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의뢰》
하룬이 집사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뜻밖에도 자작가에서도 은밀한 지하실이었다.
“어서 오게.”
데브론이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실내에는 그 말고도 세 사람이 더 있었다. 한 명은 아는 얼굴이었고, 두 명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이리 들어와서 파로스 자작에게 인사하게.”
데브론이 가리키는 곳에는 귀족 정장을 입은 초로의 사내와 젊은 기사가 앉아 있었다.
‘도대체 이 노인네의 정체가 뭐기에 자작까지 함부로 부르는 거지? 아니, 황녀인 브리엘라에게도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면 황실의 인물인가?’
누구도 말해 주지 않아 궁금하기 짝이 없었지만 굳이 가르쳐 주지 않으니 참을 수밖에는 없었다.
“내가 파로스 자작일세.”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소개한 파로스 자작은 드문드문 흰머리가 나기는 했지만 팽팽한 구릿빛 얼굴에 매서운 눈매와 단단하고 용맹한 기세를 풍겼다.
“자작님을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전 돌풍 용병대를 이끌고 있는 하룬이라고 합니다. 이방인이라 예의에 어두우니 혹시 예를 벗어나는 일이 있어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정중한 하룬의 인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자작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떠올랐다.
“황녀님 일행을 제대로 호위해서 이곳까지 도착한 것에 감사하네. 두 개의 기사단과 수천 명의 병력을 뚫고 도강한 자네의 그 기지와 능력 그리고 일행을 위해 죽음을 무릅쓴 높은 책임감은 데브론 님에게 잘 들었다네.”
그는 귀족이라기보다는 마치 전장에 나선 기사처럼 호탕하게 일개 작은 용병대 대장에 불과한 하룬의 손을 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무척 호의적인 반응이라 내심 긴장했던 하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 세계의 귀족들에게는 특유한 예법이 있다고 들은 터라 조금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데브론 님이 잘 이끌어 주신 덕분입니다.”
하룬의 겸양에도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만면에 웃음기를 띠었다.
“그 전력을 뚫고 이곳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 아, 여긴 내 아들인 데포라네. 수도의 기사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이번에 돌아왔지. 앞으로 좋은 관계를 맺게나.”
하룬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그를 바라보는 데포와 인사를 나누었고, 조용히 앉아 있는 홀과도 목례를 나누었다.
“고맙다는 인사도 할 겸 이미 수고한 보상은 받았겠지만 나도 주고 싶은 것이 있어 불렀네. 데포, 가져오너라.”
자작의 말에 데포가 한쪽 구석에 있던 작은 상자를 가지고 왔다.
“이것은 내가 젊은 시절 기사 수련을 하던 후크란 산맥에서 우연히 얻은 물건이라네. 자네가 비도를 무척이나 즐겨 쓴다기에 준비했네.”
“고맙습니다.”
하룬은 비도에 관련된 물건은 거부하거나 겸양할 생각이 없었다.
“이봐, 친구. 용병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선물은 그 자리에서 보는 것이 예의야.”
단지 인사만 나눈 사이지만 아버지를 닮았는지 권위 의식이 거의 없어 보이는 데포가 자신의 어깨를 치며 하는 소리에 눈앞에 놓인 상자를 열어 보던 하룬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이것은?”
상자 안에는 이곳저곳이 부식되어 그 형체만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된 비수 세 자루가 있었다. 왜 이런 쓰레기 같은 물건을 주는지 알 수 없었다.
“하하하! 그렇게 보여도 그 비도들은 ‘전설의 비도지존’이 사용하던 것이네.”
“네에? 이 비도들이요?”
하룬은 깜짝 놀라며 저도 모르게 상자 안에서 낡은 비도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난 것인지 표면에는 녹이 잔뜩 슬어 있고, 시퍼렇게 빛났을 날들은 그 예기를 잃고 뭉그러진 상태였다.
“흠, 역시! 요즘 사람들은 그 이름을 전혀 모르는데 비도를 사용하는 자네는 알고 있었군. 사실 여부는 나도 잘 모르네. 오우거와 싸우다가 그 서식처에서 발견한 것인데 당시 내 선임이었던 분이 말하길 그 비도들이 전설로만 전해지는 비도지존의 유물이라고 하더군.”
“그랬군요. 저에게는 의미가 깊은 선물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녹슬고 낡은 비도를 손에 쥔 하룬의 눈길은 그것에서 떠나지 못했다. 알 수 없는 운명 같은 힘이 비도에서 흘러나와 그의 심장을 강하게 박동시켰다.
“한때 그 전설에 혹해 비도술을 배우려고 했지만 기사의 길과는 맞지 않아 곧 포기했지. 황녀님을 구해준 것에 성의를 표시하고 싶었는데 자네가 그렇게 좋아하니 나도 기분이 좋군.”
