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바람의 계곡 (72/278)

《바람의 계곡》

 깎아지른 절벽의 꼭대기 바로 아래 소로가 나 있었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바위를 깎고 흙을 파내 만든 위험천만한 길이다.

 100여 미터가량 떨어진 맞은편에도 역시 깎아지른 벼랑이 있고, 그 사이로는 무시무시한 광풍이 불고 있었다.

 휘아앙! 쐐애액!

 “제길! 무시무시하군!”

 “조심해. 바람에 휩쓸리면 나뭇잎처럼 날아가고 말 거야.”

 몸을 날려 버릴 듯 강하게 바람이 부는 계곡으로 진입하는 사람들은 이곳의 지명이 왜 바람의 계곡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바람의 세기는 그렇다 쳐도 그 방향이 수시로 바뀌어 몸 자체를 절벽 쪽으로 최대한 붙이지 않으면 금세라도 날아갈 것처럼 위험했다.

 하룬은 티노의 의견을 받아들여 혹시 몰라 준비해 왔던 로프로 서로의 몸을 연결하기로 했다. 이곳을 오가는 나부루 대상들도 바람의 위험을 피해 그런 식으로 움직인다고 했다.

 하지만 그 방법도 최선은 아니었다. 한시도 긴장을 풀면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잠시 바람의 기세가 누그러들었을 때 사고가 났다.

 바람의 계곡에 진입해서 네 시간 정도가 지나 계곡 사이의 거리가 가장 좁아지는 구간에 도착했을 때였다. 선두에 선 티노는 거대한 바위가 서 있는 모서리를 막 돌고 있었다.

 중간에서 이동하던 발트랑이 사예와 바짝 붙어 뭔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급격히 좁아진 길목에서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조심해!”

 가장 후미에 있던 딜런이 소리를 질렀지만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린 사람들은 위험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건장한 체격의 발트랑이 벼랑으로 떨어지자 그 무게 때문에 밧줄로 몸을 묶은 사람들이 연속적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딜런!”

 온 힘을 다해 밧줄을 당기던 하룬이 벼락처럼 소리를 질렀다. 맨 끝에 있는 딜런이라면 같이 추락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룬의 목소리를 들은 딜런이 마나를 끌어 올려 밧줄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후드드득!

 그의 발이 바깥쪽으로 끌려가며 잔돌들이 계곡으로 떨어졌다.

 다행이다. 그가 중심을 잡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제 차례로 몸에 힘을 주어 다시 위로 올라오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운이 나빴다. 잠시 잠잠했던 거셋 바람이 순간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던 사람들과 딜런을 향해 불어온 것이다. 거센 바람은 수많은 잔돌들을 안고 일행의 얼굴이며 몸을 사정없이 때렸다.

 휘익!

 “크윽!”

 딜런이 짧은 비명과 함께 눈을 감았다. 헤아릴 수 없는 작은 돌들이 그의 몸을 때리자 간신히 바닥에 서 있던 몸이 흔들렸다. 몸을 반쯤 뒤로 돌려 밧줄을 잡고 있는 하룬과 달리 그는 바람을 정면으로 안고 있었던 것이다.

 휘이이잉!

 한번 불기 시작한 거센 바람은 계곡을 타고 올라와 미친년 치마처럼 사방으로 불어댔다. 바람의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거니와 큰 것은 얼굴 크기에 해당하는 돌에서부터 모래처럼 작은 돌 조각까지 품고 있어, 바람의 영향권에 확실하게 들어가 버린 사람들은 눈도 뜨지 못하고 나뭇잎처럼 부유했다.

 “안 돼!”

 거센 바람에 결국 딜런의 몸이 벼랑으로 떨어지는 것을 본 티노가 비명을 질렀다. 순간 밧줄을 거머쥔 그의 손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하룬과 단둘이서 사람들과 짐의 무게까지 감당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 순간 하룬은 자신의 몸이 아래로 끌려가는 것에 대경해서 마음속으로 대지의 정령을 소환했다.

 -라이피, 내 몸을 단단하게 붙잡아 줘.

 -맡겨 줘.

 이미 벼라 바로 옆까지 밀려간 하룬의 두 발은 부츠 굽까지 바닥에 파고든 상태였다. 하지만 라이피 덕분에 곧 허벅지까지 바닥 속에 묻혀 버렸고, 단단한 돌이 그의 몸을 결박했다.

 -고마워, 라이피.

 -별말을. 그런데 그 상태로는 얼마 견디지 못할 텐데.

 라이피의 걱정에 하룬은 이를 악물었다.

 “살려 줘!”

 “제발 올려 줘!”

 티노와 하룬이 잡은 밧줄에 매달려 거센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몇 사람은 바람 때문에 벽에 부딪쳐 피를 흘리기도 했고 체력이 부실한 샤니와 아반 그리고 슈미르는 이미 기절한 상태였다.

 다행히도 딜런이 벽에 닿으려고 할 때마다 몸을 절묘하게 틀어 두 발로 벽을 차 더 큰 피해는 없었지만 거센 바람 때문에 그런 동작도 매우 힘겨워 보였다.

 그렇게 5분여를 견딘 하룬은 뒤에서 티노가 신음을 토해내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돌아볼 수 없었지만 티노가 더 이상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래도 바위를 온몸으로 안고 이제까지 잘 버텨 주던 티노까지 힘을 쓰지 못하면 자신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빌어먹을! 여기서 죽는 건가?’

 비록 엄청난 능력 하락은 경험하겠지만 그래도 부활이 가능한 유저들은 괜찮다. 하지만 NPC들은 몸이 산산조각 나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으윽! 대, 대장! 바람이 잦아듭니다.”

 티노의 신음 섞인 말에 밧줄을 당기느라 온 힘을 다했던 하룬은 조금은 편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계곡 안을 부숴버릴 기세로 거세게 불던 바람의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이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미친바람, 광풍이었다.

