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이른 아침 대원들이 하나둘씩 하룬의 방으로 몰려들었다. 지난밤에 하룬이 자작의 호출을 받아 나갔다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할 말이 있다. 티노가 우리 용병대에 합류하기로 했다. 그의 노련한 경험과 지리에 관한 해박한 지식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야.”
“티노라면 난 찬성.”
“나도.”
뜻밖의 말일 텐데도 다들 찬성이었다. 그만큼 티노는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일행에게 믿음을 주었다.
“그런데 주의 사항이 있다. 티노는 다양한 지식과 깊은 경험을 가진 대원이며 나이도 있는 만큼 그를 대하는 자세에 조심해라. 특히 시린느! 티노를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면 가만히 놔두지 않을 테니 조심해.”
“피잇! 좋다 말았네. 알았어, 대장.”
유순하고 굴종의 자세가 몸에 밴 티노를 부려 먹을 생각을 하고 있던 시린느는 실망하는 기색이었지만 순순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대답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그를 부려 먹을 심산이 그녀에게 묻어났지만 하룬은 모르는 체했다.
‘이제 나머지는 티노의 몫이지.’
하룬은 필립을 보내 티노를 불러와 모두에게 인사시켰다. 비록 새로운 대원을 맞이하는 자리였지만 어젯밤 이미 술자리를 통해 진한 동료애를 공감한 사이이기에 새삼스러운 격식은 필요가 없었다.
티노는 금방 대원들에게 동화되었다. 워낙 말이 없는 사람이지만 같이 술을 마시며 흉금을 토한 터라 대원들을 대하는 그의 얼굴이나 태도는 편하게 보였다.
한바탕 화기애애한 시간이 흐른 뒤 하룬은 정색하고 분위기를 바꾸었다.
“어제 자작으로부터 새로운 의뢰를 받았다.”
하룬은 새로운 의뢰 건을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대원들의 얼굴은 심각했다.
“대장, 어떻게 할 거야?”
필립이 궁금했던지 모두의 눈치를 받은 후에 우물쭈물 다가와 물었다. 목소리에서 희미한 불안함이 흘러나왔다. 뭔가 걸리는 것이 있는 듯했다.
“자작의 의뢰를 받자. 어차피 요른 백작령에 볼일이 있어서 가려고 했는데 마침 후크란 산은 그 중간에 있잖아. 비록 홀이 차갑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라 불편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왕 가는 길이면 여비라도 벌어야지.”
“호위 대상이 문제가 아니야, 대장! 후크란 산맥은 너무 위험한 곳이라고. 거, 거긴 지옥에서 나온 흉악하고 무시무시한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금지된 곳이란 말이야!”
겁이 많은 지탄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자작이나 데브론의 말을 통해 후크란 산이 위험한 곳이라는 짐작은 했었지만 대뜸 그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굳게 입을 다문 시린느와 라트리나도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들의 안색을 보니 확실히 위험하기는 한가 보다.
하지만 하룬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이들은 모르지만 그로서는 꼭 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전설적인 비도지존이 남긴 흔적이 분명히 후크란 산맥 일대에 남아 있다고 했어. 나 혼자라도 갈 생각이었는데 잘 됐지.’
하지만 나오는 말은 그게 아니었다.
“너희들이나 내 실력은 아직도 강자가 되려면 멀었어. 앞으로 용병으로 이름을 떨치고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는 빠른 시간 내에 마나를 사용할 정도로 실력을 끌어올려야 해. 내 생각대로라면 후크란 산맥의 강한 몬스터들은 우리에게 알맞은 실전 상대가 되어 줄 거야.”
하룬의 말에 일행은 잠시 숙고에 잠겼지만 곧 고개를 흔들었다.
명망 있는 용병의 후예로 태어났고, 그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으니 당연히 본신 실력을 올려 제국에 그 이름을 떨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다. 하지만 그 방법이라는 것이 전설처럼 회자되는 뿔 달린 흉악한 몬스터들과 사투를 벌이는 것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이방인인 하룬과 달리 목숨이 하나뿐인 그들로서는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긴 하지만…….”
