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브론의 과거와 새로운 대원》
비수의 정보를 확인한 하룬이지만 그는 데브론을 은밀하게 찾았다.
“하하! 내 정체가 궁금해서 온 건가?”
데브론은 그가 찾아올 것을 미리 안 것처럼 따듯한 허브 차와 잔 두 개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몇 가지 묻고 싶은 것들도 있고요.”
“자, 일단 차 한 잔 마시지.”
데브론은 익숙한 솜씨로 우려낸 허브 차를 잔에 부어 그에게 내밀었다.
후룩.
“역시 좋군. 좋은 이와 함께 차를 나누는 것은 내가 즐기는 몇 안 되는 사치라네.”
“그렇습니까?”
이해가 가질 않았다. 자작까지 경칭을 쓸 정도이고 황녀에게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신분을 가진 데브론이다. 그런 그가 원해서 안 될 일은 별로 없어 보였다.
“우선 자네가 궁금해했을 내 이야기를 먼저 하지.”
데브론은 온기를 음미하듯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가 겪은 풍상을 대변하는 거칠고 딱딱한 질감이 묻어나는 얼굴과 굵게 파인 주름살이 미세하게 떨렸다.
“허허! 내 살아온 인생을 이야기하려니 감회가 새롭군.”
그의 노안이 흔들렸다.
“짧게 말하지. 난 사실 브리엘라의 외삼촌이라네. 죽은 내 막내 여동생이 바로 현 황제의 비妃였지. 내 가문은 대대로 군부의 요인들을 배출한 가문이었지. 이른 나이부터 가문의 전통대로 기사 수련을 시작했고,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에는 황실의 비밀 기사단 중 하나인 메신저 기사단의 수련 기사가 되었네. 하지만 현 황제가 즉위할 때 단장이었던 후코프 후작께서 중립을 지켜야 하는 골든 배틀의 규정을 어기고 다른 황자를 은밀하게 지지했던 일이 발각되어 비극적인 일을 겪었네.”
데브론은 유력한 귀족가는 아니었지만 대대로 뛰어난 기사를 배출한 가문의 적자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재질을 드러냈고, 체계적인 가르침과 열정적인 수련으로 이십 대 초반에 이미 비밀 기사단으로 황실 최고로 평가받는 메신저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 단장이 율법을 어기고 골든 배틀에 관여한 것이 발각되었는데 하필이면 그 황자가 현 황제에게 가장 위협이 되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현 황제가 즉위한 즉시 메신저 기사단은 그 뿌리까지 말살되었고, 그는 당시 황궁에 궁정 마법사로 근무했던 여동생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탈출했다.
“내가 황궁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내가 정식으로 서임되지 못한 상태로 몇 명의 동료와 함께 메신저 기사단 비전 스킬들을 비밀 수련장에서 수련하고 있었다는 것과 이미 초기에 숙청된 몇몇 수뇌부만이 내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물론 브리엘라의 엄마의 헌신적인 도움이 아니었다면 철옹성처럼 단단한 황실의 수비 병력을 뚫고 탈출할 수 없었을 테지만.”
그 후 그는 가문의 노예인 티노와 함께 세상을 떠돌기 시작했다. 혹시나 자신이 메신저 기사단의 기사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가문이 멸문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황실에는 역적을 추적해서 처리하는 비밀 기사단이 두 개나 있고, 그들의 잔인한 손 속이나 실력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테론 제국을 벗어나 북방의 초원 지대를 떠돌기도 했고, 다른 제국에서 용병 생활을 하기도 하면서 철저하게 테론 제국 밖에서 유랑 생활을 해 왔다.
“그러느라 여동생이 현 황제의 눈에 들어 비妃가 되었다는 것도 몰랐네. 그렇게 세상을 떠도는 사이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가문이 유명무실해졌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 어쨌든 그러다 2년 전에야 제국으로 들어왔네.”
혹시 모를 추적이 두려워 귀족이며 기사인 고귀한 신분에 험한 세상을 야인처럼 떠돌았던 그다.
