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퀘스트 완수 (51/278)

《퀘스트 완수》

 ‘헉!’

 스크롤을 찢는 것과 동시에 자신을 둘러싼 공간이 비틀리며 몸이 미세한 입자로 분해되는 기분을 느끼던 하룬은 잠시 후, 타우스트 남작성 광장 중앙에 있는 분수대 앞에 텔레포트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텔레포트 스크롤을 사용해서 공간을 이동한 느낌은 어떻게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기묘했다. 하지만 몸은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광장은 후크란으로 떠났을 때보다 더 많은 유저들과 NPC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무장을 한 유저들과 기사들을 상대로 하는 상인들까지 가세한 덕분에 걷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였다.

 ‘확실히 주얼리 러시라고 부를 만하네.’

 하룬은 빠르게 움직여 주얼리 러시로 인해 몰려든 사람들이 점령한 대로를 벗어났다. 조금 더 걸어 이곳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뒷골목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비록 대로처럼 잘 정비되거나 청소된 것이 아니라 곳곳에 쓰레기들이 쌓여 있고 각종 공방에서 흘러나오는 악취들과 소음들이 흐르는 곳이지만, 하룬은 이곳에 묘한 정감을 느꼈다.

 ‘혹시 내가 이곳 주민이 되고 싶을 것은 아닌가?’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레벨 업이나 아이템, 혹은 세력이나 돈을 얻기 위해 이곳 비욘드에 접속하는 유저들과 그가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가벼운 고찰을 하며 거리를 걷던 하룬은 한 무리의 아이들이 모여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남자아이들은 긴 작대기를 들고 기사 놀이를 하는 것 같았고, 여자아이들은 옹기종기 모여 길바닥에 대충 그린 어떤 그림에 돌을 던지고 깨금발을 하며 움직이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야앗!”

 “아야!”

 “이제 넌 죽었어. 뒤로 가.”

 “싫어. 난 황혼의 기사 주르라서 이 정도 상처에는 안 죽는다고.”

 “내 검은 위대한 영웅 나르보스의 신검이라서 죽는단 말이야. 까불지 말고 뒤로 꺼져!”

 “웃기지 마. 황혼의 기사 주르가 입은 드래곤 아머는 신검에도 베이지 않는단 말이야.”

 놀이 중에 옥신각신하는 아이들의 모습과 대화에 미소가 떠오른다.

 인생 그 어느 때보다 순수하고 꾸밈없는 성정을 가지고 아무 걱정 근심 없이 친구들과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왠지 흐뭇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시렸다.

 좁은 배리어 안이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보육원이나 학교 같은 곳에서 마음껏 뛰어놀곤 했는데, 몸이 약하던 그는 항상 뒤에서 쭈그리고 앉아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구경하기만 했던 것이다.

 ‘응?’

 문득 그의 시선에 들어오는 한 아이가 있었다. 작고 가녀린 몸을 가진 한 여자아이였다. 동그랗고 맑은 눈망울을 가진 그 아이는 힘없이 한 공방의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친구들이 노는 것을 쓸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어린 시절에 느꼈던 그 쓸쓸함에 가슴이 젖은 하룬은 강한 애처로움과 동질감을 느끼며 그 아이의 옆으로 갔다. 그 아이는 잠시 그를 올려다보고는 다시 깔깔거리며 놀고 있는 여자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룬은 아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햇볕을 받은 흙벽에 등을 대니 햇살도 그렇고 따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 놀이이름이 뭐니?”

 “스퀴드 패스라고 불러요.”

 아이의 목소리는 기쁜 듯 가볍고 해맑았다. 보통 아이들이라면 이방인을 경계할 법도 한데 이 아이는 대답하는 게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예전 그의 경우처럼 외로운 것일까?

 “어떻게 하는 건데?”

 “저 오징어 모양으로 그은 선 안에 돌을 던져 놓고 한 발로 뛰어서 그 돌을 집어서 돌아오는 거예요.”

 그녀가 바라보는 곳에는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한 여자아이가 바람처럼 가볍게 팔랑거리며 한 발로 빠르게 여러 개로 그은 선 사이를 뛰고 있었다.

 “왜 넌 안 하니?”

 “그, 그건…….”

 아이는 대답 대신 입술을 꽉 깨무는데 크고 동그란 눈에는 굵은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하룬은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잠시 어색한 순간이 흘렀다.

 “나미레는 왼발을 쓰지 못해요. 다른 발도 너무 약해서 한 발로 설 수가 없어 이 놀이를 같이하지 못하는 거예요. 앉아서 하는 놀이라면 같이할 수 있는데…….”

