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노블 자매와의 조우 (35/278)

《노블 자매와의 조우》

 대원들의 상처는 홀의 치료 마법과 물약으로 금방 치료가 되었지만 그들은 다시 던전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육체적인 상처가 문제가 아니었다. 한낱 오크에게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당해 버렸다는 자괴감과 럼프 오크들의 괴력에 대한 공포가 그들의 사기를 바닥까지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런 상태에서 강제로 그들을 럼프 오크들과 싸우게 만드는 것은 자칫 큰 사고를 야기할 수 있다는 판단에 하룬은 휴식을 가지기로 했다.

 자신 같으면 오기가 나서라도 다시 덤벼들 텐데 목숨이 하나뿐인 NPC들이라서 그런지 몸을 많이 사리는 기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좀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지요. 사기를 회복하는 데는 그게 좋을 거 같네요.”

 경험이 많은 티노의 조언은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하룬은 동굴과 꽤 떨어진 남쪽의 돌산 기슭으로 이동했다. 던전과는 하루 정도 거리였고, 동굴이 많아 잠시 머무르기엔 최상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당연히 몬스터들이 기승을 부렸지만 동쪽에서 뺨을 맞은 대원들의 분노를 푸는 데는 그만이었다.

 새 아지트에서 밤을 보내고 난 다음 하룬은 대원들을 불러 모았다.

 ‘휴우, 럼프 오크의 던전에서 얻은 아이템이라도 나누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아직 착용할 자격도 안 되니……. 일단 사기부터 올려야겠다.’

 그의 주변에 힘없이 앉은 대원들을 차례대로 응시하던 하룬이 입을 열었다.

 “모두 나름대로 럼프 오크를 상대하며 느낀 것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충격이나 좌절을 느꼈으리라는 것도 잘 안다.”

 모두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경험이 부족했을 뿐 난 개개인의 능력이 럼프 오크들에 비해 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필립과 라트리나 그리고 티노는 그놈들에 비해 민첩성이 뛰어나고, 지탄은 힘에서 밀리지 않는다. 그들보다 지능도 우월하다.”

 시린느를 제외한 사람들의 눈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나는 싸움, 즉 어떤 종류의 전투든 자신이 유리한 점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대에 비해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해서 전투에서 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가진 장점과 상대의 단점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 전투에서 이기는 요령이라고 생각한다.”

 “맞는 말입니다.”

 많은 경험을 가진 티노의 말이 하룬의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더구나 우리는 강한 몬스터들과의 실전 경험이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상태이니 럼프 오크들에게 밀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즉, 그렇게 죽상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제 실전을 통해 내가 가진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을 터득하면 다음에는 승리할 수 있다.”

 모두들 새로이 힘이 나는지 한결 밝아진 얼굴이었다. 물론 시린느는 제외하고 말이다.

 “우리가 후크란 산맥으로 들어가면 당장 마주칠 몬스터들이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진 놈들이라는 점도 알았고 자신의 장단점도 알았으니, 남은 것은 부족한 것을 채우고 자신의 스킬 레벨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다. 앞으로 이곳에서 닷새 정도를 보낼 생각이다. 그 정도면 이미 준비된 너희들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데는 충분할 거야.”

 “알았어, 대장. 대장 말을 듣고 나니 힘이 나네. 한갓 오크에게 밀린다고 허탈해할 필요가 없었는데. 고마워.”

 필립은 뭔가 크게 깨달은 표정이었다. 지탄과 라트리나 역시 단단히 결심한 듯 무척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티노는 나이가 있어 근력을 올리는 것은 무리이고, 시린느 역시 태생적으로 뼈가 가늘고 근육의 발달이 미약하니 앞으로는 독침을 쓰는 것을 수련해 봐요.”

 티노와 시린느는 자신들과는 크게 관계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다가 하룬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독침요?”

 “네, 일전에 우연히 고블린 던전을 깨면서 홉고블린의 독과 놈들이 쓰는 대롱과 침을 수거했거든요. 홉고블린의 독이 워낙 강해서 조심해야 하지만 제대로만 사용하면 아주 무시무시한 무기가 될 겁니다.”

 하룬의 말에 티노를 비롯한 대원들은 무척 놀란 듯했다.

 “고블린 던전은 또 언제 깬 겁니까? 홉고블린을 잡기는 정말 어려운데. 더구나 사체에서는 독을 채취할 수도 없다고 하던데요.”