“내 존재를 아무도 모를 줄 알았다면 그렇게 피하지 않았어도 되었는데…… 생각해 보면 삶은 참 잔인한 것 같네. 아니, 혹시 모르지. 당시 내가 그 장소에서 황실의 눈에 띄었거나 황도에 머물러 있다가 무서운 정보 조직의 끈에 닿았다면 내 가문은 멸문하고 여동생은 천수를 누리지 못했을지도.”
참 고단한 인생을 살아온 데브론이었다. 그런 데브론에게 하룬은 아무런 할 말이 없어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자네에게 따로 부탁할 일이 있네. 자네가 나가고 나서 브리엘라와 파로스 자작과는 이미 의논을 했네.”
순간 안내음이 울리며 퀘스트 창이 떠서 그가 말하는 것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
-퀘스트를 받았습니다.
『스토리 퀘스트(등급 ‘C')
제목: 브리엘라 황녀를 도와 최후의 4인 황위 계승권자로 만들어라!
내용: 현재 브리엘라 황녀의 세력은 극히 미미하다. 그녀를 도와 세력을 확장시키고, 1년 후 원로원이 인정하는 4인의 황위 계승권자 중 1인으로 만들어라. 단, 거느리고 있는 세력이 있는 경우는 그 세력의 공적까지 모두 포함한다.
보상: 공헌도별로 기사 작위와 영지 수여
공헌도별로 아이템 세트, 정령석, 현금과 소울 포인트 차등 지급
실패 시 특별한 제한은 없음.』
-퀘스트를 승낙하시겠습니까?
‘히유, 어마어마하구나.’
보상이 엄청났다. 물론 공헌도별 지급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기는 했지만 여느 퀘스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브리엘라가 현재 처한 상황이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일 것이다. 어차피 비욘드의 NPC도 아닌 이상 작위 같은 권력이나 영지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정령석과 아이템 그리고 돈은 그의 구미를 자극했다.
“현재 상황은요?”
다소 포괄적인 질문이지만 나름 긴장하고 있던 눈빛이 밝아졌다. 상황을 확인한다는 소리는 충분한 관심을 표명하는 증거였다.
“현 황제는 무척이나 여자를 밝히는 위인이라네.”
그의 말에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름다운 여동생을 불과 몇 달간의 사랑으로 인생을 끝내게 만든 황제에 대한 적대감이 어려 있었다.
“맞아드린 비만 해도 다섯에 열이나 되는 빈을 통해 많은 자손을 보았네. 제국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지. 그래서 이번 골든 배틀의 대상자는 모두 서른두 명이나 되네. 하지만 골든 배틀을 포기한 세 명과 직할령을 벗어나는 1차 관문에서 이미 여섯 명이 제거되었고, 여덟 명은 아직 그 생사를 알 수 없네.”
“그럼 최소 열여섯 명, 최대 스물네 명이군요.”
“그렇지. 우린 최소한 이십 명의 황위 계승권자가 1차 관문을 통과했다고 보고 있네. 역대 골든 배틀의 대상자들 중 가장 많은 숫자라네. 원래 1차 과정에서 절반 이상이 제거되는 역대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이번 황위 계승권자들의 배후 세력이 쟁쟁하다는 이야기도 되지. 현 황제의 치세가 이미 30년이 넘었으니 귀족들의 힘이 그만큼 차고 넘칠 정도로 축적되었다는 증거지.”
‘대충 이십 명 중 네 명으로 압축되는 건가?그럼 오 대 일이네. 확률이 높긴 한데…….’
잠시 생각을 하던 하룬은 데브론에게 물었다.
“그런데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든 묻게.”
데브론이 시원스럽게 말했다.
“왜 접니까?”
“허허허, 자네야말로 본인의 가치를 잘 모르고 있군. 아니면 숨기고 싶은 것이라도 있는 건가?”
데브론의 말에 그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이 호기심에 가득찬 눈길로 바라보았지만 하룬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인 고개와 사론 습지에서 보인 독에 대한 능력과 살아있는 것처럼 신기하게 움직이는 암기 실력 그리고 도강할 때 보여준 기발한 위기 대처 능력과 강한 책임감. 그리고 아직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본신의 능력. 아직도 부족한가?”
