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지도책의 인연 (52/278)

《지도책의 인연》

 제약 과정은 오래 걸렸다.

 처음에는 하룬도 머리에 담아 둘 생각으로 해독약을 조제하는 과정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지만, 공정이 너무 복잡하고 들어가는 재료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에고! 그냥 책이나 보자.’

 하룬은 지하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가츠가 모으거나 직접 저술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비록 테론 제국어는 처음 보지만 유저의 특권 중 하나가 바로 모든 문자를 읽을 수 있도록 변환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은 별다른 제약이 없었다.

 이미 라의 유물인 지혜의 파편을 통해 인체에 대한 광범위한 기초 지식을 배운 하룬은 외상 치료법이 적힌 책을 읽기 시작했다. 미리 배운 것이 없다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용병 아카데미에서도 간단한 치료법은 배웠지만 이 책의 내용은 차원이 달랐다. 상처를 소독하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뼈를 붙이고 끊어진 근육을 잡아 빼서 연결하는 접합법에 이르기까지, 외상에 대한 광범위한 치료법들이 소상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아예 통째로 암기하기도 하면서 책을 몇 번이고 정독한 끝에 어느 정도 책의 내용을 알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안내음이 들렸다.

 -‘외상 치료’ 스킬을 익혔습니다. 간단한 외상 치료를 직접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완독한 것만으로도 이런 안내음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 책의 내용이 얼마나 효용 가치가 큰지 알 수 있었다.

 뭔가 또 하나 새로 익혔다는 생각에 뿌듯해진 하룬이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들을 보았다. 네 노인들은 아직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랫동안 이런 작업을 같이해 온 듯 그들은 눈짓만으로도 상대방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언제 뭘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룬은 다음으로 약 조제법이 기재된 책을 꺼내들었지만 내용을 잠깐 확인하고는 다시 제자리에 꽂았다. 이것은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 순서를 통째로 암기해야 하는데, 치료약의 종류별로 그 제조 공정이 족히 두세 쪽이 넘어가고 있었다.

 조제법을 포기한 하룬은 이번에는 약초에 관련된 책을 꺼내 들었다. 얼마나 방대한 약초 지식이 담겨 있는지 두께가 여느 책의 대여섯 배는 되는 것 같지만, 그림이 많아 보기는 좋을 것 같았다.

 ‘흠, 이건 볼만하겠어.’

 처음에는 용병 아카데미에서 헥터 교관으로부터 제법 많은 약초 지식을 물려받았기에 중복되는 약초들이 나왔다. 하지만 그때 배운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그때는 흔히 쓰이는 약초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배웠지만, 이 책의 내용은 동일한 약초라도 그가 배운 것의 두세 배는 되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었다.

 약초의 계절별 외형이라든지 뿌리와 줄기, 잎과 열매에 이르는 자세한 설명이 그림과 함께 있었다. 어느 상처에 어떤 방식으로 쓰이는지 사례를 들어가며 그 용처와 사용 방법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이론뿐 아니라 실제적인 쓰임까지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하룬은 어느새 노인들의 존재까지 잊고 책의 내용에 빠져 버렸다.

 전혀 모르는 내용이 아니라 나름 기초를 익혔다고 생각하던 약초학이기에 더 재미가 있었다. 외상 치료에 관한 책을 볼 때와는 달리 외우려고 하지 않아도 몇 번만 반복해서 읽으면 이해가 되고 기억할 수 있게 되니 흥미와 관심이 저절로 집중 상태를 유도한 것이다.

 탁!

 마침내 마지막 장까지 다 읽은 하룬이 책을 덮었다.

 ‘정말 귀중한 책이다.’

 수십 명이 함께 저술한 듯 약초마다 그 필체가 달랐다. 더구나 문장 사이로 가필한 것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동시에 많은 사람이 함께 저술한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내려오며 만들어진 책으로 보였다.

 잠시 후 지식을 쌓은 기쁨을 배가시켜 주는 안내음이 들렸다.

