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
“모두 지치고 힘들겠지만 나중을 위해 근처 지형을 정찰해야 해. 난도, 열 개조를 만들어 정찰하도록.”
“네, 길드장.”
세류의 심복이나 서열 3위인 난도는 무사한 서열 16위 길드원인 아랑까지 조장으로 삼아 각기 다섯 명씩 조원을 편성해서 사방으로 정찰을 보냈다.
“혹시 모르니까 우리가 온 길로도 다섯 명만 보내. 그리고 힘멜은 작성한 맵을 확인하고, 만난 몬스터들의 종류와 숫자 그리고 그 세력을 추가해서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난도는 그들이 지나온 후미로 로그 계열의 다섯 길드원을 보냈다.
“안 그래도 사람이 부족한데 우리가 지나온 길은 왜, 언니?”
뫼비우스와 붙어서 아무것도 안 하던 비류가 문득 궁금한지 물어 왔다.
“은밀하게 움직이긴 했지만 혹시 다른 길드들이 우리가 지나온 흔적을 따라올지도 모르니까.”
대답하던 세류는 비류의 어깨를 다정하게 안고 서 있는 뫼비우스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바로 사업에 참여해 숱한 사람들을 겪으며 길러 온 그녀의 안목은 아버지도 인정할 정도였다.
‘하룬 대장의 말이 맞구나.’
세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룬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그녀가 뫼비우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실상 별로 없었다. 그는 세류 자매가 정보 길드를 통해 광산 정보를 얻으려고 했을 때 우연히 만나 거래를 도와준 인연으로 함께하게 된 유저였다.
상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레벨은 낮지만 정보 수집이나 정황 판단력이 뛰어났고 최근에는 비류의 열렬한 관심과 마음을 받았기에 내심 그를 길드로 끌어들일 생각을 했던 세류였다.
하지만 하룬이 이별의 선물로 주고 간 충고를 그녀는 믿었다. 하룬이라는 사람 자체를 NPC나 유저로서가 아니라 의지할 수 있는 남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과연 미끼를 던지니 바로 반응이 나타났다. 일단 의심을 시작하자 나머지들도 의심이 들었다. 비류를 좋아하는 것도 어쩌면 가식일 수도 있다.
‘설마 다른 길드에서 보낸 것은 아니겠지.’
작정하고 코엠 길드를 먹어 치우려는 대규모 길드는 많았다. 코엠 길드의 자금력은 재벌인 그녀의 집안 덕분에 탄탄한 것으로 소문나 있었다. 그래서 길드원들에 대한 처우도 게임에서나 현실에서나 타 길드보다 훨씬 나았다.
‘만약 우리를 기만한 것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넌 각오해야 할 거야, 뫼비우스.’
세류는 저렇게 좋아하는 동생의 행복을 위해 하룬의 말이 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뫼비우스의 흔들리는 눈빛에서 확신을 얻었다.
광산 정찰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이 많았다. 마법사들은 좌표를 잡고 텔레포트 진이 들어설 장소를 찾느라 분주하게 움직였고, 나머지 길드원들은 천막을 치고 식사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한가하게 한 천막으로 들어간 비류와 뫼비우스가 차를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이 세류는 길드원들을 지휘했다.
3시간 정도가 지나자 그녀가 기다리던 후미 정찰조로부터 통신이 들어왔다.
-길마, 큰일입니다.
후미로 정찰을 보낸 조의 조장인 서열 8위 윈드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산 정상에 도착해서 정찰해 보니 멀리에서 정체불명의 세력이 우리가 지나온 길을 따라오는 것이 보입니다. 거의 하루 거리 정도인데 어제 낮에 우리가 지난 계곡에서 숙영하려는 것 같습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개새끼!’
노블 세계에 편입한 후 한동안 잊어버렸던 쌍욕이 떠올랐다. 세류는 이를 갈면서 목소리를 낮추어 윈드라에게 물었다.
“혹시 어느 세력인지 알아볼 수 있겠어?”
남작성에 모여들었던 세력들 중 하나일 것이다.
