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미요스의 사자 (64/278)

《미요스의 사자》

 사흘에 걸쳐 알라미즈 산을 넘는 여행이 이제 끝났다. 마침 그렇게 퍼붓던 비도 어젯밤부터 잦아들더니 오늘은 하늘까지 파랗게 개었다.

 알라미즈 산은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최소한의 능력도 없는 두 사람이 포함되어 아주 위험한 곳이지만, 와이번들은 물론 몬스터들조차 나오기를 꺼리는 굵은 비와 도저히 길이 없을 곳인데도 지날 수 있는 작은 길을 찾아내는 하룬의 능력 때문에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별다른 위험 없이 넘을 수 있었다.

 아반과 샤니의 저질 체력만 아니라면 이틀도 안 걸렸을 것이다. 중간에 빗물에 지반이 약해진 곳에서 샤니와 아반이 미끄러지거나 굴러떨어지는 위기가 몇 번 있었지만, 미리 하룬의 허리와 연결해 놓은 밧줄로 인해 무사할 수 있었다.

 한번은 절벽을 오르며 후미에 선 묘까지 미끄러져 벼랑에 매달린 적이 있었는데 하룬은 손가락과 허리로 그들의 몸무게를 감당하면서도 바위를 기어 올라갔다. 여간해서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던 묘도 그때만큼은 감탄을 숨기지 않을 정도였다.

 보기에는 마른 체구지만 그의 괴력은 하이 랭커인 묘로서도 상상할 수 없는 정도였던 것이다.

 이틀째 저녁에 한 동굴에서 잘 때는 먹이를 찾아 빗속을 돌아다니던 늑대 떼가 동굴로 난입을 했는데, 하룬은 비수와 단검으로만 늑대들을 동굴 안에서 처리했다. 아침에 밖에 나간 사람들은 오십 마리가 넘는 늑대 사체가 동굴 입구 근처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마 하룬의 놀라운 능력이 아니었다면 묘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알라미즈 산을 무사히 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같이 사흘을 보내면서 세 사람이 유일하게 동감하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이제 위험한 곳은 다 지나왔다. 일행의 눈에 광활한 평야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머! 끝이 안 보여!”

 샤니가 감탄성을 질렀다. 작은 산 몇 개를 빼고는 광활한 평야가 눈 닿는 곳까지 이어져 있어 마음까지 툭 터지는 것 같이 시원한 모습이었다. 좁은 배리어 안에서 평생 갇혀 산 이너들이라면 당연히 놀라고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풍경인 것이다.

 드넓은 요른 백작령의 첫 느낌은 광활함과 풍성함 그리고 여유로움이었다.

 요른 평야를 가득 채운 밀은 누렇게 익어 가는 중이었고, 후크란 산맥의 북쪽 능선을 타고 내려온 부드러운 바람이 고개 숙인 밀알을 애무하는 풍경은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게 만들었다.

 누렇게 익은 밀이 바람에 파도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광활한 들판에는 추수를 준비하는 농부들과 몬스터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요소요소에 자리를 잡은 병사들이 눈에 띄었다.

 긴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하룬의 얼굴이지만 아반은 그의 눈빛에 담긴 감정을 읽었다. 하지만 설마 그가 이곳을 와 본 적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아반이었다. 자기라도 이런 광활한 평야를 본다면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참 좋은 곳이네. 그렇지 않나?”

 “맞습니다.”

 하룬이 평야에서 눈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아빠, 요른 평야는 정말 대단하네요. 마치 바다처럼 넓은 것 같아요.”

 그의 정체를 안 후부터 부쩍 친해지려고 애쓰는 샤니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하하. 대단한 곳이지. 이 요른 평야는 제국 4대 곡창 중 하나로 이곳에서 생산된 밀이 제국민 절반을 먹여 살린다는 소리가 있기도 하단다. 비록 명목상으로는 요른 백작가에 속한 곳이긴 하지만 직할령이나 다름없지.”

 그는 유저이긴 하지만 이 테론 제국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직업이 상인이라 당연할 수도 있지만 하룬은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는 아반에게 놀라고 있었다.

 “직할령이라면 직할령이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요른 백작가는 200년도 넘게 대대로 북부군의 요직을 밭아 군량은 물론 보급품을 전량 공급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거든. 그 때문에 요른 백작가는 중립 성향의 군부 세력으로 인정되어 원로원에 속하지 않았으면서도 골든 배틀에 참가하지 않는 가문이야.”

 하긴 이렇게 광대하고 기름진 땅을 가진 귀족가라면 욕심을 내는 세력이 많을 것이다. 일개 백작가가 지킬 수 있는 땅이 아니다. 요른 백작가의 선조들은 자신들의 봉토를 지키는 방안으로 제국 성립 이후로 중립을 표방하는 군부 세력이 되어 누구도 욕심을 내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리라.

 낮은 산지들과 풍부한 수량을 가진 두 개의 강이 흐르는 덕분에 높은 식량 생산성을 가진 요른 백작령은 식량을 무기로 더 이상 세력을 확장하는 대신 그렇게 가문을 지켜 오고 있었다.

 마차 두 대가 나란히 지나갈 정도로 잘 닦인 대로가 사방팔방으로 나 있는 요른 평야를 통과하는 데만 해도 8두 마차를 타고 이틀이 꼬박 걸릴 정도였다. 일행은 한 상단과 동행하여 적당한 돈을 치르고 상두가 탄 마차를 같이 탈 수 있었다.

 평야 곳곳에는 다른 곳과는 달리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마을들이 자리 잡고 있어 여행자들에게도 무척 편한 곳이었다.

