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사이언스 마을 (55/278)

《사이언스 마을》

 덤불을 제외하면 거의 식물을 찾아볼 수 없는 건조 지대는 계속 이어졌다.

 이번에도 한 번의 휴식조차 없이 5시간이나 걸어야 했기에 하룬은 다시 메신저 워킹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기의 성질이 달라.’

 사막을 건너는 동안 흡수한 기가 마치 화염처럼 느껴졌다면, 이 건조 지대의 황무지에서는 바람을 연상케 하는 묘한 성질을 가진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단 체내로 들어와 익숙한 통로를 거쳐 순환하고 나서는 처음과 다른 기운으로 변했다. 순환하는 동안 그 성질이 혼합되며 밀도가 높아져 마치 액체처럼 변하는 것을 하룬은 느낄 수 있었다.

 그 증거로 단 몇 시간 동안 좁쌀 크기에서 콩알 크기로 커진 기의 덩어리가 더 많은 기운을 받아들였음에도 더 이상의 크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는 대화조차 피해야 할 만큼 힘의 소모가 큰 여정이지만, 하룬에게는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 누구도 후미에서 묵묵히 일정한 속도로 걷고 있는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 역시 일정한 보폭으로 끊임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데 정신을 집중했던 것이다.

 다행히 해가 넘어가기 전에 영흥 마을 사람들이 야영을 하곤 한다는 안전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이제 폐허가 된 종말 시대의 어느 건물 자리였다. 마을까지는 아니고 고대한 건물이 자리하던 곳인데, 지금은 먹을 수도 없는 풀들로 덮여 있었다. 나인 은 일행들을 끌고 그 폐허를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작은 구멍 하나를 찾아냈다.

 지하로 향하는 길이었다. 인공적으로 뚫은 길이 아니라 건물이 무너지며 절묘하게 사람 하나가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세 마리의 라나두를 건물 잔해 속 한 공간에 숨긴 나인은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중간에 선 몇 명이 랜턴을 켜 시야를 확보한 다음 일행이 그 길을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가자 넓은 지하 공간이 나타났다.

 그 공간은 많이 사용을 했는지 사람의 손길이 닿은 티가 났다. 사방 벽에는 유등이 걸려 있어 심지에 불을 붙이자 실내가 환하게 보였다. 바닥 한쪽에는 짐승의 가죽을 깔아 놓았고, 다른 한쪽에는 취사를 할 수 있도록 벽돌로 쌓은 화덕과 몇 개의 솥이 있었다.

 총 10시간에 걸친 여정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은 제대로 불도 피우지 못하고 마른 음식으로 이른 저녁을 해결한 뒤 여기저기 누워 잠을 청했다. 살인적인 고온 속에서 40킬로그램이 넘는 짐을 지고 행군을 한 사람들은 눕기가 무섭게 코를 골아 댈 정도로 지쳐 있었다.

 지하 깊숙한 곳이라 그런지 얼마간은 서늘해서 좋더니 이내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통해 바깥의 식은 공기가 흘러들어온 것이다.

 ‘이런! 이러다가 몸이 상하고 말지.’

 일꾼들은 물론 영흥 마을에서 온 전사들도 극도로 지친 상태였다. 하루 종일 땀을 흘린 상태에서 급격하게 기온이 바뀌니 몸에 탈이 나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다. 하룬은 화덕에 불을 피워 공기를 덥혔다.

 하룬은 육체가 지치거나 피로한 것을 느끼지 않았지만 너무 오래 집중 상태를 유지해서 그런지 머리가 아팠다. 남자들이 누운 곳으로 향한 하룬은 눈을 감는 순간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도 전날과 마찬가지로 강행군이었다.

 끝이 없을 것 같았던 황무지가 끝나가고 있었다. 군데군데 초록으로 물든 들판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관목 숲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중간에 거대한 나무 아래에서 점심을 겸한 잠시의 휴식을 가진 일행은 서둘러 길을 떠났다. 식생이 풍부해지는 만큼 위험은 커져 영흥 마을의 전사들은 무기를 들고 전투대형으로 포진해서 이동했다. 맹수들이나 변종 생물에 대한 긴장감 때문에 이동속도는 더 빨라졌다.

 ‘신기해! 어떻게 이렇게 기의 성질이 다를 수 있지?’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위험 때문에 기를 순환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하룬은 메신저 워킹을 멈추지 않았다. 스킬을 펼치는 동안 발을 통해 몸으로 들어오는 기는 이제 활발하고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하룬은 주변 환경에 따라 기의 성질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니온의 안과 밖의 기의 농밀도가 거의 열 배는 차이가 났다. 게다가 맛으로 치면 밋밋하기만 한 유니온 내의 기와 다양한 맛과 질감을 가진 유니온 밖의 기는 그 성질까지 판이했다.