시린느가 반론을 펴려 했지만 하룬의 말이 그것을 끊었다. 하룬은 눈을 빛내며 상기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허약했던 내가 단기간 내에 너희들의 실력을 따라잡을 수 있었던 것은 목숨을 건 비장한 각오를 하고 수련했기 때문이야.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난 수련 기간 동안 무리한 수련으로 몇 번이나 죽을 뻔했어. 하지만 내 몸이 아직 젊고 의지가 강했기에 너희들을 따라잡을 정도로 발전할 수 있었지. 물론 알맞은 몬스터나 산적을 상대하며 천천히 실력을 올릴 수도 있겠지. 사실 그게 정석이야. 하지만 우린 젊잖아. 도전해 봐야지. 남들과 똑같이 수련해서 언제 그들을 뛰어넘을 거냐?”
하룬과 같이 수련했던 그들에게 그는 괴물 같은 존재였다. 물론 처음의 모습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들이 하룬을 주시했던 최초의 시간과 지금을 비교하면 새알과 나는 새에 비유될 만큼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하룬을 질투하고 미워했던 마음의 근저에는 무섭게 발전하는 그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부러워하는 마음이 숨어 있었다. 나름 자신이 뛰어나다고 자평했던 그들이다.
그들이 어린 시절부터 나름 노력해서 얻은 그 모든 결과를 단 3개월 만에 뛰어넘은 하룬은 그 모든 것이 죽음을 각오한 수련으로 얻어진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자신은 있는 거야?”
“후훗, 내 성격 모르냐?”
그 말에 하룬의 의사를 다시 확인한 필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고 겪은 하룬은 말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의지력과 투혼은 최고였다. 질투가 날 정도로 목표를 위해 매진하는 그의 모습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일 먼저 나선 것은 신참인 티노였다.
“좋습니다. 전 같이 가겠습니다. 이 나이에 돌아갈 가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처지도 아닌데 남들이 감히 가 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을 탐험이라도 해야겠군요. 어차피 죽어도 멋진 비문을 남길 것도 아닌데 호기심이라도 만족시켜야겠습니다.”
“티노.”
“대장의 호기에 감탄했습니다. 제국이 좁다고 용병으로 혹은 수련 기사들의 길잡이로 돌아다니던 젊은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정말 좋았습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길을 뚫고 위험과 맞상대하면서 살았던 그 시절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군요. 언젠가 다시 그렇게 돌아다니고 싶었지만 나이와 허약해지는 육체를 핑계로 움츠러들었던 제 자신이 부끄럽군요.”
티노가 환하게 웃었다. 비록 나이가 들어 깊은 주름이 몇 개나 파이고 작열하는 태양에 그을린 얼굴이지만 눈빛은 꿈을 향해 달려가는 젊은이의 그것처럼 강했다.
“좋아, 대장. 가자!”
머리와 육체적인 재질이 가장 뛰어난 필립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처음에야 어땠는지 모르지만 치료 때문에 하룬과 얽혀 구박과 설움을 당하면서 동행하는 동안 여전히 발전하는 그에게 어느 정도는 승복한 필립이었다.
더구나 나이가 많은 티노의 호기로운 말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호기와 오기가 발동한 것이다.
“또다시 누군가에게 밀리고 싶지는 않아. 대장과 똑같이 수련한다면 대장은 몰라도 다른 놈들에게 밀리는 일은 없겠지. 다시 한 번 그런 일을 겪느니 차라리 죽고 말 거야.”
역시 호승심도 강하고 자존심도 센 필립다운 결정이었다.
“나도 가겠어. 고질병을 치료하겠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야. 어릴 때부터 들어 왔던 용병들의 그것과 달리 대장과 함께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야. 난 단조로운 것은 딱 질색이거든. 죽을까 봐 두렵기는 하지만 그런 무서운 곳에 간다고 생각하니 오줌을 찔끔거릴 정도로 흥분되고 설레.”
라트리나의 말에 시린느와 지탄은 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똑같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미친년!”
“미친 거 맞아, 호호호. 그래도 이렇게 사는 게 짜릿하잖아. 같잖은 고블린이나 산적을 상대하는 상단 호위 같은 일보다야 무지 센 놈들과 붙는 게 낫지.”
그녀의 말에 시린느와 지탄은 고개를 저었지만 얼굴은 많이 풀려 있었다.
“나도 가겠어. 비록 내 교양 수준과 미모에 어울리지 않는 일을 맡은 것이 불만이긴 하지만 내 실력이 그거밖에 안 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내 진짜 실력을 보여 주지.”
