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출》
홀은 목책을 오르려던 두 사람이 마치 화살에 맞은 기러기처럼 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 황급히 앞으로 달려 나가다 멈추었다.
두 사람의 몸이 유연하게 바닥에 착지하는 것이 보였다.
‘아무튼 대단한 사람들이라니까.’
목책의 높이는 얼추 4미터에 육박한다. 통나무를 대충 다듬었기 때문에 튀어나온 옹이나 쳐 낸 가지 부분이 보일 정도라 발 디딜 곳이 있어 오르기는 어렵지 않을 듯했기에 그들의 행동은 뜻밖이었다.
무슨 일이기 알아보기 위해 다시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하룬이 티노를 높이 던지는 것을 보았다. 겉보기에는 그리 힘이 셀 것 같지 않은 하룬이 깍지 낀 두 손으로 한 번 땅을 박찬 티노를 중간에서 받아 올린 것이다.
다음은 하룬 차례였다. 그는 도움닫기를 위해 뒤로 약간 물러나 세 발짝 정도 달려 강하게 땅을 박차더니 마치 새처럼 높이 날았다. 공중에서 한 번 몸을 뒤집은 하룬의 몸은 순식간에 목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말 대단하구나!’
홀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행하면서 느낀 거지만 돌풍 용병대원들은 시간이 갈수록 강해졌다. 개성도 강하지만 전체적인 능력이 아주 빠르게 올라갔다.
그녀 역시 어린 시절부터 모종의 목적을 위해 마법은 물론 어쌔신 수련까지 힘든 수련을 해 왔다. 하지만 그들처럼 놀라운 수련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돌풍 용병대원들은 수련을 즐기는 것으로 보였다. 마치 재미있는 놀이라도 하듯 틈만 나면 수련을 해 대는 그들은 억지로 수련했던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르게 성장했다.
‘브리엘라 님이 저들의 마음을 꼭 얻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잠시 하던 홀은 목책 바로 앞까지 갔다.
확실히 무슨 일이 있었던 듯 목책은 엉망이었다. 군데군데 불에 그슬린 흔적은 물론 목책을 구성하는 나무들이 심하게 부러진 곳도 있었다.
무엇보다 홀의 관심을 끈 것은 날카롭게 깎은 목책의 나무 끝부분에 난 묘한 마나의 흔적이었다. 그것은 목책을 따라 넓게 펼쳐져 있었다.
‘광범위 알람 마법?’
그녀는 이제야 하룬과 티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목책을 넘으려던 순간 알람 마법의 존재를 느끼고 황급히 바닥으로 다시 내려왔던 것이다.
이렇게 긴 목책 전체를 감당할 알람 마법을 펼치려면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적어도 5서클은 되어야 마나석의 도움으로 이런 광범위 마법을 펼칠 수 있다.
그제야 홀은 왜 망루에 감시하는 사람들이 없는지 알 수 있었다. 목책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게 알람 마법을 설치했으니 굳이 감시하지 않아도 누군가 침입하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법사도 아닌데 어떻게 그들이 마법이 펼쳐져 있다는 걸 알았지?’
도무지 그 능력을 짐작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특별히 마법 아티팩트를 가진 것도 아닌데 은밀하게 설치된 알람 마법의 존재를 파악해 낸 두 사람의 능력이 정말 존경스러웠다.
홀은 4서클 마법인 플라이로 가볍게 목책을 넘어 안쪽에 뿌리 내린 키가 큰 나무의 단단한 가지 위에 올랐다. 자신도 돌풍 용병대에 자극을 받아 드디어 4서클을 마스터했던 것이다.
목책 안은 상당히 넓었다. 키 큰 나무들이 목책 주변에 심어져 있어 멀리서 보았을 때는 그리 넓지 않았지만 동서의 길이는 약 1.5킬로미터 정도였고, 남북으로는 그것보다 약간 짧은 직사각형의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더 큰 규모를 가진 건물들이 세 동이나 되었다. 그녀가 맡은 구역인 동쪽에는 숙식하는 건물로 보이는 2층짜리 큰 목조 건물이 있었다.
‘아마 기숙 동이겠지?’
데브론에게 들은 설명대로라면 그 건물은 약 이백 명에 달하는 수련생들이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는 숙소일 것이다. 예상과 달리 칙칙한 적막 속에 잠긴 건물은 대낮인데도 짙은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홀은 잠시 본부로 쓰이는 북쪽 건물을 보며 그곳 사정이 궁금했지만 이내 목책과 나무 사이의 그늘을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이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자신보다 훨씬 더 정탐을 잘해 낼 두 사람을 믿는 것이다.
하룬은 키 큰 나무에 올랐다. 조경을 위한 것은 아닐 테지만 거대한 나무들이 서로 가지를 맞댈 정도로 자라 있었다.
하룬은 가지를 밟고 마치 표범처럼 소리를 최소한으로 줄이며 능숙하게 이동했다. 중심을 잡기가 어려울 뿐 밟은 가지의 탄성을 이용해서 나무를 타고 이동하니 북쪽에 자리한 건물까지는 금방이었다.
나무로 지은 건물의 지붕에 소리 없이 내려앉은 하룬은 일단 두꺼운 지붕의 나무판에 귀를 대고 안의 기척을 살폈다.
‘역시 사람이 있구나.’
안에서는 몇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듯 대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무 두께가 있어서 그런지 잘 들리지는 않았다. 일단 안으로 침투해야 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하룬의 눈에 시꺼멓게 그은 벽난로의 굴뚝이 보였다.
건물의 크기가 있어서인지 굴뚝은 한 사람은 어렵지 않게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었다. 그을음 때문에 몸이 더러워지겠지만 하룬은 주저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 발과 두 손을 이용하니 어렵지 않게 내려갈 수 있었다.
“아직입니까?”
아까처럼 웅얼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명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짜증이 난 목소리의 주인공은 맑은 음색으로 보아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은 듯했다.
“너무 채근하지 말게.”
대답하는 이는 최소 중년 이상이다. 굵직하면서 힘이 깃든 목소리는 그 주인공이 적잖은 나이와 상당한 지위에 있다는 것 그리고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벌써 이곳에서 지체한 것이 두 달입니다. 아무리 저들이 즉시 전력이 가능한 기사급 재원이라고는 해도 정체도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았을 뿐더러 더 이상 시간을 끌면 3황자 저하께서 우리의 능력을 의심하시게 될 겁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 조금만 더 공들이면 된다네. 우리 기사단을 상대로 무려 40일을 버틴 실력자들이네. 이들은 오랫동안 이 후크란 산맥에서 지내왔기 때문에 이곳 지형에 익숙해서 광산을 찾는 데 큰 효용이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쪽으로 전향만 시킨다면 몇 개의 기사단이 생기는 것과 다름없단 말일세.”
