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저들과의 파티 플레이》
코원탑 파티는 설레는 마음으로 던전을 들어섰다.
-미발견 던전을 처음으로 찾으셨스니다. 최초 발견의 보상으로 각 파티원의 명성이 50 상승합니다. 본 던전은 소형 파티만 입장이 가능합니다. 등록하시면 파티원들에게 추가로 명성 30을 드립니다. 등록하시겠습니까?
“아니요.”
이미 던전 안으로 들어선 것인지 마론이 등록을 거부하는 소리가 들렸다.
-본 던전은 C급으로, 이곳에 서식하는 몬스터는 동굴 고블린입니다. 보스는 홉고블린과 주술사 고블린이고 보스들을 모두 잡으면 클리어됩니다. 최초 입장한 파티의 던전 클리어 보상은 개인적으로 명성 50, 소울 포인트 30점입니다. 코원탑 파티의 행운을 빕니다.
이제야 던전의 내용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클리어의 보상이 마음에 들었다. 명성이야 지금은 별 메리트가 없었지만 S.P. 30점은 새로운 스킬을 익힐 수 있는 최소한의 점수였다. 더구나 클리어 과정 중에 레벨 업을 생각하면 상당히 좋은 조건을 가진 던전이었다.
하지만 이 던전에 서식하는 동굴 고블린들이 레벨 8~12대의 일반 고블린과 같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들의 레벨로 일대일 상황에서는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다구리 앞에 장사 없다고 폐쇄된 장소에서 다수의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은 다들 처음 같았다.
그리고 아직 상대해 본 적이 없는 보스 몹들의 능력이 얼마나 될지 모르니 일행은 자연 긴장되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어렵지만도 않을 것 같은데.”
“그건 단정할 수 없어. 아직 우리 중에 누구도 보스 몹을 상대해 본 사람이 없으니까.”
자신만만한 럼의 말에 신중한 테스가 주의를 환기시켰다.
“비록 보스 몹들의 능력을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레이스 누나가 있으니까 잘 될 거야. 우리의 전력이면 충분히 클리어 할 수 있어.”
“그래. 우린 할 수 있어.”
“고, 고! 가자. 능력치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마론의 말에 다들 힘을 내며 전의를 불태웠다. 생명력을 보충시켜 주고 치료까지 가능한 신관의 존재는 이렇듯 파티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동굴은 내부로 들어가면서 마치 다른 공간에 온 것처럼 넓어졌다. 천장과 바닥을 연결한 거대한 종유석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걷는 일행의 앞에는 탱커인 멘도사가 섰다.
‘차라리 이럴 때는 어쌔신인 다솜이가 앞을 맡는 것이 나을지도…….’
용병 교육 때 배운 지식으로는 이렇게 전혀 모르는 지형을 전진할 때는 전사보다는 척후를 세우는 것이 필수였다. 그래야 상황을 미리 파악해서 대처할 여유를 가질 수 있다.
한데 이들은 일반적인 게임 패턴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하룬은 안 그래도 묻어가면서 그런 의견을 피력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의 우려가 현실로 드러난 것은 불과 얼마 후 한 종유석 기중을 지날 때였다.
슈욱! 슈욱!
“독침이다!”
가장 앞에 섰던 멘도사가 경고음을 지름과 동시에 그 자리에 쓰러지고 뒤이어 미네르바가 비틀거렸다.
투두둑! 투두둑!
엄청난 속도로 검을 휘두르는 여명의 앞에 파랗게 빛나는 음침한 고블린 특유의 독침이 떨어졌다.
“실드!”
“실드!”
우웅, 툭! 툭! 툭!
마법사들이 쉬는 시간에 미리 메모라이징해 놓았던 실드 마법을 펼치자 일행이 있는 공간에 커다란 실드가 생겼고 그 위를 독침들이 때렸다. 이제야 얼굴만 드러내고 독침 대롱을 문 고블린들의 모습이 이곳저곳에서 보였다. 놈들은 굴곡이 많은 종유석 벽들의 틈에 숨어 있었다.
“누가 숨어 있는 고블린들을 끌어내거나 요격해야 해.”
앞에 가는 멘도사를 믿다가 암습으로 쓰러진 미네르바의 존재가 너무나 아쉬운 순간이었다.
잘못하다가는 모두가 고블린의 독침에 당할 위험한 순간이었지만 레이스의 지휘는 신속하고 단호했다.
“테스, 실드를 거두고 광역 마법을 써.”
“알았어, 언니.”
사르르.
일행을 덮고 있던 실드 중 하나가 사라지자 고블린들이 쏘는 독침이 막에 부딪치는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파이어 월!”
순간 일행의 앞쪽에 불길로 만들어진 벽이 일어났다. 물론 가는 독침은 당연히 통과하지 못했고, 설사 통과하더라도 이미 독액이 열에 의해 공중으로 날아가 단순한 침에 불과했다.
“다솜이, 공격해!”
어쌔신인 다솜이가 몇 걸음 걷는가 싶더니 순간적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시야에서 모습을 감추어 주는 은밀포를 사용한 것이다. 그녀는 파이어 월의 기세가 약한 벽 쪽에 붙어서 움직이는 듯 동굴 벽에서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끼르륵, 끼익!
듣기 싫은 고블린의 비명이 몇 번 동굴 안에 울려 퍼졌을 때 테스의 파이어 월이 서서히 사라졌다. 이미 준비하고 있던 럼과 검사가 약해진 불길을 뚫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어느새 동굴 안에서 사오십에 달하는 고블린 전사들이 조악한 창을 들고 자솜이를 포위한 채 공격했고, 모습을 감추지 못한 다솜이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수십 자루 창의 빗속에서 위태롭게 움직였다.
“이놈들!”
분노한 럼이 소리를 지르며 앞을 막은 고블린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고, 그 뒤에 이어 여명이 날카로운 날을 가진 세이버를 쾌속하게 날렸다.
끄륵! 끼익!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고블린들. 하지만 그중 일부의 공격을 받자 두 사람의 검세는 현저하게 느려졌다. 고블린들의 긴 창이 두 사람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지? 저놈들 상당한 지능을 가졌어. 합공을 할 줄 알아.”
실드 안에서 레이스가 발을 동동 굴렀다. 벌써 다솜이는 몇 군데 상처를 입고 비틀거리며 간신히 창을 피하기에 급급했고, 두 검사도 처음에 몇 마리를 쓰러뜨린 후에는 교묘하게 움직임을 봉쇄하며 사각을 파고드는 창을 피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워낙 혼전이라 마법사들도 제대로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휘를 해야 할 레이스는 중독된 미네르바를 치료해야만 했는데 전황이 나빠 아직 신성 마법도 쓰지 못했다.
