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휴우, 오늘도 안 나오면 호출하려고 했어요.
어지간히 기다렸는지 그가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벨이 샐쭉한 얼굴로 그를 맞았다. 캡슐을 나와 창밖을 보니 마침 오후였다.
불투명한 배리어 밖으로 번져 보이는 태양이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미안.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계속 일이 생기는 바람에 말이야.”
-약재가 대부분 떨어져서 공급하지 못하고 있어요. 빨리 암시장에 다녀와야 해요.
“그러려고 나온 거야.”
처음에는 벨을 볼 생각밖에 없었는데 미루어 놓았던 일부터 해야만 했다.
하룬은 간단하게 샤워하고 집을 나섰다.
당장에 뿌연 모래 바람이 두건 사이로 드러난 그의 얼굴을 때렸다.
이전보다 훨씬 심해진 기분이었다. 거리를 부옇게 만드는 먼지와 모래들은 정말 많이 늘어나 있었다.
“현실은 정말 적응이 안 돼.”
하룬은 현실과 비욘드가 서로 바뀌었으면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잠시 하다가 이내 메신저 워킹 스킬으 펼쳤다.
비욘드에서 생각했던 대로 3단계 스킬인 ‘플라이 워킹’을 펼치자 그의 몸이 모래 바람을 뚫고 빠른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발을 통해 들어오는 기의 양이 장난이 아니구나. 게임에 비하면 거의 열 배 이상은 되는 것 같아.’
하지만 기氣로 추정되는 기운이 허벅지를 타고 올라오는 것까지는 느낄 수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마치 바닷속에 빠진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도대체 몸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했다.
‘뭐, 언젠가는 알 날이 오겠지.’
확실한 것은 눈에 잡힐 듯이 생생한 기운을 받아들임으로써 육체적 능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쉽게 피로를 느끼지도 않고 전신의 감각은 늘 최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전의 그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그는 변했다.
마른 체형은 변화가 없었지만 잘 발달한 근육에서 나오는 힘은 콘크리트 벽이라도 부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퇴근 시간 전이기도 하지만 발목까지 빠질 정도로 먼지와 모래에 점령당한 거리는 한산했다.
두텁게 쌓였던 먼지와 모래들이 마치 물결처럼 일어나 거리에 출렁였다.
그 사이로 긴 외투와 목도리로 몸을 감싼 하룬이 마치 물 위를 걷는 것처럼 질주하고 있었다.
누군가 보았다면 비명이라도 질렀을 법한 광경이었지만 아쉽게도 먼지와 모래 바람으로 가득한 거리를 주시하거나 돌아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룬은 채 5분도 걸리지 않아 암거래 시장에 도착했다. 플라이 워킹 스킬의 위력은 정말 대단했다.
시간이 일러서인지 암시장은 지난번보다는 한가했다. 약재가 워낙 급한 터라 구경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한 번 온 곳이라 익숙하게 대장간 ‘작살’을 찾은 하룬은 미리 약속하지 않은 탓에 해란 자매를 볼 수 없었다.
그녀만 믿고 무턱대로 찾아온 자신의 꼴이 우스웠다. 해란이 없다면 바가지를 쓸 것이 분명하니 이대로 물건을 구입해야 하는지 아니면 나중을 기약해야 하는지 갈등이 되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안내해 주지. 안 그래도 그때의 은혜를 어떻게든 갚고 싶었어.”
해란의 큰오빠가 나섰다. 그의 이름은 바란이었다.
“감사합니다. 사실 오늘 꼭 구입해야 하거든요.”
정말 다행이었다.
아주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이곳 시장을 놀이터로 삼고 자란 바란은 상당한 인망을 얻은 듯 별로 흥정을 하지 않았는데도 상인들은 최소한의 가격만 받았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몇 번 다른 사람들과 흥정하는 것을 지켜본 후에는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흥정하는 것도 좋지만 서로 기분 좋게 거래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물건이란 대부분 가격만큼의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형님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그의 말이 맞았다.
같은 물건이라도 비싸게 구입한 사람은 그만큼 아껴서 오래 사용하지만 싸게 산 사람은 그 물건을 험하게 다루어 오래 쓰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다른 것들은 쉽게 구입할 수 있었지만 산삼과 몇 가지 약재들은 원하는 만큼은 구입하지 못했다. 약재상을 다 돌아다녔지만 100년 이상 묵은 산삼은 없었다. 50년생이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한 뿌리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있는 대로 구입하고 나머지 부족한 것들은 예약을 넣었다.
모두 합해서 1,600만 원이 들었다. 생각은 했지만 하룬에게는 정말이지 엄청난 돈이었다. 그가 예약한 100년생 이상의 산삼까지 고려하면 거의 3천만 원에 가까운 돈이 드는 것이다.
마침 은행과 연결되는 단말기가 암시장 곳곳에 있어 모자라는 현금은 계좌에서 인출해서 처리했다.
