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진수 (25/278)

《진수》

 하룬은 집으로 돌아갈 때도 메신저 워킹 스킬을 수련했다. 발바닥에 정신을 집중해서 걷는 것만으로도 발바닥을 통해 기가 쌓이는 기분은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성취감과 만족 그리고 쾌감을 주었다.

 “가끔 현실로 나와 걸어야겠구나.”

 물론 벨이 캡슐 내부의 대기 상태를 현실과 동일한 조건으로 유지하고 있어 비욘드에서 수련해도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이 실제로는 캡슐 내부에 떠 있는 상태라는 설명을 들었기에 하는 생각이었다.

 발바닥으로 직접 대지를 밟는 것이 메신저 워킹 스킬을 수련하는 최상의 방법이었다. 비록 비욘드의 마나와 현실의 기기가 비슷한 개념을 가진 무형의 힘이었고 벨의 놀라운 능력으로 다른 유저들보다 캐릭터와의 동화율이 높다고는 해도 100%가 아닌 이상 현실에서도 수련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하룬은 2시간 정도 스킬을 수련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가만, 이제 밤인데 혹시 진수 형이 로그아웃하지 않았을까?’

 잠시 망설이던 하룬은 마음을 정하고 진수의 집 도어 벨을 눌렀다. 일단 비욘드에 접속하면 용병 직업을 가진 그로서는 로그아웃하기가 쉽지 않아 기회가 났을 때 진수를 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수는 그의 생각대로 로그아웃을 한 상태였다.

 “정민아, 들어와.”

 그의 집으로 들어가니 완전히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먹다 남은 즉석식품들의 용기들이며 술병들 그리고 온갖 잡동사니들이 쓰레기처럼 널려 있어 악취까지 났지만 진수는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벨이 있어 다행이구나.’

 자신만 해도 별로 깨끗한 성격이 아니어서 혼자 있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치우고 산 기억이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캡슐 밖에도 존재할 수 있는 벨 덕분에 집 안이 깨끗하게 유지되었다.

 “저녁은 먹었니?”

 “네.”

 사실 저녁 식사 전이었지만 이런 환경에서는 음식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래, 별 탈 없이 전직은 했고?”

 “전직은 했는데…….”

 하룬이 어두워진 얼굴로 말끝을 흐리자 사정을 짐작한 진수가 피식 웃었다.

 “죽었구나?”

 “네.”

 “하하하, 리얼리티가 강한 비욘드에서는 전직할 때까지 평균 두 번은 죽는다는 비공식적인 통계가 있으니 너무 기죽을 필요 없어. 난 벌써 세 번이나 죽었는걸.”

 “그래도 죽는 기분이 너무 더러워서…….”

 “그러냐? 난 별 감각 없던데. 내가 너무 자주 죽어서 그런가?”

 아마 동화율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동화율이 높으면 그만큼 현실의 육체와 정신의 충격이 강하니까. 물론 마지막 순간에 벨이 그 충격을 현저히 완화시켜 주었을 테지만 그래도 20~30%의 동화율을 가진 다른 유저들과는 현저히 달랐다.

 죽는 이야기를 하니 괜히 갑갑한 기분이 들어 하룬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복수는 어떻게 되어 가는 거예요?”

 생각보다 진수의 얼굴이 편안해 보여서 한 질문이었다.

 “아, 그거? 원래는 친구들과 네가 합류하면 일단 그년의 주위를 살피다가 틈을 봐서 납치하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전체 스토리 퀘스트가 공지되는 바람에 우리의 계획도 좀 바뀌었어.”

 스토리 퀘스트라는 뜬금없는 소리에 하룬의 눈이 커졌다. 진수는 하룬의 표정을 통해 그가 스토리 퀘스트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물었다.

 “어! 넌 모르고 있었냐?”

 “뭘요?”

 “사흘 전에 전체 공지로 떴는데. 그 일 때문에 비욘드 홈피는 물론이고 넥컴월 본사 홈피도 한동안 마비되었는데.”

 진수는 공지 내용을 잘 모르는 하룬을 위해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골든 배틀.

 비욘드 세계에서 유일하게 서비스가 된 테론 제국은 노쇠한 황제 때문에 바야흐로 폭풍을 마주한 혼란스러운 정국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40년이 넘는 치세 기간 동안 영민한 군주로 추앙받던 황제도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과 가까워져가고 있었다.

 황태자를 미리 정하지 않는 테론 제국은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골든 배틀이라는 황위 계승권자들의 싸움이었다.

 황권을 수호하는 원로원의 결정으로 시작되는 골든 배틀은 세 단계로 진행된다.