 -집중, 지식, 지혜의 각 항목이 1씩 상승합니다.

 -응급치료 스킬 레벨 1을 마스터했습니다.

 -치료약 조제 스킬 레벨 1을 마스터했습니다.

 -초보 치료사의 칭호를 얻었습니다. 칭호의 효과로 모든 스텟이 1씩 상승합니다.

 비록 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분은 좋았다.

 “허허허! 이 무서운 아이언 스네이크를 잡아 온 용병이라기에 무식하게 싸움만 잘하는 친구인 줄 알았더니, 꼬박 하루를 내리 책에 빠지는 재주까지 가지고 있었네.”

 문득 들려온 소리에 돌아보니 네 노인은 이제 작업을 다 끝냈는지 쉬고 있었다.

 “예끼, 이 친구. 무식하게 싸움만 잘해 가지고는 아이언 스네이크를 잡을 수 있겠어? 저렇게 책을 가까이하는 품성과 교양까지 가지고 있으니 잡았겠지. 안 그런가, 가츠?”

 “페로의 말이 맞아. 내 한눈에도 이 친구가 단순히 힘만 세고 무식한 용병 나부랭이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보았지. 그래서 초면에 사정 이야기를 다 해가며 부탁을 한 것이고.”

 “하하하! 그나저나 자네 배 안 고픈가? 꼬박 하루가 지났는데.”

 하룬은 노인들의 대화를 듣고서야 자신이 하루 동안이나 이 책에 심취해 있었음을 알았다. 집중알 잘하는 것은 좋은데 이래서야 몸이 제대로 남아날까 두려웠다. 노인들의 말을 들으니 바로 꼬르륵 소리를 내는 몸도 그렇지만, 행여 나쁜 마음을 먹은 인간이 접근하기라도 했다면 어쩔 뻔했을까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했다.

 “이 책의 내용이 하도 좋아서 시간 가는 것도 잊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헥터 스승님께 약초학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니 제가 얼마나 부족한지 새삼 깨닫게 되더군요.”

 “자네가 헥터의 제자라고? 정말인가?”

 페로라는 이름을 가진 노인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네. 용병 아카데미에서 인연을 맺었습니다. 저에게는 아주 고마운 스승님입니다.”

 “이런 인연이! 헥터는 내 생명의 은인일세. 자네가 은인의 제자였군. 어떻게 이렇게 만날 수가 있나?”

 “그랬습니까?”

 세상은 참 묘했다. 거대한 제국에서 용병과 약초꾼으로 살아가는 두 사람의 인연이 이렇게 또 연결이 되었다.

 위로 올라가 밝은 햇살을 받은 하룬은 노인들과 함께 하루만의 식사를 하며 즐겁게 대화하는 시간을 보냈다. 화제에 오른 것은 헥터 교관과 이미 만들어진 해독약으로 살아난 아이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약초에 대한 것이었는데, 주로 하룬이 묻고 노인들이 번갈아 대답을 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지하실로 내려온 하룬에게 가츠는 해독약이 든 밀봉된 유리병 삼십 개와 또 다른 유리병 삼십 개를 주었다.

 “이게 해독약이군요.”

 “그렇다네. 여기 있는 유리병에 담긴 것들은 자네가 부탁한 해독약이고, 이쪽에 있는 유리병 열 개는 외상 치료제일세. 그리고 여기 있는 열 개는 내상을 치료하는 약이 들어있네. 마지막으로 이 열 개에는 위급한 상황에 복용하면 잠력을 끌어올려 평소의 세 배 정도 능력을 쓸 수 있는 약이 들어있네. 하지만 위급 상황이 끝나면 족히 일주일은 정양해야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조심해서 사용하도록 하게.”