 언제 왔는지 방금 놀이를 하던 여자아이가 곁에 와 있었다.

 제법 힘이 드는지 가쁜 숨소리를 내는 여자아이의 볼을 빨갛게 달아올랐고, 얼굴에는 건강하고 밝은 기운이 물씬 배어 있었다. 하지만 친구를 바라보는 여자아이의 눈에는 진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녹아 있었다.

 “우리 나미레도 같이 놀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얼마 안 있으면 나도 같이 놀 수 있어. 할아버지가 그러셨어. 엄청난 분이 내 약을 구하러 후크란으로 가셨다고.”

 나미레는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을 소매로 훔쳐 내며 말했다. 아까와는 달리 희망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헤엥, 웃기지 마. 네 약을 구하려고 저 악마의 산으로 들어갔다고? 그건 황혼의 기사 주르나 영웅 보르도스도 못 할 일이라고. 저긴 악마 오크를 비롯해 엄청난 몬스터들이 득실대는 곳이란 말이야.”

 한 남자아이였다. 아까 자기가 황혼의 기사 주르라서 검에 베여도 죽지 않는다고 고집을 부리던 그 아이는 다른 녀석들에게 쫓겨났는지 풀 죽은 모습으로 물러나 있다가 나미레의 말을 들었던 것이다.

 “베베르, 그런 말이 어디 있어? 가츠 할아버지는 함부로 말씀하실 분이 아니야.”

 나미레가 친구의 역성을 들었다. 나미레는 베베르라는 소년의 말을 듣고 단숨에 기대와 희망을 잃은 얼굴로 바닥을 보고 있었는데 큰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네네미 누나, 어른들이 그랬어. 이전에 이곳에 왔던 이방인들이랑 기사단들이 얼마 전 저곳에서 몰살당했다고.”

 “그런 소리 하지 마. 나미레가 울잖아.”

 “그러려고 한 말은 아닌데. 나미레 누나, 미안해.”

 베베르라는 녀석은 네네미라는 소녀의 남동생인 듯했는데 앙칼진 누나의 말에 찔끔한 얼굴로 나미레에게 사과를 했다. 악의가 있어서 한 말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나미레, 울지 마. 쟤가 널 일부러 슬프게 하려고 한 말은 아니야.”

 “흐윽, 흑! 괜찮아. 베베르 말이 맞아. 저곳은 사람들을 잡아먹는 악마들이 사는 무서운 곳이야. 우리 할아버지도 그랬고 많은 어른들이 저곳에서 다치거나 죽었어. 네 아빠도 저곳에서 돌아가셨잖아.”

 고개를 든 나미레는 눈물이 흥건한 얼굴이었다. 멀리 보이는 후크란 산봉을 향한 그녀의 눈에는 끔찍한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병이 다 나아서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싶어. 친구들과 같이 스퀴드 놀이도 하고 나물도 캐러 다니고 마을 축제에서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춤도 추고 싶어.”

 자신이 꿈꾸는 것을 이야기하는 나미레의 말은 뒤로 갈수록 작아지고 있었다. 어린 나이지만 그녀 역시 한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잇는 듯했다.

 “그럼 네가 가츠 노인의 손녀니?”

 “네? 네, 맞아요. 우리 할아버지를 아세요?”

 “하하하. 난 돌풍 용병대 대장 하룬이라고 한다. 가츠 님의 부탁을 받고 후크란에 다녀오는 길이지.”

 “그럼 아저씨가……?”

 나미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곁에 있던 네네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다행히 운이 좋아 할아버지가 부탁한 네 약재를 구해 올 수 있었단다.”

 “저, 정……말이죠?”

 나미레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지만 얼굴에는 급속하게 희열의 빛이 방사되고 있었다.

 “그래.”

 “정말…… 정말 제 약을 구해 온 거죠?”

 “그렇단다. 지금 네 할아버지에게 그 약재를 가져다주러 가는 길이야.”

 하룬은 싱긋 웃어 나미레를 안심시키며 등에 멘 마법 배낭을 손으로 두드렸다.

 “끼아악! 정말이래! 정말 내 다리를 고칠 약을 구해 가지고 왔대!”

 나미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흥분에 싸인 그녀는 마치 뛸 것처럼 일어났지만 이내 균형을 잃고 쓰러지려고 했다. 옆에 있던 네네미가 급하게 그녀를 부축했다.