-시야가 멀어서 그건 파악 불가능합니다. 다만 통일된 복장이 아닌 것으로 보아 저들도 우리처럼 유저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나마 다행이다. 남작성에는 세 개의 기사단이 있었는데 유저 길드들은 그들에 비하면 형편없는 실력이라 당해 낼 수가 없다.
“일단 그 자리에서 그들을 정찰해. 이따 저녁이 되기 전에 교체조를 투입할 테니. 특별한 상황이 생기면 다시 통신 바란다.”
-알겠습니다.
통신을 끊은 세류는 비류와 뫼비우스가 들어간 천막을 보며 이를 갈았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의심 가는 것이 하나둘이 아니다. 툭하면 볼일을 핑계로 후미로 처진 것도 그렇고 지형을 유심히 관찰하던 것도 이상했다.
‘애초에 저 박쥐 새끼를 여기까지 끌고 오는 것이 아닌데.’
세류는 처음에는 자신마저 호감을 가져 그의 합류를 반겼던 것을 잊고 있었다.
‘차라리 하룬 대장이 남아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라면 믿을 수 있는데.’
세류는 무뚝뚝하고 말이 별로 없는 하룬을 떠올렸다.
자수성가한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볼수록 매력 있는 사람이 정말 평생을 같이 할 사람이라고 했다. 사업을 포함한 그 어떤 일이든 모든 것의 기본은 사람이고, 그런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인생은 빛날 수 있다고 했다.
뫼비우스가 멋진 외모와 유창하고 호감 가는 언행으로 첫인상에서 만점을 받았다면 하룬은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점수가 올라가는 타입이었다. 그것은 능력은 물론이고 남성적인 매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유저였다면 그녀는 망설임 없이 비류처럼 적극적으로 프러포즈했을 것이다. 그라면 미래까지도 고려할 자격이 있었다.
아버지는 혈통이나 배경보다는 능력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하룬을 만나면 그의 능력을 금방 알아볼 것이다.
만약 그가 유저였다면 둘의 만남을 허락, 아니 부추길 것이 확실했다.
이래저래 마음이 심란했지만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세류는 은밀하게 정찰을 나간 조장들을 대상자로 지정해서 광역 통신망을 열었다.
“길드장이다. 비상 상황이다. 극비 명령을 내리겠다. 정찰조는 정찰을 일단 멈추고 속히 복귀하라. 현재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계곡 위쪽에 보면 거대한 바위가 하나 있다. 긴급회의를 할 테니 정찰 나간 조장들은 조원들보다 빨리 움직여 1시간 후에 그곳으로 집결하라.”
정찰조들과 통신을 끝낸 세류는 비류를 제외하고 숙영지에 남은 수뇌부에게 같은 내용을 전달했다. 특히 길드의 실무를 담당하는 난도에게 윈드라와 다시 통신하게 해서 상황을 확인시켰다.
1시간 후 거대한 바위 밑에 비류를 제외한 코엠 길드의 수뇌부가 모여들었다.
“모두 주목! 먼저 난도가 후미로 파견 나간 윈드라 조가 정찰한 상황을 보고해.”
“네, 길드장. 윈드라가 이끄는 정찰조는 우리가 지나쳐 온 후미를 정찰하러 갔습니다. 산 정상에 올랐을 때 상각지도 못한 것이 눈에 들어왔답니다. 우리와 비슷한 숫자의 정체미상인 한 무리가 어제 낮에 우리가 잠시 쉬었던 계곡에 자리를 잡고 있었답니다.”
난도의 보고에 수뇌부는 웅성거렸다. 누군가 자신들을 따라오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다.
실질적인 서열 5위인 마법사 미라스가 손을 들었다. 그녀는 세류와는 무척 친한 사이였다.
“그럼 누가 우리 뒤를 밟았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힘들여 이곳까지 오는 동안 누군가 우리의 위치를 은밀하게 전했고, 의문의 무리가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으로 우리를 따라온 거지.”
난도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럼 배신자가?”
놀란 미라스가 저도 모르게 외친 말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누군가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있겠지. 당연히.”
착 가라앉은 세류의 말에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드디어 엄청난 가치를 가진 광산을 찾았다는 기쁨에 피곤도 잊었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인데 지금은 분위기가 차갑게 냉각되었다.
