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저 럼과의 만남》
대원들이 전사의 전당에 들어간 지 엿새째가 되는 날 아침 하룬의 발걸음은 다른 날과는 달리 광장으로 향했다.
일단 메신저 워킹 스킬이 한 단계 오르자 불쑥 다른 생각이 들었다. 수련도 좋지만 이참에 다른 유저들과 만나 볼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일이면 대원들이 돌아올 테니 오늘은 사냥터에나 한번 가 볼까?’
유저이면서 아직 사냥터에도 가 보지 못한 하룬은 할 수 있으면 유저들과 함께 파티 플레이도 즐기고 레벨도 올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리라고 마음먹었다.
중간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용병 사무실에 들러 할 만한 일을 찾아보았지만 혼자서 할 수 있는 괜찮은 일이 없었다. 잠시 일거리를 찾던 하룬은 편지 몇 통을 의뢰하고는 사무실을 나와 편한 마음으로 자작성의 풍광을 즐겼다. 그의 발길은 유저들이 가판을 열고 있는 혼잡한 광장을 통과해 사냥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혹시 유저이신가요?”
유유자적 광장을 지나는 그를 잡는 음성이 있었다. 돌아보니 자신과 비슷한 나이 대의 검사였다. 선이 무척 굵은 외모에 전체적으로 호쾌한 인상을 가졌다.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오크 가죽 방어구 세트와 한눈에도 심상치 않은 강철검을 등에 멘 모습으로 보아 레벨이 꽤 되는 검사가 왜 질문했는지 궁금했지만 일단 대답을 했다.
“그렇습니다만……?”
“혹시 저희와 파티 하지 않으실래요?”
갑자기 파티를 제안하는 유저.
“파티요? 글쎄요, 전 레벨이 낮아서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이제 막 전직한 상태니까요.”
파티라는 말에 강한 호기심이 생겼지만 일단 정중하게 사양하는 하룬이었다. 레벨 17에 불과한 그가 낄 수 있는 파티는 허접한 초보 파티 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사냥터에서 레벨을 20까지는 맞추어야 그래도 어디 가서 대접받을 것이다.
“레벨은 큰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요?”
영문은 몰랐지만 일단 서글서글한 눈매와 시원스러운 말투에 호감이 간 상태였기에 약간은 마음이 동했다.
“잠시만.”
그가 귀엣말을 했다.
“사실 제가 미발견 던전을 하나 찾았는데 지금 사람이 모자라서요. 일단 나머지 인원은 우리 친구들로 다 찼고, 신관도 한 분 영입했는데 아직도 한 자리가 모자라요. 파티 던전이거든요.”
파티 던전이라면 적어도 C급이다. 최소한 아홉 명이 파티를 이루지 않으면 입장 자체가 허락되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라면 굉장한 대박을 맞은 것이다.
물론 로그아웃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벨이 전해 준 정보에는 아직 등록된 던전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지도 제작자나 파인더와 같은 특수 직업이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탓이다.
“그런데 왜 저를……?”
“후훗! 아까부터 유심히 봤거든요. 친구들과 함께 파티원을 구하려고 광장으로 오다가 용병 사무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봤죠. 친구들은 NPC라고 하는데 전 이상하게 유저로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내기했죠. 그쪽이 유저인지 아닌지를 걸고. 하하하, 덕분에 제가 이기게 된 겁니다.”
그런 일이 있었나?
평범한 자신이 남들의 호기심을 끌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기에 기분이 좀 이상했다. 학교에 들어간 이래로 늘 큰 키와 소심한 성격 때문에 어느 자리든 항상 맨 뒤에서 존재감도 없이 있었기에 이제까지 다른 이들의 시선을 끌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필요한 멤버가 있을 텐데 왜 굳이 절……?”
“마음에 들어서요. 그쪽의 그 인상. 차가운 듯 고독해 보이면서도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인상이 절 끌어당기더군요.”
“후훗, 그런가요.”
태어나서 처음 듣는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하룬이 싱긋 미소 지었다.
“사실 우리 친구들이 능력이 좀 돼요. 굳이 우리보다 강자를 파티에 끌어들이는 것도 마땅찮고, 실력도 좋지만 기존 멤버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요는 인상이 마음에 들어서 파티에 초대한다는 거였다.
