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다음 날 만 하루의 제한 시간을 힘들게 기다렸던 하룬이 부활한 곳은 다행히도 파로스 자작령에 해당하는 강변이었다. 그의 눈에 누런 빛깔의 강물이 도도하게 흐르는 소르본 강과 길고 좁은 목조 다리가 보였다. 그리고 강 건너편에는 많은 병사들과 일단의 기사들이 있었다.
‘실버 문 기사단이구나. 그럼 이곳은?’
그제야 자신이 잇는 곳이 어디인지 주변을 살펴본 하룬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자작령인가? 정말 다행이다.”
사망한 곳 주변의 안전한 곳에서 부활하도록 설정했지만 자칫 강 건너편에서 부활하는 상황이면 위험할 뻔했다.
이미 게임 시간으로 사흘이나 흘렀기에 양쪽에 집결했던 군세는 대부분 철수한 상태였지만 다리 양편은 아직도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수백의 병사들이 양쪽에 포진한 상황이었다.
접속이 제한된 동안 진수와 벨을 통해 스토리 퀘스트인 ‘골든 배틀’에 대한 정보를 접한 하룬은 이제야 저간의 상황이 이해되었다.
다만 선가드 기사단과 실버문 기사단을 장악한 황자라면 막강한 힘과 세력을 가졌을 텐데 굳이 브리엘라처럼 세력도 없는 경쟁자를 제거하려고 이 난리를 피웠다는 것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긴 브리엘라 측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 이런 생각을 할 필요도 없지.’
막강한 힘을 가진 기사단 두 개가 왔는데도 감히 다리를 건널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 자작령에 집결한 힘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런 자작가의 힘을 등에 업은 브리엘라의 전력도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강할지도 몰랐다.
‘뭐, 들어가 보면 알겠지.’
하룬은 엄청난 군기가 느껴지는 성문을 바라보았다. 자작령에 속하는 다리 부근에 주둔한 병력은 물론이고 성문 주변에 주둔한 병력에서도 흐트러짐을 느낄 수 없었다. 일반적인 영지병이 아니라 정예병이 분명했다.
성에 들어서기 전에 확인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상태였다. 비욘드에서의 죽음에 대한 페널티는 상당히 심하다고 들었던 터라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이름: 하룬
종족: 인간
직업: 검사
레벨: 10
칭호: 용병대장(외 4개)
생명력: 1,210
마나: 1,240
정령력: 450
힘: 45(+15) 체력: 36
지식: 20 지혜: 38
행운: 25 민첩: 32(+12)
지구력: 12 심안: 9
집중: 16 S.P.: 3
명성: 540 통솔력: 315
화염 저항력: +10%
마법 저항력: +10%』
‘그나마 레벨이 낮아 페널티가 적었구나.’
상태 창을 면밀하게 살펴보던 하룬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행히 막 전직한 상태라 레벨 하락은 없었다. 모든 항목에서 10% 능력치가 하락했을 뿐이다. 그나마 죽기 전에 싸가지를 무리하게 소환한 탓에 정령력은 이전에 확인했을 때보다 더 올라 있었다.
그런 안도감도 잠시, 그동안 힘들게 몸을 수련해서 쌓아왔던 스텟의 하락이 안타까웠다. 다른 유저들처럼 일반적인 플레이를 해 오지 못해 레벨 업 속도는 늦고 전직까지 늦은 그였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이 평균치를 한참 상회하는 높은 스텟이었는데 정말 아까웠다.
명성이나 통솔력의 하락은 스텟만큼 그렇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내친김에 스킬 창도 확인했다. 혹시 스킬의 레벨도 떨어지지 않았을까 우려가 되었던 것이다.
『[패시브 스킬]
센스 소드: 초급 Lv.1(92.00%)/Lv.10
정령 유도 암기술: 초급 Lv.1(7.23%)/Lv.5
정령 합체 암기술: 중급 Lv.1(51.02%)/Lv.5
응급 치료: 초급 Lv.1(2.50%)/Lv.3
치료약 조제: 초급 Lv.1(12.30%)/Lv.5
함정 설치 및 해제: Lv.1(3.00%)/Lv.3
안마: 하급 Lv.1(6%)/Lv.3
메신저 워킹: 초급 LV.2(0.6%)/Lv.5』
다행이었다. 스킬들은 이상이 없었다.