“혹시 안내를 맡은 용병대장이 정보를 흘리지 않았을까요?”
서열 6위이자 3서클 마법사인 옥스밤의 말에 세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떠나면서 선물로 그 정보를 주었다.”
다들 한마디씩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NPC가 그럴 사람이 아니지.”
“맞아. 우리 중에 그에게 목숨을 빚지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야. 그라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그럼 혹시 뫼비우스라는 그 작자가?”
난도가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난 우리 길드원들을 믿는다.”
세류의 단정적인 말에 길드원들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사실 다들 뫼비우스에게 강렬한 질투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게임에서도 그렇지만 현실을 고려하면 비류는 노블을 선망하는 길드원들에게 신분 상승의 단단한 다리가 될 수 있다.
뛰어난 머리와 강단 있는 세류에 비해 성질은 못됐지만 즉흥적이고 치기 어린 비류에게 딴마음을 가져 보지 않은 길드원들은 없었다.
사실 코엠 길드가 규모에 비해 실력자들이 만흔 이유 중 하나가 세류 자매 때문이었다.
현실의 세류 자매를 익히 아는 길드원들의 대다수인 남자들은 그녀들이 태생적인 노블이 아니라 자수성가한 아버지 덕분에 노블의 위치에 오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보통 격이 맞는 대상끼리 결혼하는 노블들 시계에서 그녀들의 신분은 가장 아래였고, 배우자로 노블이 아닌 다른 남자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들의 미모와 매력 그리고 엄청난 자금력을 지닌 배경은 유니온 남자들의 로망이었다.
세류야 워낙 뛰어난 머리와 차가운 성격을 지녀 함부로 다가설 엄두도 낼 수 없지만 아직 철없는 천방지축인 비류는 성격만 참을 수 있다면 그나마 접근할 엄두를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그녀를 매혹시킨 것이 뫼비우스이니 길드월들이 그를 질투하는 것이 당연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새끼가 정보를 팔아먹은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거의 정기적으로 볼일을 핑계 삼아 후미나 옆길로 새기 일쑤였습니다.”
난도는 손에 쥔 자신의 애병을 쓰다듬으며 뇌까렸다.
“성급하게 처리하면 안 된다. 아주 철저하게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우리 길드와 비류를 그렇게 만만하게 본 것을 평생 후회하면서 살게 만들어 줘야 해. 그 새끼를 처리하는 것은 데스크라이가 맡아.”
“흐흐흐, 오랜만에 손맛 좀 보겠군요.”
세류의 말에 서열 4위인 데스크라이가 음침한 웃음을 지었다.
현실에서 코원 유니온의 폭력 조직 중 잔인하기로 소문난 ‘죽음의 함성’ 파의 후계자인 데스크라이라면 현실에서건 게임에서건 그를 확실하게 응징할 수 있을 것이다.
“안 그래도 뜨거운 피를 맛보고 싶었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좋아, 그럼 그를 응징하는 것은 데스크라이에게 맡긴다. 다음은 우리를 따라오는 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오래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오늘 밤에 피 떡으로 만들어 버리지요.”
난도가 눈에 불을 켰다. 다른 길드원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눈을 빛냈다.
개인별로 차이는 있지만 이곳까지 살아서 도착한 길드원들은 적어도 3에서 많게는 10까지 레벨 업을 했다. 그 와중에 숱한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몬스터가 아닌 인간들에게 향상된 자신의 실력을 보여 주고 싶어 했다.
세류와 코엠의 수뇌부는 은밀하게 모든 작전을 짠 후 흩어져서 산을 내려왔다.
정찰을 나갔던 길드원들이 모두 합류한 것은 정오가 훌쩍 지난 후였다. 수뇌부를 제외한 길드원들은 보너스를 생각하며 웃는 얼굴로 간단한 점심 식사를 즐겼다. 몇 쌍의 시선이 은밀하게 세류 자매와 뫼비우스가 있는 곳을 향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비류는 뫼비우스와 딱 달라붙어 갖은 아양을 다 부리며 닭살을 유발했다.
“뫼비, 이것도 먹어 봐.”
“으음, 맛있는데.”