거기에서 말을 끊은 시린느였지만 하룬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좀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자신은 절대로 식사나 빨래, 도축 같은 허접한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겠다는 다짐과 자신을 무시한 것을 후회하게 만들겠다는 얼마간의 복수심이 담긴 그녀의 눈길에도 하룬은 담담했다.
‘그런든지 말든지. 내가 데리고 살 것도 아닌데.’
편하게 생각하는 하룬의 태도는 재수 4인방에게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전혀 흔들리지 않는 그의 태도가 믿음직스러웠던 것이다.
“제, 제길! 그럼 나도 가겠어.”
“어차피 넌 혼자서는 어디도 갈 수 없는 겁쟁이잖아. 덩치만 커 가지고.”
“무슨! 나도 이젠 방패 스킬까지 익힌 몸이라고.”
시린느의 핀잔을 맞받아치는 지탄의 말에도 희미하지만 자신감이 묻어 나왔다. 물론 아직도 그의 눈동자는 닥쳐올 두려움에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가슴은 벌렁거리고 있었다.
“일단 장비를 수선하고 필요한 것들을 구입해야겠어. 자작이 영주 직속 대장간의 출입을 허가했고, 상당한 폭으로 할인해 준다고 했으니 그리로 가자.”
일행은 거처로 향하지 않고 한 병사에게 물어 대장간으로 향했다. 영주 직속의 대장간은 영지의 기사단과 영지병들을 위한 무기를 만드는 곳으로, 굉장한 규모에 나름 실력 있는 대장장이들이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무기를 제작했다.
하룬은 이곳에서 좋은 무기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제대로 된 무기들이 전시된 곳이 아니라 폐기 처분될 무기들이 아무렇게나 방치된 곳에서 지탄에게 꼭 필요한 방패를 찾은 것이다.
엄청난 덩치를 가진 지탄의 몸을 완전히 가릴 수 있을 정도 크기의 중심에서 바깥으로 휘어진 방패는 무기를 튕기는 데도 유리했다. 비록 녹이 슬고 통짜 강철을 사용한 탓에 성인 남자에 버금갈 정도로 무거웠지만 지탄은 한 손으로도 가볍게 방패를 들었다.
“하하하, 이거야!”
마음에 꼭 들었는지 지탄은 방패를 손에서 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 장식도 문양도 없는 단조로운 방패였지만 지탄과는 묘하게 어울렸다. 그렇게 엄청난 무게가 나가는 방패를 가볍게 휘두르는 지탄이 얼마나 괴물 같은 녀석인지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시린느에게는 팔목에 끼는 작고 가벼운 라운드 실드를 골라 주었다. 전투력이 다른 이들보다 현저하게 떨어지는 그녀에게는 꼭 필요한 무구였다. 그리고 가죽을 쉽게 벗겨 내고 식사를 준비할 때 필요한 다섯 자루의 잘 정련된 날카로운 날을 가진 단검 세트를 골랐다.
하룬이나 필립 그리고 라트리나에게 필요한 무기는 없었다. 물론 그냥 준다고 하면 고를 테지만 공짜는 아니었다.
“좋은 것들도 많은데 왜 하필 이런 것들을…….”
그들을 안내한 공방 책임자는 그들의 안목이 일천한 것에 자존심이 상한 듯했지만 하룬은 개의치 않았다.
“얼맙니까?”
“원래 폐기 처분하려던 것들이고 영주님의 명이 있으셨으니 다 합해서 50골드만 주십시오.”
자작은 용병들의 노고에 재료비만 받겠다고 했지 공짜로 준다고 하지는 않았다.
“아, 그리고 우리 무기들도 좀 봐 주십시오.”
하룬은 검대에서 강철검을 풀어 공방 책임자에게 주었다. 다른 대원들도 앞다투더 자신들의 무기를 내놓았다.
“그렇게 많이 상하지는 않았군요. 영주님의 각별한 손님들이시니 수리와 날을 가는 것은 공짜로 해 드리겠습니다.”
공방 책임자의 말에 하룬과 재수 4인방의 얼굴이 환해졌다. 사실 무기를 구입하는 것도 비싸지만 수리하는 데 드는 돈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것도 잠시, 수리를 기다리는 동안 하룬이 한 말에 지탄과 시린느의 얼굴이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지탄과 시린느, 이 무기들을 구입하는 돈은 너희들의 급여에서 깔 테니까 그렇게 알아.”
