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수련 캠프로 가는 길 (36/278)

《수련 캠프로 가는 길》

 “어, 누구야?”

 “그러게.”

 이제는 습관이 되어 날이 밝기 무섭게 잡에서 깨어난 재수 4인방은 입구 한쪽에서 잠자고 있는 세류 자매를 보고 깜짝 놀랐다.

 “길을 잃은 사람들이야.”

 “어제 늦게 왔어.”

 하룬과 티노의 설명에 수긍하는 재수 4인방이었지만 호기심이 동한 듯 침낭 밖으로 드러난 얼굴을 살펴보았다.

 “꽤 예쁜데.”

 필립이 중얼거렸다. 사실 세류와 비류의 미모는 상당했다. 원래 타고난 미모에 더해 외모 보정치 적용으로 그녀들의 얼굴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이 비욘드와 현실 세계 간에 미에 대한 차이는 분명히 존재할 터이지만 기준 이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즉, 그녀들의 미모는 인간이 사는 세상이면 어디에서건 통할 정도였다.

 “어딜! 우리 시린느가 훨씬 예쁘지.”

 지탄의 말에 평소에는 그를 그렇게 구박하던 시린느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번졌다.

 “꼭 여우처럼 생겼어. 재수 없어.”

 나름 개성 있는 얼굴이지만 남자들이 별로 선호하지 않는 라트리나의 말이었다. 단순히 예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상당한 적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잠에 빠진 두 여자는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여자 단둘이 어떻게 온 거지? 무기도 안 보이는데.”

 눈썰미가 좋은 필립은 금방 이상한 것을 짚어냈다.

 “그게, 한 여자는 마법사야. 그리고 한 명은 검사 같은데 검은 없던데. 자기들 말로는 여행 중이라는데 침낭도 천막도 없는 걸 보니 믿긴 좀 그래. 뭐, 우리랑 무슨 상관 있겠냐? 관심 끄고 서두르자.”

 하룬의 말에 대원들은 호기심을 버리고는 자신이 맡은 일에 열중했다. 시린느가 식사를 준비하는 사이 티노가 필립과 지탄을 데리고 도축된 가죽을 잘 정리해서 묶었다. 라트리나는 침낭들을 비롯한 물건들을 챙겼다.

 홀도 몇 안 되는 자신의 물건을 정리하고 여행 준비를 했다. 일찍 준비를 마친 그녀는 새로운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짧은 명상에 빠져들었다. 틈만 나면 명상에 빠지는 것을 보면 뭔가 수련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세류 자매가 눈을 뜬 것은 일행이 아침 식사를 끝내고 난 후였다. 그녀들은 육체적으로 힘들었는지 쉽게 잠에서 깨지 못했지만 시끄러운 소음을 참으면서 숙면할 정도의 환경에 있어 본 적이 없었다.

 “아이, 시끄러워. 입 닥쳐, 천한 것들아!”

 전날 밤 하룬이 알아본 대로 성깔이 더러운 비류는 일어나자마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상태로 성질부터 부렸다. 아마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녀들이 귀찮게 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사정을 다른 사람들이 알 리 없었다. 식사를 마친 후 짐과 자신의 무기를 점검하던 재수 4인방은 물론 티노까지 얼굴색이 바뀌었다.

 몬스터들까지 기분 나쁘게 만드는 시린느와 충분히 비견될 정도로 도발적인 비류의 짜증에 울컥한 것이다.

 “뭐야, 이 싸가지 없는 년은? 신세를 지는 주제에…….”

 “허엇! 정말 황당하네. 별꼴을 다 보네.”

 다른 대원들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을 할 뿐이었지만 라트리나는 달랐다.

 퍼억! 퍼억!

 그녀의 발이 비류의 침낭 중간 어름을 가차 없이 가격했다. 벌써 눈이 돌아간 것을 보니 제대로 맛이 간 모양이었다.

 “악!”

 발길질 한 번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라트리나는 내처 세류가 들어간 침낭까지 걷어찼다.

 “아앗! 누구야?”

 잠결에 제대로 발길질을 당하고 고통과 함께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당장 눈 뜨고 일어나, 이 쌍년들아! 얼마나 뻔뻔한 년들인지 얼굴이나 제대로 보자.”

 라트리나의 눈초리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 입술의 양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화가 났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그동안의 험한 수련으로 실력 상승은 물론 기세가 무섭게 변한 라트리나였다.

 그녀의 매서운 눈길을 정면으로 대한 비류의 눈이 커졌다. 정신이 확 깬 그녀는 화들짝 놀라 황급히 침낭에서 몸을 일으켰다.

 “누, 누구세요?”

 어지간히 놀랐는지 몸과 함께 목소리가 떨렸다.

 “어디서 굴러들어 온 물건인지 모르겠지만 따듯하고 안전한 잠자리를 주었더니 이게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뭐? 천한 것들?”

 “그, 그게…….”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그녀는 살벌한 재수 4인방의 눈빛이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것을 느끼며 엉덩이를 심하게 차인 아픔에 오만상을 찌푸린 채 침낭에서 몸을 일으키는 세류에게 바싹 붙었다.

