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세류 자매》
“아무래도 우리가 뒤통수를 맞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정보가 샐 리 없습니다.”
들어오자마자 급하게 맥주 한 잔을 단숨에 마신 뫼비우스의 입에서 나온 말에 세류와 비류는 경악했다.
“정말이에요?”
“틀림없습니다.”
뫼비우스가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자 비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누군가를 떠올리며 독기를 드러냈다.
뿌드득!
“정보 길드 놈들,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겠어.”
이를 가는 비류와 달리 세류는 허탈한 얼굴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이미 어느 정도는 의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최근 타우스트 성의 상황을 익히 아는 그녀는 이미 이런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뫼비우스가 가지고 온 정보는 그걸 확인한 것에 불과했다.
그녀는 정보가 새어나간 것을 인정하고는 뫼비우스에게 물었다.
“얼마나 많이 이곳에 들어왔나요?”
“돌아다니며 파악한 바로는 직접 기사단을 파견한 곳은 모두 세 곳입니다. 이곳 인근의 요크 공작가, 세헤라스 후작가, 말론 후작가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유저들은요?”
“모두 네 개의 거대 길드들이 강력한 선발대를 파견했습니다.”
뫼비우스는 선선히 자신이 파악한 정보를 말해 주었다.
“쳇! 이건 완전히 타우스트 성이 유저들의 놀이터로 변해버렸네. 잘못하다간 죽 쒀서 개 주는 꼴 될 수도 있겠어.”
비류가 속이 상해 빈정거렸다. 세류는 동생의 말에 속이 뒤틀렸지만 고의가 없다는 것을 아는지라 화제를 돌렸다.
“그들도 길잡이를 원하는 거겠죠?”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지도가 있다면 길잡이를 구하겠지만 그저 광산에 대한 정보만 가지고 있다면 지도에 대한 정보나 지도를 가진 세력을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겠지요.”
“부탁한 대로 후크란에 대해 잘 아는 사냥꾼이나 용병 혹은 약초꾼은 아직도 못 찾았나요?”
“네, 아쉽게도요. 뒷골목까지 수소문해 봤지만 전혀 없었습니다.”
뫼비우스가 미안한 얼굴로 실망스러운 소식을 전했다.
사실 이곳은 약초 거래의 중심지라서 용병들의 출입이 잦은 곳이긴 하지만 후크란 산맥과 지척이라서 수시로 출몰하는 몬스터들과 맹수들 그리고 험악한 산악 지형으로 둘러싸여서 사람들이 살기에 좋은 곳이 아니었다.
상주인구가 별로 없어서 당연히 이곳 출신 용병들의 숫자도 적었다. 이곳에 등록된 용병들의 숫자는 채 오십도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2급인 길드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급 이하의 용병밖에는 없었다.
“노련한 사냥꾼들이나 약초꾼들이라고 해도 후크란 산맥 중심부는 누구도 들어가 본 적이 없다고 하고 악마의 땅이라고 두려워하니 길잡이를 구하기는 힘들 겁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세류는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뫼비우스는 무척 의아한 눈치였지만 그녀는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곳에서 헤어진 지 벌써 20일 가까이 되었으니 곧 나타날 거야.’
그녀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후크란으로 향하는 방향인 서문 근처의 이 식당에 자리를 잡고 밖이 잘 보이는 2층 창가에서 비류와 함께 혹은 교대로 밤낮없이 시간을 보냈다.
‘내가 한 생각을 남들이라고 하지 못할 리가 없지. 흥! 하지만 결국 그곳을 찾는 것은 우리 코엠 길드가 될 거야.’
본격적인 골든 배틀에 앞서 각 황자 세력에 붙으려는 길드들은 기회를 잡기 위해 눈에 불을 켜는 중이었다.
아직 기사들에 비해 실력이 뒤지는 유저들이 그 세력들 속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자금력을 지원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그들 역시 자신들처럼 유니온에서 막강한 자금력과 세력을 가진 노블들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자금력을 이용해서 광산의 정보를 샀을 것이다.
자신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보 길드에서 그 정보를 여러 명에게 팔았을 거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길드장이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정보가 있으리라고 짐작한 뫼비우스가 채근했지만 그녀는 입을 떼지 않았다. 비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문득 사자의 그것처럼 긴 머리와 깊고 맑은 눈을 가진 한 용병의 모습이 떠올랐다.
“후후!”
세류는 뫼비우스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에는 산발을 한 것처럼 보기 싫었던 그 머리카락이 이제는 사자 갈기처럼 생각되는 것을 보면 그 NPC 용병에게 자신이 각별한 감정을 가진 것은 확실했다.
