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모여드는 사람들 (67/278)
  • 《모여드는 사람들》

     “어떻게 할 거야, 혜련아?”

     “흐음.”

     나투가 몇 번이나 물었지만 혜련은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우리도 가야지. 그게 어떤 가치를 지닌 마법서인지 알았는데 이렇게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

     이제까지 침묵을 지키던 다호가 묵직한 소리로 의견을 개진했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아는데 그래도 마법서를 남들에게 뺏길 수는 없어. 우리가 가진 힘으로는 어림도 없고, 희생만 당할 수도 있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이런 극비 정보를 알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보라도 마찬가지 의견이었다. 그럼에도 혜련은 심각한 얼굴로 고심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답답했던 나투는 다시 한 번 그녀를 설득하려고 했다.

     “보라가 제국의 황실 도서관 수석 사서를 통해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그 마법서 중에는 우리 휴먼들이 붕괴되기 시작한 배리어를 벗어나 제대로 이 땅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는 힘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잖아. 이미 몇몇 세력들도 은밀하게 그 사실을 확인했고. 내가 보기에는 그들 중 일부는 유니온 상층부 인물들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아.”

     “그래! 그들은 이미 행동에 들어갔을 거야. 우리 백사회의 역량이 비록 보잘것없지만 이대로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어. 네가 안 하면 나라도 할 거야.”

     보라 역시 나투의 의견에 동의했다. 좌중의 분위기로 인해 더 이상 심사숙고를 할 수 없게 된 혜련이 결국 입을 열었다.

     “너희들 말도 일리가 있다는 거 알아. 그리고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생각도 없고. 나도 갈 생각이야. 하지만 생각해 봐. 과연 우리의 힘으로 던전은 고사하고 고요의 땅까지 갈 수 있는지.”

     그 말에 좌중은 조용해졌다. 혜련은 이미 갈 생각을 굳혔지만 안전하게 고요의 땅으로 가는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다는 걸 안 것이다.

     치료사인 혜련, 책이 좋아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는 보라, 대장장이인 다호 그리고 로그지만 현실에서 해커로 활동하는 터라 게임 시간이 부족한 나투, 어느 누구도 실질적인 무력을 가지거나 랭커가 아니었다.

     “방법을 생각해야 해. 일부는 원정대에 합류하고, 일부는 남아서 원래 계획대로 우리 백사회에 영입할 회원들을 찾아야 해.”

     혜란의 말에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우리 중에서 원정대 중에 끼거나 파티에 합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치료사인 나뿐이야. 너희 셋은 미리 예정했던 임무를 수행하라고. 방법은 내가 생각해 낼 테니까.”

     세 사람은 혜련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했다. 비록 마음은 던전이 있는 고요의 땅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떻게?”

     보라가 궁금한지 물었다.

     “확실한 건 없어. 다만 황 박사님이라면 내가 접할 수 있는 고급 정보들을 많이 알고 있을 거야. 조언을 좀 구해야겠어. 이참에 아예 회사도 때려치우고 본격적으로 비욘드에 뛰어들 생각이야.”

     게임에서 만난 이들과 인연을 맺고, 백사회를 결성한 것은 이제 겨우 게임 시간으로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

     휴먼력 104년에 인공수정으로 출생한 이들은 가정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자라 결국 대부분이 무능력자로 판정받았다. 그들은 현재 각 유니온 사회에서 거의 보더러로, 최하층민으로 밀려나 암울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형제, 자매나 다름없는 그들을 모아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하자는 취지로 백사회를 결성했지만 네 명의 힘으로는 애초에 생각한 일들을 추진하는 것은 무리였다.

     일단 게임에서라도 구실점을 찾아야 했다. 유니온의 통제가 있는 현실보다는 게임사의 관여가 거의 없는 비욘드 게임에서 백사회가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야 했다.

     ‘어쩌면 그 마법서가 우리의 앞날을 밝혀 줄 횃불이 될지도 몰라.’

     혜련은 왠지 던전에 있다는 고대 마법서와 자신과 같은 인공수정체들이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접을 수가 없었다.

     성인이 되기 전 이미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네 개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딸 정도의 지식을 쌓은 혜련은 남들에게 보이거나 말하지 않은 또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예지력이었다. 어릴 때는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자라면서는 유니온 정부에 잡혀가 실험을 당할까 두려워 드러내지를 못했지만 그녀의 예지능력은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그녀는 고요의 땅에 자신의 운명이 깊게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던전 소식은 들었느냐?”

     빛을 차단하기 위해 침대 주변에 친 천 때문에 실루엣만 간신히 보이는 양부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네.”

     사원호는 공손히 대답했다.

     “그곳에 있는 마법서 중 한 권에 우리 가문의 운명과 미래가 들어 있다. 이해하느냐?”

     사원호는 양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어둠 속에 가려진 특수군 대장이며 양부의 명에 따라 부하들과 함께 시작한 비욘드 게임 속에서 상당한 세력을 구축한 상태였다.

     “네.”

     “이미 준비는 조직에 일러두었다. 이번에 동행할 전략 실장은 네가 평생 거두어라. 내 딸이다.”

     “네.”

     ‘딸을? 이제 나를 어느 정도는 믿는다는 의미인가?’

     그런 줄은 이미 몇 해 전에 알고 있었다. 양부가 건강하던 시절 군부를 장악한 그가 사형 예정자 중 미모와 교양 수준이 뛰어난 여자들 몇 명을 사적으로 빼돌렸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 그중 한 명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겠지.’

     피는 나누지 않았지만 자신과 남매간인 여자가 그들 사이에 태어났고, 양부의 은밀한 비호 속에 성장해 특수군에 들어와 고속 승진을 했다는 사실 또한 짐작하고 있었다.

     ‘칫! 날 믿어서가 아니군. 결국은 나까지 감시하겠다는 말이군.’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사원호는 양부가 시키는 대로 그녀와 평생 살 생각이었다. 어차피 결혼할 거라면 아무나 상관없다. 어차피 사랑할 사이도 아닌 것이다.