 ‘이런! 쯔쯔! 이 어린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하룬은 속으로 혀를 찼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리넷 치마를 입은 나미레의 왼쪽 발목은 뼈에다가 가죽만 씌워 놓은 것 같았다. 게다가 힘도 없어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친구랑 천천히 오렴. 난 먼저 약재상으로 가마.”

 “아, 아니에요. 갈 거예요.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

 나미레는 절박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하룬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마치 그 손을 놓으면 하룬이 연기처럼 흩어져 버릴 것처럼 느껴졌는지, 그 필사적인 태도가 다시 마음을 찡하게 만들었다.

 “그럴래? 흠, 걸을 수가 없으니 어떡한담?”

 “제가 부축하면 돼요. 아니, 업고 갈게요.”

 네네미까지 필사적이었다.

 “그럼 어깨 위에 올려 줄 테니 같이 가자.”

 “네.”

 하룬은 다시 몸을 낮추어 두 소녀의 몸을 어깨 위에 얹었다. 이제 열 살도 안 되는 어린 소녀들이라 무게감도 거의 없었다. 하룬은 성큼성큼 가츠의 약재상을 향해 걸었다.

 영문을 모르는 다른 아이들의 부러운 눈길이 그 뒤를 따랐지만, 이내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놀이에 정신을 뺏기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약재상 바로 앞에 온 나미레는 네네미의 부축을 받으며 빠르게 약재상으로 들어갔다.

 “어허, 이 녀석! 넘어질라. 할아비 여기 있다.”

 가츠 노인은 약재상 안쪽에서 하룬이 떠날 때와 다름없이 마른 약초를 썰고 있었다. 주름진 그의 얼굴에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손녀 나미레를 향한 푸근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왔어요! 왔어요!”

 “에엥? 누가 왔단 말이냐?”

 가츠 노인은 볼이 빨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흥분한 나미레의 고함에 가까운 소리에 우두둑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재를 진열한 선반 뒤쪽으로 보이는 하룬의 모습에 가츠의 눈에서 잠깐 빛이 났지만 품으로 뛰어드는 나미레를 꼭 안아 주었다. 사랑스러운 손녀는 손님을 이곳까지 안내해서 온 것이 힘겨웠는지 눈에서는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뭐야? 왜 벌써 와! 혹시 자신이 없어 되돌아온 건가?”

 가츠는 실망한 듯 목소리까지 날이 서 있었다.

 무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어딘지 믿고 싶은 구석이 많던 하룬에게 내심 기대를 많이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츠의 목소리는 뭘 생각했는지 측은한 눈길로 하룬을 보았다.

 “하긴! 거기가 어딘데. 아마 찾지도 못했겠지. 더구나 몬스터들은 지천으로 널려 호시탐탐 노렸을 것이고.”

 벌써 세 번이나 시도했다.

 날고뛴다는 용병단은 물론이고 은밀하게 욕심을 부채질한 모 백작은 기사단을 두 개나 보내기도 했다. 한 번 실패한 블루 브레인 마탑에서도 대규모로 추가 인력을 보냈다. 물론 모든 시도는 물거품이었고, 살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살아온 게 용한 거지. 잘했어.”

 가츠 노인은 나미레의 등을 측은한 마음으로 토닥였다. 사실 백 중 구십구는 불가능할 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쉽게 포기할 수 있었다. 근육이 모두 사라져 마치 나뭇가지처럼 덜렁거리는 왼팔이 그의 실망한 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져왔대요! 나와 엄마 약을 가져왔다고요.”

 “저도 분명히 이 귀로 직접 들었어요.”

 품에서 벗어나 소리를 지르는 나미레는 물론이고 네네미까지 흥분해서 소리쳤다. 가츠는 나미레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이 힘겨워서 그런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기쁨의 눈물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저, 저, 정말인가?”

 놀란 가츠는 순간 하룬을 쳐다보았다.

 하룬의 얼굴에 떠오른 진한 미소와 끄덕이는 고갯짓에 가슴이 놀라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다행히 성공했습니다.”

 “정말이지? 자네, 거짓말하면 천벌을 받을 거야.”

 “이제 나미레의 다리도 정상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건강하게 뛰놀 수 있을 겁니다.”

 “정말이군. 고맙네! 고마워!”

 가츠는 하룬의 손을 쥔 채 그 자리에서 펄쩍 뛰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푸들거리고 있었고, 평생 자손들에게 죄책감을 안고 살아온 마르고 작은 몸도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어디에 있나?”

 하룬은 마법 배낭을 손으로 가리켰다.

 하룬의 손이 잠시 배낭의 주둥이로 들어가더니 이내 공처럼 생긴 혹을 가진 아이언 스네이크의 꼬리가 나타났다.