 옆구리가 걷어차인 세류도 고통 때문에 잔뜩 인상을 썼지만 아무래도 나이도 있고 비류보다는 침착하고 영리한 편이라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비류가 하는 말은 그녀 역시 꿈결에 들었다. 잠이 많은 비류에게는 늘 있는 일이고 전날 무척 피곤했던 터라 그녀도 같은 마음이었기에 크게 느끼지 못했지만 자신들을 향해 살기등등한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무슨 사람들 눈빛이 이렇게 무서운 거야.’

 특히 흰자위가 급속하게 늘어나는 라트리나의 눈에서는 여태껏 대한 적 없는 광기와 살기가 흘러나와 오금이 저려왔다.

 “미안합니다. 제 동생이 여기가 집인 줄 알고 실수를 했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니 용서해 주세요.”

 급하게 사과하며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언제나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노블 중의 노블이라고 자신하던 그녀가 이런 지저분한 작자들에게 이렇게 사과한다는 것이 너무 수치스러웠지만 안 그러면 당장이라도 험한 꼴을 당할 것 같았다.

 그나마 적절한 순간에 사과한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이 다소 부드러워졌지만 하룬의 눈에서는 이채가 흘렀다.

 ‘호오! 사과를? 세상에 무서운 것 없는 족속들로 알고 있었는데 노블들도 상황이 바뀌면 보통 사람들하고 똑같잖아.’

 좋은 것을 알았다.

 늘 타인을 억누르는 고압적인 자세와 당당함을 잃지 않던 노블들의 모습만을 봤던 하룬이다. 심지어 실수나 잘못을 해도 그들은 당당했다. 그 상대가 설사 선생님이라고 해도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하룬은 그들이 자신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태생적으로 그들은 자신 같은 보통 사람들과는 종자가 다르다고 여겼다.

 그러나 부모도 모르는 인공 수정체로 어린 시절부터 또래들에게 따돌림을 받아 왔던 하룬에게 오랫동안 박혀 있던 혈통에 대한 열등감이 의외의 기회에 산산이 깨지고 있었다.

 ‘결국 이들의 이미지는 그들 가문이 가진 힘과 권력을 기반으로 포장되었단 말이지.’

 뭐랄까, 굉장한 비밀을 깨달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또래의 다른 아이들은 진작 알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하룬은 처음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

 이성적으로야 그들이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인지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세뇌되고 경험하며 생성된 그들의 이미지가 한 번에 확 깨지는 순간은 참기 힘든 희열을 불러왔다.

 ‘그래! 너희들도 결국 나와 똑같이 먹으면 싸고 두려우면 떨며 꼬리를 마는 휴먼이란 말이지.’

 답답하게 자신을 감싸고 있던 단단한 막이 한 겹 사라진 것 같은 시원함에 하룬이 말없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의 비밀 하나를 벗긴 듯한 벅찬 감정이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구쳤다.

 “놔둬라. 안 그래도 이 험한 후크란에서 목적지까지 가려면 전력을 쏟아 내야 하는데 벌써부터 낭비하면 안 되지.”

 “아무리 그래도 영 싸가지가 없잖아.

 하룬의 말에 라트리나는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살벌한 눈빛으로 세류 자매를 일견하고는 마지못해 물러났다.

 비류 때문에 잠이 확 깬 세류는 이미 떠날 준비를 거의 갖춘 일행의 행색을 보고는 급한 얼굴로 허겁지겁 잠자리를 정리했다.

 ‘화장 안 하고 꾸미지 않으니 우리 시린느와 별 차이도 없구나.’

 세수도 못 한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칼, 부은 얼굴을 보며 하룬은 공주의 이미지와 흡사했던 여자 노블에 대한 환상마저 확실하게 깨지는 것을 느꼈다.

 성깔이 어땠건 보통 노블들, 특히 여자들 중 상당수는 빼어난 미모와 환상적인 몸매로 일반 학생들에게 공주나 여왕으로 군림하곤 했던 것이다.

 하룬은 내심 비욘드를 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따. 게임을 하지 않고 살았으면 알지 못했을 것들을 너무 많이 알게 된 것이다.

 비욘드를 하지 않았다면 유니온에 세뇌당해 눈과 귀가 먼 상태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또 현실의 권력이 만든 장막에 막연히 노블들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면서 평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재빨리 침낭을 정리한 세류는 티노에게 감사 인사와 함께 그것들을 전하고는 하룬에게 다가왔다.

 “저, 할 말이 있어요.”

 “하시오.”

 일부러 무뚝뚝하게 받는 하룬의 태도에 주눅이 든 세류가 힘들게 입을 뗐다.

 “저, 어떤 분들이고 어딜 가시는 길인지 알아도 될까요?”

 “우린 돌풍 용병대요. 의뢰를 처리하기 위해 후크란 산맥 북쪽에 있는 모종의 장소에 가는 길이오.”