“대장!”
“그런 법이 어디 있어?”
두 사람은 뜨악한 얼굴이었지만 하룬은 차갑게 반문했다.
“그럼 너희들의 목숨을 구할 무기까지 내가 사 주리?”
두 사람은 못마땅한 표정이 되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기나 장비를 마련하는 것은 각 용병이 직접 해야 하는 일이다. 그것이 용병의 룰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필요한 무기를 구입했지만 할 일이 더 있었다. 어차피 홀은 브리엘라와 관련된 모종의 일 때문에 사흘 후에야 출발이 가능하다고 하니 어젯밤에 생각해 두었던 일을 마저 해결해야만 했다.
“티노, 이곳에 전사의 전당이 있다면서요?”
다음 날 아침을 먹은 일행을 자신의 방으로 모이게 한 하룬이 티노에게 물었다. 그의 질문에 재수 4인방의 눈에 의아함이 잔뜩 어렸지만 하룬의 시선은 티노를 향하고 있었다.
“네, 세 곳이 있습니다.”
전사의 전당이란 마법사의 탑에 해당하는 전사들의 단체였다. 장구한 세월 동안 대를 이어 세상에 실력을 검증받아 유파를 이룬 전사들이 모인 단체였다.
아직 유저들은 잘 모르는 곳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스킬 북 대신에 직접 스킬을 전수한다. 다만 그 조건이 그 유파의 스킬을 익힐 수 있는 적당한 몸과 자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무협 게임으로 치면 문파에 해당하는 이 전사의 전당에는 알려지지 않은 평민 출신의 고수들이 득실대고, 자체적으로 상급 검술과 기사단을 보유한 귀족가와는 달랐다.
파로스 자작령에 황실 기사단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 전사의 전당 때문이었다. 자작가의 기사단에서 그 주축을 이루는 평민 출신의 기사들은 대부분 전사의 전당 출신이라고 했다.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지난밤 데브론에게 얻었다.
“그곳에 가면 스킬을 전수받을 수 있다고 하던데, 맞나요?”
“네, 자격만 되고 돈만 내면 가능합니다.”
“스킬의 수준은 어떤가요?”
“정식으로 전사의 전당에 입당하지 않는 경우에는 대부분 초급 스킬만 전수합니다. 하지만 자격이 되지 않으면 아예 전수하지 않는 전통을 지닌 전사의 전당이 여러 면을 테스트하고 선택해서 고른 스킬이라 상당히 좋습니다. 자격이 되면 중급 스킬도 전수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군요.”
“좋군요.”
“그런데 갑자기 전사의 전당은 왜……?”
티노의 물음에 재수 4인방도 의아한 시선으로 하룬을 바라보았다.
“이곳까지 오면서 필립의 스매싱 블로 스킬이 거의 완성되어 중급 스킬을 익혀도 되겠더군요. 하지만 다른 세 사람은 아직 기본 스킬 수준밖에 익히질 못했습니다. 다행히 기본 스킬은 마스터한 수준이니 이참에 그곳에서 좋은 기회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티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장님!”
티노는 뜻밖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하룬이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잇을 줄은 몰랐다. 세상에 그 어떤 용병대장이 대원을 위해 직접 스킬을 익힐 기회를 주겠는가.
“대장, 정말이야?”
아는 것이 많은 필립은 전사의 전당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는지 감격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우리 모두 강해져야 돼. 닥쳐올 혼란의 파도를 타고 넘으려면 강해지는 방법밖에는 없어.”
무슨 말인지 아직도 몰라 눈만 껌벅대는 지탄과 시린느 그리고 라트리나는 그래도 눈치는 있어서 자신들에게 좋은 일이 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하는지 기대 어린 얼굴이었다.
“일단 갑시다. 자격이 되는 사람은 강해질 기회를 쉽게 잡는 것이고,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은 실전을 통해 스스로 자신에게 맞는 스킬을 깨달을 수밖에 없지.”
“그, 그래도 스킬 하나 배우는 데 적어도 몇십 골드는 내야 하는데…….”
티노는 그 와중에 돈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 정도의 돈은 내게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물론 다 쓰면 여행할 때 힘들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틈틈이 약초를 채집하거나 몬스터 가죽을 벗겨 팔면 되니까 걱정 마세요.”