 “이놈 몸집이 너무 커서 여기에 꺼내 놓는 것은 안 되겠는데요.”

 아이언 스네이크의 꼬리를 확인한 가츠 노인의 눈에서 광채가 쏟아졌다. 힘없는 노인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강렬한 안광에는 기쁨과 슬픔, 자책과 감동의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놈을 직접 잡았군. 설마 했는데, 자넨 정말로 예사 용병이 아니었어. 그래서 내가 초면인데도 그런 부탁을 하게 된 거야. 자넬 보내고 괜히 젊은 사람 하나 잡았나 싶어 내내 마음이 편하질 못했네.”

 어느새 가츠의 눈에도 물기가 어렸다.

 “나미레, 네네미와 함께 마요론 할아버지 댁에 소식을 알리러 갔다 와야겠다.”

 “알았어요.”

 나미레와 네네미는 서로 어깨를 안고 빠른 속도로 약초상을 나섰다.

 “그래, 그럼 이리로 오게. 아, 잠시만. 아예 가게를 닫아야겠어.”

 가츠는 서둘러 가게 문을 닫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허약한 노인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기대와 설렘에 빛나고 있었고, 몸놀림은 젊은 날의 그것처럼 가볍고 날랬다.

 가츠가 안내한 곳은 가게의 뒤편에 있는 약재 보관 창고의 지하였다. 왜 이런 비밀스러운 장소가 필요한지는 넓은 실내를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책들과 약재가 담긴 큰 유리병들, 갖가지 몬스터들의 박제, 실험 도구들이 잘 정리되어 있는 실내는 이곳에서 가츠가 친구들과 가족들의 천형을 고치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다.

 지하실의 가운데는 작업대로 쓰는 거대한 탁자가 있었다. 아이언 스네이크의 몸집을 생각하면 좀 작다고 생각하던 하룬은 새끼 아이언 스네이크를 떠올렸다. 다 자란 놈은 너무 덩치가 커서 이 지하실에 꺼내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룬은 새끼 아이언 스네이크를 마법 배낭에서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독낭이 터지지 않은 녀석이었다.

 “오오! 정말 아이언 스네이크야! 내 평생에 이놈을 다시 볼 줄이야! 가이아시여, 이 불쌍한 늙은이의 소원을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소원하던 아이언 스네이크의 사체를 본 가츠는 감격의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격동에 몸을 떨고 있었다. 주름살이 가득하고 검버섯까지 군데군데 피어 있는 그의 손길이 마치 보물이라도 만지듯 아이언 스네이크의 사체를 조심스레 쓰다듬고 있었다.

 ‘이제 저 노인은 평생을 힘겹게 지고 살아온 죄책감을 떨칠 수 있을 거야. 잘했어, 하룬!’

 게임을 한 이래 처음으로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이 순간 가츠 노인이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하룬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저 무기력하던 자신의 능력을 올리기 위해 시작한 게임이지만 이런 뿌듯함을 느낄 수 있어 정말 행복했다.

 본시 냉정한 편이라고 자평하고 살던 하룬의 눈가에도 물기가 번지고 있었다.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인지 처음 경험하고 있었다. 비록 아무런 조건이나 보수 없이 돕는 것은 아니지만, 가츠 노인은 죽기 전 평생을 괴롭히던 죄책감과 한을 풀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는 것 같았다.

 “어, 어떻게 이놈을 잡았나? 아니, 그게 급한 게 아니야. 일단 사체가 굳어지기 전에 해부부터 해야 해.”

 가츠는 이후로 한참 동안 하룬을 마치 없는 사람 취급했다. 혼자서 뭔가를 중얼거리면서 놀라운 솜씨로 도축은 물론 해부를 하는 가츠의 환상적인 손길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하룬은 심심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가히 경지에 오른 도축 솜씨였던 것이다. 하룬은 단순히 구경하는 것을 떠나 가츠의 손길이 닿는 곳과 그 움직임을 파생시키는 뼈와 근육의 움직임을 짐작하며 도축 과정을 면밀히 관찰했다.

 자신도 도축 스킬을 익히긴 했지만 워낙 레벨이 낮아 단검의 날카로움이나 마나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제대로 가죽을 벗겨 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러니 관심을 가지고 볼 수밖에 없었다.

 ‘시린느의 도축 스킬도 이 정도까지 오를 수 있을까?’

