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른 백작성으로》
“티노가 떠났어.”
아침 내내 티노를 찾던 라트리나의 말에 세 사람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하룬이야 같은 용병 아카데미 동료로 애증이 범벅이 된 사이지만 티노는 좀 달랐다. 비록 나이는 많지만 마치 아버지나 형처럼 그들을 보살펴 주던 살가운 존재였던 것이다.
“대장을 쫓아간 것이 분명해.”
라트리나가 공연히 주먹을 쥐고 식식거렸다.
“우리를 버렸어! 티노가 말이야.”
그녀는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흥분했다.
“그가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를 버린 거지.”
필립이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독백했다. 그의 눈 밑에는 진한 검은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밤새 잠을 설친 때문이다. 야망 때문에 기사의 길을 선택했지만 갈등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필립은 새벽에 티노가 떠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룬이 떠난 오후부터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던 티노는 결국 기사의 자리를 버리고 돌풍 용병대를 택한 것이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후크란 기사단의 단장인 세반 자작이 무척이나 공경하는 데브론 노인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티노였다. 그래서인지 홀이 용병대원 전체를 기사로 만들어주겠다고 했을 때 가장 쉽게 받아들였지만, 대장이 막상 그 결정을 거부하고 떠나자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이다.
정확한 나이는 말한 적이 없지만 대충 40대 후반으로 알고 있는 티노는 캠프의 요리와 가사 일을 맡고 있는 하녀장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티노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 최근에는 은밀하게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을 본 기사들도 있었다.
누구나 선망하는 기사의 자리와 그렇게 좋아하는 여인까지 포기하고 떠난 티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하룬을 따라 힘들고 거친 세상으로 다시 나갔을까?
용병 생활에 중독이라도 된 것일까?
필립은 진정으로 궁금했다. 세상 누구라도 자신과 같은 상황에서 기사의 길과 용병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면 틀림없이 자신이 내린 결정을 따를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제대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용병보다야 기사도를 따르는 멋진 기사가 백배, 아니 천배는 더 낫지 않은가?
필립을 비롯한 재수 4인방이나 홀은 하룬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남작성에 있을 때 이방인에 대해서는 들은 것이 많았다. 이계의 존재이기에 며칠에 한 번씩밖에 이곳에 올 수 없고, 연속해서 이틀 이상 머무를 수 없는 존재들이 바로 이방인이었다.
물론 강에서 틀림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후 부활했다며 나타났다. 하지만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룬은 아주 특이한 정령사였다. 정령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마법사인 홀도 제대로 몰랐다.
언젠가 하룬이 이방인인지에 대해 말이 나온 적이 있는데, 결론은 그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방인인 척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여러 사람을 통해 들은 이방인과는 너무나 많이 달랐던 것이다.
하룬은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이동해 왔다. 잠시라도 종적이 묘연했던 것은 강에서 죽었을 때박에는 없었다. 더구나 결정적인 증거가 있었다. 이방인들은 이 세상에서 식사를 하는 행위가 단순히 공복도를 채우기 위해서라고 했다. 실제로 그들의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 그들이 먹는 것은 거의 빵과 물밖에 없었다.
대원들은 그렇게 결론 내린 것을 굳이 하룬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무슨 비밀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서로의 비밀을 묻지 않는 것이 험한 생활을 택한 용병들만이 가지는 불문율이었다.
아무튼 필립은 왜 하룬이 기사의 길을 거부하는지 그리고 티노가 왜 그를 따라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귀에는 어젯밤 마지막 해독약을 주면서 한 하룬의 말이 아직도 울리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결정했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인생은 늘 선택의 연속이지. 부디 너희들이 선택한 길을 걸어가며 행복하길 바란다. 삶의 목표가 모두에게 다르겠지만 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가련다. 그래서 주군이나 기사도 따위에 귀중한 내 삶을 저당 잡히고 살아가는 기사의 길은 가고 싶지 않다. 언제나 자유롭게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싶으니까.
자유의지!
그 말이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그를 내내 괴롭혔다. 자신들 때문에 싫은 내색도 못하고 함께 엮였던 티노가 마지막 순간에 도망치듯 떠난 것은 바로 그 자유의지를 지키기 위함이라는 걸 필립은 희미하게나마 추측하고 있었다.
‘난 무엇을 원하지? 멋진 플레이트 메일을 걸치고 뭇 아가씨들에게 선망의 눈길이라도 받길 원하는 건가? 아니면 준귀족이 되어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을 원하는 건가? 그도 아니면 내 실력을 남들에게 뽐내고 대륙에 이름을 날리고 싶은 건가?’
자신을 뒤돌아보게 된다.
도대체 대장과 자신들의 사고 차이는 무엇인가?
대장에게 있어 자유로운 의지가 과연 뭐기에 그 빛나는 미래를 거부하는 건가?
꽤 유명한 용병단주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을 뒤돌아볼 새도 없이 그저 시키는 대로 용병단주가 되기 위한 코스를 걸어왔다.
어린 시절부터 수련용 검을 잡았고, 혹독한 수련을 해 왔다. 용병단 운영에 필요하다고 해서 지식도 익히고, 인맥을 쌓기 위해 황도의 상급 아카데미까지 다녔다. 다행히 재능이 없지 않았고 머리도 똑똑한 편이라 자신의 장래를 자신했다.
하지만 용병계에 이름을 날리기 위해 수석 수료를 목표로 입교한 용병 아카데미에서 만난 하룬은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강인한 의지력과 불가사의한 체력 그리고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나이는 몇 살이 어리지만 그는 돌풍 용병대원이 된 이래 하룬이 자신보다 어리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도리어 나이 차이가 한참 나는 형처럼 느낀 적이 많았다. 아니, 형 정도가 아니었다. 인생의 선배로 그들을 이끌었다.
몬스터들과 싸우는 동안에도 자신들에게 눈을 떼지 않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려고 사비까지 털어 전사의 전당에서 스킬까지 배우게 해 주었다. 위험한 것은 항상 본인이 앞장서서 해결했으며, 수련을 할 때는 혹독하게 몰아붙여 실력을 급상승하게 만들어 주었다.
