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다시 후크란으로 (44/278)
  • 《다시 후크란으로》

     자고 일어나 비욘드에 접속하고 보니 벌써 하루하고도 한나절이 지난 시간이었다.

     “그래도 어젯밤에는 들어와서 잤군요.”

     방에서 나오자 넓은 마당에서 길드원들과 함께 있던 세류가 다가와 인사했다.

     퍼뜩 그녀가 자신을 NPC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린 하룬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볼일이 좀 있었소.”

     “볼일이라면……?”

     뭐가 그렇게 관심이 많은지 귀찮기도 했지만 그녀의 의뢰를 받아들일 생각을 굳혔으니 말은 받아 주어야 했다.

     “후크란 지형을 잘 아는 사람을 좀 만나 보고 왔소.”

     그 말에 세류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의뢰를 받아들이기 전에 하는 사전 조사 차원이었소. 그런데 생각보다 그대들이 찾는 장소가 너무 위험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소.”

     “그런가요.”

     후크란의 흉험함을 이미 한 번 경험한 그녀는 하룬의 말을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2만 골드라면 의뢰를 받아들이겠소.” 

     “네? 너무하는 거 아닌가요?”

     고운 얼굴에 표시가 나게 인상을 쓰는 세류의 태도는 너무 큰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냐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뭐야, 날로 먹겠다는 거야?”

     “그러게. 아무리 그곳을 안내할 사람을 구하기 힘들다고는 하지만 그 돈이 얼만데…….”

     언제 다가왔는지 비류와 뫼비우스가 코웃음을 쳤다.

     “댁들이 어떤 지도를 가졌는지 모르지만 내가 1만 골드를 주고 구입할 지도는 수대에 걸쳐 후크란에서 사냥과 약초 채취를 하고 살아온 사람들이 머리를 모아 그린 것이오. 그들은 각기 영역별로 다녔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정보를 합하면 상당히 안전한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요.”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고요? 아무리 찾아도 후크란 산맥 안으로 들어갔다는 사람은 들어 본 적도 없는데요.”

     세류는 물론 직접 수소문을 하고 다닌 뫼비우스도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하룬을 응시했다.

     “이곳 타우스트 남작성이 왜 약초 시장으로 유명한지 혹시 아시오? 후크란 산맥을 빼면 다른 곳보다 특별할 것도 없는 산들밖에 없소. 제국은 물론 대륙에서도 극히 희귀한 약초들 때문에 유명해진 곳이오. 그런 약초들이 어디서 나오는지 혹시 알겠소?”

     “그럼…… 그곳을 출입하는 약초꾼들이 있단 말인가요?”

     세류와 뫼비우스는 그제야 뭔가 알아차린 얼굴이었다.

     “외지인은 물론 내지인들도 그런 사실은 잘 모르지. 이곳에는 대를 이어 후크란 산맥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약초꾼들이 분명히 존재하오. 다만 그들은 약초에 대한 정보 때문에 자신들이 그곳을 출입한다는 사실을 절대 비밀로 유지하는 것이오. 그래야 대를 이어 약초로 큰돈을 벌 수 있으니까.”

     세류와 뫼비우스는 하룬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 비욘드의 NPC들이 휴먼들과 다른 문화 수준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느 게임과 달리 거의 그들과 비슷한 지능과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다.

     외지인에 대한 배타성도 있을 테고 더구나 이방인이라면 그 배타성은 더욱 클 것이다.

     이곳 사람들에게도 비밀로 알려진 약초꾼들이 기껏해야 1~2천 골드를 내걸고 안내자를 구하는 각 세력의 제안에 혹할 리가 없는 것이다.

     ‘하긴, 나 같아도 안 나서겠다.’

     자신이라면 어떨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는 이야기였다.

     사실 하룬이 추측해서 하는 말이긴 하지만 가츠 노인과 그 친구만 해도 그가 보기에는 후크란 산맥을 어느 정도는 제집처럼 드나드는 약초꾼이었다.

     하룬이 생각하기에는 가츠 노인이 준 지도대로 움직이면 많은 위험을 피할 수 있을 듯했다. 잠깐 보았지만 그 지도에서 몬스터들의 서식지가 아주 자세하게 기록된 것으로 기억했다.