     그 또래의 노블들이 매일이다시피 여자를 갈아치우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로 그는 여자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노파심에 말하지만 반드시 네 번째 마법서는 꼭 얻어야 한다. 어느 유니온도 향후 50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마더컴들의 손상은 생각 외로 심각해서 작동 연한이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은 더 이상 우리 휴먼들을 도울 수가 없다. 우리 휴먼들의 힘으로 배리어가 없어진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 그 마법서만 손에 쥘 수 있다면 이깟 작은 코원 유니온이 아니라 전 지구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알았느냐?”

     “네.”

     ‘늙은이가 욕심도 많네. 다 죽어 가는 시늉을 하면서 내게 이러는 진짜 이유가 뭘까? 새털처럼 가벼운 내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것은 아닐 테고.’

     대답을 하면서도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사원호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음흉한 성정에 더해 철두철미한 냉혈한인 양부의 의중이 궁금했지만 그런 의혹을 노출하는 순간 자신이 어떻게 될지는 명약관화한 터라 감히 물을 수도 없어 답답했다.

     ‘확실한 것은 나를 제외하고도 몇 무리를 더 파견할 거란 거지.’

     이번 일은 확실히 위험하다. 이번 일이 수포로 돌아가면 자신은 제거될 것이다. 이미 그가 거두었던 양자들 중 일곱이 밝은 곳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죽어 갔다. 그리고 능력을 인정받아 세상에 양자로 공표되었던 두 명의 형 역시 우연한 사고로 죽었다. 모두 양부가 내린 명령을 완수하지 못한 결과라는 것을 사원호는 잘 알고 있었다.

     ‘어쨌건 이번에는 내 능력을 어느 정도까지는 발휘해야겠군.’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독사처럼 차가운 피를 가진 양부는 자신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바로 제거할 테니 말이다.

     “모든 계획은 그 아이가 짜 놓았을 테니 넌 내가 육성한 특수군 출신 길드원들만 끌고 가면 된다. 조력자들도 구해 놓았으니 네가 잘 이끌어야 한다. 난 너를 믿는다.”

     “네.”

     “오랜만에 말을 많이 했더니 좀 피곤하군. 물러가라.”

     “네.”

     대답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사원호는 몸을 돌리는 짧은 순간 양부가 덮고 있는 이불이 불룩 올라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오늘도 양기에 좋다고 어린 여자애를 침대로 끌어들인 것이다.

     ‘더러운 노블 늙은이. 빨리 죽기나 하지.’

     나인 때문에 이사 문제가 간단하게 해결되어 버리자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 버린 하룬은 벨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벨은 하고 싶은 것들도, 하려고 짜 놓은 계획도 참 많았다.

     그녀가 가장 원하는 것은 단순한 육체가 아니라 완전한 휴먼체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노 단위 작업을 해야 했고, 나노봇과 나노 단위 반도체를 비롯한 정밀 기계들이 필요했다. 또한 그것들을 만들 재료들이 필요했다.

     또 벨은 인공위성과 접속할 방도를 찾고 있었다. 위성 안테나를 이용해 지구 궤도에 몇백 년째 돌고 있는 인공위성을 이용해서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다. 위성을 이용해서 원하는 정보를 언제든지 검색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하이테크놀로지 지식이 거의 없는 하룬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벨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유니온에서는 볼 수 없는 새의 아름다운 지저귐처럼 귀여운 벨의 종알거림을 듣다 보면 마음이 충만해졌다. 이런 게 가정의 행복이 아닌가 싶었다. 그냥 이대로 게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벨과 함께 일상적인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나머지 시간에는 벨이 확장시켜 놓은 캡슐 안에서 수련을 했다. 마나 플로는 물론이고 암기술들을 수련했다. 비록 벨로 인해 다른 유저들에 비해 동화율이 높긴 하지만, 게임에 비해 손색이 있는 만큼 이렇게 주기적으로 현실에서 따로 수련하는 것이 필요함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수련하다 지치면 벨이 만들어주는 음식을 같이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는 것이 많은 벨을 통해 자신에게 부족한 것들도 배우고, 벨의 수다를 들어 주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그렇게 이틀을 비욘드에 접속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다가 우연히 방송을 보았다. 호울 비전이 아니라 다른 게임 방송이었다.

     “이런 젠장!”

     너무 빨리 터졌다.

     그렇게 당부했는데 너무 빨리 고대 던전에 대한 정보가 공개된 것이다. 먼저 고요의 땅으로 출발한 후에 공개되었어야 하는데 너무 빨랐다.

     “서둘러야겠다!”

     하룬은 급하게 비욘드에 접속했다.

     “이런!”

     요른 백작성은 이틀 전과는 또 달랐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었다. 유저 타운은 이미 포화 상태였고 주민 지역까지 유저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대로를 통해 연방 기사단들과 잘 훈련된 병사들이 속속 입성하고 있었다.

     “북부군이야.”

     “추수가 한창인데 웬일이지?”

     거리에는 그들을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말을 탄 채 눈부신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당당하게 입성하는 기사들과 종자들 그리고 보무도 당당하게 행군하는 병사들의 절도 있는 모습은 엄정한 군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제국 북부 고요의 땅에서 고대 던전이 발견되었대.”

     “고대 던전이라고? 그게 뭔데?”

     “나도 잘 몰라. 하지만 그 안에 엄청 귀중한 물건들이 들어 있어서 그것들만 얻을 수 있다면 단숨에 거부가 될 수 있다나 봐.”

     “무슨 물건인데 그러지?”

     기사들의 입성 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대로로 나온 사람들은 유저며 주민을 가리지 않고 삼삼오오 고대 던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룬은 여관으로가면서 고대 던전의 열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빨리 던전에 대한 소식이 퍼질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 이렇게 신속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여관에 도착한 하룬은 너무나 뜻밖의 인물을 볼 수 있었다.

     “대장님!”

     식당과 붙은 별채 숙소 앞에 티노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자지도 못한 듯한 행색이었다.

     “티노!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대, 대장!”

     너무 반가운 나머지 한걸음에 달려가 부둥켜안은 하룬의 품 안에서 티노는 말 대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사정을 알 수 없는 하룬은 그를 말없이 끌어안고 있었다. 안고 보니 정말 왜소한 체구였다.

