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르크와 아우터 ‘나인’》
‘작살’이라는 대장간은 중간에 있었다. 다른 대장간과 마찬가지로 강인한 근육질의 팔뚝을 가진 두 대장장이가 벌겋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교대로 내리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아 하룬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열심히 쇠를 다루고 있는 그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구경했다.
“뭘 찾으세요?”
뒤에서 들리는 말에 고개를 돌려 보니 한 아가씨가 서 있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헉 소리가 나오려고 하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매서운 눈매가 아주 특징적인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는데 키가 2미터는 훨씬 넘었고, 팔뚝이 그의 허벅지만 했다. 그뿐이랴. 풍성한 가슴의 융기가 선연하게 보이는 그녀의 몸집은 하룬의 배는 넘을 것 같았다. 덩치만으로 따지면 그 무서운 하르크보다 약간 작은 정도였다.
“그, 그게…….”
원래 소심한 하룬은 위압적인 그녀의 모습에 말을 더듬지 않을 수 없었다.
“물건을 찾는 거라면 안으로 들어가세요. 이곳은 작업장이고 물건 전시장은 안쪽에 있답니다.”
위압적인 외모와 전혀 매치되지 않는 음성이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혹시 해란 님의 쌍둥이신가요?”
“어머! 그걸 어떻게? 아, 비욘드를 하시나 보네요. 언니는 안에 있어요. 안 그래도 누가 찾아올 거라고 하던데. 전 세란이라고 해요.”
현실에서 쓰는 이름인지 아니면 비욘드나 암거래에서 쓰는 이름인지 분간할 수 없지만 하룬도 인사하지 않을 순 없었다.
“하룬입니다.”
“반가워요. 일단 들어가세요. 언니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네.”
하룬은 다른 곳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달군 쇳덩어리에 전념하는 두 사람을 지나 안쪽으로 향했다.
“호옷!”
내부로 들어선 하룬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내부의 선반에는 검, 도, 창, 도끼, 비수 같은 무기들이 시퍼런 예기를 뿜어내며 놓여 있거나 혹은 벽에 걸려 있었다.
이런 모습을 현실에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않았기에 마치 비욘드에 접속한 것처럼 너무나 반갑고 신기했다.
“뭘 찾으세요, 손님?”
거래를 위한 용도인 듯 긴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가운데 부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한쪽 구석에 큰 책상 하나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누군가 고개를 들었다.
“혹시 해란 님?”
역시 2미터가 훨씬 넘는 큰 키를 가진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입구에서 본 세란과 달리 크고 맑은 둥근 눈과 오뚝한 콧날, 작고 붉은 입술을 가졌고, 날씬한 8등신의 몸매를 가지고 있었기에 하룬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비록 날카로운 눈빛을 가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지혜로운 인상이었을 뿐 아니라 쌍둥이인 세란과는 전혀 이질적인 외모였다.
“하룬 님이군요?”
“네, 맞습니다.”
“호호, 그렇게 이상한 표정 지을 것 없어요. 세란과 날 차례로 본 사람들은 으레 그런 표정을 하니까. 쌍둥이라는 말에 선입견을 가지고 보면 당연한 반응이지요.”
그녀는 하룬이 왜 놀랐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아마도 익숙한 일인 듯했다.
“일단 앉으세요. 차 한 잔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물건들이 참 좋네요.”
하룬이 전시된 무기들을 보며 의례적인 말으 꺼냈다.
“그렇죠? 우리 오빠들이 실력은 무척 좋은 편이지요.”
“네.”
하룬은 잠시 그녀에게서 눈을 떼고 사방의 무기들을 홀린 듯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떠오른 열기를 느꼈는지 찻잔을 내려놓던 해란의 얼굴에 미소가 어린다.
“전사인가 봐요?”
“네, 아니 그건 아니지만…….”
“전 마법사예요. 세란은 전사고.”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의 인상이란 어디 가는 것이 아니니까.
“마침 쓸 만한 마나석이 필요하던 참이었어요. 이제 겨우 2서클의 끝자락에 도달했거든요.”
“그렇군요. 벌써 2서클을 마스터하다니 대단하네요.”
사실 대단한지 어쩐지는 몰랐다. 의례적인 말이었을 뿐이다.
“별로요. 이제 겨우 레벨 33인걸요. 누구는 벌써 마나석을 가진 보스 몹까지 잡을 정도인데……. 어떤 몬스터를 잡았기에 이런 아이템이 나왔나요?”