“갑사합니다, 대장!”
티노는 감격한 얼굴로 하룬에게 인사했다.
“고마워, 대장. 이 정도로 우리에게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어. 만약 내게 맞는 스킬이 없다고 해도 대장의 마음은 꼭 기억할게.”
필립 역시 감동 먹었는지 말소리에 물기가 느껴졌다. 구체적인 사실을 모르는 세 곰퉁이들도 그윽한 눈빛이 되었다.
“자, 일단 우리의 운과 자질을 시험하러 가자.”
-대원들이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대원들로부터 진심에서 우러난 충성의 마음을 받아 통솔력이 150 상승합니다. 또한 충성도가 300 상승합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안내음에 더 흐뭇해진 하룬은 발걸음이 가벼웠다.
뜻밖의 선물에 들뜬 티노의 몸놀림은 가벼웠고, 그 덕분에 성 외곽에 자리한 한 전사의 전당까지는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대한 방패가 대문 옆 벽에 그려져 있는 전사의 전당이었다. 그런데 방패 그림이 좀 특이했다. 단순한 방패가 아니라 그 모서리에 짧고 날카로운 검날들이 빼곡하게 거꾸로 박혀서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었다.
“자질을 시험하러 왔소.”
아무도 없이 열린 문가에 선 티노가 소리를 질렀다. 문 안쪽에는 넓은 수련장과 단순한 형태의 긴 목조건물이 있었는데 누군가 그 건물에서 걸어 나왔다.
“꼭 오우거 같아.”
시린느의 속삭임처럼 정말 오우거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몸집을 가진 그는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워낙 보폭이 큰 탓인지 순식간에 그들의 앞에 선 그는 특이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철편을 이어 붙인 갑옷의 중간에 대거의 날을 세운 것이다. 그 부위는 어깨, 팔꿈치, 엉덩이, 등, 가슴이었는데 비록 그 모양은 우스웠지만 근접 전투를 하는 경우를 상상해보면 활용도가 꽤 높을 것 같았다.
그는 말없이 강렬한 안광으로 일행을 하나씩 찬찬히 살펴보았다. 무심하고 딱딱한 얼굴에서는 같은 공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섬뜩하고 소름 끼치는 기세 뿜어 나왔다.
그의 안광을 대한 시린느와 라트리나가 움찔하며 눈을 바닥에 깔고 말 정도였다. 그녀들의 성깔은 보통은 한참 넘는 수준인데 말이다.
그의 눈이 멈춘 대상은 어느새 하룬과 필립의 뒤로 빠져있던 지탄이었다.
“자격이 되는 자가 한 명 있군. 너! 50골드 헌금해.”
그가 지적한 사람은 겁이 많은 지탄이었다. 녀석은 벌써 다리를 후들거렸다.
“다행이군. 자격자가 있어서.”
하룬은 망설이지 않고 품에서 50골드를 꺼내 주었다.
“따라와라. 수련 기간은 일주일이다.”
그는 지탄이 따라오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대, 대장. 나 무서워.”
지탄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니 정말 겁에 질린 듯했다.
“열심히 배워. 스킬을 배워서 나오면 오크 정도는 한 방에 날릴 수 있을 거야.”
“저, 정말?”
오늘따라 어린애 같은 지탄이었다.
“넌 할 수 있어. 덩치로 봐도 밀릴 것이 하나도 없어. 그러니 열심히 배우고 일주일 후에 자작가로 와.”
지탄은 여전히 후들거리기는 했지만 핏기가 사라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겁이 많아서 그렇지 전사의 자질이 없는 녀석은 아니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녀석의 뒷모습은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짐승과 다름없었다.
“무슨 스킬을 배울까?”
지탄이 건물 안으로 사라진 후 시린느가 부럽다는 듯 필립에게 물었다.
“흐음, 잘 모르겠는데.”
“방패술일 거요.”
필립의 대답과 동시에 티노의 말이 이어졌다.
“특유의 문양을 보면 알 수 있지.”
“그렇구나.”
사람들은 티노의 말을 듣고 이 유파의 특징적인 스킬을 알 수 있었다.
“자, 이번에는 다른 곳으로 가지요.”
티노의 말에 일행은 부러움과 걱정이 어린 눈길로 지탄이 사라진 건물을 잠시 쳐다보고는 발을 떼었다.