그의 말로 하룬은 그동안 왜 정기 연락이 끊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캠프에서 수련하던 사람들은 이들의 공격을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누가 모릅니까? 그들이 협조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니 문제 아닙니까? 이렇게 시간만 질질 끌다가 일을 망칠 수도 있단 말입니다.”
목소리로 보아 젊은 것 같은데 잔뜩 날이 서 있었다. 그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법사들이 제안한 대로 현재로써는 세뇌 마법을 펼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그동안 그들도 계속된 전투와 수감 생활로 지쳤고, 자이닌 님과 마법사들도 실력이 뛰어나니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후유증이 없는 정신계 마법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야. 특히 수뇌부는 공히 익스퍼트 중급 이상의 실력자들이니 저항이 강할 수밖에. 저들을 단기간 쓰려면야 더 독하게 손을 쓰겠지만 골든 배틀 동안 이용하려면 공을 들여야 한단 말일세.”
젊은 남자의 신분이 더 높은 듯 기세가 등등했지만 나이 든 남자 역시 꿀리는 것은 아니었다.
하룬은 그들의 대화를 통해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났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미 골든 배틀은 시작되었단 말입니다. 이곳 일은 원래 일정에 없던 것이 아닙니까? 한시라도 빨리 보석 광산을 찾아야 하는 상황인데 이렇게 일이 지지부진하면 어떻게 합니까? 왜 여기에서 우리의 발이 묶여야 합니까? 정녕 드미고스 자작께서 모든 책임을 질 겁니까? 이번 광산 탐사의 주재자는 접니다. 자꾸 이러시면 곤란하지요.”
“…….”
젊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강경하게 나가자 드미고스 자작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아무 말이 없었다.
“더 이상은 시간을 끌 수 없습니다. 차라리 그들 전부가 정신이 붕괴되어 폐인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세뇌 마법을 펼치세요.”
“……알……겠네.”
“오늘 밤 안으로 마무리해주세요. 내일은 당장 보석 광산을 찾아 산맥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드미고스 자작은 대답이 없었다. 아마도 어색하고 불편한 기류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실내에는 열 명 가까운 사람들의 기척이 있었지만 대화를 나누는 것은 단둘이니 그들이 수뇌부일 것이다.
나무로 된 바닥을 밟는 소리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후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정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에이, 쌍! 저 고블린 같은 새끼가 어디서 우리 단장님에게 지랄을 떠는 거야. 이방인 주제에 후작 각하의 총애를 받는다고 아주 지랄을 하네.”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한 말에 하룬은 하마터면 타다 남은 나무들과 숯이 깔린 벽난로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이방인이라고?’
눈이 번쩍 뜨였다. 골든 배틀을 통해 이방인들이 이 비욘드의 세상에 쉽게 뿌리 내리도록 하는 에피소드가 발동된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유저가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맞습니다. 저 뒤앙이라는 상인 자식을 비롯한 이방인들이 후작 각하의 총애를 믿고 저렇게 건방을 떠는 것을 두고만 보실 겁니까, 단장님?”
“차라리 이 기회에 아주 조용하게 파묻어 버리죠? 이곳에 온 이방인들은 이십 명도 안 되니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이런 위험한 곳에서 사고로 죽었다고 하면 각하께서도 뭐라 하시지는 못할 겁니다. 어차피 무력이라고는 오크나 겨우 상대할 정도밖에 안 되는 이방인들이니 어려울 거 없습니다.”
날이 잔뜩 선 다른 두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작심한 듯 결연한 목소리였다.
“안 됩니다, 단장님. 저들은 비록 우리에 비해 무력은 떨어질지 몰라도 마탑에서 구한 상당한 수준의 마법 아이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마법사들도 이방인들이 자금을 대서 끌어들였으니 그들도 온전히 우리 편은 아닙니다. 다 처치할 수 있다면 모르되 한 놈이라도 놓치거나 각하에게 상황을 알리면 우리만 위험해집니다. 저들은 부활이 가능한 이방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황자 저하와 후작 각하는 저들 이방인들에게 각별한 기대를 하고 계십니다.”
또 다른 목소리가 살벌해진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드미고스 자작이라는 인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브실, 세뇌 마법을 준비하라고 자이닌 마법사에게 일러라. 저들이 원하는 대로 해 준다. 비록 고깝기는 하지만 당분간은 주군에게 도움이 될 인물들이다. 사감私憾은 일단 가슴에만 새겨 두어라. 언젠가 풀 날이 올 것이다.”
착 가라앉은 그 목소리에는 강렬한 의지가 가득했다.
“알겠습니다.”
“별일이야 없겠지만 오늘 밤만은 각별한 경계를 취하도록. 세뇌 마법 중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안 된다.”
대여섯 명이 그 명령에 복창하며 이내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급하구나. 나가서 회의를 해 봐야겠어.’
결정적인 정보를 얻은 하룬이 벽을 지탱한 두 손과 발에 지그시 힘을 가하려는 찰나 드미고스 자작의 독백이 들렸다.
“언젠가 반드시 날 모욕한 걸 후회하는 날이 올 것이다. 이방인들!”
재수 4인방이 은신한 곳으로 돌아온 하룬은 이미 돌아온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다들 심상치 않은 얼굴인 것을 보니 이곳 캠프의 상황을 대충 파악한 것 같다.
“대장, 다들 갇혀 있대.”
이미 정황을 들었는지 필립이 굳은 얼굴로 말을 건네 왔다. 하룬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잡고 앉아 홀과 티노를 번갈아 보았다.
“티노.”
“수련 캠프를 장악한 인물들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일단 캠프의 모든 인원이 연금 상태라는 것은 확인했습니다. 실내가 어두워 어떤 고초를 겪고 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마치 짐승처럼 쇠사슬로 묶여 있었습니다. 감시하는 인원 때문에 접근은 자제하고 일단 돌아왔습니다.”
하룬은 이번에는 홀을 보았다.
“내가 간 건물에도 마찬가지였어요. 백 명에 가까운 수련 기사들이 쇠사슬로 손발이 묶여 연금되어 있고, 일부 수련 마법사들은 마나 봉쇄 팔찌를 차고 있었어요. 감시를 하고 있긴 했지만 감시자의 숫자는 안과 밖에 불과 세 명밖에 없었고요.”
아마 두 군데에 연금된 사람들은 수뇌부를 제외한 인물들일 것이다. 하룬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들은 3황자의 세력으로 보입니다. 기사단과 마법사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네에?”
“3황자라고요?”
하룬의 말에 다들 깜짝 놀랐다. 난데없이 3황자의 이름이 거론되리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록 골든 배틀이 공표되었지만 홀을 제외한 돌풍 용병대들이 관심을 가질 사안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룬은 자신이 들은 내용을 일행에게 말해 주었다.