 하룬은 놀란 눈으로 감사 인사도 하지 못하고 약들을 번갈아 보았다. 내외상을 가리지 않고 사용하는 포션과는 달리 내상과 외상을 구분해서 사용하는 치료약도 놀랍거니와, 위급한 상황에서 잠력을 뽑아 쓸 수 있는 이런 약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이것들은 비전으로 조제한 것이니 어디 가서 입도 벙끗하지 말게. 안 그러면 이제 곧 흙 속으로 들어갈 우리 늙은이들이 더 빨리 죽게 될 테니까.”

 노구에도 며칠 동안이나 해독약 조제에 매달린 네 노인들의 주름지고 피로한 얼굴을 보는 순간 진정으로 고마웠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기…….”

 하룬은 감사 인사와 함께 준비한 돈주머니를 인벤토리에서 꺼내 노인들에게 내밀었다. 세류로부터 의뢰비로 받은 돈 중 1만 골드에 해당하는 보석과 마나석이 든 주머니였다. 미리 이들에게 주려고 나누어 놓은 것이었다.

 “이게 뭔가?”

 가츠가 영문을 몰라 눈을 끔벅거렸다.

 “사실은 어른께서 주신 지도를 사용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하룬은 가츠를 비롯한 약초꾼 노인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의 설명을 들은 노인들은 그제야 사정을 이해하고 푸근한 미소를 떠올렸다.

 “어르신이 주신 지도가 아니면 그곳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랬군. 그래도 우리가 준 지도만으로 그곳까지 가는 것은 무리였을 텐데.”

 빙긋 미소를 머금은 가츠는 아직 손을 내밀지 않았다.

 “의뢰자가 가진 지도와 이 지도를 같이 보면서 움직였습니다. 덕분에 험준하고 위험한 지형지물을 피할 수 있었고, 안전하고 빨리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의뢰자가 찾던 장소는 지도에 기재된 마지막 장소에서 닷새 거리였습니다.”

 “허허허! 이거, 받아도 되나? 어찌 생각하면 우리에게 굳이 줄 필요가 없는 돈인데.”

 가츠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다른 노인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에 큰 욕심은 담겨 있지 않았다. 다만 굳이 이렇게까지 그들의 몫을 챙겨 주려는 하룬에 대해 기특해하는 마음만이 느껴졌다.

 “아니요. 분명히 그 지도 때문에 받은 돈입니다. 후크란 사태 때문에 귀한 약초를 캐지 못해 생활이 어려워진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1만 골드이니 얼마간은 피해에 대한 보상이 될 겁니다.”

 “허어, 1만 골드씩이나!”

 가츠는 그제야 가죽 주머니를 열어 안에 든 보석들과 마나석들을 살펴보았다. 잘 가공된 상품의 물건들은 휘황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정도라면 하룬의 말대로 후크란 산맥 일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피해보상을 하고도 남았다.

 “자네는?”

 “전 따로 받았습니다. 더구나 해독약을 비롯해서 귀한 약들까지 공짜로 만들어 주셨는데 더 바랄 것이 없지요. 더 이상의 보상은 필요 없습니다. 또한 나미레의 미소를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상받았습니다.”

 그제야 돈주머니를 받은 가츠와 노인들은 흡족한 얼굴로 눈빛을 교환했다. 평생 제국을 떠돌면서 희귀한 약초를 찾아 헤매던 그들의 늙고 주름진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허허허! 젊은이가 이렇게 나오니 나도 이걸 챙길 수가 없잖아.”

 짐짓 아깝다는 듯 얼굴을 찡그린 가츠는 한쪽에 둘둘 감아 놓은 아이언 스네이크의 외피를 주었다.

 “이 외피는 내가 이제껏 듣거나 본 가죽 중에 가장 단단한 것일세. 아마 실력 없는 타림 따위는 손도 대지 못할 거야. 나중에 혹시 제국 북부를 여행하면 달란트 장인 마을을 찾게. 이 외피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존재는 드워프들이나 그 마을 장인들이 유일하니까.”

 “아닙니다. 전 이미 충분히 받았습니다.”