“재수가 좋았습니다. 오크 워리어를 잡았거든요.”
“어머! 정말 대단해요. 그 엄청난 놈을 잡다니. 상당한 고렙인가 봐요?”
그녀가 자신을 랭커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굳이 바로잡을 필요는 없었다.
“그건 아니고…….”
그녀와 대화하다 보니 신경 쓰이는 곳이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툭툭 털어놓는 것 같아도 그녀의 말투는 자연스럽게 상대가 자신의 정보를 말하게 만들었다. 하룬은 순간적으로 경계심이 생겼다.
“일단 거래를 하고 이야기를 더 나누지요?”
“흐음, 좋아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대화를 끊는 하룬의 태도에 묘한 눈빛으로 잠시 그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현금 700만 원이에요. 그 정도 비싼 물건을 거래하는데 우수리는 감해 주실 수 있겠지요, 하룬 님?”
“…….”
하룬의 얼굴이 굳었다. 돈이 얼마나 많은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그 우수리는 큰돈이었던 것이다.
“지금 가진 것이 그것뿐이라서 그래요. 뭐, 그 정도 실력을 가진 분이니까 그 정도는 받지 않아도 별로 부담될 거 같지는 않은데요?”
그녀의 말을 듣던 하룬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수수료로 10%인 82만 6천 원의 거금을 경매 사이트에 입금한 상태였기에 순간적으로 갈등했지만 이렇게 거래할 수는 없었다. 뭐, 거래가 항상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고, 판 가격에 비해 그 돈이 큰 것은 아니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아쉽네요. 좋은 거래를 할 수 있어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더니…….”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거래를 망친 것은 해란이니 그는 다시 경매에 올리면 되는 것이다. 사이트에 신고하면 상대방은 불량 사용자로 접속이 제한되거나 거래에 불이익을 받을 것이다. 그 후에 경매 시간을 더 길게 하면 이 정도 손해는 아마 벌충할 수 있으리라.
아직 물건도 넘기지 않은 상태고 여기까지 온 것도 이제껏 모르고 살았던 곳을 구경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더구나 메신저 워킹 스킬을 현실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오늘 외출은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첫 만남부터 신뢰할 수 없는 상대와 더 이상 대화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잠깐만요.”
막 사무실을 나서려던 하룬은 발을 멈추었다.
“정말 융통성이 없는 분이네요. 숙녀가 이렇게 부탁하면 들어주는 것이 신사의 예의 아닌가요?”
그 말에 하룬이 픽 웃었다.
“난 신사가 아닙니다.”
그의 말에 해란의 얼굴이 샐쭉해진다. 8등신의 미녀인 자신 앞에서 스스로 신사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내는 아직 보지 못했던 탓이다.
“좋아요. 이 정도로 하죠. 어차피 드러내 놓고 거래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까칠하군요. 보통 이 정도 하면 다들 양보하던데 오늘은 정말 독한 상대를 만났네요.”
하룬은 그녀의 말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독하다? 난 거래하러 온 거지 내 성격이나 품평받으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닙니다. 분명히 합시다. 거래를 깬 것은 당신입니다.”
“흥! 어차피 암거래인데 너무 깐깐하게 굴 건 없잖아. 사내가 되어 가지고…….”
해란은 대뜸 태도를 바꾸어 반말을 했다. 비록 미모도 아주 뛰어나고 마법사를 선택한 것으로 보아 머리도 있어 보였지만 성깔은 영 기본도 안 된 여자였다.
이제 거래가 깨졌다 생각하고 막나가기 시작하는 그녀의 말투는 반말은 물론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완연해지고 있었다.
울컥 뭔가가 속에서 치밀었지만 애써 참은 하룬은 그냥 나갈까도 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다른 식으로 거래를 유도해 보기로 했다.
“좋아, 거래하지. 하지만 차액에 해당하는 정보를 내게 줘.”
자신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기도 하거니와 이미 반말을 쓰기 시작한 그녀에게 존대를 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말을 트고 있었다.
“후후, 그건 마음에 드는군. 어떤 정보를 원해? 참고로 난 정보 상인도 겸하고 있어.”
