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배신 (61/278)

《배신》

 세 사람과 헤어진 하룬은 서둘러 수련 캠프로 향했다. 벨이 원하는 것들을 구할 자금도 마련할 방도를 찾아냈고, 고대 던전이라는 엄청난 목표를 가지게 되어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좋았다.

 후크란 주봉까지는 심한 오르막길이고 위험했지만 두어 시간 만에 달리듯 도착할 수 있었다.

 주봉 근처에서 흐르는 땀을 잠시 식힌 하룬은 원래의 캠프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아직도 저기 있으려나?”

 슐레이만 후작가의 레드이글 기사단이 장악한 수련 캠프를 바라보던 하룬은 혹시나 싶은 생각에 우회하지 않고 근처까지 한번 가 보기로 했다. 벌써 후크란 산맥 서쪽에 보석 광산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퍼졌을 테니 유저가 낀 그들 역시 정보를 입수하고 이미 그곳으로 향했을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조심스럽게 수련 캠프를 향해 이동하던 하룬은 이전과는 달리 능선에서 캠프로 내려가는 산길이 잘 닦여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많은 인원들이 정기적으로 움직였다는 건데.’

 이전에 풀이 무성하게 나 있던 길은 이제 완연한 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룬은 기척을 죽이고 아래로 내려갔다.

 마침내 캠프의 정문이 보이는 지점까지 내려간 하룬은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후크란 기사단 특유의 갑옷이 보였다. 이전에 세반 자작이 입고 있던 것인데 붉은 자칼의 머리 문양을 가슴에 새긴 경갑주였다.

 후크란 기사단이 어떤 이유로든 캠프를 다시 장악한 것이 틀림없었다.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하룬을 정문을 지키던 기사가 알아보았다.

 “이런! 돌풍 용병대장 아닙니까?”

 “하하하! 맞습니다. 이제 막 돌아오는 길입니다.”

 이름은 깅거나지 않지만 분명히 기억 속에 있는 얼굴이었다. 기사답지 않게 곱상한 얼굴을 가진 그 기사는 나이가 어린 축에 속했다.

 “자작님을 비롯한 기사단 사람들과 돌풍 용병대원들이 많이 기다렸습니다. 아! 돌풍 용병대원들은 지금 저 아래 계곡으로 몬스터 사냥을 겸한 실전 훈련을 나갔습니다. 먼저 본부에 계신 자작님을 만나 보십시오.”

 용병 알기를 뭣같이 취급하는 긍지 높은 기사지만, 그에게는 그런 의식이 전혀 없었다. 그만큼 돌풍 용병대가 인정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고맙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한창 회의 중일 테니 다들 계실 겁니다. 사람이 없어 안내는 못 해드리겠군요. 아, 참! 이미 내부는 잘 아시지요?”

 당연히 잘 안다. 그들을 이 수련장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잠입을 했으니 말이다.

 “네. 그럼 수고하세요.”

 하룬은 강렬한 햇볕에 마른 뱃가죽을 드러낸 넓은 캠프를 지나 본부로 향했다. 이전에 자작을 비롯한 기사단 수뇌부를 구해 낸 그 건물이었다.

 본부 건물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마치 그를 반기기라도 하는 듯 말이다.

 실내의 긴 탁자에는 기사단 수뇌부들이 앉아 있었는데, 무언가 심각한 안건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듯 그 열기가 밖에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우리도 움직여야 합니다.”

 “맞습니다. 황녀님의 일만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명령이 오기 전에는 움직일 수 없소.”

 기사들은 뭔가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고, 세반 자작은 땀을 흘리며 그들을 막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상황에 곤란해진 듯 밖으로 고개를 돌리던 홀이 하룬을 발견했다. 그녀는 그래도 말석이나마 회의에 참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룬 대장!”

 홀이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까지 뛰어나왔다. 그냥 그대로 하룬의 품으로 달려들 것처럼 뛰어오던 홀은 하룬 바로 앞에서 겨우 멈추고는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드디어 왔군요. 소식이 없어서 걱정했어요. 대원들은 걱정 말라고 했지만 난 자꾸 안 좋은 생각이 들어서…….”

 뭐랄까? 하룬은 문득 경험해 보지 못한 기이한 감흥이 전신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자신을 반겨 주어 기분이 좋거나 흐뭇한 것을 벗어나 가슴이 묘하게 들끓는 기분이었다. 말을 하다 말고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홀의 하얀 목덜미를 보자 열기와 함께 찌릿한 그 어떤 감정이 몸 전체를 벼락처럼 관통했다.

 “거, 걱정을 끼쳐서 미안합니다. 처리할 일이 생겨 좀 늦었습니다.”

 그답지 않게 말까지더듬는 하룬의 얼굴도 조금은 열이 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불편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두 사람의 어색한 만남과 두 사람 사이를 오가던 묘한 감종을 오래 두고 볼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하하! 반가운 사람이 돌아왔군.”

 세반 자작은 마치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온 듯 밖에까지 나와 하룬을 맞이했다. 그의 뒤를 따르는 기사단 수뇌부들 역시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좀 늦었습니다.”

 “어서 들어오게. 안 그래도 세상 소식을 제대로 듣지 못해 답답했네.”

 하룬은 자작을 따라 본부 안으로 들어갔다. 자작은 그를 자신의 바로 옆자리에 앉혔다.

 “어떻게 된 겁니까? 하마터면 이곳을 지나칠 뻔했습니다.”

