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한밤의 혈투 (46/278)

《한밤의 혈투》

 하룬은 주변 지형을 알아보기 위해 메신저 워킹 3단계를 펼쳤다. 쾌속하게 달리면서 마나까지 쌓을 수 있는 스킬이 펼쳐지자 몸이 잔상을 일으키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광석이 대량으로 광범위하게 매장된 지역이라서 그런지 대지에 뿌리를 박은 식생들이 그렇게 많지 않아 시야는 좋았다.

 ‘분명히 이곳 같은데.’

 가츠 노인이 말한 아이언 스네이크의 서식지 환경은확실히 세류가 찾는 광산 지역과 비슷했다.

 가츠가 보았다던 해골 모양의 작은 산을 보는 순간 그런 확신이 들었다. 세 개의 높고 험준한 산 사이에 솟은 여섯 개의 작은 산은 모두 광석들이 지표면 가까이 드러난 노천 광산 지역이었다.

 ‘아이언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아서는 확실하군.’

 이제 서식하는 지역을 찾았으니 놈의 근거지를 알아내야 한다. 하지만 높고 험준한 산에 비해 작다는 것이지 산 하나의 크기가 올랐다가 내려오는 데 보통 걸음으로는 하루가 꼬박 걸린다.

 이런 넓은 곳에서 아이언 스네이크를 찾는 것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것처럼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좀 도와 달라고 할까?’

 그의 머릿속에 코엠 길드가 떠올랐다. 여행하는 동안 그에게 신세를 많이 졌고, 다른 목적을 위해서이긴 하지만 근처 지형을 탐사할 필요가 있는 그들이다.

 서로에게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아이언 스네이크를 상대할 때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룬은 세 개의 산을 살핀 후 다시 코엠 길드원들과 헤어진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확실하게 몸에 익숙해진 메신저 워킹 3단계 ‘플라이 워킹’은 의도하지 않아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경험치가 올랐다.

 하룬은 아까와 달리 몸이 새처럼 가벼운 것을 느꼈다. 신선하고 충만한 어떤 것이 몸 안으로 파도처럼 밀려드는 것이 묘한 희열을 안겨 주었다.

 ‘쌓이는 마나량이 폭증하는 것 같은데.’

 하룬은 혹시나 싶어 잠시 쉬는 사이에 상태 창을 열어 보았다.

『이름: 하룬

종족: 인간

직업: 검사

레벨: 50

칭호: 용병대장(외 6개)

생명력: 1,600

마나:2,015

정령력: 740

힘: 59(+15)     체력: 52

지식: 33        지혜: 52

행운: 42        민첩: 66(+12)

지구력: 24      심안: 19

집중: 26        S.P.: 368

명성: 1,780     통솔력: 565

화염 저항력: +10%

마법 저항력: +10%

남은 보너스 스텟: 12』

 이곳까지 오는 동안 레벨이 6이나 올라서 드디어 50이 되었다.

 스텟들은 대부분 1에서 3정도 올랐지만 정말 올리기가 힘든 심안이 2나 올라 있어 기분이 흐뭇했다.

 특기할 것은 S.P.가 무려 102나 오른 것이다. 위험에 빠진 코엠 길드원들을 돕다 보니 자연히 올라간 것이다.

 하룬은 보너스 스텟을 이번에는 힘과 체력에 반씩 나누어 배분했다.

 그의 눈은 마나에 미쳤을 때 마치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마나량이 2,015? 언제 이렇게 오른 거지?’

 마지막으로 상태 창을 확인한 것은 싸가지가 전직했을 때였다. 물론 그때 이후로 레벨이 6이나 더 올랐지만 이 정도로 상승할 리가 없다.

 스텟 구성에 따른 마나량은 1,700대 중반이나 후반이어야 계산이 맞는다. 메신저 워킹으로 인한 것을 고려하더라도 1,800대 후반이 정상이다.

 ‘그럼 이건…….’

 그 차이는 메신저 워킹 스킬로 축적한 마나일 것이다. 그런데 무려 200이나 차이가 난다. 그렇게 엄청난 마나가 불과 열흘 정도 만에 불어난 것이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이전에는 이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어.’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도 몸에 밴 메신저 워킹 1단계를 늘 썼지만 이렇게 확실하게 몸과 마음의 변화를 느낄 수는 없었다. 그가 변화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이 지역에 도착하고 나서부터였다.

 ‘그럼 반나절 만에 이 엄청난 마나를 축적했다는 거야?’

 하룬은 이 지역이 수많은 광물들이 대량으로 매장되어 다른 곳과 달리 대지를 통해 농밀한 마나가 깔려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철광석이 가장 많았지만 다른 광석들도 다량 혼재한 노천 광산은 그야말로 광물성 마나가 농밀하게 뿜어지는 지형인 것이다.

 ‘이거 혹시 다른 부작용 같은 것은 없겠지?’

 자신이 가진 가장 강력한 능력인 싸가지를 소환하기 위해서는 해독약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막상 녀석을 소환해도 초당 필요 마나가 늘어난 터라 마나량 부족도 예전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다.

 나중에 마냐량 부족을 해소할 수 없는 아이템을 구입할 생각까지 했던 하룬으로서는 무척 기쁜 일이지만 영문을 모르기에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하룬은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여전히 플라잉 워킹을 펼치며 코엠 길드가 자리 잡은 곳을 향해 부지런히 내달렸다. 달리면 달릴수록 새롭고 신선한 힘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것 같아 언제라도 달리고 싶을 정도였지만 항상 끝은 있었다.

 하룬이 코엠 길드가 쳐 놓은 천막이 즐비한 숙영지에 도착한 것은 해가 막 넘어가는 때였다. 지표면까지 올라온 광석들로 석양에 비친 후면의 산들이 마치 거대한 보석처럼 휘황한 광채를 뿌렸다.

 코엠 길드의 숙영지에 도착한 하룬은 생각과 달리 고요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발을 멈추고는 나무 그늘로 녹아들었다. 무슨 변화가 생긴 것 같아 쉬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천막 사이로 스며들어 숙영지 중앙에 있는 거대한 모닥불이 보이는 곳으로 움직였을 때에야 겨우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한 천막의 입구를 젖히고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마이어, 이제 접속했어?”