“흠. 그럼 보석 광산을 찾으러 이 후크란으로 들어와 헤매다가 우연히 수련 캠프를 발견한 거군요. 즉시 전력감으로 충분한 수련 기사들에게 욕심을 낸 드미고스 자작은 전향을 위해 설득 작업을 지속해 왔고, 연금된 캠프의 수뇌부는 그것을 완강하게 거부해 왔단 말이군요.”
티노의 명쾌한 해석에 다들 어찌 된 사정이지 파악할 수 있었다.
“시간이 없어요. 오늘 밤에 이곳의 수련 기사들 중 수뇌부를 대상으로 세뇌 마법을 펼친다고 했으니 서둘러야 합니다.”
“맙소사! 정말 세뇌 마법을 언급했단 말인가요?”
하룬의 말에 홀은 다급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하룬이 물었다.
“세뇌 마법이 그렇게 위험하오?”
“굉장히 위험해요. 그중에 7서클 마법사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성공 가능성이 무척 희박해요. 더구나 상대의 정신력이 강하면 세뇌 마법은 별 효과가 없어요. 세뇌 마법이 위험한 것은 실패하는 경우 그 대상의 정신이 붕괴되어 미쳐 버리거나 죽어 버린다는 점이에요. 도대체 그들이 어떻게 흑마법까지 손에 넣었을까요? 흑마법은 이미 몇 백 년 전에 금지되었는데.”
흑마법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타인을 세뇌한다는 점만으로 그 폐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룬 자신만 해도 오랫동안 유니온 정부로부터 세뇌당해 오지 않았던가?
“참고로 7서클 마법사는 전 제국을 통틀어 삼십 명이 조금 넘는 정도에요. 흑마법의 경우 보통 백 마법이나 원소 마법에 비해 한 서클 높은 것을 생각하면 무리 없이 세뇌 마법을 펼치려면 8서클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그 정도의 대마도사는 제국에 채 열 명도 되지 않아요. 그런 대마도사가 이런 일로 이 험한 후크란 산맥에까지 들어올 리가 없어요.”
“그럼 하위 마법사들이 마법진을 사용하거나 힘을 함하면 되잖아요?”
시린느의 질문에 홀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물론 가능하지요. 내가 걱정하는 게 그것 때문이에요. 같은 사승을 가진 마법사들이고 마법진의 도움을 받더라도 한두 단계 높은 마법을 펼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만큼 마법 발현을 위해서는 정교한 마나 조절 능력과 한 사람이 펼치는 것 같이 세밀한 마법 구사력을 갖추어야 해요.”
하룬은 일의 심각성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세뇌 마법을 당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의 추측으로 그 정도의 마법사는 없는 듯했다. 있었다면 기사들의 지시를 받고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일단 쳐들어가자, 대장! 까짓것 기사가 별거야.”
이제까지 여행을 통해 상당한 실력을 쌓은 지탄이 주먹으로 제 가슴을 치며 말했다.
“이런 미련한 놈. 넌 입 다물고 찌그러져 있어.”
시린느가 눈을 흘기며 독석을 토해 내자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내밀며 엉덩이를 뒤로 빼는 지탄의 모습에 하룬이 잠시 실소했다. 시린느에게 유난히 쩔쩔매는 지탄의 모습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재미있어 보였던 것이다.
“흠. 일단 들어가긴 해야 하는데…… 생각을 좀 해 보자. 홀이 살핀 동쪽 건물과 티노가 탐색한 서쪽 건물들에는 일반 수련 기사들이 갇혀 있고, 감시 인원은 서넛 정도, 무위는 기사단원이니 익스퍼트 초급 정도일 거야. 캠프의 수뇌부는 중심 건물에 갇혀 있는데 아마도 지하에 있을 걸로 추정된다.”
하룬이 말을 시작하자 다들 눈을 빛내며 경청했다.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동시에 두 곳의 감시자들을 해치우고 일반 수련생들의 연금을 풀어 본관 건물을 공격하는 것인데, 참작할 것은 무기 문제와 수련 기사들의 상태 그리고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야. 인원이 많은 만큼 시간이 꽤 걸릴 테니까.”
“…….”
“아니면 본관을 직접 공격하는 방법이지.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급습해서 본관을 장악하고 수뇌부를 구출한 다음 나머지 건물들을 공격하는 방법인데, 우리의 전력으로는 쉽지가 않아. 더구나 고서클로 추정되는 마법사들까지 있는 상황이니…….”
난감한 일이었다. 실력은 기사들과 겨루어도 압도하진 못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까지 올렸지만 인원이 문제였다.
‘젠장! 아무래도 싸가지를 불러야겠구나. 이제 전직은 확실하게 했겠지?’
하룬은 대원들에게 휴식을 취하도록 말을 해 놓고는 은밀한 곳을 찾아 나섰다.
자기 말로 일주일이면 전직 과정이 끝난다고 했다. 벌써 열흘이 넘게 흘렀으니 무사히 끝났을 것이다.
“소환!”
녀석을 소환하자 주변 경물이 잠시 흔들리더니 처음 보는 물체가 앞에 나타났다. 생경한 모습을 한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본 하룬의 눈이 커졌다.
그의 무릎 정도에 오는 키를 가진 물체는 화염을 연상하게 하는 빨간 꼬리와 네 쌍의 날개가 있고, 하얀 얼굴에 황토색 머리칼을 가진 소년, 아니 소녀……라고 보기에도 이상한 그런 생명체였다.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눈과 투명한 피부, 오뚝 솟은 콧날과 붉은 입술은 생기발랄했고, 무한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도대체 성별은 알 수 없었다. 불투명한 드레스를 걸친 것으로 보아서는 여성체 같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체형이 너무 밋밋(?)했다.
“너…… 네가 혹시 싸가지?”
너무나 변한 외모에 하룬은 확신할 수 없었다. 소환에 응했으니 당연히 싸가지일 테지만 이전의 흉측한 외모와는 무척 많이 달랐던 것이다.
씨익!
녀석이 웃는 순간 늘 따라다니던 안내음이 들려왔다.
-중독되었습니다. 초당 50의 데미지를 입습니다.
녀석이 맞았다. 이 불길한 안내음이 그걸 증명해 주었다. 외모가 이전보다는 그나마 보기 좋게 바뀐 것은 좋은데 중독 데미지가 다섯 배나 증가한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헤헤헷! 어때? 나 멋있지? 이렇게 외모를 바꾸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목소리마저 좀 변했다. 이전에는 마치 늙은이 같았다면 지금은 악동처럼 느껴지는 생생하고 발랄한 목소리였다. 자세히 보니 발 부분이 액체처럼 대지에 붙어 있었다.
“꼴이 그게 뭐냐?”
이맛살을 찌푸리는 하룬의 반응이 예상외였는지 녀석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칫! 왜 이래. 주인이 예쁜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이렇게 외모를 바꾸느라 얼마나 애먹었는데. 대지 속성을 얼굴에서 발로 돌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녀석의 말에 하룬은 이전에 싸가지의 모습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은 마치 노인처럼 늙은 누런 얼굴이었다.