 ‘이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아무도 몰라.’

 그게 정답이었다. 이곳까지 올라오는 동안 몇 차례나 이런 상태가 반복되었지만 바람이 불고 강해지고 잦아드는 간격은 일정치가 않았다. 언제 다시 거센 바람이 불지 모르는 것이다.

 하룬은 남은 힘을 다해 밧줄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밧줄은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허벅지까지 바닥에 파묻힌 그의 몸은 뒷걸음쳐 밧줄을 끌어당길 수 없는 상황인 데다 사람들이 밧줄을 잡고 올라와야 하는데 그의 힘도 이제 거의 바닥을 쳤고, 사람들도 밧줄을 잡고 올라올 힘이 없나 보다.

 간신히 몸을 옆으로 돌려 벼랑 아래를 내려다본 하룬은 다른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밧줄에 매달린 사람들이 거의 모두 기절해 버린 것이다. 거센 바람에 휘말려 이리저리 날렸고 그 가운데서 오지게 절벽과 충돌한 충격 때문이었다.

 그나마 밧줄 끝 쪽에 매달린 딜런과 도네이스의 몸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딜런! 딜런!”

 “으으으, 하룬 대장.”

 애타게 부른 것이 통했는지 잠시 넋이 나가 있던 딜런이 제정신을 차렸다.

 “괜찮아요?”

 “괜찮소.”

 딜런은 몇 번 머리를 흔들더니 완전하게 정신을 차렸다. 그런 그의 바로 위에 매달린 도네이스는 정신을 차렸지만 옆구리를 붙잡고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아마도 날카롭게 튀어나온 절벽의 단면에 부딪친 것 같았다.

 엄청난 무게를 끌어 올릴 힘은 없었다. 이미 힘을 거의 다 소진한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빨리 정신을 차리고 밧줄을 타고 올라올 가능성도 없었다.

 하룬은 힘을 쓰느라 시뻘겋게 변한 얼굴과 팔뚝에 굵은 힘줄이 툭 튀어나온 상태로 잠시 궁리했다. 이 상태라면 얼마 버틸 수 없다. 아무리 라이피가 자신의 몸을 붙잡고 있다고 해도 이런 상태로는 밧줄을 놓거나 아니면 자신까지 추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장 아래쪽에 매달린 딜런은 그런 하룬의 고민을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하룬이 원래 제안했던 대로 바로 뒤에 위치했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괜히 고집을 부려 후미를 맡은 자신의 결정이 후회되었다.

 “그냥 밧줄을 놓으시오!”

 마음을 정한 딜런이 위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의 고함이 계곡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하룬은 그 힘찬 고함에 쓴웃음을 지었다. 밧줄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자신에게 저런 힘이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다.

 “으. 아, 안 돼! 난 이렇게 죽기는 싫어!”

 이제야 확실하게 정신을 차린 도네이스가 비명을 질렀다. 하룬이 밧줄을 놓으면 자신은 저 까마득한 계곡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다. 이 정도 높이라면 시체도 제대로 보전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언제나 죽음 앞에 당당했던 그녀지만 적과 싸우다가 용감하게 죽는 것이 아니라 거센 바람에 날려 떨어져 몸이 산산조각 나는 죽음은 절대 사양이다.

 “다들 정신 차려! 이대로 죽을 거야? 이 빌어먹을 연놈들아, 일어나라고! 마법사라며? 검사라며? 고작 바람 때문에 이렇게 정신줄을 놓고 있을 거야? 야, 이 고블린 좆 같은 새끼들아! 일어나란 말이야!”

 그녀는 고래고래 악을 썼다. 그녀 역시 상황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하룬 대장과 티노의 힘만으로는 그들을 언제까지 잡고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희망은 기절한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있는 힘을 다해 위로 올라가는 것뿐이다.

 “정신을 차리란 말이야! 빌어먹을! 젠장, 난 아직 결혼도 못 해봤단 말이야!”

 도네이스는 쉬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절규에도 사람들은 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워낙 바람이 거세었던 탓에 몇 번이나 절벽 면과 강하게 충돌한 사람들은 방어구 덕분에 외상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강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대장, 더 이상은 힘드니 차라리 밧줄을 놓으시오.”

 딜런은 이미 생을 포기한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 또다시 바람이라도 불어온다면 끝장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익스퍼트 최상급의 실력을 가진 그였지만 자연의 놀라운 위력 앞에서는 너무나 무력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안 돼! 난 이렇게 죽을 수 없어. 차라리 몬스터와 싸우다가 죽으면 몰라도 이런 개죽음은 안 된다고.”

 도네이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도네이스, 네가 밧줄을 잘라라. 우리 두 사람의 무게만 없어져도 밧줄을 끌어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냉정한 판단이었다. 두 사람이 무려 열여섯 명의 무게를 지금까지 감당한 것도 놀랍지만 더 이상은 불가능했다. 벌써 조금씩 밧줄이 밑으로 내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다르게 건장한(?) 자신들 둘의 무게만 줄어도, 괴력을 발휘하는 두 사람의 마지막 힘이라면 다른 사람들은 어쩌면 끌어올려질 수도 있다.

 “미친놈! 자리려면 네 밧줄이나 잘라. 난 이렇게 의미 없이 죽을 수는 없다고.”

 죽기 직전이라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도네이스는 딜런에게 쌍욕을 해 가면서 악을 썼다. 그녀는 노련한 용병답게 첫 만남에서 딜런의 기세를 알아보고 그에게는 절대 무례하지 않았다.

 “야, 이 미친년아! 떠들 힘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절벽에 달라붙어! 힘들어 죽겠단 말이야.”

 듣다 못한 티노가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이런!”

 딜런은 탄식했다. 자신과 도네이스가 절벽에 달라붙기만 해도 위에 있는 두 사람은 한결 덜 힘들 거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빌어먹을 바람 같으니!”