 “하하! 레드이글 기사단이 보석 광산을 찾아 떠나는 바람에 무주공산이 된 이곳을 탈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름 전쯤 서남쪽으로 내려갔는데 잠시 타우스트를 다녀온 기사들의 이야기로는 보석 광산을 찾아간 것 같습니다.”

 홀리오 남작이 하룬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네. 맞을 겁니다. 지금 세상은 이곳 후크란 산맥 중서부에 있다고 확인된 보석 광산 이야기로 떠들썩합니다. 한가락하는 실력자들은 물론이고 골든 배틀의 당사자들 역시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룬의 말에 세반 자작을 비롯한 기사단 수뇌부들이 술렁거렸다. 그들은 후크란 산맥에서 보석 광산이 발견된 것을 확인했고 이곳을 점령하고 있떤 레드이글 기사단이 보석 광산을 찾아 떠났을 거라는 추측만 할 뿐, 그 밖의 자세한 정황은 모르고 있었다.

 하룬은 자신이 보석 광산을 안내했다는 사실을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라도 알려질 수 있겠지만 방금 전까지 보석 광산을 찾아가자던 일부 기사들의 의견을 들었던 것이다. 잘못하면 후크란 기사단까지 이끌고 거길 가야 하는데 그곳은 너무 위험했다.

 아이언 스네이크들도 그렇지만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던 흉포한 럼프 오크들을 생각하면 이들은 절대로 거기로 가면 안 된다. 잘못해서 그곳에서 전멸이라도 당한다면 브리엘라 황녀와 데브론으로서는 비빌 언덕이 없어지는 것이다.

 “정통한 소식통에 의하면 그곳 근처에는 강력한 독을 사용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몬스터들이 광범위하게 서식한다고 합니다. 또한 후크란 전역에 뿔이 달린 오크 종족이 사는데 일반 전사의 경우 오크보다 두 배 정도는 강하고, 다섯 마리를 이끄는 소전사장의 무력은 익스퍼트 급에 버금갑니다. 우리 돌풍 용병대원들도 일전에 이곳으로 오면서 그놈들과 상대해 본 경험이 있는데, 정상적으로 싸워서는 쉽게 해치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놈들이 무려 수십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때문에 이미 후크란으로 들어선 일부 기사단과 이방인 길드 삼천여 명이 몰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정말이오, 하룬 대장?”

 세반 자작이 깜짝 놀라 다시 확인을 요구했다.

 “네. 확실합니다. 이방인들은 한 번 죽을 때마다 실력이 일정 폭 하락하지만 부활을 할 수 있는 존재라서 그 소식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하룬의 말에 기사단 수뇌부들의 얼굴이 침중하게 변했다. 그들 역시 럼프 오크의 존재를 모르지 않았다. 이 수련 캠프가 있는 후크란 북쪽은 와이번들이 대량으로 서식하는 곳이라 럼프 오크는 쉽게 찾아볼 수 없지만, 조금만 남쪽으로 내려가면 그놈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곳 캠프를 개척할 초기에는 그 악마 오크들에게 많은 사상자를 낸 경험이 있었다. 한데 그런 놈들이 무려 수십만이라니 기가 질려 버렸다. 거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또 다른 몬스터까지 광산 주변에 있다니 도무지 의욕이 생기질 않았다.

 “휴우, 단장님 말대로 우린 여기서 당분간 더 대기를 해야겠군요.”

 부단장 중 한 명인 밀슨 남작의 말은 힘이 없었다. 그동안 반대를 하는 부단장 홀리오 남작과 단장인 세반 자작을 그와 수석 기사들이 설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기사단이 당했는지 그것을 혹시 아는가?”

 “네. 5황자 진영으로 분류되는 세오리지 후작가와 8황녀 진영의 알슨 백작가 그리고 7황자를 지지하는 멘도사 백작가의 기사단 세 개가 전멸을 했답니다.”

 하룬은 세반 자작의 물음에 방송에서 본 대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웬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쪽이 없네.”

 세반 자작은 이상한 듯 혼잣말을 했다. 그러자 홀리오 남작도 눈을 빛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1황자 쪽 기사단이 없네요. 그들 진영에는 여기에서 가까운 영지를 가진 푸토린 백작가가 있는데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1황녀 진영으로 분류되는 마일란 백작령도 타우스트 남작성과는 말을 타고 이틀 거리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합니다.”

 하룬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럼 혹시?’

 맞을 것이다. 강자로 분류되는 세력들은 이곳이 아니라 고요의 땅에 있는 고대 던전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선발대로 이방인들이 결성한 길드를 보내고 후발대로 기사단 전력을 보냈을 것이 확실했다.

 그 순간 하룬은 이 일에 정보 길드들이 관여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무튼 자네의 정보가 아니라면 우리도 심각한 전력의 손실을 당할 뻔했군. 사실 기사들 상당수가 보석 광산을 찾아가자는 의견을 개진하고 있던 참이었네. 브리엘라 님의 명령이 없어 미적거리고 있었지만 기사들의 충정을 무시할 수도 없어 무척 고민하던 참이었네. 자네가 오지 않았거나 늦게 왔다면 보석 광산으로 향했을 수도 있었어. 그저 부족한 자금을 확보할 생각만 했지, 그곳이 그렇게 흉험한 상황일 줄은 몰랐네.”

 세반 자작도 꽤 많이 갈등한 모양이었다.