쉬익! 쉭! 쉭!
날카로운 파공성이 사람들의 귀에 들렸다.
맨 뒤에 있던 하룬이 어느새 실드를 빠져나와 비수를 던지고 있었는데, 손에는 비수가 손가락 사이마다 끼어 있었다.
끼르륵! 끼익!
먼저 다솜이를 위협하던 몇 마리의 고블린들이 짧은 비명과 함께 힘없이 쓰러졌다.
쉭! 쉬익!
다시 비수가 날아갔다. 마치 환상인 듯 휘어져 날아가는 비수 두 자루가 뒤쪽에서 막 다솜이를 창으로 찌르려던 고블린 두 마리의 목에 틀어박혔다.
챙! 채앵!
창 두 자루를 힘없이 떨어뜨리고 손으로 목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리는 고블린 두 마리.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던 다솜이는 그 틈을 이용해 럼과 검사가 있는 쪽으로 잽싸게 이동했다. 고블린들의 창을 힘껏 쳐 내며 길을 만들어 준 두 사람 사이에 다솜이가 무사하게 들어가자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최악의 상황은 벗어났다. 물론 위험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세 사람을 둘러싼 고블린들의 숫자는 아직도 많았다. 또한 아직도 종유석 뒤나 벽의 움푹 들어간 곳에 숨어 독침 대롱을 물고 있는 고블린들도 많았다.
그 바람에 마법사들은 돌아가며 실드 마법을 펼쳐야 했고, 도와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엄호는 내가, 빨리 치료를!”
비수를 날리면서 소리치는 하룬의 말에 레이스는 신속하게 미네르바의 치료를 시작했다. 이미 그녀의 입술은 진한 보라색으로 물들었고, 몸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중독사할 것이다.
“펄 게이션!”
일단 정화 마법을 펼쳤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해독 마법까지 펼쳐야 했다.
“안티 포이즌!”
신성한 빛무리가 그녀의 손을 따라 미네르바의 몸을 감쌌고, 일부는 몸으로 들어갔다. 두 손을 모으고 눈을 지그시 감은 레이스의 몸에서 성결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상당한 경지의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사이 하룬의 비수는 모두 다 소진되었다. 이미 세 사람 주변에는 고블린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고, 특히 일행을 위협하는 독침 대롱을 문 고블린들이 많았다. 몇 번의 실전을 거치며 이미 기초 단계를 넘어선 하룬의 비수를 고블린들은 피할 수가 없었다.
하룬은 인벤에서 표창 자루를 통째로 꺼냈다. 사실 단검이나 비수를 주로 수련했기에 표창으로는 지금까지의 위력을 보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피를 많이 흘려 힘이 빠졌는지 아예 바닥에 앉아 버린 창백한 얼굴의 다솜이와 이미 고블린의 창에 몇 군데나 찔려 힘들어하는 두 검사의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암기로 엄호할 테니 천천히 뒤로 빠져 합류해, 럼!”
“알았어. 빨리 좀 해!”
죽는 소리를 하는 럼에게 한번 웃어 준 하룬의 손에서 여섯 개의 날카로운 날을 가진 표창이 연쇄적으로 날아갔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다른 사람들은 표창의 모습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끼륵! 끄륵! 끼리릭!
순식간에 일행과 세 사람 사이에 있던 고블린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 숫자는 무려 일곱 마리나 되었는데 그들의 급소 근처에는 표창이 틀어박혀 있었다.
이제 겨우 길이 난 것이다. 럼과 여명은 힘없이 앉아 있는 다솜이를 끌고 황급히 일행에게로 돌아왔고, 그들을 쫓는 고블린의 창은 하룬이 날린 표창의 숫자가 늘어나자 하나둘씩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마법사들은 공격 마법을! 서둘러!”
자신도 모르게 반말하고 있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하룬의 말에 돌아가며 연방 실드를 쳐 독침을 막던 마법사들은 비록 지치긴 했지만 마지막 힘을 내어 주문을 외웠다.
이제 실드가 없어졌으니 급한 것은 숨어서 독침을 쏘는 고블린들이었다.
하룬은 아껴 두었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전면에 돌진해 오는 고블린 이십여 마리는 일행에게 맡기고 싸가지를 급하게 소환했다.
“소환! 유도!”
엄청난 빠르기로 하룬의 손을 벗어나는 단검은 모두 열 자루. 이미 소환된 싸가지의 힘에 유도되는 단검들은 목표물을 향해 날아갔다.
케엑! 키릭! 끼리릭!
동굴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는 고블린 열 마리가 벽의 틈이나 종유석 기둥 뒤에서 쓰러지고 있었다. 독침으로 암습하던 놈들 상당수가 죽어 쓰러지니 전황은 순식간에 변해 버렸다.
하룬은 재빨리 해독약을 먹고는 다시 표창을 날릴 준비를 했다.
“파이어 월!”
“윈드 블레이드!”
“파이어 볼!”
마나를 쥐어짰는지 마법사들의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하지만 마법은 무사히 펼쳐졌다. 그들에게 쇄도하고 있던 고블린들의 전면에 예의 화염의 벽이 솟아오르고, 몸에 불이 붙어 펄떡거리는 고블린을 향해 날카로운 바람 칼의 날이 회전하며 파고들었다. 뒤이어 파이어 볼 여섯 개가 가장 흉포하게 날뛰는 고블린 전사를 때렸다.
순식간에 장내는 후끈한 열기로 달아올랐다. 공교롭게도 파이어 계열의 마법과 윈드 계열이 같이 펼쳐지자 어느 정도 밀폐된 공간인 이곳 전체의 온도가 순간적으로 올라간 것이다. 인간들은 괜찮았지만 온몸이 털로 뒤덮인 고블린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열탕이었다.
마법의 지속 시간이 지나 장내가 시야에 들어왔을 때는 고블린 대여섯 마리만이 살아남아 두려워하는 눈으로 일행을 보며 뒷걸음질 쳤고, 몸에 불이 붙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구는 고블린들로 끔찍한 상황이었다.
고기와 털이 타는 냄새, 진하게 퍼지는 피 냄새와 비명 지르는 고블린들의 모습. 그야말로 지옥 같은 처참한 광경에 일행 중 일부가 욕지기를 했다. 넓은 사냥터가 아니라 밀폐된 공간이어 한층 더 잔혹한 풍경이었다.
쉬리리릭!
한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일행의 마비된 생각을 깨웠다. 하룬이 표창을 던지는 소리였다. 역시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지는 고블린들의 등과 머리에는 표창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럼, 숨통을 끊어 줘야 해.”
“그, 그래. 그래야지.”