‘참 이상해! 유저도 아닌데 왜 자꾸 이렇게 생각이 나는 거지? 그는 도대체 언제 오려나?’
지금까지 그를 기다려 왔는데 아직 소식이 없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후크란으로 진입했다가는 일전과 같은 사태를 또 맞을 테고…….”
뫼비우스는 세류에게 눈을 떼고 비류에게 말을 하다 말고 아픈 기억이 떠올라 가볍게 혀를 찼다. 평균 레벨이 40이 넘는 유저 삼백여 명이 채 일주일을 견디지 못한 것을 떠올린 것이다.
세류에게 필요한 정보를 지원하기로 특별히 거래한 그이지만 이런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없었다.
시간이 흘러갔지만 세 사람은 각자 생각에 빠져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뭐야, 저 친구? 용병인가?”
뫼비우스는 무심코 창밖을 쳐다보다가 경호성을 토해 냈다. 타우스트 성의 네 개의 문 중 후크란 산맥으로 향하는 서문을 출입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약초꾼들이나 사냥꾼들이 가끔 출입하지만 행색으로 보아 그들은 아니었다. 뫼비우스 역시 두 자매 때문에 본의 아니게 이 자리에서 늘 서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봐 왔던 것이다.
그 말에 비류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환호성을 질렀다.
“언니, 돌풍 용병대야! 그 멋대가리 없는 대장이라고! 언니 말대로 정말 왔어!”
비류의 흥분한 소리에 눈을 뜬 세류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틀림없이 그였다. 다른 대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강렬한 기세를 풍기며 성내로 향하는 사람은 그녀가 기다리고 있던 그 사내였다.
“빨리 따라가자.”
황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세류 자매의 얼굴에는 진한 기쁨이 떠올라 있었다.
“누굽니까, 저 친구? 아는 사람입니까?”
세류 자매에게 묻던 뫼비우스는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 채 잔뜩 들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그들을 따랐다. 세 사람이 서둔 덕분에 그들은 금방 그와 보조를 맞출 수 있었다.
“반가워요. 이제 도착했나 봐요?”
“오랜만이오.”
비류의 인사에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사내였다. 그는 심지어 눈도 맞추지 않았지만 비류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일행은 다 무사하신가요?”
“네, 다행히.”
세류의 물음에도 그는 짧은 대답으로 응대했다. 비류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제대로 눈도 맞추지 못했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누구지?’
그녀들에게 고용된 지 꽤 되었지만 그간 보아왔던 그녀들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세류는 그나마 어느 정도 배려심이 있는 편이었지만 그가 아는 비류는 성질이 정말 더러웠다. 이 세계의 귀족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자존심도 무척이나 강했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했다.
그런 그녀들이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 사내를 반가워한다. 심지어 성질이 더러운 비류는 어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하기까지 했다.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신분을 떠나 두 자매의 그 생기발랄하고 빛나는 미모에 흔들리지 않는 남자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뫼비우스는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궁금한 마음에 조금 앞서 걸으며 그를 곁눈질했다.
길게 자란 머리칼 때문에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다만 큰 키에 마른 체구를 가진 그에게서는 무척 거칠고 강한 기세가 은은하게 풍겼다.
‘용병?’
용병이 맞다. 그것도 상당히 힘든 노정을 겪으며 이곳까지 온 것 같았다. 몬스터들의 피로 얼룩진 방어구에서 진한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얘기 좀 해요, 네?”
“무슨 얘기? 난 좀 바쁜데.”
역시 무심한 사내의 말이 이어졌지만 세류 자매의 얼굴에는 뫼비우스가 그동안 익히 보아 왔던 그런 표정은 없었다.
“의뢰를 하고 싶어요.”
“의뢰? 무슨?”
“여기에서 말하긴 곤란해요. 장담하지만 굉장한 건이에요.”
세류의 말에 비로소 사내의 얼굴에 표정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떠올랐다.
“좋소. 일단 개인적으로 처리할 일들이 좀 있으니 댁들이 있는 장소를 말해 주시오. 이따 저녁 식사를 겸해 의뢰를 들어 봅시다.”
“그럴 줄 알았어요. 서문 입구에 있는 ‘마몽의 주점’에서 기다릴게요.”
“알았소. 그럼 이따가 봅시다.”
사내는 더 이상 볼일 없다는 듯 약초와 가죽 시장이 있는 거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세류와 비류는 흡족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굽니까?”
“호호! 길잡이를 해 줄 사람이에요.”