 “아니야, 넣어 두게. 방금 전은 내가 농담한 거고 이런 가죽이 다 죽어 가는 나 같은 늙은이에게 왜 필요하겠나. 잘 간직하게. 이걸로 방어구를 만들면 수천 골드는 무난하게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잠시 고민하던 하룬은 둘둘 말린 아이언 스네이크의 가죽을 받아 배낭에 챙겼다.

 “고맙습니다. 이제 전…….”

 “잠깐. 우리 용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네.”

 가츠는 작별 인사를 하려는 하룬을 붙잡아 자리에 앉혔다.

 “자네 혹시 허벌 길드라고 들어 봤나?”

 “아니요.”

 이름만으로 생각해 보면 약초 길드쯤 된다. 하지만 그런 길드 이름은 들어 보지 못했다.

 “허벌 길드는 다른 길드들과는 달리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네. 물론 우리 같은 약초꾼들이 결성한 길드지만 자체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터라 혹시 정치적이나 군사적으로 이용을 당할까 봐 은밀하게 숨겨 왔네.”

 “이용을 당한다고요?”

 반문하는 하룬의 머릿속에는 깊은 산 험한 골짜기를 다니면서 약초를 캐는 이들을 이용하려는 세력이 있을 이유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는 몬스터들과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험한 곳을 다니는 사람들이네. 당연히 제국의 모든 곳에 대한 지리 정보를 알고 있지. 단순히 지리를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몬스터들의 서식지나 지형 그리고 기후 정보까지 꿰뚫고 있네.”

 가츠의 말에 하룬의 눈이 빛났다.

 “그럼……?”

 “그래. 우리가 아는 정보를 잘 이용하면 효과적으로 전쟁을 할 수 있지. 물론 제국 내에서 전쟁이 일어날 일은 골든 배틀이나 영지전밖에는 없지만 말일세.”

 이제야 이해가 갔다. 약초꾼들의 가치를 너무 간과했다.

 아무도 들어가 본 적이 없다는 후크란 산맥마저도 약초꾼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파악하고 있었다. 다른 금지된 지역들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냥꾼들이나 황금을 좇는 탐험가들에 비할 수 없는 훌륭한 정보를 약초꾼들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길드의 역사는 아무도 모를 정도로 길다네. 다른 길드들처럼 체계화된 조직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1년에 두 번씩 제국 각지에서 이 타우스트 남작성으로 모이는 허벌 시니어들은 자신들이 나고 자란 지역의 정보를 꿰뚫고 있지.”

 하룬의 눈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수천 년이 넘게 이어진 선배들의 지식과 경험을 물려받아 모으고 모은 정보는 계속해서 보완되고 개량되는 중일세.”

 약초꾼들이 그들의 정보를 공유하고 모아 하나로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약초꾼들이 모은 정보는 그 질은 물론 양까지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약초꾼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약초가 있는 곳에 대한 정보지만, 부수적으로 필요한 것이 많지. 몬스터들을 피할 수 있는 뛰어난 본능과 빠른 몸놀림, 지구력 그리고 생존 능력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된 약초꾼이라면 갖추어야 할 것들이 많다네. 그중에서도 그 어떤 독도 해독할 수 있는 해독약의 존재는 가장 중요하다네. 자네가 잡아다 준 이 아이언 스네이크는 제국은 물론 대륙 전체에서도 찾기 힘든 귀한 물건. 지난 1,000년 이래로 조제할 수 없었던 최상급의 해독약을 만들 수 있었네. 우리는 자네에게 우리 허벌 길드가 가진 정보를 주기로 했네. 자네의 심성이라면 이 정보를 함부로 남용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에 이렇게 결정했어. 부디 잘 사용하기 바라네.”

 가츠는 품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두께가 굉장히 두툼한 한 권의 책이었다. 책을 몇 장 넘겨보니 수백 장에 달하는 지도를 교묘하게 접은 지도책이었다.

 하룬은 수천 년에 걸쳐 수많은 약초꾼들의 지식을 모은 책이라는 사실에 선뜻 받을 수가 없었다.