 용병이라는 것과 후크란 산맥 그리고 모종의 장소란 말에 세류의 눈이 빛을 발했다.

 “북쪽으로 이동하실 건가요?”

 “그럴 예정이오.”

 “그럼 북쪽 강가까지만 동행하면 안 될까요?”

 하룬은 대답 대신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서 강을 건넜거든요. 거기까지만 가면 별 위험이 없을 테지만 무기도 잃어버린 동생과 제가 둘이 가기에 이곳은 너무 위험해서요.”

 “그럼 그렇게 하시오. 대신 동생 분이 경망한 말이나 태도로 우리 일행의 화를 돋우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댁이 신경을 써 주시오.”

 하룬이 아는 노블이라면 듣기 불편한 말이었을 텐데 동행을 허락받은 것만으로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진 세류가 자신을 소개했다.

 “감사합니다. 참! 전 이방인이에요. 코엠이라는 이방인 길드를 이끌고 있어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세류의 옆구리를 비류가 슬며시 찔렀다. 입을 떼기가 힘든지 잠시 망설이던 세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고는 마음을 정한 듯 하룬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때와 장소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용병이시라니 우리가 의뢰를 하나 해도 될까요?”

 “뭐요, 그게?”

 하룬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이곳의 몬스터들은 다른 곳에서 만났던 치들과는 많이 다르더군요. 비록 랭커들이 합류하지 못한 상태이긴 하지만 동행한 저희 길드원들도 낮은 실력은 아니었는데 이곳에 들어와 일주일도 못 견지도 다 죽고 말았어요.”

 “어느 방향으로 이동했소?”

 지리에 관심이 많은 티노가 끼어들어 물었다.

 “저희는 협곡을 통해 후크란 산맥 안으로 들어섰어요. 센 강을 건너 이 후크란에 들어와 협곡을 통과하는 데 꼬박 이틀이 걸렸지요. 남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이틀 동안 움직였는데 1시간에 한두 번은 몬스터들과 싸운 것 같아요. 그래서 실제로 이동한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어요. 이렇게 몬스터들이 많은 곳은 들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러다 어제 아침 무렵에 그 뿔이 솟은 오크들과 마주쳤는데…….”

 다음은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녀들의 침울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로 보아 형편없이 학살당했을 것이다.

 “흠. 결국 하루 거리를 빙빙 돌아 움직인 거로군요.”

 “네, 그렇게 됐어요.”

 “그럼 일행은?”

 하룬은 한 무리의 길드가 와서 정말 이 두 아가씨만 제외하고 다 죽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다 죽었을 거예요. 하지만 괜찮아요. 우리는 부활이 가능한 이방인들이거든요. 신탁으로 들어서 알고 계시죠?”

 하룬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룬이 이방인이라는 것을 잘 아는 티노가 그를 향해 묘하게 웃고는 재수 4인방 쪽으로 가버렸다.

 그녀는 이제 하룬을 완전히 NPC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유저가 용병대, 그것도 NPC 대원들을 이끄는 대장이 되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은 저희가 모종의 장소를 찾고 있어요. 저희를 안내해서 그곳을 찾아주시면 섭섭하지 않게 사례를 하지요.”

 세류 자매는 기대 어린 눈길로 하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하룬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 의뢰는 거절하겠소. 지금 할 일도 있고, 이미 연계된 의뢰를 받아들인 참이라 시간이 없소.”

 두 자매의 얼굴이 급해졌다.

 “우리가 찾는 장소까지만 안내해 주면 천, 아니 이천 골드를 드릴게요.”

 거금을 부르는 것을 보니 급하긴 한가 보다. 하지만 하룬은 그 의뢰를 받아들일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빨리 의뢰를 마치고 럼프 오크의 던전을 클리어하고 비도지존의 단서도 찾아야만 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오. 용병의 생명은 신뢰라오. 한번 한 약속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야 하는 것이 용병이오.”

 진심이 가득한 하룬의 말에 두 자매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아쉽기는 했지만 세류는 단호한 하룬의 태도에 두 말 없이 의뢰를 포기했다.

 “대신 오늘 하루는 안전하게 지켜 주겠소.”

 “고마워요.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비류, 뭐해? 어서 감사 인사 하지 않고.”

 세류의 말에 비류는 황급히 허리까지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대장!”

 자신도 모르게 하룬에게 대장이라고 부르며 감사 인사를 하는 비류의 모습에 하룬은 미소 짓고 말았다. 그녀와 같은 노블에게 이렇게 존칭과 함께 공손한 인사를 받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후후! 은근히 기분 좋은걸. 비욘드를 하길 잘했네.’

 하룬은 대원들을 불러 모아 인사를 시켰다.

 “자, 다들 들었겠지만 이분들끼리 이곳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은 너무 위험한 상황이라 오늘만 동행하기로 했으니 인사들 나눠. 함께 있는 동안은 같은 대원으로 생각하고 잘 대해 주라고.”

 하룬의 말에 자매의 얼굴에 안도의 빛과 함께 생기가 흘렀다.