세류의 말에 뫼비우스의 눈이 강하게 빛났다. 비류는 몰라도 세류의 말은 믿을 만하다는 것을 그간 같이 지내면서 충분히 파악했지만 쉽게 믿기지는 않았다.
“저 친구가요?”
“충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에요.”
“맞아. 좀 재수 없기는 하지만 실력 하나는 끝내주는 인간이지.”
세류 자매의 말에는 강한 확신이 실려 있어 뫼비우스는 그 사내의 정체가 더욱 궁금했다.
이 여자들과는 정보 길드에서 우연히 만나 인연을 맺었지만 그가 아는 한 그녀들은 자신의 수하들도 별로 믿지 않았다.
물론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지난번 후크란에서 그녀들을 제외하고 몰살당한 이후에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후크란의 지리는 물론 그곳의 괴물 같은 몬스터들을 우습게 아는 실력자죠. 우리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에요.”
“후크란의 몬스터들을요?”
뫼비우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사들과 상대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그의 실력으로도 뿔이 두 개 달린 오크 한 마리를 상대하다가 정신없이 도망친 끝에 그녀들에게 받은 귀환 스크롤로 겨우 목숨을 구한 그로서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래요. 그라면 우리를 확실하게 ‘그곳’에 데려다 줄 수 있을 거예요.”
“성질머리가 좀 더러워서 그렇지 능력 하나는 확실한 사람이지.”
비류까지 한마디 거들었다. 뫼비우스는 비류의 눈길이 제법 멀어진 사내의 뒷모습을 아직도 좇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눈 속에 묘한 감정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뫼비우스는 눈알을 굴리며 입가에 작은 미소 한 자락을 물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약초 시장에 도착은 했지만 하룬의 발걸음은 입구에서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장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한 특별히 좋은 생각이 나질 않았던 것이다.
‘도서관이나 서점을 찾아볼까?’
하룬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자료가 남아 있을지 여부도 불확실했지만 이 남작성이 약초 때문에 그 규모가 여타 남작성보다 크다고는 해도 도서관이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 길드를 이용할 생각은 아직 없었다.
비도지존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는 돌아다니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일단 돌아다녀 보자.’
하룬은 광장의 반을 차지한 시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약초로 유명한 곳이라더니 정말 약초상들이 많았다. 광장 주변에는 민가보다 더 많은 상점들이 있었는데 그것들 대부분이 약초 가게였다.
다른 가게들과 달리 제법 넓은 공간을 갖춘 가게들은 잘 마른 약초들을 그 쓰임별로 잘게 자르거나 구슬처럼 만들어 직접 혹은 유리병에 넣어서 팔고 있었다.
하룬 역시 약초와 무관한 입장은 아니기에 많은 관심이 갔다. 싸가지 때문에 익히게 된 약초학으로 비록 직접 본 것은 처음이지만 그 모양과 약효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제국 각지는 물론 인접한 왕국에서도 상인들이 찾아오는 곳이라서 그런지 유저들로 추측되는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해독약이 거의 떨어져 가는 시점이라 안 그래도 약초가 필요한 하룬이었기에 그의 시선은 판매대로 쏠렸지만 쉬이 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직접 채취한 것이 맞는지 아니면 헥터 교관의 말처럼 장삿속으로 대충 눈가림으로 전시해 놓은 것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 많은 약초 가게들을 다 돌아본 하룬은 광장으로 나오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휴우, 어렵네.”
“뭐가 그렇게 어려워?”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한 노인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은 주름살로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마치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묘하게 빛났다.
“예에?”
“젊은 녀석이 뭐가 그렇게 어려워서 탄식을 하냔 말이야? 그것도 잘 들리지도 않는 이 늙은이의 귀에 들릴 정도로 크게 한탄을 했냐고?”
하룬은 픽 웃었다. 오지랖이 넓은 노인이었다. 심심해 죽겠다는 그 눈빛도 그렇고 난데없이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 한탄하는 여유를 가진 것도 그랬다.
“어라, 이놈이! 아까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한탄하더니 이제는 이 늙은이를 조롱해?”
노인은 하룬이 웃는 것을 보고 기분이 상한 듯했다.
하룬은 주저 없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랬습니다.”
“죄송이고 뭐고 왜 그렇게 크게 한숨을 내쉬었냔 말이야? 궁금해 죽겠잖아.”
과연 그의 생각이 맞았다.
아무 곳에나 참견하고 다니는 호기심 많은 노인이 틀림없었다. 얼굴만 보면 이렇게 밖에 나다닐 나이가 아닌 것 같은데 소리가 어찌나 큰지 금방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정도였다.