‘순수한 건가 아니면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건가?’
실력을 따지지 않는다는 말이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어차피 대원들이 전사의 전당에서 나오려면 이틀이나 남았다.
유저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경험하고 싶어 사냥터로 향하던 하룬은 굳이 거부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미발견 던전이라면 사냥터보다는 쉽게 레벨 업도 할 수 있고, 잘하면 좋은 아이템도 얻을 수 있다.
“좋습니다. 부족하지만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룬입니다.”
“저 역시 들어와 주어서 고맙다는 말은 생략하지요. 매쉬럼입니다. 럼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럼 일단 파티원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저쪽의 카페로 가죠.”
두 사람은 광장을 가로질러 성 밖으로 나가는 대로 옆에 있는 노천카페로 향했다. 그가 있는 곳에서 이삼십 보밖에는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우리 친구들은 모두 같은 학과 동기생들입니다. 성격이 다들 다르고 개성은 강하지만 나쁜 사람은 없습니다. 혹시 도중에 홀대받는 느낌이 들더라도 양해 바랍니다.”
“그렇군요. 부럽습니다. 친구들과 같이 게임한다니. 그리고 그런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거야 미발견 던전을 찾았다는 기득권까지 가진 그들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하하! 어서 돈들 내놔!”
두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던 그의 일행은 두 사람이 가까이 가는 사이에 이미 인상이 변해 있었다.
“아무튼 사람 보는 건 귀신이라니까.”
“그러게. 난 아무리 봐도 유저로 보이지 않던데 어떻게 알았을까?”
그의 친구들이 구시렁거리며 품에서 반짝거리는 실버화를 꺼내 럼에게 던졌다. 몇 명은 주기 싫다는 듯 일부러 그와 좀 떨어진 곳으로 던졌지만 럼은 민첩하게 움직여 일곱 개의 은화를 모두 손에 넣었다.
“하룬 님이야.”
“하룬입니다. 전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파티는 처음이니 잘 부탁합니다.”
하룬의 인사에 다섯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지 않은 두 명은 요상한 눈길로 말없이 그를 요리조리 관찰했고, 나머지 한 명은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먼저 인사해 온 것은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약간은 오만해 보이는 마법사였다. 그에게서는 태생적으로 남을 누르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마론이오. 39레벨이고 마나의 길을 걷고 있소.”
아마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격이거나 이 파티의 파티장일 것이다. 느껴지는 인상으로는 영락없는 노블이었다. 노블 특유의 말투는 물론 태도까지 현실과 유사했다.
“탱커를 맡고 있는 32레벨의 검사 멘도사입니다.”
“궁사 미네르바에요. 29레벨이고요. 잘 부탁해요.”
“테스. 마법사예요. 레벨은 33.”
“같은 레벨의 검사 여명입니다.”
자신의 키만 한 대검을 한 손에 든 멘도사는 지탄을 떠올리게 하는 거구였으며 우락부락한 인상이 무척 거칠고 사나워 보였다. 하지만 말투를 보면 그 인상과는 많이 다른 것 같았다.
궁사인 미네르바와 검사 테스는 여자들인데 그 분위기가 완전 정반대였다. 미네르바가 온유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미녀라면 테스는 마치 검날처럼 날카롭게 날이 선 인상이었다. 같은 검사 여명도 호리호리한 몸매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졌지만 테스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들 레벨이 하룬보다 훨씬 높았다. 진수처럼 게임 폐인도 아닌 학생 신분으로 이 정도 레벨이라면 거의 초창기 유저들로 보였다.
“야, 동료가 될 분인데 니들은 인사 안 할 거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두 동기의 행동에 민망했는지 럼의 얼굴이 붉어졌다. 덩달아 그의 목소리도 높아졌지만 두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고 하룬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NPC도 아니고 파티 플레이도 못 해 본 유저가 어떻게 용병 길드에 출입할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안 그래요, 하룬 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상하잖아.”
아마 두 사람은 하룬을 의심하고 있었나 보다. 하긴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인 상식으로는 맞으니까.
“일단 제 정보 창입니다. 확인하세요.”
하룬은 자신의 정보 창을 그들이 볼 수 있도록 공개했다.