 “우리 기사단의 실력이야 내가 자신하지만 갑옷을 비롯해서 무기도 그렇고 모든 것이 열악한 상황에서 그곳으로 갔다면 틀림없이 끔찍한 피해를 당했을 거야.”

 세반 자작은 그 말을 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수뇌부들 역시 자작과 같은 심정인 듯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그 보석 광산에서 보석만 몇 개 주우면 골든 배틀을 치를 우리 진영의 자금 사정이 많이 좋아질 텐데.”

 “그러게.”

 그래도 끝내 욕심 한 자락은 놓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후우, 황제라는 자리가 뭔지…….’

 하룬은 그들의 반응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룬은 충성심이라고 믿고 있는 마음속에 깊숙하게 드리워진 출세에 대한 그들의 강렬한 욕구를 느낄 수 있었다.

 도 아니면 모인 골든 배틀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군에 대한 충성심으로 포장된 신분 상승의 욕심 때문에 죽어갔을까?

 어쩌면 주기적인 골든 배틀로 제국 황실이나 원로원은 더 큰 욕심을 키울 수도 있는 귀족들의 욕망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고 통제해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따.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 황제가 되기라도 하면 졸지에 평민에서 귀족으로, 하급 귀족에서 상급 귀족으로 신분이 바뀌니 사회가 정체되지 않고 역동적으로 흘러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평민들과 농노들의 삶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골든 배틀로 인해 날이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었다.

 직할령과 원로원에 속한 몇몇 전승 귀족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영지들은 골든 배틀에 대비하기 위한 군자금을 마련하려는 영주들로 인해 겨우 죽지 않고 살 수 있을 정도로 곡식을 제외한 모든 생산물을 수탈당하고 있었다.

 그것만이라면 다행이지만 만 15세 이상의 장정들이 주기적으로 골든 배틀을 위해 강제로 전쟁에 내몰리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남성의 수가 여성들에 비해 절반도 안 되는 성비의 불균형 현상이 무려 1,000년에 걸친 오랜 기간 동안 만연했다.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황제 직할령이나 원로원에 속한 몇 귀족가의 영지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영지민의 이탈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제국법에 의해 직할령이나 원로원에 속한 귀족가의 영지로 불법 이주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그 때문에 걸리면 즉결 처형을 당하거나 신분이 노예로 강등되는 등 혹독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평민들은 직할령이나 몬스터들의 위협이 상존하는 지역으로 도망치는 일이 다반사였다. 농노들 역시 목숨을 걸고 수탈이 심한 영지에서 도망치는 일이 빈발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사실 용병들의 주요한 의뢰 중 하나가 이런 도망친 평민이나 농노들이 개척한 마을을 찾아내고 그들을 해당 영주에게 인계하는 일이었다. 이런 개척 마을이 제국 전체에 얼마나 되는지는 자세하게 알려지지도 않았다.

 잠시 자신만의 생각에 빠졌던 하룬은 배낭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곳 식량 사정이 어떤지 몰라 대충 사 왔습니다. 밀가루 50포대와 소 스무 마리분의 고기 그리고 말린 채소류입니다.”

 하룬의 말에 자작을 비롯한 사람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오, 이런! 안 그래도 식량 사정이 어려워 요즘은 사냥을 하느라고 단원들의 수련 시간까지 뺏고 있는데 잘 되었네.”

 “하룬 대장, 고맙습니다. 덕분에 한 걱정 덜었습니다.”

 “하하하! 그동안 제대로 된 빵도 먹기 힘들었는데 하룬 대장 덕분에 살았습니다.”

 먹을거리를 반기는 사람들을 보며 하룬은 마음이 뿌듯했다. 아무리 기사들이라고 해도 먹지 않고서는 제대로 살 수가 없는 법이다.

 “안 그래도 그동안 모은 가죽들을 가지고 타우스트 성에 다녀올 생각까지 하고 있던 참이었소. 정말 고맙소.”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하하하! 우리의 목숨은 물론 위장까지 구해주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는담.”

 내심 식량 문제로 걱정들을 많이 했는지 기사단 수뇌부들의 분위기는 단숨에 밝아졌다.

 “몸은 괜찮으신 거죠?”

 “네. 걱정해 주신 덕분에요.”

 하룬은 홀과 함께 점심 식사 후에 캠프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다. 홀은 정말로 걱정을 많이 했는지 그윽한 시선으로 하룬을 바라보았다.

 “대원들은 잘 지냈어요. 수련의 혹독함만큼이나 그 실력이 일치월장해서 이제는 기사들과 대련을 하거나 몬스터들과 실전을 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예요. 그래서 수련에 무슨 비밀이 있나 싶어 요즘은 우리 기사들도 대원들을 따라 계곡물 속으로 들어가서 수련을 하기도 한답니다.”

 “그랬습니까?”

 하룬은 기분 좋은 미소를 떠올렸다. 대원들이 얼마나 수련에 매진했는지 그림처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저도 어릴 때부터 수련을 많이 해 봤지만 이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처음이에요. 아버님과 기사단 수뇌부들마저 감탄할 정도거든요.”

 “하하하! 용병이 믿을 거라고는 튼튼한 몸과 실력밖에 없으니 죽기 살기로 수련하는 겁니다. 우리 같은 용병들이야 배경도 없고 후원자도 없으니 그저 열심히 노력할 수밖에요. 그게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요.”

