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반 부녀와의 동행》
오랜만에 하는 수련이고 수련 효과는 최고였지만 마음만큼 오래 할 수는 없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 안개비처럼 내리던 비는 시간이 갈수록 굵어지기 시작했다. 금방 뿌연 우연雨煙이 자욱하게 깔렸다.
여관으로 돌아온 하룬은 온천으로 가서 땀에 젖은 몸을 닦고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아반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촌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쉬었나?”
“네. 온천의 효능이 꽤 좋은 것 같습니다.”
“하하하! 우리 마을의 자랑일세. 수량이 많지 않고 이곳이 궁벽한 곳이라 사람들을 끌어들일 정도는 아니지만, 마을 사람들의 건강을 지키는 데에는 꽤 일조를 하고 있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겔란이 아침 식사를 준비해 왔다. 아마도 아침 메뉴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았다. 하룬은 어제만 해도 가벼운 몸놀림으로 장난꾸러기 같던 겔란의 얼굴이 이상하게 가라앉아 있는 것이 조금 이상했지만 가볍게 넘겼다.
“같이 좀 드시죠?”
“아니네. 난 늙어서 그런지 새벽이면 눈이 떠져 아침을 일찍 먹는다네. 많이 드시게. 참, 셀라진 대금에 대해 마을 사람들과 의논을 했네.”
하룬은 이야기를 들으며 야채 수프를 스푼으로 떠먹었다. 진하 ㄴ야채 향과 함께 굵직한 야채 조각이 씹히는 것이 상당히 맛이 좋았다.
“우리 같이 궁벽한 산골에 사는 약초꾼들은 주로 생필품으로 약초 대금을 받는 터라 자네에게 줄 대금이 한참 모자라네. 그래서 의논을 했는데 이것과 우리 마을 비전으로 만든 약차로 대금을 치르면 어떨까 싶네.”
촌장은 손바닥 크기의 주머니 하나를 품에서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뭡니까?”
가츠로 인해 인연을 맺은 약초꾼들에게 큰돈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사실 그는 약초의 가치도 모르는 상황이라 알아서 주는 대로 받을 생각이었다.
“우리도 잘 모르네. 우리 마을이 생긴 지는 1,000년이 넘었는데 대대로 약초를 채취해서 살아왔네. 우리 조상들은 그 험하다는 후크란 산맥은 물론이고 서쪽의 화산 지대나 북쪽에 있는 고요의 땅 그리고 루프 산맥까지도 원정을 가서 귀한 약초를 캐 왔지. 이것들은 그렇게 험준하고 인적이 없는 곳을 다니며 약초를 캐다가 발견한 돌들이네. 간혹 마을을 찾아오는 상인들에게 보여도 봤지만 우리가 기대했던 마나석이나 귀한 광석은 아니라고 하더군. 하지만 각 돌들은 전기를 띠거나 따듯하고 서늘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 팔지 않고 대대로 촌장이 보관을 해 왔지. 귀한 것은 아니지만 크기도 그렇고 소장해서 가끔 보고 즐기기는 좋은 물건이네.”
하룬이 주머니를 뒤집어 탁자 위에 내용물을 꺼내보니 조약돌 크기의 돌이 다섯 개가 나왔다. 여러 색깔이 혼합되어 혼탁해 보이는 색감이나 크기로 보아 촌장의 말대로 귀중품은 아닌 것 같았다.
하룬은 그중 하나를 들어 보았다.
‘흑!’
벼락처럼 전신에 강력한 전기가 흘렀다. 전신 세포가 일제히 깨어나 활동하는 듯 기이한 자극이 느껴졌다. 하지만 전기와는 분명히 다른 힘이었다.
‘이건?’
촌장의 말대로 마나석은 분명 아니었다. 마나석이라면 그의 마나와 어떤 식으로든 공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다른 어떤 힘이 잠재해 있엇다. 하룬은 다른 돌을 들어 보았다.
휘이익!
강력한 바람이 돌로부터 몸 안으로 불어 들어왔다. 마치 폭풍 같은 기세로 전신 구석구석으로 부는 바람에 세포 하나하나가 날아갈 듯했다. 돌을 내려놓자 언제 그랬냐는 듯 몸 안의 바람은 잦아들었다.
차례로 돌들을 들어 본 하룬은 이것들이 최소한 마나석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 번째 돌은 뜨거운 불의 성질을, 네 번째는 서늘한 물의 성질을 그리고 다섯 번째 돌은 대지의 성질을 품고 있었다.
‘혹시 정령석일까?’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마나와는 다른 힘이라면 정령력 외에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만약 정령석이라면 정령사인 그에게는 미스릴 이상의 가치를 가진 아이템이 될 것이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자신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셀라진보다는 나을 것이다. 최소한 장식품을 될 테니까 말이다.
빨리 아이템을 감정하고 싶지만 촌장이 지켜보니 조급한 마음을 애써 눌렀다.
“뭔지는 몰라도 귀한 물건 같네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래서 그것과 약차로 셀라진 대금을 대신했으면 하네만, 괜찮겠나?”
하룬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셀라진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 모르지만 자신에게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돌들 역시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 모르지만 이런 산골의 약초꾼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물건은 아닐 것이다.
“내심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이네. 좋은 거래를 하게 되어서 기쁘네.”
“저야말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귀한 물건으로 밝혀지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허허허! 물건이라는 것은 필요한 사람에게 진짜 가치가 있는 법일세. 혹시 그 물건이 마나석의 백배 가치가 있다는 정령석이라고 해도 우리 같은 약초꾼들에겐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물건이지. 내가 보기에는 자네야말로 한 배낭의 셀라진 대신 이 돌들을 받은 것을 후회할 가능성이 더 높네.”
“맞는 말씀이네요.”
하룬은 촌장의 말에 동의했다. 희귀한 미스릴이나 황금이라도 모두에게 다 귀중한 것은 아니다.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황금보다 같은 양의 곡식이 더 필요한 법이니까.
“잠시 식사를 하고 있게나. 난 나가서 마저 일 처리 좀 하고 들어와 차를 끓여 주지. 약차들은 지금 마을 사람들이 한창 포장하고 있을 거야. 식사를 한 후에 우리 마을 비전의 약초 차를 대접하지.”
“네, 알겠습니다.”
촌장이 나간 후 하룬은 다섯 개의 돌돌을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고 마저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비록 하얗고 부드러운 밀 빵에 비해 거친 질감의 딱딱하게 굳은 호밀 빵이지만 고기 스튜와 함께 먹으니 정말 맛이 좋았다.