『이름: 하룬
종족: 인간
직업: 무직
레벨: 17
칭호: 비공개』
숙소를 나오기 전 혹시 파티를 하게 될지도 몰라 설정해 놓은 상태 창이었다. 스텟이나 스킬 창 까지는 굳이 보여 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비공개로 설정했다. 자신이 레벨을 속이지 않았다는 것과 유저라는 것만 확인시키면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용병 길드는 의뢰 건으로 들어갔다 나온 겁니다. 레벨이 아무리 낮은 유저라도 의뢰할 것이 있으면 출입이 가능하거든요.”
눈앞에 보이는 정보 창과 이어진 하룬의 말에 비로소 그녀들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떠오르며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용병 사무실에 들어간 김에 헥터 교관과 엘저에게 안부 편지를 보냈으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당당한 그의 태도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미르라고 해요. 33레벨이고, 마나의 길을 걷고 있어요. 실례했어요. 그런 정보에는 아직 어두워서요.”
“다솜이예요. 30레벨의 일천한 실력을 가진 어쌔신이고요. 저도 그런 사실은 전혀 몰라서 하룬 님이 혹시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럼이 기분파에 순진한 편이어서 남들에게 잘 속는 편이거든요. 미안해요. 사과드릴게요.”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다솜이는 어쩌면 럼의 여자 친구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미 인사를 나눈 다섯 사람보다 이 두 사람이 정상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내기에 진 것만 신경 썼을 뿐 처음 보는 사람의 이상한 점을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별말씀을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네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룬은 별로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음에 둘 일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럼은 그를 데리고 온 것이 자신이라서 그런지 아직도 그녀들을 보는 눈매가 곱지 않았다. 흡사 자신이 불신받은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저분은 얼마 전에 우리 파티에 합류하신 레이스 님입니다. 신관이시죠. 테스의 언니이시고, 시간만 나면 신성 마법을 익히시느라 늘 저런 모습을 보인답니다. 기분 나빠 하지 마세요.”
그의 말을 들었는지 눈을 감고 있던 레이스가 눈을 떴다. 그녀의 맑고 깊은 검은 눈동자가 하룬의 모습을 잠시 담았다.
“명상에 빠져 제가 실례했군요. 전 레이스, 신관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도요. 그런데 칭호가 비공개인 것은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네에?”
명상을 하고 있었다면서 어느새 정보 창까지 보았던가?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녀의 질문으로 생각건데 예사로운 인물은 아닌 듯했다.
“그냥요.”
“그렇군요. 그냥이라……. 어쨌든 하룬 님이 가세하니 마음이 든든하군요. 아까까지만 해도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거든요. 럼의 안목이 이 정도까지 되는 줄은 몰랐어요. 사실은 약간 무시하고 있었거든요.”
자신에 대해 뭘 아는 듯 의미심장한 그녀의 말에 사람들이 다시 하룬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소개받은 순간에 느낀 인상과는 다른 뭔가가 더 느껴졌다. 레이스의 레벨은 일행 중에서 가장 높았고, 게임을 한 시간도 가장 길었으며 당연히 경험도 아주 다양했다.
신관은 솔로잉이 아닌 파티용 캐릭터라 자연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본 경험을 가진 레이스의 말이라면 상당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처럼 느껴지자 럼이 서둘러 나섰다.
“자, 자! 서두릅시다. 일단 파티가 완성되었으니 얼른 가서 최초 던전 발견자의 당당한 권리를 누리자고요.”
파티의 분위기 메이커인 듯 럼의 말에 다들 기대 어린 얼굴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참, 먼저 파티원 절차를 밟아야지. 마론, 뭐해?”
“아, 그렇지. 잠시만.”
-쪽지가 왔습니다. 지금 보시겠습니까?
“네.”
-파티 코원탑이 파티를 제의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네.”