 “티노가 전사의 전당에 있을 때 들어갔었습니다. 독액과 독침은 놈들이 쓰던 것을 우연히 얻은 겁니다. 일단 티노는 시린느와 함께 독이 없는 침을 대롱으로 쏘는 것을 수련하세요. 독액이 든 병은 나중에 익숙해지면 사용하시고요.”

 “알겠습니다. 시린느, 가자.”

 “호호! 드디어 나에게도 무기가 생기는구나.”

 티노와 시린느는 전투력이 약한 자신들의 약점을 익히 알았기에 강한 위력을 가진 독침을 쓸 수 있게 된다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는 사실에 잔뜩 고무되었다.

 “자, 우리는 근처의 몬스터들을 상대로 수련하자. 당분간은 철저히 개인별 실전을 통해 자신의 스킬 레벨을 올리자고.”

 “해 보자고. 그런 변종 오크 새끼들에게 밀리고는 못 살지.”

 필립이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역시! 힘에서도 밀리면 지탄이 아니지.”

 “호호호, 내 기필코 빠르게 움직이면서 스킬을 난사할 수 있을 정도로 수련할 거야.”

 지탄과 라트리나도 이제 완전히 기운을 차렸다. 의욕에 가득 찬 세 사람과 하룬은 관목 숲을 향해 내려갔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홀은 조용히 지켜보았다.

 ‘보면 볼수록 괜찮은 사람 같아. 대원들의 떨어진 사기까지 고려하는 것도 그렇고. 거칠고 무례한 여느 용병들과는 너무 다른 사람들이야.’

 홀은 조용히 일어나 미리 보아 둔 곳으로 이동했다.

 자신만 뒤처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역시 이번 기회에 4서클을 완전히 마스터할 참이었다. 비록 소식이 끊긴 수련 캠프의 사정이 못 견디게 궁금했지만 좀 더 확실하게 가기 위해서 모두의 수련은 반드시 필요했다.

 때아닌 돌풍 용병대의 실전 의지로 돌산 기슭과 센 강 사이에 서식하던 몬스터들은 괜한 불똥을 맞고 말았다. 하룬 일행이 이제까지와 다른 새로운 방식의 실전을 시작한 것이다.

 이제까지는 파티 플레이 위주로 몬스터를 상대했지만 그날 이후 되도록 일대일로 바꾸었다. 상대할 몬스터는 지천으로 깔려 있으니 걱정은 없었다.

 다만 일대일 실전이 필요했기에 하룬이 좀 바빴다. 여러 마리가 모여 있으면 그가 암기로 그들이 떨어지도록 유도해야만 했다.

 “죽어!”

 퍽!

 께르륵!

 지탄의 무식하게 큰 방패 모서리에 맞은 고블린 전사가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며 멀리 날아갔다. 하루에도 수십 번의 실전을 치르는 동안 지탄이 익힌 실드 어택과 실드 크로싱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정교해지고 강력한 파괴력을 담아 갔다.

 그렇게 겁이 많던 지탄도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전투를 치르며 제대로 된 투기가 생긴 것이다.

 쉬익!

 필립의 방어구를 살짝 스치고 지나간 몽둥이가 다시 돌아오기도 전에 오크의 목에는 이미 그의 검이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찌를 때와 마찬가지로 쾌속하게 검을 돌렸다가 빼자 목에 큰 구멍이 난 오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비틀거렸다.

 ‘역시!’

 필립은 하룬의 조언대로 자신의 빠른 발과 몸놀림을 믿었다. 상대의 공격을 끝까지 볼 수 있게 되자 그 궤적과 속도 감각을 몸에 새길 수 있었다.

 상대의 작은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는 것이 가능해지자 자연히 스킬 레벨이 비약적으로 올라갔다.

 그가 익힌 찌르기의 특성상 여러 상황에서 가장 짧은 동선을 움직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푸앗!

 뜨거운 피가 얼굴을 뒤덮었지만 필립은 피하지 않았다. 그의 강렬한 눈은 또 다른 상대를 찾고 있었다. 태생적으로 깨끗한 것을 좋아해서 피를 보는 게 싫어 검술도 찌르기 위주로 배운 필립이지만 이제 생사를 오가는 전투에서 깨끗하고 더러운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았다.