하룬은 촌장이 준 돌에 대한 호기심까지 잊을 정도로 식사에 집중했다. 음식의 맛과 풍미를 이렇게 즐긴 것은 처음이었다. 아침 식사를 이렇게 맛있게 한 것은 현실에서도 거의 없던 일이라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촌장은 하룬이 여유 있게 식사를 막 마쳤을 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주방에서 나온 그의 손에는 약초를 달인 듯 강한 약향이 흘러나오는 토기 그릇이 들려 있었다. 아마 손수 끓인 거 같았다.
겔란에게 부탁해 질그릇에 차를 따른 촌장이 그에게 마시기를 권했다.
“흐읍!”
차를 한 모급 마신 하룬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엄청나게 썼던 것이다. 저도 모르게 오만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내 그의 눈에는 묘한 빛이 떠올랐다.
쓴맛에 이어 달고 맵고 짜고 신맛이 연이어 느껴졌던 것이다. 특히 마지막의 신맛은 상큼하면서도 입안을 개운하게 만들 뿐 아니라 다 마시고 난 다음에는 머리까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하하하!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을 약초꾼들이 산행을 가면 즐겨 마시는 오미차五味茶라네. 다섯 가지 맛을 대표하는 약초를 적절한 비율로 넣고 끓인 것이지.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풀어주고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물론 머리까지 맑은 상태로 유지시켜 준다네.”
“대단하네요.”
촌장은 엄지손가락을 들어 약차가 얼마나 뛰어난 효능을 가졌는지 말해 주었다.
“워낙 귀한 약초들만 들어가는 바람에 따로 팔 정도의 수량은 만들 수 없지만, 귀한 손님들에게는 반드시 대접하는 약차일세.”
그러면서 촌장은 한 바구니의 약차를 내밀었다. 1회분으로 만든 듯 종이로 잘 포장된 약차가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잘 마시겠습니다.”
하룬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촌장은 쑥스러운 기색이지만 만족한 얼굴로 마주 인사를 했다.
“이런 물건으로 그 귀한 셀라진을 얻었으니 정말 우리에게는 좋은 거래였네. 고맙네.”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귀한 약차를 얻어 입이 호사를 누리게 되었으니 좋은 거래였습니다.”
하룬과 촌장은 다시 자리에 앉아 약차를 즐겼다. 향기만으로도 몸이 상쾌해지는 것 같아 본능적으로 아껴 마실 정도였다. 그렇게 느긋하게 작은 창밖으로 쏟아지는 비를 완상하며 차를 즐기던 하룬은 촌장이 아직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의 시선을 느낀 촌장이 조금 미적거리다가 새로운 용건을 꺼냈다.
“혹시 일엽초를 알고 있나?”
“일엽초요?”
하룬은 가츠 노인의 지하실에서 보았던 약초학 서적에서 읽은 일엽초에 대한 내용을 떠올렸다.
“네. 셀라진처럼 각종 염증과 암에 좋은 약초라고 알고 있습니다.”
“역시! 자네가 약초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줄은 짐작하고 있었네.”
잠시 뜸을 들인 촌장이 본격적인 용건을 꺼냈다.
“사실은 일엽초가 좀 필요하네. 다행히 자네 때문에 쉽게 구한 셀라진도 그렇지만, 다른 문제가 있어 다들 곤란해 하고 있었네. 셀라진처럼 강력한 항암 효과를 지닌 일엽초를 구해야 하는데 그놈 역시 습기가 많은 고목이나 바위에 붙어 자라네. 근데 곤란한 것이, 그 약초가 대규모로 자생하는 곳이 알라미즈 산 중턱의 블랙 오크 영역이라네. 다른 곳도 있긴 하지만 비가 오면 늪지로 변하는 지역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갈 수가 없네. 남은 선택은 블랙 오크들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방법밖에는 없는데, 우리 약초꾼들의 능력으로는 오크들을 어쩔 수가 없네. 마을에 사냥꾼들이 몇 명 있기는 하지만 그들 정도의 실력이나 숫자로는 어림도 없어, 이렇게 회의를 했지만 특별한 방안이 나오질 않고 있네.”
하룬은 촌장의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셀라진처럼 강력한 항암 효과를 지닌 일엽초는 식물 전체가 한 장의 입으로 구성된 약초로, 포자로 번식하는 양치식물의 일종이다.
여러 곳에 자생하는 약초지만 약초 상인들과의 거래로 인한 기한 때문에 이렇게 고민하는 것이다. 비가 오지 않거나 기한에 여유가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테지만, 이들의 태도를 보아하니 기한이 수삼 일 정도밖에 남지 않은 듯했다.
그 정도야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메신저 워킹이라면 기척 없이 놈들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 재빨리 약초만 채집하고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비가 오면 털이 많은 오크들도 밖에 나오기를 꺼릴 테니 말이다.
“마침 저도 알라미즈 봉을 넘어 요른 쪽으로 이동하려던 참입니다. 가는 길에 일엽초를 구해서 전해 드리지요.”
“정말인가? 허허허! 정말 고맙네. 자네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비가 오는데 정말 출발할 건가?”
“네. 시간을 다투는 일이 있어 비가 오더라도 출발해야 합니다.”
“이런!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상인 일행과 동행을 해도 될 것을.”
하룬은 촌장의 말에 아반 부녀 일행이 일찍 요른 성으로 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무슨 일로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악천후에 그곳으로 향했을까?
“자네의 실력이라면 굳이 우리 마을 사냥꾼들이 안내를 하지 않아도 알라미즈 산을 쉽게 넘을 수 있을 텐데.”
촌장은 악천후에 안내를 맡아 위험한 알라미즈 산으로 출발한 마을 사냥꾼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하룬이 공포의 땅이라는 후크란 산맥을 타고 이곳까지 오며 험악한 절벽까지 올라가 셀라진을 채취할 정도로 산길을 잘 알고, 무력 또한 뛰어난 인물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골치 아픈 인간들이군. 왜 하필 이런 날에…….’
행색으로 보아 대단한 신분인 것 같은데, 달랑 미모의 수행원 하나만 대동하고 이곳까지 온 것도 그렇고 이런 악천후에 알라미즈 산을 넘으려는 것도 수상하기 짝이 없다.
식사하기 전 방에서 가야 할 루트를 한 번 더 살펴본 하룬은 알라미즈 산이 상당히 험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블랙 오크의 영역이라는 중턱까지는 비교적 오름세가 완만하지만, 중턱에서부터는 경사각이 30도에서 40도를 넘나드는 급경사의 암반 지대인 것이다.