 “어, 데보라.”

 마이어가 누군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큰 모닥불을 지키던 데보라는 그를 보자 반색했다. 그녀는 아는 얼굴로, 보급을 담당하는 부드러운 심성을 지닌 유저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에게 두 번이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다들 어디 갔어? 왜 이렇게 조용하지?”

 숙영지는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타닥거리며 불씨가 튀는 소리가 고요함을 깨뜨릴 뿐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적을 상대하러 갔어.”

 “적이라고?”

 “응. 그 재수 없는 제비 새끼 알지? 뫼비우스라는 놈 말이야. 그 족제비 같은 놈이 우리를 배신하고 양다리를 걸쳤거든. 표지석을 사용해서 우리가 온 길을 다른 길드에게 안내해 온 것이 발각됐거든.”

 “젠장, 생긴 게 꼭 족제비 새끼 같더니만 결국 그랬구나. 잠깐 현실에 다녀온 사이 대단한 일이 벌어졌네.”

 “응, 대단했지. 길드장과 사람들이 방방 뜨고 난리가 났어. 비류는 완전히 미쳐서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지. 결국 충격을 받아서 로그아웃하고 말았지만. 너도 그걸 봤어야 했는데.”

 하룬은 어찌 된 영문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이런 일을 예감하고 세류에게 미리 정보를 주지 않았던가. 영리한 그녀는 자신이 준 정보를 가지고 금방 모든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래, 그 족제비 같은 새끼는 어떻게 됐어?”

 “호호호, 비류와 데스크라이가 반쯤 죽였지. 그렇게 마음을 주었는데 너무했지 뭐야. 처음에는 완강하게 버티다가 표지석이 나오자 입을 닫았지만 데스크라이가 고문하는 와중에 계약서 몇 장이 나온 다음에는 모든 음모를 자백했어. 결국 그 녀석은 사람들 손에 완전히 난자되어 버렸지.”

 데보라는 다시 생각해도 통쾌한지 깔깔거리며 다시 정황을 마이어라는 유저에게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불쌍한 녀석. 아니, 어쩌면 난 놈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많은 조직들과 중복해서 은밀하게 거래한 뫼비우스의 말로는 너무 처참했다.

 아마도 녀석은 게임에서 무한 척살당하는 것은 물론 현실에서도 척살당할지 모른다.

 하룬이 겪은 바로는 비록 어수룩한 곳이 있긴 하지만 세류와 비류는 그렇게 만만한 노블이 아니었다. 하긴 그렇게 지독하지 않으면 노블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래서 다들 야습을 위해 출동한 건가?”

 “응, 로그아웃한 친구들을 빼면 나와 몇 명만이 남아서 보급 물자를 지키는 중이야.” 

 “그럼 나도 가 봐야겠군.”

 마이어가 흥분한 얼굴로 외쳤다. 그의 손에 들린 거대한 배틀액스를 보니 검사 계열인 것 같다.

 “그냥 여기 있어. 벌써 간 지 한참 되었고 저녁 먹고 긴장이 풀어진 틈을 타서 야습한다고 했으니 너무 늦었어.”

 데보라의 만류에 마이어는 낙담한 얼굴로 연방 투덜거렸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상황을 파악한 하룬은 왔던 길을 거슬러 달렸다. 굳이 도와줄 마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과 인연을 맺었으니 선택을 하라면 코엠 길드를 도울 것이다.

 일단 그의 목적은 단순한 구경이었다. 하룬은 길드 간의 전쟁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플라잉 워킹을 최고조로 펼쳤다.

 하룬은 3시간이 훨씬 넘게 걸렸던 거리를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시간에 주파했다. 정찰을 하지 않고 달리는 데만 신경을 쓰니 속도가 배가 되었던 것이다.

 해는 벌써 넘어갔지만 달빛이 제법 밝아 시야는 나쁘지 않았다.

 하룬은 코엠 길드가 어젯밤을 보냈던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은 산의 정상 부근에 위치한 비교적 평탄한 땅으로 어제 코엠 길드가 숙영을 위해 주변 나무들으 정리하고 대충이나마 바닥을 고른 곳이었다.

 하룬은 그곳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대한 나무로 올라갔다. 바닥을 박찬 그의 몸은 단숨에 5미터 이상 솟아올랐고, 가지를 붙잡은 다음 위로 올라가는 움직임은 표범처럼 기민하고 소리가 없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자 주변이 한눈에 들어왔다.

 ‘제법 숫자가 되네.’

 숙영지를 둘러싼 거대한 불의 띠가 이제 완연한 어둠 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밤에 움직이는 몬스터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바로 저 불이었다. 웬만한 규모를 가지지 못한 몬스터들은 인간의 냄새를 맡았어도 불 때문에 감히 덤벼들지 못했다.

 달빛과 환한 불 때문에 숙영지 내를 오가는 사람들이 눈에 잘 들어왔다. 희미하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막 식사를 마치고 정리하는 것 같았다.

 뫼비우스와 은밀한 거래를 맺은 세력은 유저들의 길드로 보였는데 천막의 숫자로 보아 코엠 길드원보다 많아 대략 삼사백 명쯤 되는 것 같았다.

 ‘뫼비우스라는 녀석 정말 대단하구나.’

 직접 확인한 표지석의 종류로 보건대 적어도 다섯 정도의 세력이 하루 이틀의 거리를 두고 뒤쫓아 오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자신이 정보를 주지 않았다면 코엠 길드는 완전히 길을 뚫고 안내하는 개척자나 안내자의 역할로 그쳤을 공산이 크다.