이 자작성의 지리를 자기 집처럼 알고 있는 티노 덕분에 전사의 전당들을 방문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세 군데를 모두 돈 후에 남은 사람은 하룬과 시린느밖에는 없었다. 필립은 가늘고 날카로운 검을 문양으로 하는 전사의 전당에 들어갔고, 티노와 라트리나는 새처럼 날아다니는 검을 문양으로 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치이, 왜 나만…….”
돌아오는 길에 결국 시린느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사실 하룬도 두 곳에서 자격을 인정받았지만 사양했던 것이다. 결국 선택을 받지 못한 것은 시린느가 유일했다.
“너도 잘할 수 있는 것이 있겠지. 이곳에는 세 곳밖에 없었으니까.
하룬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시린느를 위로했다. 재수 4인방과 함께 죽음을 겪으며 여행한 후로는 예전처럼 미워만 할 수 없게 된 하룬이었다.
시린느는 하룬의 위로에도 나름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았는지 돌아오는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일단 시린느를 게스트하우스 입구에 데리고 간 하룬은 그녀를 들여보내고 다시 외성으로 향했다.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환시세가 더 떨어지기 전에 빨리 입금시켜야지.’
비욘드를 시작한 이래로 그가 벌어들인 돈은 모두 656골드 10실버였다. 그중에서 헥터 교관에게 50골드, 무기 구입에 50골드 그리고 전사의 전당에 헌금한 것이 150골드였다. 잔액 406골드가 인벤토리에 쌓여 있는 것이다.
벨이 예측한 바로는 현실 시간으로 한 달 정도만 더 지나면 환시세가 안정세를 보여 골드당 2~3만 원, 최악의 경우는 1만 원 수준까지 떨어질 거라고 했다. 한시라도 빨리 현금으로 바꾸는 것이 좋았다.
그중 상당액은 재수 4인방에게 치료 명목과 여행 경비로 뜯어냈지만 녀석들이야 이 세계에서도 여유가 있는 집 자식들이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 만큼 녀석들을 성장시켜 주고 있으니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은행에 들른 하룬은 혹시 몰라 400골드만 환입금했다.
‘제길! 더 빨리 올걸.’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골드당 6만 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유저들의 레벨이 오르고 그 숫자가 많아지면서 생산 활동이나 아이템 거래 같은 전반적인 거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래도 2천 4백만 원이 어디야.’
F구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10년이 훨씬 넘는 오랜 시간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을 그는 단 두 달 만에 벌어들였다. 사실 너무 큰돈이라 실감도 나지 않았지만 쓰려고 해도 쓸 곳도 모르는 하룬이었다.
하지만 더구나 약초들, 특히 산삼의 시세를 생각하면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밖에 들지 않았다.
‘부지런히 수련하다 보면 이렇게 또 큰돈을 벌 경우도 있겠지. 그래도 직업 없이 이렇게 마음껏 오랫동안 게임할 수 있는 게 어디냐?’
하룬은 게스트하우스로 가려다 이내 성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며칠은 펑펑 울고만 있을 시린느를 보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차라리 이 기회에 스킬을 수련하는 편이 좋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오늘까지 닷새 동안 하룬은 무성한 풀로 가득한 강변의 초원에서 메신저 워킹 스킬을 수련하고 있었다. 현실에서도 그 놀라운 효과를 경험한 만큼 전심전력을 다한 수련이었다.
덕분에 며칠 동안 심력이 고갈될 정도였지만 날로 증가하는 마나량에 그는 멈출 줄을 몰랐다.
쉴 새 없이 걷기만 계속했던 까닭에 지구력이 3이나 올랐고, 집중도 3이 올랐다. 그뿐 아니라 호흡과 근육의 움직임을 느끼기 위해 전력을 다한 끝에 그다지 오르지 않던 심안까지 2나 상승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결과가 나왔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강력한 집중 상태에서 전심전력으로 메신저 워킹을 수련한 결과 결국 스킬 레벨이 오른 것이다. 막 어둠이 자연스럽게 초원 위로 내려앉으려 하는 시점에 그는 기분 좋은 안내음을 들을 수 있었다.
-메신저 워킹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제 ‘전력 질주’를 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력 질주는 마나의 흡입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발출 현상을 이용하는 단계로, 마나를 축적할 수 없습니다.
