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리어 밖의 세상》
암거래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두둑한 현금을 챙겨 바란의 대장간을 찾은 하룬은 미리 기다리고 있던 해란을 만났다.
“따라와!”
그녀는 다짜고짜 그를 끌고 암시장 내에 있는 두 상점을 방문했다. 그곳은 일종의 도매상점으로, 종류별로 구해야 하는 물건들을 한 번에 구입할 수 있었다.
상점 주인들은 해란과 안면이 있는 데다 대형 거래라는 점에 할인을 해 주어 일꾼들과 호위 인원을 고용하는 데 비용을 보탤 수 있었다.
“양이 정말 엄청나구나.”
의약품은 그 부피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식료품의 경우는 무려 열 짐이나 되었다. 바란이 그 호송을 책임지기로 했고, 해란 자매도 따라가기로 했으니 그들을 제외하고도 일꾼이 여섯 명 이상 필요했다.
바란은 어떻게 연락한 것인지 다음 날 중간에서 일꾼들을 호위할 영흥 마을 전사들과 만나기로 했다고 했다. 해란 남매들의 도움으로 여행할 준비가 몇 시간 내에 이루어진 것이다.
“자, 이제는 무기를 골라야지.”
세란은 무기고로 하룬을 안내했다.
사무실 벽의 한 곳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주먹으로 가격하자 은밀하게 숨겨진 무기고가 나왔다. 아마도 암시장의 대장간들은 모두 이런 공간을 가진 것 같았다.
화약 무기부터 시작해서 칼이나 도와 같은 구식 무기 그리고 빔 건이나 빔 소드에 이르기까지 온갖 무기들이 진열된 무기고는 환상적이었다.
“유니온 안이라면 폭발력을 이용한 다양한 화약 무기류가 좋지만 밖이라면 사정이 달라. 특수한 구조를 가진 가죽을 가진 변종 생물들은 화약 무기류에는 큰 상처를 입지 않거든. 놈들에게 그나마 효과적인 재래식 무기는 겨우 화염 방사기나 빔 소드 정도야. 물론 수비군이 보유한 플라즈마 광선포 정도면 최고지만 그것은 비용 대비 너무 효과가 떨어지지. 가뜩이나 에너지가 달리는 판이니까 말이야.”
하룬은 세란의 말을 들으면서도 눈을 빛내며 무기고에 진열된 무기들을 정신없이 보고 있었다.
“여기 네가 쓸 만한 검이 있어.”
세란이 검 한 자루를 골라 주었다.
다마스커스 주조법으로 제련한 통짜 쇠를 수없이 접어 가며 만든 검이었다. 특유의 문양으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파르스름한 날의 검광이 마음에 들었다.
무게중심도 잘 잡혀 있고,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현재 게임에서 사용하는 본 소드와 비슷한 크기와 형태라는 점이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생전에 만드신 검 중 단연 가장 뛰어난 명품이야. 가격을 따질 수 없는 검이지만 바란 오빠 말이 네가 아니면 쓸 사람이 없다니까 해란이 욕심내는 아이템과 퉁치는 거야.”
세란이 마치 인심 쓴다는 듯 이야기했지만 하룬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사실 아무리 명장이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검 한 자루의 가격이 3천만 원이라면 지나가던 개도 웃을 것이다.
‘반할 것 같아!’
그가 손해 보는 것인지 아니면 세란의 말대로 운 좋게 얻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검이 마음에 든다는 점이었다.
우우웅.
미세하게 검이 진동하는 소리를 들은 후에는 가격 따위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온통 검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에 세란은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나도 진검을 처음 가졌을 때 너와 같았지. 평생을 같이할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거든. 물론 지금도 같은 마음이고.”
세란의 말이 맞았다. 동생으로 삼은 벨 말고는 친구 하나 없는 하룬이다. 하지만 이 검을 쥔 순간 묘한 이끌림을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오래도록 이어질 것만 같은 운명을 미세한 진동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여기가 비밀 통로야.”