     “그런 사람들이 웬만한 돈으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것이라 생각하오? 내가 가진 인맥을 총동원해서 그 정보를 다른 용도나 다른 세력에 절대로 제공하지 않겠다는 전제 조건을 걸어 겨우 동의를 받아 낸 것이오. 난 의뢰를 받고 아직까지 실패한 적이 없소. 그 비결이 뭔지 아시오? 미리 모든 성공 조건을 충족시켜 놓고 의뢰를 진행하기 때문이오. 내가 볼 때 그들이 가진 지도가 없으면 이 일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소. 당신이 가진 지도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그 지도에 설마 몬스터들의 서식지나 위험 상황까지 기록되어 있다고는 못 믿겠소. 내가 할 말은 끝났으니 결정은 당신들이 하시오.”

     세류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한 얼굴이었다. 2만 골드는 그녀에게도 큰돈이지만 하룬의 말을 들으니 그리 큰 돈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의뢰를 실패한 적이 없다고. 대단한 자신감이군. 하긴 성공 조건을 다 만들어 놓는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거친 첫인상과 달리 무척이나 철두철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구나.’

     뫼비우스는 이제까지 NPC 그것도 용병이라고 무시했던 하룬을 다른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다.

     “좋아요. 하룬 대장의 말대로 하지요. 그럼 지도는 언제 받을 수 있나요? 그리고 출발할 수 있는 날짜는요?”

     “일단 1만 골드를 가져다주면 그들이 이틀 내에 지도를 만들어 줄 거요. 나야 이틀이면 필요한 것들을 다 구할 수 있으니 출발은 댁들이 준비되는 대로 가능하오.”

     “알겠어요. 그럼 사흘 후에 출발하는 것으로 하지요.”

     세류는 그 자리에서 15,000골드를 꺼내 하룬에게 건넸다.

     거금을 받은 하룬의 눈에 잠시 묘한 빛이 일렁였다. 실로 엄청난 돈이라 떨릴 법도 한데 자신이 생각해도 놀라운 정도로 그의 손은 무심하게 돈을 받아 품속에 넣었다.

     “그럼 난 지금 당장 가 보겠소. 미리 말해 두는데 혹시 내 뒤를 밟을 생각은 하지 마시오. 그들은 나를 만나는 것도 꺼리는 사람들이니까 말이오.”

     “그건 걱정 마세요. 우리도 준비할 것이 많아서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수는 없으니까요.”

     세류의 약속을 받아 낸 하룬은 식사도 못 한 상태로 여관을 나섰다.

     ‘가츠 노인을 만나 지도에 그려진 지형 설명을 듣고 대원들에게 필요한 것들도 구입하자. 식사야 먹을 곳이 없진 않을 테지.’

     가츠 노인의 약재상을 찾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가츠는 생각보다 후크란 산맥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이미 산맥 북쪽은 직접 경험했고, 멀리서나마 근처 지형을 눈에 익혀 두었기에 지도를 펼쳐 놓고 설명을 듣자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다.

     “후크란 산맥의 가장 상위 몬스터는 와이번이나 오우거 같은 놈들이 아니네. 최소한 열 개의 부족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럼프 오크들이라네. 놈들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높은 육체적 능력과 지능으로 후크란 산맥 전체를 지배하고 있네.”

     하룬도 그의 말엔 금방 수긍했다. 비록 볼일을 보며 긴장이 흐트러졌을 때 가장 연약한 부분(?)을 노려 놈들을 쉽게 처리했지만 놈들은 일반 오크들을 한참 뛰어넘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

     하룬은 가츠와 거의 하루를 같이 보내며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가츠가 알려 준 약초꾼들만이 아닌 은밀한 길이라면 훨씬 위험을 덜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세류가 얼마나 많은 길드원들을 데려갈지 모르니 각종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다음 날에는 시장을 들러 대원들에게 필요한 각종 물품들을 샀다.

     물가는 생각보다는 훨씬 비쌌다. 파로스 자작성에 비해 거의 두 배는 되는 것 같았다.

