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창공의 다리 (73/278)

《창공의 다리》

 하룬은 새벽에 눈을 떴다. 밤새 그렇게 거세게 불던 바람 소리였지만 그에게는 마치 자장가처럼 편안하고 친숙했기에 푹 잘 수 있었다. 편한 마음으로 푹 잔 덕분에 심신의 상태는 굉장히 안정되어 있었다.

 미명에 밝아지는 하늘을 보며 밖으로 나온 하룬은 신비한 새벽의 풍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어둠에 잠겨 있던 세상 삼라만상이 다시 그 모습을 찾기 시작하는 신비로운 풍경은 이제까지 좋아했던 짧은 석양만큼이나 마음에 들었다.

 이런 일출은 처음이었다. 배리어의 하늘은 늘 혼탁해서 제대로 일출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맑고 깨끗한 하늘과 세상이 다시 태어나는 그 놀라운 풍경에 빠져 마침내 붉은 태양이 저 멀리 산 위로 떠올랐을 때에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바람이 잠잠하다.

 “일어났네요, 대장?”

 고개를 돌려 보니 헤니였다. 아직도 어제의 그 충격에서 다 벗어나지 못했는지 약간 파리한 그녀의 얼굴을 보자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자는군.”

 “그렇겠죠. 바람이라는 것이 그 본질은 공기의 유동이니 말이에요. 대지가 태양에 달구어져 그 표면의 공기가 데워져 위로 올라가고, 식으면 아래로 내려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 바람이니 오전부터 밤까지가 가장 심한 법이죠. 늦은 새벽부터 아침까지가 그래도 바람이 가장 없을 때예요.”

 그녀의 설명에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설명을 들으니 머릿속에 잘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머리가 좋다는 것은 정말 그와 같은 사람에게는 부럽기만 한 일이다.

 “그런데 오늘도 이 길을 따라 쭉 가야 하나요?”

 하룬은 걱정 어린 그녀의 물음에 금방 대답하지 못하고 앞을 유심히 살폈다. 절벽을 따라 구불구불 이제껏 올라왔던 길이 마치 뱀의 그것처럼 쭉 연결되어 아득히 먼 곳에서 반대편 절벽의 끝과 연결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바로 건너편으로 갈 수 있다면 최소한 하루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텐데.’

 그것뿐이 아니었다. 반대편 절벽에는 이쪽처럼 소로가 없는 걸로 보아서는 그 반대편에 길이 있는 것 같았다. 건너갈 수만 있다면 이 거대한 계곡에 부는 거센 바람을 피할 수 있다.

 체력이 약한 아반 부녀와 이 신입 대원을 생각하면 어제처럼 밧줄을 서로의 몸에 연결하고 간다고 해도 걱정스럽기만 했다.

 하룬의 눈이 계곡 건너편을 향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온 길이나 앞으로 갈 길을 통틀어 계곡의 거리가 가장 짧았다. 눈대중으로 보니 약 50미터. 반대편에도 이쪽의 거대한 바위처럼 키 큰 바위가 서 있다. 가운데가 심하게 불룩 튀어나온 이상한 형태의 바위는 이쪽 바위와 거의 쌍둥이처럼 생겼다.

 하룬은 눈을 빛내며 지도책의 영상을 떠올렸다.

 ‘있다!’

 예상이 맞았다. 분명히 지도에는 건너편 바위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길이 있었다. 그 말인즉 예전에는 이 계곡을 여기서 건넜다는 말이다. 건너편에 서 있는 바위는 다른 곳과 연결된 것이 아니니 말이다.

 하룬은 어제 기절한 일행이 널브러져 있던 거대한 바위 위로 올라갔다. 높이가 약 5미터 정도 되는 거대한 바위와 그 기단부는 절벽 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었다. 바위를 유심히 살피던 하룬은 인공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굵고 깊은 홈 두 개가 2~3미터 높이의 간격을 두고 바위를 뺑 둘러 나 있었다.

 “뭐에요, 대장?”

 “이상한 게 있어서 말이야.”

 하룬의 말에 호기심이 생긴 헤니가 바위로 기어 올라왔다. 하룬의 설명과 함께 바위에 나 있는 홈을 본 헤니가 대번에 그 용도를 알아챘다.

 “밧줄 자국이에요. 상당히 굵은 밧줄인 거 같아요. 우리가 밟고 있는 바위도 그렇지만 이 바위 역시 단단한데 어떻게 저런 홈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저 홈에 밧줄을 끼워 묵었을 거예요. 그렇다는 이야기는…….”

