엉망이 되었다.
하룬은 아직도 고열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다미를 조심스럽게 한 곳에 내려놓고 싸가지를 소환 대기시켰다.
-싸가지, 어때?
-안 돼, 주인. 이건 독이 아니야.
-독이 아니라고?
-응. 마비 성분이 좀 함유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외부에서 침입한 무질에 대해 특정 세포의 저항력을 높여 주는 물질이야.
-그런데 왜 상처 부위가 붓고 곪는 건데?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이 물질은 외부에서 침입한 균류에 대항하는 세포의 활성을 극대화시키는 동시에 그 세포의 증식을 거의 무한대로 늘리는 것 같아.
‘제길! 그럼 일종의 암세포나 마찬가지네.’
좋은 세포든 나쁜 세포든 인체 내에서는 적절한 수가 존재해야 균형을 이룬다. 그 균형이 깨지면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믿었던 싸가지의 능력도 소용이 없으니 이젠 치료사인 헤니를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헤니, 가진 약재를 모두 써 봐. 내가 알아낸 것은 이 뺨이라는 놈이 흡혈할 때 주입한 물질은 독이 아니라는 거야.”
독이 아니라니 자신의 해독제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거 같아요, 대장. 안 그래도 가지고 있던 몇 가지 범용 해독제를 써 봤는데 전혀 듣질 않더라고요. 대장 덕분에 좋은 걸 알았네요.”
헤니는 그동안 이동 중이라 제대로 써 보지 못했던 약재들을 인벤토리에서 모두 꺼냈다. 독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해독제는 제외했기에 쓸 수 있는 약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조합법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피부 과사를 막거나 열을 내리는 약재 그리고 항생 효과가 있는 약재들로 시험해봐야 했다.
사람들은 거의 다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빠른 이동 때문에 피가 빨리 돌면서 열이 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익스퍼트 최상급이라는 딜런 역시 이런 현상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단지 오랜 수련에 강해진 육체로 견딜 뿐 마나는 무력하기만 했다.
하룬이 안전한 거처를 위해 지형을 가다듬는 사이 티노는 서둘러 일행의 저녁을 준비했다. 그나마 기력이 남아 있는 도네이스가 그를 도왔다. 워낙 풍만하고 푸짐한 몸집을 가진 도네이스인지라 부은 것도 제일 표시가 덜한 그녀는 평소처럼 잔소리할 기력이 없는 듯 묵묵히 티노를 도왔다.
“아악!”
갑자기 비명이 들렸다. 그것은 슈미르의 목소리였다. 골골거리던 뫼비우스가 미친 듯 비명이 들린 뒤쪽 덤불숲으로 달려갔다. 하룬 역시 지체 없이 바닥을 고르던 것을 멈추고 뫼비우스를 따라갔다.
“허억!”
뫼비우스가 숨을 급하게 들이쉬며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그와 부딪칠 뻔했던 하룬은 뫼비우스의 어깨 너머로 펼쳐진 참혹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 있었는데, 갑옷을 비롯한 방어구를 착용한 상태의 시체들은 모두 썩어 뼈가 보일 정도였고 이름 모를 벌레들이 그 사이를 꾸물거리며 기어 다니고 있었다. 특히 방어구 밖으로 나타난 머리 부위는 해골만 남았을 정도로 모든 살들이 녹아 수프처럼 근처에 고여 있었다.
몸이라도 씻을 생각이었는지 이곳으로 왔던 슈미르는 눈을 감고 제자리에 쭈그려 앉은 상태로 흐느끼고 있었다.
“끔찍하군.”
언제 왔는지 타니엘라가 절망 섞인 목소리로 탄식했다. 그 뒤로 딜런과 헤니의 모습도 보였다.
“뺨 때문인 거 같군.”
“아마도요. 피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온몸의 세포가 전부 다 급속하게 부패된 거 같아요.”
