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럼프 오크의 던전 (33/278)

《럼프 오크의 던전》

 “제기랄! 무슨 GM 신세가 이렇담!”

 매그럼은 자신도 모르게 한탄하고 말았다.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발휘한 그는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조기 졸업했다. 그리고 이제 성년이 되어 삼수가 필수라는 세계적인 대기업 넥컴월의 입사 시험을 단 한 번에 통과한 것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덕분에 D구역에 살던 그의 가족들은 단숨에 B구역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너를 내 아들로 삼은 것은 내 일생에 최고의 행운이야.”

 유니온 수비군에서 평생을 일해 온 직업 군인인 아버지는 그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했는지 온 세상에 그의 아들을 칭찬하고 다녔다. 비록 쑥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인공수정으로 태어난 그를 친자식처럼 키워 주신 부모님에게 어느 정도 은혜를 갚았다는 생각에 그 역시 뿌듯했다.

 B구역에 배정된 주택은 정원까지 있는 단독주택이었다. 덕분에 흙냄새를 맡게 된 어머니가 제일 좋아라 했다. 그녀의 취미는 화초를 가꾸는 것이었다. 아들 덕분에 소원을 푼 어머니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그 엄청난 대기업에 입사해 그가 처음으로 맡은 일은 바로 비욘드라는 게임의 보조 운영자였다. 일반적으로 게임 운영자인 GM은 막강한 능력과 권한을 가진 존재였기에 그 역시 회사가 자신의 천재적인 능력을 인정한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비욘드는 비록 넥컴월이 개발한 게임이긴 했지만 다른 게임들과는 사뭇 달랐다. 일반인들은 절대로 모르는 비밀 사항이지만 넥컴월은 게임 시스템에 거의 관여할 수 없었다.

 비욘드는 두 대의 에인션트 컴퓨터와 수천 대의 슈퍼컴을 기반으로 구현한 가상현실 게임이지만 자아를 가진 두 마더컴은 인간의 간섭을 철저하게 배제했다. 게임을 개발한 게임사가 게임에 관여할 수 없다는 황당한 말에 윗선에 몇 번 질문을 했지만 누구도 그 이유를 말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게 자아를 가진 마더 컴퓨터들과 애초에 한 약속이라고 하던데.”

 “맞아, 정확하게는 전지구위원회와 넥컴우러 간에 이루어진 계약이지. 마더컴들과 슈퍼컴의 소유권을 WGC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회사도 어쩔 수가 없대.”

 선배 GM들의 말은 차라리 충격이었다. 그도 몇 번 가상현실 게임을 해 본 적이 있지만 이런 식으로 게임이 운영되는 것은 처음 들었다.

 “이럴 거면 GM이랑 유저랑 뭐가 달라?”

 “녀석! 그래도 우리는 비공식으로는 최고 랭커잖아.”

 초른의 말대로 그나마 그것이 위안이었다. GM으로 등록하면 처음부터 전직한 상태로 시작하니 말이다. 또한 유저들과 똑같이 플레이하는 재미도 쏠쏠하기는 했다. 무론 그들에게는 편안하게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과 달리 해야 할 임무가 있었다.

 “형, 도대체 비공식 랭커들을 왜 찾아서 보고하라는 거지?”

 그의 말에 초른이 빙긋 웃었다. 입사 동기인 초른은 코원탑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 출신이었다. 다만 그의 경우처럼 출신이 낮아 유니온의 공직 사회에는 진입할 수 없었다.

 “들리는 소문에는 유니온 군부에서 대거 특채를 한다고 하더라.”

 매그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아버지가 바로 군부에 있지 않은가? 비록 직급이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연수가 오래된 직업 군인인 까닭에 군부의 사정은 꿰뚫고 있는 분인데 그런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넌 잘 모르겠지만 우리처럼 최상급 캡슐로 이 비욘드를 하다 보면 게임 능력의 어느 정도까지는 현실에서도 쓸 수 있다고 하더라.”

 “그거야 당연하지. 비록 전기 자극을 통한 접속이긴 하지만 전신의 신경 회로와 연결된 슈트를 입고 게임하니 게임 속 능력의 일부분은 현실에서도 쓸 수 있지. 특히 검사나 전사 계통의 유저들이라면 현실에서도 그 능력을 쓸 수 있잖아.”

 그가 사용하는 캡슐은 최상급이다. 더구나 전용 슈트까지 있어 캐릭터와의 동화율은 거의 한계치인 50%에 가까웠다.

 비록 게임 속에서의 움직임이 똑같이 재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슈트와 캡슐의 성능을 통해 동일한 자극을 받기 때문에 현실에서도 게임 속의 능력을 일부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게임은 다른 게임들과는 달라.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모종의 목적을 가지고 WGC와 유니온들 그리고 넥컴월이 힘과 자금을 모아 만들었다고 해. 그중 하나가 바로 날로 증가되는 오르그와 하르크의 위협을 상대할 전사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하더라.”

 “그거야 유니온 수비군에서 뽑아서 훈련시키면 되는 거 아닌가?”

 물론 그것이 정석이었다. 직업으로 자리 잡은 군인이라면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육체적 능력과 전투 능력을 인정받은 능력자 집단이니까.

 “이미 랭커들 중에 상당수는 유니온들의 수비군들에서 차출된 요원들이라는 소리가 있어.”

 “그런데 왜 우리는 비공개 랭커들을 찾아야 하는 거야?”

 “그게 말이야, 희한하게도 게이머들 중에는 현실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능력자들이 다수 존재하지. 즉, 능력이 없는 것으로 판정이 내려진 유저들 중에서는 가상현실 게임을 통해 능력자로 드러난 경우들이 상당수 보고되었어.”

 “알 만하군. 그럼 이 게임은 군사용으로 개발된 거로군.”

 유라시아 대륙 동부 유니온들을 중심으로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는 이 비욘드 게임 속에 그런 숨은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매그럼은 수습 기간 동안 받았던 교육을 통해 배리어 외부의 환경이 그동안 주입받았던 것과는 다르다는 점과 변종 생물이나 맹수들을 상대하는 방법이 화약 무기가 아닌 구식 무기가 효과적이라는 것을 이미 배웠다.

 하지만 막상 설명을 해 주었던 초른의 얼굴에는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그게 전부가 아니야. 또 다른 뭔가가 도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그렇지 않다면 그 콧대 높은 노블들이 대거 이 현실성 높은 위험한 게임을 시작하지 않았을 거야.”

 “그래?”

 그 역시 어린 시절부터 천재성을 발휘한 터라 노블들에게 질시의 시선은 물론 몇 차례나 치욕을 당한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노블이 되겠노라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더욱 관심이 갔다.

 “이 게임의 스토리 퀘스트인 골든 배틀을 통해 그 숨겨진 목적이 드러날 거야.”

 숨겨진 목적이란 말에 매그럼은 심장이 빠르게 박동 치기 시작했다.

 마더컴들의 특별한 배려로 특별한 장소에서 일주일 만에 전직하고 석 달 만에 80레벨을 찍은 운영자의 이점이 아니라도 이 게임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렬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확실한 것은 보이지 않지만 진한 유혹의 향기가 풍기는 미래가 그를 끌어당겼다.

 “일단 우리 담당인 브리엘라 황녀를 찾아가야겠네.”