 건너편에 거대한 고사목처럼 보이는 바위를 본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틀림없이 이 바위와 건너편의 저 바위를 밧줄로 연결했을 거예요.”

 “그렇다면 사람이 밧줄을 잡고 이 사이를 이동했다는 건가?”

 “네, 확실해요. 아마도 무슨 특별한 기구를 썼을지도 몰라요.”

 “특별한 기구?”

 “이 길은 ‘나부루’ 족의 대상들이 암염巖鹽을 가져와 요른 평야에서 나는 곡식을 실어 나르던 그레인 로드Grain Road예요. 당연히 짐을 나르는 말이나 나귀 혹은 야크와 같은 짐승들이 다니던 길이죠. 하지만 이런 바람을 뚫고 이 절벽 길을 따라 계곡을 둘러 북쪽 나부루 땅으로 가려면 이 바람의 계곡을 통과하는 데만도 며칠, 아니 몇 주는 더 걸릴 거예요. 이 거대한 바위들을 이용해서 대상들은 그 시일을 단축했을 거예요. 그러려면 당연히 특별한 기구가 있어야겠죠. 높이를 이용한 거니까 정교하진 않아도 되지만요.

 그녀의 설명에 대충 이해가 갔다. 아마도 이 바위의 위쪽 홈에 끼운 밧줄은 건너편 바위의 아래쪽 홈에 연결되었을 것이다. 반대편 바위의 위쪽과 이쪽 바위의 아래쪽도 그렇게 밧줄을 연결했을 것이다.

 3미터 정도의 높이 차를 이용해서 사람이나 짐 혹은 짐승을 이동시켰을 것이다. 지금같이 바람이 잠잠해지는 시간에 말이다. 그 증거로 자신들이 서 있는 이 바닥은 인간의 손이 닿은 듯 평평하게 잘 다듬어져 있고, 뒤쪽을 이용하면 위로 손쉽게 올라갈 수 있다.

 더구나 가운데 부위가 심하게 튀어나온 바위 중간에도 발을 디디거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었다.

 “문제는 밧줄과 건널 수 있는 기구로군.”

 “기구는 특별할 것이 없어요. 말안장과 비슷한 형태로 두 손으로 잡을 수만 있으면 경사를 이용해서 미끄러져 건너편으로 갈 수 있으니까요. 다만 마찰력이 심하게 발생할 테니 조심해서 만들어야죠.”

 헤니의 말에 하룬은 마음이 급해졌다. 언제 다시 바람이 시작될지 모르니 서둘러야만 했다.

 동굴로 돌아온 하룬은 티노를 찾았다.

 “혹시 밧줄 준비한 거 더 있나요, 티노?”

 “네. 있긴 한데 왜?”

 티노는 물어보면서도 배낭을 뒤지기 시작했다. 마법 배낭에는 다행히 밧줄이 들어 있었다. 길이와 굵기가 다양한 밧줄 꾸러미가 몇 개나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티노를 위해 헤니가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먼저 깨어난 몇 사람이 헤니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들었다.

 “안 돼! 난 못 건너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도네이스가 얼굴이 파랗게 질려 비명을 질렀다.

 “나, 난 높은 곳이 무섭단 말이야.”

 그녀는 티노에게 딱 달라붙었다. 마치 그가 구원자라도 되는 듯 말이다. 신기에 가까운 활 솜씨로 명성을 날리던 특급 용병인 그녀가 높은 곳을 두려워하는 것은 확실히 이상했지만 다른 사람들도 얼굴이 결코 편하지는 않았다.

 어제 절벽에서 추락해 밧줄에 매달려 기절까지 했던 사람들이다. 그 바람에 고통은 느끼지 못했지만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던 생각을 하면 소름이 돋았다.

 “진정해요. 그럴 수 있다는 거지 우리가 직접 한다는 것은 아니니까요.”

 설명을 하고는 있지만 그사이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헤니 역시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맞아. 어제 봤는데 밧줄 같은 건 아무 데도 없었어.”

 티노의 말에 그의 몸에 딱 달라붙었던 도네이스가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신의 실태를 느끼고는 얼굴을 붉히며 슬금슬금 엉덩이를 떼었다.

 하지만 헤니의 얼굴에는 기대가 사라지지 않았다.

 건너편에 밧줄을 걸 방도가 없기 때문에 설마 하룬이 정말로 그 일을 감행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능력의 끝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 혹시 몰랐다.

 모서리의 바위 위에 오른 하룬은 마음속으로 위신느를 소환했다.

 -위신느, 밧줄을 저 바위에 매 줄 수 있겠어? -그 정도는 문제없어요.