폐쇄된 지하철 궤도를 한참 걷던 해란이 콘크리트 벽에 장난처럼 낙서가 된 곳을 가리켰다. 외형만 보아서는 절대로 어떤 곳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볼 수 없지만, 그녀가 사방 네 곳에 돌출된 작은 돌출물을 순서대로 돌리자 마치 마법처럼 일렁이는 빛으로 이루어진 문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 공간은 한 사람이 몸을 굽혀야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이었다.
그녀가 주저없이 빛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룬은 그 뒤를 따랐고 엄청난 부피의 짐을 지거나 멘 세란과 바란을 비롯한 몇 명이 그 뒤를 이었다.
통로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작은 철문만 보았을 때는 예전 지하철이 다닐 때 공구 같은 것을 넣어 두는 비상 공간으로 보였는데, 막상 안에 들어서자 후리후리한 키의 하룬이 제대로 설 수 있을 정도로 높고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하긴 하르크가 쫓아 들어왔을 정도면…….’
예전에 죽인 하르크가 비록 덜 자란 개체이긴 하지만 그래도 키 3미터에 300킬로그램 정도는 되는 녀석이었다. 개에 견줄 정도의 예민한 후각을 가진 하르크는 변종 생물 중에서 가장 흉포하고 복수심이 강했다.
그때 죽은 녀석은 자신의 발톱 두 개를 베어 버린 나인 일행의 흔적을 따라 이 통로로 들어왔던 것이다.
“유니온 초기에 이런 비밀통로들이 많이 건설됐어. 한창 권력 싸움을 하던 원로원 요인들은 자신이 유니온을 빠져나갈 이런 통로를 수십 개씩 만들어 놓았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비밀 통로들은 그들에게 잊혔고, 그중 몇 개가 유니온으로 들어오려는 아우터들과 우리같이 자원이 필요한 장인들 그리고 아우터들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거래선을 잡으려는 상인들에게 발견되었지.”
하룬은 해란의 설명을 들으며 통로 천장에 설치된 발광 막대를 보았다. 현재는 전혀 볼 수 없는 종말 시대의 유물로 3초마다 발광發光하는 막대가 좁은 간격으로 천장에 박혀 있어 흐릿하지만 사물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여긴 우리를 비롯한 장인 거리의 장인들과 영흥 마을에 사는 아우터들이 주로 이용하는 통로야. 다른 상인들이 쓰는 통로는 따로 있지.”
“유니온에서 가만히 두지만은 않았을 텐데.”
해란에게 들어 보니 암시장 상인들도 상당한 세금을 일괄적으로 유니온에 낸다고 했다. 물론 세금이 아니라 보호비라는 명목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가끔 유니온에 들어온 아우터들 중에 강도나 강간 등의 중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어 비밀 통로를 그냥 놔두지만은 않을 것 같아 물어본 것이다.
“뭐, 가끔 이런 비밀 통로가 수비군에 발각되어 폐쇄가 되는 경우가 있지만, 그런 경우에도 다 수가 있어.”
그렇다면 그런 줄 알면 되는 것이다. 하룬은 벌써 1킬로미터 가까이 걸은 해란의 앞쪽에 아까처럼 빛으로 일렁이는 문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해란은 바로 나가지 않고 일행을 기다렸다.
“나가기 전에 옷을 정리하고, 보안경 쓰는 것을 잊지 마.”
사람들은 짐을 잠시 내려놓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노출되는 곳이 한 곳도 없도록 두껍고 긴 천을 옷 위로 꼼꼼하게 두르고 보안경을 썼다.