 “그래야지. 그녀 주변에 모여드는 유저들을 면밀하게 관찰해서 숨겨진 능력자는 없는지, 비공식 랭커가 있는지 찾아내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니까 말이야.”

 “아무튼 월급 받으면서 게임하는 건 마음에 들어.”

 “하하하! 동감이야.”

 두 사람은 찜찜한 기분을 풀고 브리엘라 황녀가 있을 파로스 자작령을 향해 출발했다. 이제 한동안 배변 주머니를 처리하고, 육체가 굳지 않도록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로그아웃하는 패턴으로 살아야 함에도 그들의 얼굴은 밝았다.

 홀을 호위하여 후크란 산맥으로 가는 퀘스트를 받아들인 하룬은 데브론과 파로스 자작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이 넉넉하게 준비되었고, 제법 비싼 물약과 포션들까지 제공받았다.

 호위 대상인 홀과 함께 자작가를 떠난 돌풍 용병대는 이틀을 꼬박 걸은 후에야 후크란 산맥의 남쪽 끝과 마주한 센 강을 만났다.

 북쪽의 최고봉인 후크란 산에서 발원하여 방대한 지역을 흐르는 센 강은 강폭이 넓고 수량도 많았다. 비록 수심도 깊었지만 중간 중간 강의 양쪽에 거대한 암석 지대가 있어 폭이 좁은 곳들이 있었다.

 일반 사람들이야 감히 넘어설 엄두도 내지 못하지만 하룬 일행은 암석의 틈에 용케 뿌리를 박고 성장한 거대한 나무 한 그루의 밑동을 베어 다리를 만들었다. 물론 그것 때문에 그동안 지탄이 장식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검 한 자루가 고철이 되어 버렸지만 이제 방패를 전용 무기로 쓰게 된 지탄은 그것을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센 강을 무사히 넘은 일행은 감히 산맥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강변을 따라 북상하기 시작했다. 소문에 따르면 오우거 같은 상위 몬스터들은 산맥의 중심부에 서식한다고 하니 강변이라면 어느 정도는 안심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강변을 영역으로 하는 몬스터들 역시 부지기수로 많았다. 수많은 고블린과 오크 무리들이 사시사철 신선한 풀이 자라나는 강변의 초원에 자리 잡은 풍부한 수의 초식동물들과 함께 먹이사슬을 이루며 번식하고 있었다.

 티노의 추적술이 경지에 올라 있어 대규모 몬스터들과 조우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영역을 순찰하거나 먹이를 구하기 위해 나온 작은 무리의 몬스터는 하루에도 대여섯 번 이상 만났다.

 강변은 몸을 숨길 수 없는 엄폐물이 많지 않은 초원이나 키 작은 관목 숲 지대이기에 어쩔 수 없는 전투였다.

 소수의 몬스터들은 피할 이유가 없었다. 열 마리 이내의 몬스터들은 일부러 찾으려던 하룬이었기에 몬스터들과의 조우는 좋은 일이었다. 돌풍 용병대는 몸을 사리지 았는 그야말로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지는 전투를 치러야만 했다.

 “이런 오크 똥싸개들이 감히! 이 냄새나는 추악한 오크 놈들아!”

 “…….”

 “뒈지고 싶냐? 어딜 꼬나봐! 눈깔을 빼서 목걸이로 만들어 버릴까 보다.”

 “…….”

 “이런 쌍! 죽고 싶냐?”

 라트리나의 도발은 완전히 물이 올라 있었다. 그녀의 도발적인 눈빛과 욕설을 들은 오크들은 눈이 뒤집혀 앞뒤 잴 것도 없이 그녀를 쫓아왔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욕설과 눈빛 도발은 몬스터의 머리 뚜껑을 열어 버릴 정도로 지독했다.

 그녀를 따라오는 오크들은 그녀를 미처 따라잡기도 전에 느닷없이 거대한 방패와 마주쳐야 했다. 바로 지탄의 것이었다. 지탄의 방패는 두 사람은 가릴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에 강철을 통짜로 펴서 만든 것이었기에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실드 어택!”

 꽈앙!

 강력한 힘을 모아 한순간 방패를 앞으로 미는 지탄의 실드 어택은 무척이나 효과적인 스킬이었다. 언제나 무거운 방패를 들고 다니며 힘을 길러 온 지탄의 방패는 비록 무기를 들고 있는 상대가 두셋이 넘더라도 쉽게 튕길 수 있었다.

 “실드 크로싱!”

 무지막지한 통짜 강철 방패를 옆으로 휘두르는 스킬에 오크 두세 마리는 순식간에 몸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만다. 아직 스킬 레벨이 낮아 방패의 모서리에 박은 작은 검날들의 힘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강력했다.

 “스매싱 블로!”

 지탄의 뒤에 자리한 필립의 검이 지탄의 방패와 부딪쳐 휘청거리는 오크의 이마나 목을 노리고 전광석화처럼 쏘아졌고, 일반 오크들에게는 백발백중이었다. 숫자가 둘 이상이라도 걱정 없었다.

 “멀티 블로!”

 스매싱 블로의 진화 스킬인 멀티 블로는 미약한 마나를 사용하여 빠르기를 더한 중급 스킬로, 여러 목표물을 연속적으로 찌를 수 있다. 이 스킬을 위해 필립은 전보다 더 가늘고 검첨이 뾰족한 검을 구해야만 했다.

 만약 그 숫자가 필립이 한 번에 상대할 수 없는 정도라면 하룬의 비수가 같이했다. 워낙 집중 상태를 필요로 하는 스킬이라 딜레이 타임이 있었던 것이다.

 하룬의 비수들은 여러 개의 목표라도 절대 놓치는 법이 없었다. 럼과 동행했던 던전을 클리어하며 이미 멀티 샷을 위한 S.P.를 확보한 하룬은 여행을 시작하며 바로 이 스킬을 익혔다. 이동하면서 틈만 나면 스킬을 수련한 덕분에 멀티 샷은 벌써 스킬 레벨 2에 올라선 지 오래였다.

 이제 강력한 집중으로 자신의 근육이 움직이는 것까지 심안으로 보게 된 하룬은 양손으로 세 자루씩의 비수를 각각 다른 방향의 목표물에 정확하게 날릴 수 있었다.

 부족한 것은 하나를 던질 때와 같은 동일한 힘을 세 자루의 비수에 심는 것이지만 실전을 거치면서 차츰 채워졌다. 그사이 그의 레벨은 세 단계나 상승했다.

 “아싸! 큰 놈이다!”

 시린느는 쓰러진 놈들의 가죽을 벗기는 데 이력이 났다. 이제는 누가 가죽을 잡고 당겨 주지 않아도 날카로운 단도로 혼자서도 금방 가죽을 벗길 정도였다. 히죽 웃으며 피를 흘리는 오크의 가죽으 벗기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예전 용병 학교의 시린느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제 근처엔 한 마리도 없어.”

 한참 더 주변을 정찰하고 돌아온 라트리나의 말에 일행은 비로소 긴장을 풀고 자리를 잡았다.

 “수고했어, 라트리나.”

 “호호호! 티노, 오늘은 내 도발 스킬이 드디어 마지막 레벨에 올랐어요.”