 일행이 이틀째 되던 날 저녁이 되어 도착한 바럼 마을은 주로 농노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비록 농노들이 대부분인 마을이지만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는 물론 주점과 상점들이 거리 전체를 채우고 있을 정도로 큰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사실이지만 요른 백작령에는 이런 농노 마을들의 숫자가 평민들이 거주하는 마을의 다섯 배가 넘었다. 대대로 북부군을 맡고 있는 요른 백작가에서는 북방 유목 민족들과의 전투를 통해 얻은 포로들을 모두 이곳으로 보내 농노로 삼아 왔다.

 마을로 들어간 네 사람은 상인들과 같은 여관을 숙소로 잡았다. 요른 백작성까지는 이제 두 시간만 더 가면 되지만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시간이 늦어 성문이 닫힐 것이니 이곳에서 묵는 것이다.

 하룬 일행이 묵게 된 ‘위트 헛’이라는 이름의 여관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숙소로 쓰이는 곳과 음식과 술을 파는 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외관과는 달리 음식은 맛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고, 실내도 소란스러운 것이 상인들이나 용병들의 분위기와도 맞았다.

 숙소에 짐을 푼 상인들이 점원들의 안내를 받아 주점에 들어가 몇 개 남은 테이블에 앉자 더 이상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주점 2층은 몸을 파는 창녀들이 따로 방을 빌려 영업을 하는 듯 용병들은 쉴 새 없이 2층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하하! 우리 같은 용병들에게는 이런 곳이 더 좋지.”

 “암. 고급 요리들을 불편하게 먹으면서 개미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보다야 당연히 더 낫지.”

 방어구를 풀어 우람한 근육을 드러낸 용병들이 그 주변 무리들과 먼저 주문했던 맥주를 마시며 들떠 있었다. 추수 때가 되어 제국 각지에서 곡식을 사러 온 상인들과 그 호위 용병들 때문에 가게는 꽉 차 있었다.

 따로 자리를 잡은 하룬과 아반 일행 역시 주석잔 가득 채운 맥주를 마시며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일정을 즐겼다.

 “하룬 대장, 요른 백작성에서는 언제 출발할 거예요?”

 한 번에 맥주를 반이나 마시고 소매로 거품이 가득한 입술을 닦는 샤니의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이미 이들로부터 자세한 사정을 들은 하룬은 이제 샤니에 대해 큰 반감은 없었다.

 그들은 노블이었다. 그것도 코원 유니온의 원로원 상원 의원인 현지성의 아들과 손녀였다.

 곧 대를 이어 상원 의원이 될 아반은 친한 지인인 넥컴워 코원 지사장으로부터 고요의 땅에 있는 고대 던전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고 했다. 왜 그곳에 가려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반드시 그곳에 도착할 이유가 있다고 했다.

 노블, 그것도 최상위 노블인 그들 부녀가 고대 던전에 들어가려는 사정이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말을 하지 않는데 캐물을 이유가 없었다. 그곳에 도착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룬의 존재 역시 넥컴월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아마 요른 백작성에서 만나기로 한 매그럼과 초른이 언급했을 것이다.

 “일단 여기서 만날 사람들이 있어. 그곳에 대한 정보와 길에 대한 정보를 꼼꼼하게 체크하는 것은 물론이고 준비할 것도 많고.”

 샤니에게 한 하룬의 말에 아반은 걱정을 한시름 덜었다. 비록 엄청난 거금을 주기로 했지만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준비하는 것을 보면 믿을 수 있었다. 그 역시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그렇게 훈련받았던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요른 백작성을 떠나고 난 시점엔 방송을 통해 던전 소식이 알려질 텐데 걱정이네. 나야 이야기로만 들었지만 후크란 산맥에서 일어난 비극보다 몇 배는 큰 비극이 일어날 텐데.”

 그럴 것이다. 아반이 왜 그런 걱정을 하는지 모르지만 그와 인연을 맺은 몇 사람이 아직도 그 인근에 있었다. 브리엘라와 데브론 그리고 진수 형도 아직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브리엘라와 데브론이 무사해야 할 텐데…….’

 언제나 그렇듯 골든 배틀로 인해 수십 년 이상 힘을 축적한 각 세력들은 이런 보물이나 광산 혹은 던전을 기폭제로 해서 전초전을 치른다. 이번 골든 배틀의 경우, 후크란 산맥에서 1차로 붙었다면 본격적인 세 겨룸은 곧 고요의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던전의 파급력이 크다면 아예 그곳에서 골든 배틀이 완전히 끝날 수도 있다.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 하룬은 식사를 빨리 마치고 산책을 나왔다. 남은 세 사람은 잠시 현실에 다녀올 예정이었다.

 비록 마을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위치한 이 농노 마을의 대로는 마법 등과 횃불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하지만 대로와 뒷골목 주점과는 달리 주거지는 진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다른 곳에 비해 풍족한 삶을 영위하긴 하지만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야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는 농노들은 어둠이 내려앉는 시간이면 아예 밖을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인적이 없다니.’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잦은 이곳에서는 아무 힘도 없는 농노들이 용병들에게 강간을 당하거나 만취한 여행객들에 의해 폭행을 당하는 일이 많아, 이제는 어둠이 내리면 아예 밖을 나서지 않는다는 것을 하룬은 알 수 없었다.

 하룬은 흐릿한 달빛에 비친 그들의 초라한 집을 볼 수 있었다. 크기만 좀 차이가 날 뿐이지 모두 흙으로 세운 집들은 지붕을 밀짚으로 덮은 움막 수준이었다.

 그 속에는 노예라는 굴레를 대대로 세습하며 살아온 불쌍한 영혼들이 힘겨운 하루를 마치고 유일한 휴식 시간을 즐기고 있을 터였다.

 비록 모든 권리가 제한된 그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밑바닥 생활을 해 온 하룬은 가축의 그것처럼 초라하기만 한 그들의 집을 보고는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빌어먹을!”