엄청난 거금임에도 번 돈을 똑같이 배분하는 넓은 아량도 있었다. 다른 용병대장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배분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하더니 막상 하룬이 떠나자 그 공간이 너무 크게 표시가 났다.
새록새록 그와 보낸 시간들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생각해 보면 그와 함께한 지난 몇 개월이 필립이 그간 살아왔던 시간 모두를 합친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즐거웠다.
이제 더 이상 그런 시간은 보내지 못하리라.
필립은 착잡한 심경으로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어제부터 지탄은 말이 없었다. 얼굴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다.
덩치가 아까울 정도로 수다스럽기까지 한 녀석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다. 겁이 많고 소심해서 늘 누군가를 추종하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되는 성격을 가진 녀석이다.
홀로부터 기사 직을 제의받고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기뻐하고 감격하던 녀석의 모습은 어딜 갔는지, 침울한 표정으로 계곡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시린느 역시 마찬가지다. 두 달여에 걸친 수련으로 기본 검술을 완전히 마스터한 상황에서 기사직을 제의받고 그렇게 좋아하던 그녀 역시 실연이라도 당한 얼굴이다. 이제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울 수 있다고, 대장이 오면 제대로 된 검술을 가르쳐 달라 조르겠다고 벼르던 그녀가 어깨를 웅크리고 침울하게 앉아 있었다.
라트리나는 연방 주먹을 공중에 휘두르면서 뭔가 소리를 내지 않고 중얼거리며 화를 내고 있었다. 필립은 우연히 그녀의 입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용병이야 기본적인 독심술은 다 익히고 있었다.
왜? 왜? 왜 같이 기사가 되면 안 되는 건데? 모두 같이 기사가 되면 좋잖아. 왜 우리를 버리고 떠난 거냐고?
비록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라트리나는 마음 속으로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처럼 불안하고 공포에 질려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오빠들에게 밀려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교육을 받거나 수련할 기회를 잡지 못한 라트리나였다. 용병 아카데미에 들어온 것도 수도의 기술 아카데미를 다니다가 독단으로 결정한 것이었고, 그 때문에 가진 돈도 거의 없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를 이만큼 성장하게 만든 것은 하룬이었다. 그녀의 성정에 알맞은 스킬을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하고, 돈이 없다고 말로 면박은 주었지만 실상 대우하는 것은 다른 대원들과 차이가 없었다.
‘휴우, 우리는 과연 선택을 잘한 걸까?’
필립은 손에 잡힐 듯 보이는 후크란 주봉을 바라보았다. 아련하게 대장과 티노가 그곳에서 손짓을 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대장! 배신은 우리가 했는데 왜 우리는 대장에게 버려진 것처럼 이렇게 슬프고 화가 날까?’
필립은 묻고 싶었다.
하룬은 일단 가파른 암봉들이 공룡의 척추 뼈처럼 쭉 이어진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움직였다. 능선을 다라가는 길은 경사가 급하고 험한 데다 길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허벌 길드의 보물인 제국 지도책이 있었다.
이미 심안이 20을 상회하는 덕분에 굳이 지도책을 펴지 않아도 의지만으로 목표로 하는 요른 백작성까지의 길을 영상으로 볼 수 있었다.
“흠, 와이번들만 조심하면 되겠네.”
길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심했지만 와이번들만 조심하면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길이 보였다. 거대한 바위들 사이를 이동해야 하기에 위험했지만 하룬에게는 메신저 워킹 스킬이 있었다.
수십 미터가 넘는 바위들을 오르거나 내려가야 하는 길들이라 위험할 뿐 아니라 시간도 많이 걸렸다. 하지만 이 근처에서 희귀한 버섯을 채집하는 약초꾼들은 암벽 중간에 밧줄을 설치해 놓았다. 비록 단번에 수십 미터를 뛰어오를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밧줄을 잡고 오르고 내리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사실 높이에 대한 공포만 극복하고 나면 나머지는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하룬은 빠르게 이동을 하면서도 중간에 짬짬이 짧은 휴식을 했다. 휴식이라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고가로 팔리는 약초를 발견하고 채취를 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높은 암벽 지대의 바위에 붙어 자라는 ‘셀라진’은 말리면 마치 주먹을 쥔 것처럼 생겼는데 각종 암에 특효가 있는 생약으로 엄청난 생명력을 지닌 약초였다.
이 지역의 약초꾼들을 생각해서 일부러 험하거나 높은 암벽에 있는 셀라진을 땄는데 금방 배낭 하나를 채울 정도의 양이 되었다. 워낙 그 크기가 크고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은 덕분에 군락을 이룬 것을 채집한 것이다.
중간에 사냥도 했다. 험악한 지형이라 그가 지나는 길목에는 몬스터나 맹수들은 별로 없었지만 사냥을 나온 오크 두 마리를 만난 것이다. 그냥 우회해서 지나갈까 하다가 나중에 혹시 약초꾼들이 피해를 받을까 봐 사냥을 해서 가죽을 벗겼다.
한 번은 사향 산양을 잡기도 했다. 암벽 지대에만 서식을 하는 이 사향 산양은 이성을 유혹하는 은근한 향기를 풍기는 사향 주머니를 가지고 있어 수많은 귀족 여인네들이 찾는 동물이었다.
약초도 캐고 사향 산양도 잡으며 오랜만에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하룬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롭고 행복했다.
‘진작 이렇게 혼자 다닐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원래부터 그런 건지 아니면 정서적으로 메마른 삶을 살아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하룬은 감정의 폭이 크지 않았다.