 그뿐 아니라 흡수되는 기의 양에 있어서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비욘드의 보석 광산지대에서 메신저 워킹을 수련하던 때와 비슷했다. 체내로 유입되는 기의 양이 엄청났다.

 ‘이런 곳에서 한 달만 수련하면 제법 강해질 거 같은데.’

 아직 기나 마나를 의식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까닯이 체내에 축적한 그 양이 적어서라고 생각하는 하룬으로서는 그런 바람을 안 가질 수가 없었다. 하룬은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수련에 깊이 빠져들었다.

 “다 왔다. 저기야.”

 먼저 작은 언덕을 지나 내려가던 해란이 메마른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에 사람들의 걸음이 빨라졌다. 가장 마지막으로 언덕에 오른 하룬은 앞으로 시선을 주었다.

 물이 바닥을 보이는 마른 강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폐허로 변한 거대한 부지가 보였다. 그곳에는 키가 몇십 미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나무들이 솟아 있었는데, 그 나무들 사이로 이제는 완전히 허물어진 건물의 잔해들이 보였다.

 이제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긴장감이 풀렸는지 일꾼들이 내리막길 여기저기에 주저앉았다. 그들의 옷은 어느새 땀에 푹 젖어 있었고 몸은 파김치처럼 늘어졌다.

 “일어나! 힘을 내라고.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긴장 풀지 마.”

 바란이 소리를 지르며 일꾼들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원래 목적지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곳에서 목적지까지가 가장 힘든 법이다. 여기서 늘어지면 일어나기 힘들다는 것은 경험 많은 일꾼들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지척인 것 같던 사이언스 마을까지 가는 데 무려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일행들이 지친 탓도 있지만, 수백 년 전 종말 전쟁 기간 동안 군사 시설로 보호되던 이 근처에 엄청난 지뢰를 매설해 놓았는데, 당시의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그것들 중 일부는 지금도 여전히 작동을 한다는 영흥 마을 전사들의 경고 때문에 이동속도가 느려진 것이다.

 전사들에 앞서 나인이 앞장을 선 것을 보면 그녀에겐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전사들을 이끄는 로수도 나인의 조언을 무척이나 존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문득 그녀가 당연히 했어야 할 어떤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내게 부탁할 말이 뭐지? 왜 말이 없는 거야?’

 어쨌든, 강을 건너서도 조심스럽게 이동한 일행이 무너진 대형 건물들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맞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마치 가운처럼 보이는 하얀 옷을 걸치고 있었다.

 먼저 나인이 그들과 인사를 했고 도착하는 순서대로 그들의 환영을 받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바란과 해란 자매가 그들과 인사를 나눈 후 촌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일꾼들을 건성으로 맞으면서 하룬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마침내 하룬도 마지막으로 그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반갑네. 난 촌장인 알영이네.”

 “하룬이라고 합니다.”

 알영은 반가운 듯 하룬의 손을 꽉 잡고 한참 동안 흔들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환대에 하룬은 기분이 이상했다. 알영 촌장을 비롯해서 같이 나온 사람들이 자신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을 느낀 하룬은 환대가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에 걸렸다.

 “바란의 연락을 받았네. 자네가 우리 마을에 특별한 용무가 있다고?”

 “네.”

 하룬의 대답에 촌장은 기대 어린 눈길로 그를 주시했다.

 “혹시 자네, 청일 박사를 아나?”

 “네. 제 양아버지십니다.”

 “그렇군. 우리 마을을 찾을 이너는 없기에 짐작은 했었네. 자네 아버지가 아들을 꼭 보내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결국 그 약속을 지켰군. 정말 청일 박사가 자랑하던 대로 강력한 기세가 풍기는 전사로군. 잘 왔네.”

 놀랍게도 촌장은 이미 그의 존재를 작고한 양아버지 청일 박사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아,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자리를 옮기세.”

 알영은 그의 손을 붙잡은 채 앞으로 나섰다. 나인 일행과 바란 일행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의아해했지만 알영은 그들을 지나 다 무너져가는 건물로 향했다. 겨우 서 잇는 콘크리트 건물 벽을 몇 사람이 밀자 굉음과 함께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알영 촌장은 하룬의 손을 여전히 놓지 않은 채 계단을 내려갔다. 하룬은 좀 얼떨떨한 기분이지만 온기가 전해지는 알영의 손에서 묘한 편안함을 느끼며 그를 따랐다.

 알영이 안내한 곳은 지하 7층에 있는 거대한 공간이었다.