 “주신다면 감사하기는 한데, 제법 귀중한 약재를 가져다준 것에 불과한 용병에게는 너무 과한 선물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허허허,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눈을 믿네. 자네는 틀림없이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특별한 사람일세. 근자에 들어서 제국의 정세가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럽게 돌아가는 이 마당에 우리 길드도 강력한 무력과 신의를 가진 친구를 가질 때가 되었다. 1,000년 전 비도 지존이라고 불린 친구를 두어 제국형성기의 혼란을 무사히 넘긴 전례가 있었네.”

 “비도지존이라시면?”

 가츠의 말에 하룬의 얼굴이 확 달라졌다.

 “그분은 전설이지. 혹자는 실전 인물이 아니거나 너무 과장된 전설이라고도 말하지만 우리는 누구보다도 그분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비도 네 자루로 대륙 유수의 소드 마스터들과 마도사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렸다고 전해지는 당시 최강자 중 한 명이었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당대 최고의 기사들이나 마법사들도 그분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고 하네. 워낙 오래전이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분의 아버님도 약초꾼이었다고 하지. 그런 인연으로 우리 길드의 친구가 되어 우리 길드를 음으로 양으로 보호했다고 하는데, 아이언 스네이크를 처음으로 잡은 분이 바로 그분이라네. 당시에 그분이 잡은 아이언 스네이크를 재료로 많은 최상급 약재가 만들어졌고, 전란기에 약초꾼들은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하네.”

 하룬이 추앙하는 비도지존과 허벌 길드 사이에 그런 인연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이미 오래전에 죽어 외피만을 남긴 거대한 아이언 스네이크의 사체 안에서 그 비도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비도지존이 아이언 스네이크를 사냥하려고 했다는 것은 짐작했지만, 약초꾼들과 그런 인연이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어쩌면 그는 후인을 위해 고대 지식이 담긴 금속판과 자신의 비도를 회수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든ㄴ 생각이 들었다. 그정도 능력이라면 비도를 회수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것은 아주 오래 전 심한 부상을 입고 우리 허벌 길드의 약초꾼들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대마법사 와르츠가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만든 특별한 마법 지도책 중 하나라네. 당시 8서클을 마스터한 그분의 능력과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수없는 마법 재료들로 만들어진 이 지도책에는 그간 약초꾼들이 직접 몸으로 확인한 테론 제국의 모든 장소에 대한 정보가 들어갈 수 있었네. 물론 새로운 내용을 입력하거나 업데이트하는 것도 가능하지. 이것은 우리 허벌 길드에서 가장 중요한 보물이라네.”

 “이런 것을 어찌 저에게 주십니까?”

 고맙기는 하지만 부담감이 너무 컸다. 자신은 이곳 세상의 주민도 아니다. 그렇다고 약초꾼이 될 것도 아니었다. 사실 있으면 소용은 되겠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난세야. 테론 제국이 들어선 후 강력한 변화의 조짐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네. 신탁을 받고 나타난 이방인들도 그렇고 유례없이 많은 황위 계승권자들의 출현도 그러하네. 골든 배틀로 수없이 수탈당하고 병사로 끌려가 죽는 등 억눌려 살던 평민들과 농노들에게도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네.”

 예전 엘저의 아버지인 피엘도 그렇고, 이 가츠 노인도 본능적으로 이 시기가 혼란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 이방인들 때문에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생각은 이어진 가츠의 말에 끊겼다.

 “자네의 마음 됨됨이와 능력을 보고 우리 늙은이들이 내린 결정이라네. 그렇다고 자네가 반드시 우리 길드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약속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야. 자네라면 잘 쓸 것이라는 믿음에서 주는 거야. 좀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 지옥과 같은 후크란 산맥을 뚫고 아이언 스네이크를 잡아 온 자네의 능력으로 지금도 텅 비어 있거나 내용이 빈약한 장소들에 대한 정보를 채워주는 걸세. 또 혼란기를 맞은 우리같이 힘없는 약초꾼들에게 예전 비도지존의 존재가 그랬듯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 주기를 바라네.”