데브론도 하룬이 좋아하는 것에 만족스러웠는지 미소를 머금었다.
홀린 듯 비수를 바라보던 하룬이 정신을 차리고 상자를 갈무리하자 자작이 다시 말을 꺼냈다.
“그리고 집사에게 말해 놓을 테니 영주 직속 ㅈ대장간을 사용해도 좋네. 물론 공짜는 아니고, 재료비만 받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자작님.”
“자네를 부른 용건은 고마움과 함께 선물을 주는게 다가 아니네. 자네에게 의뢰를 하나 하려고 하네.”
“말씀하십시오.”
하룬은 빨리 나가 아이템을 확인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아주 오래 전에 전설의 비도명인 혹은 비도지존이라고 불리던 이가 존재했다는 증거를 찾은 그는 어둠 속에서 빛을 찾은 기분이었다.
“자네, 골든 배틀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네,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골든 배틀을 원로원에서 공표했으니 이제 황제 폐하께서는 길어야 2~3년 안에 승하하실 걸세. 앞으로 2년, 황제가 되실 분들의 쟁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게 될 거야. 이미 상당수의 귀족들이 합종연횡을 이루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네.”
이야기를 하는 파로스 자작의 눈은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눈을 통해 이 테론 제국의 귀족들이 골든 배틀을 대하는 자세를 잘 알 수 있었다. 생각대로 골든 배틀은 귀족들에게도 강렬한 열정의 대상이었다.
“브리엘라 님을 추종하는 우리 세력은 오래전부터 요른 백작령 외곽에 있는 후크란 산맥 깊숙한 곳에 은밀한 수련장을 마련해 놓았네. 후크란 수련장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강력한 그곳의 몬스터들을 상대로 실전을 겪으며 살아남기만 한다면 엄청난 실력자가 될 수 있는 곳이네. 우리 세력의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이런 순간을 기다리며 오래전부터 고된 훈련을 받고 있지. 하지만 그곳은 마나 간섭이 심해서 마나석을 이용한 통신수단을 쓸 수가 없어 인편으로 소식을 전해야 하는 위험한 곳이네.”
깊은 산중에 훈련 기지를 마련한 것을 보면 데브론과 파로스 자작이 속한 파벌은 이미 오래전부터 황권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해 온 듯했다. 물론 다른 파벌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제국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이 느껴져 하룬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자작의 말을 경청했다.
“그런데 최근에 그곳을 오가며 소식을 전하던 전령들의 행방이 묘연하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수련장에 큰일이 벌어진 것은 틀림없네. 그래서 자네 용병대에 중대한 의뢰를 하고 싶네. 여기 있는 홀을 그곳까지 데려다 주게. 홀은 황녀님의 수행 기사이자 대리인일세. 앞으로 한동안 그녀가 그곳의 일을 맡게 될 거야. 그게 우리의 의뢰일세.”
그 제안을 듣는 순간 퀘스트를 받았음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창이 별도로 떴다.
-퀘스트를 받았습니다.
『홀을 후크란 산중에 있는 비밀 수련장까지 안전하게 호위하라
내용: 브리엘라 황녀를 따르는 세력은 험하고 강력한 몬스터들 천지라고 소문난 후크란 산의 깊은 곳에 비밀 수련장을 운영해 오고 있다. 브리엘라 황녀의 심복인 홀은 그곳에서 특별히 할 일이 있다. 그곳까지 그녀를 안전하게 호위하자.
보상: 명성 +100, 현급 100골드, 수련장의 사용 허가
실패 시 명성 -200과 차후 브리엘라 황녀 진영의 신뢰 하락이 예상된다.』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하룬은 일단 퀘스트의 수락 여부를 보류하고 자작에게 질문했다.
“그런 일이라면 영주님이 거느린 훌륭한 기사 분들이나 병력으로도 가능한데 어찌 저희 같은 작은 용병대에 맡기시려 하는 건지요?”
후크란 산맥이 어디 붙었고, 그 여정이 얼마나 험난한지 모르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이곳은 황제 직할령과 맞붙어 있는 영지이네. 황도를 향한 우리 세력의 최전방 기지인 이곳은 다른 세력들이 파견한 수많은 세작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암약하고 있네. 후크란 산중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전력은 우리 세력이 반드시 숨겨야 할 조커인 상황에서 이미 드러난 기사들이나 병력은 파견할 수가 없네. 그렇다고 홀이 혼자서 험한 그곳까지 가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야.”
그제야 상황이 머릿속에서 일목요연하게 그려졌다.