“아우터들은 그래도 바깥 환경에서 수백 년 동안 적응을 해 와서 잠시 정도는 피부를 노출해도 괜찮지만, 우리처럼 배리어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외계 공기와 직접 접촉하거나 강력한 자외선이 포함된 햇빛을 받으면 금방 급성 암에 걸리니까 절대 노출을 해서는 안 돼. 호흡도 마찬가지야. 반드시 미세 먼지까지 걸러 주는 마스크를 착용해야 해. 아직 외계 공기에는 방사능을 포함한 오염 물질들이 가득하니까.”
해란은 특히 배리어를 처음 나가는 하룬에게 주의를 주었다.
“알았어.”
하룬은 하드 레더 위에 폭이 넓고 두꺼운 천을 이용해서 마치 미라처럼 전신을 둘둘 감았다. 그런 것은 거리에서 먼지를 치우는 일을 했었던 하룬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너무 꽉 조이면 움직이는 데 불편하니까 되도록 느슨하면서도 매듭이 풀리지 않도록 하면 돼.”
해란의 조언대로 다시 천을 감싼 하룬이 마지막으로 필터가 내장된 마스크와 보안경을 쓰고 천으로 그 주위를 가렸다.
“자, 갑시다.”
해란이 빛으로 일렁이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하룬도 설레고 긴장되는 마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흐음!”
이제껏 단 한 번도 보거나 접하지 못한 태양이 그의 눈을 멀게 할 것처럼 강한 자극을 주며 들어왔다. 에너지로 만들어진 배리어를 통과한 햇빛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하고 강렬한 빛을 가진 태양이었다.
처음 본 배리어 밖 대지는 모래가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었다. 떠오르는 햇빛을 받은 사막은 모래와 넓은 유리 지층 그리고 다양한 크기의 유리조각들이 섞여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유리 조각들은 텍타이트 글라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으로 핵폭발에 섭씨 5,000도가 넘는 고열에 모래가 녹아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종말 시대에도 이 유리 지층과 유리 조각이 몇 개의 사막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것들은 그들의 선조가 핵전쟁을 벌일 정도의 초고대 문명을 이룩했던 증거였다.
마치 보석이 가득 깔린 듯 햇빛에 빛나는 사막이 두 눈 가득 들어오자 하룬의 가슴이 뛰었다.
그런 하룬을 보고 있던 해란이 싱긋 웃었다.
“멋지지? 나도 처음 밖에 나와서 가장 감탄한 것이 바로 저 태양과 아름답게 반짝이는 모래 바다였어.”
“진짜 멋지네.”
하룬은 비록 피부 한 점 노출이 되지 않게 꽁꽁 싸맨 상태지만 미지의 영역을 처음으로 접하는 격한 감동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흥을 받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높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벽 위로 햇빛을 받아 산란을 일으키고 있는 에너지 배리어가 보였다. 배리어는 미세하게 흔들리며 하늘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비욘드가 아니었으면, 벨이 없었다면 평생 저 안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비참하게 살다가 죽었겠지.’
그 생각을 하니 새삼 자신이 살아온 날들이 아무 의미 없게 느껴졌다.
“자, 가자고. 하르크나 오르그 같은 변종 생물들은 햇볕이 약해지고 온도가 내려가는 초저녁 무렵부터 밤까지 주로 활동하니까, 힘들지만 우리는 이 시간에 움직이는 수밖에 없어.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힘들겠지만 이글거리는 열기 속에 쉬는 것은 아예 목숨을 내놓는 것과 마찬가지니 약속 장소까지는 쉬지 않고 걸을 거야. 5시간은 족히 걸릴 테니 체력 안배 잘하고 앞사람 발자국만 보고 따라와.”
선두로 나온 바란의 말대로 감상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등에 멘 배낭에 설치한 영산影傘을 펼쳤다. 영산은 그늘이 생기게 만든 양산의 일종으로 배리어 밖을 여행하는 이너들이 주로 쓰는 도구였다.
하룬은 모래로 가득한 대지에 힘주어 발을 디뎠다. 모두 바란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뜨겁다!’