 하룬은 가슴이 뭉클했다. 겨우 두 번 본 것만으로 자신을 이 정도로 인정해 주는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절대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비도지존의 제자나 다름없는 자신에게 이들은 남이 아니었다.

 “여러분들의 친구가 되는 일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제 능력이 닿는 한 도움이 필요한 분을 외면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 물건은 너무 귀한 것이라…….”

 “사양하지 말게. 이제 흙 속으로 들어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우리 늙은이들이 오랜만에 만장일치로 내린 결정이니 그냥 받아 두게. 사실 그동안 몇 번이나 이 지도가 영웅, 혹은 고위 귀족에게 넘어갈 기회가 있었지만, 우리의 의사 결정 방식인 만장일치가 되지 않아 밖으로 유출이 되지 않았던 거네.”

 하룬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며 그 지도책을 공손하게 받았다.

 지도책의 표지에는 잎이 다섯 장에 빨갛고 작은 열매들이 매달린 약초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하룬은 책을 받아 들고 정보를 확인했다.

『테론 제국 상세 지도책

등급: 미평가

허벌 길드에서 수천 년에 걸쳐 수많은 약초꾼들이 모은 정보를 집약해서 만든 지도책이다. 지리, 지형, 몬스터의 종류와 서식지, 약초의 서식지 등 방대한 정보가 담겨 있으며 계속 정보의 업데이트가 가능하다.

옵션: 심안 20 이상이면 지도를 펴지 않고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찾고자 하는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가츠는 사용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일단 자신의 피를 여기 표지에 있는 약초 그림의 뿌리 부분에 뿌리게. 자네가 허벌 길드의 친구이며 지도책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야 하네. 예전 비도지존은 후인을 남기지 않고 우리 길드에 이 책을 반환했기 때문에 새로 의식을 치러야 하네.”

 하룬은 감개무량한 눈으로 지도책을 보았다. 받은 책마저 시공을 건너뛰어 그의 우상인 비도지존이 썼던 것이다.

 책을 받은 순간 비도지존과 자신 간에 연결된 인연의 끈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책을 잡은 손으로 알 수 없는 뭔가가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하룬은 가츠의 말대로 손가락 끝을 단검으로 찔러 약간의 피를 그가 말한 부분에 떨어뜨렸다. 신기하게도 그의 피를 머금은 뿌리 부분부터 색감이 살아나면서 줄기와 잎 그리고 열매로 색감이 퍼져 나갔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느껴져 신기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일단 자신이 가려는 위치를 손가락으로 누르면 지도 화면이 확대되면서 현재 위치와 목적지까지의 동선, 그 사이의 지리와 지형, 몬스터들의 서식지, 그간 발견되었던 약초들의 위치 등 자세한 사항이 눈에 들어올 거야. 자네가 새로운 정보를 체득했다면 여기 있는 입의 형태를 가진 그림을 누르고 그 정보를 말하면 그 정보가 이 지도책에 수록될 거야. 그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다섯 권의 책에도 그 정보가 업데이트 되는 걸세. 이런 방식으로 우린 이 책의 내용을 채워 왔네.”

 ‘오옷! 굉장하다!’

 하룬은 혀를 내둘렀다. 이런 식으로 성장하는 책이라니. 이 정도면 비록 기형적인 문명이지만 그래도 이런 가상현실 게임까지 구현할 정도로 발달한 현대에서도 찾기 힘든 귀한 아이템이다.

 지난번에 후크란으로 갈 때 받은 지도도 그렇지만, 이 지도책은 현대에 쓰이는 홀로그램처럼 영상 마법을 이용해서 목적지까지의 갖은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잘 받겠습니다. 절대 허투루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과 앞으로 친구들을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드리겠습니다.”

 “잘 가게, 우리의 친구. 부디 건강하길 기원하겠네.”

 하룬은 더할 나위 없이 뿌듯한 기분으로 가츠 노인의 약초상을 나왔다.

