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세 개의 퀘스트 (42/278)

《세 개의 퀘스트》

 내실 탁자에 자리를 잡은 가츠는 한참이나 하룬을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좋다! 무엇이든 해독할 수 있는 최상급 약을 만들어 줄 테니 대신 아이언 스네이크를 잡아 와라.”

 드디어 가츠의 입에서 퀘스트가 떨어졌다. 물론 아이언 스네이크를 잡아 오라는 조건으로 붙었지만 말이다.

 하룬은 눈앞에 뜬 퀘스트창을 자세하게 살폈다.

『아이언 스네이크를 잡아라

등급: B

후크란 산맥의 북서쪽 고산지대에 서식하는 희귀한 뱀 ‘아이언 스네이크’의 쓸개는 강력한 해독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인 해독약들이 국부적인 독에 효과가 있는 데 반해 아이언 스네이크의 쓸개가 포함된 해독약은 모든 독에 강력한 해독 효과를 발휘한다.

보상: 잡아 온 아이언 스네이크의 쓸개를 주재료로 한 최상급 해독약

     명성 200, S.P. 100

실패 시 약초꾼과 약초 상인들의 신뢰 감소』

 “알겠습니다.”

 하룬은 퀘스트를 수락하며 진심으로 감사했다.

 사실 재료가 있어도 스승이 제조하는 것을 곁에서 한 번 본 것에 불과한 그의 제약製藥 실력으로 해독약의 조제는 거의 불가능했다.

 ‘말이 씨가 됐구나.’

 하룬은 일전에 용병 아카데미에서 재수 4인방을 골탕 먹일 때 아이언 스네이크를 언급했던 것이 떠올라 입맛이 썼다.

 그나저나 퀘스트를 받은 것은 좋은데 하필 등급이 B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도대체 어떤 몬스터이기에 등급이 이렇게 높은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고맙기는. 아이언 스네이크를 잡는 게 얼마나 힘든데. 죽지 않고 놈을 잡아 오기만 한다면 내가 공짜로 최상급 해독약을 만들어 주마.”

 가츠 노인은 하룬을 향해 희한한 녀석 다 보겠다는 시선을 던졌다.

 ‘아이언 스네이크가 그렇게 무서운 놈인가?’

 아주 희귀한 몬스터라는 것은 헥터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놈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모르는 하룬이었다.

 “아이언 스네이크에 대한 정보를 좀 주십시오.”

 “그러지. 사실 그놈에 대해선 웬만한 약초꾼들도 잘 모르고 있으니까.”

 가츠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보를 알려 주었다.

 “아이언 스네이크는 본래 철광석이 대규모로 매장된 산중에 사는 희귀한 종이야. 수명이 대략 100년 정도인 그 종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먹이와 함께 철 성분이 함유된 돌가루를 주기적으로 섭취하지. 녀석들의 독은 한번 물면 오우거도 열 걸음을 걷지 못하고 죽을 정도로 강력해서 놈들의 영역에 들어서는 몬스터는 아예 없다네. 그렇게 10년이 넘게 철을 흡수한 녀석들의 껍질은 마치 강철처럼 단단해지고, 다 성장한 녀석들의 꼬리는 한번 휘두르는 것으로 오크 따위는 즉사시킬 정도로 강력해진다네.”

 가츠 노인의 설명대로라면 정말 두려운 몬스터였다. 아니, 맹수라고 해야 하나? 레벨이 100이 넘는 오우거도 한 방에 가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독을 가진 녀석이라니 정말 소름이 끼쳤다.

 “더구나 후크란 산맥에 서식하는 아이언 스네이크는 다른 곳에 사는 것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힘과 독성을 가지고 있으니 조심해야 할 거야.”

 가츠의 말을 듣던 하룬은 혹시 이 노인이 예전에 아이언 스네이크를 경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놈들이 사는 곳은 어디입니까?”

 “대충은 설명해 줄 수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나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모르네. 지도가 있긴 하지만 정확도는 많이 떨어질 거야.”

 하룬은 멀리 후크란의 높은 주봉우리를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할 일이 많은데…….’

 현실에서도 그렇고 이곳에서도 할 일이 많았지만 싸가지의 놀라운 능력을 이용하려면 해독약이 필수적이라 어쩔 수 없었다.

 하룬이 잠시 생각하는 사이 가츠 노인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이건 아주 오래 전에 내가 만들어 놓은 해독약이야. 아이언 스네이크의 독을 해독하기에는 어림없겠지만 그래도 그 독성을 어느 정도는 막아 줄 걸세. 가지고 가게.”

 “이런 귀한 걸…….”

 하룬은 해독약이 든 병을 쉽게 받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 받아 두게. 최상급은 아니지만 상급은 될 거야. 이 후크란의 아이언 스네이크가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잡은 아이언 스네이크의 쓸개를 원료로 만들었지만 가츠의 섬세한 제약 솜씨는 따를 자가 없네.”

 그를 끌고 온 노인이 주저하는 하룬을 채근해서 해독약을 받게 만들었다.

 “그럼 잘 쓰겠습니다. 반드시 아이언 스네이크를 잡아 오겠습니다.”

 “그래 주게. 가츠뿐 아니라 수십 명의 염원일세.”

 “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

 대답한 것은 복잡한 심경을 눈을 통해 그대로 드러낸 가츠였다.