 뒤쫓아 오는 세력들도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긴 하겠지만 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아무래도 코엠 길드의 피해가 가장 컸을 것이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숙영지가 조용해졌다. 번초를 맡은 몇 사람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두런거리던 것도 잠시 숙영지는 여행의 피로로 금세 숙면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뒤 치기를 하는 입장이라도 자신의 영역을 지나는 것을 몬스터들이 그냥 둘 리 없었다. 저들도 상당한 전투를 치르며 힘겹게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숙영지를 계속 주시하던 하룬의 귀에 작은 소리가 연속으로 들려왔다. 새소리 같기도 하지만 실을 세류가 가진 금속 나팔 소리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불로 이루어진 띠 위로 검은 실이 빠르게 스쳐 갔다. 화살들이었다. 궁수들이 쏜 화살은 정확하게 번초들을 향했고, 작은 비명들이 연속해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곤한 잠에 빠져든 숙영지는 깨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숙영지를 둘러싼 나무들 사이에서 코엠 길드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높은 곳이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번초로 만족한 것인지 알람 마법은 펼쳐져 있지 않았다.

 코엠 길드원들은 둘이 한 조가 되어 뭔가를 나르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불의 띠에 부었다.

 흙이었다. 띠를 이룬 모닥불 사이사이에 뿌려진 흙들은 지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아직도 열기와 연기가 올라오는 그 통로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은 분노와 적개심으로 번들거렸다.

 벌레들마저 사위를 가득 채운 살기에 질려 숨죽이고 있을 때 마침내 세류의 마법 공격이 조용한 숙영지를 꺠웠다.

 “파이어 웨이브!”

 그녀의 마법을 신호로 화염 계열과 윈드 계열의 마법들이 무차별적으로 숙영지를 향했다.

 “파이어 애로우!”

 “파이어 볼!”

 “윈드 스톰!”

 “윈드 커터!”

 수십 명의 마법사가 미리 메모라이징한 화염계 마법에 이어 윈드 계열 마법을 순차적으로 난사하자 숙영지는 갑자기 불바다로 변해 버렸다.

 가죽이나 천으로 만든 천막은 순식간에 불타올랐고, 곤한 잠에 빠졌다가 놀라 깨어난 유저들은 유황 지옥에라도 빠진 것처럼 정신없이 천막을 빠져나왔다.

 “발사!”

 라돈의 우렁찬 명령에 궁수들이 화살을 날렸다. 전사들은 비상용으로 챙긴 단검과 비수들을 날렸다.

 “아악!”

 “살……려 줘!”

 “으악!”

 일시에 사방이 사람들의 비명과 신음으로 가득 찼다. 옷에 불이 붙은 채 정신없이 천막을 빠져나온 유저들의 몸은 순식간에 벌집으로 변해 버렸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천막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불타고, 극심한 공황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좋은 목표물이 되어 몸에 화살이나 암기를 박은 채 쓰러져 갔다.

 “어떤 놈들이냐?”

 천막과 물건들이 불타는 소리와 비명들을 뚫고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혼란에 빠져 정신을 놓았던 상대 유저들의 귀에 들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마나가 충만해서 듣는 사람들의 고막을 뚫어버릴 것 같았기에 정신 줄을 놓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가장 안쪽에 있던 천막들은 이제 막 불이 붙기 시작했는데 그 속에서 일단의 유저들이 천막들을 쓰러뜨리며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당황하지 말고 짐을 모아 자신을 엄폐하라. 무기를 잡아라! 우리는 무적의 다크클라우드가 아니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사람들은 십여 명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숫자는 점차 불어나고 있었다. 지탄이 쓰는 방패만큼은 아니어도 꽤 큰 방패를 든 몇 명이 정면에 위치해서 쏟아지는 화살을 막는 사이 빠른 속도로 유저들이 화염 밭에서 빠져나왔다.

 상당한 랭커들이 많은 듯 그들은 놀라운 속도로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그중 일부는 방패 사이로 활을 쏘아 이제는 코엠 길드원들까지 죽어 가는 상황이 되었다.

 화염을 벗어난 그들의 몸집은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방패를 선두로 순식간에 사방을 에워싼 코엠 길드원들에게 쇄도했다.

 “디그!”

 세류가 디그 마법을 펼쳤다. 1서클에 물리적 공격력은 전무한 마법이지만 이 순간에는 시기적절했다. 방패로 앞을 가리고 저돌적으로 달려오는 적들에게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마법이었다.

 전사들 뒤에 포진한 마법사들이 일제히 소리 내어 주문을 외웠다.

 “디그!”

 “빅 홀!”

 “디그!”

 디그와 2서클 마법인 빅 홀까지 펼치자 땅이 순간적으로 푹 꺼졌다.

 방패를 든 선두의 발이 구멍에 빠지며 방패가 치워지는 사이 궁수들은 다시 화살을 날렸고 검사드른 일제히 무기를 들고 앞으로 뛰어 나갔다.

 “다 죽어 버렷!”

 “죽어라!”

 살기충천한 고함과 함께 드디어 맞붙은 전사들의 무기가 귀를 찌르는 금속성을 토해 내며 울었다.

 검이 날아가면 누군가의 사지가 잘리고 머리가 떨어졌다. 적의 목에 검을 찔러 넣고 기쁨과 희열에 차 비릿한 웃음을 떠올린 순간 도끼가 어깨를 가르고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우아아아!”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던 전사의 대검이 상대의 무기와 부딪친 충격으로 잠시 비틀거린 찰나 허리를 파고 든 또 하나의 검에 지독한 통증을 느꼈다.

 “개새끼들! 다 죽어! 소드 익스플로전!”

 마지막 힘을 다해 자신만의 스킬을 펼치자 강력한 폭발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 검 조각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자신을 상대하던 유저는 물론이고 자신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크흐으으. 날 물로 보지 말라고. 빌……어먹을. 내……가…… 이……런 곳에서 개처럼 죽다……니…….”

 다크클라우드 서열 2위인 바투스가 엉망으로 변해 버린 몸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어느 틈에 극도의 흥분과 투기로 거칠어진 호흡과 지독한 살기로 가득한 전장은 상대를 죽이려는 순수한 일념을 가진 전사들의 눈에 핏발이 서게 만들었다.