순식간에 말투가 달라지는 그녀였다. 자신에게 유리할 것 같으면 음색부터 달라지는 모습이 영락없는 장사꾼의 그것이었다. 감정이 개입되지 않으면 편한 것은 하룬 쪽이었다. 혼자 살아오며 외로움을 많이 타는 그가 가장 약한 부분이 정이었으니 말이다.
“물건을 구하고 싶어. 일반적인 암거래 시세와 네가 구할 수 있는 시세를 알고 싶어.”
“그런 거라면 문제없지. 코원(KO-1) 유니온 암시장에서 내가 모르는 정보는 없거든.”
그녀는 그 정도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듯 돈다발을 내밀었다. 그것을 품속에 집어넣은 하룬은 미리 준비한 아이템 예치 일련번호를 적은 쪽지를 그녀에게 주었다.
“물론 비밀번호는 정보를 받은 후에 주겠지? 거래 하나는 확실한 친구네.”
툴툴거리면서도 쪽지를 받는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퍼졌다. 아마도 꼭 필요했던 물건일 것이다. 하룬은 그런 그녀에게 자신이 필요한 물품 리스트를 건네주었다.
“좋아, 금방 돌아오지.”
해란은 바람을 일으키며 밖으로 나갔다. 아마도 빨리 거래를 마무리 짓고 비욘드로 들어가 마법 실험을 하려는 걸 것이다.
혼자 남은 하룬은 실내에 있는 무기들을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았다.
수도 없이 접어 치기를 한 때문인지 무기에는 소용돌이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 예기는 거리가 있는데도 살을 베어 버릴 것처럼 날카로웠다. 하나 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까 작업실에서 보았던 대로 순수한 근력으로만 만들었을 테니 가격이 장난이 아닐 터였다.
“정말 마음에 드는 녀석들이군.”
“보는 눈이 있는 분이군요.”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뒤로 돌아보자 세란이라는 쌍둥이가 막 들어오고 있었다.
“생전의 할아버지 실력보다는 떨어지지만 그래도 우리 오빠들 실력은 코원 최고라고들 해요.”
“대단한 녀석들입니다. 보는 순간부터 사정없이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이 마치 잃었던 친인이라도 찾은 느낌입니다.”
“반했군요.”
“네, 솔직히 훔쳐서라도 가지고 싶은 녀석들입니다. 여기서 다마스커스 소용돌이를 볼 줄은 몰랐거든요.”
특유의 소용돌이 문양으로 보아 이전 인류의 제련법 중 역사상 가장 강도와 경도가 높고 탄성이 강해 총알을 가릴 수 있다고 알려진 다마스커스 접쇠 단조 방식으로 만든 녀석들이 분명했다.
하룬은 더 이상 그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매끈하게 빠진 단검과 비수를 뜨거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가장 자신 있고, 많이 사용한 것이 바로 이런 암기들이라 자연히 그쪽에 관심이 갔다.
“길이 15센티, 무게중심이 기가 막히게 잡혀 있고 강도와 경도는 최상, 그 날은 하르크의 가죽을 뚫을 정도로 날카롭죠.”
그녀는 하룬의 눈앞에 비수 한 자루를 들어 보였다.
해란과 거래하면서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비수를 받아 들고 잠시 손끝으로 부드럽게 음미하던 그는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얼마죠?”
“한 자루에 30만 원, 열 자루 한 세트에 250만 원이에요. 참 착한 가격이죠.”
‘빌어먹을!’
정말 참 착한 가격이다. 비수 열 자루 가격이 게임 캡슐 가격을 넘는다. 물론 암시장 시세로 말이다. 가격 비교를 할 수 없으니 비싼지 어쩐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세란의 인상은 제법 믿을 만했다.
“생각 좀 해 보죠.”
“그러세요.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녀석들을 더 이상 만들 수 없다는 것이에요. 이건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의 유작遺作이거든요. 몇 개 남지 않은…….”
생긴 것은 꼭 영락없는 전사인데 흥정하는 것을 보면 타고난 상인이었다. 쌍둥이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달라도 고객을 혹하게 만드는 것은 똑같았다.
그가 입맛을 다시며 다시금 비수를 쳐다보고 있을 때 해란이 돌아왔다.
“알아 왔어. 근데 이 물건들 상당히 구하기 어려운 것들이 포함되어 있던데. 약초 상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고가품도 있고.”
아마 그럴 것이다. 그중에는 산삼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그렇게 말하면서도 해란의 눈은 마치 애무하듯 부드럽고 다정하게 비수를 쓰다듬고 있는 하룬의 손길을 묘하게 바라보았다.