맛과 질감 그리고 향까지 완벽하게 구현한 비욘드였기에 비록 가상이긴 하지만 먹는 것도 하나의 도락이었다. 로그아웃하면 뱃가죽이 등에 붙을 정도지만 게임할 때는 음식을 먹는 행위를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아, 뫼비우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빠르게 식사를 마친 세류가 비류에게 음식을 받아먹는 뫼비우스에게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글쎄요.”
잠시 고민하던 그의 입에서 세류가 예상한 대답이 나왔다.
“이제 목적했던 광산을 찾아 우리가 애초에 계약한 것은 이루어진 셈이니 슬슬 다른 볼일을 볼 생각입니다.”
“어머, 안 돼! 날 두고 어딜 돌아다니려고. 난 당신이 곁에 있어야 한다고.”
당장 비류가 난리를 쳤다. 그에게 푹 빠진 비류는 한시라도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 그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길드원들의 눈길 따위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비류의 행태에 세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비류를 남아서라도 우리 길드에 남아 줘요. 대우는 섭섭지 않게 해 줄게요.”
그녀의 말에 조금은 불안하게 흔들리던 뫼비우스의 눈이 진정되고 있었다.
“그래, 언니. 우리 뫼비에게 부길드장 자리를 주자. 똑똑하고 내 사람이니 그 정도는 대우해야지. 레벨이야 길드 사냥터에서 올려 주면 될 거고.”
“그럴까? 흠. 역시 부길드장이니까 A구역의 저택과 연봉도 넉넉히 주어야겠지?”
“당연하지, 언니.”
세류의 은근한 권유에 이은 비류의 말에 뫼비우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나름 자부심을 가진 그이지만 부길드장까지 제안받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총인원 이천을 육박하는 중형 길드의 부길드장 자리는 늘 혼자 떠돌았던 그에게는 절로 침을 삼키게 만드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동안 코엠 길드를 대충 파악한 바로는 서열 30위까지의 수뇌부에게는 최상급 캡슐과 넓고 안락한 작업장 그리고 B구역에 있는, 작기는 하지만 모든 편의 시설이 갖추어진 작은 아파트까지 제공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코원 유니온 굴지의 대기업인 카멕스의 후계가 길드장으로 있는 길드원다운 대우였다. 정확한 급여까지는 모르겠지만 게임만 생각해도 대단한 메리트가 있을 것이다.
다양한 가상현실 게임의 경험과 뛰어난 머리, 빠르고 정확한 순발력과 판단력을 가진 그는 몇 번의 행운을 만나 랭커가 되었지만 길드의 힘을 빌리면 100위 안의 하이 랭커가 되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이제까지 신분과 레벨을 속여 오긴 했지만 자신 정도의 레벨이라면 부길드장 자격은 차고 넘친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몇 개의 세력과 암중에 뒷거래한 사실이 발각되면 큰일이다. 적지 않은 세력과 뒷거래를 한 그의 판단으로는 언제까지나 비밀이 유지될 거라고는 보지 않았다.
“뫼비우스를 부길드장으로 영입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세류는 짐짓 주변으로 모인 수뇌부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찬성입니다.”
“레벨이 좀 달리는 것이 흠이지만 길드장을 보좌하고 길드원들을 이끄는 능력은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레벨이야 우리가 확보한 사냥터와 던전을 이용하면 금세 올릴 수 있으니 흠이랄 것도 없지. 나도 찬성이요.”
서열 3위인 난도나 4위인 데스크라이, 5위인 미라스까지 찬성하자 대부분의 상위 서열들까지 모두 동의했다.
다만 일부 길드원들은 불과 두어 시간 전까지만 해도 질투와 시기에 차 뒤에서 뫼비우스를 향해 갖은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던 이들의 예상하지 못한 상황 변화에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열성적인 찬성에 돌아가는 분위기를 파악하던 뫼비우스는 물론 비류까지 얼굴이 환해졌다.
“허허. 이렇게까지 절 반겨 주시니 더 이상 고사할 수가 없군요. 모든 역량을 다해 길드장을 보필하고 우리 코엠 길드를 비욘드 최고의 길드로 만드는 데 진력을 다하겠습니다.”