 -좋아. 그럼 던질 테니 부탁해.

 하룬은 미리 준비한 밧줄의 끝에 배틀액스를 단단하게 묶어 몇 번 돌리고는 건너편을 향해 힘차게 던졌다.

 차르륵!

 똬리를 틀었던 밧줄이 순식간에 풀려 나갔다. 밧줄 끝에 매인 배틀액스는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꼿꼿하게 대가리를 세우고 빠르게 건너편 바위를 향해 날아갔다.

 그걸 바라보는 딜런과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무려 50미터가 넘는 거리를 동일한 높이를 유지해서 날아가는 밧줄이 너무 신기했던 것이다. 하다못해 포물선이라도 그렸다면 그리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시 저것도 정령의 힘인가?”

 “설마. 정령이 밧줄에 깃들 수 있다면 모르지만…….”

 발트랑의 혼잣말을 들은 아레스가 대답했지만 말을 끝까지 잇지는 못했다.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정령사란 그만큼 희귀한 존재이기에 주로 하급 정령에 대한 것들만 단편적으로 알려졌을 뿐이다.

 그그극!

 마침내 배틀액스를 머리로 한 밧줄은 거대한 바위의 아랫부분을 몇 번 감더니 다른 바위와의 틈에 머리를 박았다.

 하룬은 몇 번 밧줄을 당겨 단단한지 확인한 후 바위 뒤를 통해 튀어나오 허리 부분으로 올랐다. 파인 홈에 밧줄을 세 번 거듭해서 걸고는 바위 뒤에 있는 큰 홈에 매었다. 티노에게 아침에 매듭짓는 법을 배웠던 것이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하룬은 또 다른 밧줄 하나를 마찬가지로 건너편 바위에 걸어 이번에는 바위의 하단에 단단하게 맸다.

 “설마 그 줄을 타고 건너가려는 건 아니겠지, 대장?”

 내내 궁금했던 사람들을 대표해서 딜런이 물었다.

 “맞는데요. 이 줄을 타고 건너편으로 갈 겁니다.”

 담담한 하룬의 대답에 사람들은 기겁했다. 표정 변화가 별로 없는 편이던 딜런마저 이번에는 얼굴이 확 바뀔 정도였다.

 “우린 서커스단원이 아니라네.”

 “압니다.”

 대답을 하면서 하룬은 투명 비수로 미리 꺼내 놓은 와이번 가죽과 뼈를 손보기 시작했다. 와이번 뼈라면 마찰력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장기적으로 밧줄을 타려면 바퀴를 이용해야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만들 여유도 없거니와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그가 만든 것은 와이번 가죽과 두개골 뼈를 사용한 일종의 손잡이였다. 단단하기로 소문난 두개골 뼈를 사용해서 밧줄을 가운데 넣을 수 있도록 가공한 다음 그 위를 가죽으로 단단하게 고정시킨 것이다. 그 끝에는 가느다란 밧줄을 연결했다.

 하나를 완성시킨 후 하룬은 다시 똑같은 것을 하나 더 만들었다.

 “그게 뭡니까, 대장?”

 아레스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모두 모이라고 해.”

 “네!”

 아레스가 힘차게 대답했지만 부를 필요는 없었다. 이미 모든 사람들이 다 바위 위로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하룬은 사람들을 보면서 설명했다.

 “이것은 일종의 손잡이입니다. 전문적인 것은 아니지만 손만 놓지 않는다면 절대로 안전합니다. 이것을 밧줄에 걸어 손잡이처럼 양쪽에 만들어진 것을 잡고 건녀편까지 가면 됩니다. 시범을 보일 테니 차례로 건너오십시오.”

 하룬은 자신이 만든 것 하나는 마법 배낭에 넣고 다른 하나는 일단 가는 밧줄을 굵은 밧줄에 연결했다. 그러고 나서 사람의 머리 크기로 만든 와이번 뼈를 홈에 걸고 양쪽으로 늘어진 가죽 손잡이를 잡았다.

 “하앗!”

 두세 걸음을 뛰어 도약하자 어느새 하룬의 몸이 허공에 걸렸다.

 추르르륵!

 와이번 뼈와 밧줄이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은 마치 새처럼 가볍게 건너편을 향해 날아갔다. 50미터가 넘는 거리였지만 금방이었다. 어느새 허공을 날아 건너편 바위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한 것이다.

 “우와! 대단하다!”

