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수련 캠프의 변고 (38/278)
  • 《수련 캠프의 변고》

     “젠장! 무슨 산이 이따위야? 소문보다 더하네.”

     연방 투덜거리며 몬스터의 피가 잔뜩 묻은 방패를 흔들어 터는 지탄의 투덜거림대로 후크란 산맥에 서식하는 몬스터의 밀도는 정말 엄청났다.

     “환경이 너무 좋은 게지.” 

     피로한 얼굴이었지만 티노가 대꾸해 주었다.

     “하긴!”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크란 산맥은 상당한 고도의 고산 지역임에도 센 강을 다라 솟아오른 무수한 고봉高捧들이 마치 병풍처럼 남쪽의 초지를 제외한 세 방향을 막고 서 있었다.

     덕분에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듯한 바람은 산을 넘지 못하여 평균 기온이 평지보다 더 높았고 또한 강수량이 많아 식물들이 자라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다양한 종류와 식물들이 빠르게 성장하는 곳이니 당연히 초식동물들이 번성했고, 그 뒤를 따라 맹수들과 몬스터들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다른 곳과 달리 먹이가 풍부하다 보니 그 영역도 좁았다.

     후크란 산맥의 입구인 클리프 협곡을 통과한 지 벌써 닷새 째였다. 그동안 상대한 몬스터들을 생각하면 뭔가에 분노하여 사방에 쫙 깔렸을 것으로 예상했던 럼프 오크들의 영역을 별다른 교전 없이 지난 것이 기적이었다. 그들의 본거지 바로 위의 산을 지났는데도 만나지 못했으니 말이다.

     물론 소규모로 움직이는 녀석들과 조우하긴 했지만 티노의 놀라운 척후로 미리 알아채고 다른 길로 돌아온 덕분에 놈들과의 전투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행운은 그것이 다였다.

     후크란 산맥에는 럼프 오크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하룬 일행은 고블린들과는 여섯 번, 블랙 오크들은 네 번이나 만났다. 모두 이삼십 마리가 넘는 무리여서 본의 아니게 많은 피를 보아야만 했다.

     한두 마리씩 다니는 블랙 베어들은 수시로 마주쳤으며 사나운 그리폰의 습격도 두 번이나 받았고, 늑대들과도 세 번이나 혈전을 치러야만 했다.

     그 와중에 털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알파인 여우 떼를 사냥하는 행운도 얻을 수 있었다.

     도축 수련과 가죽에 대한 욕심으로 쉴 새 없이 움직인 시린느 때문에 티노를 제외한 대원들은 엄청난 무게와 부피의 가죽 뭉치를 지고 있었다.

     ‘그래도 오우거나 트롤을 만나지 않은 게 행운이지. 티노의 놀라운 정찰이 아니었다면 다들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없었을 거야.’

     어쩌면 고산지대가 길게 펼쳐진 후크란의 북쪽 지역에는 트롤이나 오우거의 서식지가 없는지도 몰랐다. 그들이 상대한 몬스터들의 괴력을 생각하면 거의 개별적으로 생활하는 트롤이나 오우거들은 이곳의 몬스터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이젠 나올 때도 됐는데.’

     이곳까지 오는 동안 하룬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대원들이 자잘한 상처를 많이 입었다. 날이 갈수록 쌓이는 피로와 수면 부족으로 전투력이 떨어진 탓이었다.

     대신 무섭게 곤두선 긴장감과 집중 상태 때문인지 전투 감각은 며칠 사이 상당히 향상되었다. 이제는 굳이 작전을 짜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공격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는 시간이 지속된 것은 일행에게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피로를 주었지만 반면에 숨어 있던 잠재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었다.

     미처 대원들의 상태 창을 확인할 여유는 없었지만 하룬은 대원들의 레벨이나 실력이 상당한 폭으로 올랐을 거라고 확신했다.

     용병 아카데미를 수료한 지 불과 몇 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자신을 포함한 일행 모두의 실력은 그때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했다. 갈수록 강해지는 대원들의 눈빛이 그것을 증명했다.

     점심 무렵이 되어 작은 산을 하나 더 넘었을 때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예요.”

     감정을 거의 표현하지 않던 홀이 반갑게 소리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홀이 가리키는 곳을 향했다.

     “오오! 드디어!”

     역전의 노장인 티노가 탄성을 질렀다. 일행이 오른 작은 산 건너편에 홀이 말한 수련 캠프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찾던 수련 캠프는 절묘한 지형에 위치했다. 만년설이 쌓인 후크란 주봉의 중턱에 자리 잡은 수련 캠프의 위와 아래쪽은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이동을 위해서는 산 아래쪽에서 똑바로 올라갈 수는 없고, 절벽의 양편에 급경사를 이룬 사면을 타고 올라 옆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건너편 산 중턱에 자리한 수련 캠프를 보자 여행 내내 무심한 표정을 견지해 왔던 홀의 얼굴에도 표정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떠올랐다.