더구나 후크란 산맥의 북쪽에서 알라미즈 산까지는 와이번의 영역이다.
“내 너무 위험해서 말렸지만 길을 안내하는 대가로 1인당 100골드를 제시하자 마을의 젊은 친구들이 모두 달라붙었네. 여기 주인 알프까지 나섰지.”
‘빌어먹을!’
이런 산골에서 100골드라면 엄청난 거금이다. 오크 워리어 두 마리는 잡아야 벌 수 있는 돈인 것이다. 몇 달 동안 약초를 캐서 벌 수 있는 돈을 한 번에 벌 수 있는 일이니 사람들의 눈이 뒤집혔을 것이다.
“아저씨! 아저씨가 가 주세요. 촌장님이랑 어른들 말하는 걸 들었는데 아저씨는 무척 강한 분이래요. 아저씨가 가서 우리 아빠를 데려와 주세요. 거긴 너무…… 무서운 곳이에요.”
언제 왔는지 겔란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로 하룬에게 부탁을 했다. 겔란의 뒤에서 여주인인 이프란이 눈이 퉁퉁 부은 얼굴로 주방에서 나와 탁자로 다가왔다.
“이제까지 우리 마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죽은 것이 알라미즈 산이에요. 블랙 오크들도 그렇지만 귀한 약초들과 사냥감들이 많은 산 동쪽에는 악마 오크들이 살고 있어요. 제발 용사님이 우리 남편과 다른 사람들을 말려 주세요. 그곳은 악마의 땅이에요.”
“그래 주시게. 비가 와 오크들을 피할 수 있다고 해도 넘기에는 너무 높고 험준한 산일세. 아무리 100골드가 큰돈이라지만 목숨만큼 귀중한 것은 아닌데, 젊은 혈기에 그들의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네. 그대라면 가능할 걸세. 빠른 걸음으로 간다면 이제 출발한 지 한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내 그곳 지리에 밝은 약초꾼 두엇을 붙여 줄 테니 그들을 돌려보내 주게.”
촌장까지 나섰다. 비록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긴 하지만 어차피 갈 길이고 이렇게 간곡하게 부탁을 하니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제 말을 들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짐부터 챙겨 내려오죠.”
하룬은 급하게 2층으로 올라가 짐을 정리했다. 이미 타우스트 성에서 모든 필요한 것들을 다 구입한 터라 이곳에서 구입할 것은 없었다. 받은 약차를 마법 배낭에 넣은 하룬은 품 안에서 촌장에게 받은 돌을 꺼내 정보를 확인했다.
『원소석
등급: ?
지형적인 영향으로 특별한 성질을 가진 마나나 정령력이 모여드는 곳에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형성된 원소석이다. 원소석은 다른 마나석이나 정령석처럼 모든 성질이 혼재된 마나나 정령력이 담긴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성질을 가진 순수한 마나와 정령력이 특수한 돌에 모여들어 만들어졌다. 몸에 지닌 채 그 속성에 맞는 마법이나 정령 마법을 익히면 큰 효과를 볼 수 있으며, 원소석이 품고 있는 마나와 정령력이 소진되면 평범한 돌로 변해 버린다.』
‘뜻박에 엄청난 아이템을 건졌구나!’
가슴이 뛰었다. 한 돌에 마나와 정령력이 동시에 들어 있는 원소석은 그에게는 안성맞춤의 아이템인 것이다. 사용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수련에 큰 효과를 준다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
하룬은 원소석들을 아공간에 잘 넣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촌장은 언제 가지고 왔는지 호밀짚으로 만든 우의를 들고 있었다. 우의는 삼각형의 모자와 어깨부터 허벅지까지 오는 것으로 비가 안으로 스며들지 않고 아래로 미끄러지도록 잘 만들어져 있었다.
하룬은 사양하지 않고 촌장이 주는 우의를 입었다. 비록 아이언 스네이크 방어구가 방수 효과가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 사이 우의를 입은 두 약초꾼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것은 가시면서 드시라고 준비한 거예요.”
이프란이 내미는 것은 작은 배낭이었다. 주둥이를 열어 보니 얇은 나무로 만든 도시락 몇 개가 양가죽으로 만든 물주머니와 함께 들어 있었다. 비가 오면 그저 이동하면서 내리는 비를 물 삼아 육포나 씹을 생각이었는데 음식 솜씨가 좋은 이프란이 마련한 도시락이니 최상이다.
“감사합니다. 가능하면 주인 양반을 잘 설득해서 돌려보내겠습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혹시라도 고집을 부리면…… 제가 지금 겔란의 동생을 임신하고 있다고 전해 주세요.”
“네에?”
그러고 보니 얼굴이 붉어진 이프란의 배가 조금 불룩한 것 같았다.
“허어! 이런 경사가 있는 줄도 모르고…….”
“저도 일이 바빠 임신한 줄도 몰랐는데 오늘 아침 그이가 떠난 후에 입덧을 시작했어요.”
참 공교로운 일이다. 이런 소식을 알았다면 알프는 쉽게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룬은 촌장이 붙여 준 두 명의 약초꾼과 함께 길을 나섰다. 밖에는 굵은 빗줄기가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어 그들의 모습은 촌장과 이프란 모자의 시야에서 금방 사라졌다.
두드드드!
굵은 빗방울과 함께 뿌연 우연이 피어오르는 길을 걸으며 하룬은 지도책에서 본 알라미즈 산의 정보를 떠올렸다. 해발 2,000미터가 넘는 세 봉우리로 이루어진 알라미즈 산은 후크란 산맥의 북쪽 끝에 해당한다.
산기슭에서 700미터 고지까지는 비교적 산세가 완만하고 강수량이 많아 식생이 풍부한 덕분에 많은 동물들과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다. 진귀한 약초 또한 많이 자라는 곳이다. 이곳은 동쪽 사면을 제외하고는 블랙 오크들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그 위쪽은 급한 경사면과 험준한 암반 지역인 탓에 오르기가 무척 어려웠다. 수목들 역시 토양이 적은 관계로 많지 않아 산양과 사슴 그리고 토끼류가 고작이다. 이곳까지 후크란 북쪽에 서식하는 와이번의 영역이다.
동쪽 사면은 럼프 오크들의 영역이었다. 약초꾼들에게 알려진 럼프 오크들은 영역만 침범하지 않으면 비교적 안전한 몬스터였다. 일반 오크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높은 지능과 강력한 괴력을 가진 럼프 오크들은, 비록 동굴 생활을 하지만 자체적으로 채광과 채굴 그리고 제련을 할 수 있는 고등 몬스터였다.