 티노의 치하에 라트리나가 활짝 웃으며 자랑했다. 그녀가 도발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화가 끓어오르는 것을 보면 그녀의 말이 맞을 것이다.

 기껏 전사의 전당에 보내 스킬을 익히게 해 주었더니 배운 스킬을 쓸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생성한 도발 스킬을 쓰는 데 재미가 들린 라트리나였다.

 “히유, 저것도 스킬이라고. 쯔쯧.”

 좋아하는 그녀를 보고 필립이 한마디 했지만 시린느의 말이 더 가관이었다.

 “겨우 이제 초급 마지막 레벨이냐? 내 도축 스킬은 이미 중급을 넘어선 지 오래라고.”

 하긴 신들린 듯 현란하게 움직이는 단검과 손놀림을 보면 경지에 이른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가죽을 벗겨 내면서도 몬스터의 피를 뒤집어쓰지 않을 정도였다. 혈관을 건드리지 않고 가죽을 벗겨 낼 정도라면 중급 이상이 확실했다.

 그녀의 하드 레더에 말라붙은 몬스터들의 핏자국들을 보니 새삼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느껴졌다. 현실에서도 보기 힘든 아름다운 미모에 착한 몸매까지 가진 그녀가 자신 때문에 이런 신세가 된 것이 약간은 미안했지만 하룬은 흔들리지 않았다.

 ‘넌 영락없이 노블이야. 아직은 더 바뀌어야 해.’

 하룬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고는 쉬고 있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모두 수고했다. 필립, 넌 어때?”

 “이제 몇 마리만 더 잡으면 멀티 블로의 스킬 레벨이 2로 올라갈 거 같아, 대장.”

 필립은 검첨에 묻은 피를 털고 검집에 꽂았다. 그간 여행하면서 찌르기 공격인 초급 스매싱 블로를 완전히 마스터해가고, 전사의 전당에서 익힌 중급 스킬 멀티 블로를 집중적으로 수련한 필립의 눈은 그의 검처럼 날카롭게 다듬어졌다.

 ‘역시 성실한 녀석이구나. 그래도 혼자서 전투할 때를 대비한 검술이라도 익혀 놔야 안심이 되는데.’

 하룬은 필립이 파티 공격에 너무 익숙해지는 것을 우려했다. 물론 집중력과 민첩성이 뛰어난 찌르기 공격은 아주 강력했지만 난전이 벌어지거나 다수의 적을 상대할 경우는 사용하기가 곤란했다.

 ‘후크란 산중에 있다는 수련장에 가면 홀에게 부탁해서 녀석에게 알맞은 검술을 하나 구해주어야겠구나.’

 다른 녀석들도 그렇지만 필립의 실력이 높아지면 그만큼 용병대 전체의 전력이 올라가니 그 정도는 해 주어야만 했다.

 필립은 돌풍 용병대의 핵심 전력이다. 티노 같은 경우는 다양한 능력을 가진 대신 전투력은 형편없었다. 몬스터 같은 위험과 항상 마주하는 용병들에게 전투력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점 때문에 티노가 3급 용병이긴 해도 그간 다른 용병 단체에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홀은 허리까지 오는 풀밭의 한쪽에 서서 대원들의 모습을 보는 듯 마는 듯 쳐다보며 늘 그렇게 오연한 모습이었다.

 ‘정말 친해지기 쉽지 않은 여자네.’

 이십 일이 넘게 같이 여행한 사이지만 홀은 여전히 따로 놀았다. 평민들인 대원들과도 말을 섞지 않는 것을 보면 신분이 대단한 것 같긴 하지만 그녀의 정체는 수수께끼였다.

 데브론도 그녀의 자세한 신분은 언급하지 않아 모르겠지만 황녀인 브리엘라도 가벼이 대하지 않는 것을 보면 고위 귀족의 핏줄일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그녀가 대원들을 무시하거나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하지 않는 것이 다행일 수도 있다.

 ‘그러든지 말든지.’

 하룬은 홀에게 관심을 끊고 시린느가 챙겨 온 비수들을 암기대에 꽂았다. 그동안 잡은 몬스터들에게서 벗겨 낸 가죽이 벌써 작은 산만큼 쌓여 지탄이 등에 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시린느가 도축 스킬을 중급으로 올리는 데 막대한 기여를 한 몬스터들의 가죽들은 잘 말라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티노, 오늘은 이 근처에서 쉽시다.”

 벌써 해가 산봉우리 가까이로 움직인 상태였다.

 “알았습니다. 숙영할 장소를 찾아보지요.”

 티노는 날랜 몸놀림으로 재빠르게 키 작은 관목들 사이로 몸을 감추었다. 데브론에게 전수받았다는 그의 메신저 무빙 역시 기본 단계를 벗어나 있었다. 메신저 워킹을 단순하게 변형시킨 메신저 무빙은 마나를 쌓는 효용은 현저하게 약하지만 걸음뿐 아니라 몸을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메신저 무빙을 수련해 이제는 생활 전반에 이르기까지 이 스킬을 본능적으로 펼치는 본인은 아직 잘 모르지만 이미 미세한 마나를 흡수할 정도의 단계에 이른 것이다.

 그동안은 센 강을 따라 북상하며 위험을 피해 왔지만 이제 그들은 후크란 산맥을 관통해야 한다. 그들이 걸음을 멈춘 곳은 후크란 산의 초입에 해당하는 넓은 바위 지대였다.

 티노가 숙영할 장소를 찾는 사이 일행은 각자의 무기를 손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직 해가 중천이지만 티노의 말을 따르자면 클리프 협곡이 코앞에 있어 숙영하고 내일 새벽같이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제 드디어 후크란 산으로 들어가는 건가요?”

 오랜만에 홀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그녀는 마치 벙어리처럼 말을 아끼며 동행했다. 둔한 성격의 지탄은 몇 번이나 홀의 존재를 잊기까지 할 정도였다. 어쌔신 수련을 받았다고 하더니 정말 그녀는 같이 있으면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숨기는 재주가 있었다.

 “그렇소. 티노의 말에 따르면 저기 보이는 클리프 협곡이 후크란 산의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이라니까 길게 잡아 이삼 일이면 수련장이 있다는 중턱에 도착할 수 있을 거요.”

 수련장이 어떤 곳인지 하룬도 궁금했다. 어떤 인물들이 수련하고 있는지, 어떤 수련을 하고 있는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 그곳을 두고 여행하는 내내 대원들은 온갖 추측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접속하기 전에 들른 비욘드 홈피에도 이미 골든 배틀을 놓고 많은 의견들이 줄을 이어 올라왔다. 자신이 인연을 맺은 브리엘라 진영은 황위 계승권자들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약하다고 평가받고 있었다.

 하지만 하룬이 볼 때 그들의 태도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분명히 그들은 강력한 비밀 세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바로 후크란 산에 있는 비밀 수련 캠프라고 확신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사이 티노가 흥분한 얼굴로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대장님!”

 “무슨 일입니까?”

 이미 일행은 전투태세를 갖추고 티노를 맞이했다. 지난 이십여 일 동안 쉴 새 없이 치른 전투로 자연스럽게 몸에 익은 반응이었다.

 이제는 지탄도 그렇게 많이 겁을 먹지는 않았다. 온몸을 감싸는 거대한 방패만 있으면 몸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더, 던……전을 찾은 것 같습니다.”