     바싹 말라 뼈만 남은 작고 초라한 이 중년 사내가 살아온 고독하고 쓸쓸했던 인생이 마치 마른 솜에 물이 젖는 것처럼 하룬의 가슴으로 스며들어 왔다. 정 줄 곳 하나 없이 오로지 주인을 위해 살아왔던 그의 힘겹고 희생으로 점철된 인생이 고스란히 가슴을 통해 전해졌다.

     그렇게 한동안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티노가 결국 하룬의 품을 벗어났다. 언제 닦았는지 얼굴 대신 양 소매가 젖어 있었다.

     “대장, 난 돌풍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돌풍 용병대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의지로 선택한 내 집이고 대장은 내 가족입니다. 홀 양이 대장도 기사가 될 거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수련 기사가 되기로 했지만 난 돌풍 용병대 대원이 기사보다 더 좋습니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하룬은 더 이상 그 일을 떠올리기 싫었다. 그때 느낀 아픈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하하하! 잘 왔습니다. 안 그래도 험한 곳을 가야 하는데 티노가 무척 그리웠습니다.”

     “고, 고맙습니다. 대장, 앞으로는 반드시 대장의 의사를 확인하겠습니다.”

     하룬과 티노는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어떻게 여긴 알아서 찾은 겁니까?”

     “대장이 떠난 후 바로 쫓아 나왔는데도 벌써 사라지셨더군요. 산을 내려와 타우스트 성을 거쳐 이곳까지 왔습니다. 언젠가 대장이 요른 백작성에 볼일이 있다고 했던 것이 기억나서요. 길드 사무실에 들러 혹시 대장이 남긴 메모가 있나 봤더니 역시 있더군요. 어제저녁에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랬군요. 아무튼 고생 많았습니다.”

     두 사람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숙소로 들어갔다.

     “하룬 대장!”

     “이제야 오는군요.”

     “왜 이제 와요?”

     안에서는여섯 사람이나 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리랜서 기자인 아레스와 GM인 매그럼과 초른 그리고 아반 일행이었다.

     “후후후! 사전 조사를 갔다는 이야기는 이분들로부터 들었습니다. 예정보다 빨리 방송이 되었으니 곧 돌아올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초른이었다. 아레스는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하룬은 매서운 눈길로 아레스를 한번 쏘아주고는 아반 일행에게 인사를 했다.

     “조사는 끝났나요?”

     샤니는 그동안 무료했는지 빨리 출발했으면 하는 얼굴로 물었다.

     “거의 다 됐습니다. 소소한 몇 가지만 더 처리하면 끝입니다.

     하룬은 미소를 지으며 짧게 대답했다.

     “이틀 후 오후에 떠날 예정이니 장비와 준비한 개인 짐을 챙기십시오. 일정은 일단 북문을 나가고 나서 회의를 할 때 말씀드리지요. 그런데 다들 인사는 나눈 겁니까?”

     “물론이네. 이 친구들과는 벌써 친해졌지. 아, 저분 돌풍 용병대원이 맞나?”

     아반이 가리키는 사람은 티노였다. 아마 티노가 제대로 자신을 소개하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 용병대 부대장입니다. 지형 정찰과 척후, 수색은 물론 치료 계통에도 정통한 분입니다. 다른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이번 행로가 너무 위험하고 어려워서 부대장의 능력이 아니면 힘들 것 같아서 불렀더니 일주일 거리를 이틀 만에 오느라고 저 꼴이 되었습니다.”

     하룬의 소개에 외형상 보잘것없어 보이는 중년 사내, 티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단숨에 바뀐다. 그들이 능력자라고 생각하는 하룬이 그 능력을 높이 사는 것은 물론 부대장의 신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허허허! 이거 실례했소. 난 아반이라는 상인이오. 하룬 대장과 함께 이번 고요의 땅에 같이하게 되었소. 잘 부탁하오.”

     “티, 티노라고 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아레스라고 해요. 전투 마법사지만 체력도 좋으니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시켜 주십시오.”

     “저는 매그럼입니다. 아레스와 친구지요. 저도 여행하는 동안 잘 부탁드릴게요.”

     매그럼이 아레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인사를 했다. 같이 이곳으로 오는 동안 두 사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이다. 같은 인공수정체라는 공통점이 그들을 그 짧은 시간에 죽고 못 사는 사이로 만든 것이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티노에게 인사를 했다. 이런 대접을 한 번도 못 받아보았던 티노는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무심하게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지금까지 무뚝뚝한 하룬을 지켜보았던 사람들은 그의 태도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룬은 볼 수 있었다. 티노의 눈에는 기쁨과 뿌듯함이 물기 위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살았던 그였다. 아니, 대접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무시만 받지 않으면 되었다.

     티노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룬을 따라다니면서 그는 자신의 새로운 가치를 느낄 수 있었다.

     사실 후크란 기사단에서 자신을 수련 기사로 영입하려고 한 것이 하룬 때문임을 눈치 빠른 그는 알고 있었다. 재수 4인방은 자신들이 잘나서 그런 것으로 알고 있겠지만 말이다.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개인적인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때 예상하지 않았던 손님이 또 찾아왔다.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매그럼과 아레스가 손님들을 데리고 하룬을 찾았다.

     “누구십니까?”

     그렇게 말하는 하룬의 얼굴은 별로 좋지 않았다. 티노와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딜런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딜런은 티노와 비슷한 나이로 심상치 않은 기품을 가지고 있었다. 플레이트 메일만입혀 놓으면 전장을 휘젓고 다니는 용맹한 기사의 풍모가 느껴질 것 같았다.

     그는 젊은 남녀 두 사람과 동행하고 있었는데 샤니가 혹해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잘생긴 미남에 미녀였다. 더구나 입고 있는 복장이나 기세를 보아하니 그들 역시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지요.”

     “네.”

     어느새 방에서 나온 사람들이 모두 숙소 앞 테이블에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돌풍 용병대에 의뢰를 하고 싶어 수소문해서 찾아왔습니다.”

     “의뢰요?”