럼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검사와 함께 주춤거리며 나가, 비명을 지르는 고블린들의 목에 검을 쑤셔 박았다. 하룬은 그들과 달리 고블린들을 돌며 비수와 단검 그리고 표창을 빼서 한 곳에 모았다. 벌써 몇 번이나 쓴 것 때문인지 아니면 몬스터의 피를 먹어서인지 내구도가 제법 떨어졌고, 날도 많이 상한 것 같았다.
그때 들려온 안내음.
-레벨이 3 상승합니다.
비록 레벨이 낮은 고블린이지만 하룬이 직접 죽인 숫자가 이십이 넘으니 레벨이 순식간에 세 단계나 올랐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집중이 1 상승합니다.
-민첩이 1 상승합니다.
-심안이 1 상승합니다.
-S.P. 10점을 얻었습니다.
레벨과 스텟이 올랐음을 알리는 신호음이 아니었다면 하룬은 기분이 많이 다운되었을지도 몰랐다. 그가 보기에도 너무나 처참한 풍경을 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기분 전환을 위해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하룬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일행들에게 눈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다들 눈을 치켜뜨고 방금 전 자신처럼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안내음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정신을 차린 일행의 눈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드러났다.
“레벨이 올랐어. 한꺼번에 2나 말이야.”
“나도. 끔찍하게 올라가지 않던 레벨이 한꺼번에 2나 올라가다니.”
“후훗, 저 고블린들이 생각보다 대단한 놈들이었나 봐.”
“야, 저길 봐라. 저놈들 숫자만 해도 육칠십은 넘어가는데 레벨 업이 안 되면 그게 이상한 거 아니야.”
“하긴. 정말이지 대단하다. 이런 끔찍한 경험은 처음이야.”
레벨이 올라간 것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 일행은 이야기를 나누며 처참한 장내를 다시 돌아보았지만 아까만큼 기분이 가라앉거나 처지지는 않았다.
“마론, 일단 이곳을 뜨자. 환자도 있는데 별로 장소가 안 좋은 것 같아.”
레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치료를 받은 미네르바의 안색은 이제 많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알았어요. 럼과 여명은 다솜이를 좀 부축해 줘. 내가 미네르바를 업고 갈게.”
마론의 말에 일행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사이 하룬은 암기를 깨끗하게 닦아 제자리에 꽂거나 혹은 자루에 넣었다. 그 와중에 고블린의 대롱과 침 그리고 독액이 든 작은 병 몇 개도 챙겼다. 혹시나 사용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챙길 수 있는 것은 다 챙기고 보는 하룬이다.
“하룬 님.”
돌아보니 레이스였다. 그녀는 하룬의 활약상을 보고 흥분한 듯 그를 대하는 얼굴이 많이 상기되어 있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사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하룬 님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스니다. 하룬 님의 귀신같은 암기술이 아니었으면…… 흐읏.”
레이스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한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같은 파티원이니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어쨌든 우린 같은 파티니까요. 도울 수 있으면 돕고 살아야지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더 민망하네요. 사실 전 하룬 님이 땡잡은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우리 뒤만 따라오면 레벨도 올라가고, 잘하면 아이템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우리가 운이 좋았던 거군요. 우리 럼이 아니었다면…….”
“도움이 되었다니 그걸로 됐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지금 할 것이 아니라 이 던전을 클리어하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맞아요. 일단 움직이죠.”
어느새 일행이 다가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들은 레이스와 같은 생각인 듯 미안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하룬을 파티원으로 추천한 럼의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척후를 서겠습니다.”
이번에는 하룬이 자진해서 앞으로 나섰다.
“그런 것은 파티장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데…….”
마론이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하룬은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자 마론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반면 다른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척후가 필요한 지에 대해 약간은 의아했지만 신중하게 움직이는 하룬은 점차 그들을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전에 탱커들이 앞을 맡았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는 휘어지는 곳이면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벽을 타거나 혹은 사각을 찾아 은밀하게 움직여 상황을 확인하고서야 전진했던 것이다. 덩달아 일행도 조심스럽게 움직였고, 그 덕분에 세 번이나 고블린들의 종적을 먼저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의 기척을 먼저 알아낸 것은 큰 이점을 주었다. 이전같이 대규모 공격을 받지 않았을 뿐더러 다섯에서 열 정도의 작은 무리를 한꺼번에 공격해 없애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움직였어야 하는 건데…….”
세 번째 고블린 무리를 처치하고 움직이는 길에 테스가 한 말이었다.
“그랬다면 미네르바나 다솜이도 다치지 않았겠지.”
여명이 그녀의 말을 받았는데 그 말을 들은 마론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어쨌든 일행의 파티장으로서 전략을 잘못 짠 것이 자신이었으니 그 말이 그에게는 강한 무게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더불어 생각하지도 못했던 하룬의 활약으로 파티장의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함과 분노로 눈빛이 싸늘해졌다.
“아니, 우리 능력이 없어서라기보다는 하룬 님이 대단하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우리끼리 왔으면 아마 처음 만난 고블린들에게 다 죽었을 테니까.”
차가운 인상을 가진 테스가 하룬의 활약에 어지간히 감동을 받았는지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거야 그렇지. 레벨 17에 불과한데 일신의 능력은 정말 소름 끼칠 정도로 높아. 레벨이랑 상관없이 많은 경험을 한 유저 같아.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더 레벨이 높았는데 몇 번 사망해서 낮아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 사람 잘 보는 것으로 유명한 네 언니의 말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 이상이야.”
미네르바의 말에 마론을 제외한 일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스는 언니 레이스의 능력을 칭찬하는 미네르바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저 유저를 관찰했던 언니 말로는 거의 모든 직업군에 해당하는 스텟을 가지고 있는 것 같대. 그리고 이 비욘드의 경험이 우리보다 훨씬 많고.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미네르바와 테스가 속삭이듯 나누는 대화를 듣던 파티원들은 저 앞에 가고 있는 하룬을 다른 눈으로 보았다. 레벨로만 따지면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가장 하수이지만 위기 상황에서 드러난 능력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소리 없이 날아가는 암기술도 일품이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벽을 미끄러지듯 유연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어쌔신인 다솜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의 레벨로도 감히 구사할 수 없는 은밀하면서도 기민한 움직임에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더구나 위급 상황에 그가 보인 상황 판단력과 적절한 지휘는 뒤돌아 생각해 보면 그 상황에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의 정체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레이스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확신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꽤 오지 않았나? 고블린 보스는 언제 나오는 거야?”
이제 좀 긴장이 풀렸는지 무료함을 느낀 테스가 말했을 때였다. 십 보 정도 앞에서 걸어가던 하룬의 발이 바닥에 달라 붙은 듯 멈추었다. 멈추라는 수신호가 이어지자 일행은 순간 고요해졌다.