“나도 부탁해요. 그럼 일단 몇 가지 사항만 점검하고 돌아가는 대로 등록하지요.”
세류는 환하게 웃으며 길드 창을 열고 그를 길드원으로 등록시켰다. 길드원이 되었음을 알리는 창이 보이자 뫼비우스는 헤벌쭉 미소 지었다. 물론 정식 등록은 당연히 아니었다.
“아, 먼저 할 일이 있어요. 이곳은 어떤 몬스터와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곳이니 일단 부활 지점부터 설정하죠. 당장 부길드장이 할 일이 막중하고 또 많으니 부활 지점을 1차는 비류가 있는 곳 그리고 2차는 제가 있는 곳으로 설정하세요. 물론 3차는 길드 본부로 정하면 돼요. 언제라도 우리 비류가 부활한 부길드장을 볼 수 있게 말이에요.”
“어머머! 언니 정말 최고야. 그럼 혹시 같이 사망하더라도 내 곁에서 부활할 테니까. 너무 낭만적이다. 난 이제 우리 멋진 뫼비와는 떨어지지 않는 사이가 되는 거야. 너무 신 나!”
뭔가 말을 꺼내려던 뫼비우스는 비류가 끼어들자 그 기회를 놓쳐 버리고 입맛만 다셨다.
뫼비우스는 길드원으로 등록하는 절차와는 전혀 상관없는 부활 장소까지 설정하라는 세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비류가 들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오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게임 환경을 설정했다.
‘까짓 노블이 별거냐? 멍청한 노블을 잡으면 그게 노블이지. 비록 싸가지는 없지만 나름대로 돈 많고 예쁘니까 내가 독립할 때까지는 배경으로 삼아 주지.’
그의 눈앞으로 멋진 정원이 있는 대저택과 화려하고 멋진 옷을 입고 파티를 즐기거나 자장 부양 요트를 타고 유니온 하늘을 항해하는 모습이 지나갔다.
당연히 그런 그의 옆에는 비류가 아니라 더 아름답고 섹시하며 사랑스러운 아가씨들이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뫼비우스가 시키는 대로 부활 장소를 설정하자 세류가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짓을 기다렸던 난도와 데스크라이가 달려들어 뫼비우스의 양팔을 꺾어 버렸다.
“아악! 왜 이래? 난 부길드장이라고.”
“어, 언니? 언니, 우리 그이에게 왜 이러는 거야?”
뫼비우스와 비류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지만 비류를 쳐다보는 세류의 얼굴에는 냉기가 흘렀다. 그 서슬에 비류는 딸꾹질까지 하며 더 이상 뫼비우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비류는 도와줄 사람을 찾는 듯 길드원들을 둘러보았다. 하부 길드원들은 뜻밖의 상황에 당황하는 것이 역력했지만 앞서 전폭적인 찬성을 표했던 상위 서열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터라 동요가 없었다.
“저자의 품을 뒤져라!”
세류의 명령을 받은 미라스가 뫼비우스에게 달려들었다.
“이, 이봐! 왜 이러는 건데? 무슨 일인데 부길드장인 날 이렇게 취급하냐고?”
뫼비우스가 화난 얼굴로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미라스의 손길은 거침없었다. 곧 그녀의 손에는 적잖은 물건들과 크고 작은 주머니들이 덩굴처럼 이어져 나왔다.
“뭐가 이렇게 많아? 뭐야, 이거? 남자가 웬 향수까지 가지고 다니는 거야. 게다가 독탄은 물론 수면 가루까지 가지고 있잖아.”
뫼비우스의 품에서 나온 물건들을 보기 좋게 바닥에 쭉 늘어놓던 윈드라의 말에 빼곡하게 모여든 길드원들이 호기심에 찬 눈길을 보냈다. 몇 가지 종류의 밧줄도 있고 복면까지 나왔다.
그사이 세류는 길드 창을 통해 뫼비우스의 상태 창을 열어 보았다.
『이름: 뫼비우스
종족: 인간
레벨: 71
직업: 로그
칭호: 어둠의 중개자(외 2개)』
“뭐야, 이 사기꾼! 상인이라더니 로그였잖아. 게다가 레벨이 왜 이렇게 높아. 너 랭커였어?”