     “우리는 고요의 땅까지 돌풍 용병대에 길 안내를 받고 싶습니다. 돌풍 용병대에 의뢰하면 빠르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룬은 무심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내심 많이 놀라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고 자신이 있는 곳까지 찾아왔는지 짐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이들이 놀라운 정보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분들은?”

     “내가 보호하는 분들입니다.”

     그 말은 정체는 밝힐 수 없다는 것이었다. 뭐,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고대 던전에 대한 정보가 공개되었으니 고요의 땅으로 향할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다.

     “고요의 땅도 그렇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도 여러 면에서 무척 위험한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후크란 산맥의 보석 광산을 안내한 돌풍 용병대의 실력이라면 우리를 아주 빠른 시간 내에 그곳으로 안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틀 후 오후에 떠날 생각입니다. 던전까지는 빠르면 보름, 늦으면 스무 날 정도가 걸릴 겁니다.”

     하룬의 말에 딜런이 뒤를 돌아보았다. 좀 떨어진 곳에 나란히 선 두 남녀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요른 백작성에서 고요의 땅까지 가는 시간은 말을 타도 한 달 반 정도가 걸린다. 그것을 3분의 1, 혹은 4분의 1로 줄이는 것이니 만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안전까지는 완벽하게 책임질 수 없습니다. 경쟁자들도 그렇고 도처에 상상하기 힘든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을 테니까요.”

     “역시 그렇군요.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요의 땅까지만 데려다 주면 됩니다. 의뢰비는 충분히 드리지요.”

     “흐음. 일단 부대장과 의논을 좀 해보겠습니다. 잠시 차를 들고 계십시오.”

     하룬은 숙소에 대기하고 있는 소년을 시켜 차를 부탁했다.

     티노와 의논을 한다는 것은 그냥 한 말이었다. 이야기하고 말 것도 없었다. 단지 아반 일행이나 매그럼 일행에게 물어보는 시늉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게 예의인 것 같았으니까.

     사람들을 모은 하룬은 그들에게 양해를 부탁했다. 아반 일행은 좀 꺼리는 눈치지만, 무임승차를 하게 된 아레스와 매그럼 그리고 초른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일단 그들의 승낙을 받은 하룬이 막 탁자로 가려고 할 때 아레스가 그를 잡았다.

     조금 더 은밀한 시간을 기다렸지만 하룬은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히기 전에 거래를 성사시킨 것을 인정받고 대금을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저, 대장! 대금을 받았습니다.”

     “얼마요?”

     방송 시기를 컨트롤하지 못한 것 때문에 하룬의 말은 차가웠다. 그래서 아레스는 조금 주눅이 든 상태로 대답했다.

     “3만 골드가약간 안 됩니다. 어떻게 할까요?”

     하룬은 그 액수에 깜짝 놀랐다. 던전 때문에 난리가난 것은 알았지만 그 정도로 많은 원고료를 받았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환시세를 생각하면 거의 9억 원이나 되는 엄청난 돈이다. 이 정도라면 나인이 부탁한 것을 모두 해결하고도 한참 남았다.

     “그럼 지체하지 말고 팀원들에게 당장 내가 지난번에 말한 곳에 현금으로 가져다주라고 하시오.”

     “네, 알겠습니다.”

     하룬의 목소리에 자신에 대한 감정이 풀린 것을 느낀 아레스가 끝 소리로 대답했다.

     후크란에서 헤어질 대 미리 원고료를 받으면 바란 형이 일하는 암시장의 대장간에 현금으로 전달하라고 말을 한 적이 있어, 아레스도 무슨 소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레스가 물러나자 이번에는 초른과 매그럼이 나왔다.

     “우리도 대금 1만 골드를 받아왔습니다.”

     초른이 묵직한 돈주머니를 꺼내 하룬에게 주었다. 100골드짜리 미스릴 주화가 가득 들어있는 돈주머니였다.

     “윗분이 굉장히 만족하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좋은 거래가 이루어지길 희망한다는 전갈이 있었습니다.”

     윗분이라면 아마도 아반에게 던전에 대한 정보를 누설한 고위급일 것이다. 사실 이들에게까지 돈을 받는 것은 조금 걸렸지만 아반이 그 정보를 아무 대가 없이 받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나 역시 잘 부탁한다고 전해 주시오.”

     하룬이 준 정보 때문에 거액의 보상금을 받은 것은 물론 승진까지 어느 정도 약속받은 매그럼과 초른은 돈을 주면서도 크게 허리를 굽혀 감사를 표시했다.

     그 광경을 보던 아반 일행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상인이기에 누구보다도 돈의 가치를 잘 아는 그들에게 이런 광경은 생경하게 느껴졌다. 한자리에서 벌써 4만 골드라는 거금이 대금이라는 명목으로 하룬에게 건너갔다.

     아무리 뛰어나도 용병은 용병일 뿐인데 거래 대금의 규모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들의 절박한 상황 때문에 너무 큰 액수로 계약을 한 것 같아서 다시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진작 주었어야 하는 선금 지급을 미루고 눈치만 보던 아반은 자신이 뭔가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지금 눈에 보이는 용병은 단둘이지만 대화 내용을 보건대 이곳저곳에 대원들을 파견해서 여러 건의 중요한 의뢰를 하는 중으로 여긴 것이다.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극히 소수로 의뢰를 처리하는 형태라고 생각할 때, 돌풍 용병대의 능력은 자신이 단순하게 생각하던 수준을 훨씬 벗어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행여 입을 잘못 놀리기라도 해서 돌풍 용병대의 안내를 받지 못한다면 큰일이다. 자신들은 안전까지 보장받지 않았던가? 마음이 급해진 아반은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커험! 하룬 대장! 여기 선금 1만 골드네. 고요의 땅까지 잘 부탁하네.”

     그 역시 잽싸게 미스릴 주화 백 개가 든 묵직한 돈주머니를 꺼내 하룬에게 내밀었다.

     그걸 본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은근하게 굳었다.

     ‘그럼 고요의 땅까지 이들을 안내하고 호위하는 데 총대금이 2만 골드라는 말이네.’

     기함을 할 노릇이다. 매그럼과 초른 그리고 아레스는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룬이라는 끈을 잡은 자신들의 선택에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돌풍 용병대의 이름값이 얼마나 비싼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때 후크란 산에서 한 말이 사실이었구나.’