그제야 하룬은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방인의 경우 죽음의 순간에 원래 살던 세계로 텔레포트한 것으로 NPC들이 이해한다고 했던가? 그럼 내가 이렇게 살아서 가도 많이 놀라지는 않겠구나.’
부활의 이점을 가진 유저들이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부활할 수 잇는 것은 아니다. 능력치의 하락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캐릭터를 삭제하고 다른 계정으로 접속해야만 했다.
성을 통과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NPC 수비병들이 용병대장임을 알려주는 팔찌를 보고는 얼른 맞댄 창난을 거두어들였다.
자작성은 그 규모가 일전에 들른 남작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파로스 자작이 작위치고는 막강한 세력을 가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수십만이 거주할 정도로 거대한 거주 지역과 잘 발달된 상가 그리고 잘 포장된 대로가 사방으로 나 있었다.
비욘드의 어느 성에나 있는 거대한 광장을 가로질러 내성으로 향하던 하룬은 다시 한 번 신분을 확인하고서야 영주와 귀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데브론과 도란의 태도를 보면 파로스 자작과 무슨 관계가 있는 듯했으니 자작가로 직접 찾아가야겠지?’
그의 생각이 맞았다. 자작의 저택을 지키고 있던 한 기사가 팔찌를 통해 그의 신분을 확인하더니 정중한 태도로 그를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마치 대학 캠퍼스를 연상시키는 넓은 자작가의 정문에서 본채까지는 꽤 걸어야만 했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시오.”
기사의 말에 하룬은 잘 정리된 정원을 구경하고 있었다. 전문적인 관리사가 있는지 수많은 꽃들과 나무들이 화사하고 싱싱한 모습으로 그림 같은 광경을 연출했다.
“하하하! 하룬, 어서 오게. 처음에는 자네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자네 대원들로부터 자네가 이방인이라는 것을 알고 많이 안심했네. 이방인들은 죽음이 닥쳐오면 자동적으로 발현되는 텔레포트 마법으로 피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거든.”
맨발로 달려 나와 그를 붙잡고 기뻐한 사람은 데브론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많은 화살과 마법 공격을 한 몸에 받아 내며 강물 속으로 빠져 들던 모습을 보았던 그는 그 순간만 떠올리면 침통했었다.
비록 부활할 수 있는 이방인이라지만 모두를 대신해서 죽어 간 하룬에게 의뢰인과 용병의 관계를 떠나 무척이나 고마웠던 것이다.
“무사해 보이니 다행이군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가?”
데브론은 하룬의 몸을 붙잡고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의 눈길에서 진한 정이 흘러나와 하룬을 감동시켰다. 비록 NPC지만 자신을 아끼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죽음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일단 들어가세. 마침 내가 파로스 자작과 의논할 것이 있어 이 본채로 오길 다행이군. 일행은 저기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머물고 있네.”
데브론이 가리키는 곳에는 3층으로 지어진 고풍스러운 건물이 서 있었다.
“자네가 살아 돌아온 줄 알면 자작도 만나 보고 싶어 할 테지만 일단 먼저 일행과 인사를 나누세.”
“네.”
한때는 그렇게 미웠던 재수 4인방 녀석들이 보고 싶었다. 그래도 생사를 같이하면서 정이 들었나 보다.
화사한 딜레이니 꽃들이 피어 있는 정원을 지나 게스트하우스로 들어서자 지탄의 큰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대장! 대장이 살아 있었어!”
응접실에 앉아 접시에 수북이 쌓인 뭔가를 집어 먹고 있던 지탄이 가장 먼저 하룬을 보았다.
“잘 있었냐?”
“흐흥, 왜 이제야 오는 거야. 난 대장이 죽은 줄 알았잖아.”