     “일단 여기서 잠시 쉬어 가지요, 대장?”

     하긴 눈에 들어오긴 해도 능선을 타고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하니 꽤 걸릴 것이다. 티노의 제안을 받아들었다.

     “그러지요. 다들 휴식!”

     몬스터가 아무리 많은 곳이라고는 해도 바위밖에 없는 산 정상이라 쉬기에는 제격이었다.

     “어쨌든 여기까지 별 사고 없이 와서 다행입니다.”

     티노는 내심 마음을 졸였는지 개운한 얼굴로 수련 캠프를 보았다.

     옅은 구름 속에 잠긴 수련 캠프는 다섯 동의 크고 작은 건물과 연무장 두 개 그리고 세 개의 망루를 가진 상당한 규모였다. 용병 아카데미와 비교하니 대충 이삼백 명 정도가 숙식할 수 있는 규모였다.

     “이제 고생 끝이네. 빨리 가서 목욕이나 해야지.”

     시린느 역시 얼굴이 활짝 피었다. 센 강을 끼고 이동할 때는 수시로 강이나 웅덩이에서 몸을 씻곤 했지만 산맥 안으로 들어온 이래로 씻을 곳이나 그럴 만한 기회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난 잠이나 제대로 잤으면 좋겠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몬스터들과 맹수들 때문에 잠이 부족하긴 했다. 유난히 잠이 많은 라트리나의 하소연에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기대 어린 얼굴로 짐을 들고 후크란 주봉으로 향하는 가파른 능성을 탈 준비를 할 때 한동안 수련 캠프를 보던 하룬은 이상한 생각이 드어 티노를 돌아봤다. 마침 그도 하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역시. 대장님도 느낀 거죠?”

     “네, 이상하군요.”

     하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왜? 뭔데?”

     필립을 비롯해서 홀까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움직이는 사람이 거의 없어. 게다가 망루에도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

     티노의 심각한 목소리에 수련 캠프를 자세히 보니 과연 그랬다. 멀리 떨어지긴 했지만 사람의 형상까지 보지 못할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다.

     저 정도 규모라면 아무리 수면 중이거나 휴식을 취하더라도 최소한 망루에는 사람이 있어야 했는데 망루는 텅 비어있었다.

     “어디 집단으로 파견이라도 나갔나?”

     필립이 홀을 쳐다보았다. 홀이라면 뭔가 아는 것이 있을 거라고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홀의 눈에도 의아함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동안 정기적으로 오가던 연락이 끊어졌다고 했지? 무슨 일이 있긴 있었군.’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은 단숨에 어디론가 날아갔다. 데브론에게 듣기로, 이곳에서 수련하는 사람들이 브리엘라 진영의 비밀 무기가 될 거라고 했다.

     이곳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수련 기사들이 잘못된다면 브리엘라 진영은 골든 배틀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곳에 있는 수련 기사들의 존재는 그들의 핵심 전력이었다.

     “혹시 모르니 일단 저쪽에서 보이지 않도록 능선 사면을 타고 움직인다.”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대원들과 눈에 띄게 초조한 얼굴이 된 홀에게 지시를 내린 하룬이 앞장섰다.

     수련 캠프가 있는 후크란 주봉까지는 험준한 능선이 펼쳐져 있었다. 능선에는 나무가 보이지 않았고, 날카롭고 거대한 바위들과 일부의 평탄한 지형에는 억새가 밀생했다.

     하룬 일행은 능선보다 약간 아래쪽 사선을 타고 이동했다. 능선 자체가 상당한 고지여서 눈에 들어오는 동물들이나 몬스터가 없어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마침내 수련 캠프가 똑바로 내려다보이는 능선에 도착해서 보니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동해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산길이 아래쪽으로 나 있었다. 필시 수련 캠프에 거주하는 이들이 수련이나 필요에 따라 오가던 길일 것이다.

     하룬은 수련 캠프와 가까우면서도 나무 몇 그루가 자연스럽게 넓은 공간을 형성하는 곳에서 발을 멈추었다.

     “잠시 여기서 쉬었다가 요기를 하고 몸을 가볍게 한 다음 이동하자.”

     “그럼 이 짐들은 어떻게 하지, 대장?”

     “일단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숨겨 놓아야지. 아래쪽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니까.”

     체력이 가장 약한 시린느는 제 키보다 더 높은 짐을 내려놓는다는 것에 만족하는 얼굴이었다. 하긴 그녀가 진 짐만 해도 가죽이 오십 장이 넘으니 힘이 부족한 그녀로서는 어깨가 빠질 것 같았을 것이다.

     도축한 가죽 짐을지지 않은 사람은 척후를 맡은 티노와 의뢰 당사자인 홀이 유일했다.