 “난 필립이야. 만나서 반가워.”

 평소 예의 바른 필립이지만 이상한 기분이 든 상태에서 두 자매의 외양이 어려 보인 나머지 반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너무나 거침없는 그의 반말에 세류의 얼굴색이 조금 변했지만 마주 인사했다.

 “난 세류라고 해요. 나이는 스물다섯 살이죠. 3서클 마법사에요.”

 “비류예요. 나이는 스물한 살로, 검사예요.”

 하룬은 비류의 소개에 피식 소리 없이 웃고 말았다. 어리게 보이거나 꿀리는 것이 싫어서 나이까지 대는 것을 보니 그녀들이 더욱더 인간다워 보였다.

 “난 시린느. 5급 용병이야. 용병 세계는 열 살까지는 친구니까 말 깔게.”

 있지도 않은 용병 규칙을 들먹이며 당당하게 말을 까는 시린느였다.

 “난 지탄. 역시 5급 용병으로 강력한 방패 스킬을 보유하고 있지. 참고로 난 시린느에게 관심이 있으니까 내가 맘에 들더라도 알아서 포기하도록.”

 시린느에게 푹 빠져 있는 녀석에게는 세류 자매의 미모는 안중에도 없었다. 더구나 첫 만남에서 좋지 않은 인상을 받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들을 제대로 대우하기가 너무 싫은 지탄이었다.

 “라트리나야. 난 너희들이 별로니까 웬만하면 말 섞는 일 없도록 하라고.”

 세류 자매는 일부러 나이까지 들먹이며 자신들을 소개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라트리나는 노골적으로 적의를 감추지 않을 정도였다.

 “티노라고 불러요.”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티노가 그나마 편하게 보였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어색한 미소를 짓는 두 자매를 보던 하룬은 자신과 홀을 소개했다.

 “돌풍 용병대를 맡고 있는 하룬이오. 그리고 저분은 홀이오. 4서클 마법사로, 조용한 성정을 가진 사람이니 알아서 대접하면 될 거요.”

 4서클 마법사란 말에 세류 자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외관으로는 자신들과 비슷한 연배로 보였던 것이다.

 역시나 홀은 입을 열지 않았다. 벌써 한 달 이상 보아 온 하룬 일행과는 물론 더 오랜 시간 동안 알고 지낸 티노와도 대화를 한 적이 손에 꼽는 홀은 그녀들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나마 같은 용병대원으로 간주될 수도 있는 간략한 소개를 문제 삼지 않는 것이 다행스러울 정도였다.

 “자, 이제 출발합시다. 들었겠지만 가는 도중에 럼프 오크들이 출몰한다고 하니 각오들 단단히 하라고.”

 “오케이! 이번에야말로 그날 당했던 일을 설욕하고 말겠어.”

 재수 4인방은 물론 티노의 얼굴도 무척이나 결연했다. 한낱 오크 따위에게 당했던 그 치욕스러웠던 기억이 그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세류와 비류는 빠르게 던전이 있는 산으로 향하는 하룬 일행의 뒤를 쫓았다.

 그들이 머문 돌산과 럼프 오크의 던전이 있는 산 사이에는 관목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엇다. 척후를 맡은 티노가 일행과 이십 보 정도 떨어진 앞쪽을 주도면밀하게 살피며 일행을 이끌었다.

 “정지!”

 티노의 입에서 작은 새소리가 나자 일행은 한동안 움직임을 멈추었다.

 콰앙! 쿵! 뿌지직! 쿵!

 잠시 시간이 흐르자 엄청난 체구를 가진 블랙 베어 두 마리가 작은 나무들을 쓰러뜨리며 옆으로 지나갔다. 상대를 못할 것도 없지만 얼마나 험한 길이 남아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교전을 벌일 수는 없었다.

 다시 전진하고 한참이 흐른 후 길고 날카로운 새소리가 연속해서 들리자 하룬이 심각한 얼굴로 나직이 외쳤다.

 “산개!”

 대원들은 각기 엄폐물을 찾아 몸을 숨기고는 은밀하게 무기를 꺼내들었다. 무리를 이룬 몬스터가 앞에 있다는 신호였던 것이다. 영문을 모르긴 했지만 세류 자매도 제법 높은 나무 뒤에 숨었다.

 “언니, 무슨 일일까?”

 “나도 몰라. 어쨌든 위험한 상황인가 봐.”

 그렇게 두 사람이 소곤거리는 사이 전방에 거대한 덩치를 가진 블랙 오크 다섯 마리가 나타났다.

 주로 평지에 서식하는 회색 오크나 황색 오크보다 강한 힘을 가진 이 녀석들은 낮은 산속에 서식하며, 흉포한 성정을 지녔다.

 녀석들은 먹이를 찾아 나온 듯 이리저리 살피며 그들이 지나온 길을 따라 다가왔다. 자기들끼리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 무기를 힘주어 든 것이 이상한 것을 느끼는 듯했다.