그들의 앞은 벽이었다. 양옆으로 또 휘어지는 골목이었던 것이다.
탁!
소음과 함께 하룬의 몸이 4미터 정도의 천장으로 솟아올랐다. 마치 박쥐처럼 천장의 돌출물들을 잡고 천장에서 기어가며 움직이는 하룬의 모습에 이제껏 그의 능력에 감탄했던 일행의 입에서 탄성이 세어 나오려고 했다.
‘저 정도면 적어도 레벨 40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쌔신인 다솜이는 저렇게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전직도 하지 않은 사람의 능력이 자신을 능가하는 것은 물론 간절하게 꿈꾸는 경지에 벌써 이르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갈림길의 오른쪽으로 사라졌던 하룬의 몸이 어느새 빠르게 되돌아왔다.
툭!
역시 가벼운 소리와 함게 바닥에 착지한 하룬이 일행을 뒤로 물렸다.
“뭐야, 하룬?”
럼이 기대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드디어 보스 방이다.”
“보스? 정말?”
럼이 반색했다. 그들이 기다리던 보스를 드디어 만나는 것이다. 보스를 잡아야 아이템이 나오니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주술사 두 마리와 전사 삼십 마리가량 그리고 머리에 관을 쓴 홉고블린이 식사를 하고 있어.”
일행의 얼굴에 서서히 긴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돼요, 하룬 님?”
“그걸 왜 나에게 물어요.”
테스의 말에 하룬이 눈을 껌벅댔다. 엄연히 리더가 있는데 왜 그것을 자신에게 묻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척후를 맡지 않았던가? 벌써 마론의 오만한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요, 하룬 님의 의견을 말해 줘요.”
“어엉. 왜 레이스 님까지.”
그를 바라보는 레이스의 시선에는 굳은 신뢰의 빛이 흘렀다.
“그거야 하룬 님이 우리 중 가장 경험이 많기 때문이지. 당연한 거 아니야. 지금까지야 몰랐으니까 그냥 마론이 우리를 이끌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잖아.”
“맞아요. 이건 지휘권의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에게는 경험자의 인도가 간절히 필요하다고요.”
처음에 그를 삐딱하게 보았던 다솜이와 여명까지 나섰다. 별로 한 일도 없이 하룬 때문에 2레벨이나 오른 그들은 이제 다른 것은 몰라도 하룬의 능력만은 확실하게 인정했다.
하룬은 이제야 이 파티원들이 모두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그들을 이끌기를 바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한 명만은 예외였지만 말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힘을 합쳐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좋아요, 일단 주술사부터 해치워야 해요. 어떤 주술을 쓸지 모르니 내가 하나, 미네르바가 하나를 맡아 없애고 나머지가 전사를 상대하기로 해요. 혹시 주술사를 놓칠 경우를 대비해서 레이스 님이 대기하고, 마법사들은 자신이 익힌 마법 중 가장 강력한 마법을 동시에 펼쳐야 해요. 아까처럼 파이어 계열과 윈드 계열이 상성도 좋고 이런 밀폐된 공간에서는 위력적이나 서로 의논해서 시간 차를 이용하면 좋을 거 같아요.”
호명된 사람들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솜이 님은 마법 공격으로 장내가 혼란한 틈을 이용해 후면으로 이동해서 대기해요. 틀림없이 기회가 올 거예요. 두 번의 마법 공격으로 어느 정도 전사들이 쓰러지고 장내가 혼란스러워지면 검사들은 일직선으로 홉고블린을 향해 쇄도해요.”
검사들은 힘주어 무기를 쥐었다.
“공격을 마친 마법사들은 분산해서 피한 다음 마나를 회복해 홉고블린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나 역시 암기로 고블린들을 정리하고 나서 공략에 합류할게요.”
흠잡을 구석이 없는 작전이었다. 하룬은 현재 고블린들의 위치를 바닥에 그려 가며 어떤 차례로 공격하고, 어느 곳에 자리를 잡을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런 전략들은 용병 수련 과정에서 배운 것들이었지만 일행은 그가 이미 다른 던전을 공략해본 경험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경험이 없다면 이렇게 일사천리로 전략을 생각해 내지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공격 순서를 말하지도 못했을 테니까.
하룬은 이야기하는 도중에 그들의 태도와 시선을 보고 그들이 큰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변명할 시간도 필요도 없었다. 어쩌면 하룬이 경험이 많다고 믿어야만 그들이 더욱 큰 힘을 발휘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든 것이다.
지휘자를 믿지 못하는 무리는 그 구성원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제대로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법이니까.
“레이스 님, 축복을 부탁해요.”
그의 말에 레이스가 알아들을 수 없는 신성어를 외웠다.
“블레스!”
-축복을 받았습니다. 모든 능력이 5분간 10% 상승합니다.
파티원 모두에게 능력을 10%나 올릴 정도의 강력한 레이스의 능력에 일행은 입이 떡 벌어졌다. 굉장한 신성력을 가진 레이스였다.
어쨌든 공격 준비를 마친 일행은 하룬을 필두로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조금 더 들어가자 처음에 고블린들을 만나서 싸웠던 곳만큼이나 큰 광장이 보였다.
녀석들은 한 곳에 모여 중간에 수북이 쌓아 올린, 박쥐로 보이는 작은 먹이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다. 고블린 전사보다 몸이 더 작지만 영활한 눈빛을 가진 홉고블린과 주름살로 이목구비를 제대로 가늠하기 힘든 늙은 주술사 두 마리는 가장 안쪽의 상석에서 느긋하게, 전사들은 아무 곳에서나 서로 더 먹겠다고 다투며 소란스럽게 식사했다.
광장으로 향하는 입구의 한쪽에 자리를 잡은 하룬은 반대쪽에서 미리 화살을 시위에 걸고 긴장된 눈길로 왼쪽의 주술사를 쏘아보는 미네르바에게 신호를 보냄과 동시에 비수를 날렸다.
직선거리라서 굳이 해독약을 써야 하는 싸가지를 소환할 필요는 없었다.
쉬익!
슈욱!
케엑!
끼잉, 낑!
주술사 두 마리가 동시에 쓰려졌지만 미네르바가 맡은 고블린 주술사는 어깨에 화살을 맞고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다. 그나마 하룬이 맡은 주술사는 이마 깊숙이 박힌 비수로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죽은 것이 다행이었다.
“마법사!”
하룬과 미네르바가 신속하게 뒤로 물러나자 이미 주문을 외우고 있던 마법사들의 입에서 마법 시동어가 울려 퍼졌다.
“파이어 월!”
“윈드 블로잉!”
“윈드 블로잉!”