 “어머,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지요. 브리엘라 님과 데브론 님이 얼마나 하룬 대장과 돌풍 용병대를 믿고 있는데요. 우리 후크란 기사단도 당신들의 형제잖아요. 저도 있고요.”

 홀이 짐짓 서운하다는 듯 토라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그녀에게서 성숙한 여인의 교태가 물씬 풍겨 나와 하룬의 가슴을 흔들었다. 순간 이전에는 느끼지 못한 매혹적인 향기를 그녀에게서 맡을 수 있었다.

 하룬은 깊이 그 향기를 들이마신 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붕 뜨는 것처럼 달콤하고 약간은 어지러운 기분이었다.

 ‘후우, 여자는 정말 요물인가 봐. 그렇게 얼음장 같던 홀에게 이런 면이 있을 거라고 누군들 상상했겠어?’

 하룬은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묘한 향기에 질식되는 것 같은 기분에 심호흡을 하며 미리 준비한 것을 품 안에서 꺼냈다.

 “맞아요. 후크란 기사단이 우리 돌풍 용병대의 든든한 형제라는 것을 잠시 잊었어요. 앞으로 조심할게요. 그리고 이것은 선물입니다.”

 “선물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홀의 표정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그가 꺼낸 물건을 기대와 설렘이 가득한 눈으로 주시하는 홀의 얼굴이 따가운 햇살 때문인지 붉게 변해 있었다.

 “아름다움의 축복이 깃든 팔찌입니다. 미용에 대한 그 효용도 놀랍지만 정말 아름다워서 샀습니다.”

 하룬이 꺼낸 것은 타우스트 성에서 산 팔찌였다. 차고 있으면 변비가 없어지고 피부는 좋아지며 잔주름이 생기는 것을 막아 준다는 미용에 관한 효능을 가지고 있는 레어 아이템으로, 유저들에게는 별로 인기가 없지만 NPC 여인들에게는 없어서 가질 수 없는 귀한 물건이었다.

 하룬은 시장을 보다가 운 좋게 이 물건을 구한 유저로부터 비교적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그 유저는 사향 여우를 사냥하다가 우연히 나온 이 물건이 레어 급이라는 것에 흥분했지만 장사는 시원치가 않았다. 마나를 올려 주는 것도 아니고 축복이나 치료 계통의 효과도 없는 이 아이템은 유저들에게는 한낱 장식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며칠 동안 유저들을 상대로 기판을 열었지만 끝내 인기가 없어 팔지 못한 이 물건을 하룬에게 겨우 20골드에 넘긴 것이다. 아마 이 물건이 제국 경매에 올라갔으면 50골드는 족히 받았을 것이다.

 섬세하고 정교한 문양이 중첩되게 새겨진 팔찌는 준보석을 가공해서 만든 작은 마나석들이 깨알처럼 박혀 있어 그 외양부터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얼굴이 발그레해진 홀은 떨리는 손으로 그 팔찌를 만지더니 이내 손을 뒤로 뺐다.

 “저어…… 직접 채워 주실래요?”

 “아!”

 하룬은 여자에게 이런 선물을 할 때는 직접 착용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황급히 대답을 하며 홀의 손을 잡았다.

 부르르.

 잡은 그녀의 손으로부터 미세한 떨림이 전해왔다. 덩달아 그까지도 기분이 이상해지려고 했다. 이런 경험이 없는 하룬으로서는 곤혹스러웠지만, 눈을 질끈 감고 그녀의 가늘고 하얀 팔목에 팔찌를 채워 주었다.

 홀은 마치 홀린 듯 자신의 팔목에 채워진 팔찌를 응시했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팔찌예요. 정말 고마워요. 전…… 남자에게 어떤 선물을 받은 것은 처음이에요.”

 얼굴을 들어 자신을 보지도 못하고 팔찌를 내려다보며 수줍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홀의 모습이 묘하게 아름답게 보였다. 그녀가 그 무심한 얼굴로 한동안 동행한 홀이 맞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 말을 하는 사이 어느새 분홍색으로 변한 그녀의 긴 목이 눈을 강하게 자극했다.

 “좋아하시니 다행이네요.”

 하룬은 선물을 하고도 받는 홀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서 불안하고, 이 자리가 불편했다. 팔찌를 바라보다 그를 바라보는 홀의 눈에 정감이 가득 담겨 이었던 것이다. 이제껏 여자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홀의 아름다운 얼굴이 처음으로 가슴속 깊이 들어왔다.

 ‘내가 왜 이러지? 벨에게도 그렇고 이제 홀에게까지. 아무래도 내가 이상해졌나 봐.’

 하룬은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묘한 마음의 동요에 사로잡혔다.

 다시 한 번 성장한 벨을 상대로 느꼈던 것과 동일한 반응이다. 보는 순간 심장이 미친 듯 뛰고 온몸이 불구덩이에 들어간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자꾸 같이 있고 싶고 가까이 붙고 싶었다. 심지어는 눈에 아른거리기까지 했다.

 생소한 감정에 당황하긴 했지만 하룬은 왠지 모를 달콤하게 느껴지는 이런 감정이 싫지는 않았다. 다만 당황스러울 뿐이다. 주변에 조언을 구할 그 어떤 이도 없는 하룬으로서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이럴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후유.”

 하룬은 홀이 눈치채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이상한 상태가 된 자신을 홀이 알아차릴까 봐 두려웠다.

 “그럼 이만.”