얼마 걷지 않았음에도 발바닥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해란이 바닥과 굽이 높은 워커 종류를 신으라고 했지만 고집을 부려 통기성이 좋은 얇은 가죽신을 신은 하룬은 이렇게 금방 모래가 햇볕에 달구어질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따듯하다가 이내 뜨거워진 모래는 달궈진 철판 위를 걷는 듯한 뜨거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뿐 아니라 몸 전체도 떠오르는 태양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로 금방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곁으로 해란이 다가왔다.
“덥지? 더울 거야. 요즘 배리어 밖은 한낮에는 거의 섭씨 55도까지 올라가니까. 아무리 영산이 있어 그늘을 만들어준다고 해도 힘들 거야. 처음에 내가 배리어 밖에 나왔을 때는 초겨울인데도 얼마나 햇빛이 강한지 살이 다 익어 죽을 뻔했으니까. 땀이 많이 나겠지만 참아야 해. 덥다고 무심코 피부를 노출시켰다가는 금방 죽고 말 테니까. 힘들더라도 앞사람 뒤만 보고 걸어야 해.”
하룬은 벌써부터 흐르는 땀 때문에 눈이 따끔거려 인상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안경을 쓰기 전에 이마에 두꺼운 천으로 만든 밴드를 하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무심코 넘긴 것이 후회되었다.
‘빌어먹을!’
욕설이 저절로 나왔다.
비욘드의 것보다 훨씬 질이 떨어지는 하드 레더는 땀을 흡수하자 금방 맨살에 바짝 달라붙기 시작했다. 하드 레더가 살에 닿는 감촉이 점차 더 강해져 이내 심한 불쾌감을 유발하고 있었다.
“미친 거 아니야?”
하드 레더를 입겠다는 하룬의 말에 해란 자매는 이렇게 말했다. 통풍이 잘되고 땀을 잘 흡수하는 특별한 천으로 만든 옷을 입어도 더워 죽을 판인데, 가죽으로 만든 하드 레더를 입겠다고 고집하는 하룬이 너무 황당했던 것이다.
“영흥 마을 전사들이 우리를 지켜줄 거야. 굳이 그렇게 무장을 할 필요는 없다고.”
나중에는 바란까지 말렸지만 하룬은 혹시 모를 하르크의 습격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과 비욘드에서의 습관이 강하게 남아 있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워낙 강하게 고집을 부리니 나중에는 그들도 포기를 하고 말았지만 그들의 눈은 걱정이 가득했던 것이다.
채 30분도 걷지 않았는데 등에 멘 짐은 물론 입고 있는 하드 레더와 옷까지 모두 내던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몸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워지고 서서히 화염 속에서 타는 듯 뜨거워지고 있었다.
바란을 비롯한 일꾼들과 해란 자매가 꿋꿋하게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는 것을 보니 정말 존경스러웠다. 나름 비욘드를 통해 자신을 매섭게 단련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자신의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았다.
어느새 행렬의 맨 끝으로 처지고 말았다.
“후욱! 후욱!”
자신도 모르게 거칠어진 숨결마저 마음에 걸릴 정도로 모든 감각이 최대치를 넘어서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인 듯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을 힘겹게 한 발짝 떼는 데만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내가 이 정도에 불과했단 말이지?’
이제는 좀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하르크를 죽이며 우쭐하기도 했고 자신감을 가지기도 했다. 게임에서 랭커는 못 되지만 현실에서는 자신이 꽤 강할 거라고 생각했다.
‘또 초심을 잃었어.’
하룬은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땀이 눈 속으로 사정없이 들어가 바늘로 눈알을 찌르는 듯한 고통은 물론 시야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더위도 더위지만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으니 더 죽을 지경이다. 이대로라면 나인 일행과 만나기로 한 곳까지 가기도 전에 쓰러지고 말 것이다.
‘그래! 죽어 보자!’
하룬은 메신저 워킹을 펼쳤다.
“훅!”