 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왜 능력이 아니라 피로 세습이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방인 주제에 수천 년 동안 내려온 비욘드의 신분 사회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요즘 화두로 삼고 있는 마나의 순행과 마나를 의식적으로 움직이는 것에 대해 심각한 고찰을 하려고 나온 산책길이었다. 그러나 하룬은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농도들의 초라한 집을 본 후라서 그런지 평소 그렇게 잘되던 집중 상태에 쉽게 빠질 수가 없었다.

 ‘돌아가자.’

 마음을 정한 하룬이 막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시꺼먼 사람 둘이 뭔가를 넣은 포대를 들고 이쪽으로 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룬은 순간적으로 몸을 숨겼다. 그들에게서 음습한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다.

 ‘누구지? 농노들인가?’

 한 움막집 담벼락에 몸을 숨긴 하룬은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순간 눈이 예리해졌다.

 ‘사내, 용병들이다.’

 넓고 탄탄한 어깨와 우람한 덩치, 허리춤에 덜렁거리는 칼들은 그들이 용병이라는 것을 쉽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들은 한 손으로 포대를 움켜쥐고 빠르게 걷고 있었다.

 꿈틀!

 뭔가가 든 포대가 한순간 요동쳤다. 앞서 걷던 용병이 걸음을 멈추고 귀찮다는 듯 다른 손으로 포대를 향해 주먹을 날리자, 억눌린 낮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더니 요동이 멈추었다.

 “조용히 있어, 이 계집! 오늘 네 팔자가 피는 날이니까 죽은 듯이 있으라고. 우리 대장 눈에 들었으니 오늘 밤만 지나면 네 수중에 적어도 몇 골드는 생길 거야.”

 “흐흐흐! 그것뿐이 아니지. 그다음에 할 일은 혈기 넘치는 젊은 놈들까지 열셋만 받아 내면 되는 일이야. 너무 좋아 죽지만 않으면 네 몸값으로 다들 10실버짜리 동전 하나씩은 내놓을 거야. 너 좋고 우리 좋은 일이니까 알아서 행동하라고.”

 음침한 두 용병의 대화를 들은 하룬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던 것이다.

 “호, 고년 아직 덜 자란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슴은 제법 튼실하네.”

 잠시 걸음을 멈춘 틈을 이용해 포대 안에 든 농노의 가슴 어름을 주물럭거리는 용병의 눈이 달빛에 비쳐 음탕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열세 살에 불과한데 이렇게 가슴과 엉덩이가 탱탱하다니 타고난 계집이야. 어차피 농노이니 우리가 아니더라도 다른 놈들에게 이런 꼴을 당하거나 아니면 영주 놈 가족들에게 험한 꼴을 당할 거야. 너도 미얀화 가루를 탄 술 한 잔만 마시면 우리와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거야.”

 하룬은 눈을 질근 감았다. 겨우 열셋이란다. 이제 막 성장기에 든 어린 소녀를 욕심내는 두 용병을 향한 그의 눈에서 불길이 솟았다.

 ‘미얀화 가루면 마약이잖아. 도저히 그냥 두면 안 될 놈들이군.’

 아무리 목숨을 내놓고 사는 용병들이지만 마약까지 사용할 정도면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창녀들을 찾는 것이야 뭐라고 할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강제로 납치해서 무리를 지어 강간을 하는 것은 제국법이나 어느 영지법에서든 금지하는 일이다. 거기에 나라에서 사용을 금지한 마약까지 쓰는 것을 보면 용병이라기보다는 어둠을 좇는 무리일 것이다.

 하룬은 암기대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그의 손은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뜻하지 않은 소리가 들린 것이다.

 “흐흐흐! 게다가 관음증에 빠진 이방인 녀석들 앞에서 네가 좋아 죽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돈 많은 녀석들에게 많은 돈까지 우려낼 수 있지.”

 “오늘 오기로 한 이방인 녀석들이 낸 돈이면 앞으로 한동안 위험한 일을 안 하고 살 수 있어. 이참에 아예 대장도 이쪽으로 진출할 마음까지 가진 것 같더라. 성내에는 이미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이런 영업을 하는 무리들만 해도 수십이 넘고 매일 밤 돈을 아예 쓸어 담는다니, 우리도 잘만 하면 즐길 거 다 즐기면서 평생 먹고살 돈까지 벌 수 있다고.”

 “캬악! 미친 변태 새끼들! 하고 싶으면 직접 하면 되지 남들 하는 거 보면서 벌건 눈에 침을 질질 흘리다니.”

 “키키키! 그래도 이방인들은 신탁을 통해 우리 제국민들과 직접 성행위를 할 수 없다니 이런 식으로라도 만족하고 싶은 게지.”

 몸속에서 무엇인가가 폭발하는 것 같았다. 하룬의 눈에서 붉은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언제부터인가 살기가 일어나면 이렇게 눈이 붉게 물들고 잇었다. 마나가 요동을 치고 있었다. 그중 일부는 벌써 검을 잡은 손을 통해 검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후우! 진정하자. 뿌리를 뽑아야 해.’

 하룬은 치밀어 오르는 살의를 간신히 억누르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메신저 워킹은 마치 어쌔신의 그것처럼 아무런 소음 없이 그들의 뒤를 밟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들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마을 외곽의 작은 건물이었다. 임시로 만든 듯 조약하게 통나무와 가죽으로 덮은 그 건물 주변에는 모닥불 몇 개가 피워져 있었다. 두 용병은 번을 맡은 다른 용병들과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수고했어.”

 “흐흐. 이런 일은 일도 아니지. 제 아비 어미와 어린것들이 좀 반항을 했지만 몇 대 맞고는 다 나가떨어지더라고.”

 “뭐 잘못되더라도 농노 주제에 어디 가서 하소연하겠어? 정 문제가 생기면 마을 관리인에게 몇 푼 찔러주면 되지. 이 바닥이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야? 성내에 있는 놈들도 다 그렇게 장사한다더군.”

 “그런데 물주들은?”