 “내게는 여섯 명의 소꿉친구들이 있었다네. 우리는 마을에서 함께 자라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을 나누며 살았지. 이십 대가 되었을 때, 우리 모두는 후크란 일대에서는 누구나 엄지를 들어 줄 만큼 인근에서 가장 뛰어난 약초꾼이자 사냥꾼들이 되었네. 그 시절 우리는 산양처럼 튼튼하고 강인한 다리와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눈 그리고 수사슴처럼 혈기왕성하고 블랙 베어를 상대할 만큼 힘이 셌지.”

 가츠의 노안에 습기가 찼다.

 한창 좋았을 때를 회상하며 당연히 떠올라야 할 그리움이라든가 아니면 한때의 열정 같은 것 대신 지독한 회한과 진한 슬픔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젊은 혈기에 아이언 스네이크를 잡기로 했네. 당대 최고의 블루브레인 마탑이 우리의 소문을 듣고 의뢰를 해왔네. 보수는 무려 10만 골드. 잡기만 하면 우리 여섯 명은 한순간에 부자가 될 수 있었어. 더구나 마탑에서 5서클 마도사 두 명과 익스퍼트급 용병 열 명을 동행시켜 준다는 제의까지 했으니 당연히 그 의뢰를 받아들였지.”

 10만 골드라면 여섯 명이 나누어도 15,000골드가 넘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필립이 일전에 한 말로 한 가구당 여섯 식구의 한 달 생활비가 1~3골드인 이곳 물가를 생각하면 그 가치가 대충 짐작이 갔다.

 “온갖 희귀한 약초와 귀한 사냥감을 찾아 후크란 산맥 기슭을 내 집처럼 돌아다니던 우리도 위험한 후크란 산중으로 들어가는 것은 꺼렸지만 돈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네. 더구나 친구들 중 하나는 당시 아내가 희귀한 병에 걸렸고, 둘은 결혼을 앞두고 있었지.”

 “그 제의를 피할 수 없었겠군요.”

 하룬의 말에 슬픈 눈을 한 가츠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들의 말대로 후크란 산맥 안으로 들어서자 무시무시한 몬스터들과 맹수들이 우리를 공격해 왔네. 다행히 두 마법사와 익스퍼트급 용병 열 명은 전투 경험은 물론 실력도 뛰어나서 가까스로 위험을 피할 수 있었네. 변화무쌍한 산중의 날씨와 몬스터들로부터 쫓기던 중 아이언 스네이크가 살 만한 지형을 가진 산을 찾아낸 것은 그곳을 찾아 헤맨 지 석 달이 훌쩍 지난 후였네. 당시 우리는 세 명의 희생자를 낸 상황이었고, 식량도 거의 없었네.”

 아마도 절망적인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룬이 경험한 후크란은 그야말로 위험한 것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 산은 철광석이 표층 밖으로 노출된 노천 광산이었는데 중간에 금이나 은으로 보이는 광맥까지 가지고 있었네. 보석 광산의 가능성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 생각은 못 했네. 아주 오래 전부터 이 근방에 전설처럼 알려진 아이언 스네이크의 대규모 서식지가 틀림없었네. 우리는 기뻐하며 산으로 올라갔지.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언 스네이크를 잡는 것을 별로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지. 우리에게는 마도사가 두 명에 익스퍼트 상급과 중급의 1급 용병들이 일곱이나 남아 있었으니 말이야.”

 저절로 침이 넘어갔다. 흥미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하룬의 태도가 기꺼운지 가츠 노인은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언 스네이크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네. 밤이고 낮이고 그 넓은 지역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지만 녀석의 종적은 그야말로 오리무중이었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지칠 대로 지친 우리가 경계도 없이 곤하게 잠이 빠졌을 때 아이언 스네이크의 습격을 받았네.”

 하룬은 다시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제대로 된 아이언 스네이크의 위력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밤이긴 하지만 달빛이 있어 제대로 볼 수 있었네. 그 무시무시한 놈의 위용을.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그 길이가 10미터가 훨씬 넘고 그 굵기는 장정 둘이 팔을 뻗어야 할 만큼 대단한 놈이었어. 아마 옆구리에 날개가 돋아 있었다면 전설로 전해지는 드래곤이라고 했어도 믿었을 거야. 난 아직도 놈의 그 노란 눈을 떠올리면 소름이 쫙 끼친다네.”

 가츠는 정말로 몸을 파르르 떨었다. 다른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놈은 화염 계열의 마법을 몸으로 받으며 마도사를 한입에 집어삼켰어. 나중에 들으니 그 마법사가 창졸간에 쓴 것은 3서클의 화염 마법이었다는데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았지. 정말 무시무시한 놈이 아닌가? 결국 지옥이 펼쳐졌네. 놈의 꼬리에 살짝 빗맞았던 용병은 허리가 부러졌고, 놈의 독액을 얼굴에 덮어쓴 용병은 머리부터 녹아내렸지. 우린 마법사들과 용병들이 놈을 상대하는 사이에 정신없이 도망쳤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놈이라는 사실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으니 말이야. 그 산에서 다 내려왔을 때 우리는 놈이 마법사와 용병들을 모두 해치우고 내지르는 소름 끼치는 피어를 들을 수 있었네. 짧은 사이에 그 엄청난 전력을 해치운 거야.”