 “쿄쿄쿄쿄!”

 무식하게 큰 몽둥이를 든 오크 세 마리 사이에서 꼭 미친년처럼 웃던 라트리나의 눈이 뒤집혔다.

 비웃는 얼굴 표정과 웃음만으로도 도발된 오크들이 흉성이 터져 버렸다. 신경질적으로 무기를 휘두르는 오크들 사이로 그녀의 날렵한 몸이 파고들었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전투에 몰입했다. 한마디로 그 순간에는 미쳐 버리는 것이다.

 그녀가 전사의 전당에서 익힌 스위프트 검술의 요체는 민첩한 움직임으로 상대의 빈틈을 쉴 새 없이 파고들어 검을 난사하는 것이었다.

 세 개의 몽둥이가 어깨와 머리 그리고 옆구리를 가리지 않고 노렸지만 그녀의 가볍고 날렵한 몸은 마치 격류를 헤치고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어느 때는 유연하게 또 어느 때는 격렬하게 뒤틀리며 오크들의 빈틈을 노렸다.

 췌에엑!

 끄르륵!

 비록 가벼운 검이었지만 일단 틈이 보이면 마치 소나기처럼 퍼붓는 라트리나의 공격은 한순간에 오크의 전신을 걸레짝으로 만들었다. 더구나 광기 어린 얼굴과 시시때때로 터지는 기묘한 웃음소리는 오크들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해서 섣부른 공격을 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바탕 전투가 끝나면 시린느는 라트리나에게 싫은 소리를 했다.

 “미친년! 네가 잡은 오크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이렇게 가죽을 난도질해 놓으면 어떡해?”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자신에게 너무 잘 맞는 스킬을 익히게 된 라트리나도 말로는 절대 지지 않았다.

 “헤엥. 그래도 잡으면 그만이지. 대장도 아무 말 안 하는데 네가 왜 지랄이야?”

 “돈이 안 되니까 그렇잖아. 가진 것은 하나도 없는 주제에…….”

 “지랄. 가죽이나 벗기는 주제에.”

 “뭐라고? 이게 정말! 너 죽고 싶냐?”

 두 사람은 언제나 싸움이 끝나면 이렇게 말다툼을 하곤 했다. 그렇지만 진짜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티노는 그런 행동이 여자들이 나름 우정과 동료애를 쌓는 과정이라고 말해 남자들의 의구심을 산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스킬 사용을 멈추고 나서도 한동안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라트리나였지만 사흘이 지나고 잡은 몬스터가 백 단위를 한참 넘어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상으로 돌아왔다.

 대원들이 어느 정도 자신감을 되찾자 하룬은 갈등하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엄청난 아이템과 광렙이 보장되는 럼프 오크의 던전부터 깨고 싶었지만 홀을 수련 캠프에 데려다 주는 일도 빨리 완수해야 했다.

 한동안 고민하던 하룬은 티노와 그 문제를 의논했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어야 놈들을 편하게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겠죠.”

 용병에게 의뢰를 수행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 애초에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알면서도 욕심이 난 것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 스킬들에 익숙해졌고 자신감도 붙었으니 내일은 다시 갈 길을 가자. 일단 홀을 수련 캠프에 데려다 주고 나서 다시 이곳으로 와서 던전을 깨 버리자.’

 마침내 하룬은 미루었던 의뢰를 완수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을 모르는 대원들은 다시 럼프 오크들을 상대할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좋아, 이번에는 놈들에게 진짜 뜨거운 맛을 보여 주고 말겠어.”

 필립의 각오는 대단했다. 소전사장 하나도 이기지 못한 것이 어지간히 분했던지 움켜쥔 주먹에서 핏기가 사라질 정도였다.

 “제 놈들이 힘이 센지 내가 더 센지 제대로 겨루어 봐야지.”

 이제 방패가 자기 몸의 일부처럼 느껴져 큰일(?)을 볼 때도 손에 쥐어야 나올 게 나온다고 너스레를 떠는 지탄도 자신감이 충만했고, 더불어 그동안 찾아볼 수 없었던 오기와 투기가 느껴졌다.

 “호호호. 이 누나의 사랑스러운 손길을 기다려라, 혹부리 오크들아. 아주 찐하게 사랑해줄 테니까. 쿄쿄쿄!”