좋은 조합이었다. 머리를 맞대고 한동안 의논하더니 한 사람이 파이어 월을 펼치고 두 사람이 강력한 바람을 날려 그 불길을 앞쪽으로 향하게 만든 것이다. 3서클 화염계 마법인 파이어 웨이브나 4서클 마법인 파이어 필드의 효과를 1, 2서클의 마법을 중첩해서 사용해 살린 것이다.
끼약!
끼르륵!
식사하던 고블린들은 광장의 입구 부분에서 돌연 생성된 화염이 자신들을 향해 덮쳐 오자 두려움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뒤로 도망을 쳤지만 이미 절반 이상이 화염에 휩쓸려 버렸다.
“파이어 월!”
“윈드 블로잉!”
“윈드 블로잉!”
화염이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는데 다시 마법이 펼쳐졌다. 이번에는 훨씬 뒤쪽에서 타오르는 파이어 월이 홉고블린이 있는 상석 쪽으로 도망치는 고블린들을 향해 강렬한 열기를 동반하며 밀려갔다.
그 순간 하룬은 미네르바에게 눈짓했다. 이렇게 혼란에 빠졌을 때 그와 미네르바가 원거리 공격을 하면 더욱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미리 이야기를 할 때는 빠져 있었지만 미네르바 역시 불길 사이로 언뜻 비치는 고블린들의 공황 상태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는지 미소로 화답했다.
슈욱! 슉! 슉!
미네르바의 화살이 쉴 새 없이 화염을 뚫고 날아갔다.
쉭! 쉭! 쉭!
하룬의 표창이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화염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화염 때문에 정조준이 힘들어 비수나 단검 대신 표창을 엄청난 속도로 연속해서 날렸다.
화염 속에서 공포에 질린 고블린들의 비명이 연방 이어졌다. 멀리 떨어져도 털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강한 열기 때문에 운신도 힘든 마당에 화살과 표창이 날아오니 두렵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마침내 마법의 지속 시간이 끝나고 있었다. 화염의 벽이 작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검사들!”
검사들이 무기를 들고 약해져가는 화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의 앞에는 제대로 창도 잡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 떨고 잇는 고블린 전사들이 있었다. 세 방향을 각자 맡은 검사들의 날카로운 검이 고블린의 심장을 꿰뚫고 급소를 베었다.
어느새 화염이 사라진 장내에는 불과 열 마리도 남지 않은 고블린만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하하, 완전히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었구나.”
멘도사가 호탕하게 웃으며 고블린들을 향해 대검을 들었다. 여명과 럼도 녹색 피가 흥건하게 흐르는 자신들의 무기를 들고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할 준비를 했다.
“안 돼!”
갑자기 테스의 날카로운 경호성이 터졌다. 고블린들이 쌓인 장벽 안에 있던 홉고블린이 입을 쫙 벌리는 것이 보였다.
푸앗!
순식간에 홉고블린이 입 밖으로 뿜어낸 독액이 마치 안개처럼 넓게 앞으로 퍼졌다.
“크윽!”
“윽! 독이닷!”
가장 앞에 있떤 멘도사는 물론 조심성이 부족한 럼이 비명과 함께 눈을 감싸며 바닥으로 쓰러졌고, 여명은 황급히 팔뚝으로 얼굴을 가린 채 옆으로 굴렀다.
“미네르바, 활을 쏴! 마법사들은 화염계 마법을!”
하룬이 소리치자 미네르바는 반사적으로 이미 살이 걸린 시위를 당겼지만 마법사들은 전방에 나뒹굴고 있는 동료들 때문에 마법을 쓰지 못했다. 그사이 계속 입을 벌려 토해 내는 홉고블린의 독액이 안개처럼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서!”
재차 채근했지만 당황한 마법사들은 주문을 외우지 못하고 본능적인 두려움에 질식되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하룬은 급하게 싸가지를 소환했다.
“소환!”
싸가지가 소환되는 것과 동시에 레이스가 급하게 신성 마법을 펼쳤다.
“안티 포이즌!”
홉고블린의 독액으로 만들어진 독 안개를 뚫고 신성한 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본 일행의 얼굴에 안도감이 어린 것도 잠시, 독 안개는 그 빛무리를 잠식하더니 더욱 범위를 넓혀 갔다.
“치잇! 너무 독이 강해.”
레이스가 두 손을 모은 상태에서 계속 기도 자세를 유지했지만 빛무리는 밖으로 뻗지 못하고 안으로 뭉치고 있었다.
“싸가지, 빨리 독을 흡수해.”
“알았다고. 흐흐흐, 쓸 만한 독이군.”
녀석은 음충맞은 웃음을 낮게 흘리며 하룬의 곁을 떠나 사방으로 넓게 퍼진 독 안개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미네르바, 빨리.”
미네르바는 삽시간에 변하는 전황에 정신을 놓고 있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는 독 안개로 가려진 곳을 향해 화살을 연사했다. 하지만 이미 자리를 옮겼는지 아무런 비명도 들리지 않고 화살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러자 미네르바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아무 곳에나 화살을 난사했다.
과연 이 공격은 효과가 있는지 독 안개의 확장 속도가 느려졌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싸가지의 독 흡수 능력은 가공했다. 홉고블린이 움직이느라 독액을 토해 내는 것을 잠시 멈춘 사이 중독되어 미동도 하지 않고 쓰러진 세 검사의 모습이 보일 정도까지 독 안개를 흡수했다.
하룬은 미리 입안에 물고 있던 해독약을 삼키고는 싸가지의 소환을 해제했다. 중독된 세 검사를 이대로 조금만 더 방치했다가는 영락없이 중독사할 것이니 서둘러야 했다.
하룬은 땅을 박차고 세 검사가 쓰러진 곳까지 갔다.
“받아요!”
하룬은 가장 먼저 독에 당한 멘도사부터 시작해 럼과 여명을 안아 일행에게 던졌다. 안아서 운반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캬악!”
“악!”
마법사들이 몰려 있는 곳에 떨어진 세 검사를 비록 누군가 안전하게 받아 낸 것은 아니지만 그들 위로 떨어졌기에 부상을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룬은 다시 세력을 확장하는 독 안개를 향해 온 감각을 집중했다. 서서히 품 안에 손을 넣어 한 움큼의 표창을 잡은 손이 어느새 독 안개에 잠식되는 순간 그의 팔이 놀라운 속도로 움직였다.
취리릭! 쉬리릭!
케륵!
끄르륵!
그의 손에서 날아간 표창들은 숨어 있던 고블린들의 비명을 불러왔다. 홉고블린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하룬은 분명히 공포에 질려 떠는 고블린들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케르, 케르르.
위협적인 홉고블린의 피어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홉고블린의 피어를 들었습니다. 2분간 능력의 10%가 하락합니다.