 매그럼이 경탄성을 냈다. 놀란 사람들이 지르는 탄성이 연쇄적으로 울리더니 이내 뚝 그쳤다. 주위를 돌아본 매그럼은 하얗게 질린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룬이 건너가는 것은 멋지게 보였지만 막상 자신이 그렇게 하려니 공포에 질린 것이다.

 건너편에서는 하룬이 배틀액스를 풀고 밧줄을 바위에 연결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바위에 단단하게 감았는지 밧줄이 다시 팽팽해졌다. 미리 생각한 것인지 위아래로 교차해서 양쪽에 감은 두 밧줄의 간격도 충분해서 이제는 바람의 계곡 한가운데에 길이 생겼다.

 그 순간 하룬에게는 처음 듣는 안내음이 들려왔다.

 -창공의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창공의 다리

창공의 다리는 천 년 전 비도지존이 만든 이래 수백 년 동안 나부루 대상들이 이용하던 것으로, 한 번 끊긴 이래 다시는 만들지 못한 것입니다. 이 끊어진 다리 때문에 나부루 대상을 비롯한 상인들의 인명 피해가 큰 것은 물론 지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간 이 험로 때문에 곡물반입이 줄어 고생하던 나부루 자치 구역 사람들과 안정된 판로와 값싼 소금을 확보하게 된 요른의 농민들은 많은 이득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요른 평야와 나부루 지역을 오가는 상인들은 물론 해당 지역 사람들은 당신을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에게 제국민의 이름으로 H.P.(영웅 포인트) 500을 드립니다. 이제 당신은 언제 어디서건 제국민의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어, 이게 무슨 소리지?’

 S.P.는 잘 알고 있지만 H.P.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퀘스트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곳 주민을 위해 그 어떤 공헌을 하면 주어지는 포인트 같은데 금시초문이었다.

 물론 하룬이야 다른 유저들처럼 레벨 업에 목을 매는 입장도 아니고 넥컴월이나 비욘드 홈페이지에 자주 방문하는 것도 아니라 정보에는 취약하지만 그래도 처음 듣는 포인트 이름이었다.

 ‘뭐, 어쨌든 기분은 좋네. 이걸로 이 바람의 계곡을 오가는 사람들의 힘겨운 여정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진다면 다행이지.’

 하룬은 건너편 사람들에게 건너오라고 손짓했다. 처음에는 두려운지 아무도 나서지 않았지만 매그럼이 작은 줄을 당겨 손잡이가 달린 기구를 끌어가더니 용감하게 나섰다.

 “끼야야아아! 야호, 신 난다!”

 처음에는 비명을 지르던 매그럼은 이내 전율적인 속도감과 하늘을 나는 쾌감에 소리를 지르면서 즐거워했다. 하룬이 몸을 잡아 주어 안전하게 착지한 그는 그 짧은 사이 큰 흥분을 느꼈는지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대장, 이거 끝내주는데요.”

 “하하하!”

 다음은 딜런이었다. 그 역시 이런 공중 이동은 처음인지 조금 질린 얼굴이었지만 기분만은 좋았는지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하룬에게 하룬에게 엄지를 추켜들며 활짝 웃었다. 발트랑이 다음이었고, 헤니와 아반 그리고 묘가 그 뒤를 이었다.

 “서둘러요!”

 건너편을 주시하던 하룬이 소리를 질렀다.

 “적인 것 같다!”

 딜런 역시 긴장한 표정으로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재촉했다. 뱀처럼 구불구불한 절벽 길로 한 떼의 무리가 빠르게 일행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 오고 있었다. 햇빛이 반짝거리는 갑옷으로 보아 기사들인 듯했는데 선두는 이미 검을 빼 든 것으로 미루어 안 좋은 의도를 가진 듯했다.

 사정이 급해지자 사람들은 눈을 질끈 감고 티노의 지시대로 기구를 잡고 허공을 날아 건너왔다. 하지만 도네이스가 문제였다. 샤니처럼 연약한 여자도 건너왔는데 명색이 특급 용병인 도네이스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티노의 허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안 돼! 난 못 타! 무서워 죽겠다고.”

 사람마다 두려워하는 게 따로 있는 것인지 도네이스는 차라리 절벽 길로 가겠다면서 난리를 쳤다. 그러는 사이 벌써 절벽 길을 달려 올라오는 일단의 기사들이 티노의 눈에도 보였다.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탓에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비쳐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서라!”

 선두의 기사가 소리를 질렀다.

 “제기랄! 저놈들은 바드로 공작이 아끼는 철십자 기사단이야.”

 딜런이 갑옷 앞에 새겨진 십자 문양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저들이 왜 우리를 쫓는 거지?”