자신도 모르게 격한 호흡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발바닥을 통해 상상하지 못한 뜨거운 열기가 엄청나게 빨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마나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 열기는 한순간에 머리끝까지 치솟았고 순간적으로 어지러움과 함께 몸이 비틀거릴 정도였다.
꽈악!
비릿한 피가 아랫입술에서 나와 혀를 자극하자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온몸이 화염 구덩이에 빠진 듯 강렬한 열기가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가는 그 감각은 고통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버렸다.
뼈가 타 버리고 살이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세포가 촛농처럼 녹아내리며 신경 단위인 뉴런을 같이 녹여 버린 듯, 극렬한 통증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도 앞으로 걷고자 하는 의지와 본능은 그의 발을 끊임없이 메신저 워킹 스킬의 정교한 부분 동작을 연결하며 움직이게 만들었다.
끊임없이 발을 통해 몸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열기로 한가닥 의지와 본능밖에 남지 않은 하룬은 걷고 있지만 기절한 상태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뜨거운 사막의 열기와 사투를 벌이고 있기 때문에 맨 뒤에 따라오는 하룬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화르르륵!
마침내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화염 한 줄기가 솟아올랐다. 끊임없이 유입되는 열기가 만들어 낸 화염이 머리끝으로 오르더니 나갈 곳을 찾지 못하고 다시 몸 안으로 방향을 틀었다. 솟아올랐던 그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이었다.
뇌신경은 물론이고 머리 전체가 녹아 버리는 것처럼 열기에 잠식당해 움직이는 채로 정신을 잃은 하룬이지만, 걷겠다는 의지와 이제는 몸 구석구석의 말단 세포까지 각인될 정도로 수련한 메신저 워킹 스킬을 계속되었다.
화아악!
혈관이 모두 다 타고 피가 전부 증발해 버린 것 같았다. 발에서 올라온 뜨거운 열기는 온몸을 한 바퀴 돌아 계속 유입되는 열기와 아랫배 어름에서 합해졌다. 그곳에서 잠시 힘을 모은 열기는 한 번 가 본 길로 방향을 틀었다.
성기로 내려온 열기가 꼬리뼈 바로 위를 통과해서 척추를 따라 위로 솟아오르더니 목덜미를 거쳐 정수리까지 잠시 머물고는 이마와 인중을 지나 가슴 정중앙까지 내려왔다. 그곳에서 잠시 머문 열기는 이내 애초 자리를 잡은 아랫배로 돌아왔다.
그때 하룬은 극한의 고통에서 벗어나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마치 타인이 되어 자신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구경하듯 무심하게 그 열기의 흐름을 지켜보았다.
아랫배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은 열기는 회오리가 되어 그 밀도를 높였고, 좁쌀만큼 작게 응축되었다가 이내 안개처럼 풀어져 다시 발로부터 올라오는 열기와 하나가 되어 예의 그 경로를 순행했다.
묘하게도 더 이상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뼈와 살 그리고 신경 회로들이 마치 재생이라도 된 것처럼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을 드러낸 마른 저수지에 비가 내려 채워지는 물처럼 전신에서 활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뭐지?’
전혀 의도하지 않던 일이 일어났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기이하고 놀라운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하룬은 아주 조금씩 그 크기를 키워 가는 열기를 주시했다.
이제는 더 이상 화염이 아니었다. 불이 어떻게 형태를 바꾸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마치 용암이 된 것 같았다. 흐르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것처럼 끈끈하고 엄청난 밀도를 가진 액체 혹은 기체로 변한 것이다.
하룬은 시간의 흐름까지 잊고 끝없이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신기한 현상에 매료되어 있었다.
“다 왔다.”
이어폰을 통해 선두 바란의 지치고 갈라진 통신이 들려왔다.
마치 외출을 했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온 사람처럼, 그 순간 하룬의 의식이 돌아왔다.
“후웁!”