뫼비우스의 상태 창을 확인한 세류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너무나 다른 내용에 놀라고 화가 치밀어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레벨과 신분을 사실대로 밝힐 생각이었던 뫼비우스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상태라면 영락없이 코엠 길드를 속인 것이 되는 것이다.
그가 황급히 입을 열어 변명을 하려던 찰나 들려온 미라스의 말이 그의 얼굴을 흙빛으로 만들어 버렸다.
“여기 있습니다. 표지석입니다. 우리가 지나온 길 곳곳에 이 표지석들이 나무속이나 바위틈에 있었던 것을 정찰조들이 확인했습니다.”
물건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살피던 미라스의 말에 뫼비우스는 눈을 질근 감고 말았다.
표지선은 일정한 장소를 표시하는 일종의 마나석으로, 파인더를 사용하면 먼 거리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주로 던전 탐사와 미발견 지역을 탐험하는 것을 즐기는 매퍼Mapper들이 많이 사용하는 아이템이었다.
“뭐야? 뭐냐고!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언니!”
폭풍이 쓸고 간 것처럼 상황이 이상해지자 침을 삼키며 지켜보던 비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뭐긴 뭐야?돌아가는 상황을 보고도 파악이 안 되는 거니? 저 사기꾼 새끼가 우리를 속이고 다른 길드와 거래해서 그들에게 우리 뒤를 쫓게 만들었단 말이야.”
세류는 한심하다는 눈길로 차갑게 비류를 쳐다보았다.
“그, 그게 사실이야? 정말이냐고? 우리 다정한 뫼비가 그럴 리가 없어. 날 얼마나 좋아하는데.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비류는 머리통에 망치질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창백한 얼굴로 뫼비우스를 향해 다가갔다.
“아니지, 뫼비? 당신이 그럴 리가 없잖아. 왜 그런 비겁한 짓을 하겠어. 내 말이 맞지?”
비류가 미친년처럼 달려들며 소리를 질렀지만 뫼비우스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입을 닫아버렸다.
“끌고 가서 인벤 창까지 다 확인해 봐.”
“흐흐. 맡겨만 주시죠.”
데스크라이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수하 몇 명을 불렀고, 뫼비우스를 포박해서 그를 끌고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향했다.
“다들 주목! 정찰조가 우리를 뒤따르는 정체불명의 무리를 발견했다. 면밀한 수색 끝에 우리가 지나온 길 곳곳에 숨겨진 표지석도 찾을 수 있었고. 누군가 그들과 내통했다는 이야기지. 하지만 난 우리 길드원들을 믿었다. 그럼 남는 것은 우리를 안내한 하룬 대장과 저 뫼비우스뿐. 왜 이런 상황이 나왔는지 다들 이해할 수 있나?”
조리 있는 세류의 말에 길드원들은 그제야 정신없이 벌어진 이 일련의 사건 개요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 반반한 얼굴로 우리 비류 양에게 꼬리 칠 때부터 내가 알아봤다니까.”
“맞아. 재수 없는 새끼. 제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 일도 안 하면서 우리를 똘마니 취급했을 때부터 이럴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 목숨을 구해준 용병대장이 그럴 리가 없지. 아암.”
길드원들은 웅성거리며 대부분 고소하고 통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세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비류를 한번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길드의 든든한 자금줄이 될 광산을 쓰레기 같은 놈과 손잡은 이리들에게 양보할 수는 없다. 적들은 전혀 경계하지 않을 테니 오늘 밤에 해치운다. 준비되었나?”
“네에!”
“죽여 버리자!”
세류는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길드원들을 흐뭇하게 보았다.
“일단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움직인다. 적들은 어제 우리가 숙영했던 곳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그곳에서 몇 종류의 표지석이 나왔으니 틀림없을 것이다.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놈들을 몬스터 밥으로 만들어 버리자!”
와아!
“코엠 길드 만세!”
비록 험난한 여정에 지치고 해쓱해진 얼굴이지만 한번 기세를 탄 길드원들의 눈은 강렬하게 빛을 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