일행의 몸짓이 순간적으로 둔해졌다. 하지만 하룬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별로 지친 상태도 아니었고, 그래 봐야 레이스의 축복과 상쇄된 것뿐이었다.
오히려 홉고블린의 피어는 그 위치만 하룬에게 알려 준 꼴이 되었다.
쉭! 쉬익! 쉭!
하룬의 손에서 비수 세 자루가 연속해서 한 곳으로 날아갔다.
캑!
끄아악!
익숙한 고블린들의 그것과는 다른 징그러운 비명이 들려왔다. 분노와 고통 그리고 증오의 감정이 모두 한데 들어 있는 그것은 틀림없이 홉고블린의 비명일 것이다.
-중독되었습니다. 초당 30의 생명력이 떨어집니다.
어지간히 강한 독을 가진 홉고블린이었다. 싸가지의 독이 초당 10의 생명력을 떨어뜨리는 데 반해 이 녀석은 그 세 배에 달하는 맹독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수없이 중독을 경험한 하룬은 그런 안내음에 당황하지 않고 싸가지를 소환했다.
“빨리 독을 흡수해.”
“흐흐흐! 신 나는데, 주인. 이런 자리라면 언제든지 불러 줘.”
녀석은 신 나게 돌아다니며 독을 흡수했다. 삽시간에 전방의 공간을 모두 가리고 있던 독 안개가 사라지고 대여섯 마리의 고블린들이 둥글게 뭉쳐 있는 모습이 보였다.
워낙 경황이 없는 상황이라 그 누구도 하룬이 정령을 소환하고 부리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하룬은 싸가지의 소환을 해제하며 다시 작은 표창 한 움큼을 집어 날렸다. 한 덩어리로 모여 있어 빗나갈 일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케엑!
끄르륵!
몇 번의 비명과 함께 고블린들이 쓰러진 뒤에 이마에 작은 혹을 가진 홉고블린이 얼굴 정면에 비수 하나를 박은 채 입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 기척을 확인하고 비수를 날렸을 때 죽은 모양이었다. 독액을 토해 내느라고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비수에 맞았을 것이다.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파티원들에게 보상으로 S.P. 30점씩과 명성 50이 주어집니다.
한창 해독 마법을 펼치고 있는 레이스와 마법사들을 비롯한 일행 모두에게 안내음이 들렸다. 비록 경황이 없는 중이기는 하지만 가슴을 뿌듯하게 만들고, 긴장을 풀게 하는 소리였다. 게다가는 하룬에게 추가적인 안내음까지 들려왔다.
-레벨이 2 상승합니다.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집중이 1 상승합니다.
-심안이 1 상승합니다.
-단독으로 홉고블린을 처치했습니다. 보상으로 ‘홉고블린 슬레이어’라는 칭호와 S.P. 20점 그리고 명성 50을 추가적으로 얻었스니다. 칭호 보상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신 나는 보상이었다. 말이 파티이지 혼자서 클리어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그로서는 당연히 받아야 할 최소한의 보상이었다.
하룬은 계속 떨어지는 생명력을 확인하고 서둘러 해독약을 먹었다. 이제 자신도 좀 쉬어야 했다. 오랜 시간 동안 집중 상태를 유지한 탓에 머리가 아팠다.
아이템을 토해 냈을 보스 몹인 홉고블린 주변에는 벌써 몇 명의 파티원들이 기대 어린 얼굴로 모여들고 있었다. 이미 아이템을 하나 얻은 하룬은 거기에 동참하는 것을 포기하고 한쪽의 벽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와아!”
테스가 탄성을 질렀다.
“아이템이다!”
“네 개나 나왔네.”
“하하, 완전 대박이다. 고블린 던전에서 아이템이 네 개나 나오다니.”
저마다 홉고블린의 사체 앞에 떨어진 아이템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최고의 공적을 세운 하룬의 존재는 이제 완전히 잊어버린 듯 파티원들은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하고 눈에서 불을 켰다.
“이건 내 거야.”
“무슨 소리! 화염계 마법이 담긴 스킬 북이니까 내가 가져야 해.”
테스와 미르가 한 스킬 북을 놓고 다투는 소리에 하룬이 눈을 떴다.
그녀들의 중간에는 스킬 북을 쥐고 있는 마론이 난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스킬 북을 단단히 쥔 그의 손이 욕심으로 가볍게 떨렸다.
“그래도 내가 파티장인데 너희들이 이러면 곤란하지 않을까?”
마론의 말에 두 사람은 잠시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이 되었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이 던전에서 활약한 공적을 생각하면 비록 너라고 해도 그런 말을 할 수 없지 않을까?”
“맞아,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은 네가 차지했으니 이번에는 나에게 양보해.”
미르는 물론 테스마저 강경한 태도를 견지했다.
그들 옆에서는 럼과 여명 그리고 멘도사가 강철검 하나를 놓고 침을 흘리고 있었다.
“이 강철검은 내가 가지면 안 될까?”
“허어, 어쩌나. 나도 필요한데.”
“매직 상급 아이템이네. 그냥 양보하긴 너무 아까운 물건이네.”
세 검사는 상대들이 양보하기를 바라며 서로 눈치를 보았다.
주인이 이미 정해진 아이템들도 있었다. 레이스는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한 권의 스킬 북을 두 손으로 잡고 기뻐했다. 아마 신성 마법이 기재된 스킬 북일 것이다. 다른 파티원들과 경쟁할 일이 없는 그녀였다.
또 하나는 작은 활이었는데 그걸 들고 허공을 보는 미네르바는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아마 정보를 확인하고 기뻐하는 것이리라. 그녀 역시 유일한 궁사라서 레이스와 같은 입장이었다.
유일헌 어쌔신인 다솜이의 경우 홉고블린 자체에 관심이 있는지 사체를 유심히 관찰했다. 아마도 그 가공할 위력을 가진 독 안개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어쌔신들의 스킬 중에는 독에 관련된 것들도 있었다.
‘휴우, 이건 완전히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구나.’
하룬은 그들의 행태를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홉고블린을 단독으로 처치한 보상으로 이미 아이템 하나를 자동으로 얻은 그로서는 아이템 욕심 따위는 없었지만 자신이 아니었으면 던전 클리어는 물론 제대로 살아남지도 못했을 파티원들이 아이템을 두고 벌이는 작태가 한심해 보였다.
“어머, 하룬 님!”
이제야 아이템에서 눈길을 돌린 레이스가 몸을 일으키는 하룬을 보고 소리 지르며 다가왔다.
“하룬 님이 아니었음 정말 큰일날 뻔했어요. 고마워요.”
“다들 무사하니 다행이군요.”