사실 대원들이 후크란 기사단에 입단하기 위해 용병대를 탈퇴하겠다고 했을 때도 그렇게 서운하지 않았다. 배신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티노를 제외한 재수 4인방에게는 그다지 섭섭하거나 밉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들은 하룬이 게임을 통해 추구하는 목표, 즉 강해지는 과정에 잠시 동행한 동료였을 뿐이다. 어린 시절부터 사람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고 자라 온 하룬은 본능적으로 타인에게 큰 정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상처를 받은 것은 홀에게서였다. 하룬은 그녀에게 일종의 연정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첫사랑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큰 감정이었다. 물론 본격적으로 그 감정을 키우기도 전에 끝났지만 그래도 마음 한쪽이 서늘하고 아팠던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자연 그대로를 즐기는 하룬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자유롭고 편안했다.
혼자 노숙을 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먹는 거야 원래 입에 들어가면 다 음식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하룬이었다. 자는 것 역시 이슬을 피할 곳만 있으면 그만이다. 욕심이 없으니 아쉬울 것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이틀을 꼬박 이동하자 한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지도책을 살펴보니 ‘캘프란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서 산 두 개만 넘으면 바로 제국 최대 곡창이라는 명성을 가진 비옥한 평야 ‘요른’이 나온다.
하룬이 마을을 둘러싼 목책 가까이 향하자 목책 위에서 화살을 겨눈 일단의 사람들이 보였다.
“누구요?”
한 병사가 목책 한가운데 뚫린 넓은 구멍을 통해 그에게 물었다.
“용병이오. 여기!”
하룬은 팔목을 들어 용병 신분을 확인시켜 주었다.
“호오! 용병대장이나 되는 분이 이런 외진 곳에는 웬일이오?”
신분을 확인한 병사가 목책을 열어주며 물었다. 마치 곰의 것처럼 길고 진한 털이 얼굴을 덮은 우람한 덩치의 병사였다.
“요른으로 가는 길이오. 시간을 아끼려고 산을 타고 왔소.”
“하하! 대단한 양반이군. 와이번과 몬스터가 지천인 험한 산을 타고 이곳까지 오다니. 아무튼 캘프란 마을에 온 걸 환영하오. 난 자경대 대장 알프요.”
“돌풍 용병대 대장 하룬이오. 일이 있어 혼자 길을 떠난 참이었소.”
“좀 있으면 해가 질 거요. 우리 마을은 작지만 귀한 약초들이 많이 나는 덕분에 약초상들이 꽤 많이 들르는 곳이오. 이곳에 오려고 한동안 험한 산길을 탔을 테니 조용하고 편안한 잠자리가 필요하겠네. 바람의 노래 주점으로 가시오. 내가 보냈다고 하면 잘해 줄 거요. 거기 맥주 이거요.”
알프는 엄지를 들어 보이며 윙크를 했다.
“고맙소.”
하룬은 전날 잡아 덜 마른 탓에 옆구리에 차고 있던 오크 가죽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예전에 티노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이런 궁벽한 곳에 위치한 마을에 들어갈 때는 자경대에게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그래야 이런저런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쓸데없는 시비를 피할 수 있다고 했다.
“하하하! 뭔가 제대로 아시는 분이군. 고맙소. 덕분에 근무 끝나고 대원들과 술 한잔 제대로 걸칠 수 있겠네.”
한눈에 봐도 제대로 벗겨 낸 좋은 가죽이다. 잘하면 10실버까지 받을 것 같았다. 그 정도면 대원들과 즐거운 술자리를 한 번 가질 수 있었다. 보통 안면이 있는 상인들에게 1실버 정도 받는 것을 생각하면 꽤 많은 돈을 받은 것이다.
이대로 그냥 받기에는 미안한 생각이 든 알프는 또 다른 친절까지 베풀었다.
“아, 거기 손님 중에 호위를 원하는 외지인들이 있을 거요. 주점의 주인에게 내 소개로 왔다고 말하고 그들을 안내해 달라고 하시오. 타우스트 성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약초상들이 우리 마을까지 찾아와 약초를 내놓으라고 안달을 하는 마당이라 우리 같은 사냥꾼들이나 약초꾼들은 이 시기에 굳이 요른까지 넘어갔다가 올 생각이 없지만, 당신에게는 괜찮은 일감일 거요.”
하룬은 알프의 친절에 미소를 지었다. 그의 따듯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비록 오크 가죽을 매개로 한 친절이지만 그래도 무시하려면 무시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굳이 그 의뢰를 받을 생각은 없는 하룬이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고맙소. 그럼.”
하룬은 자경대와 헤어져 마을 내부로 향했다. 마을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개울을 끼고 수십 채의 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람이 심한 곳인지 다른 곳과는 달리 집들 대부분이 땅을 깊이 파고 지어져, 겉에서 보기에는 지붕이 눈에 해당하는 높이에 있었다.
주점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마을 중앙에 다다르자 다른 집들과는 달리 2층으로 지어진 건물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람의 노래라는 이름을 가진 주점이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자 사람들의 손때가 탄 작은 문이 보였다. 작은 풍경 하나가 낡고 오래된 문 위에 붙어 있다가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람을 닮은 청아한 소리를 냈다.
실내는 흐릿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바람 때문인지 창문이 작고 유리도 품질이 별로 좋지 않아 기울어 가는 햇빛을 많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하룬은 둥근 테이블 네 개로 이루어진 실내를 볼 수 있었다. 아직 시간이 이른 건지 실내는 비어 있었다. 하룬은 작은 창을 통해 그래도 밝게 보이는 한 테이블에 앉아 배낭을 풀었다.
“어서 오세요.”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주방에서 나와 인사를 했다. 그 뒤를 이어 넉넉한 몸집을 가진 여자 한 명이 나왔다. 아마도 그녀가 주인인 듯했다.
“알프 소개로 온 용병입니다.”
“호호! 잘 왔어요. 우리 집은 용병 전문이거든요. 맛있는 맥주와 편안한 잠자리는 이 마을에서 우리 집이 최고랍니다. 근데 우리 집 양반은 언제 온다고 하던가요?”
하룬은 그녀의 물음에 피식 웃고 말았다. 알프가 이곳 주인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룬은 평소에 그가 손님 편에 전할 말이 있으면 전하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흐음. 이 인간, 오늘도 딴 데로 새 버리면 아예 허리를 부러뜨리고 말 거야.”