녀석의 외모는 사대 속성이 융합되어 밖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어쨌든 지난번보다는 낫네. 보기도 훨씬 좋고. 근데 발은 왜 그러냐?”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이전의 혐오스러운 얼굴보다야 훨씬 낫긴 하지만 발이 제대로 생성되어 있지 않으니 무척 기괴해 보였다.
“그건 나도 몰라. 난 그저 얼굴을 바꾸기 위해서 속성의 위치를 바꾼 것뿐이니까.”
녀석도 이상한지 발쪽을 보며 연방 걸음을 옮겨 보았는데 걷는 것은 아무 지장이 없는 듯했다. 녀석은 이내 날개를 펼쳐 날아 보기도 했다. 네 쌍이나 되는 날개를 가진 덕분인지 무척이나 날렵하고 유연하게 하늘을 나는 모습이 부러웠다.
-중독이 심해져 생명력이 30% 이하로 떨어집니다.
하룬은 안내음에 화들짝 놀라 해독약부터 챙겨 먹었다. 약을 넣었던 가죽 주머니에는 이제 달랑 네 알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도 소환을 해제하기 전에 상태 창은 확인해야 했다.
“상태 창 확인!”
『이름: 싸가지
종족: 에센셜 정령(펫)
레벨: 10
생명력: 무한
마나: 100,000
정령력: 100,000
능력: 사대 속성의 중급 정령 마법을 펼칠 수 있습니다.
포이즌 관련 능력이 모두 중급으로 상향 조정되었습니다.
독으로 대량 살상이 가능해졌습니다.
소환자는 모든 속성의 하급 정령을 따로 소환할 수 있습니다.』
‘부럽다!’
마나와 정령력이 무려 10만이라니. 만렙은 아직 설정되어 있지 않지만 적어도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더구나 중급 정령 마법은 물론 하급 정령까지 소환할 수 있다니 부러울 뿐이었다.
‘그러면 뭐해! 그림의 떡인걸!’
초당 데미지가 무려 50이다. 이전에 비해 다섯 배나 늘어난 것이다.
눈부시게 발전을 거듭하는 현재 자신의 능력으로는 불과 30초도 소환할 수 없었다. 내심 녀석의 전직을 기대해 왔던 하룬은 사기적인 능력을 가진 녀석을 제대로 쓸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자 한숨만 내쉬었다.
녀석의 소환을 해제하려던 순간 아공간이 생각났다.
“아공간은 만들었냐?”
“응, 주인. 무지 좋아. 주인의 그 좁고 더러운 창고에 비하면 그야말로…….”
하룬은 녀석의 말을 끊었다. 시간이 없었다.
“아공간은 어떻게 여는 거야?”
“쳇! 꼭 말을 끊어요. 그냥 ‘아공간 오픈’이라고 외치면 내가 알아서 다 할 거야. 어차피 내 마나로 운영되는 공간이니까. 주인은 감사한 줄 알라고. 이 싸가지 님의 뛰어난 능력이 아니었으면 언감생심 주인의 그 허접한 능력으로 그런…….”
“해제!”
하룬은 녀석의 말을 다시 중간에서 끊어 버렸다. 외모도 그렇고 목소리도 변해서 이전처럼 무조건적인 적개심이나 혐오감은 들지 않았지만 녀석의 성격만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주인을 무시하고 제 잘난 맛에 빠져 있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녀석을 부리려면 해독약부터 확보해야겠지.’
비록 시작은 늦었지만 그가 눈부신 속도로 레벨 업하는 이면에는 싸가지의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앞으로도 싸가지의 능력이 수시로 필요할 것이다.
하룬이 해독약을 확보할 방안을 고민할 때였다.
-주인! 주인!
‘어엉? 이게 뭔 소리야?’
놀랍게도 싸가지가 자신에게 의지를 보내온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환 대기를 하지 않으면 서로 의사를 전달할 수 없었다.
-말하는 데 끊는 것은 실례라고. 어떻게 주인이 돼 가지고 그렇게 몰상식한 행동을 할 수 있어? 그건 상식이라고. 이제껏 도대체 뭘 배우고 살아온 거야?
녀석의 말에 하룬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앞으로 골치가 좀 아프겠다는 생각이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
-너 혼자 멀리 나가지 마. 난 그저 중독이 심해서 서둘러 소환 해제한 것뿐이야.
이제 어린애 같은 외모를 가졌으니, 특히 귀여운 여자애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 이전처럼 쉽게 주먹도 나가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해독약 한 알을 버릴 생각을 하고서라도 불러서 신 나게 팼을 텐데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외모라는 것이 중요하긴 한가 보다.
-아무튼 조심하라고. 내가 언제 한번 잡아 놓고 존재들 간에 당연히 지켜야 할 에티켓에 대해서 한번 강의를 해 주든지 해야지, 원. 주인 한번 잘못 만나서 이 위대한 능력을 지닌 싸가지가 이렇게 험하게 대우받다니.
-그만해라!
-주인이 상식과 교양 면에서 부족하다는 건 사실이잖아. 인간관계도 약한 건 물론이고 성격도 무척이나 충동적이고 폭력적이며…….
-닥쳐!
하룬은 머리칼이 곤두섰다. 스스로도 녀석의 말 중 일리가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듣는 것은 심하게 불쾌했다. 그것도 자신의 펫에게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아주 심하게 불쾌했다.
-쳇! 사람이 말이야. 부끄럽고 창피하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경청하는 자세를 가…….
-아무래도 진지한 대화의 시간이 서로 필요한 거 같은데 어때? 생각 있어?
살기 어린 하룬의 말에 녀석은 그제야 툴툴거리던 것을 멈추었다.
-난 좋은 정보를 주려고 했다고. 왜 주인이 되어 가지고 그렇게 폭력적이야? 원하던 대로 예쁜 여자아이가 되었잖아. 나도 가끔은 사랑받고 싶다고.
그랬던가?
녀석이 외모를 바꾼 이유가 그런 것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어쩌면 벨의 영향으로 자신이 그렇게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마음을 가장 잘 파악하는 녀석이니 말이다.
‘펫은 펫이라 이건가? 사랑받으면서 같이 성장하는…….’
-흐흐흐! 설마 진짜로 믿는 건 아니지? 나도 이제 전직했으니 짝을 찾아야지. 그런 꼴로는 내가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가졌어도 누가 날 좋아하겠어?
‘빌어먹을!’
어째 녀석이 무척 많이 진화한 느낌이었다. 주인을 가지고 놀려는 것을 보니 머리를 쓰는 쪽으로 많이 발달했다.
‘그런데 정령은 원래 무성無性 아니었나?’
의아한 하룬이었지만 그 의문을 오래 품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 주인에게 정령력도 상당히 있고, 내 정령력까지 빌려 쓸 수 있으니까 하급 정령은 아무나 불러서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려고 했어.