 럼프 오크가 출몰하는 곳에 서식하는 만큼 그 실력과 힘이 만만치 않은 놈들일 것이다. 모두가 하룬이 몸을 숨긴 바위를 주시했다. 여차하면 튀어 나갈 태세였다.

 쉭!

 신호가 떨어졌다. 하룬이 비수를 날린 것이다. 비수 두 자루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대원들은 일제히 몸을 일으켜 불랙 오크를 향해 쇄도했다.

 췌엑!

 취익! 취익!

 전면에 있던 동료들 사이로 날아온 비수를 발견하고 황급히 몽둥이를 휘둘러 봤지만 벌써 두 자루는 놈들의 몸 일부에 박혀 버렸다.

 놀란 녀석들이 짤막한 비명을 지르는 동료를 뒤돌아보는 사이 득달같이 달려든 지탄이 거대한 방패를 횡으로 휘둘렀다.

 잠시 시야를 뺏긴 블랙 오크들은 자세를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나무 몽둥이를 휘둘렀다.

 꽈직! 우지직!

 블랙 오크 두 마리가 휘두른 몽둥이가 방패 끝에 부딪쳐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지탄의 방패는 그 둘을 지나쳐 뒤에 있는 한 오크를 향하고 있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바로 필립과 라트리나의 검이었다.

 “멀티 블로!”

 “스위프트!”

 필립과 라트리나가 스킬을 펼치며, 부러진 몽둥이를 들고 비틀거리는 두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놈들은 당황한 가운데서도 황급히 몸을 피했지만 이미 상당한 경지에 오른 두 사람의 검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퀘엑!

 춰어어.

 필립의 꼬챙이 같은 날카로운 검 끝이 오크의 이마를 관통하고 빠져나올 때 라트리나의 검도 다른 녀석의 몸을 여러 번 난자하고 있었다.

 꽈앙!

 지탄은 가운데에 자리를 잡은 블랙 오크가 휘두른 거대한 도끼에 방패를 마주 쳤다. 굉음과 함께 둘은 뒤로 튕겼지만 지탄은 불과 두 걸음만 뒷걸음질 쳤을 뿐이다. 힘의 우세에 사기가 오른 그는 방패를 들어 날을 세우고는 두 손으로 앞을 향해 날렸다.

 쉬익! 쉭!

 비수에 맞은 두 녀석이 비수를 잡아 빼서 신경질적으로 던지며 흉악한 시선을 앞으로 돌리는 사이 하룬이 날린 두 비수가 녀석들의 머리통을 향했다. 강력한 힘이 실린 비수 끝에는 파란 광채가 흘렀고, 그 속도는 마치 빗살 같았다.

 꽈앙!

 취익! 췌엑!

 옆을 스치고 날아가는 비수 때문에 또다시 시야를 빼앗긴 블랙 오크의 운명은 죽음으로 가는 길밖에는 없었다.

 지탄이 날린 방패의 날을 얼굴로 막게 된 블랙 오크의 머리통 위쪽이 날카로운 검날에 짓이겨졌다. 미처 어떻게 방비할 틈도 없이 이빨을 비롯한 얼굴 부위가 엉망이 된 블랙 오크는 이마에 비수가 박힌 두 녀석과 달리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순식간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블랙 오크 다섯 마리가 참혹하게 죽은 것이다.

 나무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세류 자매는 몸을 잘게 떨었다. 충격적인 전투 장면에 질린 것이다.

 실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공격의 조합이 너무나 잘 맞아떨어졌고 그 공격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 상대가 미처 대응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세상에!”

 한참 후에 검사인 비류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녀 역시 저런 블랙 오크와 일대일로 상대하지 못할 실력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빠르고 깨끗하게 죽일 자신은 없었다.

 “무서운 사람들이구나!”

 세류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토했다.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탱커 역할을 맡은 지탄이나 데미지 딜러 역할을 확실하게 해낸 두 사람도 그렇지만 특히 비수를 날린 하룬에게 가지는 감정은 공포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시린느가 블랙 오크의 사체로 향하더니 놀라운 솜씨로 가죽을 벗겨 냈고, 이내 라트리나가 합류했다. 두 여자의 손길에 순식간에 한 마리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벗겨져 붉은 속살을 드러낸 것을 본 비류는 뭔가 넘어오는 듯 손으로 입을 막았다.

 블랙 오크 다섯 마리를 순식간에 해치운 것도 놀랍지만 불과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다섯 마리는 가죽이 벗겨져 고깃덩어리로 변하고 말았다. 아무리 용병이라지만 남자도 아니고 상당한 미모를 지닌 여자들의 손길에 말이다.

 세류는 물론 비류도 이번에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다만 나뭇가지를 잡은 손길에 과도한 힘이 담겨 나뭇잎이 심하게 떨렸을 뿐이다.

 간단하게 장내를 정리한 돌풍 용병대는 다시 짐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척후는 티노의 몫이었다.

 럼프 오크들을 다시 만난 것은 점심을 대충 해결하고 길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정지!”