저도 모르게 숨을 깊이 들이쉰 하룬은 뭔가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땀이 흐르지도 않았고, 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머리는 맑았고, 육체는 말단까지 그 생생한 활력이 느껴졌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언제 죽었는지 모를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절반 가까이 모래 속에 박힌 곳이었다. 이미 죽은 나무가 마치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상태로 용케 서 있었지만, 그래도 워낙 큰 나무이기에 제법 넓은 그늘을 드리워 놓고 있었다.
그늘로 들어간 사람들은 자리를 잡고 쓰러져 버렸다.
“헉! 헉! 내리 5시간을 한 번도 쉬지 않고 걸었더니 죽겠어.”
세란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바란만 물통을 찾기 위해 팔을 움직일 뿐 해란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아예 그늘에 몸을 눕히고 꼼짝도 하지 못했다.
미동도 없이 쓰러진 그들이 걸친 두꺼운 천을 통해 땀이 증발해서 생긴 허연 소금기가 보였다. 땀이 나고 증발하는 과정이 반복되어 생긴 것이다.
‘5시간이나 걸었다고?’
약 30분 정도가 지난 후부터는 전혀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지 못했다. 하룬은 등에 멘 무거운 배낭을 천천히 내려놓고 보안경을 소매로 닦았다.
“와아! 너 대단하다. 어떻게 처음 사막에 나왔으면서 이런 한여름에 초보가 베테랑인 우리와 그렇게 보조를 맞출 수 있는 거지?”
“후우웁! 그거면 말도 안 해. 옷들과 그 위에 걸친 천만 해도 죽을 판인데 하드 레더까지 입고 여기까지 왔는데도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어. 이 사막을 벌써 열 번 이상 다녀 본 우리도 죽기 일보 직전인데.”
해란 자매가 감탄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하룬은 자신의 몸속에서 일어난 현상에 빠져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냥 싱긋 웃기만 했다.
하룬은 천천히 원을 그리며 걸어 나무와 주위 경관을 눈에 담았다.
죽은 나무를 경계로 사막의 모습은 조금 달라지고 있었다.
저 멀리 햇빛을 산란하는 배리어가 보이는 곳까지는 먼지바람이 수시로 부는 모래사막이라면, 반대편은 옅은 붉은색을 띠는 황무지였다. 비록 모래사막은 아니지만 생명체가 거의 없는 불모의 땅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색이 달라져서 그런지 기분도 좀 나아지는 느낌이다.
드디어 모래사막은 끝난 것이다.
하룬은 처음 대하는 신비로운 외계의 풍경에 매료되어 한참 동안 사방을 구경하다가 그늘로 돌아왔다. 바란과 세란은 그새 보안경과 마스크를 해제하고 나무를 이용해서 임시로 설치한 천막 안에 앉아 있었다.
타고난 전사 체형과 체력을 가진 두 남매의 얼굴은 몇 시간 만에 아주 핼쑥해졌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러나고 얼굴 전체가 소금기 때문에 하얗게 보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심한 정신적 육체적 피로를 견뎌 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늘에서는 잠시 보안경을 벗어도 돼. 그리고 이곳부터는 방사능 수치나 오염 물질의 농도가 현저하게 낮아지니 잠시 마스크를 벗어도 돼. 하지만 30분 이상은 여전히 위험하니까 시간을 잘 지키라고.”
바란이 하룬에게 물주머니를 건네며 주의를 주었다.
“알았습니다.”
물주머니를 받은 하룬은 자리를 잡고 머리와 얼굴에 두른 천을 풀어 보안경과 마스크를 해제했다.
“흐으읍!”
깊이 숨을 들이쉬자 열기 가득한 대기가 코를 통해 들어왔다. 바짝 마른 건조한 공기지만 거추장스럽던 마스크를 벗은 기분 때문인지 무척 신선하게 느껴졌다.
하룬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의식을 돌려 자신의 내부로 침잠하려는 찰나, 바란이 그 모습을 보고 미안했는지 한마디 했다.