 첫 번째는 황위 계승권을 가진 황족들이 황도를 벗어나 본인의 기반이 되는 곳까지 탈출하는 과정이다. 일단 원로원이 골든 배틀의 시작을 공표하면 황권에 절대복종하는 황실 근위 기사단과 황도 수비군, 중앙군 그리고 전방 군단들을 제외한 나머지 세력들은 자신들이 선택하고 지지하는 황족의 명을 받아 각자 가장 위협이 될 만한 황족을 척살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장장 2년간에 걸쳐 벌어지는 황족들 간의 전쟁이다. 본인을 지지하는 세력의 힘과 정치력으로 다른 황족들을 복속시켜 제국 중심에 있는 황도를 기점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의 영지들을 자기 세력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그 기간 동안 전쟁 수행에 방해가 되는 몬스터 처치와 도로 건설 등이 이루어지며, 원한이 있거나지지 세력이 다른 영지 간에는 영지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 과정을 통해 평민이나 하위 귀족들은 공을 세워 자신이 모시는 주군에게 작위나 영지를 하사받을 수 있다. 그야말로 신분 상승을 위한 좋은 기회였다.

 세 번째는 이미 결정된 네 명의 황위 계승권자들이 황제의 대지라는 곳에서 황제 위를 놓고 벌이는 전투다. 원로원의 주재하에 일정한 규모의 기사단과 가신들을 동행한 각 황족들은 피 말리는 전투를 치러 최종 승자를 결정하고, 이 승자가 황제의 자리에 앉는다.

 패자가 살아남은 경우는 자신이 키운 모든 세력을 승자에게 바치고 ‘황가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영지에서 나올 수 없는 신세가 된다.

 언뜻 생각하면 황제가 바뀔 때마다 제국 전체가 피로 뒤덮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역기능보다는 순기능이 더 많은 제도였다.

 세습을 하며 막강한 권력과 금력을 집적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정체될 수 있는 경직된 귀족 사회에 주기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주는 것이 이 골든 배틀이다.

 자신이 미는 주군이 황제가 되면 자연히 막강한 힘과 권력을 쥘 수 있기에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다. 심지어 평민들에게도 마찬가지 기회가 주어진다.

 이 골든 배틀로 인해 수많은 귀족가들이 일어났다가 스러졌지만 제국은 단단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아무리 강력한 귀족가라도 몇 번만 골든 배틀에서 패하면 힘을 잃게 된다.

 힘과 권력보다는 명예를 택한 원로원에 포함되지 않은 이상 아무리 오랜 전통과 강력한 저력을 가진 귀족가라도 그 영화를 백 년 이상 누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후손이 많은 테론 제국의 황가는 이 골든 배틀을 통해 약한 자들을 솎아 내고, 귀족들의 힘과 권력을 제한하는 한편 강력한 힘을 가진 군주를 배출해 왔다.

 이 제도를 통해 비욘드의 세상에 들어온 유저들도 단지 몬스터나 잡고 아이템을 모으고 레벨 업하는 것에서 벗어나 폐쇄적인 유니온 사회와는 다른 웅대한 제국에서 자신의 기반을 세울 수 있다.

 직접 골든 배틀에 참가하여 공성전이나 대규모 전투를 통해 실감 나는 전투를 경험하고, 영지를 경영해 볼 기회를 비욘드가 제공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비욘드의 NPC들과 함께하는 것이지만 이미 전직 과정을 통해 NPC들에게 적응한 유저들은 게임의 재미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대단하군요, 이 게임.”

 “그렇지? 다른 게임과는 스케일이 달라. 현실에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것들을 이곳에서는 마음껏 누리고 구할 수 있어.”

 진수는 하룬만큼이나 비욘드에 푹 빠진 눈치였다.

 “그럼 복수는 어떻게 할 거예요?”

 복수라는 말에 진수의 눈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복수라는 소리에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열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아직 의논 중이긴 하지만 방향은 잡았어. 이왕 복수하기로 했는데 기껏 게임 캐릭터를 죽이는 정도의 시시한 개인적 복수로 끝낼 것이 아니고, 강 패밀리가 미는 황자 세력을 철저하게 분쇄하는 쪽으로 의견을 맞추고 있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자신들이 미는 황자를 군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개인적인 복수도 하고, 단순한 몬스터 사냥에서 벗어나 전략과 전술을 사용한 대규모 전투를 경험할 수 있다. 거기다 운이 좋다면 이 비욘드에서 귀족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일단 시간을 가지기로 했어. 저들의 동향을 주시하여 놈들이 어느 황자에게 붙는지 알아내야 우리의 본격적인 복수가 시작될 거야.”

 “그럼 형도 황자를 선택해야겠군요.” 

 “그렇지. 일단 저들이 미는 황자와 적대적인 세력을 찾아야겠지.”

 좋은 정보를 알았다. 물론 귀가하면 벨에게 이 정보를 듣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같은 유저에게 듣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묘한 동질감이 같은 정보라도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럼 일단 시간은 있네요.”