 살면서 이렇게 매서운 바람은 처음이다. 크고 작은 돌들을 품고 미친 듯 부는 바람 때문에 제대로 생각을 하지도 못한 것이다. 명색이 기사이며 그것도 익스퍼트 최상급의 실력을 가진 그였다.

 하룬이 소리를 질렀다.

 “딜런, 일단 밧줄을 흔들어 절벽에 달라붙어요.”

 “좋소. 이 미친년아, 너도 준비해!”

 딜런이 도네이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치마라도 입었으면 좋은 구경을 했을 거라는 어울리지도 않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씨발! 알았어.”

 이제 막가는 두 사람의 대화에 하룬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원색적인 대화를 통해 같은 길을 가는 동료의 정이 느껴진 것이다.

 “나도 있어요.”

 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요!”

 청소리 길드원인 다미도 고통에 겨운 목소리지만 응답을 했다. 그래도 넷이나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강도를 가진 바람은 몸에 밧줄을 감은 사람들을 날려 절벽의 단면에 꼬나 박았던 것이다.

 하룬은 끊어지려는 근육의 통증을 무시하고 줄을 단단히 잡았다.

 “셋에 몸을 구른다, 알았나?”

 “알았다고! 당신이나 잘해!”

 곧 밧줄에서 흔들림이 느껴졌다. 정신을 잃지 않은 네 사람이 절벽을 발로 차서 자신의 몸을 허공에서 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미약한 요동이었지만 조금씩 그 움직임이 커졌고, 어느 순간 잡고 있던 밧줄에서 무게감이 한결 줄었다. 그들이 튀어나온 절벽 면을 잡은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정신을 차리고 있다면 이 상태로 절벽 면을 잡고 올라올 수 있는데 그것이 안타까웠다.

 “정신 차려, 이 쓸모없는 작자들아! 야, 마법사들! 니들 정신 안 차릴래?”

 밑에서 도네이스가 악을 쓰면서 사람들을 깨우려고 했지만 육체적인 충격까지 더해진 상태라 기절한 사람들은 좀체 의식을 찾지 못했다.

 고오오오!

 설상가상이다. 다시 바람이 시작될 기미가 느껴졌다. 엄청난 공기의 유동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까도 이런 소리와 함께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그때 하룬은 한 가지 생각을 해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이 상태로 오래 견딜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다시 아까처럼 광풍이 분다면 이번에는 견딜 자신이 없었다.

 “딜런,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나도 알고 있소. 빌어먹을! 이번에는 못 견딜 텐데.”

 “그래서 말인데, 밧줄을 옆으로 흔들 테니 반동을 이용합시다.”

 “그게 가능할까?”

 그는 하룬이 의도하는 바를 제대로 알아들었다. 밧줄을 옆으로 강하게 흔들어 그 반동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마침 티노의 앞쪽은 방향이 꺾이는 곳이라 잘하면 하룬과 티노의 위쪽 경사면에 떨어질 수도 있다.

 문제는 힘이었다. 밖으로 나가려는 힘을 견딜 수 있느냐와 진자가 된 사람들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가능할 겁니다. 정령의 힘을 쓸 테니 준비하고 셋에 세 사람과 동시에 절벽을 박차세요.”

 “알았소. 그럼 해 봅시다.”

 “알았어. 대가리가 터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해 보자고. 야, 너희들도 알아들었지?”

 도네이스는 위에 있는 묘와 다미에게 소리를 질렀다.

 “알았어요”

 “나도.”

 달리 방도가 없었다. 불가능해 보이기는 하지만 정령력을 쓴다니 한번 기대해 볼 수밖에. 여행을 시작할 때 본 정령의 힘은 가공할 정도였다. 수십 개의 암기를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부리던 그의 정령력이라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

 “티노, 밧줄을 조금만 풀어요. 팔 길이 정도만.”

 “넷!”

 티노는 상황은 잘 몰랐지만 하룬의 말대로 밧줄을 놓았다. 당장에 티노가 감당하고 있다가 풀어낸 그 길이만큼 하중이 하룬에게 쏠렸다.

 “크윽!”

 몸이 절벽 밖으로 꺾여 밧줄에 매달린 사람들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하중이 느껴졌다.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고, 어깨는 몸통에서 뽑힐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피가 흐르는 손아귀는 이제 감각이 없을 정도였다.

 하룬은 이번 시도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있는 힘을 다 끌어 올렸다.

 -라이피, 내 몸을 최대한 붙잡아 줘.

 -알았어, 친구.

 “하나! 둘! 셋!”

 딜런은 세 사람과 함께 호흡을 맞추고 셋에 일제히 옆을 향해 절벽을 강하게 박찼다. 순간 밧줄에서 강력한 하중이 전해졌다. 근육이 찢어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고, 눈이 튀어 나올 정도로 힘을 써 보지만 이대로라면 라이피의 힘으로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하룬은 황급히 싸가지를 소환했다.

 “싸가지, 도와줘!”

 “알았어.”

 싸가지는 이미 심령을 통해 하룬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소환된 싸가지가 밧줄에 동화되자 흔들림이 급격하게 커졌다. 싸가지의 힘은 역시 강력했다. 몇 번의 진동만에 가장 아래 매달려 있던 딜런의 몸이 거의 하룬과 같은 높이까지 올라왔다.

 “이제 준비해요!”

 온몸의 혈관이란 혈관은 모두 도드라져 나왔다. 양어깨에서 양팔이 통째로 빠져나올 듯한 강렬한 통증에 하룬은 이를 악물었다.

 “크윽!”

 뒤에서 티노의 고통 어린 신음이 들렸다. 그도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너무 힘을 주어 눈 주위의 혈관이 터졌는지 시야가 붉게 물드는 것을 느끼며 하룬은 마지막 힘을 다해 밧줄을 잡았다.

 휘이익!