파티명으로 보아 이들은 자신과 같은 코원 유니온에 거주하는 유저들이었다. 어차피 게임이라 출신지야 상관없지만 그래도 같은 출신지의 젊은이들이라 왠지 정이 갔다. 노블들에게 당한 것이 많아 마론이 좀 신경 쓰였지만 마음에 든 럼 때문에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코원탑의 파티원이 됐습니다. 경험치 획득 및 레벨 업은 공헌도에 따른 개인별 원칙에 따릅니다. 아이템 획득은 공동소유이고, 그 분배는 수동 분배로 설정되었습니다. 다만 100% 데미지로 인한 경우는 자동 획득으로 설정됩니다. 그리고 파티원끼리는 대화 창이 활성화됩니다.
간단한 절차를 마친 후 코원탑은 던전 공략을 위해 서둘러 성을 나섰다.
목적지는 네논드 산으로 향하는 길.
어제 던전을 발견한 럼 일행의 말에 따르면 1시간은 족히 걸어가야 했다. 다행히 그곳으로 가는 길에 몬스터의 종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던전은 상인들이 많이 다니는 길 근처라 정기적으로 영지병들이 순찰을 도는 코스 중에 있다고 했다.
일행은 저마다 나름대로 알아본 정보를 교환하며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하룬은 그 대화에 굳이 끼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기회도 없었다. 마론은 처음 인사를 나눈 이후에는 그를 마치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취급했다. 럼과 레이스를 뺀 나머지 사람들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존재는 미리 럼이 이야기한 대로 완전 깍두기였던 것이다. 17레벨에 불과한 그의 실력도 파티원들에게 특별히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으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하룬은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그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니 말이다. 이 기회는 하룬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지만 그들에게는 자리가 남아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뿐이다.
그는 묵묵히 얕은 오르막을 오르며 메신저 워킹을 몸에 붙이는 데 신경을 썼다. 현실에서도 그 효용이 증명된 만큼 이제 무의식중에도 발휘될 수 있도록 습관을 들이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걸었을 때 신관이라던 레이스가 맨 뒤에서 걷고 있는 하룬에게 다가왔다.
“걷는 모습이 참 특이하시네요. 오르막에서도 평지처럼 아주 편하게 걷네요?”
“그렇습니까? 워낙 걷기를 많이 해서 그런가 보네요.”
하룬은 굳이 그것이 특별한 스킬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대충 넘겼다. 그의 대답이 성의가 없음을 느껴서일까, 레이스의 얼굴이 살짝 변했다.
“의심해서 미안해요. 아무래도 우리끼리는 잘 아는 사이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시간에 쫓겨 여기저기 연락해서 사람을 구할 시간이 없었거든요.”
아까 인사를 나누었을 때의 일로 하룬이 삐쳤다고 오해라도 하는 듯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충분히 이해합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요.”
“정말 걷는 모습이 독특하네요. 전혀 힘들이지 않고 걷는 것 같아요. 다들 헉헉거리는데 하룬 님은 마치 편안하게 쉬는 것 같은 얼굴이에요.”
의례적으로 말을 붙이기 위해서 꺼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그게 궁금했나 보다. 아무튼 처음 본 순간부터 하룬에게 이상하리만치 각별한 신경을 쓰는 레이스였다.
“그런가요? 전 잘 모르겠는데.”
“후훗, 저랑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가 보네요.”
그녀는 이제껏 깊이 눌러썼던 후드를 뒤로 넘겼다. 윤기가 흐르는 칠흑처럼 검은 머리칼이 폭포같이 떨어지며 이제껏 눈만 드러났던 얼굴이 전부 다 드러났다.
수정처럼 맑게 반짝이는 눈은 물론 흠 잡을 데 없이 뛰어난 이목구비가 드러나자 하룬은 약간은 멍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가 살면서 거의 처음 보는 최고 수준의 미모였던 것이다.
“미인이시네요.”
“후훗, 그런가요? 그런데 왠지 말투와 그 표정은 아닌 것 같은데요?”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드러날까 두려워 일부러 굳은 얼굴과 늘 그렇듯 차가운 말투가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것 같았다.
“아니, 원래 성격이 소심한 편이라 미인을 보면 표정 관리를 잘 못 합니다. 괜히 관심을 끌기 위해 무관심한 척할 정도도 되지 못하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감탄하며 감상할 정도의 용기도 없으니까요.”
“호호호.”
하룬의 말이 재미있게 들렸는지 그녀가 입을 벌리며 웃었다.