     새로 찾은 손님들 때문에 졸지에 미루었던 거래들을 정산한 하룬은 다시 딜런과 두 젊은 남녀에게 다가갔다. 차를 마시며 하룬 쪽의 동정을 유심히 살피던 그들의 시선이 왠지 달라진 것 같았다.

     “꽤 왕성하게 활동을 하는 것 같군요.”

     딜런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막 자리에 앉는 하룬에게 말을 건넸다.

     “난세라서 말입니다.”

     “그렇죠. 난세지요. 그 어느 시기보다 더 혼란스러운. 하하하! 소문을 듣고 찾아온 걸음이 헛되지 않아 다행입니다.”

     뭐가 헛되지 않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하룬은 담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셋은 고요의 땅까지 안내하는 대가로 2만 골드를 내겠습니다.”

     순간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떴다.

     -퀘스트를 받았습니다.

    『딜런 일행을 호위하여 고요의 땅에 있는 고대 던전까지 최단 시간 내에 안내하라

    소문을 듣고 찾아온 딜런 일행은 돌풍 용병대의 능력을 믿게 되었다. 기사로 추측되는 딜런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젊은 남녀는 상당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을 목적지까지 최단 시간 내에 안전하게 안내하라.

    보상: 명성 +500, 현금 2만 골드

    실패 시 명성 -500과 차후 의뢰 건수의 대폭적인 감소가 예상된다.』

     한동안 울리지 않던 퀘스트 안내음이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거래와는 달리 이번에는 퀘스트 창이 뜬 것을 보니 이들, 아니 들런은 확실하게 NPC가 맞았다.

     “좋습니다.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모시지요.”

     하룬이 퀘스트를 받아들이자 딜런은 당장 품 안에서 묵직한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시가 1,000골드인 상급 마나석 열 개입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하룬이 주머니 안을 보니 손가락 굵기의 마나석들이 보였다. 손에 닿은 마나석에서 강력한 마나의 유동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마나석은 틀림없지만, 상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하룬은 딜런의 말을 믿었다. 직감이 사실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하룬은 마나석이 든 주머니를 챙겼다.

     “이틀 후 점심 부렵에 북문으로 나오십시오. 우리도 여행 준비를 마치고 그곳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그곳에서 뵙지요.”

     딜런과 두 사람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돌아갔다.

     중후한 기도와 잘 정제된 분위기로 보아서는 용병 정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신분으로 보이는 딜런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예의 바른 태도로 하룬을 대했다. 당연히 하룬도 그를 좋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 빨리 저녁 식사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듭시다. 여행 준비를 할 시간이 내일과 모레 오전밖에 없으니 서둘러야 할 겁니다.”

     하룬의 말에 모두 저녁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떠날 구체적인 날짜를 정한 터라 식사 분위기는 좋았다.

     기분 좋게 저녁을 먹은 사람들은 다들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티노는 굳은 얼굴을 풀지도 못하고 주춤거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대장! 내가 눈으로 본 것들이 다 진짭니까?”

     그로서는 몇만 골드가 우습게 오가는 것을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는 듯했다. 2급 용병이긴 하지만 이런 큰 거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얼떨떨한 눈길로 하룬을 응시했다. 그가 알고 있는 하룬 대장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잠시 헤어졌던 사이에 하룬은 엄청난 거물로 변해 있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하하하! 진짜이고말고요. 안전하고 빠르게 고요의 땅으로 가자면 이런저런 준비가 많을 테니 티노도 일찍 잠자리에 드세요. 할 일이 많을 겁니다.”

     “아…… 네!”

     티노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자신이 얻은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향하면서 연방 뒤를 돌아보는 품이 여간 우습지 않았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하룬은 잠시 접속을 해제했다.

     -어! 오빠!

     그렇게 빨리 하룬이 나올 것은 몰랐던 벨은 뭔가를 검색하다가 깜짝 놀랐다.

     “진수 형을 잠깐 만나려고. 나 금방 갔다 올게.”

     하룬은 벨을 남겨 두고 서둘러 캡슐을 열고 진수의 집으로 향했다. 현실은 이제 해가 중천이다. 이런 시간에는 당연히 접속을 하고 있을 테지만 일단 여행을 떠나면 현실로 나오기가 힘드니 이 시간이라도 그를 만나야 했다.

     도어 벨을 한참이나 누른 끝에 간신히 진수가 밖으로 나왔다. 원래 캡슐에 내장된 홈 컴 기능으로 인해 게임을 하면서도 현실의 방문객이나 메일, 화상 전화가 오면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냐?”

     한창 게임을 하다가 나왔는지 진수는 조금 심기가 불편한 얼굴이었다. 하룬은 영문을 몰라 하는 진수에게 고대 던전에 대한 정보를 판 이야기를 해 주었다.

     “헉! 정말? 진짜야?”

     진수는 원고료로 받은 액수를 듣고는 눈이 뒤집힐 정도로 놀라 좁은 집 안을 팔짝거리며 뛰어다녔다. 아무리 말려도 그는 흥분해 어쩔 줄 모르고 좋아서 난리를 쳤다. 제대로 그와 이야기를 한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나도 방송은 봤어. 안 그래도 내가 주운 캠 안에 있던 영상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걸 네가 방송사 기자를 통해 넘긴 줄은 몰랐어. 어떻게 하다 보니 유출이 된 줄 알았거든. 그 칩이 그렇게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을 줄이야. 내가 완전 대박을 건졌구나!”

     “그래요. 대박 중의 대박이죠. 현실 돈으로 9억에 가까운 돈이니 이제 형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어요.”

     하룬은 그 돈을 챙기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정말 진수가 개고생을 하는 와중에 얻은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 말에 진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룬을 잠시 응시했다. 마치 그 진실을 탐색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 나 주려고?”

     “당연히 다 줘야죠. 내가 한 거라고는 용병대를 통해 방송사 기자랑 거래를 한 것뿐인데요.”

     욕심을 낼 필요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욕심도 났고 어느 순간에는 적당히 떼서 자신의 몫을 챙길 생각도 했다. 실제로 그의 역할도 상당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굳이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 돈이 아니라도 돈은 충분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달에 50~60만 원으로 살았던 그였다.