‘휴우, 많은 돈을 벌었다고 생각했는데 쓰는 것은 한순간이구나. 이러면 별수 없이 세류의 퀘스트까지 받아들여야겠구나.’
나름 현실에서는 평생 만져 보지도 못할 거금을 비욘드를 하면서 벌었다고 희희낙락했던 하룬의 얼굴이 굳었다.
머릿속으로 대충 계산해 보니 그가 게임하면서 번 돈은 암거래로 700만 원 그리고 퀘스트를 통해 환입금한 2,400만 원을 합해 3,100만 원이었다.
지난번에 식료품을 구입하는 데 100만 원 그리고 이번에 약재를 구입하고 보니 남는 게 아예 없었다.
지금처럼 제대로 게임하면서 비욘드에서의 레벨 업이나 실력 향상이 현실과 매치되려면 앞으로도 상당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자 각오를 새롭게 했다.
수백 가지가 넘는 약재를 세 개의 배낭에 가득 담은 하룬은 약재 거리에 있는 한 노점에서 진귀한 약재로 만들었다는 약차를 샀다.
바란이 일도 내팽개치고 자신을 도와준 것이 고마워서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요즘 유니온의 공기가 좋지 않아.”
“왜요?”
그는 주변을 잠시 둘러보고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배리어가 약해졌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배리어가요?”
그런 말은 아직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최근 들어 F구역에 하르크와 사막 늑대들이 자주 출몰한다는 소문이 있어. 희생자들도 꽤 많이 나왔고.”
“수비군들은요?”
“그치들이야 늘 뒷북만 치는 족속들인걸, 뭐.”
“형님 말이 사실이라면 뭔가 안 좋아지는 것은 확실한 것 같네요.”
“그래서인지 이곳 경기도 예전만 못해. 하루가 다르게 손님이 줄고 있어. 그때 이후로 하르크가 두 번이나 더 나타났거든.”
“그래요?”
확실히 이상했다.
“한 번은 식료품 거리, 또 한 번은 육류 거리가 습격당했는데 먹을거리가 많아서 그랬는지 몇 명 죽지는 않았지만 상인들이 무서워서 덜덜 떨고 있는 실정이야.”
그의 얼굴은 심각했다. 그 또한 대장장이이면서 상인이기 때문일 터였다.
“변종 생물들이 저녁에 유독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소문대로 배리어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발전소들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아니면 유니온 방어 시스템에 문제가 있든지. 아무튼 유니온에서는 공식적으로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되도록 밤에는 돌아다니지 마.”
“알겠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어날 때가 되었다. 같이 장을 봐 주고 귀한 시간까지 빼앗았으니 나중에 만나면 밥이라도 한번 거하게 사야 할 것 같았다.
“해란이 널 한번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까 꼭 연락해라. 그리고 나인도 빠른 시간 내에 자기 마을에 들러 달라고 인편으로 소식을 보내왔으니 거 뭔가 그 게임이라는 걸 통해 해란이랑 연락을 하든지.”
“네.”
하룬은 헤어지기 전 해란의 오빠에게 받은 메일 주소와 다기능 컴폰 번호가 적힌 쪽지를 받았다.
집에 돌아와 시간을 확인하니 채 3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오가는 데 10분도 걸리지 않으니 정말 편리했다.
약재를 본 벨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무래도 노심초사하고 있었던 듯했다.
일전에 식료품을 채운 것처럼 캡슐의 구멍에 약재 같은 것을 다 넣은 하룬은 벨과 오랜만에 대화를 가졌다.
벨과 함께 골든 배틀에 대한 유저들의 반응과 세력 판도 그리고 그 추이를 주제로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던 하룬은 저녁 시간이 되자 진수를 찾았다.
이전에 진수에게 건강을 위해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자동 영양 공급 장치가 없는 보급형 캡슐을 사용하는 진수는 건강과 생활 리듬을 위해 규칙적으로 접속한다고 했다.
“어서 와라.”
과연 저녁 식사를 위해 진수는 로그아웃한 상태였다.
“마침 식사하려던 참인데 같이 먹자.”
“네.”
진수가 준비한 저녁 요리는 잡탕 찌개였다. 비욘드를 시작한 이래 거의 처음으로 밥과 찌개를 구경한 하룬은 저급한 재료임에도 참 맛나게 식사할 수 있었다.
“그래, 레벨은 얼마나 올렸니?”
“형은요?”
“나? 흐흐, 놀라지 마라. 이 몸은 벌써 50이 넘었다. 뭐, 그래 봐야 랭커는 어림도 없지만 말이지.”
“와! 대단하네요.”
얼마 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겨우 34였는데 그 사이 16이나 올렸으니 대단했다. 아주 작심하고 게임에 올인했다는 증거였다.