딜런과 헤니의 대화를 들으며 뫼비우스는 쪼그리고 앉은 슈미르를 부축해 숙영 장소로 돌아갔다. 팔다리가 잘리고 장기와 뼈들이 피바다가 된 곳에 널린 그런 지옥도보다 훨씬 더 끔찍한 장면에 다들 제대로 눈을 들지 못하고 돌아서고 말았다.
“제기랄! 잘못하면 이곳에서 저 꼴로 죽고 말겠군.”
딜런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든 생각을 일부러 말로 끄집어냈다. 열 때문에 맑지 못한 정신 상태에서 슈미르가 본 참혹한 주검에 대해 두런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의 얼굴이 공포와 두려움에 깊이 빠져들었다.
티노가 준비한 저녁식사는 수프였다. 야채와 고기 가루를 듬뿍 넣어 끓인 수프는 맛있었지만 사람들은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었다. 거의 모두가 얼굴이 괴기스럽게 변한 상태라 제대로 입을 움직일 수도 없을뿐더러 공포 때문에 수시로 천으로 감싼 부위를 살펴보기에 바빴다.
수프를 훌훌 마시던 하룬은 두 번이나 더 뺨을 잡은 후에 이 장소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물이 거의 없는 편이라 안심했지만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뺨의 활동성이 강화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아까 뺨이 사람들을 물기 시작한 곳은 볕도 거의 들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들이 무성한 잎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던 지역이었다.
‘일단 자리부터 옮겨야 해.’
치료 방법은 어떻게든 헤니가 찾아 줄 거라고 믿어야 했다. 자신이나 티노 역시 치료 스킬은 가지고 있지만 이론도 부족하고 능력도 부족했다.
하룬은 티노에게만 말하고는 적당한 숙영지를 찾아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른 땅이 펼쳐진 이곳은 나무 대신 풀들이 밀생했고, 강한 향기를 뿜어내는 알 수 없는 종류의 관목들과 줄기에 가지가 무성하게 돋은 작은 나무들이 고작이었다.
하룬은 안전한 장소를 찾기 위해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쪽도 뺨을 비롯해 독충들이 들끓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안전한 곳을 찾기란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기만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른 방향을 살펴보던 하룬은 기어이 벌레가 아예 없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그곳은 가늘고 긴 잎을 가진 풀들이 지천으로 자라난 초지로, 벌레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건?’
무성하게 자란 풀들 사이로 허벅지까지 오는 긴 풀이 눈에 띄었다. 특히 마른 풀잎의 표면에 마치 기름처럼 반짝이는 액체가 묻어 있는 것이 보였는데 그것이 벌레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았다.
하룬은 가츠 노인의 약재상에서 본 약초학 서적의 내용을 떠올렸다.
《시트로넬라의 키는 90센티미터 정도다. 잎은 가늘고 길며, 적응력이 강해 어느 곳에나 잘 자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잎의 정유를 추출하려면 생잎보다는 건조시킨 잎을 수증기 증류법으로 추출한다.
정유는 향수와 화장품 원료로 쓰이며, 벌레와 모기의 접근을 완벽하게 차단해 주기 때문에 해충 방지제로도 사용된다. 뛰어난 살균과 방부 역할을 하며, 신경을 안정시켜 주는 기능이 있어 두통, 편두통, 신경통 등에 좋다. 이 밖에 소화 기관과 생식 기관에도 효과가 있다.》
‘시트로넬라에서 정유만 추출해 내면 독충이나 벌레 걱정은 안 해도 되는데.’
하룬도 수증기 증류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헥터 교관에게 배운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기자재가 없다. 단순히 잎만 가지고는 그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에 잎에서 오일을 추출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었다.
딱히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아 비수를 꺼내서 시트로넬라를 한아름 베어 낸 그는 헤니가 치료약을 찾기 위해 분주하게 약들을 배합하는 곳으로 왔다.
“그게 뭡니까, 대장?”