눈이 확 뜨이는 정보였다. 아까 확인한 상태 창에서 본 사항이지만 그때는 눈에 확실하게 들어오지 않았었다.
-내가 이제 하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는 거야?
-당연하지. 흐흐흐. 이 위대한 싸가지를 고맙게 여기라고. 계약 같은 것도 필요 없이 사대 속성의 하급 정령들을 소환할 수 있게 되었으니 웬만하면 나 귀찮게 하지 말고 걔들 불러서 시키라고. 알았지? 소환하는 것도 간단해. 그냥 녀석들의 이름과 함께 ‘소환’이라고 외치면 되니까.
비록 전직 후에 더 영악해지고 싸가지는 더 없어진 녀석이지만 마음에 드는 것도 있었다.
마법사로 전직한 것도 아닌데 정령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으니 녀석의 말투 정도야 관대하게 넘길 수 있는 것이다.
-알았어. 고맙다.
바라던 바였다.
하급 정령을 불러서 할 수 있는 일이면 굳이 중독당해 가면서 녀석을 부를 필요는 없었다. 평상시 뭘 좀 시키려면 투덜거리거나 온갖 생색을 다 내는 녀석을 하룬 역시 보고 싶지 않았다.
-난 이제 쉴 테니까 수고하라고.
녀석의 목소리에서 편하게 누워서 꼰 발을 건들거리고 있는 장면이 연상되자 속에서 뭔가 욱하고 치밀어 올라왔다.
‘이걸 확!’
왜 부아가 치미는지 모르겠지만 하급 정령에 대한 호기심으로 고개를 흔들어 그런 충동을 애써 지웠다.
“실프 소환.”
눈앞 공간이 일렁이더니 한 쌍의 날개를 가진 실프가 현신했다. 키는 50센티 정도에 영락없는 미인의 얼굴과 몸을 가졌다.
“반가워, 난 하룬이야.”
실프는 반갑다는 듯 수시로 색이 바뀌는 눈을 빛내며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한 번 숙여 인사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하급 정령과의 의사소통이 어렵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바람 좀 일으켜 줄래. 땀 좀 식히게.”
하룬의 말에 실프는 작은 날개를 파드득거렸다. 하지만 그 날개에서 일어난 바람의 세기는 강한 방호력을 가진 방어구를 통과해서 전신을 시원하게 만들 정도로 강했다.
“너 뭐 할 줄 아니?”
하룬의 물음에 실프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아무리 버릇없는 말투를 가졌지만 그래도 의사소통이 되는 싸가지와 비교하니 답답하기만 했다. 게다가 정령 마법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니 뭘 시켜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하룬은 실프를 돌려보내고 상태 창을 확인했다. 소환된 동안에도 거의 느끼지 못했지만 생각대로 마나는 거의 소비되지 않았고, 정령력 역시 소모가 적었다.
하룬은 내친김에 운디네를 불러 몸을 씻었고, 살라만다를 소환해서 2서클 마법의 위력에 해당하는 화염을 토해 내는 것을 구경했다.
마지막으로 소환한 노움은 크기가 가장 컸다. 마치 이야기로 들은 드워프처럼 작은 키에 뚱뚱한 몸을 가졌는데 얼굴이나 그 표정은 예전 싸가지의 그것과 똑같았다.
“왜 불렀냐?”
놀랍게도 대지의 정령은 삐딱한 말투지만 말을 할 수 있었다.
“으응? 너 말할 줄 알아?”
“당연하지. 소환자의 몸에 대지의 마나와 정령력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도 모르냐?”
까칠한 말투였지만 싸가지를 만났을 때와 달리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다른 정령과 달리 의사소통이 가능한 노움에게 강한 호기심을 가졌다. 또한 얼굴을 보면 꼭 노인 같지만 느낌은 또래처럼 편해서 호감이 갔다.
“내가?”
“그래, 네 몸에는 아주 진한 대지의 기운이 뭉쳐 있어. 특히 네 발 쪽에.”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움의 말을 이해할 것 같았다. 수시로 수련하는 메신저 워킹 스킬의 영향이었다. 주로 대지가 품고 있는 마나를 발을 통해 받아들이고 있어 대지 속성과는 친화력이 높아진 것 같았다.
“근데 넌 이름이 뭐냐?”
이름이라는 말에 노움의 얼굴 표정이 묘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없어. 하나 지어 줄래?”
대답하는 목소리에서 아무런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왠지 희미한 기대가 흘러나왔다.
이전에 싸가지의 이름을 지어 줄 때 무척이나 고생(?)했던 탓에 잠시 고민하던 하룬을 노움은 작은 눈을 빛내며 쳐다보았다. 늘어진 볼 살이 순간순간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 이 일에 뭔가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대지는 생명의 근원이니 라이피가 어떨까? 너무 여자 같은 이름인가?”
“아니, 마음에 든다. 이제 난 라이피, 앞으로 네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그대의 운명에 종속되어 라이피로 살아갈 것이다.”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환하게 웃는 라이피의 몸 주변에 잠시 순백의 광채가 일렁였다가 사라졌다. 다시 보인 라이피의 외관은 약간 달라졌다.
특별한 곳을 짚을 수는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날렵해졌다는 느낌이 들었고, 얼굴 역시 노인의 그것과는 다른 편하면서도 푸근한 인상을 주었다.
“넌 무슨 마법을 할 수 있니, 라이피?”
“마법? 아, 내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을 말하는 거구나. 일단 다양한 깊이와 넓이를 가진 구덩이들을 만들 수 있고, 한순간에 흙으로 벽을 비롯한 온갖 형상을 만들 수 있지. 그리고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에는 생명의 마나를 나누어 줄 수도 있고, 깊이의 한계는 있지만 땅속에 묻힌 광석을 찾아낼 수도 있어.”
“오! 대단한데.”
하룬은 정말 감탄했다. 하급 정령인데도 그런 것이 가능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예전 용병 아카데미에서 듣기로 대지의 정령은 땅에 구멍을 파는 정도밖에는 그 능력이 없다고 했던 것이다.
“우리 정령들은 계급에 따라 발휘할 수 있는 힘이 다르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소환자의 친화력이야. 상급 정령이라도 소환자의 친화력이 낮으면 제대로 의사소통을 할 수가 없어서 가진 힘을 다 쓰지 못해. 하지만 계급이 낮아도 소환자의 친화력과 정령력이 강하면 자유로운 의사소통은 물론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지. 특히 동일한 정령을 대상으로 자주 소환하고 힘을 쓰게 만들면 계급까지 올릴 수 있어.”