 하룬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더 이상 여기에 홀과 있다가는 무슨 행동을 할지 몰랐다. NPC를 상대로 연정이라도 느낀 것인지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홀이 강하게 의식되고 있었다.

 “저어…….”

 기어들어 가는 것처럼 가는 홀의 말이 들려왔지만 하룬은 눈을 질끈 감고 대원들이 묵고 있다는 숙소로 뛰어갔다.

 “후와!”

 숙소 앞에서 참았던 숨을 내쉰 하룬의 몸은 마치 한 번도 숨을 쉬지 않고 달려온 것처럼 후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전에 없이 몸에 진땀까지 흐르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이상하긴 이상했다.

 ‘내가 NPC를 상대로 무슨 추태를 부린 거야?’

 하룬은 자신을 질책하며 숙소로 들어갔다. 곧 점심을 먹으러 돌아올 대원들이 혹시 몰래 숨어 본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금방이라도 대원들이 나와 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저 멀리서 홀이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묘한 기분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는 하룬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대원들이 숙소로 돌아온 것은 점심을 먹고 나서였다.

 “대장!”

 티노를 위시로 다섯 대원들은 숙소 문을 벌컥 열고 하룬을 찾았다.

 “늦으셨군요. 걱정했습니다.”

 “반가워요, 티노. 좀 바빴습니다. 이곳 후크란 산맥에서 보석 광산이 발견되는 바람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일을 처리하는 것도 시간이 많이 걸렸고요.”

 “별일 없이 건강하시니 다행입니다.”

 티노는 푸근한 웃음으로 그를 반겨 주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얼굴이 활짝 핀 것이 나중에 깊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았다.

 “하하하! 필립, 잘 있었지?”

 “그럼. 대장도 얼굴을 보아하니 험한 꼴은 안 당했나봐.”

 필립은 검게 탄 얼굴로 농담을 건넸다. 그동안의 수련이 꽤 효과가 있는지 필립에게서는 전에 찾아보기 힘들던 여유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난 하도 대장이 안 와서 도망친 줄 알았어.”

 “바보! 도망치긴 왜 도망치니? 내 치료비를 하나도 못 받았는데.”

 지탄과 라트리나가 농담을 하며 그를 반겼다. 두 사람 역시 필립처럼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대장이 가죽 판 돈 가지고 난 줄 알았지. 그건 안 아까운데 우리를 완전히 해독시켜 주지도 않고 멀리 간 줄 알고 걱정했잖아. 이제 겨우 한몫 제대로 할 수 있는 실력이 생겼는데 말이야.”

 시린느 역시 이제는 제법 무인의 기세가 풍기는 것이 수련을 열심히 한 것 같았다.

 “다들 열심히 수련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네. 모두들 수고했어.”

 하룬은 제일 먼저 가죽을 판 대금을 배분하기로 했다. 그동안 수고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 들 것 같아 대원들이 좋아할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먼저 가죽을 판 돈부터 배분하도록 하지. 가죽 값은 모두 5,000골드를 받았어. 여기 후크란의 몬스터 가죽들은 다른 지방 것보다 두 배에서 세 배는 비싸더군. 거기에 시린느가 워낙 도축을 잘한 데다 잘 관리를 한 덕분에 굉장히 높은 가격을 받았지.”

 5,000골드라는 말에 대원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티노를 제외한 재수 4인방이 비록 상당한 규모의 용병단 단주들의 자녀들이라지만, 그들로서는 한 번도 만져 본 적이 없는 큰돈이었던 것이다.

 “너희들이 부탁한 속옷을 비롯한 의복류와 포션과 각종 의약품, 소모품 그리고 식량을 구입하는 데 모두 1,400골드를 썼어. 대원들마다 가죽과 같은 무산물을 나누는 비율 같은 것이 우리는 없으니, 남은 3,600골드를 똑같이 나누기로 했다. 우리가 여섯 명이니 한 사람당 600골드씩 가질 수 있어.”

 하룬은 100골드짜리 미스릴 주화로 각자의 몫을 주었다. 600골드라는 거금을 받아 든 대원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주화를 쥔 손을 떨었다. 용병 생활을 해 보았던 티노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이런 엄청난 거금을 그 짧은 시간 내에 벌어본 적이 없던 터라 형언하기 힘든 감동이 찾아왔던 것이다.

 “내가 이런 큰돈을 벌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

 유달리 겁이 많았던 지탄이 갑자기 눈에 습기가 차는지 고개를 푹 숙이며 울음 섞인 말을 털어놓았다.

 “그러게. 이제 용병 생활을 한 지 겨우 석 달밖에 안 됐는데 이런 큰돈을 받다니. 이거 용병 생활을 계속하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는걸.”

 필립도 감개가 무량한 모양이었다. 어쨌건 그가 처음으로 번 돈이고 그 액수가 막연히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많았던 것이다. 한 사람의 용병으로 제 몫을 해서 받은 땀과 고생의 대가였으니 그걸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전과 같을 순 없었다.

 하룬은 필립의 말을 들으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렇게 되면 차라리 용병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라트리나의 말은 그 느낌이 이상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룬은 시린느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기사잖아. 나중에 정식으로 서임을 받게 되면 준귀족 신분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용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분이야. 이깟 돈은 기사가 되면 얼마든지 벌 수 있어.”

 시린느는 자신이 벌써 기사라도 된 듯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라트리나를 비웃었다.