 하룬의 명령에 걸음을 멈춘 일행을 향해 정찰하던 티노가 빠른 속도로 복귀했다.

 “대장, 럼프 오크들입니다. 다섯 마리가 한 조로 길목을 지키고 있습니다.”

 “왜 여기까지 왔지? 놈들의 영역이 이렇게 넓은가 아니면 다른 부족인가?”

 지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지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식량을 구하러 나왔나 보지.”

 라트리나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아니, 길목을 막고 일정 거리를 오가며 주변을 살펴보는 폼이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아.”

 지탄에게 하는 티노의 말에 하룬은 내심 뜨끔했다. 던전에서 럼프 오크 부족장을 죽인 것이 떠오른 것이다. 아마 그 일 때문에 복수를 위해 주변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루 거리까지 수색한다는 건 좀 이상하네.’

 당연한 의문이었지만 하룬 일행은 럼프 오크의 서식지 입구가 산의 남서쪽 방향으로 나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그들이 들어간 곳은 던전의 후미라는 것을 생각지 못한 것이다.

 “럼프 오크라면 뿔이 달린 오크를 말하는 건가요?”

 “맞습니다.”

 “으드득! 그, 그 악마 같은 놈들에게 우리 길드원들이 전멸됐어요. 어떻게 할 건가요?”

 세류와 비류는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한편으로는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하룬을 쳐다보았다.

 비록 랭커들인 수뇌부 대부분이 빠지긴 했지만 나름 고레벨의 길드원들이 럼프 오크들에게 학살당한 것을 지척에서 겪은 터라 덜컥 겁이 난 것이다.

 피할 수 있으면 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직도 길드원들이 처절하게 죽어 갔던 순간을 떠올리면 심장을 짓누르는 공포가 밀려왔다.

 하지만 그녀들의 기대와 달리 돌풍 용병대원들의 얼굴에는 강렬한 투지가 떠올랐다.

 “이번 기회에 빚을 갚아야지.”

 필립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소전사장을 상대로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밀렸던 것이 내내 가슴에 걸렸던 것이다.

 “이번엔 내 힘을 제대로 보여 주지.”

 그렇게 겁이 많았던 지탄도 이를 악물었다.

 “다들 준비해! 내가 비수를 날리는 것이 신호다. 티노와 시린느는 독침으로 측면에서 지원하고 나머지는 상대를 정해 기습한다.”

 “넷, 대장!”

 일행이 럼프 오크들을 상대할 준비를 하는 동안 두 자매는 후미에서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으로 눈을 빛냈다. 겁이 나긴 했지만 이들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두려움은 어느새 사라져 갔다.

 티노를 선두로 일행은 은밀하게 전진했다.

 마침내 그들의 눈에 머리통에 뿔이 솟아오른 거대한 덩치의 오크들이 보였다. 가장 중심에 있는 녀석은 크고 작은 뿔 두 개가 불룩 솟아 있었다.

 일전에 필립이 고전했던 오크와 같은 등급의 소전사장이었다. 녀석의 목에는 사슴의 뿔로 만든 나팔이 걸려 있었다. 인근에 포진한 다른 녀석들과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체제까지 갖춘 것이다.

 녀석들은 매서운 눈길로 주변을 살피며 일정한 범위를 관찰했다. 수시로 의사소통을 하는 녀석들의 이목을 피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일행에게는 하룬이 있었다.

 취에엑! 취엑! 체엑!

 츄얼! 체엑!

 아마도 이상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하나의 뿔 옆으로 두 번째 뿔이 불룩 솟아오른 가장 전면에 선 소전사장이 눈을 돌리는 순간 하룬의 손에서 비수 세 자루가 연속으로 날아갔다.

 검날에 파르스름한 빛이 일렁였다. 이제 전력으로 비수를 던지면 자신도 모르게 마나가 가장 날카로운 날 부분을 통해 밖으로 살짝 삐져나왔다.

 채앵!

 퀘에액!

 쿠억!

 소전사장은 기민한 움직임으로 손에 쥐고 있던 대검으로 비수를 쳐냈지만 그놈 때문에 시야가 가려진 다른 오크 전사 두 마리의 어깨와 옆구리에는 비수가 자루만 보일 정도로 깊숙이 박혔다.

 오크들이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추가적인 공격이 일제히 가해졌다.

 “쳐랏!”

 “죽엇!”

 “실드 어택!”

 순간적으로 오크들을 향해 돌진하는 다섯 명의 손에는 이미 강력한 힘이 실린 무기들이 들려 있었다.

 하룬의 강철검은 비수를 쳐 내긴 했지만 비수에 실린 강력한 힘에 잠시 비틀거리는 소전사장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놈은 어느 상황에서든 무기를 의지대로 휘두를 수 있는 실력자였기에 검을 마주했다.

 까앙!

 충돌과 함께 뒤로 튕기던 강철검은 연속된 충돌로 세차게 흔들리는 오크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바닥을 강하게 박차고 앞으로 뛰어오르는 하룬의 몸이 오크의 품을 파고들기가 무섭게 그의 검은 이미 가슴팍에 긴 자상刺傷을 만들어 놓았다.