하룬은 눈을 빛냈다. 녀석의 말은 일반적인 정령 마법의 이론과는 그 궤를 완전히 달리했다. 세상에 알려진 바로는 정령사가 정령을 소환하면 정령계에서 무작위로 소환된다고 한다. 즉, 소환할 때마다 매번 그 정령이 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라이피는 그 속설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럼 널 다시 소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내 이름을 부르면 돼. 정령에게 이름이 주어진다는 것은 물질계에서 그 존재 질서에 각인된다는 것을 의미하거든. 즉, 물질계에서도 시간의 흐름이나 경험의 축적에 따라 성장할 수 있다는 말이지. 우리가 있는 정령계는 시간의 흐름이 적용되지 않는 곳이거든.”
좋은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라이피를 일단 정령계로 보낸 하룬이 미처 알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이제껏 그 어느 정령사도 그의 경우처럼 하급 정령과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다.
아주 오래 전에 이름을 가진 정령들이 몇 번 존재했다는 전설은 전해지고 있었지만, 상고시대에 존재했던 고엘프들로부터 발원한 정령 마법이 이론적인 틀을 가지게 된 후로는 누구도 정령에게 이름을 지어 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령 친화력을 타고난 일부 정령사들의 경우 어린 시절 치기 어린 마음에 귀여운 정령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 경우는 있었지만,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있으며 그것이 정령의 성장으로까지 이어진 경우는 없었다.
정령력과 친화력이 올라가면 부리는 정령이 달라지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한 정령사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엘프들의 담백한 성정상 특정 정령에게 애정을 쏟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해독약이 이제 세 알밖에 없어 아깝긴 하지만 녀석의 능력을 이용하면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하는 것은 어려울 거 없지.’
이전에 센 강을 넘기 위해 수면 물질을 살포했던 것을 생각하면 수련 캠프 전체에 수면 독을 뿌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소수의 인원으로 수련생들을 구출하려면 선별적으로 중독을 시켜야 한다는 점이었다.
일단 전직한 싸가지 덕분에 구출에 대한 실마리를 잡은 하룬은 다시 일행과 합류했다.
대원들은 평상시와 달리 극도의 불안에 시달리는 홀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그녀의 눈치만 보았다. 아버지의 생사가 달려서인지 홀의 트레이드마크인 평정심이 깨진 것 같았다.
“자, 모여 봐!”
하룬의 외출이 무언가를 생각하기 위한 것이라고 여겼던 대원들이 다소 안도하는 얼굴로 모여들었다. 홀 역시 기대 어린 얼굴로 그의 곁에 앉았다.
“적들은 목책에 설치해 놓은 알람 마법의 존재를 상당히 믿고 있어서 경계가 느슨하다. 몸이 가벼운 시린느가 문 여는 걸 맡아. 일단 왼쪽 건물부터 장악할 생각이다. 정령으로 감시자들만 선별해서 수면 물질을 뿌릴 테니 수련생들의 포박을 풀고 탈출하는 것에 모두가 전력을 기울여.”
“아, 맞아! 대장 정령 마법사였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필립이 반색했다. 이전에 센 강을 건넜을 때도 정령의 도움을 확실하게 받았던 것을 떠올린 대원들과 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신속하고 조용하게 움직여야 해. 일단 식사 시간을 노리자. 어차피 적들은 알람 마법을 믿고 있으니 침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야. 먼저 양쪽 건물에서 포로들을 구하는 일을 처리하고 나서 빨리 합류해야 해. 캠프의 수뇌부가 잡혀서 고초를 겪고 있는 본부 건물을 장악하려면 모두의 도움이 필요해. 그곳에는 적들의 수뇌부가 거의 모두 모여 있을 테니까.”
“명령만 하세요!”
입술이 바짝 마른 홀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해가 막 저무는 시간이었다. 산은 더 빨리 어둠에 잠식되었다. 보통 마을이라면 요리나 난방을 하느라 연기가 날 시간이지만 캠프는 괴괴한 적막에 싸여 있었다.
시린느와 티노가 도움닫기 해서, 깍지 낀 하룬의 손을 박차고 목책 안으로 넘어가고, 하룬과 홀이 그 뒤를 따랐다.
문의 빗장을 벗기는 것을 맡은 시린느가 정문으로 향하자 하룬은 기민하게 왼쪽 건물을 향해 움직였다.
‘해독약은 정확하게 세 알밖에 남지 않았으니 절대로 실수하면 안 돼.’
하룬은 건물 벽을 따라 소리 없이 움직였다.
티노와 홀이 미리 알아 온 대로라면 건물 앞과 안쪽에 한두 명이 배치되어 있다고 했다. 아마 두 명이 배치된 모양이다.
맞은편 건물을 쳐다보자 그곳에도 두 명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복장으로 보아 기사들이었다. 밖에서는 남들의 우러름을 즐길 기사들이 이곳에서는 감시자에 불과한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하룬은 은밀하게 싸가지를 소환했다.
“드디어 작전 개시인 거야? 호호,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야?”
외모뿐 아니라 성격까지 바뀐 것일까? 싸가지의 목소리에서 강한 호기심이 드러났다. 중독을 알리는 안내음이 아니었다면 싸가지를 소환한 것을 순간적으로 의심할 뻔했다.
“양쪽 건물의 감시자들만 재울 수 있겠어?”
“그 정도야 간단하지. 맡겨만 줘.”
싸가지는 바람처럼 날아 양 건물을 오가며 하룬이 시킨 일을 정확하게 해냈다. 싸가지가 돌아오자 재빨리 해독약과 마나 포션을 마신 하룬은 수신호를 보내 홀과 티노를 불렀다.
“벌써 처리한 겁니까?”
티노도 그렇지만 홀도 너무 빨리 처리했다고 하니 믿기 힘들어하는 얼굴이었다. 전에도 정령을 부리는 것을 보긴 했지만 그때는 완전히 어둠 속이었기에 상황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었다.
하룬은 손을 흔들어 그들의 걱정을 가라앉혔다.
“빨리 갑시다.”
건물의 앞으로 가니 과연 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문을 여니 안쪽에도 세 명이 쓰러져 있었는데 비명조차 없었던 것에 정말 놀랄 지경이었다.
실내에는 감시자들을 위한 모닥불 하나가 피워져 있을 뿐 어두침침했다.
그 어둠 속에서 짐승처럼 번들거리는 안광들이 한꺼번에 새롭게 나타난 그들을 향하자 홀과 티노는 상황을 알면서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불이 붙은 나뭇가지를 들어 안을 자세히 보니 백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마치 짐승처럼 발목에 족쇄를 찬 채 벽 쪽에 있는 기둥들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 상태로 계속 구속했는지 실내는 제대로 씻지도 못한 사람들의 악취로 가득했다.
식사도 못 하고 씻지도 못한 사람들의 몰골은 그야말로 거지꼴이었다. 더구나 한쪽에는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기식이 엄엄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홀은 이를 악물었다. 설마 이런 고초를 당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브리엘라 황녀님의 명령을 받고 온 홀 에반스다. 여기 선임이 누군가?”