“유니온 북쪽이나 동쪽은 그래도 1시간만 벗어나면 황무지 지역인데, 이곳은 5시간이나 사막을 걸어 통과해야 하니 정말 힘들어. 하지만 어쩌겠어. 우리가 지리를 잘못 잡은걸.”
그 말을 들으며 하룬의 의식은 자신의 내부로 향했다.
‘이게 비욘드에서 말하는 마나, 현실에서 말하는 기氣라는 거구나.’
처음으로 실체를 느낄 수 있는 기였다. 아랫배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은 채 웅크린 좁쌀처럼 작은 기의 덩어리에 의식을 집중했다. 아지랑이처럼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기의 덩어리는 흡사 용암처럼 느껴졌다.
하룬은 그 기를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지는 기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애를 써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자신의 몸속에 자리를 잡기는 했지만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질적인 존재인 듯 꼼짝도 하지 않는 녀석과 한참을 씨름한 끝에 하룬은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허어, 참!’
한숨과 함께 눈을 뜬 하룬은 아직도 죽은 듯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바란과 세란 자매 역시 일꾼들과 마찬가지로 언제 다시 뒤집어쓴 건지 보안경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짐을 베개 삼아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하룬도 바란의 충고가 생각나 다시 보안경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잠을 청했지만 그의 육체는 방금 깨어난 것처럼 힘과 기력이 충만한 상태였다. 결국 하룬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메신저 워킹을 펼치면서 작은 원을 그리며 걸었다.
하룬은 사막을 걸으며 흡수한 뜨거운 대지의 기운을 끊임없이 순환시키고 있었다.
‘이젠 제법 커졌는데.’
처음에는 좁쌀보다 작아 겨우 그 존재만을 느낄 수 있던 기의 덩어리는 이제 콩알 크기로 커져 있었다. 그리고 기의 통로 역시 계속되는 순환으로 많이 넓어진 느낌이었다. 기의 통로에서 몸의 각 부분으로 흐르는 미세한 기의 통로 역시 기의 순환 속도가 빨라진 여파로 조금은 넓어진 느낌이었다.
일행이 모두 죽음처럼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은 2시간이 훨씬 넘은 후였다. 강렬한 햇빛을 방사하는 태양이 머리 바로 위까지 떠 있었다.
“하룬!”
그 소리는 자신의 의식 내부에 침잠해 있던 하룬의 오감을 외부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와 더불어 기의 순환도 자연스럽게 멈추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아랫배 깊숙한 곳으로 돌아갔다.
“설마 그 상태로 잔 것은 아니겠지?”
잠에서 깨어난 해란이 신기하다는 듯 그를 보고 있었다.
“명상을 하다가 그냥 잠이 들었어.”
“명상까지? 아무튼 대단하다. 그렇게 장비를 착용하고 명상을 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그녀가 묘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니 아마 하룬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별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아무렴 어때.’
하룬은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저기 온다!”
세란의 외침에 눈을 돌려 보니 뜨거운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이글거리며 올라오는 붉은 황무지에 한 줄로 늘어선 인영들이 그들을 향해 오고 있었다. 바란이 목에 걸고 있던 작은 뿔고둥을 불자 그쪽에서도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내서 신호를 보내왔다.
눈에 들어온 지 30분이 지난 뒤에야 그들이 거대한 나무가 만들어준 그늘에 도착했다. 영흥 마을에서 온 나인 일행이었다.
그들의 복장도 하룬 일행과 다를 바가 없었다. 흰색 천으로 몸 전체를 감고 일체형으로 제작된 마스크를 쓴 그들의 등에는 보기만 해도 무거워 보이는 배낭들이 머리 위로 한참 높이 솟아 있었다.