 우워어!

 연속된 기습에 주도권을 놓치고 상처까지 입은 소전사장이 흉광을 쏘아 내며 분노를 담은 미약한 피어를 토했지만 이미 상황을 되돌리기는 늦었다. 너무나 빠른 하룬의 검세를 방어하는 것에 급급할 뿐 자신의 검에 온 힘을 실어 풀 스윙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까앙! 깡! 까앙!

 충돌음이 연속되자 하룬의 센스 소드는 이미 소전사장의 거대한 검이 힘겹게 그려 내는 좁은 궤적을 읽어 냈다. 마치 좁은 구멍을 빠져나가는 뱀의 그 영활한 움직임을 닮은 강철검은 몇 번의 충돌 끝에 럼프 오크의 심장에 정확하게 박혔다.

 푸욱!

 쿠르르!

 억울한 듯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는 오크의 벌겋게 달아오른 흉흉한 눈빛은 하룬의 손목이 가볍게 회전하자 급격하게 사그라졌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강하게 박동하던 심장이 통째로 엉망으로 변했다.

 하룬은 큰 소리를 내며 쓰러진 럼프 오크에게서 뿔 두 개를 베어 내며 전황을 살펴보았다.

 ‘흐음, 괜찮군. 그동안 수련한 것이 효과가 있네.’

 지탄이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저돌적으로 마주 덤벼드는 오크들을 일차로 상대하고, 이차로 필립이 필살의 스킬로 상대하는 조합은 어느 정도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지탄이 실드어택과 크로싱으로 오크의 자세를 흐트러뜨린 사이에 감행된 필립의 스매싱 블로는 비록 이전에 비해 두 배 이상 빨라진 탓에 제대로 급소를 찌르지는 못했지만 심각한 상처를 입혔다.

 그 빠르기 때문에 두 마리의 오크를 동시에 공격하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신호 나팔을 목에 건 녀석은 어떻게든 나팔을 불려고 했지만 필립의 빠른 검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벌써 둘이 상대하는 오크 두 마리는 온몸에서 피를 흘렸고 비록 흉성이 터진 듯 포효하며 무서운 기세로 날뛰었지만 쓰러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물론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필립의 검에 어깨가 찔린 오크 한 마리가 자신의 등 뒤에 있는 거대한 나무 등걸을 향해 도약하고 걷어참과 동시에 그 반탄력으로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 방패로 전신을 가린 지탄을 공중에서 날아 내리며 상대하려는 의도였다.

 “크로싱 어택!”

 지탄은 방패를 들어 마치 던지려는 것처럼 자세를 취한 다음 맹렬한 속도로 앞을 향해 달렸다. 비록 오른쪽 앞에 또 다른 오크가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꽈앙! 퍼억!

 원래 지탄의 머리 쪽을 노렸던 오크의 대도가 강한 충돌음과 함께 튕겨 나가는 것과 동시에 날카로운 단검이 가시처럼 박힌 방패의 앞면에 오크의 머리통이 부딪쳤다.

 아무리 단단한 가죽과 머리뼈를 가졌다고 해도 지탄의 힘이 실린 강철 방패의 날과 부딪친 순간 오크의 머리통은 부서지고 말았다.

 그 순간 지탄을 향해 도끼를 휘두르던 오크 한 마리의 목을 필립의 검첨이 관통했다. 방패 때문에 시야에서 가려졌던 필립의 몸이 유령처럼 나타난 것을 오크는 피할 수가 없었다.

 “이 놀 좆 같은 오크 새끼! 죽어! 죽어 버렷!”

 욕설을 퍼부으며 미친년같이 날뛰는 라트리나의 검은 신랄하게 오크의 몸에 많은 상처를 냈다.

 도발적인 얼굴 표정과 말이 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욕설에 오크의 두 귀에서는 하얀 열기가 나올 정도였지만 라트리나의 눈에는 흰자위가 가득했고, 얼굴에는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녀가 익힌 스위프트 검술은 정말 그녀와는 궁합이 너무 잘 맞았다. 원래부터 남들에 비해 유연한 몸과 가벼운 몸놀림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그 스킬로 완전히 날개를 단 격이 되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대의 공격을 마주하며 틈을 파고드는 그녀의 몸은 마치 연체동물처럼 불가사의하게 휘고 접히며 강력한 적의 공격을 피했고, 가볍고 빠른 검은 바람처럼 움직여 적의 몸에 심각한 상처를 늘려 놓았다.

 “끄아아악! 죽어 버렷!”

 괴성까지 지르며 달려드는 라트리나의 기세에 오크는 결국 투기를 잃고 허둥대다가 목이 잘렸다. 아무리 질긴 가죽을 가진 럼프 오크라지만 비슷한 위치를 대여섯 번이나 연속해서 베니 견딜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티노와 시린느가 공들여 수련한 협공도 아주 효과적이었다. 한 사람이 오크를 상대하는 사이 다른 사람은 독침을 날리는 방식으로 럼프 오크를 상대했는데 의외로 효과가 좋았다. 시린느의 공격에 집중했던 오크는 티노의 독침을 피할 수 없었고, 한 대를 더 맞을 때마다 그 힘을 급격하게 떨어졌다.