“운 좋게 던전을 하나 발견했지. 각종 고스트가 출몰하는 던전이라 처음에는 꽤 고생했지만 덕분에 레벨이 급속도로 올랐어. 친구 놈이 신관이라 데미지가 제대로 들어가더라고. 벌써 열 번째 클리어에 도전하는 중이다.”
“부럽네요. 난 이제 겨우 40이 막 넘었는데.”
왠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레벨을 들은 진수는 심하게 놀랐다.
“어엉! 어떻게 그런 광렙을 한 거니? 너도 던전이라도 찾은 거야?”
하긴 생각을 못 하고 있었는데 전에 진수를 만났을 때는 막 전직한 상태였다.
그 짧은 사이 무려 30이나 레벨이 올라갔으니 그가 기함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건 아니고……. 지금 용병 하고 있다는 건 알죠? 대원들이 경험도 많고 실력이 막강해서 어지간한 몬스터들은 우습게 알거든요. 그들에게 열심히 배우고 실전을 치르다 보니 실력이 올라가네요. 그리고 몇 번은 친한 동료의 양해를 받아 설거지를 했어요.”
설거지라는 용어는 동료들의 공격으로 목숨이 간당간당한 몬스터에게 마지막 정타만 가해서 경험치의 반을 가져가는 것을 말한다.
“좋은 동료들을 만난 모양이구나. 아무튼 너도 착실하게 레벨 업을 하다니 다행이다.”
진수는 부러워하면서도 자신의 일처럼 좋아해 주었다.
“그래, 형은 골든 배틀 대상자는 정했어요?”
“아니, 아직. 애초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면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정보만 열심히 모으고 있어.”
“근데 길드들이 유니온별로 만들어지는 것 같던데요.”
“그러게. 다분히 그런 경향이 있네. 안 그래도 꼴 보기 싫은 인간들이 길드를 만들어서 현실처럼 행세하려는 모양인데 영 마음에 들지 않네.”
진수가 보이는 반응처럼 노블들과 연관되지 않은 유니온의 주민들 대다수는 아직 가입할 길드나 골든 배틀 대상을 정하지 못하고 관망하는 상태였다.
“비욘드에서도 그런 꼴을 보느니 차라리 게임을 접고 말지. 안 그러냐?”
“맞아요.”
하룬은 분기에 찬 진수의 말에 맞장구쳐 주었다.
“난 노블들과 상관없는 길드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친구들을 포함한 가까운 사람들끼리 작은 길드를 만들 생각이야. 레벨 70이 넘는 최상위 랭커라면 모를까 혼자서는 골든 배틀에 뛰어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아무래도 그렇겠죠.”
하룬은 진수와 함께 한동안 비욘드가 주가 되는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대다수의 유저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향후 플레이할 방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강한 힘을 얻겠다는 일념으로 걸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워낙 특이하게 비욘드를 플레이하는 하룬으로서는 보통 유저들의 사고와 행동 패턴 그리고 일상적인 정보가 궁금했다.
비욘드에 접속할 준비를 하던 하룬은 벨에게 뜻밖의 부탁을 받았다.
-오빠, 유전자 정보 검색 좀 하게 해 줘요.
“유전자 정보 검색? 그건 네가 벌써 알고 있는 거 아니야?”
하룬의 반문에 벨이 간절한 눈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렇긴 한데 좀 더 자세하게 조사해 보고 싶어서요. 유전이나 유전에 대한 정보, 지식수준은 종말 시대에 극도로 발달했지만 종말 전쟁과 암흑기를 거치면서 많이 유실되었거든요. 어머니가 남겨준 지식을 한창 공부하는 중인데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많아요. 오빠를 모델로 유전자에 담긴 정보와 내부 및 외부 발현 상태를 자세하게 관찰해야 할 것 같아요.
대단히 학구적인 모습에 약간은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동생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벨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그런데 어떻게 해야 되는데?”
-오빠는 그냥 편안하게 누워 있으면 돼요. 잠을 자든지 아니면 어떤 행동을 하든지 상관없어요.
“그런 거라면 내가 비욘드에 접속했을 때 하면 되는 거 아니니?”
-그것과는 조금 달라요. 접속 중에는 오빠의 전체 신경조직과 전자기적으로 연결되어서 게임을 지원하는 데 많은 부하가 걸리거든요. 더구나 싱크로율이 높은 오빠의 경우 실시간으로 체크하지 않으면 안 좋은 일이 발생할 가능성도 높고요.
한마디로 게임할 때는 그에게 눈을 뗄 수 없다는 말이었다.
“알았다. 그럼 이렇게 된 김에 한숨 잘 테니 알아서 깨워 줘.”
-네, 오빠.
하룬은 눈을 감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혼곤하게 잠에 빠져들었다.
벨이 지원하는 자동 영양 공급 장치로 보통 사람들보다 높은 신진대사가 일어나는 육체는 물론이고 강한 집중 상태를 습관적으로 오래 유지하려는 자세 때문에 머리도 무척 피곤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