 “던전이라고요?”

 티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네, 협곡과 이어진 거대한 바위들 밑에서 늑대 굴처럼 생긴 것을 발견하고 잠시 살펴보았는데 아무래도 던전 같았습니다.”

 “갑시다!”

 일행은 티노를 앞세우고 흥분한 얼굴로 일제히 그가 말한 장소로 달리기 시작했다. 던전이 맞는다면 그동안 고블린과 오크들을 잡으며 가죽밖에 건지지 못했던 그들로서는 완전히 대박을 맞은 것과 다름없었다.

 흥분한 것은 하룬뿐이 아니었다. NPC들이긴 하지만 그들에게도 던전은 능력을 올리고 보물들을 얻을 수 있는 장소였다. 전설적인 용병들에게는 꼭 따라붙는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던전이었다. 던전을 발견하고 부자가 되거나 경이적인 실력의 상승을 경험한 용병들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티노의 발이 멈춘 곳은 관목 숲이 끝나고 거대한 절벽이 자리한 가장자리였다. 수많은 세월 동안 물과 바람에 침식되어 안으로 깎여 들어간 절벽의 아랫부분은 위에서 떨어져 내린 것으로 보이는 크고 작은 바위들로 가득했다.

 티노가 안내한 곳은 넝쿨 식물들의 굵은 나무뿌리들과 작은 바위들로 가려진 바위의 틈이었다.

 “호오, 정말 절묘한 곳이네.”

 “맞아. 티노가 아니었으면 가까이 올 생각도 하지 못했을 거야.”

 필립과 지탄의 말대로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는다면 굵은 나무뿌리 때문에 바로 앞에서 보아도 틈이 있다는 것도 몰라볼 정도였다.

 “이런 절벽 지대라면 동굴이 있을 법해서 찾던 중에 이곳에서 따듯한 바람이 새어 나오는 것을 느끼고 손을 넣었더니 주변의 기운이 바뀌더군요.”

 역시 길을 찾고 지형을 탐색하는 것은 발군인 티노였다.

 1년이 36개월인 이 비욘드의 세상도 이제 가을로 가는 계절이기에 한낮이지만 기온은 선선한 편이어서 바위틈에서 나오는 따듯한 공기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들어가 봅시다.”

 하룬은 살아 있는 나무뿌리를 옆으로 힘껏 당겨 제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럼프 오크의 던전을 발견했습니다.

 안내음과 함께 하룬의 눈앞으로 정보 창이 떴다.

『던전명: 럼프 오크의 던전

등급: B급(임의성 던전)

이 지역은 다양한 광석들과 마나석들이 풍부하게 매장된 화산 지대로, 강렬한 지열에 마나가 녹은 마나수를 지속적으로 섭취하고도 살아남은 오크들이 집단으로 서식하는 곳이다. 많은 시간 동안 격리되어 번식하는 사이 마나수에 적합한 상태로 변이를 이룬 이 오크들은 머리통 위에 마나가 쌓인 럼프를 가지게 되었다. 이 럼프의 영향으로 뛰어난 지능과 놀라운 육체적 능력을 가진 럼프 오크들을 처치하다.

몬스터: 럼프 오크 전사- 레벨 35~40

       럼프 오크 전사장- 레벨 60~70

       럼프 오크 주술사- 레벨 70~80

       럼프 오크 부족장- 레벨 90~100

클리어 조건: 부족장 1마리, 주술사 5마리, 전사장 10마리, 전사 400마리

발견 보상: 명성이 100 상승합니다. S.P. 30. 최초 발견자에 한해서 클리어를 할 때까지 아이템 드롭율이 3배 상승합니다.

이 던전은 등록 대상이 아닙니다.』

 ‘흠, B급이라면 아주 위험한데.’

 얼마 전 벨이 조사해서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던전을 등록하는 경우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지도 제작자나 파인더의 길을 걷는 유저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소리였다.

 다른 직업을 가진 유저들이라면 던전을 공개하거나 등록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등록된 던전의 대부분은 D급이고 간혹 C급이 등록된 경우가 있었지만 B급 던전의 존재 유무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럼프 오크가 어떤 종이기에 이렇게 레벨이 높은 거지?’

 15~20레벨인 일반 오크들의 두세 배에 해당하는 강력한 레벨을 가진 것으로 보아 굉장히 난이도가 높은 던전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일전에 유저인 럼의 친구들과 같이 들어갔던 던전이 9인 파티 입장이 조건인 C급인 것으로 보아 B급이라면 정상적으로 최소 90인 파티는 되어야 도전이 가능하다.

 하룬이 정보를 보고 잠시 고민하는 사이 나머지 일행도 나름대로 던전에 대한 것들을 추론하고 있었다.

 “우, 냄새! 이건 오크 냄새인데.”

 “그럼 몬스터 던전이네.”

 필립과 지탄의 대화를 들으며 티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났다. 아쉽게도 이 던전은 마법사들의 연구실이거나 고대 문명의 유물은 아니었다. 그런 던전이라면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는 보물들은 물론 엄청난 스킬까지 얻을 수 있으련만 무척 아쉬웠다.

 “그래도 몬스터 던전이 어디야? 거기다 상대들은 만만한 오크잖아.”

 이제 오크 정도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게 된 지탄의 말이었다.

 “그렇지. 이놈들이 얼마나 좋은 아이템을 가졌는지 궁금하네.”

 벌써 설레발을 치는 라트리나의 말에 다들 기대에 가득한 얼굴들이었다. 일당이 50실버인 그들로서는 최하 30골드가 넘어가는 아이템에 욕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도 하룬은 입장을 고민하고 있었다. 비록 NPC들인 대원들과 홀은 아무런 정보도 알아낼 수 없지만 유저인 자신은 이미 상당한 정보를 얻었다.

 단지 럼프 오크가 어떤 존재인지 확실히 모르는 상황이라 불안했다. 안의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들어가기에는 그들의 숫자가 너무 적었다.

 “재미있겠다.”

 이제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에 단단히 재미를 붙인 라트리나의 말에 하룬은 고개를 저었다.

 하룬은 유저라서 던전의 정보를 쉽게 취득했지만, NPC들로서는 안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제대로 모르는 상황이라 당연히 저런 소리를 하겠지만 그는 달랐다.

 “일단 이곳에 베이스캠프를 만들어서 푹 쉬고 내일 아침에 탐색을 겸해 짐을 놓고 가벼운 몸으로 들어가 보자.”

 “괜찮을까, 대장?”

 역시 신중한 필립이 불안해하는 하룬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입구 밖에는 오크들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 같아. 아니면 다른 곳으로 뚫린 입구가 있겠지.”

 “그건 대장의 말이 맞아요. 희미하게 오크들의 냄새가 나긴 하지만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단지 위험한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게 걸리긴 하지만…….”

 말끝을 흐리는 티노의 얼굴이 약간은 심각해졌다. 그의 뛰어난 본능이 위험을 경고하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일단 탐색부터 해 보고 계속 들어갈지 말지 판단하는 걸로 합시다.”

 “좋아요!”

 지형과 몬스터에 관한 한 티노의 판단은 모두의 신뢰를 받을 정도로 정확했다.

 일행은 하룬의 말대로 자신들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던전을 클리어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식량을 비롯한 기본적인 것들은 챙겨야겠지만 다른 것들은 놓고 들어가기로 했다.