 가츠 노인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 기억이 견디기 힘든 공포를 주는 듯했다.

 “밤새 숨어 덜덜 떨던 우리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겨우 살아남은 용병 세 명과 함께 후크란 산맥을 빠져나왔네. 그 셋은 싸움이 벌어지자마자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도망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과 힘을 합쳐 죽을 고생을 하고 나서야 겨우 센 강을 넘을 수 있었네.”

 “그래도 다행이네요.”

 하룬의 말에 노인은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눈에 담았다.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지. 그 자리에서 놈의 먹이가 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우리에게 다른 불행이 찾아왔다는 것을 그 후 1년이 넘어서야 겨우 알았네. 미약하지만 아이언 스네이크의 독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말이야. 녀석의 독이 얼마나 지독한지 우리는 물론 자손들까지 중독이 이어졌다네. 우리 여섯은 물론 그 자손들까지 아이언 스네이크의 독 때문에 몸의 일부 근육이 녹아 버리는 병을 가지게 된 거지.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하고 살기는 힘들어진 거지.”

 아이언 스네이크의 독이 조직 세포를 서서히 죽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나마 이렇게 가게라도 해서 약초를 대고 있지만 더 이상 독이 퍼지지 않게 하는 약재들은 워낙 희귀한 것들이라 약재를 대는 것이 쉽지 않네.”

 노인의 긴말이 끝나자 하룬은 이 일이 얼마나 흉험하고 힘든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퀘스트였다.

 “난 그 후로 미친 사람처럼 약초에 파고들었네. 약초에 밝다는 사람을 찾아 제국의 곳곳을 찾아다녔네. 다행히 난 왼팔 부위를 제외하면 운신이 가능했으니까. 다리 근육 일부가 녹아 없어지는 병 때문에 태어나서 한 번도 제대로 걸어 본 적이 없고 시시각각 찾아오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무 죄도 없는 내 딸과 손녀를 두고 볼 수 없었지. 그렇게 약초를 연구하며 희귀한 약초를 찾아낼 수 있었고, 그것들로 많은 돈을 벌기도 했던 나는 그 돈으로 마법사며 사제들까지 불렀지만 아무도 우리의 병을 치료할 수 없었네.”

 마법사의 치료 마법과 신성 마법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하다니 정말 두려운 독이 아닐 수 없었다. 극소량을 흡입한 것만으로 중독되고, 그것이 유전까지 된다니 정말 소름이 끼쳤다.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지. 독을 가진 녀석들은 그 자신이나 주변에 독에 상응하는 해독 물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그동안의 내 연구로는 아이언 스네이크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것은 놈의 쓸개일 걸세. 문헌을 보거나 이야기를 들어도 아이언 스네이크의 쓸개를 주재료로 하는 해독약은 모든 독을 해독할 수 있으니 말이야. 놈의 독도 마찬가지네. 다른 독을 중화시켜 버릴 수 있는 효과를 가진 것으로 보이네.”

 말을 마친 가츠는 선반에서 갖가지 크기의 빈 유리병을 가죽 주머니 안에 넣어 건네주었다.

 “놈을 잡는 것은 어렵겠지만 독을 채집하는 것은 가능할지도 몰라. 행여 놈이 독을 주입한 먹잇감을 찾는다면 그 부위를 통째로 담아 오게. 그 정도로도 효과가 있을 테니까. 물론 그런 먹잇감을 놓고 딴짓을 하도록 유도는 해야겠지.”

 하룬은 가죽 주머니를 받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츠가 말하는 바를 이해한 것이다.

 “놈을 잡아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놈의 독이 주입된 물건만 가져와도 내 부탁은 어느 정도 완수한 것으로 간주하겠네. 쓸개라면 더 좋겠지만 독이 주입된 물건으로도 상당한 효능을 가진 해독약을 만들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다녀올 동안 몸조심하세요.”

 하룬은 짠한 마음으로 두 노인을 보며 가게를 나섰다. 마치 겨울을 맞은 나뭇가지처럼 가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왼팔을 가진 가츠가 오른손을 흔드는 것을 보자 마음이 무거웠다.

 하룬은 가츠 노인이 소개해 준 가죽 공방으로 갔다.

 규모가 꽤 큰 공방은 가죽 제품을 진열한 가게와 옆에 딸린 두 개의 작업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작업장은 통풍 문제로 벽을 만들지 않아 안이 훤히 보였는데, 가죽을 무두질하는 사람들의 땀 냄새와 가죽 특유의 지독한 냄새가 어우러진 작업장을 지날 때는 절로 코를 잡게 만들 정도였다.

 “어서 오세요.”

 상점에 들어서자 한 중년 부인이 그를 맞았다. 하드 레더나 레더 부츠 등 가죽으로 만든 생활 용품과 방어구로 나뉘어 전시된 실내에는 몇 사람이 물건을 구경하고 있었다.

 “가츠 노인의 소개로 왔습니다.” 

 “어머, 그래요. 일단 여기 앉으세요. 아버님을 불러 드릴게요.”

 중년 부인은 가츠라는 이름에 반색하며 작업실로 향하는 작은 문을 나갔다.

 조금 후 돌아온 그녀의 뒤에는 날카로운 인상의 노인이 따르고 있었는데, 작업 중에 왔는지 지독한 가죽 냄새와 약 냄새가 풍겼다.