     나머지 돈으로 벨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부족하면 자신이 더 벌면 되는 것이다.

     굳이 진수에게까지 양심을 속이거나 이득을 취하고 싶지는 않았다.

     “야, 인마! 세상에 이런 바보 같은 녀석이 다 있나! 넌 왜 그렇게 욕심이 없냐? 솔직히 나야 그 칩을 우연히 죽어 가는 유저에게 도둑질하듯 얻은 것뿐이야. 거기다가 어떤 식으로든 쓸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나머지는 네가 다 한 일인데 왜 날 다 주냐?”

     진수는 진짜로 화가 났는지 소리를 높였다. 그 모습에 하룬은 마음이 찡했다. 정말 진수는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도 내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형하고 나하고 명확하게 돈거래를 할 사이도 아니고요. 형이나 나나 외롭고 힘든 보더러인데 형이 고생하면서 얻은 물건으로 내가 무슨 이익을 챙기겠어요. 난 그거 아니라도 충분히 돈을 벌고 있어요. 안 그래도 번 돈으로 이사까지 갈 참인데요.”

     “그래도 이건 말이 안 돼. 그래, 반으로 나누자. 난 내 손을 떠난 순간 내 물건이라는 생각을 버렸어. 방송이 된 영상이 내가 준 칩에서 본 것이긴 했지만 네가 어쩌다가 유출시켰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 칩이 그렇게 큰돈이 된다고 생각도 하지 못했고. 내 인맥이나 능력으로는 감히 방송사와 연락하거나 거래를 할 수도 없었을 거야. 사실 그 돈은 네가 다 벌어 놓은 것이나 다름없는데 형이라고 뭐 해 준 것도 없이 내가 무슨 염치로 그 돈을 모두 받겠니? 난 반이라도 충분해. 그거만 있어도 평생 돈 걱정 없이 게임을 즐기면서 살 수 있다고. 너로 인해 내가 그렇게 그리던 꿈이 이루어졌단 말이야.”

     진수는 감격에 겨워 눈물까지 글썽이며 하룬을 끌어안았다. 흥분으로 인해 빠르게 박동하는 그의 심장을 통해 진심이 전해졌다.

     ‘이거 하루에 두 번이나 남자들과 진한 포옹을 하네.’

     하룬은 이런 감동적인 순간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진수가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도 정말 흐뭇하고 행복했다.

     특별히 나눈 대화나 함께 보낸 시간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이 F구역으로 와서 마음의 의지가 되어 주었던 고마운 형이 평생 꿈꾸던 것을 자신의 도움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니 자신이 대견스럽게 여겨졌다.

     하룬은 몇 번의 양보 끝에 절반을 받기로 했다. 진수의 입장이 워낙 강경했던 것이다.

     “그럼 돈은 어떻게 드릴까요? 아, 고요의 땅에서는 나온 거예요?”

     “아니!”

     하룬의 물음에 진수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제야 하룬은 아까 처음에 불편했던 표정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제기랄! 평생 써도 못 쓸 돈을 벌었는데 지금은 입에 넣을 빵 한 조각 없으니. 참 황당한 일이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 여기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서 숨어 지내고 있어. 골드 스톰과 피닉스 그리고 천공 길드원들이 속속 도착하고 엘프들의 숫자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어. 세 세력과 엘프들이 던전을 중심으로 호시탐탐 싸울 기회만 노리고 있어서 이 주위는 이제 완전히 폭발 일보 직전이야. 내가 은밀한 곳에 숨어서 상황을 관찰하고 있는데 고대 던전은 엘프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고, 세 거대 길드들이 세력을 키워 파상적인 공격을 하는 중이야. 밖에 나갔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것 같아서 내가 파 놓은 땅굴 속에서 풀뿌리를 뜯어 먹거나 쥐를 잡아먹으면서 버티고 있는 중이지.”

     그런 줄은 몰랐다. 이미 고요의 땅을 벗어나 요른 백작령으로 돌아오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강혜리 년을 봤어. 천공 길드와 함께 있더라고. 그래서 한동안 백작성 인근에서 볼 수 없었던 거야. 또 누구랑 눈이 맞았는지 뻔쩍뻔쩍한 갑옷을 입은 허우대 멀쩡한 놈이랑 돌아다니더라고. 죽을 때 죽더라도 그 연놈을 혼내 주고 죽으려고 기회만 보는 중이야. 흐흐흐! 이제 돈도 생겼겠다, 제대로 된 방어구도 갖춰 입고 습격을 한 다음 스크롤로 튀면 되겠지.”

     강혜리에게 뭘 어떻게 당한 것인지 진수는 그 여자 말만 하면 완전히 돌아 버리고 있었다. 아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모멸감을 느꼈던 것이다. 같이 지내 봐서 아는데 진수는 성정이 온순하고 폭력을 싫어하는 편이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지금 의뢰를 받아서 고요의 땅으로 가고 있거든요. 나도 던전에 갈 거니까 내가 도착할 때까지만 기다려요.”

     “안 돼! 여기가 얼마나 위험한데 오려고 해? 게다가 이곳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위험한데 그래. 나 같은 전문 파인더들도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고.”

     “하하하! 일행들 실력이 뛰어나니 걱정 마요. 약초꾼들만 아는 안전하고 은밀한 길도 아는 사람이 있으니 그곳까지 가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거예요. 일단 형이 필요한 물건들을 말해 줘요. 백작성에서 다 구해 가지고 갈 테니까요. 그리고 형이 숨어 있는 곳의 위치도요.”

     하룬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 이상은 만류하지 못하는 진수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일행이 있다니 말리지는 않겠는데, 정말 조심해라. 여기도 그렇지만 이곳까지 오는 길은 정말 위험하단 말이야.”

     “알았어요.”

     진심 어린 걱정에 하룬은 코끝이 찡해졌다. 큰돈을 벌어 주어서가 아니라 진수는 예전부터 그랬다. 그 대상이 비록 하룬만은 아니겠지만 남을 걱정해 주는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진수에게 필요한 물건의 목록과 자세한 위치가 기재된 약도를 받은 하룬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지만 바로 비욘드에 접속할 수는 없었다. 해란으로부터 긴급 호출이 와 있었던 것이다.