 천장이자 대지의 바닥에 해당하는 크고 두꺼운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강렬한 햇빛이 몇 가지 장치를 거쳐 이 깊은 지하까지 비추고 있었다.

 내려오면서 보니 유리로 된 바닥이자 천장으로 들어온 햇빛을 이용하는 수경 재배 농장이 지하 6층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지하 7층의 거대한 공간에는 금세 소문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로 가득 찼다.

 적어도 수백 명은 넘어 보였다. 모여든 사람들의 눈에는 흥분과 함께 강한 호기심이 드러나 있었다. 손님이 자주 찾아온다면 마을 사람들이 이렇게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많이 모여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반응으로 보아 이 마을에 손님은 거의 찾아오지 않거나, 혹은 아주 오랜만에 방문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여기는 원래 회의실로 쓰던 곳인데 우리가 벽을 뜯어내고 마을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로 바꾸었네,”

 “그렇군요.”

 “이런 한여름에 기대하지도 않았던 상행이 온다는 소식에 밖에 나갔던 사람들이 모두 귀환하고 있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모두를 볼 수 있을 거야.”

 하룬은 점점 더 가슴이 먹먹해졌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이렇게 환대를 받는지 모르는 상황이라 답답하기만 했다.

 “일단 사람들이 궁금해하니 먼저 인사나 하지.”

 알영은 단상으로 보이는 중앙으로 올라갔다.

 “이 뜨거운 열기를 뚫고 우리를 찾아온 손님들을 소개하겠소. 바란 형제들과 영흥 마을의 전사들입니다. 모두 박수로 환영해 주시오.”

 바란과 나인 일행이 인사를 했다.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익숙한 바란 일행과 나인 일행을 반겼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소. 이 젊은 친구는 우리가 기다리던 아주 특별한 손님이오.”

 알영이 소개를 하다 말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특별한 손님이라는 말에 몇 사람의 얼굴에 기대의 빛이 떠올랐다. 사정을 모르는 바란과 나인 일행까지도 궁금한 기색이었다.

 “여기 이 친구가 바로 우리의 친구인 청일 박사가 우리를 위해 보내 준 박사의 아들이오.”

 “오오!”

 “정말 왔어!”

 시끄럽게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뜨거운 열망과 반가움이 깃들어 있었다.

 소개를 받았으니 제대로 인사를 해야 했다. 바란과 나인 일행과는 달리 자신은 이 사람들과 초면인 것이다. 하룬은 몸에 두른 천을 모두 벗었다. 방어구를 착용한 하룬의 모습이 드러나자 사람들이 일제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해란 가게에서 구입한 강철 장검과 비수 세트가 꽂힌 요대를 본 사람들의 반응이 급격히 뜨거워졌다.

 “정말인가 봐? 저 탄탄한 근육 좀 봐.”

 “그러게. 정말 강해 보이는걸.”

 하룬 역시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들은 것인지는 몰라도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도대체 양아버지가 무슨 소리를 해 놓았기에 이런 반응이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인사는 해야 했다.

 “하룬입니다.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하룬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는 순간 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뜨거운 박수로 환영했다. 그는 내심 한숨을 쉬며 곤혹스러운 시선을 알영 촌장에게 던졌다.

 “드디어 청일 박사가 약속을 지켜 아들 하룬 군을 우리에게 보냈습니다. 우리의 목숨을 수시로 위협해 오던 하르크들을 이 친구가 해치워 줄 겁니다. 이제 우리도 이 좁은 지하 마을을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선물로 이 많은 식량과 의약품을 보냈습니다.”

 와아아!

 “최고다아!”

 알영의 말이 끝나는 순간 장내에 모인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희열과 기대 그리고 열망이 표출되어 있었다.

 ‘하르크라고? 내가? 내가 하르크를 상대한단 말이야?’

 하룬은 너무나 뜻밖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같이 온 사람들 역시 뜻밖의 말에 의아한 얼굴이 되어 하룬을 쳐다보았다.

 “모두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겠지만 오늘은 일단 이 정도 인사하는 것으로 자리를 마치고 내일 다시 모여 자세한 이야기를 들읍시다. 먼 길을 왔으니 좀 쉬어야 할 겁니다.”

 알영 촌장의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미적거리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해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은 쉽게 하룬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하하핫! 사람들하고는. 이제까지도 기다려 왔으면서 하루를 더 못 참나?”

 가벼운 질책이 담긴 말로 사람들의 등을 완전히 떠민 알영 촌장은 하룬의 손을 잡고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촌장과 함께 한 층을 더 내려가니 연구실로 보이는 방들이 복도 양쪽으로 가득했다. 촌장이 하룬과 해란 일행을 안내한 곳은 그 긴 복도 끝 쪽에 있는 한 방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거실과 방이 네 개나 되는 큰 공간이 나왔다.