 “가츠의 소개로 왔다고?”

 “네, 하룬이라고 합니다. 용병입니다.”

 용병이라는 말에 하룬을 아래위로 잠시 훑어보던 눈이 방어구를 향했다.

 “좋은 방어구인데 너무 험하게 썼군. 완전히 망가졌어. 쯔쯧.”

 못마땅한 눈길로 그에게 혀를 차는 노인을 본 하룬은 직업의식이 투철한 장인의 성격이 싫지 않았다. 자신의 일에 자긍심을 가진 이는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하룬의 생각이었다.

 덕분에 초면에 노골적인 책망을 받았음에도 화를 내거나 기분 나쁜 기색 대신 미안한 얼굴을 하는 하룬이었다.

 “위험한 놈들을 많이 상대해서 그렇습니다. 더구나 이 방어구가 상하는 대신 목숨을 많이 구했으니 이 녀석에게 신세를 많이 지었지요.”

 “호오, 그랬나.”

 까탈스럽고 심술궂기까지 한 노인의 얼굴에 작은 미소 한 조각이 흐른다. 그래서인지 이어지는 목소리가 약간은 부드러워졌다.

 “그래, 가츠와는 어떤 인연이 있는 사이인가?”

 “이번에 가츠 노인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그 말에 노인의 눈에 기이한 광채가 일렁였다가 사라졌다.

 “여긴 무슨 용건으로 왔나? 방어구 수리? 아니면 방어구 구입? 미리 말하지만 그따위 쭈그리와의 인연을 들먹여 값을 흥정할 생각은 버리라고.”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가츠와는 상당히 친한 듯했다.

 “하하하, 아닙니다. 가죽을 좀 팔려고 왔습니다.”

 “가죽이라고? 어디? 아, 그거 마법 배낭이었나?”

 “네, 제법 좋은 가죽이라 제대로 볼 줄 아는 장인을 소개시켜 달라고 했더니 이곳을 알려 주더군요.”

 “크험! 가죽이라면 이 타우스트뿐 아니라 인근에서 우리 가게를 따라올 곳이 없지. 아암. 일단 작업실로 가세.”

 노인은 좋은 가죽이라는 말에 한결 펴진 얼굴로 하룬을 작업실로 이끌었다.

 짝! 짝!

 노인이 손뼉을 치자 세 사람이 그를 향해 모였다. 그들만의 신호인 듯 그 셋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자신의 일에 열중했다.

 “내 아들들이네. 원래 다섯인데 두 놈은 분가해서 다른 영지에 가게를 냈지.”

 세 사내는 중년 정도로 보였는데 짙은 수염과 함께 모두 장대한 체구를 가져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돌풍 용병대를 맡고 있는 하룬입니다.”

 하룬은 노인의 세 아들과 인사를 나눈 후, 그들의 재촉을 받으며 마법 배낭에서 그동안 시린느가 공들여 도축하고 잘 말린 가죽들을 꺼냈다.

 사람 키 높이로 묶은 다섯 짐의 가죽들을 하나씩 푸는 것을 주시하는 그들의 눈이 묘한 열기로 번들거렸다.

 “아! 아버님, 이 오크 가죽들은 상처가 거의 없군요.”

 “어엇! 이것 봐. 이거 럼프 오크 가죽 맞죠, 아버지?”

 그중 한 사내가 럼프 오크의 가죽을 용케 알아보았다.

 “두께 좀 봐.”

 “그렇구나. 럼프 오크의 가죽이 맞다. 이걸 어떻게 잡은 거지? 이 악마 같은 놈들을 잡으려면 후크란 산맥 안까지 들어가야 하는데.”

 노인은 이젠 완전히 놀란 얼굴로 하룬을 돌아보았다.

 “세상에! 형들, 여기 좀 봐. 악마 오크 가죽이 스무 장이 넘어. 거기에 블랙 베어 가죽과 알파인 여우 가죽 그리고 그리폰 가죽까지 있어.”

 세 아들은 흔히 볼 수 없는 귀한 가죽에 온통 정신이 팔렸지만 노인의 경악한 시선은 하룬에게 꽂혀 있었다.

 “후크란에서 오는 길입니다 대원들은 아직 거기에 있고요. 가죽을 팔아 보급품을 사가려고 혼자 나왔습니다.”

 “저, 정말이군. 후크란 산맥에 들어가 이렇게 무시무시한 놈들을 사냥하는 용병이 있을 줄은 내 평생에 꿈도 꾸어 보지 않았네. 가츠가 이번엔 정말 제대로 된 친구를 소개했군. 놈이 날 도와줄 때가 다 있고 참 희한한 일이야.”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아니.”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 악마 같은 오크들은 기사들까지 상대하는 무서운 놈들이야. 이 럼프 오크 가죽은 내가 젊었을 때, 후크란에 들어갔다가 오지가 당하고 살아 나온 후작가의 기사들이 몇 장 가져온 것을 제외하면 처음 보는 걸세.”

 하룬은 후크란 산맥과 그곳에 사는 몬스터들에게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가 생각보다 얼마나 큰지 대충은 알 수 있었다.