 “잠깐! 기사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하룬의 말에 대원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변했다. 특히 티노는 무척이나 곤란한 얼굴로 하룬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우리 모두 단장님에게 기사 권유를 받았어.”

 대답을 하는 필립은 아주 당당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하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런 경우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당연히 다들 그 제의를 받아들였지. 왜? 대장도 제의를 받지 않았어?”

 하룬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격하게 뛰었던 것이다. 어찌 된 사정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후크란 기사단을 구해 내고 같이 지내는 사이 이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것을 보고 세반 자작이 그런 제의를 했을 것이다.

 후크란 기사단은 사람이 부족했다. 그런 참에 성실하게 수련을 할 뿐 아니라 발전 가능성이 보이는 젊은 돌풍 용병대원들이 눈에 들어왔으니 그런 파격적인 제의를 했을 것이다.

 사실 시린느와 티노의 실력은 기사가 되기에는 한참 부족할 뿐 아니라 발전 가능성도 낮지만, 다른 세 사람에게만 그런 제의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돌풍 용병대가 생명의 은인이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티노는 데브론과 오랜 인연까지 가지고 있으니 거부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티노는 민망한지 아예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래서 대장인 내게 허락도 받지 않고 그렇게 결정을 했다는 건가?”

 묵직하게 가라앉은 하룬의 말에 실내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다.

 “영예로운 기사가 될 수 있잖아. 험한 일을 하며 풍찬노숙을 밥 먹듯 해야 하면서도 손가락질이나 당하는 용병보다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기사가 될 수 있는데 누가 거부하겠어? 게다가 우리가 말이 용병대지 겨우 여섯 명이 무슨 용병대고, 그 속에서 대장이 무슨 권한이 있어 우리가 이런 결정을 하는 것을 막을 건데?”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필립의 태도에 하룬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래, 맞아! 처음 용병대를 만들 때 생각을 해 봐. 우리는 해독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장의 말에 따른 거라고. 거기다가 첫 의뢰만 해도 그래. 지금 생각하면 우리의 실력을 크게 올려 준 의뢰지만, 대장은 자신의 의견을 고집해서 목숨이 위태로운 의뢰를 받아들였잖아.”

 시린느의 말이 마치 비수처럼 살을 베어 냈다. 그래도 처음에는 많이 미워했지만 같이 생활하면서 정도 제법 들어 나름 무척 신경을 썼던 하룬은 생살이 베이는 듯 고통스러웠다.

 “난 별로 불만은 없지만 그래도 그동안 너무 힘들었어. 짐이란 짐도 다 내가 들고, 힘든 일도 다 내가 했어.”

 “나도 불만은 있지만 경비나 해독약 값도 내지 못한 처지였으니 입 다물게.”

 지탄과 라트리나까지 분위기에 편승했다. 하룬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 전개되자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녀석들을 데리고 뭘 하겠다고 설쳐댔으니 나도 참 한심하다!’

 이런 것을 배신당한다고 하나? 하룬은 너무 가슴이 아팠다. 자기 딴에는 대원들의 실력 향상을 위해 돈도 아끼지 않았고 자신의 레벨 업까지 포기해 가면서 대원들의 실전 능력을 높여 주었는데, 이제 와 이런 소리를 들으니 억장이 무너지고 있었다.

 “미안해요, 대장.”

 그래도 마지막에 티노가 한 사과에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티노의 사정이야 눈에 보이듯 훤한 하룬이기에 그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 이제야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 티노의 앞날이 정말 안타까웠다. 이미 중년이 넘은 그의 나이로 기사는 어림도 없었다.

 이들은 기사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주군에 대한 세뇌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각고의 수련 과정을 거친 후에 탄생하는 것이 기사다. 그들에게 주군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다.

 평화 시라면 모르지만 지금처럼 골든 배틀을 치르는 시기는 그야말로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것이 바로 기사였다. 후크란 기사단이야 정신 기사단과 레인저 부대의 중간 형태이긴 하지만, 전투가 벌어지면 플레이트 메일과 같은 중갑주를 입고 적진을 향해 앞장서서 돌진하는 것이 바로 기사다. 많이 나아지긴 했겠지만 지탄과 같은 겁쟁이나 근력이 부족한 두 여자 대원에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필립을 제외한 네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사로서는 자격 미달이다. 그렇다면 다른 쓰임새로 활용될 것이 분명한데, 그래도 기사 작위를 내려 줄지 그것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겉멋이 들었군.”

 하룬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나 쉽게 자신을 배신한 것에 대한 분노보다는 자신의 역량이나 그릇을 파악하지도 못한 대원들의 앞날이 정말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하룬은 말없이 대원들을 위해 구입한 물건들을 마법 배낭에서 꺼냈다. 대원들이 필요로 하는 속옷과 평상복을 비롯해서 생활 소품들 그리고 선물로 마련한 아이템들이었다. 먹성이 좋은 지탄을 위해 따로 산 육포 꾸러미도 있었다.

 식량과 포션 그리고 럼프 오크의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는 꺼내려다가 말았다. 이들에게 더 이상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다. 그것까지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츠 노인에게 받은 해독약 네 알을 꺼내 그들 앞에 놓았다.

 “이번에 조제한 해독약은 단 한 번에 몸에 남은 독 기운을 모조리 없애 주는 최상급이다. 그동안 복용한 해독약 때문에 몸에 남은 독 기운은 얼마 안 될 것이니 미리 사용하지 말고 증상이 나타나거나 혹은 중독이 되었을 때 복용해라.”