     특히 무기 종류는 없어서 못 팔 정도여서 몇 개 되지 않는 대장간들이 때 아닌 호황을 누렸다.

     이게 모두 광산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모여든 유저들 때문이었다.

     하룬은 만약을 대비해서 소모품으로 쓸 비수와 단검 그리고 표창 종류를 한 자루씩 사서 인벤토리에 넣었다. 거의 다 노멀급이었지만 가격은 생각보다 많이 비쌌다.

     생각나는 물건들을 모두 사고 나니 벌써 늦은 오후가 되었다.

     그제야 좀 한가로운 마음으로 성안을 구경할 수 있었다. 파로스 자작성과 비교해서 대규모 약초 시장이 있다는 것을 빼고는 오히려 성의 규모가 훨씬 작은 이곳에는 이상하게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말 사람이 많구나. 이 작은 성에 웬 유저들이 이렇게 많아? 아, 광산!’

     하룬은 대번에 상황을 추측할 수 있었다. 유저들은 물론 기사들도 심심치 않게 보이는 것을 보면 광산에 대한 정보가 많이 알려진 것 같았다.

     ‘좀 더 부를 걸 그랬나?’

     출발은 안개가 자욱하게 낀 새벽녘에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이게 다요?”

     성문을 나온 하룬은 세류의 뒤를 따르는 몇십 명에 불과한 사람들을 보고 물었다.

     “호호, 정보가 새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나머지 길드원들은 이미 성을 빠져나가 센 강에서 대기하도록 했어요. 정예들만 추렸어요. 숫자는 전과 같은 삼백 명 정도지만 그 실력은 비교를 할 수 없지요.”

     세류는 마치 칭찬이라도 바라는 표정으로 하룬을 보았다.

     ‘영리한 여자군. 길드장의 자격은 있네. 노블이라고 다 같지는 않은가 보다.’

     미리 길드원들을 빼돌린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가 확인한 것만 해도 상당수의 길드와 기사단이 광산 건으로 이 남작성에 모여든 상황에서 대규모 인원이 성을 나서면 정보원의 이목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럼 서두릅시다. 빠를수록 좋으니까.”

     칭찬을 바라는 세류에게 무심한 눈길을 한번 준 하룬은 메신저 워킹 스킬을 펼쳐 빠르게 움직였다.

     세류는 뒤에서 바짝 붙어 재미난 이야기라도 나누는지 시시덕거리는 비류와 뫼비우스의 모습을 한번 보고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칫! 무뚝뚝하긴.”

     보기에는 그냥 걷는 것 같지만 엄청나게 빠른 하룬은 벌써 저만큼이나 앞서 가고 있었다. 용병으로 오랫동안 여행해서 그런지 그의 걸음은 이상할 정도로 빨랐다.

     “서둘러!”

     세류는 심통이 나서 괜히 비류와 뫼비우스에게 소리를 빽 지르고는 뛰기 시작했다.

     “왜 저래?”

     “몰라요. 저 용병이 또 언니 속을 긁었나 보지.”

     비류와 뫼비우스는 이제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하는 일행의 뒤를 부지런히 쫓았다.

     입에서 단내가 나게 뛴 덕분에 저녁 늦게 센 강에 도착한 세류 일행은 미리 약속한 장소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길드원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은 후 처음으로 하룬은 코엠 길드원의 수뇌부와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길드장인 세류가 미리 언급했는지 그들 대부분이 상당한 호감을 표시해서 내심 동행 기간 동안을 걱정했던 하룬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코엠 길드는 길드장인 세류와 부길드장인 비류가 각기 서열 1, 2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열 3위인 난도는 실력으로는 가장 강해서 레벨이 무려 64인 랭커였다. 날카로운 눈매와 잘 정제된 기도로 보아 현실에서도 상당한 무력을 지닌 것으로 추측되는 아주 인상적인 검사였다.

     난도에 비길 만한 인상과 실력을 가진 인물이 한 명 더 있었다.