 상당수의 랭커들이 숙영지 중심부에 자리를 잡고 있던 탓에 마지막 저항은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만약 야습하지 않았다면 코엠 길드는 감히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자들이 수두룩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강자라 해도 협공에는 도리가 없다. 세류의 지시대로 랭커들이 협공을 서슴지 않은 덕분에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었지만 그 와중에 적지 않은 길드원들이 연기처럼 현실로 날아가 버렸다.

 “너희들이 어떻게?”

 몸에 세 개의 검을 꽂고도 쓰러지지 않던 마지막 생존자가 세류를 보고 입을 열었다. 세류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다크클라우드 길드의 수장라그렌달은 세 자루의 검이 관통된 몸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그녀를 향해 강렬한 눈길을 보냈다. 그의 눈동자는 억울함과 분노, 자책 그리고 의구심으로 복잡하게 흔들렸다.

 “우리 길드를 배신한 뫼비우스가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돌려 너희들의 존재를 알려 주었다.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이었지.”

 “그, 그랬군. 크헉!”

 라그렌달은 일부가 시커멓게 변색된 피를 격렬한 기침과 함께 뱉고는 한쪽 무릎을 땅에 꿇었다.

 “큭! 큭! 그 개종자가 배신을 했군. 안 그래도 뿔 달린 오크 새끼들과 정면으로 마주쳐 절반이나 개박살이 나서 놈을 의심했는데…….”

 그의 말에 세류의 눈에 진한 분노가 떠올랐지만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 길드에서는 파문했으니 복수는 알아서 하도록. 조사해 보니 원래 직업도 로그에다가 레벨까지 속였더군. 그 나쁜 새끼 레벨이 70이 넘더군. 우리는 이제 그 바샌자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크헉! 컥! 잘됐군. 로그에다가 레벨 70이 넘으면 랭커였군. 크크크! 너희들을 배신하고 결국 우리까지 배신하다니 정말 개보다 못한 새끼네. 흐흐흐. 그 개종자를 가만히 두면 내가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 수 있겠어. 아무튼 여기까지 안내해준 것은 고마웠어. 크헉.”

 라그렌달의 몸은 원독이 가득한 눈으로 저 먼 곳을 보며 안개처럼 흩어졌다.

 “잘 가. 다시는 내가 노리는 것에 눈독들이지 말고. 안 그럼 너희 회사를 통째로 먹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이제 뫼비우스 녀석이 어떻게 살아갈지 궁금하군.”

 그녀는 상대를 현실에서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가문과 경쟁을 벌이는 가문의 후계자를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녀의 관심은 배신의 대가로 처참하게 죽어 버린 뫼비우스에게 향했다.

 그녀의 곁에는 창백한 얼굴로 후들거리며 간신히 서 있는 가엾은 비류가 있었다.

 어느새 전장을 정리하고 길드원들이 하나둘씩 모여 들었다.

 “난도, 우리 상황은 어때?”

 “생각보다 피해가 많았습니다. 방패를 가졌을 줄은 생각을 못 해 마지막 발악에 꽤 많은 길드원들이 당했습니다. 특히 자폭 스킬들을 가진 놈들 때문에 피해가 컸습니다. 마법사는 두 명 사망에 다섯 명이 중상입니다. 검사는 서른두 명 사망에 마흔한 명 중상이고, 그 외 계열은 열네 명 사망에 스물두 명이 중상입니다.”

 어느새 세류와 합류한 피투성이의 수뇌부는그 보고를 듣고 얼굴이 굳었다.

 “휴우, 생각보다 피해가 더 크네. 뭐, 하긴 급습했으니 이정도로 그쳤을지도 모르지. 상대는 불이 다 꺼지고 날이 밝아 봐야 알겠지만 대충 삼백은 넘었으니까. 일단 중상자들은 포션으로 바로 치료하고 들것을 만들어 후송할 준비를 해.”

 “알겠습니다.”

 천막을 세울 때 나무를 사용했던 터라 불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코엠 길드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나마 살아남았거나 사흘 후 로그인할 길드원들의 사기를 생각하면 적들이 사망할 때 떨어뜨린 아이템들이라도 전리품으로 나누어 주어야 했다.

 우워어.

 그 순간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드는 포효가 들려왔다.

 “뭐지?”

 세류는 황급히 주변에 길드원들을 보냈다. 금방 돌아온 길드원들의 얼굴은 심각했다.

 “늑대들입니다. 나무들 사이로 빛나는 눈의 숫자가 엄청납니다.”

 “에잇! 피 냄새를 맡았구나. 우리가 NPC가 아닌 유저라는 사실을 모르는 늑대들이 우리를 노릴 거야. 할 수 없다. 서둘러! 대충 눈에 보이는 대로 아이템을 챙겨. 대형을 이뤄 숙영지로 되돌아간다.”

 세류의 명령이 떨어지자 길드원들은 잠시 아이템을 줍기 위해 사방을 수색했다. 하지만 곧 난도의 신호와 함께 빠르게 움직이며 포션으로 치료한 중상자들을 들것에 싣고 살아남은 검사들로 방어막을 형성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그래도 백오십이 넘는 길드원들에게 달려들 정도로 멍청한 늑대들은 아니었다.

 물론 쉽게 먹잇감을 포기하지 못하는 늑대들이 거리를 두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때문에 숙영지로 향하는 내내 코엠 길드는 늑대들의 반갑지 않은 호위(?)를 받아야만 했다.

 모두가 떠나자 나무 위에서 전투를 지켜보았던 하룬은 전장으로 향했다.

 “멋있군.”

 생생한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전장을 보며 하룬은 아직도 벌렁거리는 가슴을 지정시키지 못했다.

 비록 습격의 형태이긴 하지만 살벌한 전장을 생생하게 목격한 그의 심장은 여전히 맹렬하게 박동 쳤다.

 “나한테 이런 성향이 있을 줄은 몰랐네.”