블랙 오크도 일반 오크인 회색 오크나 갈색 오크에 비하면 한 수 위인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럼프 오크는 차원이 달랐다. 일단 럼프 오크들이 나타나면 블랙 오크들은 영역을 옮길 정도로 두려워한다고 한다.
‘제발 동쪽으로만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요른 성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동쪽 사면을 타는 것이었다. 이런 빗속이라 아마도 위험도가 적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빨리 그들의 뒤를 잡아야 했다.
맞으면 아플 정도로 강하게 내리는 굵은 빗줄기를 뚫고 한 시간여를 걸어 산기슭에 도착했지만 앞서 간 사람들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심하게 내리는 비 때문에 흔적이 말끔하게 지워져 버린 것이다.
‘이대로라면 놓치고 만다.’
메신저 워킹 스킬을 펼쳐야 했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두 약초꾼의 속도는 너무 느렸다. 그들은 하룬을 따라잡느라고 벌써 숨이 찬 모양이지만 말이다.
하룬은 두 약초꾼을 설득해 혼자서 한발 먼저 움직이겠다고 했다. 용병이라고 들었는데 평생 들이며 산을 돌아다닌 자신들보다 더 빠르게 이동하는 하룬에 대해 외경심을 가지게 된 약초꾼들은 선선히 하룬의 말을 따랐다.
‘일단 중턱까지는 외길이니 잘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동쪽 사면을 타고 럼프 오크의 영역을 통과해서 산을 돌아 넘는 길은 중턱에서 시작되니 더욱 서둘러야 했다. 사냥꾼들과 약초꾼들에게 있어서 완만한 경사를 가진 700 고지 정도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다만 상인으로 추측되는 아반 부녀가 산길에 서툴기를 바랄 뿐이다.
메신저 워킹 2단계 스킬을 펼친 하룬의 몸이 마치 새처럼 위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평지가 아니고 오르막이기에 나는 것처럼 빠른 움직임은 아니지만, 그래도 걷는 것에 비해 두세 배 이상 빠른 속도였다.
휙! 휙!
나무며 바위들이 빠르게 자신을 지나치는 것을 느끼며 산을 오르던 하룬은 중간에 쉬지 않고 스킬을 펼쳤다. 빠르게 움직이는 빗줄기의 저항도 커서 어느새 빗물이 우의 안으로 스며들어 몸이 축축했다.
“도망쳐!”
“아악!”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하룬의 몸이 순간적으로 빗줄기를 뚫고 위로 날아올라 갔다. 근처에서 가장 높은 나무 꼭대기로 빠르게 올라간 하룬의 눈에 일단의 사람들이 블랙 오크들에게 쫓기는 것이 들어왔다.
“제기랄!”
무슨 짓을 했기에 이렇게 심하게 내리는 빗속에서 오크들에게 쫓긴단 말인가? 하룬은 나뭇가지를 타고 그들을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마침내 사람들이 확실하게 눈에 들어오는 곳까지 이동한 하룬은 수십 마리의 블랙 오크들에게 쫓겨 도망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알프와 다른 사냥꾼 한 명이 대도를 휘두르고 있었고, 묘라는 아반의 수행인 여자 검사가 검을 휘두르며 놈들의 추격을 막고 있었따.
아반과 샤니 부녀는 가장 앞쪽에서 도망치는 중이었고, 부상을 입은 듯 피를 흘리며 서로를 의지해서 도망치는 사람들이 네 명이나 되었다. 성한 마을 사람들은 넷뿐이었다. 알프와 한 사내가 놈들의 추격을 막고 있었고, 다른 두 사람은 동료들을 부축해서 도망치는 중이었다.
“이놈!”
작은 바위에서 뛰어내린 알프가 휘두른 대도가 한 블랙 오크의 어깨를 베었다. 어깨에서 피를 흘리는 블랙 오크의 눈이 흉흉해졌다. 놈은 상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식하게 큰 도끼를 던져 버렸다.
길고 검은 털이 비에 흠뻑 젖은 놈들의 몰골은 흉광을 토해 내고 있는 안광 때문에 더욱 흉악해 보였다.
채앵!
“큭!”
엄청난 기세로 날아오는 도끼를 대도로 맞받아친 알프의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충격이 강했는지 대도를 힘겹게 들고 있는 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정신없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나는 그의 앞으로 깊이 파인 발자국이 드러났다.
“안 돼!”
또 하나의 도끼가 그런 알프를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본 동료 사냥꾼이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도를 날렸다.
카앙!
다행히도 속수무책인 알프를 향해 날아오던 도끼는 쳐 낼 수 있었지만, 대신 그는 자신의 목을 향해 떨어지는 녹슨 대검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맑은 날이라면 빠른 몸놀림으로 어떻게든 도망을 칠 수 있겠지만, 잔뜩 물을 머금은 우의를 입고 땅바닥마저 축축하게 젖은 상태라 이미 몸이 너무 무거운 상태였다. 곁에 있던 묘가 사력을 다해 그녀를 향해 떨어지는 세 블랙 오크의 무기를 쳐 냈지만 그를 도와줄 여유는 없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상대의 무기를 응시하고 싶었지만 검사도 아닌 그로서는 불가항력적인 순간이었다.
“타앗!”
한 줄기 기합성이 들려왔다.
퀘엑!
애처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냥꾼은 어리둥절해서 눈을 떴다. 분명히 자신의 목은 무사했던 것이다.
퀘엑!
다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입에서 피를 게워 내고 있는 알프를 향해 긴 나무 봉을 휘두르던 오크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그 오크는 봉을 놓고 자신의 목을 움켜잡고는 뒤로 비척거리며 뒷걸음질 치다가 곧 젖은 바닥으로 넘어갔다.
그때부터였다.
오크들의 비명이 줄을 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난 알프와 그 동료들이 본 것은 빗속을 헤치고 날아가는 몇 줄기 선이었다. 눈에 들어오자마자 사라진 그 선에 격중된 오크들은 한결같이 목을 움켜쥐고 쥐어짜는 것 같은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취익! 도망쳐라! 엄청난 강자다! 넓게 산개해서 도망쳐라!”
한 오크의 명령에 따라 사람들의 뒤를 쫓던 블랙 오크들이 일제히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놈들은 얼마나 다급했는지 무기까지 내팽개치고 도망칠 정도였다.