 단검을 다루는 가츠의 손길을 빠르고 정확하며 심지어 유연하기까지 했다. 그 손길에 몸길이 5미터가 훨씬 넘는 아이언 스네이크는 순식간에 철갑 껍질을 홀랑 벗은 것은 물론이고 뼈와 살이 분리되었다.

 내장은 부위별로 나뉘어 다양한 크기의 유리병 안에 담기고, 뼈와 살 역시 부위별로 잘려 큰 용기에 담겼다. 힘줄도 역시 버리지 않고 따로 챙기는 가츠였다.

 ‘그런데 어떻게 저 단단하고 질긴 철갑 껍질을 벗긴 거지?’

 그렇게 생각하고 자세히 보자 가츠 노인의 손에 들린 단검이 눈에 들어왔다. 검신에 새겨진 드래곤 문양과 하얗게 빛나는 자루, 노랗게 빛나고 있는 검날은 한눈에도 보통 아이템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말 멋진 놈이군!”

 가츠 노인이 희열에 차 탄성을 질렀다. 30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그 엄청난 아이언 스네이크를 부위별로 완전하게 해체한 가츠는 그제야 하룬을 제대로 보았다. 힘주어 하룬의 손을 잡는 가츠의 얼굴은 작업할 때와는 달리 다시 벌겋게 달아올랐다.

 “정말 고마우이! 자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새 삶을 찾을 걸세.”

 “그렇게 된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나미레가 웃으면서 뛰어노는 것을 꼭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룬이 겸허하게 인사를 받는 순간 퀘스트 완수를 알리는 창이 떴다.

 -아이언 스네이크에 관한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보상으로 S.P. 50점과 300골드 그리고 명성 200점을 획득했습니다. 이제 가츠는 최선의 실력을 다해 해독약을 조제해 줄 것입니다.

 “자네 덕분에 친구들은 물론이고 내 가족과 친구들의 가족을 괴롭히던 천형을 고칠 수 있게 되었네. 이 은혜는 나와 친구들은 물론이고 우리의 가족들이 평생토록 갚을 걸세.”

 하룬은 대답 대신 빙긋 미소를 지어 주었다. 격동에 찬 가츠의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보상을 받은 것 같았다.

 “잠시만 기다리게. 약 조제에는 나보다 더 뛰어난 친구가 있으니.”

 가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계단을 뛰어 올랐다.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바닥을 박찬 그의 노구는 나이를 거꾸로 먹은 듯 마치 새의 그것처럼 가벼웠다.

 “보기 좋구나. 이런 맛에 선행을 하는 거겠지.”

 뿌듯한 마음으로 잠시 지하실의 사면 벽에 만들어진 선반 위 약재들을 구경하는 사이, 지하실로 네 명의 노인이 뛰어 내려왔다. 가츠 노인과 그의 친구들로 보이는 노인들이었다.

 저마다 몸의 한 부위가 마치 뼈만 남은 듯 불편한 모습이라 그들이 가츠의 친구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해체된 아이언 스네이크의 시체를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에 가츠처럼 격동과 감동에 표현하기 힘든 표정이 떠올랐다.

 “자네는 잠시 기다리게. 한시라도 빨리 해독약을 만들어야 하니 말이야.”

 가츠는 마치 주인 없는 가게에 들어선 손님처럼 멀뚱거리는 하룬을 향해 부드러운 어조로 당부했다. 부드러운 말과는 달리 그의 눈에 조급함이 떠오른 것을 본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의 후손 중에 목덜미 한쪽에 독이 침습한 아이가 사경을 헤매고 있어 우리가 좀 급하다네.”

 그런 사연이 있기에 노인들이 이렇게 서두르는 것이다. 이제야 좀 이해가 갔다.

 “전 걱정 마십시오. 심심하면 책이라도 보겠습니다.”

 “그러게. 나와 친구들이 세상을 떠돌며 습득한 약초 지식과 이곳에서 의견을 나누며 정리한 약학이 모두 거기에 기록되어 있네. 자네라면 그것들을 읽을 자격이 있지. 암!”

 가츠는 하룬에게 따듯한 시선을 주고는 이내 친구들과 합류했다.

 “일단 놈의 쓸개에서 즙을 추출해야 해!”

 “근육 재생을 도와줄 타파스 줄기와 뿌리는 내가 다듬지.”

 “독을 중화시킬 부대료인 마파쿠 열매는 내가 맡지.”

 “난 증류할 준비를 하도록 하지.”

 네 노인은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역할을 분담하고는 빠르게 움직였다. 전혀 끼어들 여지도 없이 각자 할 일을 찾아 빠르게 손을 놀리는 노인들 때문에 하룬은 완전히 방관자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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