 이제는 스킬을 쓰지 않는 평시에도 어딘가 꼭 미친 구석이 느껴지는 라트리나의 말에 시린느가 면박을 주었다.

 “미친년!너 혹부리 오크들의 가죽까지 못쓰게 만들면 진짜 국물도 없을 줄 알아. 그게 얼마짜리인지 몰라? 그것들만 제대로 벗겨 팔아도 네가 대장에게 진 빚은 다 갚을 수 있다고.”

 재수 4인방의 대화에, 그들과 떨어진 곳에 나란히 앉은 하룬과 티노는 흐뭇하게 웃으며 서로를 보았다.

 “그래, 스킬은 어느 정도 익혔습니까?”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힘이 늘어나고 공격력이 배가 되니 두 마리 정도는 혼자서도 금방 해치울 수 있더군요.”

 오전에 몇 시간 독침을 쏘는 수련을 한 다음 개인적으로 검술 수련을 위해 실전을 하는 티노였다. 젊은 재수 4인방과 함께 실전을 치르는 것이 부끄러웠는지 일부러 눈에 띄지 않는 곳을 찾아다닌 티노의 목소리에도 강한 자신감이 흘렀다.

 습관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낮추는 그의 성격으로 보아 일반 오크라면 서너 마리도 혼자서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홀은 오늘도 보이지 않네요?”

 “아마 저 위에 있는 옐로우 스톤에 갔을 겁니다. 순수한 마나가 충만한 곳이라 마법 수련에 좋은 곳이라고 하더군요.”

 그나마 홀이 티노에게는 말도 잘하고 친절해서 다행이었다. 말이 없는 그녀와 유일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티노였다.

 홀이 마법 수련을 위해 올라갔다는 돌산 정상 부근을 찾아보았다. 옐로우 스톤은 암석 지대의 한 곳이 동이 틀 때와 석양 무렵에 그 부위만 노랗게 빛난다고 해서 시린느가 붙인 이름이었다.

 명상에 빠졌을 홀의 모습을 찾던 하룬의 시선이 산 정상 부근에 미쳤을 때 희미하게나마 사람 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저기에 웬 사람이!”

 티노도 그것을 보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행여 홀에게 위험이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지만 그들은 홀이 있는 암석 지대가 아니라 뾰족하게 날이 선 돌들로 가득한 험준한 길을 따라 하룬 일행이 있는 곳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둘입니다. 한 명은 체형이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으로 보아 여자로 보이네요. 여자는 마법사인데 갑옷을 입은 사람은 잘 모르겠네요.”

 제법 먼 거리지만 하얀 로브를 걸친 여자는 빛나는 보석을 박은 지팡이를 든 것으로 보아 마법사가 분명했다. 또 다른 사람은 빛나는 갑옷을 입긴 했지만 검이 보이지 않아 직업이나 성별을 추측하기가 힘들었다.

 ‘이 위험한 곳에 고작 둘이서 돌아다니다니 무슨 일이지?’

 의아했지만 굳이 찾아가서 알아볼 필요는 없었다. 자신들에게 용건이 있다면 알아서 찾아올 것이다. 비록 인적이 드문 곳에서 본 사람이지만 지금은 수련과 의뢰 때문에 별 관심이 가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한 걸까요?”

 “흐음, 필요하면 찾아오겠지요. 우리도 빨리 씻고 돌아갑시다.”

 “네, 대장님.”

 재수 4인방은 몸을 씻기 위해 벌써 강으로 가 버렸다. 그들의 시야에 상체를 드러난 필립과 지탄밖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시린느와 라트리나는 위쪽에 있는 작은 웅덩이로 간 것 같았다. 땀 냄새를 맡으며 같이 자고 종일 동행해도 여자는 여자였다.

 일행이 모두 몸을 씻고 아지트로 삼은 작은 동굴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 홀이 그린 듯 조용히 안쪽에 앉아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튼 유령이 따로 없다니까. 그래도 예쁘니 무섭지는 않아 다행이지만.”

 홀은 비록 말이 없었지만 시린느의 말에 작게 미소 지어 반응은 했다.

 “자, 빨리 식사 준비하자고.”

 시린느는 미적거리는 라트리나의 팔소매를 잡아끌고 저녁 식사를 조리하기 위해 바지런을 떨었다. 이곳은 사슴과 같은 동물이 지천이고 먹을 만한 야생 식물도 많아 식재료 걱정은 없었다.