그런 오크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세 사람은 하늘 높은 곳에서 표표히 내려오는 하룬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신계에 산다는 신족처럼 느껴지는 하룬의 하강에 알프는 머리를 힘차게 내저었다.
분명히 날개는 보이지 않지만 까마득한 나무 끝에서 날아 내리는 하룬의 모습은 굵은 빗줄기와 자욱한 우연 속에서 다시는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땅으로 내려온 하룬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계에 산다는 신족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순간 하룬은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상하네. 어떻게 내가 블랙 오크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거지?’
이제까지 오크들의 말은 그 듣기 싫은 비음밖에는 들을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그들의 말을 정확하게 듣고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을 오래 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그를 주시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다들 괜찮습니까?”
“네. 감사합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다른 마을 사람들과는 달리 이제야 하룬임을 확인한 알프는 멍한 상태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괜찮은지 어쩐지는 모를 정도지만 그렇게라도 대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한동안 들려왔던 소음들-블랙 오크들이 도망치면서 나무와 부딪치는 소리,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 공포에 질려 내는 괴성 등-이 사라지자 앞서 도망쳤던 사람들이 가까이 왔다. 그들은 알프를 비롯한 세 사람이 본 광경까지는 미처 볼 수 없었지만 상황이 이상하게 종료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룬…… 당신이 왔군요.”
“네. 다친 곳은 없습니까?”
“없습…… 아!”
무심코 대답을 하던 알프가 왼쪽 옆구리를 붙잡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까 블랙 오크에게 몽둥이로 맞았던 옆구리에서 불로 지지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부족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쓸 따름이었다.
“와 줘서 고맙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우리 샤니 고집 때문에 하마터면 모두 여기서 죽을 뻔했는데 자네 덕분에 살았네.”
“칫! 아빠는 왜 그런 소리를…….”
아반과 샤니가 다가왔다. 그들은 몇 번 땅에 굴렀는지 옷 꼴이 엉망이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고마워요. 덕분에 생명을 구할 수 있었어요.”
묘였다. 입었을 우의는 어디로 갔는지 몸에 딱 붙는 방어구를 착용한 그녀의 모습은 물에 젖어 아주 고혹적으로 보였다. 마치 게임 속 여전사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8등신의 몸매에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 그리고 물기에 젖은 아름답지만 차가운 얼굴은 이런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매혹적이었다.
하룬은 그저 고개를 숙여 인사를 대신하고는 부상자들을 향해 걸어갔다. 두 사람은 다리가 부러져 있었고, 다른 두 사람은 몸에 무기에 베인 자상刺傷을 입고 있었다. 부러진 뼈야 접골을 하면 괜찮을 터지만 자상은 위험했다. 몬스터들이 주로 사용하는 무기는 질 나쁜 쇠로 만들어진 것이나 인간들에게 빼앗은 것으로 평소에 관리를 하지 않아 녹이 슬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경우 파상풍의 가능성이 무척 높았다. 더구나 지금은 상처에 물까지 들어간 상태였다. 하룬은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의 힘을 빌려 부상자들을, 바싹 붙어 자란 나무 몇 그루가 자연스럽게 만들어 낸 공간으로 옮겼다.
천막을 길게 펴 나무 사이로 연결하니 제법 비를 피할 수 있었다. 하룬은 뼈가 부러진 두 사람을 그 동료들에게 맡기고 자상을 입은 두 부상자를 살쳤다. 한 명은 어깨를 깊이 베였고, 다른 한 명은 옆구리가 갈라져 창자가 빠져나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가츠 노인에게 받은 소독용 가루약을 꺼내 상처에 뿌렸다. 금방 상처 부위에 부글거리는 거품이 일어났고, 부상자들은 그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이런 험한 곳에서 사냥을 하거나 약초를 캐던 사람들이라 의지가 강해 끝내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중급 치료 포션 하나를 꺼내 소독한 부위에 뿌렸다. 다시 부글거리는 거품과 함께 상처 부위가 천천히 아물기 시작했다.
현실과 이 세계가 다른 점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포션의 존재였다. 현실에서는 외과적 치료, 즉 봉합을 해야 하는 정도의 부상도 이 세계에서는 포션으로 상처 난 부위의 세포들을 재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만큼 생명력은 줄어든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NPC들에게는 어떤 페널티가 있는지 몰라도 이방인들에게는 사용에 아무런 제한이 없는 것이 바로 이 포션이었다.
급한 대로 두 사람의 치료를 마치고 상처 부위를 깨끗한 붕대로 감은 하룬은 부목을 만들었다. 그사이 다른 마을 사람들은 동료들의 뼈를 접골하고 있었다.
대대로 산에서 살아온 그들은 뼈가 부러진 것 정도는 치료할 수 있었다. 몸을 바들거리면서도 고통을 참고 부러진 뼈를 제대로 맞춘 부상자들에게 부목을 대 준 하룬은 마지막으로 알프에게 향했다.
알프는 그사이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이를 악문 그의 곁에는 같이 싸우던 동료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갈비뼈가 몇 개 부러졌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장기를 찌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처를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그 역시 몇 군데 다친 곳이 있었지만 신음소리를 삼키며 힘들어하는 알프 곁을 떠나지 못했다. 도망치는 사이 몇 번이나 자신을 위험에서 구해 준 알프였다. 그것을 떠나 태어나 지금까지 같이 자란 친구가 힘들어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 나오고 있었다.
하룬은 말없이 알프가 옆구리를 누른 손을 잡았다. 파르르 떨리는 알프의 눈이 뜨여 하룬임을 확인하더니 고마운 눈빛으로 보며 손에서 힘을 뺐다.
“입에 물릴 나무를 부탁합니다.”
“네!”
고통이 클 것이다. 그 역시 외상 치료에 대한 책을 읽고 입문한 상태에 불과한 것이다. 하룬은 비수를 꺼내 마나를 주입한 상태로 알프의 옆구리를 조심스럽게 갈랐다.
그사이 작은 나무토막 하나를 알프의 입에 물린 동료는 눈을 떼지 못하고 곁에 서 있었다. 하룬은 자른 옆구리 사이를 벌려 손을 넣었다. 조심스럽게 움직이자 부러진 뼈가 느껴졌다. 책에서 읽은 대로 감각을 끌어 올려 갈비뼈를 조심스럽게 맞추었다.
두둑! 뚝!
“흐으, 크으으윽!”
뼈가 엇갈리고 맞추어지는 소리와 알프의 억눌린 신음 소리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긴장시켰다. 하룬은 부러진 뼈들을 조심스럽게 다 맞춘 다음 준비한 포션을 상처 부위에 골고루 뿌렸다.