하룬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데브론의 칭찬이 고맙기는 하지만 사실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싸가지의 능력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펫을 부리는 주인이니 그것도 자신의 능력이라고 주장해도 무방하지만 하룬은 왠지 본신 능력이 부족한 것이 입맛이 썼다.
“당분간은 용병대의 실력을 기르는 데 치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특별한 도움은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름 장고한 끝에 내린 결정이다. 아직 골든 배틀에 뛰어들 자신이 없었다. 힘을 더 기른 후에 본격적으로 골든 배틀에 참가할 생각이었다.
“좋은 생각이야. 자네의 활약이 필요한 것은 6개월에서 1년 정도 후에 본격적으로 황자들이 세를 겨루는 시점이네.”
“너무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그 점은 걱정하지 말게. 자네는 능력을 키우는 데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되네. 브리엘라와 나는 다른 할 일이 있네. 이제 우리는 브리엘라 황녀를 모시고 고요의 땅이 있는 테베 백작령으로 갈 거야. 자네가 갈 후크란 산맥과 이어지는 곳이지. 내게는 사촌이 되는 테베 백작은 우리 세력의 중추라네. 비록 고요의 땅이 척박한 곳이기는 해도 광산 개발이 유력하니 그곳에서 자금줄을 확보하고 세력을 만들어야지. 스물이 넘는 황위 계승권자들을 누를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세력을 만들려면 시간이 모자라겠지만 해 봐야지.”
브리엘라 황녀를 지지하는 주축은 외가였다.
“데브론 님과 도란 님이 하는 일이니 모두 잘될 겁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굳은 결의로 가득한 데브론의 얼굴에서는 강한 신념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의 눈에서는 어쩔 수 없는 걱정스러움도 엿보였다.
다들 세력이 막강한 공작이나 후작을 후견인으로 두고 경쟁을 벌이는 터에 자신은 몬스터들 천지인 고요의 땅에서 백작을 뒷배로 거사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전 그동안 힘을 기르고 가능한 한 용병들을 규합하겠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그간 인연을 맺었던 용병들을 떠올리는 하룬이다.
“그래 주게. 나중에 본격적인 세력 다툼이 벌어지면 어차피 용병들이 가세하겠지만 제대로 된 용병들을 미리 선점한다면 우리도 승산이 있네.”
황위 계승궈자들 중 가장 세력이 약한 현 상황에서 데브론과 도란이 생각해 낸 것은 용병이었다. 용병을 세력화시키려는 것은 상식적인 방법으로는 상당한 격차가 벌어지는 다른 거대 세력들의 전력을 일시에 따라잡기 위한 것이었다.
이방인들이 이 세상에 등장하면서 용병들의 일거리는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일단 몬스터 퇴치에 관한 의뢰들은 제국 각지에서 나타난 이방인들로 현격하게 준 상황이라, 상행이나 요인 호위 같은 일들은 벌써 경쟁이 심화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도태되는 용병들을 군세로 흡수할 생각이었다.
“혹시 몰라 후크란에 있는 비밀 수련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조처하겠네.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과 수련 경비 그리고 실력 있는 용병을 영입하기 위한 자금 내역만 확실하다면 역시 우리 측에서 제공하겠네.”
“알겠습니다. 좋은 방향으로 결정하겠습니다.”
하룬으로서는 밑질 것이 전혀 없는 거래였다. 옆에 붙어서 전력을 다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강해지기 위해 떠돌면서 실력자들을 영입하는 것이니 부가적인 일이었다.
자금 지원도 좋은 조건이긴 하지만 그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자금까지 지원받으면 돌풍 용병대는 자유로운 위치를 상실할 것이다. 비록 골든 배틀에 참가하긴 하지만 그는 스토리 퀘스트에 올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티노는 어떤 사람입니까?”
“티노?”
하룬의 질문에 데브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다소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뭘 생각했는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데브론의 얼굴에 따듯한 미소가 흘렀다.