 일행은 던전의 입구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동이 트기 무섭게 안으로 진입했다. 비록 대화가 오간 것은 아니지만 홀도 자연스럽게 그들과 동행했다.

 던전은 몬스터의 그것 답게 동굴이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은 무척이나 길었다. 티노의 말대로 정상적인 출입구가 아닌 것을 증명하듯 한동안 들어갔지만 오크들은 만날 수 없었다.

 대신 기어서 가야 간신히 통과할 정도의 좁은 통로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덩이들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지만 지나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거의 30분이 흘러 한 큰 공동空洞에 이르렀을 때 최초로 오크를 볼 수 있었다. 그것도 가장 적나라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오크의 모습이었다.

 놈은 한 구덩이 위에서 양발을 벌리고 털이 부슬부슬한 전신에서 유일하게 분홍색 살이 드러난 엉덩이를 드러낸 채 힘을 쓰고 있었다.

 “에고, 냄새야.”

 인간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렬한 악취에 절로 이맛살이 찡그려졌고, 급기야 지탄은 코를 잡으며 투덜거렸다.

 “쉿!”

 티노가 주의를 주자 지탄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볼일을 보던 오크는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오크는 머리통에 한 개의 혹이 불룩 솟은 기괴한 모습이었다.

 슈욱.

 채앵!

 “이런!”

 비수를 날린 하룬은 눈을 크게 떴다. 놈은 그 상황에서도 바닥에 내려놓았던 도끼를 잡아채 하룬이 날린 비수를 막아낸 것이다. 그걸 막아 낼 줄은 생각도 못 했던 하룬이나 나머지 일행이 잠시 놀라는 사이 오크는 기민하게 자세를 잡더니 흉광을 폭사하며 도끼를 들고 망설임도 없이 달려들었다.

 “실드 어택!”

 방어는 역시나 지탄의 몫이었다.

 꽈앙!

 굉음과 함께 불똥을 튀며 도끼를 쥔 오크의 몸이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사이 필립이 검을 날렸다.

 “스매싱 블로!”

 이 스킬을 거의 마스터한 필립의 검은 이제 어떤 자세에서도 가장 빠른 길을 찾아 목표를 꿰뚫었다.

 끄윽!

 비틀거리던 오크의 눈이 통방울만큼 커졌다. 어느새 목을 관통한 필립의 검첨이 회전을 하며 큰 구멍을 만들었던 것이다. 필립의 검은 핏줄기와 함께 뽑혀 나왔고, 오크의 눈에서 흉광이 빛을 잃었다.

 “이……건?”

 지탄이 쥔 방패가 크게 흔들렸다. 그만큼 강력한 충격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강력한 찌르기로 오크의 숨통을 끊은 필립도 얼굴이 굳어 있었다.

 “목이 꿰뚫린 상태에서도 몸을 움직였어. 그것뿐이 아니야. 내 검은 정 가운데가 아니라 목표한 곳에서 많이 벗어났어.”

 필립의 말에 티노가 앞으로 나서 오크의 사체를 자세히 살폈다. 필립의 말대로 목 한가운데가 아니라 조금 옆쪽에 검이 낸 구멍이 나 있었다.

 “럼프 오크군요!”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홀의 말이었다.

 “럼프? 정말 머리통 위에 뿔 같은 것이 달려 있네.”

 시린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오크의 사체를 훑어보았다. 여느 오크들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키와 지탄보다 더 건장한 몸체는 일전에 보았던 워리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죽은 오크의 머리통에 솟아난 혹을 만졌다.

 “딱딱한 것이 그냥 뿔 같은데. 이거 혹시 그 귀하다는 생체 마나석 아닌가요, 홀?”

 혹을 바라보는 시린느의 눈에 탐욕의 빛이 흘렀다.

 “그것은 아니야. 생체 마나석은 마나석 자체를 몬스터나 맹수가 우연히 먹어야만 만들어지지. 그 경우 보통은 마나석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마는데, 아주 희귀한 경우가 일어나곤 하지. 강인한 육체와 성정을 가진 녀석들이 있어 간혹 마나석을 먹고도 살아남는데 그런 경우 체내의 마나석을 기반으로 마나를 다루는 능력이 생겨 살아가면서 마나석을 더 키우게 되지. 그것을 생체 마나석이라고 부르는 거야.”

 “그럼 이건?”

 “자세히 알려진 것은 없지만 그 뿔은 몬스터가 흡수는 했지만 사용하지 못하는 마나들이 머리통 위에 혹처럼 쌓여서 만들어지는 거라고 해. 생체 마나석의 경우는 마나의 순도는 물론 그 흡수와 발출이 일반 마나석에 비해 뛰어난 데 반해 이 뿔은 단지 마나를 몬스터의 생체 조직과 함께 쌓아 놓은 것에 불과하다고들 하지. 이것을 마나석처럼 이용하려면 고위 마법사의 존재와 세밀하고 복잡한 마법 공정이 필요해서 거의 가치가 없다고 해.”

 마법사인 홀이 시린느의 호기심을 풀어 주었다.

 ‘흠, 실망이네.’

 독 때문에 싸가지를 소환하는 것을 극도로 자제하는 하룬으로서는 이 뿔이 마나석이었으면 하는 강한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가만! 식성(?)이 좋은 싸가지라면?’

 하룬은 캣랫 비수를 꺼내 오크의 머리에서 뿔을 잘라 냈다. 독 기운이 서린 비수지만 어차피 싸가지가 흡수할 아이템이니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마치 뼈처럼 단단하게 오크의 머리에 결합되어 있던 터라 곧 피가 흘렀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하룬이었다.

 “보통 오크들에 비해 굉장히 강한 놈들이니 긴장해야겠어.”

 그의 말에 일행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 무기를 단단히 잡았다.

 “대장. 그, 그런데 이놈 가죽은 포기하면 안 될까?”

 “왜?”

 하룬이 묻자 시린느가 심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오물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오크의 엉덩이 부분을 가리키며 코를 잡았다.

 “가죽이 좋더라. 보통 놈들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가격을 받을 것 같은데.”

 “럼프 오크의 가죽이라면 보통 것의 다섯 배에서 열 배까지 값을 더 받을 수 있습니다. 워낙 질기고 튼튼해서 작자만 있으면 부르는 것이 값이 될 정도지요.”

 티노의 말이 이어지자 시린느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래도 아직 더러운 것들까지 붙어 있는데…….”

 “씻으면 되잖아.”

 그 말에 시린느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오크의 사체 앞에 앉았다.

 “라트리나, 네가 지저분한 부분을 씻어.”

 “에엑? 대장, 그건?”

 라트리나가 질색했지만 하룬은 그녀의 반응 따위는 개의치 않고 구덩이들을 살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거주했는지는 몰라도 사십 개가 넘는 구덩이들이 있었다. 그중 상당수는 납작하고 넓은 돌로 덮여 있는 것으로 보아서 완전히 다 찬 듯했다.

 아마 입구에서부터 자신들이 들어온 쪽으로 벽을 파 들어가며 화장실 공간을 넓혀 온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입구 쪽의 구덩이들은 모두 돌로 덮여 있었다.