울먹거림이 살짝 느껴지는 지탄의 말에 코끝이 찡해졌다. 동료애라는 것이 정말 무서웠다. 자신은 녀석들을 이용할 생각만 했는데 녀석들은 그런 자신에게 정을 주고 있었나 보다.
“이대로 대장이 죽으면 우리의 요상한 병은 어쩌라고. 난 똥꼬가 찢어져 죽고 싶지는 않단 말이야.”
“에라이!”
퍼억!
“아악!”
하룬은 고조되었던 감정이 깨어지자 지탄의 머리통을 힘주어 제대로 갈겨 버렸다. 하긴 그새 동료애 따위가 쌓일 리 없었다. 더구나 생각하기에 따라 그들 입장에서는 일방적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불평등한 관계가 아니던가.
“살아 계셔서 다행이에요.”
그동안 대화도 나누지 않았던 데면데면한 관계였지만 이 순간의 브리엘라는 진심으로 그의 귀환을 기뻐했다. 왜 그녀가 이곳 게스트하우스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새 그녀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평상복이 아니라 드레스를 입고 약간의 화장을 한 그녀에게서는 고귀한 기품과 함께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성숙한 여인의 향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걱정해 주신 덕분입니다.”
신분을 알았으니 가벼이 대할 수 없었다. 하룬의 정중한 대답에 브리엘라는 흥분했던 자신을 떠올린 듯 홍조 띤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눈으로 인사하는 홀의 뒤로 물러섰다.
좀처럼 감정이 없던 눈에 고마움을 담은 홀은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피를 많이 흘려 걱정했는데 그래도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원들에게 하룬 대장이 실은 기이한 능력을 지닌 이방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마음은 좀 놓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보니 정말 기쁩니다.”
도란이 두 아이와 함꼐 두 눈 가득 반가움을 담고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 그들 가족에게서 느껴져 가슴이 뭉클했다.
“아이들이 건강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이게 다 하룬 님 덕분입니다. 높은 파도를 일으킬 정도의 놀라운 정령력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무사히 자작령에 들어올 수 없었을 겁니다.”
하룬은 대답 대신 미소 지으며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세페르와 세피는 다시 만난 기쁨에 상기된 얼굴로 그의 손을 꼭 잡았다.
“형이 죽은 줄 알았어요.”
“세피는 슬퍼서 많이 울었어요.”
누군가 자신을 이렇게 걱정해 주는 것에 감동한 하룬이 두 아이의 어깨를 잡아 가볍게 안아 주었다.
“고맙구나. 너희들이 슬퍼할까 봐 억지로 살아서 온 거란다.”
“정말요?”
“그럼.”
기쁨으로 빛나는 두 아이들 뒤로 필립과 시린느 그리고 라트리나가 다가왔다.
“대장.”
필립은 환하게 웃으며 하룬을 바라보았다.
“호호, 내 말이 맞지. 대장은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야.”
잡일을 하지 않은 덕분에 얼굴이 환하게 핀 시린느를 보자 왠지 망가뜨리고 싶은 마음이 끓어올랐다. 왜 시린느만 보면 노블이 연상되는지 모르겠다.
“다행이다. 난 대장이 죽으면 따라서 자살하려고 했어.”
웬일로 라트리나가 착한 소리를 했다. 정신을 차린 것일까?
“난 그렇게 더러운 꼴로 죽고 싶지는 않아. 그럴 거면 차라리 대장을 따라 죽는 게 낫지.”
‘그럼 그렇지.’
입맛이 썼다. 그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줄 잘못 알고 있는 병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인사를 하는 사이 돌아온 대브론은 일행을 데리고 큰 회의실로 향했다. 어쨌든 그들의 목숨을 구한 하룬 덕분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오래간만에 즐거운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떠들썩한 인사가 끝나고 데브론이 화제를 돌렸다.
“돌풍 용병대에 한 의뢰는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네.”
그 순간 하룬의 눈앞에 퀘스트의 완료를 알리는 안내 창이 떴다.
-퀘스트를 완수했습니다.
브리엘라를 호위하는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것이다. 바로 즐거운 메시지가 들려왔다.
-용병대장의 레벨이 3 상승합니다.