 해독약을 비롯해서 자신들을 위해 꼼꼼하게 준비한 물건들을 보는 대원들의 표정은 조금은 어두워졌다.

 하룬은 자신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기사가 된 것을 거부한 것이다. 이후로도 몇 번이나 더 자신들을 위해 설명하고 당부하는 하룬의 태도를 통해 애초부터 그는 기사 따위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룬은 각자에게 몇 마디 당부를 더 하고 마지막 할 일을 했다. 용병대장의 표식인 마법 팔찌를 풀어 비수의 끝으로 대원 명단에 금을 그었다. 이제 이들과의 인연은 끝났다는 표시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하룬은 배낭을 메다 말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난 주군의 명령에 죽고 사는 기사보다는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 수 있는 용병이 더 좋다. 사람들에게 존경 대신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내 자유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가치니까. 그동안 같이 지내면서 나름 정도 많이 들었는데 무척 섭섭하다. 나도 한다고 했는데 결국 이렇게 권위도 없고 제대로 인정도 못 받는 대장이라는 것이 확인되니 무척 슬프고 화가 나지만, 그래도 대원들의 의지니 존중해야겠지. 부디 몸조심하고 원하는 멋진 기사가 되길 바란다.”

 “대장! 아무리 그래도 송별회는 해야지?”

 시린느가 애써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 교태를 부리며 그의 소매를 잡았지만 이제까지 단 한 번도 통하지 않은 그 교태가 통할 리 없다.

 “이별은 짧을수록 좋다! 이왕 결심한 것이니 초심을 잃지 말고 이제까지 수련했던 것처럼 열심히 해서 멋진 기사가 되길 바란다.”

 하룬은 한 사람씩 눈을 마주치고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티노는 소리도 못 내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가 어떤 처지인지 잘 알고 있는 하룬은 너무나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이미 내린 결정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잘 지내요, 티노. 짧은 시간이지만 같이 생활하면서 참 많이 즐거웠어요. 부디 몸조심하고 다음에 볼 때는 부인과 아이랑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흐윽! 대장!”

 티노는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겨우 대장이란 소리밖에 내질 못했다. 노예로 태어나 평생 고생만 하다가 이제 겨우 자유를 되찾았건만 누군가의 욕심으로 인해 다시 자유를 봉쇄당한 티노를 보니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아 문을 부술 것처럼 거칠게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는 언제 왔는지 홀이 서 있었다.

 “대, 대장! 난 도움이 되고 싶어서…….”

 홀은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은 생각도 못 한 듯했다. 아마 그녀가 세반 자작에게 대원들의 영입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 같았다. 그것이 하룬을 비롯한 돌풍 용병대원들에게 큰 이익이 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녀의 예측을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하룬이 이렇게 단호하게 떠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듯 그녀의 얼굴은 수심과 미안함으로 얼룩져 있었다.

 “바쁜 일이 있어 일찍 떠나야겠군요. 부디 몸조심하시고 대업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대원들을 잃었으니 황녀님을 제대로 도와 드리기도 힘들겠군요. 기사는 기사대로 용병은 용병대로 사람의 쓰임은 다 있는 법인데…… 휴우, 그럼 안녕히.”

 복잡한 마음 때문에 홀을 차마 더 볼 수 없었던 하룬은 정문을 향해 걸으면서 메신저 워킹 스킬을 펼쳤다. 너무 가슴이 아파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하룬은 대원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막상 숙소 문을 열고 나오자 가슴이 먹먹했다. 그가 배낭을 메고 검을 든 상태로 문을 통과하는 것을 본 기사 둘이 뭐라고 말을 붙이려고 했지만, 심각하게 굳은 얼굴을 보고는 황급히 안쪽으로 달려갔다.

 ‘빌어먹을! 내 다시 배신 같은 건 당하기 싫어서 정을 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왔다. 알게 모르게 정을 준 자신을 탓하는 수밖에 없었다. 남 탓을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은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하룬이 막 개활지를 지나 숲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루운!”

 돌아보니 홀이 달려오고 있었다.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녀의 뒤로 세반 자작과 홀리오 남작 그리고 밀슨 남작이 빠른 걸음으로 따라오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무시하고 메신저 워킹으로 피하고 싶었지만 그녀에 대한 마음 때문에 발길을 멈추었다.

 “대장, 잠깐만요.”

 하룬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홀을 똑바로 응시했다.

 “무슨 일입니까?”

 그녀는 늘 차가운 얼굴이지만 얼마나 달려왔는지 숨이 턱까지 차 헐떡거렸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용병대원들을 빼돌리려고 한 것이 아니었어요. 전 단지 그들의 꿈이 기사라고 하는 말을 그들과 친한 우리 기사들에게 들었기에 그들의 꿈을 이뤄 주려고 한 거에요.”

 홀은 하룬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된 사정인지 대충 이해가 갔다.

 대원들은 가능성이 무한하고 발전 속도가 빠르긴 하지만 필립을 제외한 나머지는 아직은 익스퍼트 경지가 요원한 풋내기들이다. 그런 대원들을 당장 기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홀의 호의나 데브론과 브리엘라 황녀와의 인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룬은 비록 감정적으로는 심하게 불쾌했지만 이성적으로는 홀이나 자작을 탓하고 싶지 않았다. 홀의 말로 판단하건대 그들은 선의로 한 일일 것이다.