 고블린들이 사용하는 홉고블린의 독액은 신경에 작용한다. 때문에 독침을 맞으면 반응 속도가 현저하게 저하되고 신경이 분산되기에 시린느에게 집중할 수 없었다.

 파악!

 드디어 오크의 심장에 날카로운 검첨이 꽂혔다. 생각 외로 마무리는 독 대롱을 품에 갈무리하고 검을 들고 달려든 티노의 차지였다. 잘 싸우기는 했지만 몇 번이나 오크의 낡은 대도와 마주친 것만으로 힘이 빠진 시린느는 마무리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얏호! 죽인다!”

 제일 전력이 약한 시린느가 환호성을 지르며 자신이 상대했던 럼프 오크의 사체로 달려갔다.

 “히잉, 이게 뭐야? 가죽이 엉망이잖아. 이래 가지고는 제값을 받기 힘들겠어.”

 무려 중급에 오른 도축의 명인이 된 그녀다운 말에 다들 실소를 지었다. 이제 그녀에게 그 무섭던 럼프 오크는 단지 희귀하고 귀중한 가죽을 가진 존재일 뿐이었다.

 한 번의 충돌로 심각한 내상까지 입었던 지난번에 비하면 놀랍도록 향상된 실력에도 그녀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눈이 다른 오크들의 사체로 향했다.

 “이건 더 엉망이군. 아예 쓰레기 수준이야.”

 그녀는 라트리나가 상대했던 럼프 오크의 사체를 보고는 혀를 찼다. 수십 군데 이상 검에 난자당한 가죽은 상품 가치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필립과 지탄 그리고 하룬이 상대했던 오크들의 사체를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지. 아무렴.”

 그녀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쉬는 것을 잊어버리고 품속에서 도축 전용 단검 세 자루를 꺼냈다. 그것들은 파리스 자작성에서 개인적으로 구입한 세트로 날의 두께나 길이가 다른 세 자루의 단검은 각기 역할이 나뉘어 있었다.

 그녀는 가죽을 넝마로 만들어 버린 라트리나를 구박하며 조수로 삼아 능숙한 솜씨로 럼프 오크들의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사이 하룬은 죽은 오크의 머리통에서 뿔을 잘라 잘 챙겼다.

 그 모습에 세류는 이제 놀랍다 못해 두렵기까지 했다. 그런데 비류의 시선은 시린느에게 꽂혀 있었다.

 “으으. 언니, 저 여자 정체가 정말 뭐야?”

 생긴 것은 자신들이 낫다고 자신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시린느가 능숙한 솜씨로 가죽을 벗겨 내는 모습이 저도 모르게 몸을 떨게 만들었다.

 제대로 벗겨 낸 가죽을 펴들고 흐뭇하게 웃는 시린느의 미소는 무척이나 살벌해 보였다.

 “모, 몰라. 뭐 저런 인간들이 있니?”

 세류의 목소리는 떨림을 숨기지 못했다.

 “언니, 정말 엄청난 사람들이야! 우리 길드원들을 학살한 저 괴물 오크들을 저렇게 쉽게 해치우다니. 도대체 레벨이 얼마나 되는 NPC들이기에 괴물 오크들을 저렇게 간단히 죽이는 거야?”

 “어쩌면 이런 실력을 가지고 있기에 다른 NPC들이 그렇게 위험하다고 말렸던 공포의 땅을 오가며 용병 일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들은 오크들이 휘두른 무기에 베이거나 떨어져 나간 거대한 나무 파편과 오크들이 흘린 피가 자욱한 곳에서 태평하게 쉬고 있는 돌풍 용병대를 번갈아 주시하며 마음속 깊은 곳에 경외감을 키웠다.

 ‘설마 우리 길드원들을 학살했던 그 악마 같은 놈들과 지금 이 사람들이 죽인 놈들과 다른 종족은 아니겠지?’

 하지만 세류는 고개를 흔들어 부질없는 생각을 지웠다.

 자신들이 그동안 상대했던 오크와는 너무나 다른 괴물 오크들이었다. 덩치가 일반적인 오크보다 훨씬 큰 오크들은 무지막지하게 발달된 근육으로 자신의 키만 한 검이나 도를 너무나 가볍게 휘두르는 괴력은 물론 미처 눈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른 몸놀림을 가졌다.

 저런 정도의 빠르기라면 웬만한 공격 마법은 쉽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육중한 몸에도 빠르고 가벼운 몸놀림으로 나무를 걷어차고 공중으로 날아 공격하는 정도라면 자신들이 아는 검사들의 실력으로는 감히 일대일로 이길 유저가 드물었다.

 ‘이 용병대를 잡으면 돼! 이들의 실력과 경험이라면 그곳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세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어떡하든 의뢰를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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