     “야, 하룬!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영상이 연결되자마자 해란이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리야?”

     난데없는 고함에 살짝 눈살을 찌푸린 하룬이 물었다.

     “너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데 이렇게 큰돈을 보냈냐고?”

     아마 아레스의 동료가 벌써 돈을 가져다주었나 보다. 미리 언질은 했지만 그 정도 액수인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놀란 것이다. 그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룬도 아레스가 방송사로부터 받은 돈을 실감할 수 없으니 말이다.

     “사연이 있어. 그리고 나쁜 일로 번 돈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해란의 뒤로 세란과 바란의 얼굴까지 비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그 일을 두고 의논을 하고 있었나 보다.

     “하룬, 정말 무슨 돈이냐? 이렇게 큰돈이라면 최소한 그 출처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거 아니냐?”

     바란의 굵직한 목소리에는 걱정과 근심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하룬처럼 말이 많은 사내가 아니었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당혹감과 함께 깊은 우려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암시장이라도 이 정도의 현금을 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긴 저들이야 당연히 걱정이 되겠지.’

     돈을 대신 관리하고 물건을 대리해서 구입하는 중개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알아야 할 것도 같았다. 그의 일을 대신 해주는 자들이니 말이다.

     “그 돈은 이번에 게임하면서 고대 던전에 대한 정보를 호울 방송사에게 넘기고 받은 돈 중 일부에요. 그 돈을 주고 간 친구가 바로 방송 원고를 쓴 기자고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결국 하룬은 돈의 출처를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걸로 일이 끝난 건 절대 아니었다. 물론 바란은 어느 정도 수긍하는 눈치였지만 당장 해란과 세란의 눈이 커졌다.

     “뭐어? 네가 그 정보를 방송사에 넘겼다고?”

     “어떻게, 어떻게 알았는데?”

     “얘기 좀 해봐. 답답해서 죽을 거 같다고.”

     “던전의 정보가 담긴 영상을 어떻게 얻은 건데? 제발 말 좀 해 봐!”

     하룬은 대답할 생각도 없었지만 두 자매가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부었다. 하룬이 입을 단단하게 다물고 있는 모습을 본 바란이 동생들의 어깨를 툭툭 치며 진정시켰다.

     “이거 한 가지만 말해 줘. 너 혹시 돌풍 용병대원이야?”

     역시 해란은 그 정도까지는 짐작하고 있었다. 하룬 역시 던전의 정보 공개에 돌풍 용병대가 관여되었다는 넷상의 소문은 이미 벨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응.”

     짧은 그의 대답에 해란과 세란은 고개를 흔들며 놀란 표정을 숨기지도 못했다.

     “휴우, 도대체 언제 그런 유명한 용병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거니? 사람들이 말하길 거기 대원들은 엄청난 능력자들이라던데 너도 그런 거였어? NPC들도 못 들어가는 그런 유명한 용병대에 어떻게 유저가 들어갈 수 있냐고? 왜 똑같이 게임을 시작했는데 넌 풍운의 중심에 있는 용병대에 들어가고 나는 아직도 3서클에서 헤매고 있는 건데?”

     해란은 자신이 한심하다는 듯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런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세란이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눈을 크게 뜨고 하룬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야, 하룬. 너 정말 능력 있다. 하긴 일전에 배리어 밖에서 네가 보였던 실력이라면 당연할 수도 있겠지. 원래 현실의 능력이 뛰어나니 게임에서도 그렇게 빨리 자리를 잡았겠지? 음, 아무래도 그냥 좋은 친구로만 지내려고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어. 너 나한테 시집, 아니 장가와야겠다. 내가 보기보다 꽤 여자다운 구석이 있으니까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거야. 너도남들 평생 벌 돈을 한 방에 버는 남자니 나랑 결혼할 자격은 충분해.”

     세란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소리에 하룬은 피식 웃었고, 순간 해란이 그녀의 옆구리에 주먹을 박아 버렸다.

     “미친년! 찬물도 아래위가 있는 법인데 언니를 놔두고 감히 내 신랑감을 노려. 안면을 튼 것도 내가 먼저고, 친한 것도 내가 더 친해. 감히 어디서 제 형부 될 사람한테 웬 망발이야.”

     탄탄한 근육을 가진 세란이지만 해란의 주먹에 옆구리를 강타당하자 인상을 찡그리며 양손을 허리에 얹고, 같잖은 태도로 자신을 쏘아보는 해란을 노려보았다.

     “형부라고? 화아! 이거 완전히 돌게 만드네. 말은 내가 너보다 먼저 했고, 실제로 얼굴을 본 것도 내가 먼저거든. 이게 어디서 주먹질이야? 너 한번 이 언니에게 맞아 볼래?”

     세란이 주먹을 불끈 쥐자 당장 어깨와 팔뚝 근육이 눈에 띄게 부풀었다. 우람한 그 근육들로부터 엄청난 힘과 강도가 느껴졌지만 그녀의 말대로 여성미 역시 상당했다. 일단 미모가 받쳐주는 데다 근육질이지만 몸매는 완벽한 S라인을 그리고 있었다.

     “너! 어, 언니에게 이게 무슨 짓이야? 너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생각하지도 못한 세란의 반응에 해란은 당혹스러운 듯했다.

     “언니 좋아하네. 네가 언니인지 내가 언니인지 누가 알아. 우릴 버린 잡것들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을 네가 어떻게 알아. 시장 사람들에게 물어봐, 누가 언니 같냐고. 한눈에도 내가 언니라는 것은 다 안다고, 이 절벽아!”

     세란은 정말 화가 났는지 눈썹 끝이 위로 치솟았는데 그 모습이 자못 위협적이라 해란의 기세가 단숨에 꺾이고 말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모욕적인 말에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올려 무드러운 살덩어리를 잡고 대충 가늠하던 해란은 다시 자신이 생겼는지 입술을 질근 물고는 소리를 질렀다.