“생각보다 많이 솔직하시네요. 칭호를 비공개르 해 놓아서 사실 비밀이 많은 사람으로 생각했거든요.”
“후훗.”
이번에는 하룬이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웃어넘겼다. 하지만 그 순간 하룬은 왜 그녀가 얼굴을 드러냈는지 의아해졌다.
“실례한 것도 있고, 분위기가 있는 분이라 좀 더 알아도 무방한 거 같아서 일부러 얼굴을 드러냈어요.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
그의 눈빛에 그런 감정이 살짝 스쳐 간 것을 읽었는지 그녀가 설명했다. 뭐,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지만 이걸로 그녀가 사람의 감정을 읽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껏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강한 그 어떤 것이 느껴졌거든요, 럼과 함께 걸어올 때 말이죠. 마치 황야를 제집처럼 떠돌며 유유자적하는 고독한 늑대와 같은 느낌이었어요.”
“고독한 늑대라면 어쩌면 맞는지 모르겠네요. 강한 것은 아닌 것 같지만 말입니다. 원래 현실의 삶도 그러하니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좀 감동했어요. 여자란 고독한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니까요.”
“후후후, 영광이네요.”
아까보다 훨씬 더 솔직한 고백이었다. 여자에게 이런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라 좀 들뜨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운 생각도 들었다. 마치 알몸을 내보이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정식으로 인사해요. 나이는 스물두 살, 현실 이름은 화연이에요. 저 아이들과 같이 코원유니온탑 대학 3학년이지요.”
그녀의 인사에 하룬은 무슨 말을 할 수 없었다. 가상현실 게임에서 현실 이름을 알려 주는 것은 처음 경험했따.
“누구는 가상현실에서 맺은 인연은 가짜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적어도 이 비욘드의 세계는 가상현실이라고 느껴지지 않거든요. 소중한 내 두 번째 삶이에요. 그래서 이곳에서 맺은 인연은 현실에서 이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비욘드가 또 다른 현실이라는 점은 저도 동의합니다.”
하룬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다.
“난 당신이라는 사람이 무지 궁금해요. 아, 오해는 하지 마요.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내게 이 정도의 관심을 끈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그렇다고 내가 지금 하룬 님에게 작업을 거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사람에 대한 원초적인 관심이 간다고 할까요.”
세상에는 같은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런 종류의 여자가 또 나타났다. 수련 과정에서 만났던 네미온이 꼭 이런 성격을 가졌다.
하룬도 그녀가 처음 만난 자신에게 남자로 호감을 느껴 이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네미온의 경우에 비춰 보면 그녀는 하룬이라는 존재 자체에 아주 순수한 호기심을 가진 것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전 백수이고 이제 열아홉 살입니다. 레이스 님이 저보다 연상이지만 그렇다고 누나라고 하진 않겠습니다. 제가 아는 분이 말하길 남자끼리도 마찬가지이지만 좋은 느낌을 가진 이성 앞에서는 함부로 그런 호칭을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나요.”
“호호호, 듣고 보니 그분 말이 맞네요. 남녀 간에 나이는 아무런 문제도 되질 않으니까요. 우리 엄마도 아빠보다 세 살 연상이거든요.”
하룬의 말에 그녀는 활짝 웃었다. 하룬은 희미한 보조개와 덧니가 마음에 들었다. 폭발적인 아름다움보다 귀여운 것이 더 좋았다.
“이제부터는 조심하면서 따라와야 해요!”
럼이 거리를 두고 따라오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에게 외쳤다.
“여기야, 럼?”
“아니요, 이 가시나무 숲이 끝나는 지점에 있어요.”
하룬의 눈에 사람 키가 넘는 오래된 가시나무들이 군락을 이룬 숲이 보였다. 이런 곳을 뚫고 들어갔다는 것이 놀라웠다. 일부러 들어갈 일은 절대로 없어 보였던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의 의아함을 눈치챈 럼이 머리를 긁적였다.
“헤헤, 사실은 용변 볼 곳을 찾다가…… 조금만 더 들어가자 하다가 찾았지.”
쑥스러운 듯 웃는 럼의 말에 하룬도 미소 지었다. 이런 장소라면 우연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고 던전도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파티는 정말 운이 좋았다. 아직 공식적으로는 던전이 보고된 적이 없으니까.