 “이곳에서 잠시 쉬고 있게. 일단 나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자네가 가져온 선물들을 정리하고 곧 돌아오겠네.”

 “네.”

 촌장은 아직도 흥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얼굴로 방을 떠났다. 방에 남겨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룬에게 쏠렸다.

 “하룬, 어떻게 된 일이야? 분명히 여기는 처음 온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게. 우리도 이 마을과는 몇 번 거래한 적이 있지만 이런 환대는 처음이야. 게다가 하르크를 해치운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도대체 이 마을 사람들과 어떤 인연이 있는 거야?”

 해란 자매는 아직 얼떨떨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하룬에게 물었다. 어지간히 궁금한 모양이지만 하룬도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이곳이 아버지와 인연이 있는 곳이란 사실밖에 없어.”

 “아버지가 누군데?”

 해라니 내처 물었지만 하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양아버지는 유니온 정부로부터 추방을 당했기 때문에 말하기가 조심스러웠다.

 “그건 나중에 말하지. 일단 우리도 좀 쉬어야지?”

 즉답을 회피하는 하룬의 태도에 사람들은 실망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말은 지금 자신들의 상태를 새삼 떠올리게 만들었다.

 “하아! 피곤해.”

 해란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미 체력이 약한 나인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벽에 등을 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해란을 신호로 사람들이 일제히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의 상태는 거의 최악이었다. 열광적인 환대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사흘이 넘도록 살인적인 햇빛과 폭염을 경험한 그들의 육체는 극도의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쓰러지지 않은 사람은 하룬이 유일했다. 사막을 횡단하면서 반 기절 상태에서 무의식중에 기의 순환을 경험한 하룬의 상태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활력에 넘치고 있었다. 그는 일일이 방문을 열어 실내 공간을 확인했다. 샤워 시설을 갖춘 화장실이 두 개나 되었고 방들은 넓었다.

 “여기 이 방은 여자들이 쓰면 되겠네.”

 “어디?”

 그나마 기력이 좀 남아 있는 세란이 방이란 말에 힘겹게 일어나 방을 구경했다. 싱글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놓인 방은 좀 좁지만 여자 세 명이 쓰기에는 충분했다.

 나머지 방 세 개는 모두가 다 들어가도 될 정도로 넓었다. 바란과 하룬 그리고 로수가 방 하나를 쓰기로 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무리별로 나누어 쓰기로 했다. 방 배정이 끝나자 사람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피곤에 전 육신을 바닥 혹은 침대에 눕히고 잠에 빠져들었다.

 호기심 많은 해란까지 침대에 눕자마자 가늘게 코를 골 정도니 그들의 피로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과는 달리 원기왕성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하룬은 일단 샤워부터 했다.

 모래사막과 건조 지대를 거치며 방어구 안까지 들어온 모래와 먼지들을 모두 씻어내고 나니 몸이 날아갈 듯 가볍고 상쾌했다.

 속옷을 갈아입고 다시 가죽 방어구를 걸친 하룬은 모두가 깊이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하고는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사흘간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배리어 밖은 먼지 날리는 배리어 안에 비하면 정말 혹독한 기후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과 50도가 넘는 한낮과 영하까지 떨어지는 밤의 기온은 엄청나게 체력을 소진시켰다.

 다행히 안전한 길을 꿰뚫고 있는 영흥 마을 전사들 때문에 변종 생물들은 만나지 않았지만 정말 휴먼들이 살기에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하룬은 그 대지에서 강한 생명력을 느꼈다. 거기에 더해 한없는 자유로움과 가슴이 뻥 뚫리는 통쾌감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에 휩싸여 있었지만 예민한 감각으로 누군가 방 쪽으로 오는 기척을 느꼈다.

 하룬은 아직 물기가 다 마르지 않은 머리를 다듬으며 문가로 갔다.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촌장님.”

 알영 촌장은 문가에 선 하룬에게 놀란 얼굴을 보였다. 마치 미리 알고 준비한 것처럼 행동하는 하룬에게 놀란 것이다. 하지만 곧 놀란 얼굴을 풀고 그의 젖은 머리를 보며 안으로 들어섰다. 촌장의 뒤에는 두 명의 중년 남녀가 따르고 있었다.

 “허험. 잘 쉬고 있었나?”

 “방금 샤워를 했습니다. 같이 온 사람들은 방에서 쉬고 있고요.”

 “그렇군. 마침 잘됐네. 그렇지 않아도 조용히 대화를 하고 싶었네.”