“으으으, 으윽. 크윽!”
알프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극도의 고통에 그의 눈이 돌아가 흰자위가 생겨났다. 하지만 그는 끝내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마침내 연이어 뿌린 포션으로 인해 뼈들이 붙고 가른 옆구리 살이 붙었다.
언제 난 것일까? 하룬은 자신의 얼굴이 땀으로 흥건하다는 것을 깨닫고 손으로 땀을 훔쳐 냈다. 처음 시술이라 긴장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성공이었다. 비록 포션의 힘을 빌리기는 했지만 부러진 갈비뼈를 제대로 붙였고, 오염되었을지도 모를 내장까지 소독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목숨을 구해 주시고 치료까지 해 주시니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몸이 성한 사람들은 물론 부상자들까지 하룬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산을 타다 보면 다치는 것이야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렇게 빠르게 상처를 치료한 것은 처음이다. 더구나 말로만 들었지 너무 비싸 살 엄두도 내지 못하던 포션까지 쓴 하룬에게 그들은 진심으로 감사했다.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촌장님과 이프란의 부탁을 받아 빨리 온다고 왔는데 제가 조금 늦었군요.”
“송구합니다. 저 아가씨가 바스란 꽃이 너무 아름답다고 따 달라고 하는 바람에 놈들의 영역에 들어섰다가 그만 놈들 중 한 무리와 마주쳐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알프와 같이 싸우던 사냥꾼 하나가 서늘한 눈초리로 샤니를 흘겨보았다. 철모르는 아가씨 한 명 때문에 모두가 블랙 오크의 손에 죽을 뻔했기에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바스란 꽃이라면 파리와 같은 곤충이나 작은 동물을 잡아먹는 포식 식물 아닙니까?”
“맞습니다.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실은 썩은 냄새로 곤충이나 동물을 유혹하는 악마의 꽃인데 그걸 꼭 가지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하룬은 황당한 표정으로 샤니를 쳐다보았다. 그녀도 자신의 실수를 확실하게 알았는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내 도발적인 시선으로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흥! 그게 뭐 어때서요? 그래도 계약을 한 이상 내가 부탁하는 것 정도는 들어줄 수 있잖아요?”
“우리가 약속한 것은 알라미즈를 안전하게 넘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지, 이런 돌발적인 위험까지 감수해 가면서 아가씨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소.”
“아니, 한 사람당 100골드라는 돈이 어디 단순한 안내를 위한 돈이라고 생각한 건가요? 분명히 말했죠? 요른 백작령까지 가는 동안 최대한 편의를 제공하겠다고. 그럼 내가 부탁한 일은 어느 것이나 들어주겠다는 의미 아닌가요?”
“뭐요? 그래서 우리 모두를 이렇게 죽을 위기로 몰아넣은 것이 잘했다는 거요? 우리가 그렇게까지 말렸는데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잖소!”
“뭐라고? 이런 천한 자들이 감히 누구에게……!”
“그만!”
두 사람의 말싸움은 아반으로 인해 그쳤다. 둘 다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았지만 아반의 목소리에는 묘한 위엄이 들어 있어 두 사람의 기세를 압도적으로 눌러 버렸다.
“우리 샤니가 다소 과도한 요구를 했고, 그 때문에 의도하지 않은 위험 상황이 초래된 것은 인정하겠소. 모두에게 내가 대신 사과를 하리다. 미안하오. 우리 때문에 이런 상처를 입게 되어 무척 유감스럽게 생각하오.”
아반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마을 사람들에게 사과를 했다. 그렇게까지 할 줄을 몰랐기에 사과를 받는 사람들의 얼굴이 아주 곤혹스럽게 변했다.
‘딸은 개떡 같은 성질을 가졌는데 그래도 아버지는 낫군.’
하룬이 그렇게 판단하는 사이 아반은 또 다른 제의를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더 이상 우리를 안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되는군. 다들 작고 큰 부상을 입은 상태로 더 이상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힘들 거요. 만약 여기 이 용병 친구가 우리를 요른 백작성까지 안내해 준다면 우리는 댁들과 맺은 거래가 무사히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하겠소.”
노회한 아반은 이제 하룬을 걸고 넘어졌다. 하룬이 대신 그들의 임무를 수행한다면 그들은 미리 받은 돈을 돌려줄 필요가 없이 마을로 돌아가도 되는 것이다. 받은 선금이 무려 50골드니 횡재도 보통 횡재가 아닐뿐더러 이런 몸으로 험준한 산길을 가는 자살 행위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 늙은이가!’
하룬은 무언가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굳이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대신 샤니와 말싸움을 하던 사냥꾼에게 귀엣말로 물었다.
“기한을 정했습니까?”
그 말에 잠시 생각을 하던 사냥꾼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다만 안전하게 요른 백작령까지 안내를 하는 것이 거래 내용이었습니다.”
그의 귀엣말을 들은 하룬이 아반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습니다. 이들의 임무를 내가 승계하지요.”
“하하하! 좋아, 아주 좋아요! 내 당신이라면 안심할 수 있소.”
아반은 하룬이 대신 안내를 맡게 된 것이 즐거운 듯 대소를 터트렸다. 샤니도 좀 안심이 되는 얼굴이었다. 묘는 무표정한 얼굴로 하룬을 뜨겁게 응시하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뜨거운 시선은 호의가 아니라 강렬한 투기였지만 말이다.
“대신 이들의 상처가 심해 지금 출발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심한 빗속에서 위험한 산을 넘는 것은 무리입니다.”
하룬의 말에 아반 일행의 얼굴이 변했다.
“안 돼요. 우리는 시간이 없단 말이에요. 당신이 계약을 승계했으니 책임져요.”
“사정은 이해하지만 우리는 지체할 시간이 없네. 미안하지만 계약을 지켜 주게.”
두 사람의 입장은 강경했지만 하룬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부상자들의 배낭에서 천막을 꺼내 더 설치했다. 그런 하룬의 모습을 보던 아반과 샤니의 얼굴이 점차 붉어지고 있었다.
샤니가 몇 번 더 따라다니며 바로 출발할 것을 종용했지만 하룬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성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크고 작은 상처들이 다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배수로까지 다 파고 난 하룬이 식사 준비를 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다가가자 샤니가 소리를 빽 질렀다.