 아레스가 궁금해서 물었지만 딜런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대신 뫼비우스가 대답해 주었다.

 “철십자 기사단의 주인인 바드로 공작으 1황자 진영의 주축 세력이야. 던전을 찾아낸 골드 스톰 길드가 미는 곳이지. 놈들은 우리가 가는 길을 막을 생각인가 봐.”

 그들은 돌산 지대를 통과하면서 고생했는지 무척 지친 얼굴이었지만 이글거리는 눈으로 건너편 절벽에 있는 하룬 일행을 똑바로 응시하며 접근해 오고 있었다.

 “서둘러요, 티노!”

 마음이 급해진 헤니가 소리를 질렀지만 도네이스는 패닉 상태였다. 검을 빼 들기까지 하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이놈들! 다 죽여 버리고 말겠어! 거기 서라!”

 이제 얼굴을 알아볼 거리까지 추적한 선두의 기사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기사들은 지척인데 도네이스의 상태는 최악이니 보는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티노가 마침 고개를 돌린 도네이스의 뒷머리를 주먹으로 강타했다. 축 늘어지는 도네이스의 거구를 안은 티노가 한 손으로 손잡이를 그러잡고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잘했어! 꽉 잡아, 티노!”

 딜런은 주먹을 꽉 쥐고 티노를 응원했다. 간발의 차이로 티노를 놓친 기사들이 원통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사이 이를 악문 티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두 사람의 체중이 무거운 것일까? 그 속도가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마치 개미의 그것처럼 느리기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건너편 기사들 중에 섞여 있던 일부 병사들이 활을 꺼내 들었다.

 하룬은 마음속으로 바람의 정령을 소환했다.

 -위신느, 언제 바람이 다시 불지?

 -이제 곧요.

 -늦겠어.

 어제만큼만 불어도 근력이나 시위의 힘으로 날리는 화살은 아무런 위협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화살을 시위에 거는 모습을 본 하룬의 머리에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위신느, 실드도 만들 수 있어?

 -그럼요, 당연하죠.

 어제 불었더 그 광풍의 기세라면 화살 따위는 가볍게 막아내고도 남았다. 그래서 실드를 떠올린 것이다.

 -그럼 저 친구들 뒤에 생성시켜 줘.

 -어렵지 않아요.

 “윈드 실드!”

 다른 사람들을 의식한 형식적인 주문이었지만 위신느는 이미 티노의 바로 뒤에까지 날아가 바람으로 실드를 만들었다. 안에서 밖으로 원을 그리며 부는 회오리 바람으로 만들어진 둥근 바람 방패였다.

 팅! 팅! 팅!

 역시 생각대로였다. 위신느가 만들어 낸 바람 방패는 화살을 훌륭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그 어느 곳도 뚫리거나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고 강한 방패를 보며 하룬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리 위신느 최고다.

 -호호호, 그렇게 좋아해 주니 신나는데요.

 위신느의 바람 방패가 두 번 더 화살을 막아낸 직후 티노가 마침내 도착했다. 딜런이 달려 나가 도네이스의 몸을 받아 재빨리 뒤로 빠지자 티노 역시 힘겨운 얼굴이지만 바위 뒤로 움직였다.

 하룬은 밧줄에서 기구를 풀어 바위 아래 깊숙이 파인 홈에 집어넣었다. 이것은 이제 언제든 이 바람의 계곡을 찾을 상인들이 발견해서 잘 사용할 것이다. 바위 뒤로 몸을 뺀 하룬은 위신느를 불러들였다.

 -수고했어. 그만 돌아와.

 -이 정도야 쉽죠.

 하룬에게 날아온 위신느는 바람처럼 하늘거리는 몸으로 보상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기대 어린 눈빛을 보내왔다.

 -후후. 잘했어, 위신느.

 하룬은 위신느의 볼에 뽀뽀해 주었다. 부끄러웠는지 몇 번이나 하룬의 몸을 휘감으며 불던 위신느가 마침내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을 보이며 사라졌다.

 “이 새끼들아, 거기 서! 거기 서란 말이야!”

 마음이 급해진 기사들이 직접 줄을 잡고 건너오려고 했지만 이미 막 불기 시작한 거센 광풍의 기세에 황급히 뒤로 물러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하룬은 맞은편과 달리 바람의 계곡 반대편 능선에난 비교적 편한 길로 일행과 함께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거구에 풍만하기까지 한 도네이스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탓에 그녀를 책임지게 된 티노가 죽을 것같이 힘겨운 표정을 지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들 고개를 젓는 바람에 그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그녀를 어깨에 둘러메고 한참을 내려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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