“티노는 내 동생과 같은 존재라네. 내가 겪은 풍상을 그도 같이 겪었지. 난이 발어졌을 때 그는 열 살도 채 되지 않았지. 그렇게 어린 나이로 황도를 탈출할 때부터 나와 동행했어. 비록 그의 신분이 우리 집안의 노예였지만 나는 이미 예전에 그를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었네.”
어째 그럴 것 같았다. 그의 평상시 태도를 보면 굴종이 몸에 배 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그가 마흔이 겨우 넘었다는 사실은 좀 놀라웠다. 아마도 고생을 많이 한 탓에 늙어 보였나 보다.
“노예 신분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분명 한자리 차지했을 친구지.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눈치가 빠른 그 친구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어깨너머로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들을 배우는 재주가 뛰어났어. 귀족이라는 신분에 젖어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세상을 떠돌 때, 울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툭하면 사고를 치던 내 옆에서 많은 도움을 주면서도 묵묵히 나를 보필하던 좋은 친구라네. 생각해 보면 티노가 없었더라면 그 방랑의 세월 동안 무척이나 힘들었을 거야.”
그의 음성에서는 티노에 대한 신뢰와 정이 무한하게 느껴졌다. 그 말에 하룬은 더욱 부담스러웠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을 하고야 말았다.
“실은 티노를 저희 용병대에 영입하고 싶습니다.”
“티노를? 흐음, 그것도 괜찮겠지. 그러고 보니 티노가 올해 마흔셋이군.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노인이 되겠네. 나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했으니 이젠 그도 내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 보는 것이 좋을 거야.”
데브론은 그 짧은 시간 동안 혼자서 다양한 감정을 표출했다. 두 사람 다 가정도 이루지 못하고 오랜 시간을 같이해 왔으니 쌓인 정이 보통이 아니었다.
“티노만 괜찮다면 그렇게 하게. 어차피 오래전부터 그의 신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자유인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하기는, 모든 것은 그의 의지라네. 그를 잘 설득하게. 생각해 보면 참 미안했어. 늘 받기만 하고 그에게 준 것은 거의 없었다네. 항상 곁에 있는 그에게 의지해 왔지만 정작 난 그의 가치를 잘 모르고 있었어. 자네가 금방 알아차린 그의 능력을 난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에게 새로운 삶을 살아갈 기회를 주지도 못했던 거야.”
하룬은 그의 독백을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데브론에게 티노가 어떤 존재인지 대화를 나눌수록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데브론은 이제 티노를 놔주려 하고 있었다.
“그가 내 곁에 있으면 언제까지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어. 늦었지만 이제는 그도 가정을 꾸리고 세상 사는 재미를 느껴보길 바라네. 자네가 꼭 그렇게 해 주게.”
그의 간곡한 의지가 드러나는 부탁에 하룬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에게는, 아니 우리 용병대에는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알아서 대우하겠습니다.”
“고맙네. 자네 어깨에 너무 많은 짐을 지운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
“어르신은 제게 스승과 같은 분입니다. 비록 제가 이방인이긴 하지만 그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고맙네. 비록 브리엘라가 내 조카딸이긴 하지만 내게는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자네가 더 피붙이처럼 느껴지네.”
하룬의 손을 쥐는 주름살 가득한 데브론의 손에서 감당하기 힘든 감정의 파노라마가 전해졌다. 어느새 데브론의 눈에는 습막이 어려 있었다.
‘이 노인네도 무척 외로운 양반이구나.’
하룬은 말없이 데브론의 손을 잡고 그가 보내는 정을 받으며 행복한 마음이 되었다.
데브론을 만나고 나온 하룬은 밤이 늦었지만 티노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티노는 게스트하우스에서도 하인들이나 묵는 가장 허름한 방에 기거하고 있었다.
자다가 깬 티노가 황급히 침대를 정리하고 하룬을 맞았다.
“하룬 대장님이 이 누추한 곳에는 웬일이십니까?”
“쉬는 걸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할 말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 밤에 찾아왔습니다.”
“무슨 말씀을. 괜찮으니 말씀하십시오.”
그는 하룬의 정중한 태도와 말에 당황했다.
“이곳까지 여행하면서 티노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티노는 박식하고 현명하며 많은 재주를 가진 분입니다.”