특이한 것은 짐을 주렁주렁 매단 동물 세 마리를 끌고 왔다는 것이다. 등을 따라 작은 혹들이 줄지어 난 그 동물은 넓고 털이 밀생한 발바닥을 가지고 있었고, 체고는 성인 남자의 키에 머리에서 꼬리까지는 그 두 배 정도로 길었다.
그늘로 들어온 사람들은 서둘러 얼굴에서 마스트를 탈착하고 몸에 두른 천을 벗었다. 그들은 하룬처럼 그 안에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와 초승달 모양이로 잔뜩 굽은 칼을 착용하고 있었다.
“어서 와, 나인아. 오느라고 고생했다.”
“고생은 무슨. 우리야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이 일인걸. 너희들이 고생했지.”
해란과 세란은 나인을 안고 방방 뛰며 반가운 해후를 나누었다. 남자들끼리도 이미 아면이 있는 듯 서로 어깨를 안고 인사를 나누었다. 혼자 소외된 하룬은 처음 보는 동물로 다가갔다.
푸르릉!
하룬의 접근에 그 동물들이 좀 긴장한 듯 콧구멍을 넓히고 묘한 소리를 냈지만 그늘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하룬은 신기한 마음에 그 동물에게 다가가 이곳저곳을 살폈다.
‘혹시 이게 낙타라는 동물인가?’
하지만 그가 본 사진이나 영상과는 좀 달랐다. 혹이 있는 것은 비슷하지만 이 동물은 큰 혹이 아니라 주먹 크기의 작은 혹들이 등줄기에 줄지어 솟아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점은 이들의 이빨이었다.
낙타는 초식 동물로 알고 있는데 이 동물은 전혀 달랐다. 녀석들은 송곳니가 나 있었다. 휴먼들과 비슷한 구조의 이빨로 보아 육식성 동물로 보였다. 발가락은 세 개로 다리 굵기에 비하면 무척 큰 편이고, 밖으로 털이 보일 만큼 긴 털들이 밀생해 있었다.
“라나두라고 해요.”
돌아보니 나인이었다. 지친 얼굴이지만 눈은 빛을 내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 그늘막 아래에서 쉬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종말 시대에 존재하던 낙타가 변이를 일으켜 진화한 동물로 추정이 되는 놈들이에요. 낙타와는 달리 육식도 하는 동물로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요. 짐은 300킬로그램까지도 운반할 수 있고 한번 물을 마시면 한 달은 충분히 먹지 않고 버틸 수 있어요. 황무지에 간간이 자라는 풀을 찾는 능력을 지녔고, 세 마리면 하르크를 상대하는 괴력을 가진 놈이에요.”
“굉장하네요.”
하긴 변종 생물들이 우글거리는 배리어 밖에서 살아남은 놈이라면 특별한 능력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막이나 초지에서는 단거리에서 이 라나두보다 더 빨리 달리는 동물은 없어요. 지구력도 엄청나서 하르크도 급습을 하지 않으면 못 잡는 놈들이죠.”
놀랄 만한 빠르기를 지닌 하르크도 쉽게 잡지 못할 정도면 대단한 동물이었다.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길들이기 시작해 이제 겨우 어느 정도 야성을 제거했지만 아직 사람을 태우지는 않아요. 충분한 먹이를 주지 않으면 야생으로 도망가 버리기 때문에 먹이에 신경도 많이 써야 하는 놈들이랍니다.”
“그렇군요.”
하룬은 나인의 말을 들으며 한 라나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가락 한 마디 길이의 털은 그 감촉이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손바닥을 통해 녀석의 체온이 느껴졌다. 특이하게도 라나두의 체온은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로 낮았다.
‘아마 이래서 이런 열기 속에서도 잘 견디는가 보구나.’
그의 손길이 머리를 지나 혹들이 줄지어 늘어선 등뼈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잠시 하룬의 눈치를 보던 나인이 막 뭔가를 이야기하려고 할 때 해란이 그녀를 불렀다.
“나인아, 식사해!”
나인은 순간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콧등에 작은 주름을 만들고는 해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