허리에 양손을 얹고 험악한 혼잣말을 하는 여주인을 보니 그 기세가 정말 살기등등했다. 곰 같은 알프가 마누라에게 잡혀 사는 것을 상상하니 갑자기 유쾌해졌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이들에게선 사람 사는 냄새가 진하게 흘러나왔다.
“어머! 손님을 앞에 두고 실례를 했네요. 호호호! 워낙 속을 썩이는 인간이라서요. 그런데 일단 저녁부터 준비할까요 아니면 목욕부터 준비할까요?”
“목욕이 된다면 목욕부터 하고 싶네요.”
“그럼 3호실에 여장을 풀고 우리 겔란을 따라가세요. 제법 질이 좋은 노천 온천이 뒤에 있거든요.”
“얼맙니까?”
“남편 소개로 왔으니 내일 아침 식사까지 해서 30실버만 받을게요.”
이런 궁벽한 곳에 온천이 있을 줄은 몰랐던 하룬은 생각만으로도 몸의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현실에서도 못 해본 온천욕을 게임에서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자신을 이프란이라고 소개한 여주인에게 셈을 치르고 겔란이라는 꼬마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간 하룬은 3호실에 여장을 풀고 노천 온천으로 향했다. 주점 바로 뒤에는 이 마을의 집들처럼 낮은 건물 하나가 길게 지어져 있었는데 뚫린 천장을 통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는 것을 보니 온천이 맞았다. 두 주점, 혹은 여관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모양인지 목욕을 마치고 다른 건물로 들어가는 상인 차림의 한 남자가 보였다.
하룬은 방어구 위에 입은 외투를 벗었다. 아이언 스네이크의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와 속옷은 분실을 우려해서 아예 아공간에 넣고 실내로 들어갔다.
실내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한 김과 함께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온천수가 흘러나오는 암반을 양쪽으로 막고 둘레에 벽을 세운 것이 전부인 온천이지만, 처음 느끼는 온천수의 느낌은 정말 황홀하도록 좋았다. 적당한 열기를 지닌 온천수는 이내 땀방울이 솟게 만들었고, 뻥 뚫린 천장을 통해 간간이 들어오는 서늘한 산바람은 더할 수 없는 시원함을 선사했다.
너무 덥다 싶으면 밖으로 나와 작은 바위에 앉아 있다가 몸이 식으면 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하는 하룬은 처음 경험하는 온천욕의 풍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하하하! 젊은 친구가 온천을 제대로 즐기는군.”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보니 나이가 지긋한 한 남자가 온천 한쪽 끝에 몸을 푹 담그고 있었다. 자욱한 김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전혀 몰랐다. 그 인물의 얼굴 윤곽은 보이지 않지만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먼저 온 분이 있었군요.”
하룬은 자신의 치부를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특별히 뭘 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자신을 그대로 드러낸 것은 게임을 하면서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 남자는 몸을 일으켜 하룬 쪽으로 걸어왔다.
“난 이방인이라 사실 그렇게까지 좋은 것은 못 느끼네. 다만 상상을 하며 즐길 뿐이지.”
초면에 이방인임을 드러내는 남자는 얼핏 본 것처럼 노인이 맞았다. 주름살 하나 없이 팽팽한 얼굴이 아니라면 중년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지만 말이다.
“용병 하룬이라고 합니다.”
“난 아반이라고 하네. 상인이지.”
그동안 혼자서 무료했는지 뜨거운 물속에 몸을 담근 아반이 흥미로운 눈길로 하룬을 바라보았다. 하룬은 그가 왜 그런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신경이 쓰였다.
“흐읍!”
하룬은 아반의 뒤쪽에서 한 여자가 유령처럼 나타나는 것을 보고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분명히 아무도 보이지 않았는데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김 속에서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아니, 김이 잠시 움직인 사이에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20대 후반의 여인은 거의 알몸에 가까운 차림으로 아반의 몸을 천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목욕 시중이라도 드는 모양인데 혼탕도 아니고 남탕에 치부만 겨우 가린 선정적인 속옷 차림으로 있는 것을 보니 황당했다.
이제 갓 성년이 된 하룬의 심장이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굴곡이 뚜렷한 몸에 가슴과 엉덩이는 속옷을 입었다 해도 그 크기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잘 발달되어 있었다.
“하하! 놀라게 했나 보군. 내 수행인일세. 자네도 목욕 시중을 받을 텐가?”
“아, 아닙니다.”
하룬은 손사레를 치며 눈을 돌렸다. 불편한 이 자리를 당장 뜨고 싶었지만 알몸이라 그것도 쉽지 않아 탕 안으로 더욱 깊이 몸을 담갔다. 그렇게 조금 있다 보니 온몸이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그런데 내가 왜 이래야 하지?’
생각해 보니 억울했다. 편하게 몸을 풀기 위해 들어온 탕에서 이렇게 불편해야 하다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위축될 필요가 없었다. 불편한 것은 상대방이지 자신이 아닌 것이다.
하룬은 탕에서 일어나 바위 위에 앉았다. 흘긋 그를 쳐다보던 여인이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출출했다. 뚫린 천장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밖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산골의 밤은 무척이나 일찍 찾아들었다.
“어디까지 가나?”
“요른 백작성에 갑니다.”
“그래?”
하룬의 대답을 들은 아반은 반색을 했다.
‘혹시 이 사람이 알프가 말한 그 인물인가?’
그럴 확률이 높았다. 목적지를 듣고 반색을 하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하룬은 지금 의뢰를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혼자 이틀 동안 여행을 해 보니 고적하기는 했지만 나름 느껴지는 풍미가 쏠쏠했던 것이다.
그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접하면서 아무 방해 없이 혼자만의 감정을 느끼고 즐기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성격이 안 좋아서 그런지 외로움 같은 것은 느끼지 못했다. 대신 한없는 자유로움과 가슴 전체로 자연을 느끼는 맛을 알아버렸다.
“전 시장해서 먼저 나가겠습니다.”