-각 대원의 레벨이 2 상승합니다.
-명성 200을 얻었습니다.
단숨에 레벨이 올라 13이 되었다. 사실 돌풍 용병대의 전력으로 보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난이도를 많이 고려한 레벨 업은 아니었다.
그래도 단숨에 레벨이 3이나 올라 기분이 좋아진 하룬은 아무 변화도 보이지 않는 재수 4인방의 태도를 보고 NPC들에게는 레벨 업 메시지가 안내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약속한 보수 100골드네. 사실 자네들의 공로를 생각하면 어림도 없는 보상이지만 황녀가 좋은 것을 하사할 걸세.”
뒤의 말은 거의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아직 재수 4인방은 브리엘라의 신분을 모르는 듯했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특히 하룬 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모두 적들의 화살과 마법 공격에 강물 속에 수장되어 물고기 밥이 되고 말았을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브리엘라였다. 뭔가 의례적인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사실 엄청 고생해서 그런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것은 제가 작고하신 아버님에게 물려받은 몇 개 안 되는 물건 중 하나입니다. 원래 황족의 손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주의 사항이 적혀 있던 물건입니다. 하지만 하룬 대장님이 죽을 위기를 넘기며 우리 전체를 구해 준 은혜를 갚고자 이 물건을 드리니 부디 좋은 곳에 써 주세요.”
그녀가 내민 것은 눈알만 한 구슬이었다. 비록 광택이 나기는 했지만 보석 종류는 아니었다. 나름 기대했기에 하룬은 실망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귀한 물건이라니 잘 쓰겠습니다.”
그녀에게 구슬을 받은 하룬은 그 자리에서 바로 정보를 확인했다.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가 이방인이라는 것이 모두 밝혀진 마당에 유저 특유의 행동을 하더라도 별 상관은 없었다.
이방인은 하나같이 허공에 대고 대화를 나누는 버릇(?)이 있다고 알려졌다는 것은 진수에게 이미 들었다.
『신비의 소환구(미스터리)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봉인된 구슬입니다. 봉인된 존재는 소환자의 의지에 반응하여 계약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뭐야, 이거?’
등급도 없는 미스터리 아이템이었다. 마치 싸가지를 얻었을 때가 생각나 하룬은 부지불식중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비록 사기적인 스킬을 구사하게 만들어 준 싸가지라는 펫을 얻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런 펫은 절대 사양이었다.
‘게다가 소환에 대한 선택권이 소환자에게 없다니, 정말 황당하군. 뭐, 이런 아이템을 주는 거야? 누구는 끔찍하게 죽기까지 했는데.’
그래도 보는 앞에서 불만을 표시할 수도 없어 마음을 다잡고 구슬을 인벤토리에 신경질적으로 처박은 순간 다시 그의 눈에만 보이는 창이 떴다.
-D급 연계 스토리 퀘스트를 완수했습니다.
‘좋아, 가는 거야!’
보상을 받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다.
-레벨이 4 상승합니다.
-행운 스텟이 5 상승합니다.
-명성이 300 올랐습니다.
-소울 포인트 30점을 획득했습니다.
한 방에 레벨이 4단계나 올라 합하면 7업이었다. 레벨 업으로 주어지는 보너스 스텟을 생각하면 사망 페널티를 얼추 복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룬은 연속으로 보상을 받은 짜릿한 기쁨의 순간을 더 즐기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일단 정신을 차렸다.
“그럼 쉬게. 난 프리엘라와 함께 자작을 만나 상의할 것이 있네. 자작도 자네를 보고 싶어 하니 내일쯤 따로 부를 거야. 일단 돌아와서 회포를 풀기로 하세.”
“알겠습니다.”
데브론은 브리엘라와 홀을 데리고 자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대장, 우리 돌풍 용병대의 첫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기념 파티는 안 할 거유? 보수도 푸짐하게 받았으니까 어디 가서 제대로 한잔 먹자.”
“에휴, 이 곰퉁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벌벌 떨던 주제에 먹는 건 밝혀요.”