헤니를 돕고 있던 아레스가 물었다. 그의 목덜미에는 큰 혹이 솟아올라 뺨에게 물린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곳에서는 누런 고름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손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헤니가 감염을 우려해서 사람들에게 아예 만지지도 말라고 한 것이다.
“시트로넬라. 벌레를 퇴치하는 데 특효가 있는 식물이지요.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 많이 자라고 있어요.
“아, 시트로넬라! 저도 들은 적이 있어요. 일명 벌레 쫓는 풀이라고 하지요. 보는 것은 처음이에요. 제가 가지고 있는 약재와 그 풀의 정유를 혼합하면 치료약을 만들 수 있어요.”
헤니 역시 이 풀의 효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하룬이 찾아온 시트로넬라를 보고 기뻐서 껑충껑충 뛰었다.
“한 10분 정도 떨어진 곳이야. 이곳도 안전한 곳은 아니니까 힘들더라도 일단 그곳으로 가야 해.”
“네. 그곳에 가면 쉬는 거라도 편하게 쉴 수 있을 거예요. 당장 가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사람들이 기대 어린 얼굴로 그들에게 몰려들었다. 그 지긋지긋한 벌레들을 피할 수 있다는 말에 없던 힘까지 났던 것이다.
“그 풀은 나도 알고 있소. 예전에 마탑에서 재미 삼아 용돈을 벌려고 화장품을 만든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다루어 본 적이 있지.”
타니엘라도 풀의 효능을 알아보았다. 그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그런데 치료하려면 수증기를 이용해서 잎의 정유를 추출해야 하는데 장비가 없어서…….”
하룬이 안타까움에 말끝을 흐리자 기대하던 사람들의 몸에서 다시 힘이 빠져나갔다. 특히 몸을 바르르 떨면서 간지러운 것을 참고 있던 샤니는 눈물까지 흘렸다. 상인이기에 별다른 무력이나 능력이 없어 아반과 샤니가 집중적으로 독충에게 노출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차이라고는 물린 횟수가 다를 뿐이다. 다들 필사적으로 간지러움을 참고는 있지만 그 모습이 너무 힘겨워 보였다.
더 큰 고통과 흉한 몰골이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손을 대고야 마는 이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만 어떻게 없어진다면 못 할 것이 없겠다는 생각까지 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룬은 머쓱한 얼굴로, 안고 온 시트로넬라를 티노가 지펴놓은 모닥불 속에 집어넣었다. 매캐한 연기와 함께 시트로넬라 특유의 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자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이 초지까지 들어오려고 외곽까지 몰려든 독충들과 벌레들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가만. 어쩌면 물의 정령이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자, 날 따라와요.”
하룬은 급하게 시트로넬라가 자라고 있는 곳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남자들이 아직 깨어나지 못했거나 늘어진 여자들을 업고 그의 뒤를 따랐다.
일행의 상태가 많이 좋지 않은 탓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목적했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말이야! 독충은 물론 벌레들이 전혀 안 보여.”
“이젠 살았구나.”
“치료약이고 뭐고 일단 벌레들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난 살 것 같아.”
사람들은 이제야 안도하며 시트로넬라 위로 쓰러졌다.
헤니와 타니엘라가 시트로넬라를 두고 뭔가 의논할 때 하룬은 시험 삼아 한 포기를 뜯어내 마음속으로 나이아를 소환했다.
-안녕, 나이아. 이 풀에서 기름 성분만 뽑아낼 수 있겠니?
하룬의 부탁에 잠시 고민하던 나이아가 이내 눈을 빛냈다.
-네,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풀 속에서 수분만 뽑아낼 테니까 그런 다음에 마른 풀을 최대한 쥐어짜면 적은 양이지만 오일을 뽑아낼 수 있어요.
-좋아, 그럼 부탁할게.
하룬은 시트로넬라를 될 수 있는 한 많이 뽑아 한자리에 쌓았다.