“여기 목록 옆에 시세를 꼼꼼하게 적어 왔으니 참고하면 될 거야. 그리고 석청하고 산삼은 시간을 주어야 구할 수 있대. 채집꾼들에게 주문을 넣어야 하니까 선금을 걸어야 한다고 하더라고.”
그녀의 말에 하룬의 눈빛이 묘하게 일렁였다.
‘구할 수 있단 말이지. 이미 이 세상에서는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귀한 약재들을 직접 채집한단 말이지. 그렇다면 이곳에 들어서면서 느낀 대로 배리어 밖에 사는 아우터들의 삶도 내가 아는 것과는 많이 다르겠군.’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제까지 살았던 세상의 틀이 깨어지고 있었다. 그가 알던 세상은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유니온의 학교와 사회 그리고 인터넷과 넷TV를 통해 알아 왔던 이 세상의 경계가 한순간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산삼 같은 약초는 연수에 비례해서 시세가 형성되고, 원하는 고객이 많을수록 그 가격이 올라가나 보더라고. 50년생 천종산삼의 경우 500~700만 원 사이이고, 100년생은 1,500~2,000만 원이 시세더라고. 생각 있으면 말해. 내가 구전 받지 않고 소개해 줄게.”
해란의 말을 들으면서 하룬은 머리가 뻥 뚫리며 시공간의 경계가 녹고 있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이제까지 알아왔던 이 세상에 대한 상식의 틀이 깨지는 순간 머릿속에서는 벼락이 치고, 신경계를 통해 헤아릴 수 없는 양의 전기신호들이 폭주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외계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모두 다 인지할 수 있으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이제까지 유니온에서 날 세뇌시켜 왔다는 거지. 후후후, 정말 우습다.’
갑자기 웃고 싶어졌다.
뭔가 내부 깊숙이에서 폭발하고 있었는데 그 기분이 참으로 시원했다. 소리 내어 웃고 싶었지만 입이 벌려지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얼굴에는 아주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매력이 진하게 묻어나는 멋진 미소였다.
해란과 세란 쌍둥이는 갑자기 터진 하룬의 미소에 머릿속이 환해지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그 미소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찔했다. 그리고 보는 사람까지도 가슴속을 시원하게 만드는 강렬한 끌림과 전염성을 가지고 있었다.
‘생긴 건 별로인데 미소 하나는 진짜네.’
‘제법 남자처럼 보이잖아.’
하지만 아쉽게도 하룬의 미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고 강한 호기심이 그 자리를 채웠다.
“저어…….”
사무실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마치 게임에서 바로 나온 듯 사슬로 만든 방어구와 검을 손에 쥔 전사 하나와 검정색 가죽 외투를 걸치고 모자를 깊게 눌러쓴 한 소녀였다.
해란은 그 소녀를 보더니 반색을 했다. 세란도 마찬가지였다.
“누구? 어머, 나인! 어서 와!”
“마침 있었네. 게임하느라고 오늘도 없는 줄 알았는데.”
소녀가 모자를 벗었다.
‘병이라도 앓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창백한 얼굴에 가녀린 분위기를 풍기는 소녀였지만 보기보다 나이는 먹었는지 해란과 말을 트고 손을 마주 흔들고 있었다.
“중요한 거래가 있어서 잠시 로그아웃했어.”
“그랬구나. 나도 물건들 좀 구입하려고 들어왔어.”
소녀의 말에 해란이 그녀의 손을 끌고 의자에 앉혔다. 이제 하룬은 완전히 뒷전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래, 부탁했던 철광석은 가져온 거야?”
“응. 밖에 대원들이 네 오빠들에게 인계하는 중이야. 너도 확인해야지?”
“오빠들이 알아서 하겠지. 우린 밀린 수다나 떨자. 아니, 무슨 물건들인지는 몰라도 내가 같이 가서 구해 줄게.”
“정보통인 네가 도와준다면 나야 좋지.”
하룬은 더 이상 자신이 있을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나가려고 했지만 해란이나 세란이 자신을 쳐다보질 않아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무기 진열대 앞에 서 있었다.
막 나인이라는 소녀가 생소한 하룬을 발견하고 해란에게 뭔가 이야기하려는 순간 밖에서 큰 소리가 났다.
꽝! 꽝!
쿠워어.
“하르크다!”
“도망쳐!”