     “내 가슴이 어때서? 내 키에 이 정도 가슴이면 큰 거라고.”

     해란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받쳐 올리며 식식거렸다.

     “흥! 뭐, 가슴만 만지고 살 것도 아니고, 젖만 빨면서 살 것도 아닌데 왜 큰 게 필요해. 이 정도면 되는 거지. 여자는 가슴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여성스러움이 먼저라고. 그리고 어디서 감히 언니라는 거야? 그때 분명히 할아버지가 정했어. 우리가 든 바구니 안의 메모를 읽은 할아버지가 말이지. 너도 12개월 때니까 기억할 거야. 분명히 할아버지께서 나더러 언니라고 했어.”

     “흥! 그 이후로 다시 물어본 적이 없는데 그걸 어떻게 확신해. 그 당시 할아버지는 대작을 끝내고 만취해서 돌아오다가 우리와 우리를 담은 바구니를 발견했지만 바구니 안에 있던 메모지는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고. 바란 오빠, 할아버지가 글을 알았어요?”

     세란은 근육질의 외모와는 다르게 아주 차분하게 자신의 주장을 역설하고는 바란까지 그 싸움에 끌어들였다.

     “그, 그게…… 확실히 아버지는 글은 배우지 못한…… 거 같은데 아셨을 수도 있는 것 같고…….”

     바란이 쩔쩔매면서 확답을 피했다. 아마도 이런 경우를 꽤 많이 겪은 것 같았다. 우람한 덩치를 가진 그가 두 여동생들의 눈치를 보면서 말까지 더듬고 흐리는 모습은 하룬에게 큰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오빠!”

     “오빠!”

     동시에 자신을 부르며 독기 어린 눈길을 보내는 두 여동생들의 기세는 결국 바란의 이마에 식은땀까지 나게 만들었다.

     “바란 형님.”

     그때 하룬이 그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두 여동생의 눈빛 속에 활활 타서 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해란과 세란을 제치고 앞으로 나와 하룬의 영상 앞에 선 바란의 눈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아, 하룬. 왜? 뭘 해 줄까?”

     “일단 나인이 부탁한 일을 좀 해 주시고요. 곧 거처를 옮길 생각이니까 제가 부탁한 물건들을 구입해 놓았다가 그때 좀 배달해 주세요.”

     “알았다. 요즘은 방위군 조달 부서에서 주문도 없는 상태라 한가하니 내가 직접 해 주지.”

     이제 돈도 들어왔고 시간을 내서 나인이 말한 곳을 찾아가 확인만 하면 된다.

     “그동안 대접도 제대로 못 했는데 나중에 옮긴 거처로 오시면 식사 한번 대접하겠습니다.”

     하룬은 지난번 자신을 도와주었을 때 겨우 차 한 잔으로 떄우고 만 것이 미안해 그렇게 약속했다. 나날이 좋아지는 벨의 음식 솜씨라면 제법 먹을 만한 요리를 만들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한 후 하룬은 두고두고 후회해야만 했다.

     “정말이지? 나도 오빠랑 같이 갈 테니 내 것도 부탁해. 호오, 남자 혼자 사는 집은 어떨까? 난 남자를 사귄 적이 없어서 정말 궁금하네.”

     해란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방금 전까지 핍박을 가했던 바란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흥! 여우같은 년. 이제까지 사귄 남자들 숫자만 해도 열 손가락이 넘어가는데 무슨 개소리를. 아무리 네가 여우 짓을 해도 하룬 정도면 다 안다, 알아, 이 여우야. 그리고 쟤가 왜 혼자냐? 귀엽고 예쁜 여동생도 있는데. 또 짐을 옮기는데 비리비리한 네가 왜 가냐? 나 정도 힘은 있어야 바란 오빠를 도울 수 있다는 거 몰라?”

     풍만한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세란 역시 바란의 반대쪽 팔에 팔짱을 끼고 달라붙었다. 그제야 겨우 진정되었던 바란의 얼굴에 다시 식은땀이 돋아나고 있었다.

     “아, 그리고 가능하면 나인도 데려와요, 형. 할 이야기도 있고 정산도 해야 하니까요.”

     나인이 좋은 집을 알려 주었으니 조금 더 보답할 생각이다.

     “알았어. 다른 것은 없고? 한번 들르지 그래?”

     “네. 목록에 있는 것들 중 구입이 가능한 것부터 좀 구해 주세요. 일단 볼일도 있고 이사도 해야 하니 당분간은 많이 바쁠 겁니다.”

     “그렇구나.”

     바란의 말과 함께 유심히 대화를 듣던 해란과 세란의 얼굴에 실망의 파도가 퍼져 나갔다.

     “그럼 수고 좀 해주세요.”

     “그러마. 또 연락해라.”

     “네. 해란과 세란도 나중에 시간이 되면 보자. 난 바빠서 이만.”

     “잠…….”

     “하…….”

     하룬은 해란과 세란이 또 헛소리를 할까 봐 두려워 서둘러 연결을 끊었다. 뭔가 할 말들이 더 있는 눈치였지만 그녀들의 태도가 단순한 장난이나 농담으로 여겨지지 않아 굳이 더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저러나 해란과 세란도 고아였구나.’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고아가 어디 그녀들만 있을까. 어느 유니온이건 고아들은 흔했다. 아무리 희망이 없는 유니온 하층 주민들이라도 사랑도 하고 섹스도 즐기지만 아이는 원하지 않았다. 아이가 생기면 그나마 연애를 하는 것도 힘들었던 것이다.

     워낙 자식에게 들어가는 돈은 많고 벌이는 시원치 않은 D와 F구역 주민들은 결혼을 아예 하지 않거나 결혼을 해도 임신을 극도로 꺼린다. 굳이 비참한 하루하루를 자식들에게까지 대를 이어 살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갈수록 노후화되어 가는 유니온의 기계들을 대신해 인간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안정적인 인력 수급이 필요한 유니온 정부는 일단 낳으면 부양 가정을 통해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지원을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버려지는 아이들은 꽤 많았다. 대부분이 부양 가정에서 자라지만 일부는 다시 버려지거나 혹은 보육원이나 고아원 같은 시설에서 자라는 경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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