“야! 천한 용병 놈이 어디서 사람 말을 못 들은 체하는 거야? 야!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하룬은 ‘천한’이라는 말에 꼭지가 확 돌았다. 안 그래도 현실에서 보더러로 천시받는 것도 억울하고 싫은데 게임에서마저 그런 소리를 들으니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하룬은 살기가 도는 눈길로 샤니를 쏘아보았다. 그의 몸 전체에서 마치 독 오른 맹수의 눈빛처럼 살벌한 기세가 구름처럼 뿜어 나왔다. 순간 샤니가 오들오들 떨며 뒤로 물러났다.
“다시 한 번 말해 봐! 뭐라고 했나?”
“무, 무슨 말을…….”
“천한 용병 놈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네가 한 말이냐?”
“그, 그건…….”
겁에 질려 창백한 얼굴로 주춤거리며 물러나던 샤니는 뭔가 등에 닿아 더 이상 물러나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아버지의 얼굴을 본 샤니의 눈에서 큰 눈물방울이 주르르 흘렀다.
서럽고 무서웠다. 마치 천지간에 하룬과 단둘이 마주한 것 같았다. 그 어느 존재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상대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금방이라도 자신의 가는 목 줄기를 뜯어 버릴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아, 아빠! 저 새끼가 날…… 흑! 흑!”
“괜찮아. 아빠가 처리하마!”
아반은 샤니를 안고 등을 몇 번 두드려 준 후 뒤에 있던 묘에게 넘기고 앞으로 나왔다.
“어린애한테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좀 듣기 싫은 소리를 하긴 했지만 계약을 이행하라는 말을 무시한 자네도 잘한 것은 없지 않은가?”
그는 살기가 넘치는 하룬의 눈빛을 당당하게 받아 내며 근엄한 태도로 말했다.
“계약? 누가 요른 백작성까지 안내를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분명히 내 입으로 계약을 승계하겠다고 했을 텐데요.”
“그런데 왜 움직이지 않는 건가?”
“그 계약에는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왜 아닙니까?”
그 말에 아반의 얼굴색이 급변했다. 하지만 노회한 그는 여전히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 그렇긴 하지만 의뢰자가 급한 사정이니 당연히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반 씨는 상인이라고 했습니다. 거래는 그 계약 내용을 준수하는 것이 생명입니다. 미리 약정한 조건이 없다면 이후 상황은 서로 의논해서 결정하는 겁니다. 더구나 지금 이들은 당장 움직일 수 없는 상황입니다. 행여 블랙 오크라도 다시 이곳으로 온다면 이들은 그야말로 죽은 목숨인 거지요. 미리 약정한 것도 아닌데 왜 내가 당신네 사정만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돌변한 상황에 대해서는 다시 계약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룬의 말에 아반의 얼굴이 결국 일그러졌다. 그 역시 현실과 이 비욘드에서 수많은 거래를 했고, 누구보다 계약을 철저히 이용한 사람이다.
“더구나 천한 놈이니 새끼니 하면서 계약한 상대방을 모욕하는 거래 당사자와는 더 이상 계약을 이행하고 싶지 않습니다. 특정한 계약 내용이 없으니 통상 거래를 참조해서 약정 대금의 세 배인 위약금을 내겠습니다.”
하룬은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하지만 이내 하룬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뿔싸!’
그러고 보니 돈이 부족했다. 모두 여덟 명이 100골드씩에 계약을 했으니 위약금은 모두 2,400골드다. 그런데 가지고 있는 것은 600골드 밖에 없었다. 아니, 더 있긴 했지만 합해도 그 돈은 어림없었다.
그 순간 이야기를 나누던 마을 사람들이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우리가 받은 돈도 합해 주십시오.”
아까 알프와 함께 싸우던 사냥꾼이 모은 400골드를 가지고 왔다. 순간 아반과 샤니 부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과도 척을 져 버렸으니 돌아가는 것조차 힘들어진 것이다.
“아, 아닐세. 이러면 안 되네. 상도의가 이래서는 안 되는 거야. 내가 대금을 더 지불함세.”
당황한 얼굴로 아반이 하룬의 손을 붙잡았다.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 알기를 우습게 아닌 사람들과는 거래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룬은 품에서 돈을 더 꺼냈다.
“사과하겠네. 이렇게 중간에서 계약을 파기하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 이런 법은 없는 걸세.”
그의 얼굴에는 노회한 표정 대신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게 떠올라 있었다.
“후후! 왜 없습니까? 우리가 이 계약을 파기해서 뭐 얻는 것이 있다고 마치 배신한 것처럼 그러십니까. 계약을 파기하게 된 것은 저 샤니 양의 거칠고 무례한 언행과 계약 조건을 무시한 아반 씨 때문입니다. 굳이 계약 조건이 아니더라도 이대로 놔두고 가면 죽기 십상인 상황인데, 본인들 사정만 따진 것은 그쪽입니다. 우리는 사람 목숨 때문에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상도의 운운하는 것은 정말…….”
하룬의 말이 이어질수록 아반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과연 하룬의 말에는 한 치의 잘못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잘못했네. 잘못했어. 자네가 하라는 대로 할 테니 계약 파기는 참아 주게. 이대로 계약을 파기하면 우린 요른 백작성으로 가기 위해 다시 타우스트 성으로 나가서 요른으로 가야 하는데, 그러면 한 달이 넘게 걸리네. 우리는 정말 다급한 상황이란 말일세. 그래서 실수를 하게 된 거야. 샤니! 어서 사과하지 뭘 하고 있니?”
“미, 미안해요. 정말 잘못했어요.”
정말 다급한지 무릎이라도 꿇을 태세인 아반과 황당한 가운데서도 얼굴이 파랗게 질려 기어가는 목소리로 하룬과 마을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는 샤니를 본 사람들은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순간 그런 광경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묘의 얼굴에도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녀가 아는 아반은 절대로 자신의 말을 번복하는 법이 없었고, 샤니 역시 이렇게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었다.
“마을 주민들과의 거래는 이대로 끝을 내겠네. 선금 역시 이곳까지 안내한 대금으로 치지. 대신 자에 나와 계약을 하세. 우리를 요른 백작령까지 안전하게 호송해 준다면 1,000골드를 내겠네.”
역시 노회한 상인다운 순발력이었다. 더 큰 이익을 위해 작은 손해는 빨리 잊는 게 좋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예상은 틀렸다. 하룬의 표정이 심드렁했던 것이다.
“왜, 1,000골드가 마음에 안 드나? 그 돈이면 웬만한 의뢰 대여섯 건은 해야 벌 수 있는 돈인데.”