하룬은 가볍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기분이 상했던 것이다. 레이스의 말을 들었으면서도 아직 다른 사람들은 아이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제 던전도 클리어했으니 난 가 보겠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그게? 그렇게 활약을 하셨으니 응당…….”
그제야 그녀는 아이템을 두고 벌어지는 장내의 광경을 직시할 수 있었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특히 동생인 테스가 아이템을 놓고 벌이는 광경에 눈을 질끈 감을 정도였다.
하룬은 파티 창을 열었다.
“파티원 하룬은 이 시간부로 코원탑 파티에서 탈퇴합니다.”
그의 탈퇴 요청을 들은 마론은 즉시 수락했다. 하지만 뭔가 용건이 있는 듯 곧바로 미르와 테스를 무시하고는 스킬 북을 품속에 넣은 상태로 하룬에게 다가왔다.
오만한 얼굴과 위압감이 드러나는 느린 걸음을 통해 자신이 노블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마론이었다.
“고생이 많았네요.”
“별말씀을.”
그렇게 말은 했지만 전혀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고 건성인 것이 느껴져 하룬이 짧게 말을 받았다. 녀석은 하룬의 태도는 신경 쓰지 않고 묘한 눈길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제안을 하나 하지요. 계속 파티를 같이하면 어떨까요?”
“글쎄요.”
가볍게 넘기는 하룬의 태도에 입맛을 다신 마론의 말이 이어졌다.
“하룬 님의 능력이라면 내가 현실에서도 많이 도와줄 수 있는데. 내가 생각보다 훨씬 더 능력이 있거든요. 날 따르면 평생 먹고사는 것은 물론 좋은 직장과 집까지 마련해줄 수 있어요.”
하룬은 녀석의 제안에 기가 막혔다. 완전히 자신을 패밀리로 부리고 싶다고 작정하고 하는 말이었다. 이 정도의 제안이라면 당연히 수락할 것으로 생각하는 녀석의 마음이 자신만만한 표정에서 잘 드러났다.
‘이걸, 여기서 작살을 내 버릴까?’
예전이라면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하룬은 많이 달라졌다. 그런 유혹이 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 유혹에 빠져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긴 했다.
“하하핫! 잠시 시간이 난 김에 인상이 좋은 친구를 만나 재미 삼아 따라나섰더니 감히 나를 패밀리로 삼으려고 하는 놈이 다 있다니, 정말 놀랍네.”
분노에 찬 하룬의 웃음과 이어진 말에 마론은 물론 다투던 사람들의 얼굴이 달라졌다.
“무, 무슨…….”
마론이 말을 더듬었다.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나?”
웃음을 멈춘 하룬은 안색을 차갑게 가라앉히고 매서운 눈으로 마론을 응시했다. 그 눈길과 그의 전신에서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기운이 순식간에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그것은 바로 보스 몬스터들이나 가지고 있는 피어에 해당하는 마나의 폭출이었다.
“으으.”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마론이 뒷걸음질 쳤다. 이제껏 경험해 본 적 없는 살벌한 기운이 심혼을 짓누르며 그를 압박한 것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갔다.
사람들의 상태를 지켜보던 하룬은 분노의 감정을 가라앉혔다. 감정을 폭발한 것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가슴이 뿌듯해졌다. 의도하지 않은 기회에 감정에 마나를 담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메신저 워킹 스킬 수련으로 적은 양이지만 마나를 쌓았고,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덕분이었다.
“잠시 같이 파티를 맺은 인연으로 건방진 제안은 잊기로 하지. 다음에는 웬만하면 만나지 말자. 난 안 좋은 일은 평생 마음에 담아 두는 성격이라서 다시 만났을 때는 별로 좋지 않을 테니까.”
마론은 여전히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아무 말도 못 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룬은 아무 미련도 남기지 않기로 했다. 사실 가장 귀중한 아이템은 자신이 챙겼으니 특별히 원망하는 마음은 남아있지 않았다. 현실에서도 이런 친구들을 많이 경험해 보았다. 다만 마론은 나중에 만나면 반드시 손을 보아 주리라고 다짐했다.
“하룬 님, 이렇게 가시면 어떡해요.”
다들 말을 잃은 채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지만 레이스만은 정상이었다.
“다음에 인연이 되면 만나기로 하지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하룬은 목례하고는 자리를 떴다.
“얘들아, 하룬 님이 가시잖아!”
하지만 그녀의 말에 반응하는 것은 럼밖에 없었다. 럼은 성큼성큼 던전을 나가는 하룬을 보더니 욕심내던 강철검을 포기하고 그 뒤를 따랐다. 나머지는 아직도 하룬이 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두고 보자, 이놈! 감히 날 이렇게 대하다니!”
뒤에서 마론이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지만 심하게 떨리는 그 목소리는 아무런 감흥도 주질 못했다.
‘두고 보자고? 넌 언젠가 내 손에 걸리면 아주 아작을 내주마!’
도리어 독한 마음을 품는 하룬이었다.
“미안해, 하룬.”
하룬을 쫓아온 럼은 차갑게 굳은 그의 얼굴을 보고는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룬은 침중한 얼굴로 럼의 어깨만 몇 번 두드리고는 홀로 던전 밖으로 향했다.
“어디로 가는데? 어디 가면 널 만날 수 있는 거야?”
럼의 말에 하룬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잠시 욕심에 흔들렸던 럼이지만 그 밝은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맑은 눈을 보자 하룬은 한 조각 미소를 지었다.
“요른 백작성으로 간다. 한동안 거기에 있을 거야.”
“꼭 찾아갈게. 그때는 오늘 신세 진 거 꼭 갚을게. 내 목숨을 구해 줘서 고마워.”
“친구끼리는 그런 말 필요 없어.”
하룬의 말에 럼이 활짝 웃었다. 진정으로 기뻐하는 그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순수하고 천진한 웃음이 불쾌했던 하룬의 마음을 날려 버렸다.
‘좋은 녀석이야.’
드디어 사귀어 볼 만한 친구를 만난 것 같았다. 녀석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었지만 이내 그 마음을 접었다. 그의 뒤로 레이스가 쫓아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인연이라면 다시 만나겠지.’
하룬은 정말 럼이 요른 백작성으로 찾아온다면 진짜 친구로 사귀어 보겠다고 다짐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잘 지내라. 그리고 난 돌풍 용병대라는 작은 용병대를 이끌고 있으니까 잘 찾아와. 다음에 만나면 술 한잔하자.”
“역시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용병대장을 하고 있었냐? 나도 네 용병대에 받아 주라. 재미있을 거 같아.”
“언제든지. 우리 돌풍 용병대는 소수 정예를 추구하는 곳이야. 일단 오기만 하면 내가 확실하게 키워주지.”