엄청난 포효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급하게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뒤를 쫓아 나간 하룬의 눈에 대장간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하르크 한 마리가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이 보였다.
“제기랄. 우리 뒤를 쫓아왔어. 분명 비밀 통로를 막았는데…….”
하르크를 보며 분해하는 전사의 말에 하룬은 이들이 배리어 밖에서 비밀 통로를 통해 유니온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키가 3미터에 달하는 하르크는 전신이 반질거리는 매끈한 피부를 가진 인간형 변종 생물이다. 단단한 근육질의 몸매에 길이가 5센티가 넘는 손톱과 발톱은 웬만한 시멘트 정도는 한 방에 부스러뜨릴 수 있으며, 마치 톱니처럼 생긴 이빨들은 인간의 육체를 가볍게 자를 수 있었다.
놈은 이곳 대장간의 일꾼으로 보이는 한 젊은이의 허리를 부러뜨리고는 그 시체를 한쪽으로 던져 버렸다. 동물들과는 달리 먹기 위해서 살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살기를 억제하지 못하고 살육을 저지르는 하르크였다.
“이쪽으로 오고 있어. 해란, 들어가서 셔터 내려!”
작업실 한쪽에 모여 있던 사람들 중 해란의 오빠로 추정되는 사람이 여자들에게 소리치며 엄청난 크기의 대검을 쥐고 앞으로 나섰다.
“저놈, 우리에게 발톱 두 개를 잘린 놈이야. 우리의 냄새를 추적해 왔나 봐!”
나인이 작은 주먹을 꽉 쥐고 분노에 떨고 있었다. 첫인상은 무척 어렸지만 목소리는 강한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놈에게 친구 셋이 죽고 둘이 중상을 입었어. 희생이 나더라도 여기서 처리해야 해. 이곳은 좁은 공간이니까 놈의 행동반경도 제한을 받을 거야. 오승아, 전투 준비해!”
“알았어! 전투준비!”
같이 사무실로 들어왔던 오승이라는 전사의 고함에 같이 왔을 네 명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고 나섰다.
“안 돼! 피해야 해. 지금이면 수비군이 출동했을 테니까 5분만 피하면 된다고. 강철로 만든 셔터 문이라면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어.”
해란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나인은 사무실로 들어갈 생각은 없는 듯했다.
웨엥! 웨엥! 웨엥!
아주 오래 전에 사용하던 경보음이 지하도에 울리기 시작하고, 가게마다 셔터를 내리기 시작했다. 신속하게 침입 경보가 울리고 강철로 만든 셔터를 내리는 것을 보면 가끔 이렇게 하르크가 이곳 암시장에도 침입하는 것 같았다.
“늦었어. 내 친구들과 네 오빠들이 위험해! 차라리 함께 싸우는 게 나아.”
나인의 말대로 하르크는 흉흉한 기세를 흘리며 무기들을 든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검이며 도를 든 숫자가 여섯이나 되는 터라 놈도 신중했다.
“설사 살아남아도 너희는 수비군에 걸리면 무단 침입죄로 몇 년 동안 감옥에 가게 될 거라고.”
“상관없어. 저놈이 잡아먹은 우리 마을 사람들이 벌써 열이 넘어. 수비군이 올 때까지 저놈을 붙들어 두어야 해.”
나인의 의지는 단호했다. 그녀의 눈은 닿으면 활활 타오를 증오의 화염으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꽈앙!
“끄으윽!”
“커억!”
하지만 상황은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무척이나 위험했다. 하르크에게 달려든 두 전사가 한 번의 충돌로 멀리 튕겨 나가 벽에 부딪치고 만 것이다.
“죽어!”
“개새끼!”
남은 네 명은 무기를 놓칠 정도로 강력한 충격과 벽에 부딪친 2차 충격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시뻘건 핏물이 가득한 입을 벌리고 접근하는 하르크에게 달려들었다.
꽈앙! 꽝!
하르크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듯 강력한 위력을 가진 손톱을 휘둘러 사람들의 합공을 받았다.
“커억!”
“흑! 소용없어. 놈의 가죽이 너무 질겨!”
두 명이 다시 비명을 지르며 멀리 튕겨 나갔다. 다행히 하르크의 몸에 칼질을 할 수 있었던 해란의 오빠들은 황당한 얼굴로 망연자실하게 서 있다가 하르크의 팔에 얻어맞을 뻔하고는 황급히 뒤로 빠졌다.