 마침내 밧줄이 높이 날아올랐다.

 “싸가지!”

 “맡겨 두라고!”

 싸가지는 자신의 힘을 이용해 밧줄을 안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높이 날아오른 사람들의 몸이 한꺼번에 티노의 바로 위쪽 경사지로 떨어졌다.

 “디일-러언!”

 하룬이 소리를 질렀다. 엄청난 요동에 정신이 없었던 딜런은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그의 몸이 경사지로 떨어지고 있었다. 딜런은 빠른 속도로 빼 든 검을 급격하게 확대되는 경사지에 있는 힘을 다해 박았다.

 쿠웅! 쿵! 쿵!

 “우욱!”

 “아악!”

 사람들의 몸이 경사지에 오지가 박히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더불어 몇 마디의 고통 어린 신음도 들려왔다.

 하룬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티노의 머리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꺾어지는 사면 위로 샤니와 아반 그리고 묘까지 주르르 티노의 바로 앞쪽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곳은 또 다른 절벽이었다.

 후드드득!

 사람들의 몸과 함께 굵고 잔 돌들이 굴러 떨어졌다. 혹시 몰라 밧줄을 쥔 손에서 힘을 뺄 수 없었다. 만약 딜런과 도네이스가 떨어지는 곳을 잘 붙잡지 못한다면 그들 모두는 다시 떨어지게 될 것이다.

 “됐어요, 됐어!”

 긴장하던 티노의 기쁜 고함이 터졌다.

 다행이다. 암반에 제대로 박혀 든 딜런의 검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지만 더 이상 사람들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서둘러야 한다. 이번에는 딜런과 도네이스가 나머지 사람들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룬은 라이피를 돌려보내고 서둘러 티노의 앞으로 뛰어갔다. 모서리를 돌아 티노 옆에서 위를 올려다보니 딜런이 경사면에 검을 깊게 막은 채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밧줄을 한 손으로 잡고 있었고, 도네이스 역시 얼굴에 피를 흘리면서도 튀어나온 작은 바위를 한 손으로 안고 있었다. 지금까지 잘 견디고 있던 묘와 다미는 기절한 듯 아무런 동정이 없었다.

 하룬과 티노는 중간에 매달린 샤니의 몸부터 안쪽으로 끌어 올렸다. 결국 밑으로 떨어진 사람 모두를 끌어 올린 하룬은 이번에는 경사지로 뛰어 올라갔다. 60도가 넘는 심한 경사지였지만 크고 작은 돌들이 튀어나오거나 갈라진 틈이 있어 올라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곧 딜런에게 도착한 하룬은 연방 고통 어린 신음을 토하는 그의 얼굴을 들었다. 얼마나 강하게 경사지 바닥에 부딪쳤는지 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코뼈는 주저앉았고, 입술을 비롯한 얼굴 전체가 피투성이로 변했다.

 서둘러 포션을 꺼낸 하룬은 신음을 토하는 그의 입에 약간 부어주고 나머지는 얼굴 전체에 골고루 뿌렸다.

 부글부글!

 외상 치료에 강력한 효능이 있는 중급 포션은 상처 부위를 급속하게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도 아까워서 사용하지 못했던 포션의 효능은 놀라워서 피투성이가 되었던 그는 이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일단 손을 놔요!”

 “서, 성공한 거요?”

 “그렇습니다. 딜런 덕분에 다들 무사합니다.”

 “다행이군.”

 딜런은 그 말과 함께 검 자루에 쥔 손에서 힘을 뺐다. 전심전력을 다했던 그의 눈이 스르르 닫히고 있었다.

 하룬이 밧줄을 단단히 쥐고 있는 사이 티노는 중간에 있던 슈미르부터 시작해 기절한 사람들을 하나둘씩 끌어내렸다. 물론 도네이스 역시 얼굴이 엉망이었지만 딜런만큼 충격을 받지는 않아 포션을 마신 후엔 곧 제정신을 차렸다.

 “히히히, 살았네! 살았다고! 이 미친 지랄이 도대체 어떻게 성공한 거야?”

 그녀는 믿기지 않는 듯 실실거리며 티노에게 달라붙었다. 하지만 충격에서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은 듯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왜소한 체구의 티노는 끙끙거렸다.

 “휴우, 큰일 날 뻔했군.”

 포션을 마신 후 한참이 지나서야 완전하게 정신을 차린 딜런은 바위 뒤에 있음에도 몸이 날아가 버릴 것처럼 세차게 부는 바람에 눈도 뜨지 못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이런 미친 시도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맹렬한 바람의 기세를 막아 줄 거대한 바위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위 뒤에 포개진 사람들은 또다시 바람에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정령의 힘이 놀랍구나.’

 이제까지 검술에 매진해 온 삶을 통해 그는 마법이나 정령력 정도는 검술의 힘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왔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그 생각이 바뀌었다.

 무려 열여섯 명의 무게를 단둘이서 견뎌 냈을 뿐 아니라 밧줄의 궤적까지 조정해서 결국 어렵게 사람들을 살려 낸 것은 단순한 인간의 근력이나 마나의 힘으로는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

 ‘내 평생 용병들을 무시하면서 살았지만 저 친구만은 앞으로도 예외로 생각해야겠구나.’

 딜런은 눈도 뜨지 못할 정도로 크고 작은 돌덩이들을 머금고 미친년 치맛자락처럼 부는 세찬 바람 속에서 무언가를 하는 하룬을 향해 뜨거운 시선을 던졌다. 하룬은 지금 자신들이 지나온 아슬아슬한 절벽 길에서 반쯤 구부린 자세로 비수로 벽에 무언가를 작업하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뭘 하는 거지?’

 포션으로 치료는 했어도 몸 이곳저곳 안 쑤시는 데가 없었지만 그는 슬금슬금 하룬을 향해 기어갔다. 평생 기사로 당당하게 살던 그로서는 네발로 기어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바람이 거센지 그도 별수 없었다.