하룬은 그 안내음에 깜짝 놀랐다.
다른 스킬들의 경우 스킬 레벨이 오르는 것은 전혀 안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센스 소드나 두 개의 암기 스킬들의 경우도 스킬 레벨이 올라도 아무런 안내음도 나오질 않았었다. 이런 경우는 그의 일천한 가상현실 게임 경험이나 그동안의 상식과는 너무나 달랐다.
‘전력 질주라고?’
하룬은 새로운 이름을 가진 스킬을 두고 잠시 숙고했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결국 이 메신저 워킹 스킬은 벨의 말대로 단계마다 새로운 세부 스킬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구나. 한 스킬에 이렇게 여러 개의 세부 스킬이 포함되어 있다니 정말 대단해.’
처음 데브론에게 이 스킬을 전수받았을 때는 단지 걷는 것만으로 마나를 쌓을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되었다.
싸가지 때문에 마나의 부족을 매번 경험했던 그로서는 아이템이 아니라 수련만으로 마나가 늘어나는 이 스킬의 내용에 흠뻑 빠졌던 것이다.
게다가 메신저 워킹을 펼치면 걸음이 평소보다 두 배 이상 빨라졌고, 미세하기는 하지만 마나가 늘어나니 지금처럼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상황에서 전력을 기울여 수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벨의 판단이 맞았군.’
하룬은 새삼 벨의 능력에 감탄했다. 이미 그 점을 그녀는 예견했었다.
그가 게임을 즐기는 사이에 벨이 하는 일과는 대충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이 세계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쌓는 것이었다. 말로는 전지구위원회WGC의 전자도서관에 접속해 방대한 자료를 통해 그 지식들을 받아들인다고 했다. 보안 수준이 특급일 그곳에서 어떻게 정보를 얻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관심 쓸 일이 아니었다.
두 번째는 그의 몸체를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인간과 똑같은 육체를 가진 그런 존재를 그녀는 만들고 있었다. 일부 혹은 전체가 정교한 기계 부속으로 만들어진 사이보그가 아니라 일정한 생명현상을 가진 육체적인 존재이면서도 캡슐체인 진체眞體와 호환이 가능한 몸체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물론 하룬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번에는 껍데기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물리적인 감촉까지 느껴지는 신체를 가진 벨의 모습도 경험했으니 두고 볼 일이다.
세 번째는 비욘드의 정보를 검색하고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주인인 하룬을 위한 일이었다. 그것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인 지식의 질과 양에서도 그렇고, 키워 온 능력이 닿지 않아 하룬이 로그아웃했을 때나 정보 전달이 가능한 상태지만 벨의 목표는 게임하는 하룬의 뇌파를 통해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녀는 어느 정도 공개된, 유저들이 사용하는 다수의 스킬까지도 분석하고 있었다.
-패시브라서 그런지 그 내용이 너무 상세해요. 한 가지 스킬로 보기에는 너무 자세하고 방대한걸요.
사망해서 현실에 있을 때 벨에게 자랑삼아 스킬의 내용까지 상세히 말했다가 들은 말이었다.
“그래? 하긴 한 동작에 이렇게 상세한 설명과 정교한 세부 동작이 왜 필요한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걷는 것만으로 마나를 쌓는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아?”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거 같아요, 오빠.
벨은 연방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입수해서 살펴본 다른 스킬들의 경우 이렇게 내용이 자세하거나 분량이 많지 않았어요. 아무리 몸으로 직접 수련해서 익혀야 하는 패시브 스킬들이라고 해도 이 메신저 워킹 스킬의 내용은 다른 중급 스킬보다도 적어도 세 배 이상 길어요.
하룬은 벨의 분석에 동의하면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
“그거야 그만큼 이 스킬이 섬세한 동작을 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호흡과 연관되어 있어서 더할지도 모르지.”
-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제가 볼 때 이 스킬은 세부적인 스킬들이 몇 개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 같아요. 물론 그 전체 내용을 관통하는 일관된 사항들 때문에 잘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익히다 보면 그 비밀이 드러날 거예요.
“후후, 그럼 내게는 더 좋은 일이지. 벨의 말이 맞길 바라야겠네.”
그리고 벨의 말이 맞았다.
‘전력 질주…….’