브리엘라 황녀의 선물로 보이는 영롱한 보석 목걸이를 들어 보이는 그녀의 외침에 잠시 이곳저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한 사람이 쇠사슬을 끌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렇게나 자란 머리칼과 수염으로 나이를 종잡을 수 없었고 오랜 굶주림과 구타로 많이 상한 얼굴을 가진 사내였다. 하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기사 라이만입니다. 혹시 단장님의 영애이십니까?”
“맞다!”
“어떻게 이곳을…….”
라이만은 감격한 얼굴이었지만 너무나 뜻밖의 출현에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수련 기사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쇠를 찾았습니다.”
그사이 티노가 쓰러진 감시자들 사이에 놓여 있던 긴 탁자 위에서 열쇠를 찾아냈다.
“근처에 안전한 곳이 있나?”
티노와 하룬이 족쇄를 푸는 동안 홀이 라이만에게 물었다.
“제 2캠프가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하지만 캠프를 맡고 계시던 자작님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본부 건물에 갇혀 계십니다.”
“그들도 구출할 것이다. 적들의 정체는 파악했나.”
그녀의 말에 라이만의 눈에 비로소 안도의 빛이 떠오르며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슐레이만 후작가 사람들이었습니다. 기사들은 레드이글 기사단이고 마법사들은 생소한 마법을 구사했습니다.”
그사이 족쇄가 풀려 운신의 자유를 얻은 수련생들이 하룬과 티노를 도와 더 많은 수련생들의 족쇄를 풀기 시작했다. 때문에 모두의 발을 연결했던 족쇄는 순식간에 풀렸다.
“일단 몸 상태가 좋은 사람들은 환자들과 거동이 불편한 동료들을 부축해서 캠프를 빠져나가라. 나와 함께 온 돌풍 용병대원들이 여러분을 도울 것이다. 라이만, 할 수 있겠나? 우린 나머지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
“기사 라이만, 실수 없이 모두 안전하게 2캠프장으로 이동시키겠습니다. 부디 조심하시길. 기이한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들의 숫자만 해도 열이 넘습니다.”
“그곳에서 보지.”
차갑고 딱딱 떨어지는 홀의 말에는 강한 염려와 안도감이 묻어 나왔다. 평소에는 조용하던 홀은 타고난 카리스마로 순식간에 수련 기사들을 휘어잡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부드러운 여성의 모습보다는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오랫동안 갇혀 있던 수련 기사들의 사기에 도움이 된다.
이미 하룬과 티노의 모습은 더 이상 실내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벌써 맞은편 건물로 향한 것 같았다.
홀은 작게 한숨을 쉬며 황급히 발을 옮겼다. 자신의 일도 아닌데 저렇게 애쓰는 것을 보니 남다른 정이 느껴졌다.
맞은편 건물에 갇힌 수련생들을 모두 구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중에 자신들 측으로 전향시키려는 의도였는지 족쇄로 구속한 것 말고는 특별히 괴롭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제 재수 4인방까지 안으로 들어와 수련생들을 돕는 것을 확인한 세 사람은 나는 듯이 본부 건물로 향했다. 군데군데 피워 놓은 모닥불이 수련 캠프를 밝혔지만 사각을 통해 이동하는 세 사람의 움직임은 노출되지 않았다.
비록 망루나 목책 주위를 지키는 인원은 없었지만 본부로 향하는 길목 주변에는 드문드문 감시자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유저로 짐작되는 자유 복장을 한 사람들이었다.
쉭!
크윽!
하룬의 비수에 맞은 유저가 손으로 목을 잡으며 쓰러졌다. 언제 꺼냈는지 홀의 손에 쥐인 은색 줄에 목이 감긴 감시자는 비명도 없이 죽었다.
NPC라면 좀 마음에 꺼리는 것이 있겠지만 부활이 가능한 유저에게 손을 쓰는 것은 그나마 부담이 덜했다. 움직이면서 비수를 날리는 하룬의 손에 감시자들은 작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본부 건물은 3층 규모로 굉장히 컸다. 별다른 가구나 설비가 없는 입구 쪽 건물에 비해 목재뿐 아니라 석재까지 써서 공들여 지은 티가 났다.
건물의 옆에 접근한 세 사람은 미리 이야기가 된 대로 하룬이 먼저 건물로 침투하고 두 사람은 신호를 기다리기로 했다.
하룬은 처음 침입했던 루트를 이용하기로 했다.
가볍게 벽을 타고 올라 지붕 한쪽에 난 굴뚝을 두 발로 지지해서 내려가 1층 가까이 도착했을 때 많은 사람들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음식 냄새가 진하게 나는 것으로 보아 식사를 하는 것 같았다.
“빨리 서둘러라.”
“마법사들은 식사를 마치는 대로 지하실로 내려오라는 자작님의 명입니다.”
“대법이 진행되는 동안 기사들은 본 건물을 엄중히 경호하라는 명령이니 군장을 갖추고 대기하기 바란다. 각 대는 지대장의 명령에 따르라.”
식사하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명령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엄정한 군기를 가진 기사들이 틀림없었다.
이제 싸가지를 소환할 시간이었다.
‘해독약이 두 알밖에 남지 않았어. 빨리 어떻게 해야겠다.’
사기적인 능력을 가진 싸가지를 더 이상 소환하기 힘들다는 것에 무척이나 속이 쓰린 하룬은 잠시 인상을 쓰다가 조용히 녀석을 소환했다.
“이번엔 어떻게 해줄까, 주인?”
“이 건물 내부에 수면 물질을 모두 살포해 버려.”
“오케이. 신 난다.”
“적당히 하라고. 너무 방방거리지 말고. 마법사들도 있다니까 조심하고.”
“호호, 알았다니까. 내 능력을 어떻게 보고. 몇 명은 내 존재를 알아차릴지언정 중독은 피할 수 없을 거야. 주인이 원한다면 다 죽일 수도 있는데, 어때?”
생글거리는 귀여운 얼굴로 죽인다는 소리를 쉽게 하는 싸가지의 모습이 엽기적이라고 생각하던 하룬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이들은 정확하게 홀의 적이지 자신의 적은 아닌 것이다.
싸가지가 홀연히 날아가고 얼마 후 식기가 떨어지는 소리와 몸이 의자와 함께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안내음이 들려왔다.
-중독 상태가 심각합니다. 생명력이 30% 이하로 떨어집니다.
하룬은 상태 창을 띄워 놓고 생명력이 10%에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지하까지 네 개 층에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수면독을 펼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에 한계 상태까지 버텼다.
마침내 생명력 수치가 11%가 되었을 때 싸가지의 소환을 해제한 하룬은 중독되어 파랗게 변한 얼굴로 힘겹게 인벤토리에서 해독약과 생명력, 마나 포션을 꺼내 순차적으로 복용했다.
“휴우, 큰일 날 뻔했구나.”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오자 솟아오른 식은땀을 소매로 훔친 하룬은 벽난로를 통해 실내로 진입했다.