헤니와 타니엘라가 궁금했는지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나이아가 풀 속에서 수분을 뽑아내는 것은 금방이었다. 금세 시트로넬라의 잎이 누렇게 말랐다. 하룬은 빈 포션 병과 안 입는 옷 하나를 인벤토리에서 꺼내 마른 잎들을 옷 가운데에 넣고 젖은 빨래에서 물기를 쥐어짜는 것처럼 양손을 교차해서 비틀었다.
뚝! 뚝!
비록 적은 양이지만 기름이 한 방울씩 포션 병으로 떨어졌다. 바싹 마른 상태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꽤 많은 양이 나왔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자 작은 포션 병 다섯 개를 꽉 채울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하룬이 고개를 돌리자 헤니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환하게 웃었다.
“허허! 정말 대단하네. 정령사가 이렇게 대단한 존재라는 것은 처음 알았네. 도대체 못하는 것이 뭔가?”
타니엘라는 진심으로 탄복한 것 같았다.
재료가 다 준비되자 치료약을 만드는 것은 금방이었다. 꽤 많은 치료약을 만들어 낸 헤니는 시험 삼아 일부는 자신이 먹고 일부는 뺨에게 물린 부위에 발랐다. 초조하게 변화를 지켜보던 하룬과 타니엘라는 채 5분도 되지 않아 고름이 멎고 부었던 부위가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성공이닷!”
치료약을 조제하는 데 성공한 헤니가 펄쩍펄쩍 뛰며 좋아하다가 과도하게 업 되었는지 타니엘라와 하룬의 몸을 차례로 끌어안았다. 타니엘라 역시 간지러움을 참느라 죽을 정도였기에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흡!”
헤니가 목을 안고 품에 안기자 하룬은 저도 모르게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달콤한 체향과 부드럽고 뭉클한 처녀의 몸이 순간적으로 그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치료약 조제 스킬 레벨이 올랐어요. 다 대장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하룬은 부르르 떨었다. 하필이면 민감한 귀에다 속삭일 건 뭐람. 안 그래도 자극받았던 터에 달짝지근한 그녀의 목소리와 숨결에 순간적으로 피가 뜨거워졌다.
“으응. 다행이네. 그런데 이 몸 좀…….”
“어마!”
하룬의 몸에서 급히 떨어져 나가는 헤니의 얼굴이 삽시간에 노을처럼 붉게 물들었다.
“허헛! 늙은이 눈이 오늘 호사를 누리는군.”
장난 섞인 타니엘라의 말에 헤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들지 못했다.
헤니가 만든 치료약의 효능은 정말 끝내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사람들은 원래의 제 얼굴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환부에서 고름을 짜야만 했던 헤니와 하룬의 얼굴은 누렇게 떴지만 말이다.
고열로 신음하던 다미까지 고르게 숨을 쉬며 잠에 빠져든 것을 확인한 하룬은 힘겨웠던 여정으로 피로가 누적되어 아무렇게나 쓰러져 버린 사람들을 하나둘씩 안아 티노와 도네이스가 친 천막 안으로 날랐다.
비교적 체력이 강한 딜런과 발트랑 그리고 묘가 도와준 덕분에 금방 일을 마무리하고 모닥불을 피울 수 있었다.
하룬은 약초 마을의 촌장에게서 받은 오미차를 꺼내 차를 준비했다. 발트랑과 묘는 차를 거절하고 자신들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딜런 님, 감사합니다.”
“무슨 말을. 대장이 아니었으면 우리도 그 꼴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오히려 대장이 수고했소.”
이번 일을 통해 하룬을 대하는 딜런의 말투가 처음보다는 많이 편안해졌다. 어떤 이는 제대로 알기 전까지는 정중하게 상대를 대하는 법이다.
“티노와 도네이스도 수고했어요.”
“아닙니다, 대장.”
“할 일을 했을 뿐이야.”