 사실이었다. 적어도 이런 강렬한 투기가 있을 줄은 비욘드라는 게임을 하기 전에는 전혀 몰랐다. 그 전까지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 한심할 정도의 소심하고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강렬한 투기로 전투에 뛰어들고 싶은 열망을 억지로 자제해야 할 정도로 전투적으로 변했다. 아니, 어쩌면 변한 것이 아니라 숨겨져 있던 것이 비욘드를 매개체로 발현된 것인지도 몰랐다.

 왜 사람들이 리얼리티가 극대화된 가상현실 게임에 열광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룬은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눈길로 점차 불길이 꺼져 가는 시커멓게 변한 숙영지를 쓸어 보았다.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

 “어?”

 하룬은 곳곳에서 그의 눈을 자극하는 물건들을 보며 짤막한 경호성을 터트렸다.

 “아이템이다!”

 유저들이 사망할 때 일정 확률로 떨어뜨리는 아이템들이 간간이 눈에 들어왔다. 귀해 보이는 무기류와 마법 아티팩트들도 눈에 띄었다. 세류가 노렸던 전리품들이었다.

 하룬은 뜻밖의 횡재에 정신없이 전리품들을 챙겨 싸가지의 아공간에 넣었다.

 시꺼멓게 변한 숯 덩어리까지 나뭇가지로 들추며 찾아낸 아이템들은 이십 개 정도 되었다. 대부분 매직급인 듯했지만 그중 몇 개는 상당히 귀해 보였다.

 “하하하! 이러면 뫼비우스가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준 건가?”

 하룬은 좋은 머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뫼비우스에게 애도의 묵념을 잠시 올렸다. 몇 중의 암거래를 통해 녀석이 얼마나 많은 돈을 챙겼는지 모르지만 자신이 얻은 이익도 만만치 않았다.

 ‘덕분에 예상치 않은 전리품까지 주다니. 이거 나중에 혹시라도 만나면 고맙다고 인사나 해야겠는걸. 이런 행운이 언제 또 오겠어?’

 하지만 불과 하루 후에 다시 그런 행운을 경험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또 다른 길드가 하루 거리를 두고 뒤쫓아 오는 것을 그때만 해도 코엠 길드는 전혀 몰랐다.

 뫼비우스가 설마 두 개 이상의 길드와 중복으로 거래했으리라고 예상한 코엠 길드원은 아무도 없었다.

 하룬은 남은 것이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한 후에야 비조처럼 날아 코엠 길드의 숙영지로 향했다.

 “가만! 굳이 찾아갈 필요는 없지?”

 이 근처에 서식하는 것이 분명한 아이언 스네이크를 찾는데 도움을 받을 생각에 코엠 길드와 합류하려던 하룬은 중도에 발을 멈추었다. 엄청난 숫자의 아이템을 중간에 챙긴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나중에라도 내가 뒤 치기를 했다고 여길지도 몰라.’

 굳이 쓸데없는 오해를 받을 필요는 없었다. 뫼비우스가 한 짓 때문에 자신까지 배척당할 수도 있고, 나중에라도 아이템이 모두 없어진 것을 알면 그를 의심할 수도 있다.

 결국 하룬은 마음을 바꾸어 코엠 길드를 찾지 않기로 했다. 아직 필요한 물품은 없었다.

 적당한 곳에 자리 잡은 그는 안전지대를 설정한 후 로그아웃했다.

 -어서 와요, 오빠.

 벨의 맑은 음성을 들으며 눈을 뜨는 기분은 무척이나 정겨웠다. 누군가 이렇게 곁에 있다는 느낌은 그가 늘 그리워하던 것이었다. 나중에 결혼하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눈을 뜨니 여느 때처럼 바닥에 누운 자세가 아니라 넓은 실내의 중앙에 떠 있었고 벨이 생글거리며 그와 마찬가지로 공중에 뜬 상태로 곁에 있었다. 큰 캡슐의 모든 방향에서 무수한 빛줄기가 선처럼 자신의 몸 구석구석과 연결되어 연속해서 쏘아지고 있었다.

 “이건 뭐야?”

 신기한 나머지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던 하룬이 물에라도 뜬 듯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자신의 상태에 놀라며 물었다.

 -호호. 원래 오빠가 비욘드에 접속하면 몸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이런 상태가 된다고요. 제가 달리 최상급이겠어요?

 “하긴. 아, 그래서 내가 수련한 능력을 현실에서도 쓸 수 있는 거구나. 그런데 실내가 원래 이렇게 넓었나?”

 하룬은 전용 슈트를 착용하지 않아도 게임에서의 능력을 현실에서 쓸 수 있는 이치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이런 상태라면 게임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실에서 수련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의문은 실내의 크기 문제였는데 원래는 당연히 아니었다. 벨의 본체인 캡슐은 그가 누우면 딱 알맞은 정도였다.

 -내부 공간을 확장했어요. 그러지 않으면 단순히 누운 상태에서 뇌파로만 게임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구나.”

 이렇게 공간이 확장된다는 것은 무척 놀라운 일이었지만 하룬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거실 전체로 캡슐이 확장되겠구나.’

 그는 캡슐의 외관까지 확장되는 걸로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내부 공간만 이렇게 확장되었다. 벨의 성능이 인지 범위의 한계를 벗어난 덕분이었다.

 “벨, 길드 상황과 골든 배틀 상황을 유저의 시각에서 좀 파악해 줄래?”

 -이미 파악하고 있었어요, 오빠. 오빠가 관심을 가지게 될 걸 알고 미리 조사를 좀 했지요.

 참으로 기특한 벨이었다. 하룬은 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가입자가 천만이 넘는 비욘드의 유저들은 이미 수없이 많은 길드를 생성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시켰다.

 많은 가상현실 게임을 하며 길드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잘 알고 있는 유저들은 길드를 통해 쉽게 레벨 업하고 전직 조건을 달성했다.

 또한 유니온 단위의 현실에 비해 몇백 배 큰 경제 규모를 가진 테론 제국에서 NPC들과 거래를 통해 현실 못지않은 경제활동도 했다.

 -길드원 수가 5천이 넘은 길드만 해도 열 개가 넘어요. 그들 대다수는 같은 유니온에 거주한다는 점에 착안해서 만들어진 길드들로 길드장을 비롯한 수뇌부는 현실에서 ‘노블’ 신분을 가지고 있지요.