 “우리에게 이 가죽들을 가져다줘서 정말 고맙네. 제대로 가격을 쳐주지. 그 쭈그리가 웬일로 맘에 드는 짓을 하는군.”

 노인은 럼프 오크의 가죽을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양 사랑스럽게 쓰다듬으며 활짝 웃었다. 하룬은 노인에게서 좋은 재료를 본 장인의 기쁨을 여실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이름도 말하지 않았군. 난 타림이라고 하네.”

 “네.”

 뒤늦게 이름을 말해 주는 노인의 얼굴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단단하게 굳어 변화가 거의 없었지만 노안은 이글거리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인의 세 아들들은 연방 감탄성을 토해 내며 가죽을 만지고 느끼고 냄새까지 맡으며 기쁨을 표시했다.

 “저, 그 럼프 오크의 가죽 말인데요.”

 “응, 뭔가? 저것들로 방어구라도 만들어 줄까?”

 타림은 인상과 달리 하룬의 속내를 금방 짚어냈다.

 “네, 되도록 세트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정도 재료라면 열 사람 분은 나오겠는걸. 워낙 도축을 잘한 덕분에 버릴 곳이 하나도 없어. 자네, 용병하지 말고 차라리 사냥꾼을 하게. 금방 부자 될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가죽을 도축한 이는 따로 있습니다.”

 하룬은 이제 완연히 호감을 드러내는 타림 노인에게 싱긋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방어구가 일곱 벌은 필요합니다. 나머지 가죽들은 그 공임으로 했으면 좋겠는데 가능할는지요? 부족하면 더 내겠습니다.”

 “허허! 이 친구 가죽 값을 모르는군. 럼프 오크 가죽은 장당 최하 200골드가 넘네. 이 정도 가죽은 작자만 잘 만나면 300골드까지 받을 수 있어.”

 “이게 그렇게 귀한 겁니까?”

 하룬은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게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일반 오크 가죽이 상품 기준으로 1골드 50실버 정도 한다는 것은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또 데브론과 상행을 같이 하면서 잡은 오크 워리어의 가죽이 100골드 정도 나간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이거 보게.”

 타림이 가죽의 단면을 가까이에서 보여 주었다. 이제까지 가죽을 보면서도 제대로 관찰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처음 보는 단면이었다.

 “몇 겹인지 눈에 보이나?”

 자세히 보니 털이 나 있는 외피를 기준으로 살이나 근육과 이어진 내피 사이에 다섯 개의 선이 겹쳐 있었다.

 “이놈의 피부는 오우거나 와이번하고 똑같이 일곱 겹으로 되어 있다네. 일곱 겹의 피부가 똑같이 배열된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성분과 배열 형태를 가진 덕에 럼프 오크의 가죽은 마나를 주입한 검이 아니면 제대로 베기도 힘들 정도로 질기고 단단하다네. 다섯 겹의 피부를 가진 오크 워리어의 가죽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되지.”

 하룬은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한 점이 떠올랐다.

 “그렇군요. 그런데 우리 대원은 이놈 가죽을 잘만 벗기던데요?”

 “벗기는 건 좀 다르지. 더구나 날카로운 도축용 최상급 단검이 있거나 도축 스킬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 있으면 죽은 놈들 가죽을 벗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네.”

 “그렇군요.”

 하룬은 아직도 약간의 의문은 남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가죽으로 방어구 세트를 만드는 공임은 세트당 무려 100골드야. 하드 레더 중에서는 가장 손이 많이 가고 공정이 복잡한 데다 특수한 도구를 사용해야 하기에 그 정도는 받아야지. 내 언뜻 보아도 자네에게 방어구 일곱 세트를 만들어주는 공임을 제하고도 5천 골드는 내주어야 될 것 같네. 블랙 베어 가죽도 그렇지만 알파인 여우의 가죽도 무척 희귀하거든.”

 히룬은 뜻밖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으로 시린느의 존재가 반갑게 느껴졌다. 그녀의 도축 솜씨가 아니었다면, 아니 철저한 가죽 관리가 없었더라면 이런 횡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알아서 계산해 주십시오. 전 타림 님만 믿겠습니다.”

 “하하! 쫀쫀하지 않아서 좋군. 행색이 멀쩡한 기사 놈들도 어떡하든 가격을 후려치려고 난리를 치는 게 요즘 세태인데.”

 쫀쫀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가격을 전혀 모르니 믿을 수밖에.

 하지만 노인과 세 아들은 그런 하룬의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런데 혹시 이놈들의 뿔은 어떻게 했습니까?”

 묻는 사람은 타림의 세 아들 중 막내로 보이는 자였다.

 “우리 대원 중 마법사가 별 필요 없다고 해서 그냥 버렸는데요.”

 “하아! 아깝다. 그게 있으면 마법 저항력을 높일 수 있는데.”

 “그래? 자세히 말해 보아라.”

 놀란 하룬 대신 타림이 물었다. 노인 역시 그런 사실은 모르고 있었나 보다. 그러자 사내는 하룬과 다른 두 형제의 궁금해하는 얼굴을 보며 가슴을 내밀며 대답했다.