쓸데없는 만남은 미리 잘라야겠다고 생각한 하룬이었다.
“하하. 나도 이제 재미없는 목욕은 그만해야겠군. 실은 동화율이 낮아 목욕하는 즐거움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있었거든.”
어째 느낌이 좋지 않았다. 상인이라고 하더니 눈치가 귀신처럼 빠르다. 하룬이 자신의 접근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아챈 것일까?
아반이 그를 따라 나오는 바람에 하룬은 곤란해졌다. 속옷만 입은 8등신 여자의 존재도 그랬지만 자신의 속옷을 보관한 아공간을 내보이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에이!’
하룬은 아공간을 여는 것을 포기하고 외투만 입기로 했다. 속옷이나 방어구도 없이 알몸에 달랑 풍성한 외투를 걸치는 하룬을 본 노인의 눈매가 이상하게 좁아졌다.
“하하하!”
하룬은 노인의 웃음을 뒤로하고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왔다. 자물쇠를 연 하룬은 자신의 배낭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는 아공간을 소환해서 속옷과 방어구를 꺼냈다.
‘아! 그러고 보니 세탁을 한 번도 못 했구나.’
“나이아, 나와!”
“오랜만에 불러 주네요.”
모습을 드러낸 나이아는 오랜만의 소환에 기쁜 듯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예전에 듣기론 정령들은 감정 표현이 거의 없다고 하던데 그에게 귀속된 정령들은 전혀 달랐다.
“미안! 친구를 부를 일이 없었어.”
“진한 물 향기가 나는 것을 보니 목욕이라도 했나 봐요.”
“응. 목욕을 하고 생각을 해 보니 그동안 제대로 세탁을 한 기억이 한 번도 없어서 말이야.”
“그럼 안 되지요. 달리 할 일이 없더라도 최소 이틀에 한 번은 절 불러주세요. 몸을 씻거나 세탁을 하는 건 무척 쉬운 일이거든요.”
“미안해서 그렇지.”
하룬은 정말 자신에게는 소중한 정령을 그런 하찮은 일에 부르는 것이 미안했다. 그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을까, 물의 정령은 진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정한 시선을 보낸다.
“그래도 이번에 얻은 방어구 성능이 꽤 좋은 거라 정기적으로 세탁을 하려고 해. 그런데 하드 레더를 이렇게 물로 세탁해도 되는지 모르겠네.”
“괜찮아요. 원래 가죽 제품은 물이 닿으면 질이 떨어지고 내구력이 내려가지만 제 능력이라면 상관없어요.”
나이아는 몸 전체로 속옷과 방어구를 덮었다가 금방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정말 눈 깜박할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지만 그사이 방어구와 속옷은 깨끗하고 말끔하게 변해 잇었고, 물기마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외투예요.”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나이아는 외투를 입은 하룬의 몸 전체를 덮었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뭔가가 몸을 통째로 안아 오는 것 같은 감각에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마치 벨을 안고 있을 때처럼 따듯하고 편안한 느낌이었다.
“다 되었어요.”
눈을 떠 보니 나이아가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자신의 나신을 접촉했다는 생각에 조금은 부끄러워진 하룬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고마워. 정……말 좋았어.”
“푸훗! 저도요. 자주 안고 싶어요.”
그 말에 하룬은 얼굴이 더 달아올랐다. 마치 놀림을 당한 것 같은 기분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기도 했던 것이다. 어찌 되었건 그의 알몸을 처음 경험한 것은 정령이었다. 그냥 단순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의미를 부여한 순간 그가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정령의 몸에 작은 파랑이 일어나 금세 전체로 퍼졌고, 어느 순간 그녀의 몸체 두 배 가까이 커져 버렸다.
“나중에 또 부를게.”
“네, 보고 싶으니까 자주 불러 줘요. 할 일이 없더라도 말이에요. 라이피만 부르지 말고요.”
“알았어.”
하룬은 쑥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에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그녀를 돌려보냈다. 사라지는 정령의 눈빛이 애틋하게 변한 것은 더욱더 알 수 없었다.
옷을 모두 입고 나니 바닥에 검은 재가 떨어져 있었다. 잘 살펴보니 자신의 자신의 몸과 옷에서 빼낸 때인 것 같았다. 물기가 제거된 때는 마치 가루처럼 변해 있었다. 그걸 보자 새삼 기분이 상쾌해졌다.
하룬은 몸과 마음이 상쾌해진 상태로 1층으로 향했다. 벌써 아까의 그 테이블 위에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정식으로 준비했어요. 멧돼지 다리구이와 특제 소스를 뿌린 산나물 샐러드 그리고 맥주는 드시고 나면 피로가 싹 풀릴 거예요.”
엄마의 일을 거드는 겔란의 또랑또랑한 설명에 하룬은 배가 심하게 고팠다. 사실 그동안 먹은 음식은 육포와 마른 빵이 고작이었다. 하룬은 주머니를 뒤져 1브론짜리 동전 몇 개를 겔란에게 주었다.
“감사합니다.”
팁을 받은 겔란이 신이 나서 주방으로 향하자 하룬은 천천히 식사를 즐기기 시작했다. 멧돼지 다리 구이는 좀 질기긴 하지만 육포에 비하면 황송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또 진한 약향과 생명력을 머금은 산나물 샐러드의 풍미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입가에 거품을 묻히고 마신 맥주의 그 시원한 맛은 정말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였다. 현실에서나 게임에서 먹어 본 음식 중 가히 최고라고 할 만했다. 새삼 이곳을 소개해준 알프에게 고마움으 느꼈다.
그렇게 음식을 즐기던 하룬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하하! 벌써 식사를 하고 있었군.”
누군지는 벌써 짐작하고 있었다. 하룬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아반에게 눈으로 인사를 보냈다. 아반은 혼자가 아니었다. 아까 보았던 수행원으로 짐작되는 여자와 하룬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아가씨가 동행하고 있었다.
아반은 양해도 구하지 않고 하룬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른 두 여자들도 당연하다는 듯 그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이봐, 이프란. 우리도 같은 것으로 준비해 줘.”