일행은 럼의 안내를 받아 가시가 잔뜩 돋친 나무줄기와 날카로운 털이 난 잎을 조심스럽게 헤치고 전진했다. 생각 같아서는 칼로 나무줄기를 베어 버리고 길을 내어 가면 좋겠는데 혹시 다른 유저들이 따라올까 싶어 그러지도 못했다.
불편한 자세로 한 10분 정도 전진했을 때 드디어 그들의 눈앞에 던전이 있는 곳으로 추측되는 절벽이 나타났다. 위를 향해 깎아지를 듯 올라간 절벽의 한 곳에 제법 규모가 큰 동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일행이 각자의 무기를 점검하고 잠시 쉬는 동안 럼이 그동안 챙기지 못한 것이 미안했는지 그에게 다가왔다.
“하룬 님, 저기가 바로 그 던전입니다.”
“그렇군요. 던전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렇지요? 처음부터 심상치 않아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호기심에 한 발을 내디디니 던전을 알리는 안내음이 들려오더라고요.”
“아직 던전을 찾은 사람은 없다고 하던데 대단하네요.”
그의 말에 럼이 뿌듯한 얼굴이 되었다.
“하하, 덕분에 이번 학기에 제출할 리포트 문제는 해결되었지요.”
“그럼 게임 관련 학과에 다니나 보네요?”
“네, 컴퓨터 인공지능 공학과입니다. 레이스 누나와 마찬가지로요. 그런데 아까 보니 두 분이 대화가 잘 통하시나 보던데요. 테스가 이상한 눈으로 자꾸 쳐다보더라고요.”
내성적인 하룬과 달리 누구에게나 붙임성을 가지고 대하는 럼의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밝은 얼굴과 유쾌한 성격도 그와는 정반대였지만 묘하게 호감이 갔다.
“좋은 분이더군요.”
“그럼 나이가 어떻게……?”
“올해 성인이 되었습니다.”
“예엣? 그럼 열아홉 살이네요. 나랑 동갑이네.”
아마 레이스와 친숙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연상이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거기다 고독한 분위기가 더 나이 들어 보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좀 노안입니다.”
그 말에 럼이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 아니에요. 우리가 마음대로 생각한 거니까요. 그런데 동갑이라면 말을 편하게 하는 게 어떨까……요?”
“그래, 그러자.”
그의 주저하는 태도에 하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그래, 이러니까 편하다. 난 문희라고 해.”
“난 하룬. 현실에서 쓰는 이름은 별 의미가 없어. 그냥 하룬으로 불리고 싶어.”
“그래? 그런데 어디 사니?”
“F구역. 왜?”
역시 사는 지역을 따지는 것을 보면 럼도 어쩔 수 없다 싶어 절로 차가워진 대답이었다. 하지만 하룬의 짐작과는 달리 대답을 들은 그의 눈에는 얼핏 동경하는 빛이 났다.
“아니, 왠지 네 분위기와 그곳이 잘 어울린다 싶어서. 그곳에는 사연이 많은 사람들이 산다지?”
“별로 그렇지도 않아. 적어도 내 주위에는 없어.”
생각과 달리 자신이 F구역 출신이라는 것을 밝혔는데도 럼은 평범하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 구역에 대한 환상이라도 가진 듯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들어가 보자고.”
파티장인 마론이 모두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충분히 쉬었으니 던전을 공략할 시간이 된 것이다.
“일단 탱커인 멘도시가 앞에 서고, 여명이 보조해 줘. 럼과 미네르바가 좌우를 맡고 하룬 님이 후미를, 마법사들은 중간에 자리를 잡고 각각 전후좌우를 맡아. 테스가 앞, 미르가 왼쪽, 내가 오른쪽, 다솜이가 후미를 지원하고 레이스 누나가 가운데서 커맨드를 해 줘요.”
“예써!”
이미 이곳으로 오면서 이야기가 된 사항이기에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궁수와 어쌔신, 신관, 검사와 마법사를 아우르는 균형까지 갖춘 파티였다. 하룬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어차피 깍두기이고, 레벨과는 상관없이 레이스에게 신뢰를 얻는 것 같으니 신경 쓸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