 몇 번이나 티노의 지도를 받은 덕분에 제법 먹을 만한 음식을 만들곤 하는 시린느라 네 사람은 요즘 입맛을 찾았다.

 식사하면서 하룬은 티노와 의논했던 것을 공지했다.

 “아, 아깝다! 그놈들하고 한번 붙어야 하는데.”

 “그러게 말이야. 이번에는 그 재수 없는 뿔들을 산 채로 뽑아 버리려고 했는데.”

 “어쩌나, 가죽을 한 열 장은 더 벗겼어야 했는데.”

 “난 그놈들 똥구멍에 칼침을 놔 주려고 했어. 똥물에 튀겨 죽일 놈들!”

 재수 4인방은 아쉬워하는 눈치가 역력했지만 다행히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만큼 짧은 시간에도 자신의 실력 향상에 만족하고, 던전에서 느꼈던 패배감을 떨쳐 버린 것이다.

 저녁을 한껏 먹은 재수 4인방은 바로 제자리를 찾아 쓰러졌다. 긴장 상태를 풀 수 없는 강도 높은 실전을 치르는 그들의 몸은 안전한 곳에 누웠다 하면 바로 잠이 드는 경지까지 와 있었다.

 홀은 오늘도 앉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명상을 겸한 수면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다들 마법에는 무지한 상태라 그녀의 경지를 가늠할 도리는 없었지만 티노의 말로는 이미 4서클에 진입했다고 하니 그 나이를 고려하면 대단했다.

 하룬과 티노는 일행의 가장 앞에 자리를 잡고 느긋하게 차를 즐겼다. 산중이라 벌써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지만 하늘은 수없이 많은 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짙은 어둠과 찻잔에서 나오는 따듯한 김 그리고 고적한 침묵을 두 사람은 지그시 눈을 감고 즐겼다. 굳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두 사람 사이에는 기분 좋은 편안함이 흘렀다.

 터억!

 좋은 기분으로 차를 마시려던 두 사람의 몸이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동굴 주위의 오르막에 설치한 함정 하나가 파괴되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돌이 많은 곳이라 한밤중에 움직이는 몬스터는 거의 없었는데 웬일인지 모르겠다.

 기분 좋은 피로감과 나른한 몸 때문에 긴장이 풀려서인지 두 사람은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소리를 들은 순간 하룬은 소리 없이 비수 몇 자루를 꺼내 들었고, 티노는 동굴 안쪽으로 움직였다. 여차하면 다른 대원들을 깨워야만 했던 것이다.

 “실례할게요. 지나가던 사람이에요.”

 불시에 받을 수도 있는 공격이 두려웠는지 함정이 있던 곳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인 듯 날카로우면서도 맑은 음색이 느껴졌다.

 “천천히 앞으로 오시오.”

 하룬은 약간 긴장을 풀고 상대방에게 말했다. 이쪽은 피워 놓은 모닥불 때문에 이십 보의 거리에 있는 상대방이 아직 보이지 않았다.

 작은 발소리와 함께 이동해 오는 사람들의 형체가 보이고, 이내 모닥불 빛에 그 얼굴들이 드러났다.

 나타난 사람은 둘이었다. 아무래도 아까 보았던 그 두 사람인 것 같았다.

 한 여자는 마법사 특유의 로브를 입었고, 다른 여자는 은회색이 나는 금속 방어구를 착용했는데 행색은 등에 멘 배낭 이외에는 무기도 없는 단출한 모습이었다.

 “야영할 장소를 찾다가 불빛을 보고 왔어요.”

 “어서 오시오. 불은 나누어 쓰면 되니.”

 티노가 하룬을 한번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안전하다는 신호였다. 행색이나 첫인상만으로 위험성을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하룬은 그의 경험과 안목을 믿었다.

 두 여자는 조심성 없는 태도로 걸어와 불가에 앉았다. 하는 짓을 보니 영락없는 초보 여행자였다. 한 여자는 이십 대 초반으로 보였고, 마법사로 보이는 다른 한 명은 이십 대 후반으로 보였는데 나이가 꽤 차이 났지만 자매인 듯 비슷한 이목구비와 체구를 가졌다.

 상당한 미모의 그녀들은 키도 훨친하고 몸매도 무척이나 풍만한 것이 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듯했다.