 “그래, 우리도 실력을 키우는 데 전력을 다할 거야. 모든 유저들이 마찬가지 입장이지. 적어도 기사급 실력은 되어야만 마음껏 활약할 수 있을 테니까.”

 “기사라면 레벨이 어느 정도 되나요?”

 하룬의 질문에 진수가 약간 한심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가 보기엔 하룬이 늦게 시작한 터라 게임의 필수적인 정보에 너무나 취약해 보였다.

 “우선 영지병의 경우는 고블린과 오크 사이로 10~20레벨 정도야. 하지만 정규병의 경우는 20~30레벨로 일반 오크와 비슷해. 수련 기사의 경우는 50~70으로 소드 유저 상급에서 최상급 사이로 마나를 검에 주입할 수 있는 정도지. 일반 기사들은 80~120 레벨로, 검에 마나를 주입해서 검의 강도나 절삭력을 현저하게 올릴 수 있지. 상위에 속하는 기사들은 120레벨 이상으로 검사劍絲 혹은 오러-스레드나, 검기劍氣라고 부르는 오러-소드를 뽑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오러-소드는 이미 본 적이 있었다. 퀘스트를 하면서 데브론과 기사들이 그것을 썼던 것이다.

 “그럼 지금 유저들의 실력은 어때요?”

 “자세한 통계 자료가 발표되지 않아 평균 레벨은 모르겠지만 현재 유저 공식 랭킹 1위는 블러드케이프라는 검사 유저인데 65레벨이야.”

 피의 망토라는 뜻을 가진 유저명은 듣는 것만으로 살벌했다. 그만큼 전투에 미친 유저일 것이다. 그러니까 벌써 65레벨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비공식 랭커들도 많아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오크 워리어나 전사장을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인 45레벨 이상은 고렙, 리자드맨을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인 30~44레벨은 중렙이라고 부르지.”

 진수의 말에 하룬은 뿌듯했다. 싸가지의 사기적인 능력 때문이긴 하지만 자신은 오크워리어 슬레이어인 것이다. 하지만 진수는 자신의 이야기에 열중했다.

 “시간이 갈수록 레벨 업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유저들의 실력이 급격하게 올라갈 수는 없지만 서비스 기간을 고려하면 NPC들보다 발전 속도가 빨라서 앞으로 게임 시간으로 1년 안에 고렙들은 기사들의 레벨과 비슷해질 거라는 관측이 많아. 물론 2차 전직을 하고 나면 레벨 업이 한층 더 극악해진다고 하니 그때는 NPC들에 비해 유저들의 레벨 업 속도가 엄청나게 빠를 거야.”

 그럴 것이다. 그래야 게임하는 재미가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무한정 유저들의 레벨 업을 쉽게 할 수도 없는 것이 비욘드의 NPC들과 유저들 간의 밸런스도 고려해야 했다. 그래서 2차 전직 후에는 레벨 업이 어려워지도록 했을 것이다.

 “일단 실력을 키우는 데 주력해야겠군요. 어쭙잖은 실력으로 골든 배틀에 참가한다면 말단 병사밖에는 안 되겠는데요.”

 “그렇지. 더구나 앞으로 각 황자 세력들은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무투회와 같은 인재 영입 행사들을 하게 될 거야. 그 대상은 아무래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유저들이 될 테고 말이야. 비록 골든 배틀이 시작되면서 사망에 대한 룰이 바뀌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지금 유저들은 지정 사냥터는 물론이고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위험한 곳도 마다하지 않고 있어. 죽음을 각오하고 전투력과 레벨을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상황이라고.”

 하룬은 진수의 말에서 이상한 것을 느끼고는 물었다.

 “룰이 바뀌었다고요?”

 “응. 처음과는 달리 일단 전직 후에는 한 번 사망할 때마다 레벨과 능력치의 20%가 하락하는 것으로 패치가 되었어.”

 왜 그런 조건이 설정되었는지는 대충 이해가 갔다. 목숨이 하나인 NPC들과의 밸런스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세 번 이상 죽으면 차라리 캐릭터를 삭제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형 레벨은 얼마예요?”

 “세 번이나 죽는 바람에 많이 깎여서 이제 겨우 34레벨이다. 하지만 이제는 걱정 없어. 요른 백작성 인근 산에서 대단위 오크 부족을 하나 발견했거든. 비선공이 원칙인 사냥터가 아니라 좀 위험하지만 영리하게 치고 빠지면서 오크를 상대로 레벨을 최대한 올릴 생각이야. 물론 그러면서 던전이라도 발견하면 최상이겠지.”

 두 사람은 2시간 넘게 이야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지난번 만났을 때는 보기 안쓰럽기까지 했던 진수였으나 새로운 미래와 복수를 계획하고 나서는 아주 활기찬 모습을 보여 하룬은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비욘드에서 친구들과 약속이 있는 진수는 시간이 없었다.

 하룬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요른 백작성에서 만나기를 기약하고 진수의 집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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