     아주 험악한 인상을 가진 서열 4위의 데스크라이는 레벨이 61인 전사로, 온몸에 크고 작은 도끼 네 자루를 가지고 다녔다.

     풍기는 분위기도 그렇고 발언권도 그렇고 그가 길드의 실제적인 행동 대장으로 보였다.

     서열 10위까지로 이루어진 수뇌부의 회의 분위기를 보니 이 두 사람이 길드원들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 세류와 비류는 길마와 부길마이긴 하지만 길드 운영에 대해 이 두 사람에게 많은 권한을 주는 것으로 보였다.

     ‘생각보다 세류가 뛰어나구나.’

     단순히 권력을 즐기는 노블인 줄 알았더니 제법 사람을 부릴 줄도 알았던 것이다.

     “오늘은 여기서 쉽니다.”

     하룬의 말이 떨어지자 여기저기에 주저앉는 소음들이 연속해서 들려왔다.

     세류 일행이 자리를 잡은 곳은 굵은 자갈들과 바위들 사이로, 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는 험준한 산의 정상에 가까운 곳이었다.

     바위들을 제외하고는 엄폐물이 없어 하룻밤을 지내기에는 부적합하지만 다행히 몬스터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이런 황량한 산에 자리 잡을 몬스터는 없을 테니 오히려 안전할 수도 있다.

     “아이고, 죽겠다!”

     “난 이제 손이며 다리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먼저 로그아웃할 순서가 된 놈들이 부럽네.”

     여기저기 피로와 불만을 토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류는 땀과 먼지로 엉망이 된 얼굴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한참이나 그 자리에 누워 있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쉬고 있는 거지나 다름없는 길드원들이 들어왔다.

     먼지와 몬스터들의 피 그리고 자신의 피로 얼룩진 하드 레더, 이가 나가고 녹슨 무기들, 금방 숨이 넘어갈 것처럼 파리한 얼굴들이 눈에 가득 넘쳐 났다.

     하룬은 중간에 몇 번이나 길을 바꾼 덕분에 운 좋게 럼프 오크를 피할 수 있었지만 후크란에는 럼프 오크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몬스터들과 맹수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룬이 가진 지도는 약초꾼들이 제공한 것이라 길이 험하고 무척 좁았다. 하룬이 아니었다면 길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대규모 인원이 움직이는 탓에 소수였다면 피할 수 있었던 전투도 어쩔 수 없이 치러야만 했다.

     좁은 배리어 안에 갇혀 살던 이들이 언제 이런 험준한 지형을 경험해 보았던가.

     네발로 기어올라야 하는 가파를 산을 수십 개 지나는 사이 체력은 급격하게 저하되고 긴장이 조금이라도 풀리면 독사들이며 독충들이 달려들었고, 제법 수가 되는 몬스터들은 뜻밖의 먹이에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들었다.

     악전고투하며 광산을 찾아 나선 지 20일이 넘자 코엠 길드원들은 피로가 극에 달했다. 오늘도 네 번이나 전투를 치러야만 했던 것이다.

     식생이 풍부한 곳이라 그런지 몬스터들의 영역도 비교적 작았기에 영역을통과할 때마다 칼부림을 해야만 했다.

     벌써 독충과 몬스터들에게 한 번이라도 사망한 길드원들의 숫자가 백이 넘어갔고, 나머지도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마법사들의 체력이 떨어져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했다. 그녀를 포함한 마법사들이야말로 조금만 더 무리하면 죽을 판이었다.

     “하룬 대장,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세류의 말은 간절한 염원까지 담고 있었다. 물론 힘든 길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험난한 길인 줄은 짐작도 못했다. 길을 막는 몬스터들은 하나같이 그들이 익히 보던 그런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경험한 놈들보다 적어도 두 배 이상은 강력한 괴력과 흉포함을 가진 녀석들에게 벌써 전력의 3분의 1은 로그아웃당한 상태였다. 거기다 강행군에 녹초가 된 마법사들은 이 상태라면 며칠도 견디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대답 대신 하룬은 오늘 낮에 봤던 산꼭대기 근처의 거대한 구덩이를 떠올렸다.