 바라던 바였다. 도대체 양아버지가 무슨 약속을 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아, 먼저 인사하지. 이 사람들은 부촌장을 맡고 있는 아리와 바리라네.”

 둘 다 흰색 가운을 입고 있었다. 아리라는 중년 여인은 안경을 쓴 냉랭한 얼굴이고, 바리는 퉁퉁한 몸에 보기 좋은 웃음을 입가에 매달고 있는 남자였다.

 “반갑습니다. 아리라고 불러요.”

 “반가워요, 하룬 씨.”

 “저 역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일단 인사를 나눈 네 사람은 거실 한쪽에 있는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은 식사를 하는 장소인 듯 거실과는 어느 정도 격리가 된 공간이었다.

 “자네가 가져온 식량과 의약품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네. 안 그래도 늘 식량과 의약품이 부족하던 터라 마을 사람들이 무척이나 기뻐하고 있어.”

 “도움이 된다니 다행입니다. 뭐가 필요한지 몰라 대충 준비해서 혹시 불필요한 것을 가져온 것은 아닐지 걱정했습니다.”

 “하하! 젊은 친구가 아주 겸손하고 예의가 바르군. 자네 아버지와 많이 닮았어. 그래서 더 마음에 드네.”

 “그렇습니까?”

 양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 하룬이지만, 전형적인 과학자인 양아버지의 성격이 상당히 모가 났다는 것은 양어머니의 끊임없는 험담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촌장은 한참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익히 아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리였다. 그녀는 하룬에게 복잡한 시선을 맞추며 촌장의 말을 반박했다.

 “참, 촌장님도. 그 인간이 뭐가 겸손하고 예의가 발랐나요? 오만하고 까칠한 데다 툭하면 사람 핀잔을 주어 운 아이들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허어, 그랬나? 난 잘 모르겠던데. 바리,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하하! 저도 청일 박사에 대한 기억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평생을 쫓아다닌 아리의 마음을 뺏은 연적을 좋게 기억할 리가 없지요.”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바리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연적? 그럼 양아버지가 저분을 사랑했나 보네.’

 “흥! 연적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난 남자에게는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몰라? 그리고 당신이 언제 날 사랑했다고 천연덕스럽게 그런 소리를 하는 건데? 내 앞에서는 단 한 번도 좋은 티를 낸 적도 없으면서 입으로만…….”

 “그, 그거야 내가 고백하려고 몇 번이나 기회를 마련했는데 당신이 그때마다 듣지도 않고 자리를 피했으니까 그런 거지.”

 바리는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 모습을 보던 촌장이 두 사람을 말렸다.

 “그만하게! 하룬 군이 흉보겠네.”

 두 사람은 입을 닫고 고개를 숙였다. 손님 앞에서 흉한 꼴을 보인 것이다. 하룬은 금방 어색해진 분위기에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런데 촌장님,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그래? 물어보게.”

 “저…… 아버지가 한 약속이란 게 정확하게 뭡니까?”

 하룬의 물음에 세 사람의 얼굴이 급변했다. 안색까지 변하는 것을 보니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자, 자네…… 그럼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에 왔단 말인가?”

 “네. 양아버지께서 유언으로 자신에게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라고 해서 찾아온 겁니다.”

 하룬의 대답에 얼굴이 굳어지는 3인이다.

 “그, 그럴 리가!”

 “양아버지?”

 “어떻게……?”

 촌장과 바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고 아리는 청일 박사가 하룬의 양아버지라는 것에 놀란 눈치였다. 그는 그런 사실조차 그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다.

 “말씀해 주십시오. 비록 제가 무능력자로 유니온에서 보더러(변경인)로 낙인찍힌 신세고 양아버지가 어떤 약속을 했는지 모르긴 하지만, 제 능력이 닿는 한 반드시 들어 드리겠습니다.”

 하룬이 간곡하게 말했지만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한동안 탁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하게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하룬이 다 미안해질 정도였다.

 한참 후에 서로의 얼굴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시선을 교환하던 세 사람은 무척이나 실망한 듯했다.

 “휴우, 자네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에 온 거로군.”

 “그러게요. 청일 박사가 정말 원망스럽군요. 그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촌장과 바리의 말에 하룬의 궁금증은 더 커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실망하는지 정말 궁금했다. 아리는 처연한 표정으로 탁자만 응시하고 있는데 그녀의 눈에서는 작은 눈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일단 제게 그 내용을 말씀해 주시지요. 어쨌건 아버지가 약속한 일이니 능력을 떠나 들어는 봐야겠습니다.”

 하룬이 결연한 어조로 묻자 촌장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잠깐 사이 그의 얼굴이 10년은 늙어 보이는 것 같았다.