하룬은 모여드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부담스러워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러려면 대충이라도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사실 좋은 약재를 찾는데 제가 약초 보는 안목이 없어서 도저히 고를 수가 없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해독약을 만들기 위한 약초들을 살 생각을 하고 가게들을 기웃거렸으니 말이다.
“에헴. 그렇단 말이지.”
잠시 생각에 잠겼던 노인이 하룬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무슨……?”
놀란 하룬이 손을 빼려 했지만 무슨 노인네가 그렇게 힘이 좋은지 손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놈아, 내가 최상급 약재를 취급하는 곳으로 데려다 주겠단 말이다. 그곳이라면 품질이나 가격, 아니 가격은 조금 비싸지만 아무튼 품질만큼은 믿을 수 있지.”
“네?”
“젊은 놈이 무슨 말을 그렇게 못 알아먹어? 당장에 가자.”
하룬은 노인의 박력과 힘에 못 이겨 마시장에 끌려가는 말처럼 끌려가고 말았다.
노인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빨랐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도 못 쫓을 정도로 빨랐지만 메신저 워킹을 익힌 하룬은 금세 보조를 맞추었다.
하룬은 노인이 가격이 싸다고 했으면 그 손을 뿌리쳐서라도 따라가지 않았을 것이다. 약재가 좋으면 가격이 비싼 것은 당연하다. 일단 노인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노인이 향한 곳은 뒷골목의 허름한 약초 상점이었다.
당연히 외지의 상인들이나 유저들도 찾지 않을 정도로 후미진 곳에 위치한 상점들이지만 이곳에서도 약초뿐 아니라 다른 성에 있는 다양한 종류의 물건들을 취급하고 있었다.
‘이곳 주민들이 주로 드나드는 곳이겠군.’
골목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옷차림이나 행색으로 보건대 그의 생각이 맞았다.
“이봐, 나 왔어!”
노인이 기세등등하게 가게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소리 질렀다.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허름한 상점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지만 정작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하룬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한동안 추레한 얼굴을 내밀지 않아서 후크란 깊숙한 곳에서 썩고 있는 줄 알았더니 살아 있었나 보네.”
역시 늙은 목소리였지만 묘하게 힘이 느껴졌다.
“뭐라고? 이놈이! 형님이 왔으면 얼굴부터 내밀어야지 어디서 배워 먹은 지랄이냐?”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어디서 또 형님이래?”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안채에서 나온 사람은 기형적인 몸매를 가진 노인이었다.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의 그것보다 더 불룩하게 배가 나온 노인의 오른손에는 약초를 썰 때 쓰는 작두칼이 들려 있었고, 왼팔은 나뭇가지처럼 바싹 말라 덜렁거렸다.
더구나 얼굴 전체를 가로지르는 징그러운 흉터가 세 줄기나 있어 마치 악마처럼 보였다.
“손님 데리고 왔다. 바가지 씌우지 마라. 좋은 젊은이 같으니까.”
“빌어먹을. 내가 언제 바가지 씌우는 거 봤냐? 네놈이나 구전口錢 챙긴다며 손 벌리지 마라.”
하룬은 투덕거리는 두 노인을 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오가는 말은 비록 험했지만 무언가 진한 감정이 그들 사이에 흐르는 것 같았다.
“어서 오게. 난 가츠라고 하네. 이젠 산에 오를 기력도 없는 가짜 약초꾼이 뭐라고 사기를 쳤는지 모르겠지만 약초만큼은 최상급만 취급하니까 걱정 말라고. 우리 가게는 약 조제까지 하고 있으니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을 하게.”
“아, 네.”
나름 웃는 것 같은 가츠 노인의 얼굴은 마치 악마처럼 일그러져 끔찍한 기분이었다.
“그래, 무슨 약초를 찾는데?”
“해독약이 필요해서요. 모든 독을 해독할 수 있는 그런 최상품이 필요합니다.”
싸가지가 전직하고 난 후 독 데미지가 훨씬 강해진 것은 물론 그 독성마저 강해졌을 것으로 생각한 하룬은 가능한 한 비싸더라도 최상품을 구하고 싶었다.
“없어!”
하룬의 말을 듣더니 가츠는 대뜸 그렇게 소리치고는 몸을 돌려 버렸다. 황당해진 하룬은 그의 뒷모습만 멀뚱히 바라보았다.
“이 똥물에 튀겨 죽일 놈아! 손님을 모시고 왔으면 장사를 해야지 그게 무슨 소리냐?”
“모든 독을 해독할 수 있는 최상품은 없다고. 아니, 약재가 없어서 못 만든다고.”