며칠 이곳에 묵어서 그런지 아니면 천성적으로 상인 기질을 가져서인지 이프란에게 음식을 주문하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알았어요!”
“아무래도 이 친구 음식에 정성이 잔뜩 들어간 거 같은데, 우리 것도 똑같이 해 줘!”
“호호호. 알았다고요!”
아반이 크게 외치자 주방에서 여주인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아, 내가 소개를 미처 못 했군. 이쪽은 내 딸인 샤니고 이쪽은, 아까 봤지? 내 수행원이자 경호원 역할을 하는 묘라고 하네.”
“반갑습니다.”
하룬은 대충 인사를 하며 두 여자를 흘긋 쳐다보았다.
샤니는 아버지인 아반처럼 상인인 것 같았다. 방어구를 걸치긴 했지만 깨끗한 차림이고 무척 귀여운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나이 차이가 상당한 부녀 유저가 이렇게 동시에 한 게임을 즐기는 것을 보니 조금은 이상하기도 했지만 부럽지도 했다.
묘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는 틀림없이 전사였다. 아까 속옷 차림의 몸매를 대했을 때는 자욱한 김 때문에 8등신의 몸매만을 간신히 보았지만, 지금 보니 상당한 위압감을 발하고 있었다.
비록 무기를 휴대하지는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벨 듯 날카로운 예기를 발산하며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마나를 다루는 능력을 가지면서 예민해진 그의 감각을 통해 상당한 실력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행색으로 보아서는 산에서 약초를 채집하고 돌아오는 약초꾼들 같았는데, 무슨 일이 있는지 분위기가 어두워 보였지만 열 명이 넘다 보니 금방 실내는 시끌시끌해졌다.
하룬은 더 이상 음식의 맛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 아쉬웠다.
‘아마 나중에 몇 번 생각날 거 같군.’
하룬은 이제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었다. 아반과 더 얽히기 싫었던 것이다. 비록 음식은 좀 남았지만 목욕을 오래 해서 그런지 아니면 맥주를 한 잔 곁들인 포만감 있는 식사 때문에 그런지 모르지만 쉬고 싶었다.
“그래, 일행은 없나?”
“네.”
아반의 물음에 부러 고기를 씹으며 그냥 고개를 끄덕이던 하룬의 눈이 반짝였다. 하루의 고생을 털어 버리려는 듯 맥주를 시킨 약초꾼들의 대화가 들려온 것이다.
“빌어먹을! 셀라진 양이 모자라.”
“그러게 말이야. 그렇다고 처음 계약을 맺은 약초 상인들에게 시간을 더 달라고 할 수도 없고. 내일부터는 며칠 동안 비가 올 텐데.”
약초꾼들은 내일부터 비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게. 비가 오면 셀라진 따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데. 이곳을 찾는 약초 상인들의 숫자가 늘어난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지만, 우리가 늘 채집하던 분량이 있는데 이렇게 갑자기 양이 늘어났으니 큰일이야.”
“잘하면 타우스트만큼은 아니더라도 약초 산지로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기회인데…… 에잉!”
약초꾼들은 약초 상인들과 계약한 양을 맞추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이들이 날씨를 어떻게 예상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비 때문에 계획이 어긋난 것 같았다.
하룬은 뭔가 계속 이야기를 붙이려는 아반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많이 드십시오.”
“아아…… 쉬려나 보군. 올라가게.”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아반과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는 샤니라는 아가씨 그리고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묘를 뒤로하고 하룬은 방으로 가서 짐을 정리했다. 타우스트 남작성에서 구입한 식료품들은 마법 배낭 안에 가득 있었고,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었다.
허벌 길드의 지도책을 펼친 하룬은 사향 산양을 발견한 곳을 기재했다. 다양한 약초들이 있는 위치들은 이미 기재가 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일 넘을 알라미즈 산에 대한 정보를 확인했다. 높고 험준한 봉우리 세 개로 이루어진 알라미즈 산은 정상 부근에 와이번의 서식지가 있고, 기슭에서 중턱까지는 블랙 오크 마을들이 그리고 규모가 작긴 하지만 럼프 오크의 서식지도 있어 무척 위험한 곳이었다.
지도를 꼼꼼하게 살핀 하룬은 안전한 루트를 찾아내고 그것을 머릿속에 담았다.
“아!”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하룬은 셀라진이 든 작은 배낭을 아공간에서 꺼냈다. 약초꾼들의 대화가 생각났던 것이다. 왠지 내려가면 아반과 얽히게 될 것 같은 생각에 잠시 고민했지만, 이 지역에 있는 약초꾼들도 모두 허벌 길드에 소속되어 있을 테니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가 배낭을 들고 1층으로 내려갔을 때는 다섯 개의 테이블이 모두 꽉 찬 상태로 실내는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한쪽에는 어느새 식사를 마친 아반과 샤니 부녀가 맥주를 즐기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자경대장인 알프가 대원들과 함께 한 테이블을 차지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세 테이블에는 약초꾼으로 보이는 이곳 마을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어, 용병 친구! 이리 오시오.”
“하하! 덕분에 좋은 숙소를 구했소. 음식과 맥주 맛이 최고요.”
하룬은 미소를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하하! 내 마누라여서가 아니라 이 마을에서 이프란의 음식 솜씨를 따라갈 여자는 없소이다. 다른 좋은 솜씨들도 많지만 말이오.”
벌써 몇 잔씩들 마셨는지 빈 잔이 테이블에 가득했다. 다람쥐처럼 테이블과 주방을 오가며 심부름을 하는 겔란도 바쁜지 채 치우지 못한 상태였다.
“대장, 그 다른 좋은 솜씨라는 거에 혹시 잔소리하는 솜씨도 포함된 거 아니오?”
“자식! 그거야 당연하지. 거기에다 긴긴 밤과 관련된 솜씨도 포함되어 있어.”
격의 없는 농담들이 오가는 것을 보며 알프가 인간성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있으면 한번 사귀면 좋을 사람으로 보였다. 하룬은 순박하거나 아니면 이렇게 속셈이 얼굴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들이 좋았다.