“무식한!”
정말 한심했다. 저런 무지막지한 놈을 상대로 저렇게 정면공격을 하는 바보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대검이 두 번이나 하르크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지만 놈의 피부는 가느다란 줄만이 나 있을 뿐이었다.
꾸어억!
하르크는 그 상처에 분노했는지 머리를 쳐들고 소리를 질렀다.
“안 되겠어. 오빠가 막아!”
“알았다.”
나인의 말에 곁에 서 있던 전사가 반월형 도를 등 뒤에서 빼 들고 하르크에게 달려들었다.
상처를 입은 하르크는 흉광을 토해 내며 긴 두 팔을 휘둘렀다. 거대한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빠르기였기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전사는 하르크의 공격을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빠른 발과 몸놀림으로 빈틈을 노리는 전사의 반월형 도는 하르크의 성질을 돋우고 있었다.
해란의 두 오빠들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들 역시 전사가 몰리기라도 하면 주저 없이 하르크의 옆구리며 등을 대검으로 공격했다. 그들의 몸놀림도 오랫동안 운동을 했는지 상당히 가벼웠다.
하지만 하르크의 괴력을 치고 빠지는 것만으로 감당하기는 힘들었다. 놈은 영악하게도 쓰러져 아직도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사람을 향하며 세 사람이 무리한 공격을 하게끔 유도하고 있었다.
“저, 저걸…….”
“어떡해!”
안타까운 소리를 내고 있던 세란이 급기야 문가에 전시된 대검 한 자루를 들고 공격에 합류했다. 이대로라면 수비군이 오기도 전에 네 사람은 모두 하르크에게 갈가리 찢기고 말 것이다.
“세란! 위험해!”
해란이 발을 동동 굴렀지만 이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 순간 하룬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안 떨린다. 저게 날 그렇게 괴롭히던 하르크란 말이지.’
비욘드에서 몬스터들을 많이 상대해서 그런지 아니면 자신의 몸 상태가 좋아져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다. 어쨌든 상상만으로도 잠을 잘 수 없었던 공포의 대상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그는 두렵지 않았다.
하룬은 사무실로 들어가서 강철검 한 자루와 아까 세란으로부터 구입 권유를 받았던 비수 세트를 들고 나왔다. ㅏ지만 지하도의 공간이 너무 좁아 자신까지 검을 들고 공격을 하는 것은 비효율적이었다.
‘놈도 약점은 있겠지?’
그곳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일반적인 약점은 알고 있다. 드러난 곳 중에는 입과 귀 그리고 눈이었다. 다른 곳은 알 필요도 없었다.
하룬이 비수를 꺼내어 손에 잡은 순간이었다. 하르크의 등을 향해 검을 휘두르던 세란이 갑자기 두 발로 벽을 걷어차고 유연하게 몸을 회전한 하르크의 정면에 놓이게 되었다.
비록 그녀의 검이 하르크의 정강이 어름을 베고 지나갔지만 대신 그녀의 몸은 하르크의 긴 팔의 궤적 안에 들어가 버렸다. 황급히 뒷걸음질을 치는 세란이었지만 이미 늦어 하르크의 강철만큼 강하고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아악!”
보고 있던 해란과 나인이 비명을 질렀다. 바로 그 순간 하룬의 눈에 하르크가 입을 벌리는 것이 들어왔다.
쉭! 쉭! 쉭!
비수 세 자루가 날았다.
“뭐, 뭐야?”
눈을 감은 해란과는 달리 눈을 부릅뜨고 있었던 나인은 자신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비수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비수가 절묘하게 세란의 어깨 위를 지나 막 입을 벌리고 있고 있는 하르크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마치 그림을 보듯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끄윽! 끄윽!
막 세란의 머리통을 손톱으로 박살 내려던 하르크의 몸이 이상한 신음과 함께 휘청거렸다. 놈은 얼굴의 반 이상이나 차지할 정도로 쩍 벌린 입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며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세란! 빨리 뒤로!”
나인의 고함에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린 세란이 정신없이 뒷걸음치는 사이 다시 하룬의 손에서 비수 두 자루가 연속으로 날아갔다.
쉭! 쉭!
퍼억! 퍼억!