 즉, 이들도 상당한 호의를 표시한 것이다. 돌풍 용병대를 무시하거나 강제로 흡수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 덕분에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자신은 모든 대원을 잃고 말았다. 현실의 벨과 진수를 제외하고는 나름 믿고 의지하던 게임 내에서의 소중한 존재들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재수 4인방과는 악연으로 얽혔지만 같이 여행을 하는 사이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다.

 “아버님이 대장도 후크란 기사단에 영입하고 싶어 하세요. 정식 기사로요. 충분히 실력이 되시잖아요. 황녀께서도 그렇지만 데브론 님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으시고 제 생명도 지켜 주셨으니, 대장이 우리 기사단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하룬은 눈을 질끈 감았다. 녀석들은 자신들이 당장이라도 기사가 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겠지만 실은 수련 기사에 불과했다. 그것도 반대가 꽤 있었던 듯했다.

 ‘녀석들이 앞으로 쉽지 않겠구나.’

 응어리지려던 미운 마음이 어느새 어느 정도는 스르르 녹아 사라졌다. 녀석들은 기사들에게는 손가락질받는 용병 출신이다. 차라리 평민 출신이 낫지 전통적으로 용병과 기사 사이는 그야말로 견원지간이나 다름없었다. 대원들이 앞으로 당할 고초가 눈에 선했다.

 “난 태생이 구속을 못 견뎌 하는 사람입니다. 내 의지로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하, 하지만 용병은 제대로 사람 취급을 못 받잖아요.”

 홀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내게 있어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추구하는 것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릅니다. 모두가 좋은 옷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남들에게 우러름을 받고 사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난 딱딱한 호밀 빵에 찬물 그리고 우러름을 받지 않아도 내 자유로운 의지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행복과 만족을 느끼며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룬이 언제나 꿈꾸는 강해지고자 하는 삶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브리엘라 황녀님과 데브론 님에겐 하룬 대장이 필요해요. 그분들에게는 우리와 같은 미약한 힘밖에는 없어요. 대장은 아직도 드러내지 않은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계시잖아요. 우리를 도와주세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하룬은 숨을 깊이 들이켰다. 이제야 홀이 왜 대원들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었는지 완전하게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영입은 자신을 끌어들이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홀이 판단하기에 자신은 정이 무척이나 많은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하룬은 용암처럼 솟구치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천천히 그리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배운 것이 많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덕이 있어야 한다더군요. 그런 면에서 브리엘라 황녀님은 인덕이 많으신 분입니다. 홀이나 자작님 같은 풍성스러운 수하들이 있으니까요.”

 하룬은 잠시 말을 멈추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골든 배틀에서 승리하려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많은 인재들이 필요할 겁니다. 하다못해 무기를 만들 대장장이부터 시작해서 기사들이 할 수 없는 험하고 더러운 일을 대신 해 줄 용병이나 어쌔신, 심지어는 로그들도 필요할 경우가 있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기사들은 기사들대로 할 일이 있을 것이고, 나 같은 용병들의 힘이 필요할 경우도 반드시 생길 겁니다.”

 잠시 말을 멈추고 크게 숨을 들이쉰 하룬은 마저 말을 이었다.

 “사실 이미 데브론 님하고는 약속을 했습니다. 머지않아 미래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용병대를 키워 대업에 동참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계획이 시작부터 어긋나버렸습니다. 차후에 용병단의 초석으로 키울 생각으로 온갖 공을 들여 육성한 대원들을 믿었지만, 그들은 기사 자리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습니다.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실망감으로 더 이상 용병대를 키우고 싶은 생각마저 없어졌습니다. 물론 저 혼자라도 나중에 도울 일이 있으면 도울 겁니다. 대신 애초에 데브론 님이 바라던 만큼은 당연히 도와 드릴 수 없을 겁니다. 두 분에게 안부 전해 주십시오. 형제의 인연을 맺은 기사단 여러분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떠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그럼 안녕히.”

 하룬은 등을 돌리고 천천히 걸어 숲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제 어느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때늦은 후회가 눈물로 변해 홀의 얼굴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너무 성급했군. 저 정도의 인물을 데브론 님이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말이야. 이미 손을 써두셨어. 하룬 대장의 말이 정녕 옳구나. 대업을 이루려면 기사들의 힘만으로는 어림도 없겠지. 그의 말대로 온갖 인재들이 필요할 거야. 휴우,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자세한 사정도 알아보지 않고 마음대로 대원들을 수련 기사로 받아들여 용병대를 와해시켰으니 이건 전적으로 내 실수다. 후유! 정녕 좋은 인재를 놓쳤구나. 나중에 황녀님과 데브론 님을 어떻게 뵙는단 말이냐?”

 세반 자작이 이제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곳을 향해 고개를 떨어뜨리고 힘없이 발길을 돌렸다. 이번 일을 홀과 함께 추진했던 홀리오 남작이 침울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홀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하염없이 하룬이 사라진 숲을 보고 있었다. 때늦은 후회와 자책이 밀려들었다. 대업도 대업이지만 이미 하룬에게 뺏긴 방심芳心은 진홍 핏물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녀는 먼 나중의 꿈을 위해 하룬이 자신에게 꿀리지 않는 신분이 되길 바랐다. 공을 세우고 작위를 받아 모두에게 인정받는 그런 인물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그랬기에 홀리오 남작의 제안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이젠 어떻게 하면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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