 이제 가죽 공방으로 가서 방어구를 찾아야 했다.

 “어때, 내 결정이?”

 그의 늠름한 뒷모습을 조금은 쓸쓸한 눈빛으로 응시하던 가츠가 세 명의 다른 노인들에게 물었다.

 “수많은 우리 약초꾼들과 무수한 기사들 그리고 마법사들의 목숨을 덧없이 앗아 간 악마의 대지 후크란을 무사하게 다녀온 친구니 믿을 수 있겠지. 저 친구라면 예전 비도지존께서 그랬듯 우리의 훌륭한 친구가 되어줄 거 같아.”

 “암,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이네.”

 “나도. 뭔가 숨겨진 것이 많아 보이는 것이 마음에 좀 걸리기는 하지만, 드물게 정직하고 훌륭한 능력을 가진 젊은이야.”

 “나야 처음부터 저 친구의 능력을 알아봤지. 그래서 가츠에게 데리고 온 거고. 좋은 결정을 내린 걸세. 그나저나 길드원들에게 우리에게도 드디어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는 것을 알려야지.”

 노인들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아이언 스네이크라는 최상의 약재가 있으니 만들 것이 많았다. 그리고 만든 해독약으로 만성 중독에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도 구해야만 했다.

 “아버님! 왔습니다!”

 마침 거리로 시선을 주던 타림의 맏아들이 외치는 소리에 가죽 공방이 시끄러워졌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드디어 온 것이다. 공방의 상점으로 들어간 하룬은 황급히 달려온 타림과 그 아들들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하하하. 우리야 못 지낼 턱이 있나? 악마 오크들에게 럼프를 구하러 간 자네가 걱정이었지. 그래, 럼프는 구해 왔나?”

 타림 부자의 기대 어린 시선이 하룬을 향했다.

 “네, 다행히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룬은 어부지리로 싸우지도 않고 구한 럼프를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후아! 무려 이십 개나 구해왔군. 역시 대단한 친구였어.”

 그들은 하룬에게 엄지를 들어 보이더니 받은 럼프들을 살펴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좋아. 됐어! 상품이야. 이제 자네는 가 보게. 마법 처리까지 하려면 보름은 꼬박 걸려야 하니 그 뒤에 오게나. 자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엄청난 물건을 만들어 볼 테니 기대하게.”

 타림의 말에 하룬은 좀 곤혹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우리가 더 고맙지. 아무튼 럼프가 충분하니 방어구를 몇 개 더 만들 수도 있을 걸세. 마음 편하게 먹고 맛있는 거라도 사 먹으며 쉬고 있게.”

 그들은 하룬의 감사 인사에 대충 응대하고는 더 붙잡을까 두렵다는 듯 황급히 작업장으로 가 버렸다. 어지간히 기다리던 모양이었다. 천생 장인인 그들의 행동에 하룬은 미소를 지으며 공방을 나왔다.

 그 사이 퀘스트 완수를 알리는 안내음이 들렸다.

 “휴우, 그런데 보름이나 걸린다니 어떡하지?”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하룬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럼프를 구해오기 전 다른 공정이 끝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마법 처리를 하는 데 보름씩이나 걸릴 리는 없으니 행여 럼프를 못 구해올 가능성에 대비해서 손을 완전히 놓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대원들이 난리를 칠 텐데.’

 이렇게 되면 한 달 약속이 두 배가량으로 늘어나게 생겼다.

 ‘에구, 일단 어디 가서 로그아웃을 해야겠다.’

 하룬은 유저들이 득실대는 광장으로 향했다. 그곳이라면 편하게 로그아웃을 할 수 있는 구역이 있을 것이다.

 가츠의 약초상 지하 밀실에서 노인들과 함께 꼬박 하룻밤을 새운 터라 눈꺼풀의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육체는 괜찮은 상태지만 워낙 심력을 기울여 정독을 한 뒤라서 그런지 정신적인 피로가 심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제 싸가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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