 “그 변태 이방인들은 이미 다 왔어. 눈알에 벌겋게 돼서 은밀하게 오는 꼴이라니. 크크크!”

 “그럼 우린 들어가네. 자네들도 어서 들어오게. 어린 계집 품는 맛이 일품이니까. 비록 앞에서 길은 뚫어 놓겠지만 길을 들이는 맛도 제법 각별할 거야.”

 “알았어. 곧 들어가지.”

 포대를 든 두 용병이 들어가고 얼마 후 번을 맡던 용병들까지 안으로 들어가자 모닥불 몇 개만이 조악한 건물을 지키고 있었다.

 ‘살려 둘 가치가 있는 놈들은 하나도 없겠군.’

 그래도 혹시 몰라 하룬은 아공간에서 일전에 럼프 오크의 부족장을 죽이고 얻었던 방어구를 꺼내 착용했다. 비록 방어구 두 벌을 껴입었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은 별 무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두 방어구의 더블 세트 효과로 인해 날아갈 듯 가볍고 활력이 가득 차올랐다.

 하룬은 머리에 쓴 럼프 오크 투구 위에 솟아오른 뾰족한 세 뿔 사이로 시퍼런 뇌전이 흐르는 것과 눈이 피처럼 붉게 변한 것은 느끼지 못했다.

 하룬은 천천히 그 건물로 다가갔다.

 밀짚으로 엮은 문을 살짝 들치자 수십 명이 넘는 사내들이 보였다. 안에도 몇 개의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고, 가장 중앙에는 급조한 넓은 침대와 알몸을 드러낸 소녀 한 명이 보였다.

 “허억! 농노 계집이 이렇게 좋은 몸을 가지고 있다니.”

 “흐흐흐! 오늘 내 물건이 환장을 하겠군.”

 “거 오늘은 앞에서 물건 좀 제발 살살 다루라고. 오늘도 죽어 버린 계집과 그 짓을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모닥불에 비친 소녀는 이제 겨우 열 살이나 되었을까? 먹는 것이 부실해서 아까 들은 열셋의 나이로는 보이지 않는 가냘픈 몸을 가지고 있었다.

 벌써부터 노동에 시달리느라 뙤약볕에 탄 거뭇한 얼굴과는 달리 뽀얀 속살을 드러낸 소녀는 욕정에 번들거리는 사내들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두 손 두 발로 제 몸을 가리기 위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소녀를 보는 순간 벨이 생각나 가슴이 울컥했다.

 용병들 중 한 명이 뭔가를 술에 타더니 사내 몇 명이 강제로 소녀의 사지와 얼굴을 붙잡았다.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는 소녀의 몸짓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두려움에 질식되어 아무런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소녀의 입에 마약을 탄 술병 주둥이가 닿았다.

 “사, 살려 줘요!”

 소녀는 필사의 발악으로 술병에 닿은 입을 틀었다. 순간적으로 술병에 담긴 술이 소녀의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이런 쌍년이!”

 짜악!

 거친 욕설과 함께 우악스럽게 따귀를 갈기는 용병은 벌써 아랫도리를 가린 속옷밖에는 입지 않고 있었다. 그가 이 용병들의 대장인 것 같았다.

 “흐흐! 좋아. 계집이 그 정도 앙탈은 해야 볼 맛이 있지.”

 “비린내도 안 나겠다. 어서 해라!”

 중앙을 기점으로 십여 명이 넘는 사내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이방인들이 그 소동을 보며 몸이 달아오르는지 끈적거리는 눈길과 함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하룬은 잠시 몸을 부들거리며 떨다가 나이아를 소환했다. 그의 눈이 마치 악마의 그것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저 소녀를 제외한 놈들에게 아이스 에로우를 날려 버려. 아니, 그냥 죽여서는 안 되지. 워터 스파이크로 하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만들면 돼.”

 하룬과 특별한 계약을 통해 그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받은 나이아의 눈에 살의가 감돌았다. 수백 개의 워터 스파이크가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내들을 향해 날아간 것은 순식간이었다.

 쉬시싯!

 “크앗! 뭐야?”

 “허억!”

 “아악! 누구야?”

 건물 안은 삽시간에 비명과 고함 소리로 가득했다. 농노 소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몸 구석구석에 워터 스파이크를 맞아 고통에 찬 신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중 일부는 그래도 실력과 독기가 있는지 자신의 무기를 쥐고 일어서려고 했다.

 하룬은 이번에는 대지의 정령을 소환했다.

 “저 짐승 같은 놈들의 머리만 남기고 다 묻어 버려.”

 “후, 재미있겠군.”

 라이피는 싱긋 웃더니 바닥을 들썩였다. 용병들과 유저들의 몸을 지지하고 있던 바닥이 한순간에 푹 꺼졌다. 바닥은 그들을 목만 남긴 상태로 단단히 결박 지었다.

 그런 소동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몸을 잔뜩 웅크린 소녀는 공포에 질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눈만 겨우 드러나는 투구를 쓴 하룬의 모습은 세 개의 뿔과 붉은 안광 때문에 마치 지옥에서 막 나온 악마처럼 보였다. 투구는 코와 입 가리개까지 있어 그의 목소리마저 으스스하게 바뀌었다.

 “누, 누구냐?”

 “으윽! 누가 감히 우리 혜성 길드를 건드리는 거냐?”

 머리만 겨우 드러낸 용병들과 유저들이 신음 소리와 함께 분노에 차 고함쳤다. 하지만 이내 중앙의 침대 앞에 나타난 하룬이 하나하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화염이 쏟아지는 것 같은 붉은 안광을 쏘아 대자 겁에 질려 창백해지고 말았다.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고 솜털이 곤두섰다. 더구나 전신에서 방사되는 살기는 그 기운만으로도 몸을 갈가리 찢어 버리는 것 같았다.