 벨의 설명에 하룬은 절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게임에서도 노블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그렇다고 하자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현재 레벨을 공개한 최고의 랭커는 레벨 79에 불과한 게 현실이지만 사망에 대한 페널티에도 부활이 가능한 유저들은 제국 내 다양한 위치에서 영향력을 넓혀 가는 중이에요. 제국 귀족들도 이런 이점을 가진 유저들을 새롭게 인식하며 자신들의 세력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들을 하는 실정이에요.

 황제를 가리는 골든 배틀과 맞물려 대단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저들에게 눈을 돌리지 않는 귀족들을 별로 없을 것이다. 만약 유저들을 이방인이라며 배타시하는 귀족이라면 앞으로의 세상에서 도태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기사들에 비해 아직 실력은 떨어지지만 그 발전 속도와 부활의 이점 그리고 정체된 유니온 체제와 달리 신분 상승이 가능한 이 비욘드에서 뭔가 이루려는 욕구를 가진 유저들의 영향력은 날로 커져 가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대형 길드들은 골든 배틀에서 자신들이 후원하고 밀어줄 세력을 찾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어요. 열 개 중 다섯 개의 길드가 벌써 황위 계승권자들과 모종의 거래를 마친 상황이고, 나머지들도 좀 더 나은 이권을 제시하는 세력을 고르는 중이에요. 물론 중형급 길드들도 몸집 불리기에 힘쓰는 한편 골든 배틀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어요.

 하룬이 혼자서 활동하는 사이에 벌써 상당한 움직임이 태동하고 있었다. 벨의 이야기를 들으며 왠지 자신이 혼자 뒤처지는 느낌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하룬은 아직도 굳이 길드 따위에 가입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나마 인연이 닿은 코엠 길드에는 약간의 호감이 있었다. 세류도 노블이긴 했지만 동생인 비류나 다른 노블들보다는 특권 의식이 좀 덜하고 NPC들을 대하는 태도도 부드러운 편이었다.

 “코엠 길드는 어느 정도야?”

 -길드원 이천을 거느린 코엠 길드는 그 규모나 실력으로 중형 길드에 속해요. 다만 장인들을 비롯한 생산 계열과 상인들, 그리고 마법사들이 대거 포진해서 향후 무력 계열의 길드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높아요. 길드장의 능력과 방향 설정 그리고 이곳 주민들, 특히 귀족들과의 관계 정도에 따라 골든 배틀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질 가능성이 커서 황위 계승권자들에게 중용重用될 수도 있다고 판단하고 있어요.

 역시 생각대로 세류는 여느 노블들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코엠 길드에 가입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도 유저지만 왠지 유저들보다는 이곳의 NPC들이 더 편한 하룬이었다.

 “골든 배틀 상황은 어때?”

 -1차를 통과한 황위 계승권자들은 모두 스무 명이에요. 세력 판도는 4강 7중 8약 1최약이에요. 그중 1황자 세력이 가장 강력하고, 그 뒤를 2황자와 1황녀 그리고 5황자 세력이 쫓고 있어요. 이 네 명은 모두 공작들이 밀고 있는 세력으로 오랫동안 준비를 해 왔어요. 길드들 역시 이 4강에 두 개씩 붙어있는 상황이고요.

 “브리엘라 진영이 최약체인 건가?”

 -빙고! 맞아요. 오빠와 인연이 있는 브리엘라 진영은 드러난 것으로는 최고 귀족이 백작에 불과하고 지지 귀족들 숫자도 가장 적어 유저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어요.

 비록 데브론과 각별한 정을 나누었고 남다른 인연을 맺은 하룬이었지만 아직은 골든 배틀에 뛰어들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 골든 배틀은 거부감을 유발하는 거대한 전쟁터일 뿐이었다.

 “후유. 제국에 피바람이 부는 것이 느껴지는구나.”

 하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몬스터들과의 혈투는 비록 유혈이 낭자하고 잔인하기는 했지만 그 대상이 이유 없이 인간들을 살육하고 먹이로 삼는 몬스터라 심리적인 저항감이 적었지만 골든 배틀로 인간끼리의 학살이 곧 일어날 터였다.

 좁은 배리어 안에서 정체된 정치체제하에 억압받던 유저들의 폭력성이 곧 비욘드라는 무대를 통해 화산처럼 분출할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비욘드를 만든 넥컴월과 유니온 연합이 이것을 노렸는지도 모르겠다.

 대리 만족을 시키면서 현실에서의 변화를 억제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비욘드를 개발했을지도 모른다는 하룬의 생각은 거의 확신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지금 오빠가 플레이하는 후크란 산맥 인근에 열 개가 넘는 길드에서 사람을 파견했다는 거예요.

 “그래? 그렇게 많이?”

 -네, 그 모두가 후크란으로 진입한 것으로 파악됐어요.

 “흐음. 그것도 뫼비우스가 관여한 건가?”

 -네, 아마 상당수는 그럴 거예요. 아닐 수도 있고요. 어차피 대규모 인원이 움직이면 당연히 파악할 수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그 뒤를 밟을 수 있지요. 아무튼 오빠의 눈으로 살펴본 뫼비우스라는 사람은 인간의 마음을 혹하게 만드는 말재주는 물론이고 상식을 깨는 사고를 가진 유저로 보여요.

 “그래, 대단한 재주를 가진 친구지.”

 하룬은 뫼비우스를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처음에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무수한 길드들을 상대로 대차게 이중삼중으로 거래한 것을 떠올리면 어딘지 통쾌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는 다양한 특성을 가진 길드들이 출현하겠지만 현재는 현실의 힘과 세력을 이용한 노블들을 수장으로 하는 길드들이 대세여서 그 길드들을 엿 먹이는 행동은 노블들을 골탕 먹이는 행동으로 치환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만나면 제대로 한번 이야기나 나누어 봐야겠어.”