“자네 일행도 이번 일로 노출되긴 했지만 그 정체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작은 규모의 용병대라는 것으로 밝혀진 만큼 세작들의 눈은 금방 사라지고 말 거야. 상황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가용하기에 가장 알맞은 사람들이 바로 자네의 돌풍 용병대라는 것이 나와 데브론 님의 판단일세.”
“사정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원래 다음 일이 예정되어 있는 터라 조금 시간을 두고 생각을 좀 해 보겠습니다.”
하룬은 성급하게 의뢰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어서 레벨 업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게. 부디 좋은 결론이 나왔으면 좋겠군. 우리에게도 많은 시간은 없으니 되도록 빨리 결정을 내려 주게. 작은 용병대라고 생각했는데 연계 의뢰가 있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나 보군.”
사실 용병대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돌풍 용병대지만 데브론을 통해 그 활약상을 들은 자작은 하룬 일행의 전력을 상당히 높이 평가했다.
평민이나 다름없는 이방인에게도 예의를 잃지 않는 것을 보면 합리적이면서도 소탈한 성격을 가진 자작의 태도에 하룬 역시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 후로도 조금 더 담소를 나눈 하룬은 저택을 나와 게스트하우스로 향하는 길에서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았다. 얼른 낡은 비수의 정보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숙소 뒤편의 작은 숲으로 들어가 하룬은 상자를 열어 비수를 꺼냈다.
“정보 확인.”
『비도지존의 비수
등급: ?
아주 오래 전부터 희미한 전설로 전해지는 비도지존이 사용했던 비수들이다. 의지만으로 날릴 수 있다고 전해지는 이 비수들은 알 수 없는 재료들로 만들어졌지만 공기 중에 방치된 상태에서 너무 오랫동안 관리를 받지 않아 본래의 용도로는 쓸 수 없는 상태이다. 이 비수들은 비도지존이 생전에 익히고 쌓았던 고유한 마나를 품고 있어 그 존재가 사용하면 다른 비수들은 물론 그가 가지고 있었던 물건들이 가까이 있으면 푸른빛과 더불어 소리를 내는 효능을 가지고 있다.』
‘굉장한 물건을 운 좋게 얻었군.’
비수는 이 자체로는 큰 소용이 없지만 비도지존의 흔적을 찾는 하룬에게는 나침반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는 불과 몇 사람만이 알 뿐인 전설적인 존재가 남긴 자취를 찾는 데 이만한 것이 없었다.
‘흐음, 이건 무슨 문양이지?’
하룬은 비수의 자루에 새겨진 흐릿하지만 기이한 문양 하나를 발견하고는 눈에 힘을 주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느껴졌던 문양은 의외로 복잡했고, 문양을 좇는 그의 시선에서 빛이 일렁였다.
-스킬 이미지를 찾으셨습니다. ‘멀티 샷’을 익히시겠습니까?
생각지도 않았던 메시지가 들려왔다.
‘스킬 북의 형태가 아니라 이미지 형태로도 스킬을 남길 수 있는 거구나.’
거부할 일이 아니었다. 하룬은 메시지에 수락 의사를 표시했다.
『멀티 샷(액티브): 초급 Lv.1(0%)/Lv.5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효율적인 암기 스킬입니다. 여러 개의 암기를 같은 위력으로 동시에 목표물을 향해 날리는 스킬로, 딜레이는 없습니다.
제한: 집중 스텟 10 이상, 필요 S.P. 30, 소모 마나 1회당 100』
“마나가 많이 소모되는 것이 흠이기는 하지만 좋은 스킬을 얻었구나.”
싸가지 때문에 사기적인 암기술을 구사할 수 있었던 하룬이지만 독과 마나 소비 때문에 함부로 그 스킬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암기 스킬을 익히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퀘스트의 보상으로 얻은 행운 스텟의 영향인지 아니면 이것 자체도 보상에 속하는지 알 수 없지만 기분만은 최고였다.
아쉬운 것은 이미 전직과 메신저 스킬을 배운 터라 S.P.가 부족해서 당장 익힐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 S.P.는 지금까지의 경우를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확보할 자신이 있었다. 안 그래도 자신의 실력이나 대원들의 실력을 키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룬은 비수들을 토시 안에 조심스럽게 꽂았다. 암기대에 꽂았다가는 급할 때 생각 없이 날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호위 대상이 무표정하고 차가운 홀이라는 점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이 비수들이 발견된 곳이 후크란 산중이라고 하니 꼭 가야겠구나.’
하룬은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진수와의 재회가 좀 미뤄지는 한이 있더라도 비도지존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골든 배틀로 상황이 변한 만큼 시간은 충분했다.
이 게임을 시작하며 오직 강해지는 것만 목표로 삼고 매진했던 하룬이 또 다른 목표를 정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