 “사실 박사가 죽기 전에 우리에게 약속한 것이 있었네. 이곳은 자네가 아는지 모르지만 종말 시대 말에 원자력 발전소였네. 지진이나 핵전쟁에도 견딜 수 있게 지하에 건설된 이 발전소는 방호력이 뛰어난 시설로 수백 년 동안 우리를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었지.”

 하룬은 그의 말을 숨도 쉬지 않고 경청했다.

 “종말 전쟁이 터지고 이곳에 근무하던 과학자들과 운 좋게 이곳으로 피신한 일부 가족들은 지하 수십 층으로 건설된 이 발전소 건물에 남겨진 시설들을 이용해서 외부의 오염된 환경은 물론 아우터들을 약탈하는 강도단이나 홀연히 나타나 인간들을 먹이로 삼는 변종 생물들 그리고 우리를 찾아내 이용하려는 유니온을 피하며 안전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네.”

 하룬은 이들의 연원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곳이 왜 과학자 마을이라고 불리는지도 말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마을과 멀지 않은 곳에 하르크 한 무리가 자리를 잡았네. 추정하기론 30년 전으로 생각하네. 그때 실종자가 처음 나왔으니까 말이야. 우리 마을의 유리창 천장 때문에 놈이 우리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 거지. 처음에는 그런 사실도 알지 못했네. 그렇지만 야외 작업을 나간 마을 사람들이 연거푸 세 명이나 돌아오지 않자 은밀하게 조사해서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되었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종말 시대의 핵전쟁이 일어나고 암흑기를 거쳐 다시 지금까지 오는 동안 발전소로 지어진 시설은 노후화가 진행되어, 지금은 수시로 보수를 하지 않으면 원자로와 같은 시설물의 사용은 물론 지하에 건설된 마을 자체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태까지 오고야 말았네.”

 하긴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 종말 시대의 건축 기술로 지어졌다고 해도 4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 낡아 가는 것은 당연했따.

 “원래는 더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견고한 시설물이지만 그동안 일어난 네 번의 대지진 때문에 시설물의 기본 골조가 많이 뒤틀렸네. 그 때문에 휴먼의 고기 맛을 본 하르크는 20년 전부터는 밖은 물론 안까지 들어와 마을 사람들을 해치기 시작했네. 우리 마을 사람들은 노후화된 시설을 주기적으로 보수해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부분을 없애려고 노력했지만, 하르크의 괴력은 다른 곳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오기 일쑤였네. 때문에 청일 박사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마을 사람들 중 3분의 1이 놈의 희생물이 되었네. 그나마 놈이 주기적으로 오는 탓에 한번 희생자가 나오면 이 주 정도는 안심할 수 있지만, 그것이 누적되자 마을 사람들은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갔지. 아우터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전사들에게 하르크에 대한 의뢰를 했지만 아무도 나서질 않았네. 그렇다고 유니온을 찾아갈 수도 없었지. 유니온 정부와 거래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가 아는 바로는 수비군조차 무섭도록 빠르고 교활한 하르크를 쫓아내는 것만 가능하지, 놈을 죽일 수는 없었으니까.”

 예전 화장장에 근무를 했을 때 들은 얘기로는 하르크는 휴먼 고기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놈이 이 근처에 자리를 잡은 것도 어쩌면 휴먼드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년이 넘게 화장장에서 근무한 분의 말로는 한 번도 하르크의 사체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놈을 잡으려면 일반 화약 무기는 소용이 없고 광자포가 장착된 자장 비행체라야 하는데 광자포에 맞은 하르크는 시체를 찾을 수도 없이 산산조각이 난다고 했다.

 그나마 전 지구에 걸친 자장 이상 현상이 심화되면서 자장 비행체들도 배리어 밖을 비행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했다. 해서 하르크는 거의 천적이 없는 상태로 날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마을을 찾아온 청일 박사는 우리가 그의 연구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면 우리에게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지. 우리의 원수인 하르크를 없애 달라는 우리의 소원을 그는 흔쾌하게 받아들였네. 다만 그의 연구가 끝나고 전사 수련을 받고 있는 아들이 장성한 다음에 들어주겠다는 조건을 걸었지.”

 촌장의 말을 듣던 하룬은 속에서 불이 났따. 해 준 것도 없이 고아인 자신의 고혈을 빼먹고도 모자라 자신을 매개로 약속까지 한 양아버지의 정신세계가 정말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촌장은 그런 하룬의 기분을 모르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박사는 비록 유니온에서 축출이 되긴 했지만 전지구위원회WCG와 인근 유니온의 원로원과도 핫라인을 가지고 있었고, 마더컴에 접속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진 것을 확인한 터라, 우리는 우리의 역량과 대를 이어 만들어 낸 합금 등의 재료를 모두 동원해서 그의 연구를 도운 거라네. 그는 연구하는 틈틈이 시설물을 살펴 취약한 부분은 보강하고 에너지 충격을 이용한 방어 무기를 만들어 더 이상의 희생은 최소화되도록 만들어 주었네. 그래서 우리는 청일 박사의 말을 이제까지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네.”