 돌을 들어 올리자 형언할 수 없는 악취가 났다. 도대체 뭘 먹는 건지 썩어 가는 오물은 코를 감싸 쥐게 만들 정도의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빨리해! 이곳이 녀석들의 화장실로 쓰는 곳 같으니까 여기서 잠복해서 몇 마리 더 잡는다.”

 시린느가 울상인 것을 보고 즐거워하던 라트리나는 난데없는 불행에 항변하려고 했지만 차가운 하룬의 말에 더 이상 입을 떼지 못했다. 평소에는 부드럽다가도 한번 말을 내뱉으면 반드시 관철하고야 마는 하룬의 성미를 이제는 어느 정도 알기 때문이었다.

 하룬의 말대로 대여섯 개의 구덩이는 두 발을 벌리고 앉기 좋을 정도로 파여 있었고, 그것들 안에서 여지없이 생생한 악취들이 풍겨 나오는 것으로 보아 여기가 오크들의 화장실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오크들이 화장실이라는 개념을 알다니…….”

 “대단하지. 인간들도 도시나 되어야 화장실을 만들어 쓰는데 한낱 오크 주제에 화장실까지 만들어 쓰다니.”

 티노와 필립은 연방 감탄하면서도 코를 감싸 쥔 상태로 구덩이를 구경했다.

 “잠깐! 볼일 좀 보고 올게.”

 오크의 머리통에서 베어 낸 럼프를 보며 뭔가를 떠올린 하룬은 그렇게 말하고는 들어왔던 길을 되짚어 갔다.

 굽어진 통로로 돌아 들어가기 전 슬쩍 뒤를 보니 시린느가 가죽을 벗겨 낼 준비를 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 주변에 모여 있었다.

 일행과 멀리 떨어진 곳까지 온 하룬은 싸가지를 소환했다.

 “싸가지.”

 “웬일이야? 그동안 찾지도 않더니.”

 -중독되었습니다. 초당 10의 데미지를 입습니다.

 역시나 중독되었다는 안내음을 들은 하룬은 꺼내 놓은 해독약을 복용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녀석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서 아주 희미한 반가움의 냄새가 풍겼다.

 “해독약이 얼마 남지 않아서 못 불렀다.”

 사실 해독약이 눈에 띄게 줄었다.

 “그러게 좀 넉넉하게 준비하지. 그렇게 준비성이 없어서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고 그래.”

 또 울컥한다. 이게 도대체 그를 주인으로 생각이나 하는지 머리통을 쪼개 확인하고 싶은 잔인하고 엽기적인 충동이 일어날 정도였지만 억지로 참는 하룬이었다.

 “맞을래 아니면 조용히 할래?”

 “칫, 또 폭력이야. 펫이 소환자를 해칠 수 없다는 태고의 언약을 너무 악용하지 말라고. 난 너보다 훨씬 더 오…….”

 하룬은 럼프 오크의 뿔을 내밀어 녀석의 말을 막아 버렸다.

 “이거 봐.”

 “뭐…… 이게 뭐야?”

 “잘 살펴봐.”

 “어, 이건? 마나 덩어리잖아! 지저분한 것들과 섞여 굳어있기는 하지만 분명히 마나의 밀도가 높아.”

 하룬은 회심의 미소를 떠올렸다.

 “이 정도면 아이템을 먹지 않아도 네 다운된 능력을 회복하고 전직까지 할 수 있겠지?”

 “그으럼! 매직급 아이템보다 더 나은걸. 꿀꺽.”

 녀석은 작고 째진 눈으로 탐욕스럽게 뿔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몇 개나 있으면 되겠어?”

 “음, 이 정도 마나면 한 오십 개 정도? 생체 조직과 결합된 마나 덩어리라 다양한 마나 흡수가 필요한 내게는 더 효과가 좋을 거 같아.”

 “제길, 많기도 하네.”

 이미 오크 워리어를 잡을 때부터 무리한 싸가지는 독지를 지나면서 독 속성의 마나를 다량 흡수해서 일부 능력을 회복했지만 자작령을 코앞에 두고 다시 능력을 벗어난 정령 마법을 펼치는 바람에 상태가 많이 안 좋아졌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아이템이 아니라도 되니 다행이지, 뭐. 대신 뽑아낼 것은 뽑아내야지.’

 “조건이 있어.”

 “엥? 무슨 조건? 펫을 진화시켜 주는 것은 주인의 당연한 의무인데.”

 “그런 소리가 나올 줄 알았다. 싫으면 말든가. 이제 해독약도 거의 떨어져 가는데 차라리 널 영원히 봉인시키고 말지. 굳이 쓸데도 없고, 주인도 몰라보는 싸가지없는 네 말투나 행동을 생각하면 그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어.”

 그 말에 싸가지의 못생긴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어. 주인, 그, 그건 계약 위반이라고.”

 “언제 내가 널 전직시켜 주겠다고 계약했냐?”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녀석의 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하룬이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조건을 걸었다.

 “너 전직하면 아공간을 만들 수 있다고 했지?”

 “그래, 맞아. 하지만 그곳은 내가 쉴 곳인데?”

 “크기는 얼마나 되냐?”

 “그, 그거야…… 이 정도 공간의 열 배쯤?”

 하룬은 자신이 있는 공간을 둘러보았다. 이 공간의 열 배라면 말까지 포함한 마차 세 대는 넉넉하게 들어갈 것이다.

 “그 아공간을 내가 좀 사용해야겠다.”

 “뭐, 뭐라고? 주인, 그건 좀…….”

 “어차피 난 네 주인이잖아. 그렇게 보면 네가 가진 것들은 다 내 것이고, 네 것 일부를 주인인 내가 사용한다는데 뭐 문제 있냐?”

 “그, 그거야…….”

 사실 그건 아니었다. 비록 하룬이 펫의 주인이긴 하지만 펫 고유의 아공간을 쓰는 것은 펫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아공간은 펫 자체의 마나를 소비해서 유지하는 영구 귀속 아이템의 일종이다. 마치 펫의 팔다리처럼 그의 일부에 속하는 것이다.

 “그럼 조건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지.”

 “주, 주인!”

 싸가지는 생각할 여유도 없이 밀어붙이는 하룬의 태도에 당황한 듯 보였지만 뿔을 들고는 갈등 어린 표정을 지었다.

 “너같이 소환되면서 주인까지 중독시키는 아무 데도 쓸모없는 펫의 능력을 되찾고, 전직까지 시켜 주기 위해 불철주야 생명을 걸고 몬스터와 싸우는 주인에게 감사하라고.”

 갈등하던 싸가지는 하룬의 말에 인상을 찡그리긴 했지만 그 점은 인정하는 눈치였다. 사실 쉬고 있기는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룬이 마나석을 구하려고 하는 노력을 싸가지도 보고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전직하면 내 본체가 커질 텐데, 주인.”

 ‘그런 것도 있었나?’

 정령 펫에 대한 정보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유저들은 물론이고 NPC들 중에서도 정령 펫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럼 절반만 쓰도록 하지.”

 “아, 알았어, 주인.”

 절반이라도 마차 한 대분이 훨씬 넘는다. 살 엄두도 내지 못하던 500골드 이상의 중상급 마법 배낭이 가진 옵션이다. 더구나 이 아공간은 절대로 도둑맞을 일이 없는 장소이니 아이템이나 중요 물품을 보관하는 데는 최고였다.