 “흐흐, 난 미요스의 사자! 죄질이 극히 나빠 이 세상에 살려 둘 가치가 없는 것들을 처리하는 일을 하지.”

 럼프 오크 방어구를 입은 하룬에게서 짙은 어둠의 포스가 흘러나왔다. 두려움에 잠식된 사람들의 심혼이 마치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사, 살려 주시오.”

 용병대장이 벌벌 떨었다. 그나마 하룬의 살기를 겨우 감당하는 그였다.

 “저 이방인들이 시켜서 할 수 없이 했을 뿐입니다.”

 잠시 눈알을 굴리던 그의 입에서 나온 변명에 하룬은 감당하기 힘든 섬뜩한 시선을 유저들에게 돌렸다.

 “아, 아니다.”

 “우린 저놈들이 좋은 구경거리를 보여 준다고 해서 온 것뿐이라고.”

 “우리 혜성 길드에서 알면 넌 죽은 목숨이야. 좋은 말할 때 우릴 풀어줘. 우린 신탁으로 존재를 인정받았다고. 우리를 죽이면 넌 네 신에게 불경을 저지르는 거라고.”

 제법 레벨이 되는지 하룬의 살기를 힘겹게나마 감당하는 유저들은 변명을 하거나 개중에는 신을 들먹여 협박까지 하고 있었다.

 하룬은 으스스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 재미있는 생각이 난 것이다.

 생각해 보니 이 비욘드 세계의 평민들과 농노들은 신탁에 의해 존재를 인정받은 이방인들에 대해 강한 외경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유저들이야 다른 게임에서처럼 NPC들로 취급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걸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비욘드의 신들은 아마도 인공지능 컴퓨터들일 테니 이방인들의 행동을 제어할 리가 없다. 미약하지만 자신의 힘으로라도 그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하룬은 으스스한 웃음을 흘렸다.

 “미요스의 의지며 어둠의 주재자인 나 죽음의 사자는 공포와 절망에 질린 작고 가여운 종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내 종들로 하여금 고통과 절망의 심연에 들게 한 벌레 같은 놈들을 두고 볼 수 없다. 미요스의 율법을 어긴 이들에게 처참한 죽음을 내리겠다!”

 미요스가 어떤 신인지는 모르지만 하룬은 분명히 들었다. 두려움에 질식된 농노의 어린 딸이 떨면서 하던 간절한 기도가 들렸던 것이다.

 -미요스시여, 이 어린 다에몬이 간절하게 비옵니다. 절 이 지옥에서 구해 주세요!

 소녀는 옷이 찢겨 덜 성숙한 알몸을 드러내면서도 눈물을 흘리며 몇 번이고 그 기도를 반복했던 것이다.

 “너희들의 영혼은 미요스의 깊은 곳, 어둠과 유황불이 이글거리는 곳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리라.”

 -라이피, 저들의 몸에 소일 스피어를 박아. 되도록 천천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후후후, 그러지.

 “끄아아악!”

 “아아악!”

 “살려 줘!”

 “제발! 살려 줘요!”

 사방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흙으로 만들어진 창이 육신 곳곳을 파고들자 유저들과 용병들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이들 중 죄를 지은 자들의 입은 닫힐 것이다!”

 하룬의 입에서 낮지만 묘한 운율을 가진 저주가 흘러나오자 대지가 한 번 요동을 치더니 그들의 입까지 아래로 끌어내렸다. 더 이상 비명은 들려오지 않았다. 간신히 숨을 쉴 수 있도록 코 바로 아래까지 흙 속에 빠져든 상태였다.

 혼절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몸을 꿰뚫은 대지의 창을 통해 피를 조금씩 쏟아 내고 있는 용병들과 유저들의 눈에서 조금씩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무나 강렬한 고통과 비명도 지를 수 없는 상황에서 힘을 주다 보니 눈 주위의 모세혈관들이 터져 버린 것이다.

 -라이피, 저놈들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 수 있을까?

 -며칠 정도라면 가능하지.

 -아니야. 그냥 죽이자.

 생각 같아서는 며칠 동안 고통을 더 느끼게 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너무 잔인한 것 같아 생각을 바꾸었다. 하룬은 코 위쪽을 간신히 드러낸 채 고통에 일그러진 용병들의 얼굴을 하나씩 쳐다보며 말했다.

 “미요스의 권능으로 말하노니 너희들은 영원히 지옥의 유황불에 빠지리라. 아무리 낮은 신분이라 해도 너희와 똑같이 미요스의 자녀를 잔혹하게 다룬 죄인들은 더 이상 죄업을 쌓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들의 눈에서는 후회와 간절함이 녹아든 피눈물이 흐르고 눈동자는 두려움에 질려 불안하게 돌아갔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하룬의 시선은 냉혹하기만 했다.

 “가라!”

 그 말과 함께 삽시간에 그들의 남은 머리통이 흙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무런 비명도 남기지 못한 채로 그들을 삼킨 바닥은 곧 단단하게 굳었다.

 그 광경을 보는 유저들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파르스름한 전기가 흐르는 뿔 세 개가 솟은 투구를 쓴 하룬의 붉은 눈이 공포에 질린 유저들을 향했다.

 “다른 세계까지 와서 악업을 저지른 너희 이방인들은 이 세계의 모든 신들과의 계약을 어긴 죄로 죽음을 피하지 못하리라. 다시 한 번 이 세계에서 이런 비열하고 더러운 짓을 저지른다면 환생마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명심해라, 이방인들이여! 너희들은 이 세계의 손님들일 뿐, 이 세계가 너희들의 더러운 욕망을 충족시키는 놀이커가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유저들의 일그러진 눈은 고통 속에서도 공포로 하얗게 물들고 있었다. 다시 태어나지 못한다는 말은 부활이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다른 계정으로 접속하는 것을 뜻하는 환생마저 거부당한다는 말은 단순한 위협으로 들리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유저들의 머리가 천천히 땅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눈과 이마까지 흙 속에 잠긴 유저들은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몇 가지 아이템이 떨어져 있었다.