티노와 도네이스는 나란히 앉았는데 그 모습이 왠지 보기 좋았다. 비록 작고 왜소한 티노와 크고 풍만한 거구의 도네이스는 정반대의 외모를 가졌지만 둘이 나란히 있으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대장.”
차를 한 모금 마신 티노가 조심스럽게 용건을 꺼냈다.
“무슨 일입니까?”
“아까 저쪽에 죽어 있던 시체들을 살펴봤습니다.”
“그래요? 그래, 뭔가 나왔습니까?”
하룬은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습지에 들어와 그렇게 죽었는지 궁금했다.
“대장, 저놈들은 제라츠 용병단입니다.”
티노의 말에 하룬은 눈만 껌벅거렸다.
“그, 그들이 왜?”
그렇게 묻는 딜런은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그들이 심상치 않은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저 새끼들도 우리와 같이 제국 10대 용병단에 속하지. 물론 정보 길드들의 손발이 되어 황실이나 원로원 그리고 귀족 새끼들의 은밀하고 더러운 일을 처리해주는 똥개들이지만.”
티노와 함께 시체를 살펴보았던 도네이스는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가 속한 용병단과 제라츠 용병단 간에 무슨 알력이라도 있는 듯했다.
“도네이스의 말대로 제라츠 용병단은 용병들 사이에서는 무척 배척받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정보 길드, 특히 제국 정보 길드와 야합해서 주로 인명 살상에 관련된 청부나 황실과 연관이 있는 고위 귀족들의 더러운 청부를 수행하며 세력을 확장해 왔습니다.”
“그건 사실이지.”
딜런이 티노의 말을 확인해 주었다.
“그것뿐이 아니야. 단주인 제라츠, 그 개호로자식은 의뢰 대상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능욕하는 것은 물론 아기나 노인을 막론하고 아무도 살려 두지 않는 악마와 같은 새끼라고. 그 부하들도 마찬가지고.”
하룬은 티노를 돌아보며 보충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제라츠 용병단은 다른 용병단들과 달리 주로 살인을 의뢰받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예컨대 반란을 일으킨 영지 전체를 말살하거나 달아난 농노나 영지민들을 잡아 죽이거나 넘기는 추악하고 더러운 의뢰를 받지요. 이전이라면 제국군이나 영지군이 해야 할 일들 중 더럽고 추악한 일을 대행하는 겁니다. 게다가 그들은 단주인 제라츠의 영향으로 여색은 물론 남색까지 즐기게 되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강간 폭행하는 것은 물론 고문에 살인까지 즐기는 살인마들입니다. 다만 그 대상이 황실과 영주가 죽여도 좋다고 인정한 자들이지만요.”
“나쁜 새끼들이군요.”
들어 보니 전혀 동정이 가지 않는 놈들이었다.
“당연히 나쁘지. 그나마 놈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사람들에게 나름 거칠고 같이 어울리기는 위험하다는 정도의 평가를 받기는 했어도 손가락질은 받지 않았던 우리 용병들의 이미지를 하루아침에 더러운 살인자, 늑대 같은 살육자로 떨어뜨린 놈들이라고.”
도네이스는 말을 하면서도 연방 분기를 터트렸다. 아마 맺힌 것이 많았던 것 같다.
“단장인 제라츠는 황실의 기사단 중 ‘어둠의 집행자’ 기사단의 일원이었다가 정보 길드와의 밀거래 때문에 쫓겨난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병들 사이에는 놈들이 어둡고 더러운 일을 처리하기 위해 일부러 제국 정보 길드에서 뒷돈을 대서 만든 단체라는 소문이 은밀하게 돌고 있습니다.”
티노의 말은 충분히 일리 있었지만 그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룬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 중 일부가 왜 자신들이 향하는 길에 죽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걸 한번 보시죠.”
티노가 천 하나를 꺼내 그에게 전했다. 둘둘 만 상태의 하얀 실크 천이었다.