 -푸훗, 오빠가 그렇게 기대하는 얼굴은 처음이에요. 그런데 표정이 아주 오묘해요.

 “하하하! 그런가?”

 하룬은 웃음을 터트린 후 다시 로그인을 준비했다. 그 와중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 빙그레 웃음기를 머금은 벨에게 조금은 불편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내 생리작용은 어떻게 처리하는 거야?”

 사실 그것이 내내 궁금했다.

 -푸훗! 오빠도 그게 걸리나 봐요? 그것은 걱정 마요. 소변은 몰라도 대변은 거의 나오지 않으니까요. 미리 식료품들과 약재들 중에서 불순 성분은 모두 제거한 상태이고 격렬한 움직임과 운동량 때문에 거의 100% 소화 흡수되고 있으니까요.

 “다행이다. 네게 안 좋은 걸 많이 보여 주지 않아서.”

 다시 게임에 접속하며 하룬은 조금 붉어진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비록 벨이 휴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항상 자신의 더러운 부분을 볼 수 있다는 점으 그에게 꽤나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던 것이다.

 ‘이제 비욘드로 돌아가서 좀 자고 내일 아침 일찍부터 주변을 정찰해 보자.’

 그렇게 하룬은 짧은 현실에서의 체류를 끝내고 빛무리가 동공을 자극하는 비욘드로의 여행을 다시 시작했다.

 “오늘도 꽝이네.”

 하룬은 오늘도 목적한 장소를 찾지 못하고 어제 묵었던 장소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아직 해는 남아 있었지만 산에서 샤벨 타이거를 두 번이나 만나서 잔뜩 긴장했던 탓인지 쉬 지쳤던 것이다.

 가츠 노인이 말한 아이언 스네이크의 서식지에 대한 정보는 너무 오래전이었고, 당시 엄청난 공포에 질린 나머지 확실하지가 않아서 그야말로 뜬구름 잡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분명히 근처라는 것은 확실한데 어느 곳에 사는지, 어떨 때 나타나는지 등 자세한 것은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나마 메신저 워킹 3단계 스킬인 플라잉 워킹의 숙련도가 빠르게 올라가고 마나량이 급속하게 늘어나는 것이 낙이라면 낙이었다. 스킬의 위력이 좋은 건지 아니면 이 지역이 특별한 것인지 몰라도 늘어나는 마나량이 엄청났다.

 풀리지 않는 실마리 때문에 골치가 아파진 하룬의 눈에 맞은편 산 중턱에 긴 띠를 이룬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계곡을 타고 어제 처절한 전투가 있었던 산 위쪽으로 오르는 중이었다.

 “뭐지? 설마 또?”

 그들은 자신과 코엠 길드가 지난 길을 지나고 있었다.

 “허어, 정말 대단한 놈이네.”

 그 녀석이 또 다른 길드와도 거래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또 드러나고 있었다.

 “그렇구나!”

 불현 듯 떠오른 생각에 하룬은 탄성을 질렀다. 이제야 왜 표지석이 한 종류가 아니라 그렇게 많았는지 이해가 된 것이다.

 “그럼 이들 말고도 몇 개가 더 있다는 거네.”

 하룬이 탐지한 표지선의 종류는 모두 일곱 개였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그만큼의 길드와 암중에 거래했다는 말이었다.

 아마도 녀석은 출발 시간만 다르게 조정했을 것이다. 그럼 광산이 있는 곳까지 안내하겠다는 약속을 충분히 지킬 수 있으니 말이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코엠 길드는 알고나 있을까?’

 이런 사실을 알면 세류 자매는 난리를 칠 것이다. 어쩌면 뫼비우스를 일찍 죽인 것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벨에게 들은 정보대로라면 아직 중형 길드에 불과한 코엠 길드로서는 막대한 자금력을 확보할 수 있는 광산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하룬의 기우에 불과했다. 자세하게 살피자 산 위쪽에서 코엠 길드원들이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을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어제처럼 고정적으로 정찰원을 배치한 것 같았다.

 “가 보자.”

 호기심이 동한 하룬은 비호같은 움직임으로 건너편 산으로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근처는 나무들도 별로 없고 돌이 많은 지형이라 몸을 숨기기가 쉽지 않았지만 메신저 워킹 스킬이 이미 또 한 번 진화한 덕분에 그는 은밀하지만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산을 오르던 하룬의 눈에 산 중턱에 자리를 잡는 새로운 길드의 모습이 보였다.

 “흠. 코엠으로서는 다행이네.”

 이제 막 해가 넘어가려는 시간이기 때문인지 새로운 길드는 두 길드가 묵었던 것이 아니라 경사가 지기는 했지만 제법 넓고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야영을 준비했다. 아마 정상적이었다면 전투의 흔적을 발견하고 새로운 길드가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이 야영과 저녁 준비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 코엠 길드는 은밀하게 그 주변으로 움직였다. 그나마 새로 온 길드가 자리 잡은 곳은 반경 100미터에 나무나 관목이 전혀 없는 곳이어서 코엠 길드의 접근은 그곳이 한계였다.

 새로운 길드는 이전 길드와 비슷한 숫자였지만 습격을 준비하는 코엠 길드의 숫자는 많이 줄었다. 전날에 벌어진 싸움으로 적지 않은 피해를 당한 것이다.

 코엠 길드는 신중했다. 각기 은밀한 곳에 자리 잡은 그들은 육포와 물로 저녁을 해결하고 대상자들이 가장 곤하게 잠드는 시간까지 기다렸다.

 드디어 적당한 시간이 되었다. 배를 가득 채운 번초들마저 늘어지는 눈꺼풀을 올리기가 힘겨운 시간이었다.

 먼저 공격한 것은 마법사들이었다. 하지만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마법사들은 상승 효과가 있는 공격을 연속으로 퍼부었다.

 “파이어 필드!”

 “파이어 애로우!”

 “파이어 스톰!”

 “윈드 스톰!”

 “윈드 애로우!”

 “윈드 커터!”

 화염 계열의 마법이 숙영지를 환하게 밝히는 수십 개의 모닥불을 매개로 전 지역을 불바다로 만들자 윈드 계열의 마법이 그 화염의 등을 밀어주었다.