 그것들을 챙기던 하룬의 눈빛이 한 아이템을 보며 번득였다. 그것은 바로 헤어밴드형 캠이었다. 아마도 이 모든 장면이 생생하게 찍혔을 것이다. 행여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보면 귀찮아질 것이다.

 아이템들을 모두 챙긴 하룬은 불이 붙어 있는 장작을 들었다. 그 장작을 한 벽에 던지자 금세 일어난 화염이 나무와 밀짚으로 만든 건물을 활활 불태우기 시작했다.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는 하룬의 옆구리에는 이미 기절한 농노 소녀의 가녀린 몸이 끼워져 있었다.

 그날 밤 하룬은 인근 세 마을과 백작성까지 다녀왔다. 그 무시무시한 럼프 오크 방어구를 착용한 상태로 새벽까지 돌아다닌 것이다.

 숙소로 돌아온 하룬의 방어구에는 핏물이 흥건했다. 방어구를 벗고 나자 흥분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자신이 밤새 벌였던 끔찍한 살육이 떠올랐다.

 “너무 흥분해서 그런가? 비록 죽일 놈들을 죽였지만 수백 명을 넘게 죽였는데도 왜 이렇게 마음이 편안한 거지? 거기다가 오늘 밤은 마치 빙의라도 된 것처럼 내 몸과 마음이 평소와는 달랐던 거 같아.”

 이상하게 또렷하게 생각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평소의 자신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벌인 것은 기억났다. 하지만 하룬은 자신이 밤새도록 돌아다니며 벌인 일에 대해서 후회는 하지 않았다.

 다만 돌아다니며 못된 놈들을 잔인하게 징치할 때는 너무 흥분한 상태라 잘 의식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손 속이 너무 잔인했고 과격했던 것과 기사가 낀 NPC들까지 쉽게 처리했던 능력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룬은 나이아를 소환해 방어구들을 씻으며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내가 벨 때문에 너무 흥분했었나 보다. 혹시 버서커 상태에 빠졌던 것은 아닐까?’

 그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요른 성에서 대지의 신 ‘미요스’의 사자가 현신하여 농노나 평민의 딸을 납치하여 창녀로 만들어 팔아먹는 짐승들과 관음증으로 성욕을 풀던 이방인들을 징치한 이래, 테론 제국에서는 귀족들은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무려 칠백만이 넘는 이방인들이 이 세계로 넘어왔다. 그들은 테론 제국인들과는 달리 일정한 기간만 머무를 뿐이지만, 그들 대부분은 제국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유저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직업인 검사부터 시작해서 상인 계열과 장인들과 같은 생산직 계열 그리고 가장 소수인 마법사에 이르기까지, 이방인들의 제국 진출은 그야말로 마른 밭에 들어온 물줄기처럼 제국 전역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이미 이방인들의 출현으로 인해 상거래가 활발해진 터라 농업 위주의 1차 산업에서 많은 평민들이 상업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비록 6개월여의 짧은 기간이지만 그동안 대장장이나 가죽장인들을 비롯한 전문직 평민들은 이방인들로 인해 엄청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벌어들인 돈을 자본으로 삼아 대량생산을 시도했고, 끊임없이 유입되는 이방인들의 수요로 인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유저들이 접속하는 포인트를 중심으로 많은 자영농들과 평민들이 돈이라는 새로운 가치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혀물 거래가 주였고, 그나마 수익의 대부분은 귀족들과 몇몇 거대 상인들에게 빼앗겼지만 이제는 달랐다.

 유저들에게 소문난 대장간의 경우는 해당 영주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경우까지도 발생했다. 상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돈이 있는 평민들이 늘어나자 그들의 수익은 점차 늘어 갔고, 굳이 귀족과 결탁하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은 바야흐로 농업이 아니라 상업이 주가 되는 시대로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시장경제에 눈을 뜬 평민들은 이전과는 달라졌다. 영주에게 무조건 굴종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아를 실현하려는 욕구가 강해졌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귀족들이 보유한 무력은 어쩔 수가 없었다. 수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을 거느린 영주에게 반항하는 것은 아직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신이 내린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사태가 바뀌었다.

 자신들 역시 돌보는 신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농노들과 평민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믿음의 대상으로 숭배되는 미요스 신이었다.

 귀족들이 주로 섬기는 전쟁의 신이나 순백의 신처럼 크고 화려한 신전은 없지만, 오랜 기간 동안 땅을 근간으로 입에 풀칠을 하며 간신히 생명을 이어온 일반 평민들과 농노들이 믿는 대지의 신이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이 드디어 사자를 보낸 것이다. 비록 악마처럼 무시무시한 사자지만 진짜 악마들을 가차없이 대지 깊은 곳에 묻어 버린 그들만의 사자였다. 평민들과 농노들 사이로 이 사자의 이야기는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비록 황제나 귀족들이 신이 내린 사람이라지만 자신들 역시 돌보는 신이 있는 것이다.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하고 귀족의 무조건적인 권위를 부정하는 시야가 열린 이들의 움직임은 소리 없이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몇십 년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강제 징집과 공포와 살육이 자행되는 비극적인 전쟁. 죽거나 불구가 되어 버린 식구들과 이웃.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 가도 귀족들이 섬기는 신전은 그들을 돌보아 주지 않았다. 통곡과 오열을 반복했던 1,000년의 고통.

 평민들과 농노들이 생각하는 골든 배틀은 그것이 상의 의미는 없었다.

 골든 배틀 덕분에 내전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황가나 원로원뿐이었다. 이 땅의 또 다른 주인들은 이제 자신들의 주인 의식을 서서히 고양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앞서 나가는 이들은 길드를 구성한 전문직 평민들과 상인들 그리고 용병들이었다. 그들은 좀 더 유연하고 발전한 문명 세상에서 온 이방인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던 것이다.