두 손으로 자신의 입 주위를 만지던 하르크의 두 눈에 비수가 박히며 눈알을 터뜨려 버렸다. 놈을 참을 수 없는 통증에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연한 입안 살 깊숙이 박힌 세 자루의 비수 때문에 그마저도 할 수가 없자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입과 두 눈 주변에 피를 철철 흘리며 발광을 하는 하르크의 모습을 보고 그제야 상황을 짐작한 사람들이 하룬을 놀란 눈길로 일제히 바라보았다.
“당신이?”
“하룬!”
하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팔을 풀로 스윙했다. 넘의 가죽이 얼마나 질긴지 몰랐기에 눈에 들어온 놈의 심장 부위로 있는 힘을 다 실어 비수를 던진 것이다.
크허억! 끄르르.
하룬이 던진 비수가 심장에 박히자 하르크는 더 이상 발광하지 못하고 기괴한 신음을 토해 내며 스르르 바닥으로 쓰러졌다.
“비수, 겨우 비수로 하르크의 가죽을 뚫었어!”
나인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해란은 마치 괴물이라도 보는 양 이상한 눈길로 하룬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세란과 하르크를 상대하던 세 사람이 홀린 듯 하르크가 죽어 가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들의 눈은 못 볼 것을 본 듯 하르크와 하룬을 번갈아 가며 향하고 있었다.
웨엥! 웨엥!
지하도에 다시 경보음이 울렸다. 그 소리에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바로 나인이었다. 경보음이 수비군의 출동을 알리는 것을 짐작한 그녀는 급하게 해란에게 소리쳤다.
“빨리 사람들을 사무실로 옮겨야 해.”
해란도 그녀의 말을 금방 알아들었다.
“오빠, 세란! 빨리 부상자들을 옮겨. 빨리!”
방금까지 살벌한 싸움을 한 사람들이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고 부상자들을 옮겼다. 힘들은 장사라서 금방 부상자들은 사무실로 옮겨졌다.
하룬은 말없이 하르크의 입과 눈 그리고 심장 깊숙이 박힌 비수를 뺐다.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지만 그 정도를 피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사무실로 들어오고 강철로 만든 셔터가 내려진 후 방호복과 방패 그리고 빔소드를 착용한 수비군들이 대거 출동했다.
오십 명도 넘게 출동한 수비군 중에는 변종 생물들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인 화염방사기를 든 군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본 것은 유혈이 낭자한 싸움터와 하르크와 한 인간의 시체밖에는 없었다.
강철로 만들어진 셔터를 통해 밖의 정황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대장님, 수색을 해 봤지만 아무도 없습니다.”
“흠. 누구지? 누가 하르크의 심장을 찔러 죽인 거지?”
“상처로 보아 하르크는 단검 종류에 급소 여럿이 찔려 죽은 듯합니다. 그 주인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요.”
“빔소드로도 제대로 베이지 않는 하르크를 겨우 단검으로 죽였다고?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마. 일단 사체를 치우고 다시 주변을 정밀하게 수색한다. 분명히 이 하르크는 이 지하도와 연결된 비밀 통로를 통해 밖에서 들어왔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한동안 수비군들의 소음이 들렸지만 그들은 결국 1시간 만에 아무런 소득도 없이 철수하고 말았다. 수비군들이 강철로 만들어진 셔터를 내린 대장간들을 두드려 보았지만 어떤 가게도 문을 열지 않았다.
밖의 정황을 짐작할 길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 소리까지 막을 정도로 단단하게 밀폐된 안쪽에서는 오히려 더 두려움에 빠지기만 했던 것이다.
사무실로 옮겨 온 부상자들은 다행히 큰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다만 충격의 여파로 장기가 흔들리고 정신을 잃었을 뿐이다.
환자들의 치료가 일단락된 후 사람들의 관심은 무심한 표정으로 비수에 묻은 피를 닦아 낸 후에도 홀린 눈길로 비수를 쳐다보는 하룬에게 향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어두운 실내를 잠식했다. 결국 해란이 입을 열었다.
“하룬!”
하룬은 해란의 부름에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 누구예요?”
그녀의 말에 하룬이 씩 웃었다. 그녀가 묻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것도 같았지만 이제까지 너무나 비루한 삶을 살아온 하룬이 대답할 내용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모습이 대답하기 싫어하는 것으로 보였는지 이번에는 나인과 그녀가 오빠라고 불렀던 전사가 나섰다.