 ‘빌어먹을! 젠장!’

 촌장의 말을 듣는 순간 하룬은 내심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그가 남긴 메시지 그 어느 곳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단지 은혜에 보답하라는 말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중대한 약속을 해 놓고…….’

 하룬은 한숨을 내쉬려고 입을 벌리다가 급하게 다물었다. 혹시나 싶어 자신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눈길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들은 하룬의 황당해하는 표정을 보며 상황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말도 잊고 망연자실해진 그들의 모습을 보는 하룬은 미안함으로 얼굴을 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 작은 문제도 아니고 그 무서운 하르크를 없애 주겠다는 약속을 한 양아버지의 뻔뻔함에 치가 떨렸다.

 “죄송합니다. 변명 같지만 양아버지로부터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하고 온 탓에 여러분들의 소원은 당장 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조금 더 시간을 주십시오. 아버지가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지금 전사로서 수련하고 있는 중이니 수련이 경지에 이르면 반드시 약속을 지키로 오겠습니다.”

 하룬은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

 “아닐세. 아무것도 모르고 온 자네가 정말 황당하겠군. 그래도 자네는 아버지의 은혜를 갚는다고 엄청난 양의 식량과 의약품까지 많은 돈을 써서 준비해 왔는데, 느닷없는 소리를 들었으니…….”

 알영 촌장이 실망한 가운데서도 하룬을 위로했다. 외형만큼이나 넉넉한 마음을 가진 분이었다. 하긴 재촉한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아버지가 비욘드를 추천한 까닭은 벨을 이용해서 내 본신의 능력을 올려 이 마을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라는 의미였을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맞는 것 같았다.

 사실 그는 게임을 시작한 지 몇 달도 되지 않아 비약적인 능력을 계발해 가고 있는 중이다. 이런 추세라면 1, 2년 안에 하르크를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될 수도 있었따.

 ‘그래! 까짓 하면 되지, 뭐.’

 하룬은 양아버지의 소행이 어처구니 없었지만, 자신에게 벨을 준 것만으로도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벨의 가치는 자신에게는 돈으로 절대 따질 수 없으니 말이다.

 ‘굳이 내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해도 이들이 할 말은 없겠지만 양아버지의 유언도 그렇고, 하르크는 언젠가 상대하고 싶었으니까.’

 하룬은 어린 시절부터 공포의 상징으로 마음에 자리한 하르크를 반드시 해치우고 싶었다. 현실에서 놈을 해치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면 자신을 무의식중에 가로막고 있는 정신적, 육체적 한계들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하르크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놈입니까?”

 하룬의 질문에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촌장이 입을 열었다.

 “흠, 어디부터 설명을 할까? 일단 이 이야기는 종말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네.”

 촌장의 설명에 따르면 하르크가 출현한 것은 두 가지 설이 있었다.

 하나는 하르크와 오르그 혹은 자기 비행선까지 공격할 정도로 기동력이 뛰어난 빅윙과 같은 변종 생물이 종말 시대 유전공학 연구소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상대국들의 주요 정치 군사기지가 지하 깊숙한 곳에 건설되어 탐지하거나 공격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핵무기로 통칭되는 대량 살상 무기의 대안으로 유전자 조작 기술을 이용하여 특별한 생체 무기를 개발하던 와중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일곱 겹으로 이루어진 피부층과 적응력이 뛰어난 생체 조직을 가지고 태어난 변종 생물들은 실험실에서 그 대를 이어가며 개량이 되던 중 종말 전쟁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탈출하여 인간들이 암흑기와 배리어를 기반으로 휴먼 시대를 여는 동안에 급속하게 번성했다고 한다.

 또 하나의 가설은 종말 시대의 오랜 미스터리들에 기반을 둔다.

 종말 시대 북유럽은 그리스를 비롯한 다른 문명권과는 확연하게 다른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 신화들은 대를 이어 전승되어 내료어다가 톨킨이라는 소설가를 통해 문학의 틀에 들어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사실 가상현실 게임의 상당한 환경 기반이 이 북유럽 신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었다.