하룬은 잠시 숙고했지만 걷기가 아니라 달리는 것으로 진화되었다는 것 이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동안 하룬은 스킬의 내용은 충분히 숙지하고 그 내용대로 호흡의 종류, 강약과 길이 그리고 호흡 간의 짧은 간극과 발과 허리 등의 몸놀림을 맞추는 수련을 해 왔다.
아마 같은 동작을 수천, 아니 수만 번은 반복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가 느끼지 못해서 그렇지 강한 집중 상태에서의 수련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몇 배에 해당하는 수련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 덕분에 하룬은 비록 며칠 안 되는 시간이지만 수련이 끝나면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의 초인적인 집중 상태를 유지해서 수련했다.
‘일단 해 보자.’
머리로 알 수 없으면 몸으로 해 보는 수밖에.
하룬은 호흡과 동작을 일치시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휘이.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지랑이처럼 옅은 마나가 대지로부터 발바닥으로 이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 감각은 이제 어느 순간에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달려 보자!’
전력 질주라는 이름을 떠올린 하룬은 발가락으로 맹렬하게 땅을 박찼다.
파악!
땅을 박찬 몸이 앞을 향해 심하게 쏠렸다. 마치 앞으로 쓰러질 듯 불안한 자세였지만 한번 땅을 박찬 그의 몸은 거의 2미터 가까운 거리를 날았다. 하지만 체공하는 높이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파악!
발가락으로부터 발바닥으로 부드럽게 연결되는 동작으로 땅을 밟은 그의 발가락이 다시 땅을 박찼다. 역시나 발가락만으로 겨우 선 것처럼 그의 몸이 앞으로 쏠린 상태에서 2미터 가까이 날았다.
휘청.
순간 자신이 이동한 거리를 확인한 하룬의 몸이 흔들리며 호흡과 동작의 조화가 깨졌다.
“뭐야,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한 일이었다. 한 걸음에 2미터 정도나 움직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거야 달리는 것이 아니라 숫제 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몸이 가벼웠다.
‘분명히 마나가 빠져나갔어.’
그랬다.
땅을 밟고 완전하게 대지에 닿는 순간 발바닥으로 들어왔던 마나가, 달린다는 의지를 가지고 땅을 박차기 위해 발가락에 힘을 주는 순간 회오리를 만들며 밖을 향해 빠져나갔다. 들어올 때는 1의 양에 불과했지만 나가는 순간 발바닥의 중심 부위에서 빠른 속도로 돌았던 마나는 다섯 배가 넘었다. 그렇다고 기존에 스킬을 익히며 축적한 마나를 쓴 것 같지도 않았다.
아직 마나 플로를 배우지 못한 그로서는 특별한 어떤 곳에 마나를 축적하지 못하고 전신의 몇몇 곳에 자연스럽게 쌓는 것에 불과했지만 기존의 마나를 사용했다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다.
‘혹시 회전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럴지도 몰랐다. 그에게는 발바닥을 통해 들어오는 대지의 마나가 아지랑이와 같은 기체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한곳에서 강하게 회전하다가 다시 밖으로 발출되는 순간 그 힘이 증가한 것이다.
‘후후, 정말 대단하구나. 이 정도라면 바람처럼 빠르게 뛸 수 있겠어.’
정신을 가다듬은 하룬은 흥분된 마음을 억제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호흡과 몸을 일치시키기 시작했다. 믿기지 않는 의외의 결과를 보아서였을까? 몇 번이나 실패한 끝에 드디어 다시 높은 몰입 상태가 되자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진일보한 메신저 워킹 스킬의 놀라운 모습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지난 며칠간의 광적인 수련으로 집중 스텟이 3이나 더 오른 덕분인지 이제는 몰입 상태를 유지하면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가지게 된 하룬은 새롭게 태어난 메신저 워킹 스킬을 확실하게 경험하고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약간 쏠린 이상한 자세이긴 했지만 마치 나는 듯 빠르게 초원을 달리는 하룬의 모습은 말의 그것과 비슷했다. 아니, 말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달리는 동안 그의 체력은 그다지 소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추진력의 대부분은 그의 근육이 아니라 마나가 담당했다.
어둠이 내리는 초원을 달리는 하룬의 모습은 마치 날개 달린 천마처럼 빠르고 신비로웠지만 아쉽게도 누구도 그를 보아 주는 이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