     세류가 가진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분명히 가츠 노인에게 받은 지도에서 보았던 천갱天坑이 틀림없었다. 천갱은 산맥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지하 수로 때문에 산의 한 부분이 밑으로 내려앉으며 형성된 특이한 지형이었다.

     이제까지 실제로 걸으면서 이동한 거리 감각을 고려하면 목적지는 지척이나 다름없었다.

     “난 더 이상 못 가. 다리가 너무 아파, 달링.”

     곁에서 비류가 뫼비우스에게 달라붙어 징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까지 오면서 뫼비우스는 확실하게 목적을 달성한 것 같았다. 비류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으니 말이다.

     둘은 여행 초반부터 이상한 분위기를 연출하더니 이제는 대놓고 스킨십을 할 정도로 사이가 가까워졌다.

     “어디 다리 좀 내밀어 봐. 내가 주물러 줄게. 하아, 우리 예쁜 애기 다리가 정말 퉁퉁 부었네. 내가 풀어 줄게.”

     “호호호. 고마워, 달링. 아이, 시원해. 너무 좋아.”

     둘의 닭살 유발 행위는 지친 길드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지만 하룬은 아무런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그 상대가 멍청한 비류이다 보니 심지어 부럽지도 않았다.

     “식량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길드원들도 체력이 거의 바닥을 기는 상황이라 걱정스러워요.”

     세류는 하룬에게 하소연을 했다. 동생도 그렇게 수뇌부도 언젠가부터 행군이 멈추면 뻗기 바쁘니 뭘 의논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빠르면 내일, 늦어도 사흘 이내에 도착할 거요.”

     “정말요?”

     세류가 펄쩍 뛰면서 반색하자 뫼비우스 역시 주무르던 비류의 다리를 놓고 기쁜 얼굴로 하룬을 주시했다.

     빠르고 가벼운 몸을 가진 그이긴 하지만 연속된 전투와 강행군에 지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길드원들처럼 그의 눈 밑에도 진한 다크서클이 그려진 지 오래였다.

     하룬의 말이 작은 파랑을 일으키며 퍼져 나가자 얼굴에 화색이 돈 길드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소곤거리며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의 관심은 온통 하룬에게 향했다.

     “이 산을 넘으면 여섯 개의 작은 산으로 구성된 광산지대가 나올 걸로 예상하고 있소. 물론 운이 나쁘면 이 정도 높이를 가진 산 하나를 더 넘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거의 다 온 거 같소.”

     “휴우. 고마워요.”

     세류는 아직 목적지에 다 온 것도 아닌데 벌써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만큼 고초가 심했다는 방증이리라. 그녀뿐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환희가 아지랑이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자, 모두 들었을 테니 다시 말하지 않겠다. 곧 해가 질 테니 각자 할 일을 서둘러라. 로그아웃할 사람들도 먼저 숙영부터 준비해라.”

     “네에!”

     그 어느 때보다 큰 소리로 복창하는 길드원들을 보며 세류의 얼굴에 모처럼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세류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산 위로 향하는 하룬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흔들었다. 그의 안전을 기원한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도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그가 어떻게 방향을 잡고 지도에 표기된 장소를 찾아내는지 이제는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았다.

     나름 독도법을 공부했다는 길드원들도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지도를 보고 정확하게 움직이는 하룬이었다.

     대하면 대할수록 경이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NPC가 아니라 유저였다면…….’

     세류는 은밀한 생각에 얼굴을 붉혔다.

     휴먼이건 NPC이건 간에 이제까지 냄새나는 사내 따위는 전혀 관심도 없었던 그녀지만 짧은 시간 동안 가장 든든한 존재로 자신을 안심시켜 준 하룬을 남자로 인식하게 된 그녀의 눈이 그를 좇으며 빛을 발했다.