“나인이라고 해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하룬이라고 하셨지요?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로수라고 한다. 나 역시 전사의 혼을 걸고 그대의 은혜에 반드시 보답할 것을 약속한다.”
“하룬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만들어 준 틈을 노렸는데 요행히 급소에 맞은 것에 불과하니 그렇게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아도 됩니다.”
사실 게임 속에서 익혔던 암기술이 통할 거라고는 그도 생각하지 못했다. 상황이 워낙 다급해서 자신도 모르게 던졌던 것이다.
메신저 워킹 스킬도 그렇게 자신이 가장 공을 들여 수련했던 암기술도 현실에서까지 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마지막에 비수를 날릴 때에는 몸에서 뭔가가 비수와 함께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던 하룬이라 그 현상이 무엇일지 숙고하던 참이라 사람들의 관심이 그렇게 반갑지는 않았다.
그의 담담한 태도에 나인과 로수는 서로의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으로 뭔가를 의논한 것 같았다. 과연 나인이 목에서 무엇인가를 풀어 하룬에게 내밀었다.
“감사의 보답입니다.”
“그런 것은 필요 없습니다. 당신들의 눈빛만으로 충분합니다.”
하룬은 고개를 저었지만 손을 거두지 않고 있는 가녀린 인상의 나인의 눈에서는 맑고 강렬한 빛이 나왔다. 하룬은 그녀의 눈을 통해 비록 몸은 약하지만 강인한 정신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느끼고는 할 수 없이 그녀의 손에서 물건을 잡았다.
“우린 배리어 밖 영흥마을에 삽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들르세요. 그 목걸이는 우리 마을 전사를 상징하는 물건이니 아무에게나 보이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하룬은 비록 줄은 금박이 벗겨져 나갔지만 다섯 개의 어금니 뼈가 별 모양으로 이어진 팬던트를 가진 목걸이를 그 자리에서 목에 걸었다. 그게 준 사람의 성의를 제대로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인과 로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여유가 되면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우리 마을을 꼭 방문해 주세요.”
하룬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뭔가 간절한 감정을 감지할 수 있었다. 비록 웃고 있는 얼굴이나 눈빛은 그런 감정을 담고 있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절절한 마음이 들어 있었다.
그녀의 맑고 큰 눈과 가녀린 용모가 마음을 자극했다.
‘어차피 근간에 양아버지를 도와준 아우터들을 찾아봐야 하니 그때 이들을 만나 보자.’
설마 은인을 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배리어 밖을 나갈 계획을 가졌는데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요. 마침 구할 것도 있고 들를 곳도 있었으니 되도록 빨리 방문하도록 하지요. 어쩌면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니.”
“하룬 님이 온다면 언제나 환영이에요.”
그때 경계음이 지하도에 울려 퍼졌다. 추측건대 위험 요소가 사라졌다는 신호로 생각되었다.
“오빠들, 이제 상황 끝이에요.”
해란의 말에 셔터가 열리자 나인과 로수는 겨우 정신을 차린 네 동료를 데리고 신속하게 대장간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어둠에 잠겨 있는 지하도의 끝이었다. 그곳 어딘가에 비밀 통로의 입구가 있을 것이다.
하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거래도 끝났고 나름 중요한 정보들을 알아낸 뜻깊은 외출이었다.
“잠깐만, 여기!”
밖으로 나가는 하룬은 해란의 손에 들린 비수 세트를 보고 놀랐다.
“고마워. 하마터면 오빠들은 물론 우리까지 하르크에게 죽을 뻔했어.”
해란의 말과 함께 세란과 두 사내도 감사를 전했다. 아까는 나인 일행 때문에 제대로 고마움도 전하지 못한 것이다.
“다친 사람이 없으니 그걸로 된 거지. 다음에도 좋은 거래나 부탁해.”
“후훗! 걱정 마. 네게는 절대 이윤을 챙기지 않을 테니. 그리고 이 비수는 선물이야.”
“선물?”
그 말에 해란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네 물건인 것 같아. 한번 피를 먹었으니 다시 팔기는 힘드니까 말이야. 그 물건으로 그 흉악한 하르크 놈들이나 많이 죽였으면 좋겠어.”
하룬은 사양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묘하게 자신을 끌어당기던 녀석들이다.
“고마워! 그럼 다음에 보지.”
하룬은 네 사람의 눈길을 뒤로하고 언제 혼란이 일어났냐는 듯 활기를 찾아 가는 암시장을 천천히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