 “고맙소.”

 행여 가까이 갔다가 좁은 절벽 길 때문에 혹시 사고가 생길까 두려워 한참 떨어진 곳에서 내뱉은 딜런의 인사말은 이내 거센 바람 소리에 묻혔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하룬은 용케 그 소리를 들었는지 작업을 멈추고 뒷걸음질 쳐서 나와 그를 보았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딜런 님 때문에 사람들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대가 더 큰일을 했지. 나야, 뭘.”

 하룬의 인사를 받기가 어쩐지 쑥스러웠던 딜런이 말을 흐렸다.

 “그런데 뭘 하고 있소? 바람의 기세가 장난이 아닌데.”

 “바람을 피할 곳을 만들던 참입니다.”

 하룬의 말에 눈을 크게 뜬 딜런이 땅을 기어서 가까이 갔다.

 그러고 보니 하룬의 앞에 제법 큼지막한 구멍이 파여 있었다. 서지는 못하겠지만 앉으면 서너 사람은 문제없이 들어갈 정도의 동굴이었다.

 “좋은 생각이군.”

 바람 때문에 악전고투하며 올라왔지만 앞으로도 갈 길은 먼데 태양은 벌써 서쪽으로 한참 넘어가고 있었다. 정신이 깬 사람들이 안전하게 머물 곳이 필요했다.

 하룬의 손에 들린 비수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단검과 장검의 중간 길이를 가진 비수였다. 한눈에도 그 예기가 남다른 비수로 절벽 면을 파냈던 것이다.

 ‘혹시 신검인가?’

 레전드 급 아이템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바위를 두부처럼 베는 무기를 일러 흔히 레전드 급이라고 칭해 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그 정도 등급의 아이템은 전 제국을 통틀어도 몇 개 없으니 말이다.

 “혹시 마나를?”

 하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군. 그대처럼 젊은 용병이 익스퍼트라니.”

 딜런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하룬에게 감탄했다. 정령사야 워낙 희귀한 존재이니 그 경지를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중급 이상의 정령사가 확실한 하룬이 검술로도 익스퍼트라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한 우물만 파도 쉽지 않은 법인데 익스퍼트에 중급 정령사라니. 딜런이 무려 50년이 넘게 수련을 해서 이룩한 검술의 경지가 이제 익스퍼트 최상급이다. 물론 그야 자질은 물론 특별한 마나 플로와 검술 비전을 익힌 덕분에 성년이 되기 전에 익스퍼트에 입문했지만 하룬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다.

 “잠시 나도 거들겠소.”

 “몸은 괜찮은 겁니까?”

 “괜찮소.”

 10년째 익스퍼트 최상급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답보 상태에 빠진 그이긴 하지만 요병의 걱정 어린 시선에 왠지 울컥했다. 기사로서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인정할 만한 자이긴 하지만 용병에게 동정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호오, 굉장하군.”

 자신이 정신을 잃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그사이 깊이 3미터 높이 1미터가 조금 넘는 동굴을 판 것은 정말 대단했다. 바닥에 떨어진 돌들을 보니 조금 무르긴 하지만 퇴적암 종류 중 하나인 셰일이었다.

 마나 플로를 돌리니 웅혼한 기상을 가진 마나가 꿈틀거렸다. 평상시와 비교하면 양도 많이 줄었고, 그 성질도 조금 혼탁해지긴 했지만 충분히 사용 가능했다. 딜런은 마나를 손으로 이끌어 검에 주입했다.

 그의 애검 끝으로 실처럼 가느다란 검기가 흘러나와 천천히 그 두께가 굵어졌다. 길이는 무려 1미터에 달했다. 검신의 두께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놀라운 경지였다.

 딜런은 눈짓으로 하룬에게 조심하라 이르고는 차분하게 검을 휘둘렀다.

 싸악! 싹!

 단단한 셰일이 마치 진흙처럼 검기에 베였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암석들의 크기는 이전에 하룬이 베어 낸 것들과 달리 무척 크고 두꺼웠다.

 하룬은 처음 보는 익스퍼트 급 검사의 검력에 감탄했다. 검 끝에서 솟아 나온 꼬챙이처럼 가는 검기에 바위들이 부드럽게 베이는 것을 보니 그 위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검기에 베이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약 5분 정도 지났을 때 동굴은 처음의 두 배 이상 커졌다. 하룬은 부지런히 바닥에 떨어진 돌들을 주워 밖으로 던졌다. 거센 바람이 마치 먹이를 낚아채는 맹금류처럼 돌들을 낚아챘다.

 “휴우.”

 5분 동안 쉬지 않고 검기를 발현한 딜런이 그제야 검을 아래로 내렸다. 그의 얼굴에는 진땀이 가득했다. 순수하지 못한 마나 때문에 정상일 때보다 훨씬 더 힘들었던 것이다.

 ‘내가 늘그막에 웬 호승심이람.’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하룬 때문에 무리한 탓에 그 후유증은 상당히 컸다. 벌써 마나 오션이 텅 비었고 마나 로드들은 끊어질 듯 아팠던 것이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손보면 되겠네요.”

 하룬이 앞으로 나섰다. 딜런은 손으로 얼굴에 흐른 진땀을 훔치며 하룬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마나 플로를 돌리는 듯 자세를 바로 했던 하룬의 손에 쥐인 비수가 잠시 후 돌연 그 모습을 감추었다. 심지어는 자루까지 사라져 버렸지만 손의 모양이 그대로인 것으로 보아 사라진 것이 아니라 투명해진 듯했다.

 ‘훗, 대단한 검이군.’

 이런 종류의 아이템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 본 적이 없었기에 딜런은 크게 놀랐지만 행여 마나를 끌어 올린 하룬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까 봐 입을 벌릴 수는 없었다.

 사악! 사악!