 그 내용 중에는 많은 유사 인간들과 몬스터들이 있는데 그들 중 하나가 바로 오그르Org였다. 털이 없는 매끈한 가죽을 제외하면 외형이 인간과 비슷한 오르그는 그 소설에서 악의 편에 선 사악한 존재로 묘사되었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자신들뿐 아니라 이런 존재들이 아득한 북쪽에서 왔다고 하는데 그 북쪽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극지방이다. 이 신화들은 지구 공동설과 결합하여 현실성을 받았다.

 지구공동설地球空洞說은 지구의 속이 비어 있으며, 양극(남극과 북극)에 그 비어 있는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있다는 주장이다.

 종말 시대 1692년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핼리혜성의 발견자인 에드먼드 핼 리가 주장했으며 에르하르트 오일러 역시 이 설을 주장했다. 19세기부터 유행하였으며, 20세기 말에는 그에 대한 증거나 문헌들이 발견되었지만 끝내 과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가설을 믿었으며 각종 SF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지구 속에 태양과 대양 그리고 육지가 있으며 1년에 세 번 양극 지대에 그곳으로 뚫린 구멍이 열린다는 설이다. 그곳에는 아갈타라고 불리는 문명 세계가 있다는 주장과 인류의 선조가 초고대 문명의 충돌기에 그곳으로 피신해서 살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곳의 날씨는 사시사철 온화하고 다습하여 생물종이 살기에는 최적의 환경을 가지고 있어 이미 지구상에서 멸종된 수많은 동식물들이 생존한다고 한다.

 북유럽 신화에서 언급된 키가 4~6미터에 달하며 텔레파시를 사용하는 거인족들과 엄청난 체구의 동물들이 산다고 일부 목격담(노르웨이 사람 올랄 얀센의 수기-그는 아버지와 함께 1828년부터 3년 동안 지구 안 세상을 여행했다고 함)에 묘사되어 있다.

 오르그와 하르크를 비롯한 변종 생물 대부분이 그곳에서 나왔다는 두 번째 가설의 요지였다. 물론 흥미는 가지만 별로 실현 가능성이 없는 가설이었다.

 “가설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놈이 어떤 생태적 특징을 가졌느냐, 어떤 곳이 약점이냐, 어떻게 공략하면 되느냐 하는 것이지.”

 촌장의 말에 하룬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일단 내 능력을 최대한 키우는 수밖에 없구나.’

 결론은 내려졌다.

 “실망하셨겠지만 제가 사정을 파악하기 위한 사전 준비로 이곳을 방문했다고 여겨 주시면 좋겠습니다. 불철주야 수련을 하고 있고 이제 수련의 목표도 명확해졌으니 오래 기다리시지 않게 하겠습니다. 반드시 이 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하르크들을 모두 해치우겠습니다.”

 결연한 어조로 생각한 바를 말하는 하룬의 기백과 의지가 전해졌는지 망연자실해하던 세 사람의 표정이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군. 사정이 어떤지, 어떻게 상대할지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먼저 들렀다고 생각하겠네.”

 촌장이 드디어 굳은 얼굴을 풀었다.

 “그래요. 난 싸움은 잘 모르지만 하룬은 한눈에 봐도 꽤 실력 있는 전사인 것 같아요. 믿을게요.”

 아리는 편하게 생각하라는 듯 웃는 얼굴을 보여 주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10년을 넘게 기다렸는데 고작 1, 2년을 더 못 기다리겠나? 자네를 믿겠네.”

 바리까지 이해를 하자 하룬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제 하르크를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쌓는 것만 남았다.

 “우리도 나름대로 준비는 하고 있네.”

 “네? 준비요?”

 “그렇다네. 청일 박사가 제작해 준 최고의 게임 캡슐을 이용해 비욘드라는 가상현실 게임을 통해 전사 세 명을 양성하고 있네. 우리 마을에서 가장 재질이 좋은 아이 셋을 선발했네. 청일 박사가 직접 선택했지. 지금 이 시간에도 그들 셋은 게임을 통해 익힌 전투 기술들을 현실에서도 쓸 수 있도록 특수 제작된 최고의 캡슐 안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수련을 하고 있네. 일주일에 한 번 밖에 나오는 아이들이라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나중에 자네가 하르크를 상대하러 이곳에 올 때는 든든하게 뒤를 받쳐 줄 수 있을 것이네.”

 어느 정도 사양의 캡슐인지 대충 감이 왔다. 인공지능을 가진 벨 정도는 아니라도 그 기술을 대거 채용해서 만든 최고의 캡슐일 것이다.

 양부는 그나마 자신의 조력자를 만들어 두었다. 그들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게임에서 만나면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나저나 이건 혹 떼러 왔다가 완전히 혹 하나 더 붙이고 가는 기분이네.’

 무려 3,000만 원에 달하는 선물까지 가지고 왔건만 마음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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