“이런!”
실크 천을 펼친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곳에는 자신들이 요른에서 이곳까지 온 루트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옆에 쓰인 숫자까지도 인원수와 맞았다.
“우리를 노린 것이 확실합니다.”
“흠! 정보 길드라.”
어쌔신을 보낸 것은 뫼비우스가 전해 준 정보와 더불어 이미 한 번 부딪친 일로 잘 알고 있었지만 제국 10대 용병단까지 동원했을 줄은 몰랐다. 일단 제국 정보 길드의 강력한 힘이 느껴졌고, 자신을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그들의 저의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던전에 대한 정보를 발설했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광분하는 제국 정보 길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뫼비우스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 때문에 그들이 상당한 손해를 보았다지만 그 정보는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밝힐 가능성이 높았다.
손해를 본 것이 아니라 벌 수 있는 돈을 못 벌었다는 이유 때문에 이렇게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된 제국 정보 길드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었다.
“제국 정보 길드라. 반드시 지워 버려야겠군. 아주 철저하고 잔인하게 말이야.”
배신당한 후 용병대를 키워 골든 배틀에서 큰 역할을 해보겠다는 목적을 상실한 하룬은 강해지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나마 돈을 버는 것에나 관심을 가질 뿐이었지만 이번 일을 통해 또 다른 목적을 가지게 되었다.
“후후후. 어디 한번 해 보지. 제국 정보 길드, 기대해 봐.”
하룬의 혼잣말에 티노와 도네이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딜런마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마나를 끌어 올려야 할 정도로 강렬한 살기가 하룬의 몸에서 한순간에 뿜어져 나와 주위 공간을 채웠던 것이다.
용병 아카데미를나와 세상을 경험한 이래 그들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정보들을 꽤 많이 입수했다.
정보를 사고파는 것은 죄가 아니다. 현실 역시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정보를 독차지하거나 왜곡시켜 수많은 인명 피해를 유발하면서 정보를 거래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정보란 제대로 사용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만 나쁘게 사용하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할 수 있다.
종말 시대의 역사를 들여다보거나 현재 유니온 체제에 대해서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통치자들이 정보를 독점하거나 통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힘을 기울이는지 잘 알 수 있다.
기자나 언론인들이 권력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그 사회는 진정한 언로言路가 막히고 독재 아닌 독재로 물들어 힘없는 자들의 권리는 갈수록 위축되고 눈과 귀가 멀어서 결국은 바보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 정보를 다루는 자들이 사욕과 재물 때문에 이런 암살과 같은 더럽고 치졸한 짓을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이 저질러 왔는지 모른다. 아마 제국 전체를 사고도 남을 정도로 부를 쌓은 그들이라면 그동안 저지른 죄악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이제까지 하룬은 싸가지의 사기적인 능력을 거의 쓰지 않았다. 그것은 오염된 현실에 살면서 오염 물질과 독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이었다. 아울러 진정으로 스스로 강해지는 것에 싸가지의 능력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임이 아니라 현실에서 강해지고자 했던 하룬은 암기술이나 검술을 힘들여 수련했고, 목숨이 경각에 달한 경우에만 싸가지를 소환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지. 그런 놈들에게라면 예전의 그 마적 놈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마음의 가책 없이 싸가지의 독을 쓸 수 있어.’
주먹을 쥐는 하룬의 몸에서는 티노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살기 가득한 포스가 넘실거리며 흘러나왔다. 산전수전을 다 겪었고, 끔찍한 광경을 수도 없이 보아 왔던 티노의 온몸에 소름이 돋고 솜털까지 솟을 정도의 깊고 강한 어둠의 포스였다.
‘이자, 너무 위험해!’
머릿속에서 경종이 쉴 새 없이 울렸다. 도네이스는 부들부들 떨면서 자신도 모르게 티노의 팔을 붙잡았다. 안 그러면 하룬이 흘리는 살기에 온몸이 갈기갈기 찢길 것 같았다. 같은 용병대원이라 그런지 티노에게는 본능적으로 그 살기를 약하게 내보내는 까닭에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찾을 수 있었다.