 “10년 전까지 군역으로 황도의 황실 대장간에서 일할 때 우연히 알게 된 것인데, 럼프처럼 생체 조직과 마나석이 결합한 것들을 재료로 방어구를 만들면 마법 방어력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럼프를 갈아서 만든 가루와 미스릴 그리고 몇 가지를 더 섞어 조제한 물질로 방어구에 마법진을 새기면 물리 방어력은 물론 3서클 정도의 마법은 50~80%까지 방어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비법은 제가 알고 있고, 마침 데카로스 아저씨까지 와 있으니 마법진을 새기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예요. 더구나 미스릴 가루라면 밀프란 대장간에 충분히 있잖아요.”

 “호오. 그런 비법이 있었구나. 그럼 우리가 만든 하드 레더의 방어력이 판금 갑옷 못지않게 올라가겠구나.”

 타림이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네, 아버지. 강철이나 판금보다야 가죽에 마법진을 그리는 것이 더 손쉬워 명품이 될 것이고, 가격도 몇 배나 더 받을 수 있으니 수익률은 올라갈 겁니다.”

 네 부자는 기쁜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수익 모델이 제시된 것이다. 본래 가죽을 다루는 것은 워낙 힘든 일이지만 수요가 많지 않아 큰 수익이 나지 않았다.

 기사나 병사들은 사슬 갑옷이나 판금 갑옷, 그것도 아니면 철편 갑옷을 선호했기에 이방인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하드 레더의 인기나 수요가 무척 적었다. 그래서 가죽 제품들은 주로 제국 북쪽 지방의 겉옷이나 마구와 같은 생활 용품에 한정되어 그 수익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물리 방어력은 물론 마법 방어력까지 갖춘 하드 레더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럼프 오크 가죽의 물리 방어력은 강철 아머보다 약간 떨어지는 정도이니 그 무게나 착용감 그리고 편리성을 생각하면 강철 아머에 비할 바가 아니다. 거기에 마법 방어력까지 갖춘다면 그야말로 부르는 것이 값일 것이다.

 “문제는 럼프로군.”

 있다면 당장 내놓고 싶은데 럼프는 이미 싸가지가 전직하느라 다 먹어 치운 상태이니 그림의 떡이다.

 ‘아니지! 잊고 있었어. 럼프가 있어.’

 럼프 오크를 잡은 것이 떠오른 것이다. 하룬은 황급히 인벤토리를 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없었다. 아마 싸가지의 아공간에 넣은 모양이다.

 다 보는 앞에서 아공간을 여는 것이 어떨지 몰라 고민하던 하룬의 눈에 타림 부자가 서로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혹시?’

 하룬의 예상이 맞았다.

 “자네 용병이라고 했지? 럼프 오크 스무 마리나 잡을 정도로 실력 있는 용병대이니 몬스터를 상대하는 데는 여느 기사의 실력을 능가하겠지? 의뢰 하나 하지. 럼프 오크의 뿔을 좀 구해 주게.”

 그 순간 그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떴다.

 『럼프 오크의 럼프를 구해 오자

등급: D+

타림 부자는 새로운 가죽 방어구를 구상했다. 물리 방어력과 마법 방어력을 동시에 갖춘 최고의 하드 레더를 만들기 위해서는 생체 마나석인 럼프가 필요하다. 새로운 종류의 방어구를 만들 그들을 위해 럼프를 구해 와야 한다.

수량: 20개

보상: 럼프 오크 방어구 세트 7벌 무상 제공

     가죽 여행 용품 7세트

     명성 150

실패 시 호감도 저하, 가죽의 판매 가격 하락』

 하룬은 즉시 퀘스트를 받아들였다. 어차피 자신이나 대원들의 방어력을 올리기 위해 그들이 제안하지 않았어도 갈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더구나 이미 몇 개는 있으니 많이 잡을 필요도 없었다.

 타림은 기뻐하는 얼굴로 뒷문으로 나가더니 묵직한 가죽 주머니 하나를 가지고 와서 하룬에게 건넸다.

 “자네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럼프를 구해 올 거라고 믿기에 방어구 가격을 뺀 가죽 값이네. 5천 골드라네. 있으면 더 주고 싶지만 우리가 가진 돈은 그게 다야.”

 “아니, 이렇게 다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네. 물건은 제값을 주고 구입해야 제대로 된 물건으로 탄생하는 걸세. 다른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물건의 가치는 거래하는 사람들 간의 신뢰와 믿음으로 만들어지는 거라네. 희귀한 재료를 가지게 된 우리로서는 더 많이 쳐주고 싶지만 우리 사정이 이러니 나중에 제대로 된 방어구를 만들어 주겠네.”

 “고맙습니다.”

 하룬은 진심으로 타림 노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평생 한길만을 걸어온 사람답지 않게 인생을 관통하는 어떤 흐름을 아는 것 같아 존경스러웠다. 까탈스럽고 깐깐한 첫인상과는 너무나 다른 타림이었다.

 “잘 다녀오게. 비록 잘 손질되어 있긴 하지만 우리 집안의 비전으로 다시 손을 보자면 며칠이 걸릴 걸세. 오랜만에 방문한 친우의 동생이 마침 인챈트 마법이 가능한 마법사이니 럼프만 구해 오면 제대로 된 명품이 탄생할 거야.”

 “알겠습니다. 되도록 빨리 오겠습니다.”

 하룬은 네 부자의 배웅을 받으며 작업실을 나왔다.

 ‘이제 세류가 무슨 의뢰를 할지나 들어 볼까?’