 “하룬이오. 이쪽은 티노 그리고 나머지 일행은 쉬거나 잠을 자고 있소.”

 “반가워요. 전 세류이고 얘는 비류라고 해요. 여행하던 참이에요.”

 ‘유저구나. 그것도 코원 출신의.’

 게임 아이디를 보니 자신과 같은 코원 출신이 분명했다. 이제는 영어와 섞였지만 종말 시대에 막강한 국력을 가졌던 한국의 언어인 한글은 그 편리함과 우수성으로 유니온 공용어 중 한 언어였다. 그래서 때때로 코원과 코부 유니온 출신 중에서는 이렇게 순수한 한글로 아이디를 정하는 유저들이 있었다.

 ‘그런데 단둘이 여행하고 있다고? 분명히 거짓말일 텐데.’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런 험한 곳에 여자 단둘이 여행을 왔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과연 그럴 정도의 능력은 갖추었는지도 궁금했지만 굳이 물을 필요는 없었다.

 “식사는 하셨나요?”

 마법사 차림의 세류가 물었다.

 “우리는 했소.”

 “그럼 실례할게요.”

 세류라는 유저가 능숙하게 배낭을 풀어 빵과 간단한 음료를 꺼냈다. 그 와중에 동생인 비류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길로 두 사람과 모닥불 빛으로 붉게 보이는 동굴 내부에서 자고 있는 다른 대원들 그리고 앉은 채로 미동도 없는 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룬과 티노는 두 사람에게 모닥불을 양보하고 동굴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일은 날씨가 좋겠네요. 상류 쪽 하늘에 별이 그득하군요.”

 티노의 말에 하룬이 하늘을 쳐다보니 과연 크고 작은 별들이 찬란한 빛을 뽐내고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에 좋은 날씨였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데도 서로 존대해 가면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두 사람을 이상하다는 듯 연방 쳐다보는 비류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느껴졌지만 하룬과 티노는 그 눈길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유저들과 어울린 경험을 통해 그들에게 진저리를 친 하룬은 아침이면 헤어질 상대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티노는 오랜 경험으로 자신이나 동료가 관계된 일이 아니면 아예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빵과 음료로 저녁을 해결한 두 여자는 하룬과 티노에게 말을 걸려는 눈치였지만 두 사람은 보란 듯이 침낭을 펴고 누웠다.

 약간 이르긴 하지만 이제 자야 할 시간이었다. 현실에서와 달리 몸의 시계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으로 맞추어져 있었다. 어느새 자연의 법칙에 동화된 것이다.

 “저어…….”

 막 잠이 들려고 할 때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에 먼저 반응한 것은 티노였다.

 “무슨 일이오?”

 “혹시 여분의 침낭이나 모포가 있으면 얻을 수 있을까 해서요. 여행한다고 성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준비가 많이 미흡해서요.”

 한심한 노릇이었다. 이 세계에 사는 NPC들이라면 절대 저지르지 않을 실수를 하는 것을 보니 유저가 맞았다. 그것도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무슨 사연으로 두 여자가 이런 곳에 있는지 모르지만 그녀들이 멘 배낭이 마법 배낭이 아니라면 기본적인 먹을거리도 얼마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

 “대장님.”

 티노는 혼자 결정하지 않고 하룬은 존중했다. 윗사람을 모시는 것에 아주 익숙한 사람이었다. 하룬은 내심 귀찮았지만 그래도 못 본 척하기는 힘들었다.

 “여분은 있습니까?”

 “마침 자작께서 잘 챙겨주시는 바람에 여분이 몇 개 있습니다.”

 “빌려 주세요.”

 하룬의 승낙이 떨어지자 티노는 배낭을 뒤져 새 침낭 두 개를 꺼내 세류에게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그럼.”

 하룬과 티노는 간단히 인사를 받고는 다시 침낭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제 정말 잠을 자야 하는 시간이었다.

 한참이 지났지만 하룬은 여전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재수 4인방은 물론 티노도 코를 골았고, 홀의 몸이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다들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험하기로 소문난 후크란 산맥 안으로 드디어 진입한다는 사실 때문일까?

 더구나 다른 때 같으면 그 역시 피곤해서 잠들었을 텐데 오늘은 손님이 있어서 그런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언니, 자?”