와이번과 몇 마리의 독사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몬스터들을 만나지 않았던 돌산 지대에 비해 습지는 뺨과 같은 흡혈 독충은 물론 수시로 악어와 리자드맨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검게 죽어버린 늪지대에 들어서면서는 한번 달라붙으면 피부까지 같이 도려내지 않으면 안 되는 흡혈 거머리까지 방어구를 파고들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시트로넬라 정유가 아니었으면 아마 다른 독충들까지도 그들을 괴롭혔을 것이다.
별로 먹잇감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물고기가 아니라 인간이라서 그랬는지 습지를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 하룬 일행이 치른 전투는 대소 서른 번 이상이었다.
“훅! 훅! 징그러운 새끼들!”
매그럼이 마지막 리자드맨의 머리통을 베어 버리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힘을 내요! 이제 10분 정도만 더 가면 습지는 끝이니까.”
어느새 자신이 맡은 리자드맨을 처리하고 전방으로 탐색을 나갔다가 돌아온 티노의 말에 일행의 검게 변한 얼굴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말라 버린 하얀 입술과 쑥 들어간 눈, 길게 자리한 다크서클로 꼭 좀비처럼 보이지만 눈빛만은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모두의 로브나 방어구는 온통 몬스터들의 피로 제 색깔을 잃어버릴 정도로 얼룩져 있었다. 모두가 힘을 합치지 않았다면 적어도 힘이 약한 몇 명은 죽었을 것이다.
마법사들도 지치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시로 나타나는 악어와 리자드맨의 습격은 검사들이 일단 막아 주니 다행이었지만 마나 홀이 비워질 때까지 마법을 난사해야 겨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잇었던 것이다.
이곳에 사는 놈들은 하나같이 적게는 수십 마리, 많게는 수백 마리가 떼를 이루어 습격을 해왔다. 때문에 편하게 구경하는 사람은 아예 없었다. 상인인 아반과 샤니마저 손을 보태기 위해 할 수 없이 검을 들고 나서야 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뫼비우스는 티노와 함께 큰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이 양쪽에서 척후를 맡은 덕분에 몬스터들의 기척을 쉽게 감지하고 전투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둘이 없었다면 하룬은 마음 놓고 다른 사람들을 지원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궁사인 도네이스와 로레인의 활약도 대단했다. 악어나 전기뱀장어 그리고 거대 흡혈 물고기를 처리할 때 그녀들의 궁술은 효과적이었다. 물론 깊숙이에서도 힘을 잃지 않는 강력한 위력을 가진 도네이스의 화살은 명중률도 높아 거의 백발백중이었다.
가죽이 단단하고 질기기로 유명한 악어도 그녀의 화살에 눈을 잃고 연약한 뱃살을 드러내며 발광할 정도여서 검사들은 비교적 쉽게 악어들을 처치할 수 있었다.
로레인은 도네이스의 신기에 가까운 궁술에 매료되어 요즘은 친구인 슈미르와도 별로 이야기할 틈도 없이 도네이스의 꽁무니만 따라다녔다.
슈미르는 타니엘라를 쫓아다니며 마법은 물론 그 활용에 대해서 전수받았다. 하룬은 뫼비우스가 척후 임무를 맡아 바쁜 사이 슈미르의 안전을 타니엘라에게 맡겨 버렸다. 슈미르가 어릴 때 헤어진 여동생과 비슷한 미소를 지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타니엘라는 자신의 깨달음을 전수했다.
습지를 다 벗어날 즈음 하룬은 우연히 아레스 일행이 대화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몬스터와 전투를 치렀는지 아레스의 레벨이 10이나 올랐다고 했다. 아마 나머지 유저들도 실력이 꽤 큰 폭으로 올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