“아니, 아닙니다. 그거야 어쩌다 보니 얻게 된 소소한 재주일 뿐입니다. 이렇게 과분한 칭찬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닙니다.”
칭찬을 받아 본 적이 없는 것일까? 그의 불편해서 어쩔 줄 모르는 태도를 보자 하룬은 왠지 가슴이 아팠다. 신분 때문에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평생 한 사람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고 살아온 그의 일생이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우리 돌풍 용병대에 들어와 주십시오.”
“네에?”
티노의 눈이 커졌다.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제의 때문인지 눈을 부릅뜬 그의 얼굴이 이상하게 찌그러졌다.
“우리 돌풍 용병대는 비록 이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작고 보잘것없지만 티노 같은 분이 들어와 준다면 훌륭한 용병대로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그, 그건…….”
티노는 몇 번이고 하룬의 눈을 쳐다보며 그 제안이 진심인지 확인하고, 복잡한 심경을 눈으로 표현했다. 무엇 때문인지 그는 쉽사리 입을 떼지 않았다.
“데브론 님과는 이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데브론 님의 말씀에 티노는 자유의지를 가진 자유인이며 이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때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룬의 말에 티노의 눈이 커졌다.
“저, 정말……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네, 친동생과도 같은 티노께서 이젠 자신의 곁을 떠나 가정도 꾸리고 세상 사는 재미를 누리길 바란다며 저에게 꼭 티노를 데리고 세상으로 나갈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티노는 말이 없었다.
하룬 역시 아무런 말도 첨언하지 않았다. 데브론이 느꼈던 그 감정들을 티노 역시 느끼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살아온 생보다 더 긴 세월동안 자신을 죽이고 오로지 데브론을 위해 살아왔던 티노였으니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잠시 방 안에는 뜨거운 습기가 밴 엷은 침묵이 흘렀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에 고개를 바닥으로 떨어뜨린 그의 구릿빛 딱딱한 얼굴 겆구 위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분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하룬 대장?”
한참이 지난 뒤 티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는 이제 흘러내리는 눈물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했다.
“네.”
짧지만 단호한 대답에 티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울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분이 원하시는 일이니 따르지요.”
힘겹게 내뱉는 대답이지만 하룬이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난 티노의 의지를 원합니다.”
“그, 그건…….”
이제까지 묵묵히 보필했던 데브론에게 배신감이라도 느낀 것일까 아니면 이제라도 놓아준다는 데브론에게 감동한 것일까?
하룬은 그 어느 쪽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브론과 티노의 관계는 그의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나와 용병대에 필요한 사람은 티노이지 데브론 님이 아닙니다. 내 꿈은 골든 배틀을 이용해서 데브론 님과 같은 세력가에 붙거나 나중을 위해 뛰어난 재주를 가진 티노를 연결끈으로 용병대를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풍찬노숙으로 세상을 떠도는 용병이긴 하지만 의뢰를 떠나 자유롭게 대륙을 활보하며 새로운 것들을 찾아 여행하는 작지만 강한 용병대를 원합니다. 난 그 꿈을 같이 이룰 식구를 원합니다.”
티노의 얼굴이 서서히 바뀌었다.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노예근성이 밴 평상시 그의 얼굴에서 노화한 현자賢者의 그것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처음으로 하룬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그의 눈에서 꿈틀거리는 작은 열망의 불꽃이 환영처럼 보였다.
하룬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티노의 경륜과 능력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원한다면 대장 자리도 내놓지요.”
진심이 담긴 하룬의 말에 티노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비록 어색한 미소였지만 하룬은 알 수 있었다. 처음 자신의 의지로 뭔가를 결정한 그의 눈빛은 맑았고 서늘했다.
“허헛! 대장은 싫습니다. 그건 아마 평생 저랑은 어울리지 않는 자리일 겁니다.”
“대우는 섭섭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뭣한 말이지만 데브론 님의 말대로 기회만 되면 장가까지 보내 드리지요. 반갑습니다, 돌풍 용병대 대장 하룬입니다.”
“후훗. 티노라고 합니다. 변변치 못한 재주뿐이지만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하하!”
“후후후!”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함박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