 가벼운 그의 걸음이 향하는 곳은 ‘마몽의 주점’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마몽의 주점은 유저들로 가득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종업원들과 주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저라서 그동안 NPC들과 늘 같이 생활해 왔던 하룬은 이상한 기분까지 들었다.

 “어서 오세요.”

 그가 빈자리를 찾고 있을 때 세류가 2층에서 내려와 그를 맞았다.

 용건이 무엇인지 대충은 짐작하고 있지만 현실에서 노블이며 비욘드에서는 길드 마스터가 이렇게 직접 맞아 주니 기분이 괜찮았다.

 “이곳은 혼잡하니 옆에 붙은 여관으로 가지요.”

 세류는 하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후원으로 향했다. 사실 복잡한 것보다야 조용한 곳이 나은지라 하룬도 군말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하룬 대장, 또 보니 반갑네요.”

 밝게 인사하는 비류의 모습이 보였고, 묘한 미소를 지으며 엉거주춤하게 그를 맞는 사내가 눈에 들어올 뿐 제법 넓은 별채의 테이블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앉으세요.”

 “고맙소.”

 테이블에는 음식이 잔뜩 차려져 있었다. 자신이 이 시간 정도에 도착하리라고 예상한 듯했다.

 “일단 식사하고 나서 이야기하지요. 음식을 앞에 놓고 있으려니 저도 배가 고프네요.”

 “그럽시다. 원래 용병은 먹는 것을 절대 사양하는 법이 없소.”

 하룬은 점심을 간단하게 해결한 터라 그렇지 않아도 시장했기에 주저 없이 빵을 집어 들었다. 세 사람도 역시 서로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식사를 시작했다.

 “음식을 참 빨리 드시네요.”

 하룬이 식사하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비류가 한마디 했다.

 “원래 용병의 식사는 이렇소. 기회가 되었을 때 빨리 많이 먹어 두는 거지요. 기사들은 언제 어느 때나 힘을 쓸 수 있게 천천히 식사하는 것이 법도이지만 우린 일할 때는 기사들처럼 먹지만 일단 의뢰가 끝나면 이렇게 먹는다오.”

 “그렇군요. 좋은 걸 알았네요.”

 오늘따라 작정하고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비류였다.

 이미 무슨 용건인지 짐작한 하룬이라 마음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들어 보고 아니면 거절하면 되는데 무슨 문제가 있으랴.

 세 사람은 유저인 관계로 식사를 하는 행위가 공복도를 채우는 것에 불과했기에 깨작거리다가 하룬이 식사를 마치자 일제히 포크를 내려놓았다.

 작은 종을 흔들자 종업원이 와서 음식을 치우고 차를 내왔다.

 하룬은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만 잡고 있는 세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무슨 일인지 들어나 봅시다. 참고로 후크란과 관계된 일이라면 사양하오. 이번에도 정말 고생을 많이 했거든.”

 이미 눈치를 채고 먼저 말을 꺼냈지만 생각 외로 세류의 얼굴은 별 변화가 없었다.

 “그랬군요. 어쨌든 의뢰는 성공한 건가요?”

 “그렇소. 전에 없이 몬스터들이 난리를 치는 바람에 무척 힘겨웠지만 간신히 의뢰는 성공적으로 완수했소.”

 하룬의 말에 세류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용건을 꺼냈다.

 “우리가 할 의뢰는 짐작하신 대로예요. 워낙 고생해서 의뢰를 거부하는 것은 알겠지만 우리 처지가 너무 곤궁해서 하룬 대장이 아니면 도와줄 사람이 없어요.”

 “거절하겠소. 내가 먹은 음식 값은 내가 내고 나가지.”

 하룬은 금방이라도 일어날 태세를 취했다.

 “거참, 융통성이 하나도 없으시네. 원래 흥정이란 밀고 당기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하면 우리가 더 센 패를 꺼낼 수가 없지 않습니까?”

 비류 옆에 있던 사내가 조금은 이죽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누구요, 당신은?”

 “뫼비우스라고 합니다. 이 두 분이 모종의 일을 마무리할 때까지 도움을 주기로 한 사람이지요.”

 이름에서부터 간단치 않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유저였다.

 ‘뫼비우스라면 어느 곳에서 시작해도 그 면이 이어진다는 곡면의 띠였던가?’

 “일전에 만났을 때 얘기했지만 방금 전에도 분명히 후크란과 연관되는 의뢰는 받지 않겠다고 말했소. 댁이 말하는 흥정이란 것은 양 당사자가 모두 어떤 일을 하리라고 의견 일치를 보았을 때나 사용하는 용어라는 건 알고 있소?”

 “그야 당연히 알고 있지요.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레이디들이 애타게 원하는데 들어 보지도 않는다면 사내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요?”

 묘하게 신경을 거스르는 말이었다.

 “지금까지는 운과 실력이 통해 후크란에서 살아남았지만 언제까지 그런 행운이 따를 리 만무한 법이지. 아름다운 레이디라. 뭐, 예쁘긴 하군. 내 눈은 정상이니까. 하지만 난 레이디를 존중하는 신사나 기사가 아니라 생명의 소중함을 잘 아는 용병이오. 그래야만 사내가 될 수 있다고 세상 모든 남자가 말한다면 당장이라도 아랫도리를 떼어 낼 용의가 있소.”