 코원 유니온의 S구역 모처.

 혜련은 아침 일찍 ‘지적관리국’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상 2층, 지하 1층의 작은 건물에 도착했다.

 지적관리국은 원래는 토지에 지번을 부여하고 그 내용에 대해 조사 기록하는 행정 관서지만, 이제는 배리어로 인해서 토지 대신에 신축과 멸실되는 건물의 변화 그리고 거리에 대한 조사 등록 업무를 처리하는 별 볼일 없는 부서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선 혜련은 탈의실이라고 쓰인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자신의 역할을 대행할 로봇의 목덜미에 있는 액팅 버튼을 눌렀다. 그녀의 체형과 똑같이 제작된 로봇은 그녀의 걸음을 흉내 내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언제 봐도 나랑 똑같단 말이야.’

 쓴웃음을 지은 혜련은 탈의실 한쪽 벽면에 있는 대형 그림의 한쪽을 눌렀다. 벽이 소리 없이 움직이더니 아래로 향하는 엘리베이터가 나타났다.

 그녀가 누른 층은 지하 114층.

 다른 층에는 어떤 부서가 있는지 모르지만 그녀가 누른 지하 114층을 비롯한 열 개 층은 현재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게임 ‘비욘드’를 연구하는 팀들이 쓰는 연구실이다.

 즉, 이 건물 자체가 넥컴월사의 소유며 듣기로는 스무 개가 넘는 위장 관서의 지하가 전부 넥컴월의 연구 시설이라고 했다. 물론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도 20곳이나 되는 그 관청에 설치되어 있을 것이다.

 ‘어, 오늘 무슨 일이 있나?’

 언제나 경험하는 약간의 어지러움과 불쾌감 때문에 잠시 눈을 감았던 혜련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복도 이곳저곳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연구원들의 모습에 눈을 치켜떴다.

 휴가로 일주일 만에 출근한 그녀는 그들의 모습에서 뭔가 뒤숭숭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하지만 연구원들은 늘 그렇듯 개미처럼 작게 대화하는 법에 익숙해서 그 곁을 스쳐 가면서도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그 층에는 네 개의 연구팀이 같이 근무를 하고 있는데 그녀가 속한 연구팀은 가장 안쪽의 이너 섹션을 사용하고 있었다. 섹션 게이트에 도착한 혜련은 정문에서 확인했던 대로 다시 홍채와 유전자 스캔으로 신분 확인을 하고 나서 열린 게이트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커피 한 잔을 자동 기계에서 빼 든 혜련은 곧장 휴게실로 향했다. 일주일간의 휴가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수다가 특기인 다랑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직 업무가 시작하려면 30분이나 남았기에 출근한 연구원들은 몇 명 없었다.

 “혜련! 어서 오게.”

 “황 박사님.”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반기는 백발의 황 박사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황 박사는 컴퓨터 인공지능을 전공하고, 실제로 종말 시대 말에 만들어진 인공지능 컴퓨터를 복원하는 데 평생을 바친 석학으로 3년 전에 은퇴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말부터 은밀하게 넥컴월 비욘드 팀에 합류해서 현재 수석 연구원을 맡고 있었다.

 “자네, 혹시 들었나?”

 “네? 뭘요?”

 과연 무슨 일이 있긴 했다. 안 그래도 회사 분위기가 이상해서 황 박사에게 물으려던 참이었다.

 “자네도 몰랐군.”

 황 박사의 말에 혜련은 영문을 몰라 크고 맑은 눈만 끔벅거렸다.

 “실은 어제 비욘드에서 아주 특이한 살인 사건 하나가 발생했네. 사안이 심각해서 어제 GM 전체 비상 회의까지 소집되었다고 들었네.”

 다른 게임처럼 GM이 게임을 통제하거나 모니터링을 할 권한이 없는 비욘드 때문에 수많은 GM들이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실제로 게임을 하면서 정보를 얻어야 했다. 하지만 아직 전체 비상 회의까지 소집된 적은 없다고 들었다.

 사안이 중대한 모양이지만 그 이유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비상 회의까지 소집될 정도의 살인 사건이라고요? 하지만 그런 사건은 늘 있는 거 아닌가요?”

 잔뜩 기대한 혜련은 맥 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지. NPC 주민 간은 물론 유저들 간에도 그런 사건이야 늘 일어나지. 뭐, 요즘은 비욘드 주민들과 유저들 간에도 심심치 않게 PK가 일어나니까. 하지만 이번 일은 좀 다르네. 소위 비욘드 세계에 존재하는 자칭 ‘신의 대리인’이 직접 현신해서 저지른 것이니까.”

 “네? 정말요?”

 비욘드 세계의 신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주 연구 분야인 혜련의 눈이 반짝였다.

 “어제 테론 제국의 한 곳에서 미요스의 사자使者를 자칭하는 존재가 나타났다는군.”

 “미요스라면 대지의 여신인데요.”

 미요스는 따로 신전은 없지만 하층민들이 광범위하게 믿는 대지와 풍요 그리고 자애의 여신이었다. 특이한 것은 그 여신이 사후 세계 중 지옥을 관장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미요스의 신성력을 받은 사제는 비욘드의 역사에서 아직 출현한 적이 없었다.

 “그래, 나도 GM 팀으로부터 그렇게 들었네. 사건의 개요는 신의 사자가 나타나 농노나 평민 여자아이를 납치해서 강간하고 폭행한 비욘드 주민들과 그 광경을 보며 변태적인 성욕을 채우던 유저들을 학살했다네. 그 신의 사자는 대지의 힘을 사용했는데, 죄지은 자들을 흙 속에 산 채로 매장해 버렸다고 하네. 하룻밤 사이에 한 백작성과 그 인근 지역에서 그런 짓을 즐기던 유저 사백여 명과 그 일에 연관된 주민 천여 명이 땅속 깊이 생매장되었네.”