 “아니.”

 자매가 나누는 낮은 대화가 들려왔다. 나름 들리지 않게 소곤거리는 목소리였지만 밤에 그것도 감각이 무척이나 예민한 하룬은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칫! 나이도 많지 않아 보이는데 그깟 침낭 하나 빌려 주는 거 가지고 꽤나 유세를 떠네.”

 외모와 달리 치기가 느껴지는 동생 비류의 목소리였다.

 “아름다운 레이디의 어려움을 보았으면 다른 것들도 물어보고 알아서 챙겨 줘야지 뭐 이래? 저 늙다리는 그렇다 치고 저 재수 없는 작자는 왜 저렇게 도도한데? 눈이 멀었나? 우리 미모가 보이지도 않나 보지? 이 비욘드는 정말 NPC들이 마음에 안 들어.”

 그녀의 말에 하룬은 기가 막혀 웃기지도 않았다. 말하는 본새를 보아하니 현실에서 마론과 같은 노블 비슷한 신분을 가졌나 보다. 게다가 자신을 당연하게 NPC로 보는 것도 황당했다.

 “목소리 낮춰. 어쨌든 우리에게 모닥불과 침낭을 제공한 사람들이야. 아무리 NPC들이라도 이곳은 실제와 거의 흡사한 세상이니까 현실처럼 행동하면 안 돼. 벌써 몇 번이나 NPC들과 부딪쳐 보고도 그러니?”

 보아하니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이곳에서도 몇 번이나 NPC들을 상대로 사고를 친 듯했다.

 “치잇. 알았어. 이럴 줄 알았으면 길드의 랭커들을 다 끌고 오는 건데. 언니는 뭘 그렇게 급하다고 소집령 내리자마자 출발한 거야. 덕분에 비리비리한 녀석들만 데리고 오는 바람에 우리가 이 꼴이 됐잖아. 평소에는 마치 오우거라도 한 칼에 해치울 것처럼 자랑을 늘어놓던 놈들이 변종 오크에게 한순간에 박살 나 버렸잖아.”

 하룬은 눈을 크게 떴다. 분명히 길드라고 했다. 벌써 길드가 만들어졌는지는 몰랐다. 물론 가상현실 게임에서 길드 생성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유저들과 지낸 경험이 없는 탓에 미처 생각을 못 한 것이다.

 더구나 현실에서 노블들의 위세를 생각하면 그들이 길드를 만드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노블들마저 이 비욘드를 할 줄은 몰랐다.

 ‘노블이 이렇게 흔했던가?’

 게임을 통해 나이 대가 비슷한 노블과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은 것이 마론을 포함해서 벌써 세 번째였다.

 S구역이나 A구역에 거주하는 노블들의 숫자는 그가 사는 코원 유니온을 기준으로 대략 천 명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그 나이 대를 생각하면 그와 비슷한 연배의 노블은 백 명에서 이백 명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래도 길드원들이 죽어 가면서 그 무서운 뿔 달린 오크들을 막았기에 너와 내가 살 수 있었잖아. 출세를 위해 우리에게 꼬리를 흔들며 살아가는 하찮은 녀석들이지만 그건 고마워해야지.”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그래도 조금 나아 보였지만 세류의 사고방식 역시 비류와 오십보백보였다.

 “에잇, 신경질 나. 현실도 아닌 가상 세계에서 이런 꼴을 당하다니. 이런 첩첩산중에서 이게 웬 봉변이야?”

 “불평하지 마. 다음에 제대로 준비를 갖추어서 다시 오면 돼.”

 “그런데 언니, 그곳이 과연 존재하는 게 확실하긴 할까?”

 언니에게 어딘가의 실존 여부를 묻는 비류의 말에서 강한 호기심과 흥미가 느껴졌다. 하룬 역시 귀를 쫑긋 세웠다. 그녀들은 뭔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지도는 확실해. 이걸 구입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갔는지 잘 알면서 그래. 제대로 찾기만 하면 우리 길드는 이 시계에서 확실히 자리 잡을 수 있어. 우리가 원하는 상계 진출과 확장은 물론 이곳에서도 고위 귀족이 될 수 있다고. 장차 비욘드는 현실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게 될 테고, 이곳에 형성한 금력과 권력이 더해지면 유니온에서 아버지가 상원에 진출할 수 있어. 그럼 우리 자매도 그동안 무시했던 그 쓰레기 같은 연놈들을 발아래 깔고 마음껏 가지고 놀 수 있게 된단 말이야.”