“이리 앉으시오.”
알프가 자리를 권했지만 하룬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금방 올라가서 쉴 생각이오. 부탁이 있는데 약초꾼들을 이끄는 분 좀 소개시켜 주시오.”
“약초꾼을?”
“거래할 것이 있소. 산에서 딴 약초인데 아까 식사를 하며 들으니 마침 필요한 거 같아서 말이오.”
“그럼 나랑 같이 갑시다. 저기 긴 수염이 난 분이 우리 마을 촌장님이오. 마침 약초 상인들과 계약한 약초들 중 부족한 것이 있어 지금 회의를 하는 중이었소.”
알프는 하룬을 이끌고 약초꾼들이 앉은 테이블로 갔다.
“촌장님! 이분이 이야기를 하고 싶답니다.”
촌장은 회색으로 바랜 턱수염이 보기 좋게 난 노인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이제 막 성년이 된 청년부터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노인들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약초꾼들이 맥주를 즐기며 조용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다가 알프와 하룬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난 이 마을 촌장이오. 무슨 일이오?”
노인은 심경이 편치 않은지 별로 반기는 기색이 아니지만 알프의 소개는 무시하지 못했다.
“지나가던 용병입니다. 좋은 거래를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뵙기를 청했습니다.”
“허어, 우리 같은 약초꾼들과 좋은 거래를?”
촌장은 뜬금없다는 표정이었다. 다른 약초꾼들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하룬을 주시했다. 그 바람에 실내는 조용해져 모두가 촌장과 하룬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후크란에서 이곳으로 오던 중 우연한 기회에 셀라진을 제법 많이 땄습니다.”
“오! 셀라진을!”
촌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바람에 맥주잔이 흔들리며 술이 튀었지만 약초꾼들은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들이 걱정하고 있던 몇 가지 약초 중 가장 중요한 품목이 바로 셀라진이었던 것이다.
하룬은 배낭을 열어 셀라진 몇 개를 테이블에 꺼내 놓았다. 큰 주먹 모양으로 생긴 셀라진들은 건조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 진한 색깔과 크기를 본 약초꾼들의 눈이 커졌다.
“오! 멋진 셀라진일세. 내 이렇게 크고 좋은 셀라진은 맹세코 처음 보네.”
촌장은 감탄을 숨기지 못하고 흥분했다. 다른 약초꾼들 역시 황홀한 눈길로 셀라진을 살피고 있었다.
“원래는 다음 목적지에서 팔 생각이었는데 아까 식사를 하다가 들으니 이 약초 때문에 조금 곤란해하는 것 같아서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고맙소. 정말 고마워. 안 그래도 이 약초가 부족했소. 기한이 여유가 좀 있지만 내일부터 많은 비가 내릴 것 같아서 걱정을 하던 참이오. 알다시피 비가 오면 이 약초를 채취하는 것이 너무 힘드니까 말이오.”
촌장 말이 맞았다. 셀라진은 깎아지른 암벽 틈이나 암벽의 갈라진 곳에 있는데, 풍화작용으로 만들어진 겨우 한 줌도 되지 않는 척박한 토양에 뿌리를 박고 사는 약초라 비가 와서 바위가 미끄러워지면 채취하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던 것이다.
하룬은 배낭을 털어 안에 있는 셀라진을 다 꺼냈다. 딸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꺼내 놓으니 테이블 하나가 꽉 찰 정도로 많았다. 워낙 크고 실한 상태라서 수량에 비해 부피가 컸다.
“그래, 셈은 어떻게 쳐 드려야 하나?”
만면에 웃음기를 머금은 촌장은 조금 곤란한 듯 하룬을 쳐다보았다. 팔기는 해 보았지만 사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라 나름 남감했던 것이다. 보통 품질도 아니고 상품의 약초이니 셈하는 것은 더 어려웠다.
“일전에 타우스트에서 가츠라는 분과 교분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오오! 가츠! 잘 아네.”
“연배가 비슷해서 그러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상인도 아니고 약초꾼도 아닌 용병입니다. 그분과의 인연으로 약초에 대해 몇 마디 들은 적이 있는데 용케 저놈이 보이더군요. 그래서 우연히 딴 약초이니 알아서 셈해 주십시오.”
그의 말에 촌장은 얼굴이 환해져 그의 손을 반갑게 잡고 흔들었다.
“허허, 이런 반가울 데가. 가츠와 인연이 있는 용병이라니. 그럼 혹시 그 늙은이가 원하던 아이언…… 그놈을 구해다 준 건가?”
“네."
"허허허! 자네, 아주 큰일을 했군. 그 늙은이가 평생 원하는 것을 구해다 주다니. 덕분에 그 늙은이 웃는 모습을 보게 되었군. 이봐, 알프! 귀한 손님이니 일단 가서 맥주부터 좀 가지고 오라고.“
촌장은 알프에게 맥주를 시켰다. 돌아가는 사정을 대충 짐작한 알프가 재빨리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 앉게. 다들 인사해. 가츠를 도운 용병이야. 우리에게도 친구라고 할 수 있지.”
촌장의 말에 약초꾼들이 분분히 일어나 하룬에게 인사를 했다. 모두들 가츠 노인을 알고 있는지 반가운 얼굴이었다. 하룬은 약초꾼들에게 셀라진을 발견한 장소를 설명해 주었다. 그가 다시 이곳으로 올 일이나 약초를 캘 일은 없으니 아까울 것이 없었다.
약초꾼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는 귀한 약초가 자생하는 장소였다. 그것은 한 개인 혹은 마을의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정보를 쉽게 알려주는 하룬이 이들에게 호감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좋은 분들과 같이 맥주라도 마시면서 친교를 나누고 싶은데, 후크란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이 너무 험하고 힘들어 몸이 많이 지쳤습니다. 미안한 말씀이지만 전 피곤해서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셈은 촌장님이 알아서 해 주십시오. 돈이 아니라 상비약이라도 상관은 없습니다.”