가츠는 다른 노인에게 말하는 것으로 하룬의 의아함을 풀어 주었다.
“내가 이번 여름에 가져다준 약초들로는 뭘 하고? 해독에 효과가 높은 약초들을 많이 갖다 주었잖아?”
“다 썼어.”
가츠 노인의 대답에 그 노인의 얼굴이 금방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그 많은 약재로도 이젠 채 반 년도 못 버티는구나. 젠장, 이젠 후크란에는 들어갈 수도 없는데.”
“무슨 소리야? 네놈이 후크란에 못 들어가다니?”
가츠는 다른 노인의 말에 놀라 다시 몸을 돌렸다.
“젠장. 요즘 후크란 북쪽은 난리도 아니야. 거 뭣이냐, 뿔 달린 오크 놈들이 미쳐 날뛰고 있다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놈들이 흉성이 터져 살아 움직이는 것은 보이는 대로 족족 죽여대고 있단 말이야. 그 때문에 내가 데리고 있던 놈들이 많이 다쳤어. 근동에서 내로라하는 사냥꾼들도 요즘은 후크란 주변에는 일절 접근도 못 한다고.”
“뭔 일이래? 그 뿔 달린 오크 놈들이 지독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저희들 영역 밖으로는 잘 나오는 놈들이 아닌데.”
“그걸 알면 답답하지나 않게. 안 그래도 성이 수상한 무리들로 꽉 차서 후크란의 지리를 아는 약초꾼들과 사냥꾼들을 찾던데. 또 광산 바람이 불었나?”
두 노인의 대화를 듣던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찔끔했다. 보나 마나 자신이 부족장을 죽인 것 때문에 럼프 오크들이 난동을 부리는 것이리라.
“그래서 요즘 좋은 약재가 전혀 반입되지 않는다고 상인들이 난리를 치는 거구나.”
“이러다가 약초꾼들은 모두 굶어 죽을 판이다. 내가 단속은 하고 있지만 추수 때가 다가오면서 식량이 떨어진 녀석들이 후크란으로 들어갈까 봐 가슴이 콩알만 해졌어.”
두 노인은 심각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제길! 나도 부족장이나 되는 그런 대단한 놈이 싸가지의 독에 그렇게 무력해질 줄은 몰랐다고.’
자신이 한 일이 있어 뜨끔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이라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
“잠시만요.”
“뭔가?”
“필요한 약재는 직접 채취해 오겠습니다. 그럼 됩니까?”
“뭐?”
가츠와 다른 노인의 눈이 커졌다.
“자네가 후크란을 알아?”
“지금 후크란에서 내려오는 길입니다. 거기서 잡은 몬스터들의 가죽들을 가지고요.”
하룬은 등에 멘 마법 배낭들을 내려놓았다. 배낭에서 제일 먼저 꺼낸 가죽은 럼프 오크의 가죽이었다.
“이건? 럼프 오크의 가죽? 자넨 도대체 정체가 뭔가?”
놀란 노인들에게 하룬은 팔뚝을 내밀어 용병임을 증명하는 팔찌를 보여 주었다.
“돌풍 용병대 대장 하룬입니다. 의뢰 때문에 후크란 북쪽으로 들어갔다가 그동안 잡은 몬스터 가죽들을 팔고 해독약을 만들 약초를 사러 나왔습니다.”
“흠, 용병이 맞군. 그런데 후크란 북쪽이라면?”
과연 자신이 진짜 후크란에서 왔는지 궁금할 것이다. 하룬은 후크란 기사단을 언급해도 되는지 잠시 망설였다.
“후크란 주봉 중턱에 있는, 일단의 기사단이 머무는 캠프까지 의뢰인을 호송했습니다.”
“흠, 그렇단 말이지.”
두 노인은 묘한 눈으로 하룬을 바라보다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자네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 아니, 자네의 용병대는 어때?”
“이 배낭에 담긴 가죽들 중에는 샤벨 타이거도 있고, 럼프 오크들도 있습니다. 그리폰 가죽도 두 개나 있지요.”
하룬은 미심쩍어하는 눈빛인 두 노인에게 배낭에서 가죽을 꺼내 확인시켜 주었다.
“오오! 정말이야!”
“뿔 달린 오크 가죽이 맞아. 거기에 그리폰 가죽까지!”
두 노인은 탄성을 지르며 가죽을 살피더니 뜨거운 눈으로 하룬을 응시했다.
“날 따라오게.”
가츠는 뭔가 결심한 듯 보였다. 그의 뒤를 따라 내실로 향하는 하룬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퀘스트 냄새가 솔솔 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