그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여기저기 쓰러진 사람들과 그 와중에 넘어진 식기며 의자들로 실내는 발 디딜 틈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대부분이 정복을 착용한 기사들이었다.
“후후, 완전 엉망이군. 녀석, 정말 쓸 만하단 말이야.”
하룬은 재빨리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찾았다. 내려가는 계단에도 네 명의 기사들이 쓰러져 있고, 닫혀 있던 문 뒤에도 두 명의 기사들이 엎어진 상태로 있었다.
세뇌 마법이 일찍 펼쳐졌을까 봐 마음이 급했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비수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조심스럽게 전진하던 하룬의 귀에 작은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고개 돌려 소리가 들리는 곳을 보니 보라색 모자를 쓴 마법사 한 명이 힘겹게 눈을 뜨고 그를 향해 독살스러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해골처럼 마른 마법사의 얼굴은 그 나이조차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늙었다.
수면독을 극복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노마법사는 연방 눈을 뜨고 감기를 계속했는데 그의 주변에는 두 명의 마법사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누군……데 감히 내게 독을…….”
마법사는 마치 마법을 펼치려는 듯 두 손을 천천히 추켜들었다. 팔목에는 작은 해골 모양의 돌들로 만든 팔찌와 뼈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하얀 완드가 채워져 있었다.
홀이 말하길 세뇌 마법은 일종의 흑마법, 이 노인은 상당한 수준의 흑마법사가 틀림없었다. 제대로 입을 벌려 주문을 외우기라도 하면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원한 관계도 없는 상황이라 아직 비수를 날리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정체를 들키기라도 하면 귀찮아질 것이다.
그래도 굴뚝을 타고 들어오며 자연스럽게 얼굴에 검댕이 묻어 인상착의를 몰라보는 것이 다행이었다.
“스틱! 페트리파이(석화)!”
“허억!”
방심했다. 원한 관계가 없어 주저한 것이 실수였다.
수면독에 저항은 하고 있었지만 워낙 늙어 보이는 모습이라 손을 쓰기가 망설여졌는데 마법사의 힘은 무서웠다.
힘이 빠져 주문도 외우지 못할 줄 알았는데 그가 주문을 외우는 순간 하룬의 발이 바닥에 붙어 버렸다. 더구나 몸 전체가 돌로 변한 듯 단단하게 경직되어 버렸다.
놀란 채로 굳은 하룬의 얼굴을 본 노마법사의 얼굴에 음침한 미소가 떠올랐다.
“6서클에 오르면 독에 대한 저항력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을 간과한 모양이군. 그래도 해독하느라 꽤 많은 마나를 날려 버렸군. 그나저나 넌 누구냐? 누구기에 이런 강력한 수면독을 이렇게 짧은 순간 기척도 없이 살포할 수 있단 말이냐? 어쌔신인가? 아니면 마법사?”
노마법사는 끔찍한 살광과 흉광을 번득이며 하룬을 쏘아 보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수면독을 해독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위험하다.’
하룬은 몸을 움직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작은 경련이 일어날 뿐 마치 얼어 버린 듯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마법사가 음침하게 웃었다.
“클클클, 내 마법은 백마법을 쓰는 놈들보다 한 수 위야. 기대해, 이곳에 들어온 놈들은 모두 내 마법 실험체로 써서 산 채로 지옥을 경험하게 만들어 주지.”
리치처럼 끔찍한 몰골을 한 노마법사의 이빨 없는 입에서 듣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저주가 흘러나왔다. 어떤 성정을 가졌는지 안 보아도 눈에 훤했다. 하룬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마법사의 걸음에 차츰 힘이 실렸다.
‘안 돼!’
눈알이 터져 나갈 정도로 힘을 쓰던 하룬의 이빨이 마침내 덜덜 떨렸다. 그 와중에 입술만 간신히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마법사는 그와 다섯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까지 접근했다.
“제대로 된 지옥을 보여 주지.”
팔뚝에 채워진 완드의 끝부분을 하룬에게 향하고 마법사가 막 주문을 외우려는 순간 하룬이 급하게 소리쳤다.
“라이피, 묻어 버려!”
그게 가능할지 어떨지는 생각도 못 하고 급한 마음에 소리친 하룬이었다.
쩌억!
하지만 기적처럼 마법사가 내딛고 있는 단단한 바닥에 깊은 구덩이가 생기더니 그 노쇠한 몸뚱이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위에서부터 바닥이 붙어 버렸다.
“허억! 크으윽!”
순식간에 흙으로 메워진 구덩이는 비명마저 삼켜 버렸다.
“라이피, 단단하게 굳혀 버려!”
하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흙이 살아 있는 것처럼 모여들었다. 그렇게 다져진 땅 위로 라이피의 모습이 현신했다.
“큰일 날 뻔했어. 조심해!”
“고마워, 라이피. 정말 나와 주었구나.”
하룬은 간신히 입술을 달싹거려 고마움을 표시했다. 워낙 위급한 상황이라 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라이피를 소환해서 부탁했지만 정말 이루어질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비록 마법사는 겨우 해치웠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발은 아교로 바른 듯 바닥에 붙어 있고 몸도 입 주변을 제외하고는 돌덩이처럼 굳어서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라이피, 무슨 방법이 없을까?”
라이피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내 정령계로 돌아가 버렸다. 녀석까지 떠나니 불현 듯 불안감이 증폭되었다.
‘혹시 이대로 평생 지내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몸이 오싹했다. 마법사를 죽인다고 마법이 풀리는 것은 아니다. 상대는 자신의 입으로 6서클 마법사라고 했으니 그와 동등한 레벨의 마법사가 아니고서는 마법을 해제할 수 없다.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마법사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이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입만 열 수 있으면 두려운 마법을 펼칠 수 있으니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가.
그렇다고 마냥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밖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홀과 티노가 참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오면 상황은 좀 나아질 테지만 그러기까지는 한참이 지나야 한다.
‘뭐든 해 보자.’
굳게 마음먹은 하룬이었지만 그 상태로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정령을 소환하는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싸가지를 소환할 수도 없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중독되면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정령 중에 의사소통이 가능한 라이피의 능력으로는 그를 어떻게 할 수 없어 보였다.
자칫 라이피가 실수라도 하면 그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굳은 상황에서 바닥에 쓰러져 산산조각으로 깨어질지도 몰랐다.
‘가만. 깨진다? 그래, 한번 해 보자.’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하룬은 운디네를 소환했다. 비록 대지의 마나만큼은 아니지만 라이피와 한 것처럼 운디네와 관계를 맺어 보기로 한 것이다.
하룬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그를 향해 무표정하게 떠있는 운디네를 향해 간절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내가 주는 이름은 나이아. 내 친구로 언제나 널 곁에 두고자 하니 이름을 받아 줄래?”
과연 통할지 자신할 수 없지만 강렬한 의지를 담아 운디네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