 인벤토리에 여유는 있었지만 이전부터 이런 아공간을 꼭 가지고 싶었던 하룬이었다.

 싸가지를 겁박해서 강제로 아공간의 사용권을 얻은 하룬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일행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그의 진한 미소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다들 제각각이었지만 상황이 묘해서 그런지 모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시선이 공교롭게도 가죽이 통째로 벗겨져 시뻘건 고깃덩어리가 된 오크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아, 정말 살벌하다니까. 정말 잔인한 놈이야.’

 티노와 재수 4인방은 물론이고 이제까지 별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홀까지 눈빛이 엷은 공포에 잠식되어 있었다. 가끔 알 수 없는 행동으로 일행에게 공포를 주는 하룬이지만 그는 꿈에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어때, 가죽은?”

 “아아, 가죽! 상품이야. 질기기가 일반 오크들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 돼. 이놈의 가죽은 웬만한 단검으로는 베이지도 않아서 엄청 고생했어. 일반적인 오크의 가죽을 벗기는 것의 몇 배는 힘을 써야만 했다고. 아직 오우거의 가죽을 본 적은 없지만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하룬의 말에 대답한 시린느는 자신이 힘겹게 벗겨 낸 럼프 오크의 가죽에 감탄했다.

 “잘됐네. 오늘 이놈들을 아주 제대로 학살해 보자.”

 어차피 몬스터들은 엄연히 인간들의 적이다. 비록 그 수를 알 수 없고, 그 개체 하나하나가 일반 오크와는 다른 능력을 가진 버거운 상대이긴 하지만 가죽도 상품이라니 뿔도 챙기고 돈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후덜덜.

 하룬의 말을 들은 시린느의 몸이 세차게 떨렸다. 그의 얼굴에 피어난 진한 미소는 원초적이고 화려한 공포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공포는 하품처럼 강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어 순간 실내에는 질식할 정도의 침묵이 흘렀다.

 “일단 여기서 기다리면서 볼일을 보러 오는 놈들을 요격합시다.”

 하룬은 이곳에서 놈들의 숫자를 좀 줄일 생각이었다.

 놈들이 어느 정도의 숫자를 가졌는지 모르지만 인간처럼 따로 화장실을 만들 정도의 지능을 가진 존재들이라면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더구나 이곳은 긴장이 가장 많이 풀리는 장소가 아닌가?

 볼일을 보러 이곳으로 들어온 럼프 오크를 해치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굳이 다른 사람들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사람들은 큰 바위들 뒤에 숨어 있기만 하면 되었다.

 쉬잇!

 끄아악! 끄르륵!

 연약한 엉덩이를 까고 자세를 잡는 오크의 항문을 향해 날아간 비수는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간혹 비수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들은 예민한 놈들도 있었지만 이미 볼일을 보기 위해 긴장을 푼 순간 운명은 결정되었다.

 항문을 파고든 비수는 내장 부위를 온통 엉망으로 만들어버렸고, 엉덩이에 힘을 주려던 몬스터는 배설과 함께 숨이 끊어졌다.

 ‘이런 잔인한 광경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어.’

 산전수전을 다 겪은 티노지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시간이 흘러 죽음 당하는 오크들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일행의 공포심 역시 강렬해졌다.

 몸에서 가장 연약한 곳에 속하는 항문을 비수가 뚫고 들어가는 순간, 그걸 지켜보는 일행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그곳을 뭔가 꿰뚫고 들어오는 환상이 떠오르고 격렬한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차, 차라리 싸우다가 죽는 게 낫겠어.’

 겁이 유난히 많은 지탄의 안색은 이제 아예 하얗게 질렸다. 이대로라면 숨을 못 쉬고 이 자리에 앉은 채 죽을 것 같았다.

 질식할 것만 같았던 시간은 다행히 일찍 끝났다. 동굴 밖에서 오크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췌엑! 추욱! 체첵!

 취이! 칙칙! 체에에엑!

 그동안 화장실을 간다고 사라진 오크들을 찾아 나선 녀석들일 것이다. 벌써 하룬의 비수에 응가를 싸면서 죽어 간 불쌍한 럼프 오크들의 숫자가 이십이 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대장, 다섯입니다.”

 티노는 예민한 귀로 이곳으로 들어오려는 오크들의 숫자까지 알아냈다.

 “일단 하나씩 맡는다. 내가 비수를 던지는 순간 덮친다. 홀, 마법으로 엄호해 줘요. 티노는 싸움이 벌어지면 밖의 동정을 파악해요.”

 “네.”

 일행은 숨죽이고 기다렸다. 시린느가 가죽을 벗겨 낸 오크들의 사체는 몇 개의 구덩이 속에 넣었지만 피 냄새는 숨길 수 없었다. 놈들이 방심할 때 급습해야 효과적인데 그게 좀 걱정이었다.

 바위가 만든 어둠 속에서 지켜보니 어린 오크 한 마리를 앞세운 네 마리의 럼프 오크들이 들어왔다. 어린 오크는 무심코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지만 네 오크는 피 냄새를 맡은 듯 입구 주변에 서서 주변을 경계했다.

 취에르그?

 분명히 피 냄새가 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 이상한 듯 녀석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온갖 냄새가 나오는 한 구덩이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 순간 하룬의 양 손가락에 끼인 비수 다섯 자루가 오크들을 향해 섬광처럼 날아갔다.

 “멀티 샷!”

 그동안 필드에서 수련해 온 중급 암기 스킬로, 손가락들의 힘과 각도를 이용해서 여러 개의 비수를 한 번에 던지는 암기 스킬이었다. 아직 스킬 레벨은 낮지만 덩치가 큰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는 유용한 스킬이다.

 체게엑! 취엑! 끄억!

 채앵! 챙!

 나름 회심의 습격이었지만 하룬의 비수는 아쉽게도 어린 오크를 제외하고는 한 마리도 죽이지 못했다. 이미 경계를 하고 있던 럼프 오크 전사들의 능력은 그들의 예상치를 상회했다. 그나마 두 마리의 어깨와 허벅지에 비수가 자루까지 깊게 박혀 적잖은 데미지를 준 것이 위안이었다.

 비수와 함께 몸을 날린 재수 4인방 중에서 오크와 가장 먼저 격돌한 것은 라트리나였다. 상대는 허벅지에 비수를 맞고 그 통증에 무심코 허리를 숙이던 오크였는데 그녀의 검이 그 머리통을 향해 쾌속하게 날아갔다.

 퀘에엑!

 상처에 정신이 팔렸던 오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어깨를 가르고 지나가는 라트리나의 검에 비명을 질렀다. 전사의 전당에서 익힌 쾌검 스킬로, 빠른 검으로 적을 난사했다.

 하지만 연이은 그녀의 검세는 뒤로 벌렁 누워 허리의 반동을 이용해 몸을 일으킨 오크의 잔영을 베었을 뿐이다. 덩치와 다르게 엄청나게 빠른 럼프 오크의 몸놀림이었다.

 쿠워어!

 부상을 입은 탓에 특유의 흉성이 폭발했는지 불덩어리가 튀어나올 것 같은 눈으로 분노의 피어를 지르려던 오크는 다음 순간 하늘 높이 치켜든 팔과 무기를 힘없이 떨어뜨렸다. 하룬이 재차 날린 비수가 라트리나의 얼굴을 스치고 날아 오크의 벌린 입을 꿰뚫은 것이다.