     희망적인 소식에 힘을 낸 길드원들이 임시 캠프를 만들고 식사를 준비했을 때 정찰을 나갔던 하룬이 돌아왔다. 지나치는 그를 대하는 길드원들의 시선에서 강한 신뢰가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길 안내를 맡은 NPC 정도로 여겼다. 며칠 지난 후에는 노련한 용병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후에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의 손짓 한번, 시선 한 줄기, 말 한 마디는 모두 일행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는 쉴 새 없이 물어 대는 독충과 발 한쪽이 빠지면 이내 몸까지 빨려 들어가는 늪 그리고 무시무시한 맹수들과 몬스터들을 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오늘만 해도 네 번이나 몬스터들과 사투를 치른 그들이지만 하룬이 아니었다면 열 번도 더 넘게 만났으리라는 것을 이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힘이 부족해 꼼짝도 못 하고 몬스터의 이빨에 머리통이 씹히기 일보 직전에, 죽음의 공포에 잠식되어 정신이 나가려 할 때면 여지없이 날아가는 그의 암기들은 경각에 달한 목숨들을 구해 주었다.

     코엠 길드원 중에서 지금까지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비록 세류가 그들의 길드장이긴 했지만 이곳 후크란에 들어와 며칠이 지난 후부터 하룬의 위치는 확고부동해졌다. 최소한 후크란에서는 그가 대장이었다.

     모든 판단과 지시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모르는 길드원들은 없었다.

     그의 지시를 따르면 보다 안전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아는 길드원들이기에 불만은 있을 수가 없었다.

     “거칠고 무뚝뚝한 것이 걸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NPC잖아. 같은 유저라면 아니꼽겠지만 숱한 위험을 헤치면서 용병으로 살아왔고, 행동은 진중하고 믿음이 가니 우리를 이끌 자격이 있지.”

     나름 자신의 머리와 능력을 자신하는 마법사들은 그렇게 말하며 하룬을 따랐다.

     “도대체 레벨이 얼마야? 민첩 스텟이 얼마나 되면 저렇게 움직일 수 있을까? 거기에 검술도 웬만한 기사들은 저리 가랄 정도야. 저거 봐! 아무리 산에서 평생을 보냈다고 해도 저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거야?”

     “하룬 대장이 비수 던지는 거 봤어? 내 눈에는 보이지도 않더라. 손 한번 흔들면 한 생명이 끝나는데 우리 편이니까 그렇지 적이라고 생각하면 소름이 쫙 끼친다.”

     검사를 포함한 전사 계열의 길드원들은 그의 순수한 무력에 감탄했다.

     세류는 미소 지으며 돌아온 하룬에게 수프 그릇을 내밀었다. 하얀 밀빵이 곁에 얌전히 빠져 있었다.

     과연 하룬의 말이 맞았다.

     아침 일찍 산을 오른 코엠 길드원들은 산꼭대기에 오르자 여섯 개의 작은 산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비친 그 지역은 나무가 별로 없는 탓에 산 전체에 깔린 광석들에 반사되어 마치 전체가 보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휘황한 빛을 발했다.

     세류가 가진 지도에 표시된 것이 아니더라도 한눈에 희귀한 노천 광산 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급격하게 사기가 오른 코엠 길드는 3시간이 흐른 후 그곳의 초입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이 흐르는 계곡과 가까운 초지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한동안 주위의 이색적인 풍광에 푹 빠져들었다.

     제대로 된 흙이 없어 키 작은 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는 산은 황량해 보였다.

     게다가 몇 가지 색깔이 뒤섞인 돌들로 가득한 산은 멀리서 보던 것보다는 높이나 둘레가 꽤 컸다.

     “틀림없습니다. 이 산은 철광석들이 유달리 많은 것 같습니다. 붉은 빛을 반사하는 돌들은 철을 함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력석에 강한 반응이 있습니다. 다른 광석들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철광산은 맞습니다. 더구나 파고 들어갈 필요도 없이 지표면들까지 광석들이 올라온 노천 광산입니다. 아주 노다지입니다. 저기 계곡물을 보세요. 붉은빛이 감도는 물은 철 성분과 반응한 증거입니다.”

     마법사인 미라스와 옥스맘이 흥분해서 떠드는 말이 아니더라도 세류는 묵묵히 짐을 다시 챙기는 하룬의 태도를 보고 드디어 광산을 찾았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녀가 가진 정보로는 이곳에 매장된 광석은 단지 철광석만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금과 은은 물론 각종 보석들이 엄청나게 매장되어 있다고 했다.