 그 말을 들은 하룬은 처음으로 노블 간에도 알력이 있고, 서열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노블답게 우아하고 아름답게만 보이는 세류의 말에서 강렬한 적개심과 분노가 진하게 느껴졌다.

 “호호호호, 생각만 해도 통쾌하네. 난 강혜리와 모미진, 그 돼지 같은 음탕한 년들을 사람들 많은 대로에서 빨가벗겨 침을 뱉어 주고 싶어.”

 어딜 가나 빠지지 않는 강혜리의 이름이 또 나왔다. 아마 비류 역시 심한 모욕을 당한 적이 있었나 보다.

 하룬의 눈에 기광奇光이 번득였다. 아무리 잠든 것처럼 보였다고 해도 그렇지 저런 중요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나누다니. 머리통이 어떤 물질로 채워져 있는지 정말 궁금했다.

 “그나저나 왜 귀환 스크롤을 쓰지 말자고 한 거야? 오늘 걸은 것은 그렇다 치고 앞으로 우리가 강 건너온 곳까지는 여기서 꼬박 하루는 걸린다고. 난 무기도, 수발해주는 패밀리도 없이 이렇게 불쌍하게 더 이상 돌아다니고 싶진 않아, 언니.”

 정말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철부지였다. 하룬은 황당해서 소리 없이 실소를 흘렸다.

 “나도 이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면 굳이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한데서 자고 싶은 생각은 안 했을 거야. 너도 생각을 좀 해 보렴. 이 사람들, 무지 궁금하지 않니? 근처에서 후크란 산맥에 대해 제대로 아는 NPC들이 하나도 없는 데다 다들 두려워하며 접근하는 것조차 꺼리는데 이 사람들은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으니 궁금해서 온 거야. 혹시 아니? 이 사람들이 후크란 산에 대해서 잘 아는지.”

 “흐음. 그런 생각을 했구나. 그런데 설령 저들이 후크란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해도 우리의 부탁을 들어줄까? 저 젊은 놈 눈매가 살벌하던데.”

 자신들에게 안전한 잠자리와 침낭까지 내준 사람에게 이놈 저놈 하는 개념을 상실한 말투를 보니 노블이 맞았다. 그가 아는 한 노블들이 일반 주민들을 제대로 사람 취급하는 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만약 후크란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으면 어떻게든 설득해 봐야지. 안쪽에 보니까 여자들도 있긴 하지만 행색을 보아하니 용병들이나 사냥꾼들 같던데 돈으로 어떻게든 되지 않겠니?”

 역시 권력으로 안 되면 돈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노블들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을 드러냈다.

 “호호호. 알았어, 언니. 그래도 젊은 것은 무척 차가워 보이던데…….”

 비류는 차갑게 자신을 대했던 하룬이 영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걱정하지 마. 살벌하게 굴어서 그렇지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으니까.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니.”

 하룬은 기가 막혀 잠시 숨을 쉬지 못했다. 당장 박살을 내고 쫓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불같이 일어났다.

 “그런데 정말 이 사람들의 정체가 뭘까? 분명히 저 늙다리가 젊은 남자에게 대장이라고 불렀지, 언니?”

 “그러게, 나도 궁금하네. 그렇다고 치렁치렁 기른 지저분한 머리나 입고 있는 방어구를 보아서는 이 세계의 귀족 같지도 않아. 분명히 어떤 단체를 이끌고 있긴 한 것 같은데. 물론 행색으로 보아서는 딱 사냥꾼이지만…….”

 “아유, 너무 피곤하다. 업어 줄 패밀리들이 다 죽어서 반나절 내내 험한 산길을 걸었더니 다리가 퉁퉁 부은 것 같아.”

 “자, 피로 회복 물약이야. 일단 잠을 좀 자자.”

 두 자매는 정말 피곤했는지 그 후 별다른 대화 없이 곧 조용해졌다. 천막 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모닥불 가에 그대로 누워 자는 듯했다.

 ‘후후, 재미있겠는걸. 로그아웃하지 않는다는 걸 보면 최상급 캡슐을 사용하는 확실한 노블이군.’

 하룬은 잠시 미소 짓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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