     사실 이번 여행의 보상은 그들이 지고 있는 가죽의 가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럼프 오크나 그리폰 그리고 블랙 베어와 알파인 여우의 가죽은 가치를 따지기 힘든 귀한 물건들이었다.

     빵과 육포 그리고 물로 요기한 일행은 엄청난 부피와 무게가 나가는 짐을 나무 사이에 잘 감추어 두고는 산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무슨 일이 있긴 하네.”

     길에 무성하게 난 풀을 본 하룬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몇십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던 길이라 잘 나 있는 길이었지만 최근에는 별로 지나다니지 않았는지 풀이 많이 자라 있었다.

     그것을 느낀 홀의 얼굴이 더욱 심각해졌다.

     “별일은 없을 거예요. 있으면 우리가 해결하면 되니까. 긴장 풀어요.”

     “고마워요.”

     시린느가 옆에서 위로했지만 홀의 굳은 얼굴은 쉽사리 펴지지 않았다.

     수련 캠프의 목책이 눈에 들어오는 곳까지 이동한 일행은 일단 이동을 멈추었다. 항상 그렇듯 일행에 앞서 척후를 나간 티노의 신호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는 이미 목책 주변에 접근했을 것이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티노가 돌아왔다.

     “망루도 그렇지만 목책 사이의 틈으로 살펴보았는데 역시 별다른 기척이 없습니다. 발걸음이나 문을 여닫는 소리로 보아 안에 적잖은 사람들이 있는 것은 확실한데 어떤 상황인지는 판단하기 힘듭니다.”

     티노의 말에 홀이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캠프로 진입할 태세였다. 그녀가 그렇게 평정을 잃은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일단 나와  티노가 캠프로 잠입해서 내부 상황을 자세히 파악해야겠어. 그동안 다들 여기서 대기하며 쉬어. 안으로 진입할 여건이 되면 저기 보이는 망루에서 수신호를 할 테니까.”

     하룬이 지시를 내렸지만 홀의 얼굴은 이전보다 훨씬 더 굳어 있었다.

     “나도 갈게요.”

     “그건 위험합니다.”

     티노가 만류했지만 홀의 태도는 강경했다. 원래 별 의견을 내지 않던 그녀였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그녀는 마음을 굳힌 듯 마법 완드와 몇 개의 장비를 점검했다.

     티노가 곤란한 표정으로 하룬을 보았다.

     “어쌔신 수련까지 받았으니 같이 가도 별문제는 없을 거요. 일단 내부 상황만 살피러 들어가는 것이니 내 지시에 따라 주시오.”

     “알았어요. 하룬 대장의 지시에 따를게요.”

     홀은 선선히 약속했다. 필립과 라트리나도 엉덩이를 들썩거렸지만 하룬은 눈빛 하나로 그들의 움직임을 제지하고는 캠프로 향했다.

     목책 주변에는 풀만 무성할 뿐 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시야 확보를 위해 일부러 나무들을 제거한 것이다.

     “난 안쪽에 있는 건물을 살필 테니 티노는 왼쪽의 두 건물을 맡아요. 그리고 홀은 오른쪽의 긴 건물을 살펴 줘요. 무슨 일을 벌이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 안의 형편만 파악하고 바로 나오지요.”

     “네, 대장님.”

     “알았어요. 부탁합니다.”

     홀은 이제까지의 무심한 표정과 달리 무척이나 심각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 깊이 고개 숙여 부탁했다.

     사실 엄격하게 말하면 이번 의뢰는 이곳까지 온 것으로 완수된 것이다. 오는 길에 돌풍 용병대가 겪은 수없는 전투를 생각한다면 보수는 그야말로 하찮을 정도였다.

     하지만 하룬은 물론 다른 대원들도 당연하다는 듯 나서는 것에 내심 캠프 상황이 걱정스러우면서도 대원들에게는 감동한 홀이었다.

     “이마에 긴 검상이 있는 분을 보면 각별히 잘 살펴 주세요. 그분이 이곳 책임자인 사반 에번스 자작입니다. 제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뒷말은 기어들어 가는 듯 작았지만 티노와 하룬은 홀이 왜 이렇게 심각한 얼굴인지 알 수 있었다. 친인이 이곳에 책임자로 있었던 것이다.

     “걱정 마세요.”

     “괜찮을 겁니다.”

     두 사람은 홀을 위로하고는 날렵한 몸놀림으로 목책으로 달려갔다. 그들의 움직임은 마치 바람처럼 빠르고 기척이 없어서 눈으로 보지 않는 한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기민했다.

     사실 누가 보아도 본부인 중앙 건물을 맡고 싶었지만 홀은 하룬을 믿었다. 여기까지, 아니 황도를 떠나 파로스 자작령으로 향하면서 하룬의 엄청난 능력을 보았고, 그 사람됨을 알았기에 곁가지로 어쌔신 수련을 받은 자신보다는 하룬이 더 믿음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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