“고마워. 꼭 찾아갈게. 아니, 내가 아는 친구들 몇 명하고 같이 가마.”
하룬이 고개를 끄덕일 때 레이스가 헉헉거리며 그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하룬 님, 너무 서운해하지 마요. 아직 나이가 어린 데다 아이템을 처음 얻어서 그래요. 지금은 눈이 뒤집혀서 저러지만 나중에는 자신들이 잘못한 것을 깨달을 거예요. 그리고 마론의 일은 마음에 두지 마세요. 원래 노블들이 그렇잖아요.”
레이스는 자신의 몫으로 챙긴 스킬 북을 품 안에 넣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던전을 클리어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하룬에게 아무런 것도 돌아가지 않은 이 상황이 너무나 미안하고 면목 없었던 것이다.
“이거라도…….”
급기야 그녀는 손에 쥔 스킬 북을 하룬에게 내밀었다.
“레이스 님, 난 인간관계가 좁은 사람이라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는 건 있어요. 사람의 본성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레이스 님은 다시 만났으면 좋겠스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몸조심하시고 즐거운 게임 즐기세요.”
그 말을 끝으로 하룬은 던전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향하는 밖이서 환한 햇빛이 미쳐 그의 신형이 마치 광구光球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크게 한숨을 쉰 레이스는 동생과 동생 친구들이 여전히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던전 안을 안타깝게 돌아보았다.
“사귀어 두면 정말 든든할 사람을 놓쳤구나.”
‘이제 나도 이 아이들과 더 이상의 인연을 맺지 말아야겠구나. 하룬 님이 말한 대로 인간의 본성을 보고 나니 정말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아.’
그녀의 시선은 잠시 던전의 안과 밖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마음을 굳힌 듯 힘차게 던전 밖을 향하는 럼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가시나무 관목 숲을 통과해 인적이 닿은 길로 나온 하룬은 잠시 망설이다가 성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사냥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차라리 NPC들이 더 낫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정말 씁쓸하군. 일단은 숙소로 돌아가자.’
그렇게 그가 성으로 돌아가고 난 얼마 후 럼이 헐떡거리며 관목 숲을 빠져나왔지만 이미 하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럼은 마치 실연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긴 한숨을 쉬었다.
“럼, 너무 실망하지 마.”
등 뒤에서 레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나도 더 이상 게임에서 친구들을 안 보려고 해요.”
그의 목소리는 낙엽처럼 말라 있었지만 단호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래도 한두 해 사귄 친구들이 아니잖아.”
쾌활하고 솔선수범하는 성격의 럼으로 인해 동생 친구들 사이를 잘 조율해 주던 럼의 결심에 레이스가 자신 없는 말투로 만류했다.
“비단 오늘만 느낀 감정은 아니에요. 마론이야 원래 그런 놈이고 태생이 귀한 노블이니까 그렇다 해도, 다른 친구들의 이기심과 약삭빠른 성격은 아주 예전부터 느껴 왔죠. 누나도 알겠지만 인공수정으로 부양 가정에서 자란 제 존재는 저 아이들에게 진정한 친구는 아니었으니까요. 일부는 친부모가 없다는 동정심에서, 또 일부는 나서기 좋아하고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 제 성격을 이용하기 위해서, 나머지는 같이 오래 어울렸다는 이유로 절 무리로 받아들인 것뿐이죠.”
레이스는 럼의 목소리가 너무 쓸쓸해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곁에서 오래 지켜본 바로는 럼의 말이 전혀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무능력자로 밑바닥으로 떨어지면 아는 사람도 없고, 어울릴 사람도 없을 거 같아서 이제까지 같이 다닌 건데…… 이제는 포기할 수 있어요. 어차피 저 아이들에게 나란 존재는 이번 경우처럼 별 무게감이 없으니까요. 지금까지는 그 진실을 거의 예상하고 있으면서도 차마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는데 막상 이렇게 확인하고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요.”
“그래도 다솜이는 다르잖아.”
다솜이의 말이 나오자 럼의 눈이 깊어졌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다솜이는 나와 어울릴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에요. 계속 그녀를 좋아하면 나중에는 서로 불행해져요. 그녀를 향한 마음도 접는 게 다솜이를 행복하게 해 주는 거예요.”
그 말에 레이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동생 친구들과 함께 꽤 오래 어울려 온 그녀는 항상 밝고 쾌활했던 럼이 이렇게 슬픈 얼굴을 한 것은 처음 보았다.
‘어쩌면 럼의 말이 맞을지도…….’
잘나가는 수비군 부대장급 인사인 아버지를 가진 다솜이였다. 특별한 능력을 가지지 못했지만 밝고 심성이 착해 양부모의 사랑을 받아 대학까지 진학한 럼이지만 성적도 시원치 않은 이대로라면 결국 유니온의 외곽 지역으로 밀려날 미래가 확연히 보였다.
그런 럼이 다솜이와 잘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잘못하면 더한 비극이 발생할 수도 있다. 럼의 말대로 지금 아예 마음을 접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누나는 늘 나한테 신경을 많이 써 주었어요. 감사하게 생각해요.”
“럼, 그렇게 단정해서 이야기하지 마.”
“아니, 진실을 확인한 것뿐이에요. 쟤들 일곱 명보다 오늘 처음 만난 하룬이 더 진실하고 나에게 필요한 친구라는 것을 늦게라도 알았으니 하룬을 찾아야겠어요. 생각해 보니 친구라는 것이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네요. 한 명이라도 서로 믿고 의지하고 도와줄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그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레이스는 점점 더 묘한 열기가 흘러나오는 럼의 말에 동화되었다. 그녀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녀에게 하룬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친구라는 이름으로 다가온 것은 아니었지만 아주 각별하게 느껴진 것은 사실이었다.
‘남자라는 이름으로 말이지.’
레이스는 살짝 얼굴이 붉어진 채로 럼에게 물었다.
“어디로 간다고 했니?”
“비밀이에요. 테스를 통해 또 다솜이에게 흘러갈 수 있으니 비밀로 할래요.”
레이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집요한 성격의 테스라면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말할지도 몰랐다. 물론 자신이 원하면 알아낼 방법은 있으니 굳이 강제할 필요는 없었다.
“어디로 갈지 아니까 혹시 중간에 엇갈리더라도 녀석을 기다릴래요. 그 녀석과 함께라면 이 비욘드의 세상을 좀 더 많이 즐길 수 있을 거 같아요. 아니, 어쩌면 희망 없는 현실에서도…….”
럼은 마을을 향해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축 늘어졌던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얼굴은 밝게 빛났다.
레이스는 럼의 뒷모습을 보며 말없이 탄식했다. 그녀는 긴 한숨과 함께 그 자리에 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