 하룬의 손이 움직이자 소성과 함께 암벽이 베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가 베어 낼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도 작고 양도 적었지만 대신 하룬의 손놀림은 그가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조금 더 빨랐다.

 ‘마치 조각이라도 하는 것 같군.’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신중한 표정으로 정신을 집중해서 돌을 베어 내는 하룬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 역시 평생 수련해 온 검사이기에 하룬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굉장한 집중력이군. 이 정도 집중력에 노력과 실전 경험이 갖추어진다면 정령사가 아니라 검사로도 큰 진경을 이룩할 수 있겠어.’

 딜런은 이 어린 후배가 무척 기꺼웠다. 그 역시 질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하룬을 주시하다가 곧 입구 쪽에 자리를 잡고 마나 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하룬의 작업은 10여 분이 더 걸리고 나서야 겨우 끝이 났다. 마나 오션이 거의 텅 빈 느낌을 받고서야 작업을 멈춘 것이다.

 ‘이 정도면 하룻밤은 쉴 수 있겠군.’

 높이가 낮은 것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이 거센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은 다행이다.

 집중 상태에서 벗어나 마나 포션을 마신 하룬은 몸이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동굴 입구에서 마나 플로를 돌리는 딜런을 지나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바람이 잦아들고 있었다. 발마으로 가득했던 세상이 서서히 어둠에 잠식되고 있었다.

 “대장, 다 됐습니까?”

 하룻밤 편하게 쉴 수 있는 동굴을 파겠다고 거센 바람을 뚫고 뒤로 갔던 하룬 때문에 목 빠지게 기다리던 티노였다.

 “네, 딜런 님이 도와주셔서 빨리 끝났습니다. 어서 사람들을 한 명씩 이곳으로 옮기세요.”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어둠이 내리면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기온도 떨어질 거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난 체력 좀 회복하겠습니다.”

 하룬은 바위 옆에 있는 티노를 지나쳐 툭 터진 통로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모서리의 바위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아주 먼 곳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이다. 아릿한 주황색 계열의 흔적을 남기며 어둠에 먹혀드는 세상이 묘하게 마음에 들어왔다.

 살아온 삶이 그래서인지 하룬은 냉소적이었다. 밝음보다는 어두움, 그중에서도 특히 막 어둠이 깔리려는 때가 좋았다. 밝음이 어둠에 정복되는 그 짧은 간극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뒤에서 티노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소리와 티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도네이스가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빨리 옮겨. 다시 바람이 불면 끝이야.”

 “이 못생긴 원숭이가! 지금 나에게 감히 명령을 하는 거야?”

 “뭐, 원숭이? 꼭 터진 밀빵같이 생긴 주제에 어디서 막말이야. 의뢰비도 내지 않고 따라붙었으면 당연히 할 일을 해야지.”

 용병대 일을 나누어 하겠다는 조건으로 합류했던 그녀인지라 더 이상은 거부할 수 없었는지 힘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부상에서 막 회복된 그녀의 상태로는 힘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 시바! 내 살다 살다 이런 시답지 않은 대접은 처음이네. 남자 같지도 않은 늙은이에게 무시까지 받다니.”

 “이 빌어먹을 터진 밀빵아! 어디서 남의 혼삿길을 막고 그래. 나 이래 봬도 아직 사십 대라고. 어디서 늙은이라고 막말이야. 딱 보기에도 나와 비슷한 연배 같은데, 내가 늙은이면 넌 할망구나.”

 “돌아버리겠네, 시바! 어딜 봐서 너 같은 늙은이랑 내가 비슷하다는 거야? 난 아직 사십 대도 아니거든. 그리고 어딜 견줄 데가 없어 터진 밀빵이라는 거야? 이게 다 근육이라고. 어디서 꼭 고블린 좆같이 쬐그만 놈이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고 있어.”

 “미친년! 이렇게 큰 고블린 좆 봤냐? 넌 네 늘어진 옆구리 살과 접힌 뱃살이 근육으로 보이나 보지?”

 그들의 대화는 사람들을 옮기는 와중에도 계속되는지 연방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곤 했다.

 하룬은 피식 웃었다.

 티노에게 이런 구석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가 이제까지 본 티노는 오랫동안 데브론을 모셔서 그런지 노예 본능이 많이 남아 있었다. 무조건 참고 남을 배려하는 모습만 본 터라 이렇게 쌍소리를 해 가면서 투덜거리는 모습에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지만 오히려 거칠고 야생적인 용병 냄새가 풀풀 나서 보기는 더 좋았다.

 그사이 다시 바람이 시작되었다. 이제 동굴로 돌아가야 했지만 어쩐지 이곳에 그대로 있고 싶었다. 흥건히 땀에 젖은 두 겹의 방어구 때문에 지금이라면 차라리 바람을 맞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후웁!

 하룬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바람을 맞았다. 설사 바람에 날리더라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등 뒤쪽에 거대한 바위가 있으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좁은 배리어 안에서 살아온 하룬은 이런 굉장한 바람을 맞아 본 적이 없었다. 있다면 거리와 건물 사이에 부는 먼지 돌개바람이 고작이었다.

 휘이잉! 휘익!

 사방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늘게나마 눈을 뜰 수 있었지만 금방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바람에 섞여 있는 돌들이 노출된 얼굴 부위를 사정없이 강타하는 바람에 눈은 물론 얼굴 부위가 금방 얼얼해졌다.

 하룬은 이런 바람을 정면으로 맞겠다고 했던 자신의 생각을 곧 후회하고 말았다. 아까도 잠간 경험했지만 이 바람은 감히 맞설 만한 것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연이어 불어오는 바람은 마치 그의 몸을 날려 버릴 것처럼 무서운 기세였다.

 ‘빌어먹을!’