 “실드 어택!”

 방패를 두 손으로 잡은 지탄이 기합과 함께 한 마리의 오크를 향해 짓쳐 들었다. 오크는 거대한 방패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것을 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쿠웍!

 역시 기합과 함께 조잡하지만 작은 바위만 한 쇳덩어리가 달린 자루를 방패를 향해 휘둘렀다.

 꽈앙!

 “큭!”

 꾸억!

 굉음과 함께 지탄과 오크는 상대의 힘에 뒤로 튕겼다. 엄청난 힘과 힘의 격돌이었지만 입에서 피를 쏟아 내는 지탄에 비해 비척거리며 몸을 가누려고 애쓰는 오크의 우세였다.

 “스매싱 블로!”

 방패 뒤에 숨어 있던 필립이 바닥을 박차고 몸을 날려 득달처럼 달라들었다. 그의 매서운 검첨은 언제나 그렇듯 오크의 머리통을 향하고 있었다.

 끄윽!

 오크의 비명이 다시 터져 나왔다. 하지만 놀랍도록 기민한 몸놀림을 가진 럼프 오크가 머리를 피하는 바람에 필립의 공격도 반만 성공했을 뿐이다. 검이 오크의 어깨를 꿰뚫어 버린 것이다. 미처 손목을 움직여 박힌 검을 돌려 상처 부위를 깊게 파헤치기도 전에 오크는 흉악한 인상을 쓰며 검을 잡았다.

 “이익!”

 필립은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힘을 썼지만 놈에게 잡힌 가는 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뼈가 보일 정도로 살점을 가른 검이 오크의 손아귀에 부러질 듯 휘기 시작했다.

 하룬은 급하게 비수를 날렸다. 하지만 계속 그쪽 상황을 지켜볼 여유가 없었다. 가장 전력이 약한 시린느의 비명이 들렸던 것이다.

 “꺄악!”

 겁도 없이 대도를 들고 있는 오크의 공격을 정면으로 맞받은 시린느의 가녀린 몸이 한 번의 충돌에 비명과 함께 뒤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떠나 공중을 날아가는 검은 반으로 부서진 상태였다.

 오크는 충돌의 여파가 전혀 없는지 대도를 든 손을 어깨 위로 올리고 있었다.

 “멍청한!”

 하룬은 자신 쪽으로 날아오는 부서진 검 자루를 향해 몸을 박찼다.

 “타앗!”

 도약과 함께 공중으로 날아오른 하룬의 발이 강력한 역도가 담긴 검 자루를 걷어 찬 반동으로 더욱 높이 올라간 순간 이미 그의 손에는 강철검이 들려 있었다.

 “놈!”

 시린느에게 정신이 팔린 오크의 붉은 눈이 느닷없이 나타난 하룬을 향했다. 당황한 녀석을 향해 하룬의 전력이 담긴 강철검이 무서운 속도로 내리쳐 왔다.

 쨍!

 회심의 일격이었지만 녀석은 기민하게 검을 쥔 손을 가슴 앞으로 옮겨 대도의 옆면으로 하룬의 검을 막았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하룬의 센스 소드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적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면서 빈틈을 찾는 스킬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하룬은 입 냄새를 맡을 정도로 오크에게 가까이 붙어 제 키를 넘길 만큼 긴 도를 쥔 녀석을 향해 검을 날렸다.

 채앵! 창! 채앵! 창!

 무척이나 빠른 검이지만 그가 상대하는 오크는 전투 경험이 상당한 듯 대도의 면을 이용해 그의 공격을 막아 냈다. 녀석은 어떻게 하든 공격하고 싶었지만 한번 수세에 몰리자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제 센스 소드가 5단계에 이른 터라 몰입 상태를 벗어날 수 있게 된 하룬이 주변으로 잠시 시선을 돌렸다.

 꽝! 꽈앙!

 두 손으로 방패를 든 지탄이 두 오크의 공격을 막아낼 때마다 술 취한 듯 비틀거렸다. 그 방패의 궤적 뒤에 몸을 숨긴 라트리나와 필립이 순간적으로 튀어나와 오크들을 급습하고는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지탄 뒤로 몸을 숨기는 패턴으로 전투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지탄의 흔들림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지고, 불안한 상태였다. 충격의 여파로 녀석의 입과 코 그리고 귀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홀!”

 하룬은 손앞에 네 개의 불덩어리를 만들어 놓고 기회를 엿보는 홀을 불렀다. 기회를 찾을 것이 아니라 만들어야만 하는 상황인데 그녀는 계속 좋은 기회를 잡기 위해 기다리고만 있는 것이 답답했다.

 “억!”

 잠시 한눈판 것이 불찰이었다. 무지막지한 힘이 담긴 도가 몸을 가를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피할 여유가 없었다.

 ‘어깨를 준다!’

 이를 악물고 앞을 향해 달려들며 상체를 급하게 움직였다.

 퍼억!

 “크윽!”

 다행히 도의 날은 피할 수 있었지만 도병刀柄이 왼쪽 어깨를 가격한 것이다. 뼈가 부스러지는 거 같았다. 불에 지지는 것 같은 격통에 눈앞이 아득했다.

 왼쪽 어깨를 준 대신 오크와는 가까워졌다. 하룬은 이를 악물고는 바닥을 박차면서 검을 단단히 잡았다.

 놀란 오크가 황급히 몸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이미 하룬의 검은 아래에서 위로 쳐 올라가고 있었다. 어깨를 준 대신 오크의 가슴이 훤히 열린 것이다.

 당황한 오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놈은 그 짧은 순간에 유연하게 상체를 뒤로 젖혔지만 독이 오른 하룬의 검은 더 영활하게 움직였다.

 푸욱!

 강철검은 제대로 오크의 심장에 박혔다. 오크는 비명을 지르며 대도를 떨어뜨리고는 심장을 찌른 하룬의 검을 두 손으로 단단히 그러잡았다.

 하룬이 손에 힘을 가해서 검을 비틀었다.

 꾸워억!

 돌아간 손목의 궤적에 따라 살이 벌어지면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괴력을 가진 럼프 오크의 손에 붙잡힌 강철검은 잠시 멈추는가 싶었지만 조금씩 틀어졌다.

 그것도 잠시, 이내 오크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검을 쥔 두 손은 반으로 갈라지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거기에 담긴 힘만은 여전했다.

 “탓!”

 낮은 기합과 함께 손목을 돌려 검을 붙잡고 있는 오크의 손들을 떼어 낸 하룬은 전황을 살폈다.

 털이 많은 오크들은 불을 두려워했다. 홀이 던진 파이어 볼은 한 마리의 몸을 격타해서 그 털들을 태웠고, 녀석이 불 때문에 발광하는 사이에 라트리나의 검이 수차례 녀석의 몸을 베었다.

 불에 타고 검에 수차례 베인 오크는 연방 비명을 토하며 발광했지만 처치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뿔이 두 개인 오크였다. 다른 녀석들과 달리 작은 뿔이 하나 더 달린 오크는 전혀 지친 기색 없이 지탄의 방패를 두드리면서 필립의 기습을 막아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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