“허어, 이런! 내가 피곤한 사람을 붙잡고 있었구먼. 그나저나 험하기로 소문난 후크란에서 이곳까지 왔다니 자네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 하긴 가츠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정도면 실력이야 알아볼 정도겠지. 알았네. 쉬시게. 셈은 내일 일찍 와서 하는 걸로 하세.”
하룬은 촌장과 약초꾼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정말 몸이 많이 피곤했던 것이다.
하룬은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이지만 옷을 걸친 하룬은 밖으로 나왔다. 미명에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있는 밖의 공기는 무척 상쾌했지만 눅눅한 느낌이 들었다.
약초꾼들이 말하길 며칠 동안 비가 올 거라고 하더니 아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그런 것을 어떻게 예측하는지 정말 신기한 노릇이다.
하룬은 메신저 워킹 스킬을 사용해 넓게 펼쳐진 구릉지를 향해 걸었다. 그 어느 때보다 신선하고 맑은 마나가 발바닥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오자 익숙하게 마나 오션의 마나를 움직여 상반신 정중앙 선을 일주하는 마나 플로를 운행시켰다.
아직 앉아서 호흡을 통해 마나를 흡입해서 마나를 돌리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이틀 동안 산중에서 노숙을 하며 해 본 결과로는 메신저 스킬을 펼치며 동시에 마나 플로를 돌리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한참 동안 낮은 구릉지를 돌며 메신저 워킹이나 마나 플로를 돌리던 하룬은 자신의 몸 내부에서 울린 무슨 소리를 들었다.
퍼억!
뭔가가 터지는 소리였다.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앉아 마나 플로에 정신을 집중했다.
‘언제 이렇게 빨라졌지?’
마나는 바로 어제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마나 로드를 타고 상반신을 일주했다. 마나가 순수한 곳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방금 들었던 그 소리와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기분 좋은 일이기에 더욱 정신을 집중했다.
퍼억!
다시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어깨 근처에서 소리가 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으로 의식 일부를 옮긴 하룬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나 플로를 지나는 통로가 아닌 마나 로드였지만 예전과는 달리 무척이나 넓어진 것을 발견한 것이다.
‘언제 이렇게 넓어졌지?’
항상 운행하는 마나 로드를 제외한 곳들은 무척 비좁은 통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곳은 달랐다. 늘 마나를 돌리던 마나 로드만큼은 아니지만 무척이나 넓은 통로를 가진 것이다. 왜 이곳이 이렇게 넓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룬은 다시 마나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마나와 마나가 지나는 주변을 면밀하게 관찰한 하룬은 드디어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강한 밀도로 인해 액화된 것으로 보이는 마나가 익숙한 마나 로드를 빠른 속도로 질주하자 그 마나 로드와 연결된 좁은 열두 곳이나 되는 마나 로드들의 입구 부분이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슨 원인인지는 몰라도 마나가 마나 로드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하룬은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마나 플로를 멈추고 마나를 어깨 부위로 흘렸다. 이미 상당한 넓이로 뚫린 마나 로드를 쉽게 통과한 마나는 팔꿈치 부위까지 빠른 속도로 움직였지만 그곳에서 병목현상을 겪었다. 팔꿈치 부위부터는 다시 마나 로드가 좁아졌던 것이다.
마나는 강력한 압력을 만들었기 때문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더 이상 강행하다가는 마나 로드가 찢길 것 같은 불안감에 마나의 세기와 양을 조절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윽고 좁은 마나 로드를 흘러 손바닥 가운데까지 흐른 마나가 느껴졌다. 그것을 손가락 끝까지 이동시키자 손가락 끝에서 희끄무레한 빛이 나왔다. 그것은 바로 손가락을 통해 외계로 나온 마나가 뿜어내는 마나광이었다.
드디어 마나를 의지로써 의식한 곳으로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전에도 비록 암기나 본 소드에 마나를 주입할 수 있었지만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의식적으로 마나를 목표로 한 곳까지 끌어내고 그 움직임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기쁨에 크게 웃고 싶었지만 아직 시험은 끝나지 않았다. 마나를 거꾸로 돌린 하룬은 이제 왼손을 향해 마나를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왼쪽 어깨 부위로 향하는 마나 로드가 오른쪽과는 달리 좁디좁은 상태 그대로였던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한참을 노력했지만 그 좁은 마나 로드를 통과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은 얼마 되지 않았고, 그 세기도 약해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으음, 어쨌든 좋은 걸 알았구나. 마나 플로를 돌리면 원인은 알 수 없지만 그것에 의해 또 다른 마나 로드들이 넓어지게 된다. 마나 로드들이 넓어지지 않으면 마나를 쉽게 이동할 수 없어.’
안타깝게도 팔꿈치 부위부터 손바닥에 이르는 마나 로드들은 어떻게 넓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라도 메신저 워킹 스킬을 펼치면서 마나 플로를 돌리지 않고, 정신을 집중해서 마나 플로를 돌려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어깨 부위의 마나 로드가 넓게 뚫린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난 김에 하체로 흐르는 마나 로드들을 점검해 보았다. 메신저 워킹 스킬 때문인지 마나 오션에서 양 발바닥으로 향하는 마나 로드들은 넓게 뚫려 있었다.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마나가 쉽게 발바닥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하룬은 현재 상방신의 정중앙을 뒤에서 앞으로 도는 단순한 마나 플로를 운용할 뿐이지만, 차제에는 전신을 관통하는 큰 마나 플로를 운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야만 축적한 마나를 마음먹은 곳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것은 흔히 이곳 비욘드 세상에서 익스퍼트라고 불리는 등급의 검사가 되는 길이었다. 자신은 이제 그 입구에 완전하게 들어섰다.
이제 목표가 눈에 잡힐 듯 들어왔다. 마나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 단순히 근육의 힘을 쓰는 것에 비할 바 없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룬은 내친김에 커브 피치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일정한 마나 로드를 통해 마나를 이동시키자 손바닥에 도착한 마나는 그의 의지를 쉽게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