지탄의 말에 라트리나가 면박을 줬지만 둘 다 웃는 낯이었다. 정이든 아니면 치료 때문이든 재수 4인방이 자신의 무사귀환을 기뻐하는 것에 하룬은 가슴이 뭉클했다.
“그래, 가자.”
“아싸!”
필립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점잖은 체하느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도 제대로 첫 의뢰를 완수한 기분을 내고 싶었을 것이다. 시린느는 벌써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자꾸 사양하는 티노까지 데리고 나선 하룬 일행은 용병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유명한 선술집으로 향했다. 새끼 양 요리와 맥주 맛이 일품이라는 티노의 말에 혹해 들어간 그곳에서 하룬은 비욘드에서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훗! 기분이 좋네.“
의뢰를 성공해서 그런지 아니면 티노와 재수 4인방에게 동료애를 느껴서인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좋았다. 거기다 맥주 맛은 현실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 맥주 맛을 가장 좌우하는 것이 원료가 되는 물이라고 하더니 전혀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로 만든 비욘드의 맥주 맛을 일품이었다.
자퇴 후 거리를 떠돌았을 때 몇 번 술을 마신 적이 있는 하룬이지만 이렇게 시원하고 맛있는 맥주는 처음이었다. 이런 순간에는 벨에게 감사했다.
다른 유저들의 경우 술맛까지는 느낄 수 있었지만 술이 가진 알코올이 빠진 상태라 제대로 술기운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시끄러운 주점이지만 일행은 힘겨웠던 그동안의 여정과 몬스터들과의 전투를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진한 동료애를 쌓았다.
벨로 인해 알코올이 제대로 들어간 술맛에 하룬은 기분이 좋아졌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지 처음으로 느끼는 하룬이었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커지고 말도 많아진 하룬이지만 누구도 그 모습을 이상해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더했던 것이다. 심지어 티노까지 그랬다.
평소에는 말이 별로 없던 티노였지만 일단 맥주 몇 잔이 들어가자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그를 억제하고 있었던 뿌리 깊은 노예근성이 사라졌는지 그는 노회한 용병이 되어 좌중의 분위기를 주도해갔다.
살아오면서 배우고 들으며 실제로 겪으며 쌓아 온 티노의 해박한 지식에 숨 막히는 경험담이 곁들여지자 술맛은 그 향기를 더해 갔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붉은 석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술자리를 파할 때 티노는 이미 돌풍 용병대의 대원처럼 대우를 받았다. 그 또한 그런 대접이 마음에 드는지 농담까지 해가면서 술기운을 즐겼다.
그동안 티노의 배려를 가장 많이 받았던 시린느는 특유의 영리함으로 그의 기분을 알아채고는 매혹과 여우 같은 말솜씨로 티노를 살살 녹여 버렸고, 하룬을 비롯한 다른 대원들도 은근히 그 분위기에 동조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줄 알았더니 이런 재주도 있었네.’
하룬은 처음으로 시린느에게 좋은 감정을 가졌다. 그녀의 매혹 스텟이 이럴 때는 제대로 그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물론 티노의 나이나 그가 살아온 인생으로 볼 때 시린느에게 연정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겠지만 가족이 없는 티노로서는 무척이나 살가운 존재로 받아들여진 것 같았다.
꽤 많은 맥주를 마셨지만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룬 역시 육체적인 능력이 향상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기분 좋은 대화를 많이 나누어서 그런지 크게 취하지는 않았다. 다만 라트리나가 생각보다 조금 취해서 지탄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업어야 했다.
“야, 인마! 넌 줘도 안 가져!”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지 횡설수설하는 라트리나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온 하룬은 몸을 씻기도 전에 집사로부터 자작이 만나고자 한다는 전갈을 은밀하게 전해 들었다.
‘이런 한밤중에 할 이야기가 뭐지?’
어쨌든 남들의 이목을 피해 한밤중에 만나는 것이니 중요한 이야기일 것이다. 긴장하자 술기운이 확 깨는 하룬이었다. 혹시 몰라 가볍게 몸을 씻고 미리 준비된 깨끗하고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집사를 따라 자작이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