     유저들은 모두 산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다.

     “이제 난 가겠소.”

     세류는 이 소리만은 왠지 빨리 듣고 싶지 않아 애써 딴짓을 했지만 결국 하룬과 얼굴을 마주하고야 말았다.

     “돌아갈 때까지 같이 있으면 안 되나요?”

     그녀의 말에는 아주 애틋한 감정이 실려 있어 하룬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적지 않은 고락을 같이한 터라 이제는 하룬도 세류를 향한 막연한 적대감은 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은근하게 전해지는 그녀의 정은 흐뭇하고 가슴이 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했다.

     왠지 같이 더 있으면 그녀에게 각별한 정을 느낄 것 같았다. 두어 번 완전히 뻗어 버린 그녀를 업었을 때는 불현 듯 자신이 유저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은 충동도 느꼈다.

     그녀가 NPC라고 생각하는 하룬이 성관계를 맺을 수 없어 결혼할 수 없는 비욘드의 주민이 아니라 유저라면 그녀는 어쩌면 적극적으로 그에게 대시할지도 몰랐다.

     하룬도 남자인지라 노블로서의 사고방식은 어쩔 수 없지만 사려 깊고 당차면서도 여자의 갖은 매력을 한껏 드러내는 그녀에게 끌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살아오면서 노블에게 이런 감정을 느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렇게 되고 말았다.

     ‘나 같은 보더러가 노블과 사귀면 십중팔구는 좋은 꼴로 끝나지 않을 거야.’

     그것도 그거지만 뿌리 깊은 노블에 대한 적대감도 남아 있었다.

     더구나 자신은 이곳에서 할 일이 있었다.

     “할 일이 있소. 그 일이 끝나면 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니 더 이상 동행할 수 없소.”

     “알았어요. 다, 당신은 그저 빨리 우리를 떠나고 싶은 마음밖에 없는 것 같군요. 그래도 나는 하룬 대장과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요.”

     섭섭한 마음이 여과 없이 그대로 전해진다.

     “헤어짐을 오래 끄는 것은 상처와 그리움만 키운다고 들었소.”

     무뚝뚝한 대답이지만 세류는 눈을 반짝였다. 아릿하면서 달콤한 뭔가가 그 대답에서 흘러나와 그녀를 기쁘게 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보낼 때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파악한 하룬의 성격 역시 잡는다고 잡힐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여기 잔금 5천 골드예요. 그리고 이것은 제 선물이에요. 타우스트 남작성의 좌표가 기재된 텔레포트 스크롤이니까 유용하게 사용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또 만날 수 있겠죠?”

     물기를 머금은 듯 촉촉하게 젖은 그녀의 말에 가볍게 얼굴 근육이 움직였지만 하룬은 예의 무심한 태도로 그녀에게 돈과 스크롤을 건네받았다.

     “내 선물은 하나의 정보요.”

     “정보라고요?”

     기대가 되는 듯 살짝 치켜뜬 세류의 눈매가 아름답다.

     “뫼비우스라는 사람을 조심하시오.”

     은밀한 하룬의 말에 세류의 얼굴이 확 변했다. 그녀가 아는 한 하룬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믿을 수 없는 말을 한 것이다.

     “그, 그게 무슨 얘기예요?”

     “확실하진 않지만 누군가 우리가 지나온 길에 표지석을 곳곳에 뿌려 놓았소. 뒤따르는 세력이 있다는 이야기지. 만약 그게 확실하다면 그럴 사람은 한 사람밖에는 없소.”

     “그럴 리가.”

     세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부인했다.

     “확실치는 않다고 했소. 하지만 확인은 할 필요가 있겠지.”

     세류는 너무나 뜻밖의 말을 들어서 그런지 입만 벌린 채 말을 하지 못했다.

     “작별 인사를 나누기가 번거로우니 모두에게 대신 안부 전해 주시오. 그럼.”

     하룬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자리를 떴다. 코엠 길드원들 대부분은 산기슭에 쌓인 돌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세류는 충격에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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