 “습격이다!”

 “흐윽!”

 “아악! 뜨거워!”

 “살려 줘!”

 숙영지는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작심하고 퍼부은 마법 공격에 숙영지는 금세 화염에 휩싸였고 강한 바람으로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불에 휩싸인 천막을 급하게 빠져나온 유저들은 비명을 지르며 불길을 피해 달아나려고 했지만 그들을 기다리던 코엠 길드원들의 손에는 저마다 암기가 들려 있었다. 단검류를 비롯해 날카로운 돌들이 한꺼번에 날아가자 사망자가 속출했다.

 하지만 그들 중에도 실력자들은 있었다.

 “윈드 커터!”

 “윈드 애로우!”

 마법사 몇이 윈드 계열의 마법을 펼쳐 무작위로 날리기 시작했다.

 “크악!”

 “악!”

 숙영지 가까이 진군한 코엠 길드원들 사이에서도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죽기 살기로 마법 공격을 날릴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가까이 접근했던 길드원들이 죽어 가자 한순간 혼란이 일어났다.

 암기 공격이 뜸해진 사이 다른 마법사들은 워터 계열의 마법으로 불길을 잡으려고 애썼다.

 “워터 봄!”

 커다란 물로 이루어진 구가 폭발하자 활활 타오르던 화염의 기세가 주춤했다. 그 뒤로 다른 마법들까지 펼쳐졌다.

 “리무브 에어!”

 일정 범위의 공간에서 불의 매개가 되는 공기를 제거하는 마법은 효과적이었다. 순식간에 불길이 사라졌다.

 다른 것은 몰라도 마법사의 숫자나 그 실력은 코엠 길드를 상회했다.

 “총공격!”

 세류의 명령이 떨어졌다. 길드원들은 투기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힘주어 자신의 무기를 잡고 숙영지를 향해 쇄도했다.

 “모두 쓸어버려라!”

 “죽이자!”

 몇 개의 불타는 천막이 주위를 밝히고 있는 숙영지는 고함과 비명으로 가득 차 버렸다. 뜨거운 피 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불길 속에서도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야습을 가한 코엠 길드에게 이를 갈면서 덤벼들었다.

 두근두근.

 지켜보는 하룬의 심장이 무섭게 박동 쳤다. 살기 가득한 눈빛들과 거친 호흡 소리, 진한 피 냄새가 그를 자극했다. 자신의 싸움도 아닌데 왜 이렇게 투기가 차오르는지 모르겠다.

 전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철저하게 준비한 자들과 경계심을 잃어버린 자들 간의 싸움은 이미 결정된 것과 다름없었다. 비록 저항은 강했지만 처음의 마법 공격에 많은 수의 유저를 잃어버린 터라 반격은 단지 시간만 끌 뿐이었다.

 “빌어먹을!”

 “씨발!”

 “뫼비우스, 이 개종자!”

 “내 그 개새끼를 가만히 두면 휴먼이 아니다.”

 살아남은 코엠 길드원들은 뫼비우스를 향해 욕설을 내뱉으며 그를 저주했다.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은 불에 비친 그들의 숫자는 이틀 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다. 두 번의 싸움으로 절반이 죽어 나간 것이다. 수뇌부도 몇 명 남지 않았고, 그 행색도 초췌하고 남루하기 그지없었다.

 “빨리 정리하고 자리를 뜬다. 늑대가 나타나면 골치 아프니 서둘러라!”

 하지만 그 명령은 조금 늦었다.

 컹! 컹!

 깨끗한 밤공기에 실린 피 냄새를 맡은 들개 떼의 노란 눈이 온산을 덮을 지경이었다. 전날보다 그 수가 한참이나 늘어나 있었다.

 한번 무리를 이루면 그 무엇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바로 떼를 이룬 늑대들이다. 놈들은 뼈까지 씹어 먹는 무서운 포식자들이었다.

 “젠장! 서둘러라! 대충 하고 철수한다!”

 세류가 이를 갈며 명령을 내렸다. 잘못하면 숫자가 많이 줄어든 코엠 길드원들이 들개들의 먹이가 될 수도 있다. 사망하면 몸이 사라지는 유저들인지라 굶주린 들개들이 먹을 것은 없는 것이다.

 코엠 길드는 동료들이 재수 없게 떨어뜨린 아이템을 모두 챙길 여유도 없이 황급히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미 들개 몇 마리는 아직도 뜨거운 기운이 가득한 전장 근처에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앞으로 코엠이 고생 좀 하겠네.’

 비록 세류나 코엠 길드에 좋은 감정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앞으로도 몇 개의 후속 길드를 상대해야 광산을 차지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하룬은 그들이 불쌍해졌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늑대 떼가 모두 사라지자 하룬은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스산하군.”

 한 길드가 가진 거의 모든 것들이 불태워지고 대지마저 불탄 자리는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있어야 할 시체들이 없어 욕지기가 나올 정도로 처참하지는 않았다.

 하룬은 아직도 열이 느껴지는 땅을 밟으며 천천히 전장을 돌았다. 지저분하게 변한 바닥에는 몇 개의 아이템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중 일부는 화마와 마법에 제 기능을 잃거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상태가 양호한 것들도 있었다.

 “오케이! 아이템이 거저구나.”

 하룬은 꼼꼼하게 전장을 돌아다니며 코엠 길드원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아이템들을 부지런히 쓸어 담았다. 줍는 와중에 살펴본 바로는 레어급 이상의 아이템들도 몇 개 되는 것 같아 손에 힘이 실렸다.

 조개와 도요새가 싸우면 어부가 그 둘을 모조리 잡는다더니 자신이 바로 그 격이었다.

 “언제 날 잡아서 아이템들을 정리해야겠다.”

 몇 번이나 전장을 뒤진 끝에 불에 탄 천막 아래에서 귀한 보석이 박힌 팔찌 하나까지 건진 하룬은 오늘도 뿌듯한 마음으로 쉴 곳을 찾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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