 이 정도라면 몸을 일으킨 순간 날아갈 것이 틀림없었다. 그나마 정좌하고 앉은 것이 다행이었다. 무게중심이 낮아진 덕분에 허벅지까지 들리긴 했지만 엉덩이는 바닥에 붙어 있었다.

 겁이 덜컥 났다. 이대로 바람에 날려 아득히 먼 곳까지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위기감에 불안해졌다. 아니, 그 전에 자신이 투명 비수로 베어 낸 크기의 돌이라도 얼굴에 직격한다면 죽을 수도 있다.

 두려움이 정신을 침습하는 순간부터 몸이 오글오글 떨렸다. 두려움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그의 정신에 공포의 장막을 드리웠다. 눈이라도 뜰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앞조차 보이지 않으니 그 공포의 장막은 점점 더 의식 깊숙한 곳까지 드리워지고 있었다.

 “안 돼!”

 공포에 잠식되어 가던 하룬은 고함을 질렀다.

 “질 수 없어!”

 공포에 완전히 잠식되려던 순간 성년이 되기 전날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상태를 떠올렸다. 이를 악물었다. 금세 뜨겁고 찝찌름한 피가 느껴졌다.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무기력하고 희망 없이 사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를 살더라도 사람답게 살기로 작정한 하룬이다. 그가 생각하는 사람다운 삶이란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절망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하룬은 그것이 강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가다가 지치거나 쓰러질지라도 가고 말겠어!’

 입 밖으론 나오지 못하는 그의 오기였다.

 신기하게도 그리 마음먹은 순간 그렇게도 심혼을 옥죄었던 공포의 장막이 바람에 날아갔다. 찢어지고 찢어져 잘게 잘린 공포의 장막이 바람에 날아가는 순간 하룬은 말할 수 없는 통쾌함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와라!”

 같이 공포를 이겨내서 그런 것일까? 그 자체가 공포의 원인이었던 바람이 이제는 같이 공포를 이겨 낸 동료처럼 느껴졌다.

 친근했다. 마치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친구처럼 말이다. 바람의 모든 것을 몸으로 생생하게 느끼고 싶었다.

 그 순간이었다. 바람이 마치 스펀지에 물이 빨려 들 듯 그의 육신과 영혼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자유!

 바람이 가진 끝없는 자유로움이 그의 정신을 아득한 저 하늘까지 날려 보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이제껏 보지 못했던 넓고 광활한 자연과, 자연이 만들어 낸 세상을 마음껏 느끼고 완상할 수 있었다.

 어느새 하룬은 바람과 하나가 되었다. 바람과 일체가 된 기분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극도의 희열을 가져왔다.

 마음대로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고, 지치면 아무 산봉이나 하다못해 작은 나뭇잎 위에 내려앉아 쉴 수도 있다.

 화가 나면 세상 전체를 날려 보낼 광포함을, 사랑을 느끼면 진한 꽃가루를 가진 작은 꽃의 수술 위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는 애정 가득한 애무를 해 주는 바람이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룬은 자신이 한 번도 지어 본 적 없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눈을 떴다. 어느새 광풍은 잦아들고 있었다. 얼굴을 스쳐 가는 부드러운 바람 한 줄기가 느껴진다.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바람과 하나가 되어 온갖 곳을 가 보고 온갖 것들을 만지고 경험했던 것을 말이다. 그가 끊임없이 추구하는 강함과 묘하게 일치하는 성질을 가진 바람의 힘에 하룬은 강하게 매료되었다.

 바람이 완전히 잦아든 다음에도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걱정이 된 티노가 도네이스가 함께 왔지만 그는 미소 한 조각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꼴에 대장이라고, 쳇! 시건방진 놈!”

 “이 썩을 주둥이하고는. 나이는 어려도 단체의 수장에게 말을 가려서 해. 내가 네 아비에게 그렇게 말하면 좋겠냐? 어서 가서 식사나 준비해! 한동안 정신을 잃었던 터라 사람들이 배가 많이 고플 거야.”

 두 사람은 여전히 투덕거렸지만 왠지 그들의 대화에는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친근함이 들어 잇었다. 이 많은 사람들 중 둘만이 거친 용병의 길을 오랫동안 걸어온 탓이리라.

 두 사람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하룬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지금이라면 바람의 정령을 귀속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바로 귀속시켰던 대지의 정령 라이피나 다소 힘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귀속된 물의 정령 나이아와는 달리 그의 대답에 화답하지 않았던 바람의 정령이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이 장소라면 화답할 것 같았다.

 “바람의 정령아, 내게 모습을 보여 줘.”

 하룬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작게 소리치는 순간 눈앞에 정령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상했던 것과 달리 그의 몸 절반 정도 되는 큰 정령이었다. 그가 아는 상식으로 실프의 크기는 겨우 손바닥만 하기에 하급 정령이라고 믿기는 힘들었다.

 ‘뭐, 맞겠지. 실프는 아니겠지만 싸가지에 대한 설명을 보면 하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하룬이 아는 한 자신은 중급 정령을 소환할 수 없었다.

 “반가워, 난 하룬이야.”

 바람의 정령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닥거려 인사했다. 그 미소는 어찌 보면 개구쟁이의 심술이 들어 있는 것도 같고, 어찌 보면 연인을 바라보는 그윽한 정이 들어 있는 것도 같았다. 아무튼 아주 다양한 감정이 혼재된 미소 그 자체만으로 마음에 쏙 드는 정령이었다.

 “너에게 위신느라는 이름을 줄게. 나와 계약을 맺지 않겠니?”

 ‘바라다’는 말에서 나온 위시와 윈드를 조합해서 여자 이름을 만들었다.

 “위, 신, 느. 위신느! 좋아요. 마음에 들어요. 이제 위신느는 정령계의 계약에 따라 하룬과 운명의 실로 함께 묶였어요.”