 “…….”

 혜련은 너무나 놀라 들고 있던 커피를 떨어뜨릴 뻔했다.

 “생매장당한 무리들 중에는 뒷돈을 받고 그들을 비호한 기사들과 적극 가담한 용병들, 혹은 어둠의 실력자들도 다수 있었던 모양이야. 유저들 중에도 하이 랭커가 세 명이나 끼어 있었고.”

 “그럼 정말 신의 사자란 말인가요?”

 혜련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아는 한 기사들을 비롯해서 실력자들이 섞인 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쉽게 대량 학살할 수 있는 존재는 아직 없네. 물론 테론 제국에 존재하는 소드 마스터들이거나 8서클 대마법사들이라면 그 정도는 하룻밤에 처리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흙 속에 생매장할 수는 없겠지. 능력이 다르니까.”

 “그럼 진짜 신의 사자일 수도 있다는 건가요?”

 “지금 우리가 가진 정보로는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 사망한 유저들이 기억하는 외모도 전설로 알려진 신의 사자와 비슷하네. 머리 위로 솟은 세 개의 뿔과 뿔 사이를 흐르는 푸른 전격, 활활 불타는 공포의 붉은 눈, 주문도 없이 그냥 말로만 그들을 흙 속에 매장시킨 능력 등으로 보아 죄지은 자들을 지하 세계 깊숙한 곳에 있는 지옥으로 데려간다는 죽음의 사자일 가능성이 높네.”

 잔뜩 흥분한 황 박사의 말이지만 혜련은 쉽게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비욘드가 신탁이 통하는 세상이라지만 이런 일은 진짜가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종말 시대까지 인간의 역사를 보면 종교를 기반으로 하는 사기 사건들이 무수히 많았던 것이다.

 또한 이 세계에 존재하는 존재들 중에도 그런 능력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숲의 종족이라고 알려진 엘프들이었다.

 “그런 일은 대지 속성의 정령 마법사라면 가능한 일일 텐데요. 사건을 직접 보지는 못해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 정도라면 상급이나 최상급의 정령사들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마법 종족이라는 엘프들이 존재하는 세상이잖아요.”

 그녀의 말에 황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가 현재까지 알아낸 지식으로는 비욘드의 세상에서 아직 그 정도 능력을 가진 정령 마법사는 출현하지 않았네. 또 그 정도 정령 마법을 익혔을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존재들인 엘프들은 그동안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인간의 일에는 절대로 관여하지 않았다는 점도 다른 근거가 되고 있지.”

 “하긴 알려진 바로는 엘프들 중에도 그 정도의 정령 마법을 익힌 존재들은 거주지를 떠나지 않는 하이 엘프들밖에는 없으니 그렇긴 하네요.”

 그녀를 비롯한 일단의 연구진들이 그동안 조사해 온 사안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는 이번 사건은 실로 중대한 의미를 지녔다.

 그녀를 포함한 수십 명의 연구진들은 넥컴월의 비욘드 팀에 소속되어 한 가지 조사 연구를 은밀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그것은 비욘드라는 세계가 진짜 가상현실인지 아니면 또 다른 현실인지를 파악하는 일이다.

 그것은 애초에 휴먼들이 게임의 개발 단계부터 완전하게 배제가 되었고, 서비스를 시작한 이래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사실들이 유저들의 경험을 통해 표면화된 후에 은밀하게 시도되었다.

 아무리 마더컴이 주도하고 사막에 묻혀 있던 수백 대의 슈퍼컴들이 능력을 모아 만든 게임이라고는 하더라도, NPC들의 행동 양식이나 유구한 역사 그리고 수시로 발생하는 사건의 의외성은 프로그램화되었다고 믿기 어려웠던 것이다.

 정형화되지 않은 NPC들의 행동 양식은 물론 그들의 지능과 문화 수준이 휴먼들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진 문화유산, 책이나 유물 등은 그 깊이는 물론 종류가 너무 다양해서 만들어낸 현실이라고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신에 대한 다양한 전설과 역사는 물론이고 신의 존재에 대한 토론집과 신성력에 대한 논문에 이르기까지, 깊이 있는 연구 자료는 너무나 많았다.

 너무나 생생한 가상현실이기에 게임 개발을 해 본 연구원들까지 혀를 내두를 정도인 것이다.

 그래서 유저들은 진짜 판타지 세계를 경험하는 것 같아 열광하지만, 지구에 존재하는 대다수 유니온들의 투자로 만들어진 전 지구적 기업인 넥컴월은 정작 그 점에 의심을 품었다.

 “그럼 우리 생각대로 정말 NPC들이 다른 차원이나 다른 행성에 거주하는 휴먼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건가요? 그 얘기는 비욘드가 컴퓨터들이 만들어 낸 가상 세계가 아니라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는 또 다른 현실 세계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네요?”

 “현재까지 우리 팀이 조사해 온 결과와 이번 일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황 박사의 말에 혜련은 순간 공황에 빠졌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늘 의심했으면서도 막상 그것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지자 그 어떤 생각도 떠올릴 수 없었다.

 “일단 연구원들이 모두 모이면 이 일에 대해서 심도 있게 의논을 해 보자고. 기후에 대한 조사를 맡은 팀도 있고, 천체에 대한 조사를 하는 팀도 있으니까 말이야. 여러 팀의 연구 결과를 취합해 보면 어느 정도 실마리가 잡힐 거야.”

 “네. 그런데 왜 게임을 개발한 회사에서 이 일을 그렇게 중요시하는 거지요?”

 황 박사는 혜란의 질문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 연구를 책임지고 있는 자신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깊이 알지 못했다. 자신 역시 이런 조사를 시키는 회사의 의도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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