 “크흠.”

 거칠지만 단호한 하룬의 말은 반론의 여지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다. 뫼비우스는 공연히 끼어들었다 싶었는지 헛기침을 하며 등을 다시 의자에 붙였다.

 세류는 공연히 하룬의 성미만 건드린 것 같아 뫼비우스에게 매서운 눈길을 한번 보내고는 다시 말을 꺼냈다.

 “1만 골드를 드리겠어요.”

 하룬은 순간 말을 잊었다.

 지금쯤 환시세가 골드당 3만 원 정도까지 내려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3억이라는 거금을 부른 것이다. 아까는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가죽을 판 돈도 1억 5천만 원이 넘는다는 이야기였다.

 현실의 가치로는 너무 큰돈이라 생각만으로도 인플레가 심해 얼른 그 가치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찾는 장소를 표시한 지도에요.”

 곱게 접은 양피지 가죽은 한눈에도 유구한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하룬은 잠시 생각하다가 세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댁들이 찾는 것이 후크란 산맥 서쪽에 있다는 보석 광산이오?”

 “어, 그걸 어떻게?”

 세류는 물론 비류와 뫼비우스도 무척이나 놀란 눈치였다.

 “이 지역 토박이라면 누구나 아는 전설이오.”

 “그, 그럴 리가? 뫼비우스! 어떻게 된 거예요?”

 세류는 뫼비우스를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보며 해명을 요구했다.

 “그, 그건…….”

 순간 뫼비우스의 얼굴에 진땀이 흘렀다.

 “당신이 이 정보를 구해 왔으니 해명을 해 봐요?”

 “나, 난 정말 몰랐습니다. 그저 정보 길드의 말만 믿었을 뿐입니다. 설마 그들이 이런 정보를 우리뿐 아니라 다른 길드에게도 넘겼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고, 이런 정보가 NPC들에게는 잘 알려졌다는 것도 미처 몰랐습니다. 미안합니다, 길드장! 하지만 지도는 유일한 겁니다. 무려 5만 골드짜리 특급 정보였단 말입니다. 그것까지 날 속였다면 정보 길드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할 수 없을 겁니다.”

 사색이 되어 변명하는 뫼비우스는 급기야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제법 큰 가죽 주머니였다.

 “이건 내가 실수한 대가로 도로 드리는 겁니다. 이제까지 내가 모은 전 재산인 3만 골드에 해당하는 보석과 마나석입니다. 나 뫼비우스, 그렇게 이상한 사기꾼이 아닙니다.”

 세류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주머니를 열어 안을 확인하더니 얼굴을 조금 풀었다.

 “좋아요. 이렇게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거짓말은 아닌 것 같군요. 하지만 애초에 당신이 장담한 대로 아무도 모를 거라는 정보가 실은 흔하디흔한 정보라는 사실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거예요. 이것은 그 실수의 대가로 받지요. 당신은 정보 길드를 상대로 이 돈을 받아 내면 될 테니까요. 어차피 그들과 거래한 것은 당신이었으니까요.”

 “그, 그렇지요. 당연히 받아 낼 겁니다. 내 재산과 신뢰를 금 가게 만들었으니 반드시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할 겁니다.”

 세류의 기분이 풀리는 징후를 포착하자 창백했던 뫼비우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머! 뫼비우스 씨, 너무 멋져요. 당당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다 내놓고 사과하는 그 솔직한 모습에 반했어요.”

 비류는 정말로 뫼비우스에게 반했는지 발갛게 변한 얼굴로 금방 안길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순식간에 장내의 분위기는 변화를 거듭했다. 물론 그 자리에서 하룬은 방관자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1만 골드가 당장 수락하고 싶을 정도로 큰돈이긴 하지만 후크란 산맥은 지도가 있다고 해서 찾아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오. 후크란을 조금이라도 경험했다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요.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하오. 그 정도라면 시간을 좀 더 가지고 다른 사람을 구해 보시오. 저녁 잘 먹었소.”

 하룬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류나 비류도 뫼비우스의 일로 심경이 복잡한 듯 더 이상은 그를 잡지 않았다.

 “어쨌든 생각을 좀 더 해 주시길 바라요. 언제 후크란으로 다시 출발하시나요?”

 “구할 것이 많이 이삼일은 소요될 것 같소.”

 “그럼 이 별채에 마침 방을 구해 놓았으니 거기서 쉬세요. 그것은 부담 가지지 않아도 돼요. 우리 길드원들 때문에 단체로 잡아 놓은 방이니까요.”

 하룬은 마음이 불편해서 거절하려고 했다.

 “그래요. 어차피 이 작은 성에 유저, 아니 이방인들이 한꺼번에 몇천 명이나 모여드는 바람에 어느 곳에서도 방을 잡을 수 없을 겁니다.”

 뫼비우스의 말에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붙잡으려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빨리 쉬고 싶었다. 나무 사이를 뛰어 산을 내려오는 것은 강한 집중력이 요구되었기에 생각보다 피로감이 심했던 것이다.

 하룬은 세류의 배려로 한 길드원의 안내를 받아 뒤쪽에 있는 조용한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일단 오랜만에 벨의 얼굴이나 보고 오자.’

 너무 오래 로그아웃하지 않은지라 밖의 상황이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벨이 말한 약재가 다 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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