 정말 마음에 쏙 들었다. 마치 맑은 종소리처럼 짤랑거리는 말소리도 그렇게 기쁜 듯 우는 그 미소도 너무나 예뻤다. 혹시 벨이 이 세계로 같이 올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을 주지 않을까 싶었다.

 “고마워요, 하룬. 정령계는 무지무지 심심했거든요. 하룬을 만나 너무 기뻐요.”

 위신느가 날아와 그의 얼굴 바로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투명한 피부며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위신느의 얼굴은 하룬을 가슴 뛰게 만들었다.

 마치 향긋한 그녀의 숨결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의식을 통해 바람과 하나가 되었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무척이나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흥분이 되었다.

 하룬은 갑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반응을 느끼고는 얼굴을 붉혔다. 꼭 변태라도 된 것 같았다. 인간이 아닌 정령에게 인간 여자에게도 느껴 보지 못한 이상야릇한 감정과 함께 그묘한 육체적 변화까지 느끼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하룬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녀를 돌려보냈다.

 “나중에 부를 테니까 또 보자.”

 쪼옥!

 위신느가 그의 입에 뽀뽀했다. 순간 하룬의 몸에 강렬한 전류가 흘렀다. 그녀의 얼굴 역시 하룬처럼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그 미소는 정말 매혹적이었다.

 “비록 하룬 당신의 생이 끝나는 순간 소멸될 운명이지만 당신과 만나게 되어 너무 기대되고 행복해요.”

 그렇게 위신느는 하룬의 마음에, 이전에 겪어 보지 못한 기묘한 충격을 안겨 주고는 사라졌다.

 하룬은 그 자리를 한동안 떠나지 못하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반추했다.

 ‘근데 왜 내가 부른 정령들은 모두 이상하지.’

 물의 정령 나이아도 그렇게 대지의 정령도 마찬가지였다. 하급 정령인데도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은 물론 다양하게 바뀌는 표정이나 그 크기마저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싸가지의 능력 때문에 그런 건가?’

 가능성은 그것밖에 없었다. 비록 독과 사기적인 능력 때문에 소환하는 데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져 잘 부르진 않지만 정령에 대한 문제는 녀석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 현실에서도 소환이 가능한 존재였다면 거리낌 없이 싸가지를 무수히 써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룬이 추구하는 것은 게임에서 익힌 스킬을 현실에서도 사용 가능하게 만드는 것. 극히 위험한 순간이 아니라면 현실과 관계가 없는 싸가지의 능력에 의존하는 것은 극도로 피하고 있었다.

 ‘이 녀석과 오랜만에 심도 있는 대화를 좀 나누어 볼까?’

 하지만 그의 생각은 중도에 끊기고 말았다. 티노가 그를 불렀던 것이다.

 “대장! 대장!”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절벽에 동굴을 만든 것을 보고 체력과 마나가 완전히 바닥을 쳤을 거라는 점과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또다시 광풍이 불 텐데 하룬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다 일어났고 식사도 준비됐습니다.”

 이야기를 하며 하룬을 살피는 티노에게서 정이 느껴졌다.

 “알았습니다.”

 하룬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더 이상 티노를 걱정시킬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굴로 들어가 보니 사람들은 모두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고마워요, 하룬 대장.”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어요.”

 티노와 도네이스가 싸우면서 만들었을 수프와 빵을 먹던 사람들이 분분히 인사를 해 왔다. 그중 아반 부녀와 헤니의 얼굴이 무척 창백했지만 아마도 놀라서 그럴 것이다. 자잘한 외상은 이미 티노가 포션으로 치료를 다 해 놓은 것이다.

 엄청난 의뢰비를 지불한 사람들이니 하급 치료 포션 정도는 기본적으로 제공해야 했다. 물론 헤니는 대원이니 당연히 챙겨야 했고 말이다.

 사람들은 충격이 심했는지 식사하는 내내 조용했다. 절벽에서 추락하고 거센 바람에 그렇게 나뭇잎처럼 휘날렸으니 겉은 멀쩡할지 몰라도 청각이나 균형 감각 그리고 정신적 충격은 꽤 컸을 것이다.

 식사를 하고 난 후 사람들은 말없이 동굴 벽에 등을 기대거나 배낭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다른 때 같았으면 냄새가 난다는 등 붙지 말라는 등 난리가 났을 테지만 심신의 충격을 심하게 받은 터라 좁은 동굴 안에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오늘 밤은 일찍 쉬십시오. 내일은 꽤 먼 곳까지 가야 합니다.”

 하룬의 말에 굳이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할 힘이 없는 것 같았다. 그나마 티노와 아옹다옹하던 도네이스마저 긴장이 풀렸는지 어느새 티노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잠이 들었다.

 ‘참 재미있는 여자로군.’

 혀를 차는 하룬과 달리 벽에 등을 댄 티노의 얼굴은 편안했다. 어쩌면 그녀와의 작은 싸움을 통해 이제까지 치열하게 살아왔던 용병 생활을 추억하는지도 몰랐다.

 “오늘 고생했소.”

 “아닙니다.”

 그와 함께 동굴 입구에 자리를 잡은 딜런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사람들을 제대로 구할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니 진작 싸가지의 힘을 사용했으면 그렇게 어렵게 하지 않았어도 될지 몰랐지만 말이다.

 하룬은 눈을 감는 딜런을 보며 자신이 누운 바로 옆의 동굴 밖으로 주의를 돌렸다.

 어느새 밖에는 거센 바람의 기세가 정점에 달해 있었다. 주기적인 것은 아니지만 바람의 세기는 강해지고 약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휘이잉! 슈웅! 슁!

 엄청난 기세로 부는 바람의 소리는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었다. 바람의 정령을 귀속시킨 탓인지 아까와는 다르게 왠지 그 소리가 바람이 뭔가 말을 해 오는 것처럼 들렸다.

 정령답지 않게 이성의 향기를 물씬 풍기던 바람의 정령을 생각하던 하룬은 본인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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