아반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불쾌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상황을 이용해서 큰돈을 챙기려는 것으로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세류의 의뢰로 인해 하룬은 눈이 무척 높아진 상태였다.
“후후! 우리 돌풍 용병대는 1만 골드 이하 의뢰는 웬만하면 안 받습니다만.”
“도, 돌풍? 자네가 돌풍 용병대란 말인가?”
“그럼 후크란 보석 광산까지 이방인들을 안내한 그 돌풍 용병대란 말이에요?”
두 부녀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들은 이방인, 방송이든 어디서건 최근의 최대 화제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전 분명히 후크란 산맥에서 이곳으로 오는 길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 그랬지. 분명 들었어. 그럼 정말 자네가 돌풍 용병대였단 말인가?”
“맞습니다. 돌풍 용병대 대장 하룬입니다.”
하룬은 손목의 팔찌를 풀어 아반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하룬의 말이 틀림없음을 확인한 아반의 얼굴에 마치 죽은 부모를 본 듯한 기쁨이 떠올랐다.
“세상에, 여기서 만나다니.”
“반가워요, 하룬 씨. 아니 하룬 대장님.”
두 사람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하룬에게 반가운 모습을 연출했다. 하룬이 적응이 안 될 정도였다. 뭔지 몰라도 그들에게 자신은 무척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알라미즈 산은 블랙 오크와 와이번은 물론 공포의 존재인 악마 오크까지 출몰하는 곳입니다. 저기 있는 묘 전사와 단둘이서만 간다면 모르지만 두 분까지 모시고 이런 날씨에 험준한 산을 넘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 행위입니다.”
“알겠네. 그럼 5,000골드면 어떻겠나? 아니, 할 말이 있으니 잠시만 시간을 주게.”
“네. 그러시죠.”
하룬은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해 넓은 잎을 가진 나무 아래로 자리를 옮겼다.
“혹시 고요의 땅으로 가는 길 아닌가?”
아반의 말에 이번에는 하룬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그걸……?”
“사정이 있어 알게 되었네. 자세한 사정은 가면서 털어놓지. 아무튼 고요의 땅까지만 우리를 최대한 빠르고 안전하게 데려다 준다면 1만 골드를 내겠네.”
“흐음.”
하룬은 너무나 뜻밖의 사태에 당황해서 일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 유저가 어떻게 자신을 알고 있는지, 목적지를 어떻게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에 잠긴 하룬의 태도를 아반은 어떻게 해석을 했는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2만 골드 주겠네. 대신 안전만 보장해 주게. 일정에 다른 대상을 추가해도 상관없네. 그저 안전하게만 고요의 땅 입구까지만 데리고 가 주게.”
하룬은 짧은 생각을 끝냈다. 자세한 상황이야 가면서 들으면 될 것이다. 강해지는 것이 게임을 하게 된 제일 큰 이유지만 돈을 버는 것을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가는 길인 것이다.
“좋습니다. 대신 자세한 사정은 오늘 저녁에 듣기로 하지요.”
“하하하! 그럴 줄 알았네. 역시 소문대로 화통하군. 그러세. 선금은 내 요른 백작성에 가서 주겠네.”
당장 가진 현금이 없다는 말에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아반과 하룬은 악수를 하고 일행들이 머무는 천막으로 돌아왔다.
그사이 뒤따르던 두 약초꾼이 와 있었다. 중년의 노련한 약초꾼들은 치료에도 일가견이 있어 자질구레하게 난 상처들을 돌봐주고 있었다.
불을 피울 수 없어 도시락과 빵을 나누어 먹은 사람들은 휴식을 취했다. 그사이 하룬은 혼자 일엽초가 자라는 곳을 다녀왔다. 비록 블랙 오크들의 영역이긴 하지만 비가 심하게 오는 덕분에 그곳까지 오크들이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채취한 일엽초를 두 약초꾼에게 준 하룬은 이제 많이 호전된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알프의 상태는 정말 많이 좋아져 이제 일어나 조금씩 걷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이런 분인 줄 모르고 그냥 유령하는 떠돌이 용병인 줄 알고 실례가 많았습니다. 정말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충분히 대접 잘 받았습니다. 아주머니가 준비해 준 도시락이면 충분합니다.”
“우리를 위해 그 귀한 포션까지 쓰시다니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알프는 연방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시했다. 다른 마을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쳐다보는 눈길이 선망과 존경으로 반짝이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십시오. 비록 비가 심하긴 하지만 상처는 치료되었으니 이제 편안한 장소에서 푹 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 아닙니다. 저희도 같이 가겠습니다. 은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습니다. 이 산에 대해선 우리 마을 사람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길 안내는 물론 허드렛일을 해도 좋고, 악마 오크가 나타나면 미끼라도 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길은 저도 잘 압니다. 그런데 부인이 둘째를 가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까?”
“네에? 둘째요? 저, 정말입니까?”
“네. 부인이 그렇게 전하라더군요. 둘째가 기다리니 빨리 오라고요.”
“하아, 하, 하하하! 크윽!”
알프는 미친놈처럼 크게 웃다가 인상을 찡그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 바람에 상처 부위가 아파진 것이다. 하룬은 소식을 듣고 웅성거리는 마을 사람들을 보았다.
“마을로 되돌아가십시오. 여러분이 할 일은 이제 끝났습니다. 비록 비가 많이 오긴 하지만 이곳에서 비가 그치길 기다리려면 며칠이 더 걸릴 겁니다. 차라리 조금 비를 맞더라도 집에서 가족들의 정성 어린 간호와 온천욕을 하면 상태는 금방 좋아질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빗속에서 위험한 이곳에 있는 것보다는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나을 거 같아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하룬을 따라온 중년 약초꾼이 말했다. 혈기와 돈 욕심에 나섰다가 반나절도 안 되어 죽을 위기를 겪은 청년들의 얼굴은 많이 기가 죽어 있었다. 아직은 노련한 선배들과 함께 움직여야 안전하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경험한 것이다.
사람들은 우의를 다시 매만져서 준비를 한 다음 마을로 길을 떠났다.
“언제든 꼭 다시 우리 마을을 들러 주십시오. 그때는 제대로 대접하겠습니다.”
동료에게 부축을 받은 알프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아무 사고 없이 이렇게 돌아가게 되어 다행입니다. 돌풍 용병대와 하룬 대장의 이름은 반드시 기억하겠습니다. 언제든 반드시 들러 주십시오. 제대로 가진 것 없고 하잘것없는 약초꾼들이지만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나중에 따라온 약초꾼들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아쉬운 얼굴로 하룬의 손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