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퀘스트 완수 (22/278)

《퀘스트 완수》

 데브론과 하룬이 합류하자 도란이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프를 끓일 상황도 분위기도 아니어서 일행은 몇 개 남지 않은 빵과 물로 저녁 식사를 해결해야만 했다.

 식사를 하면서도 데브론은 아까와 달리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데브론을 보는 도란과 홀의 얼굴은 무척이나 심각했다.

 하룬은 데브론이 어떤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전직했다는 것과 새로 배운 스킬들에 정신이 홀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 보니 모든 사람들이 무거운 침묵 속에서 힘겹게 빵을 뜯어 먹는 것이 보였다. 재수 4인방도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 역시 죽음의 위기를 겪은 터라 긴장하고 있었다. 한데 심각한 표정들의 사람들 가운데 데브론의 편해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생각이 있는 건가?”

 데브론에게 무슨 생각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들이 쫙 깔린 산 아래의 정황을 내려다보니 답답하기만 했다.

 ‘무슨 수로 저렇게 엄중한 방어벽을 뚫고 강을 건넌담. 휴우, D급 퀘스트답구나.’

 하룬은 그 생각을 하는 순간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한숨 소리가 컸는지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보았다.

 “대장,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오른 거지? 그렇지, 응?”

 저 쓸데없는 트러블 메이커 시린느가 또 일을 벌여 놓았다. 당장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에휴, 이런!’

 일행의 시선이 집중되자 금세 머리로 피가 쏠리며 얼굴이 붉게 변했다. 안 그래도 심각한 분위기인데 여태 딴 생각을 하다가 사기를 떨어뜨리는 짓을 했다고 질책하듯 느껴져 부끄러웠다.

 “마나 포션이 충분하다면 써 볼 만한 방법이 있긴 한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그 순간에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말을 꺼내고 나니 자연스럽게 그 점이 안타까웠다.

 “그럼 가능한 방법이라도 있단 말인가?”

 데브론의 얼굴에 순간 묘한 긴장감과 기대가 어리기 시작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표정이 눈에 띄게 변했다.

 “어쩌면요.”

 그 순간 하룬은 싸가지의 존재를 떠올렸다. 녀석의 독 중에는 수면이나 정신을 잃게 만드는 효과를 지닌 게 있을 것이다. 오만 가지 오염 물질을 긴긴 세월 동안 흡수한 녀석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싸가지를 소환해서 길을 뚫으려면 엄청난 마나가 필요한데 지금 그의 마나량으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사론 습지를 지날 때는 싸가지가 자신의 힘으로 독을 흡수했기 때문에 소환에 필요한 마나만 있으면 되었지만 지금 떠오른 생각대로 하자면 그 이상의 마나와 정령력이 필요할 것이다.

 “들어 보지.”

 그렇게 말한 데브론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하룬을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제게 강력한 수면 효능을 지닌 약이 있습니다. 또한 정령의 힘을 이용해서 그 약을 일정 범위에 살포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들키지 않고 움직일 정도로 살포하기 위해서는 정령력은 물론 마나가 많이 필요합니다. 다행히 정령력은 충분한 상태이니 만약 마나 포션만 충분하다면 어둠을 뚫고 강안까지 은밀히 이동해서 수영을 하거나 뗏목을 이용해서 도강하는 것이 가능할 겁니다.”

 데브론의 눈이 강하게 빛나면서 빠르게 번뜩였다. 제대로 의사소통도 되지 않는 정령을 이용해서 수면약을 살포한다는 계획은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당사자가 이해 불가능한 정령력을 가진 하룬이라면 달랐다.

 “홀, 마나 포션을 모두 꺼내 봐라.”

 “네.”

 홀은 미심쩍어 하는 표정이었지만 신속하게 배낭을 뒤져 마나 포션을 모두 꺼냈다.

 “모두 열두 개입니다.”

 마나 포션은 홀의 두 손바닥을 가득 채웠다. 중급이 일곱 병이고 하급이 다섯 병이었다.

 “이 정도면 어떤가?”

 “잠깐만요.”

 하룬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저들의 움직임으로 보아 아직 산 아래까지는 특별한 방비 없이 움직여도 된다. 산 아래에서 가장 짧은 동선을 선택하면 강까지는? 이런 경험이 없어 작게 보이는 그 동선의 실제 거리를 모르겠다.

 “티노, 저 아래의 바위에서 강까지 일직선으로 거리가 대충 얼마나 될까요?”

 뜬금없지만 하룬의 질문에서 굉장한 중요성을 감지한 티노가 아래를 자세히 내려다보았다.

 “자신할 수는 없지만 대충 천오백 보에서 천육백 보 정도는 될 겁니다.”

 사실 그 정도를 알아낸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따. 하룬은 여기까지 동행하면서 그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럼 저들의 간격은요?”

 하룬은 거리를 두고 조를 이루어 주변을 순찰하는 병사들을 가리켰다.

 “거의 백 보 간격입니다. 체스 판처럼 서로 백 보 정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미리 그것까지 확인했는지 티노의 대답은 거침없었다.

 싸가지를 소환하고 마음먹은 대로 수면 효과가 있는 독을 퍼트리려면 1초당 30~50의 마나량이 필요할 걸로 예측된다. 정령 합체술에 필요한 마나량이 초당 50이다. 이제 400대 후반의 마나량으로는 최소한 9초를 간신히 견딜 수 있을 뿐이었다.

 ‘아니지, 나 전직했지.’

 이제야 그 생각이 들었다. 하룬은 급하게 상태 창을 열어 보았다.

『이름: 하룬

종족: 인간

직업: 검사

레벨: 10

칭호: 용병대장(외 4개)

생명력: 1,310

마나: 1,340

정령력: 410

힘: 49(+15)      체력: 40

지식: 23         지혜: 42

행운: 28         민첩: 35(+12)

지구력: 14       심안: 10

집중: 18         S.P.: 3

명성: 600        통솔력: 350

화염 저항력: +10%

마법 저항력: +10%』

 절로 입이 벌어졌다. 모든 수치가 상승한 상태 창을 보는 것은 유저로서 정말 행복한 일 중 하나였다. 더구나 하룬의 경우는 그 모든 것이 몸으로 직접 부딪쳐 이룬 것이니 감회가 남달랐다.

 전직한 뒤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생명력과 마나가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는 것이다. 물론 S.P.의 경우는 전직과 스킬을 익히느라 80포인트가 없어졌지만 앞으로 부지런히 다시 쌓으면 된다.

 ‘그렇다면 대충 20초 정도 소환했다가 쉬었다가 가는 수밖에 없는데 녀석의 독 살포 반경이 어느 정도나 될까?’

 해 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중급 마나 포션도 이십 개가 넘으니 될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녀석의 살포 반경이 오십 보가 넘는다면 가능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실패할 것이다.

 “확률은 반반입니다.”

 하룬이 미안해하는 얼굴로, 기대하는 일행에게 말했다. 내심 성공 가능성이 컸지만 설레발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절반의 확률이라는 말에 도란의 얼굴에 희색이 어렸다.

 “데브론 님, 그럼 이걸로 하죠.”

 “그래야겠군.”

 안도의 한숨을 쉬는 도란과 결연한 데브론의 태도를 보니 아마 두 사람이 의논했던 제 3의 방안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하룬이 말한 것이 확률이 훨씬 더 높은 것 같았다.

 “홀, 포션을 하룬에게 모두 넘겨주어라.”

 “저, 전부 말인가요?”

 “그래.”

 마법사인 홀은 아까운 듯 주저했지만 데브론의 말은 단호했다. 일단 결정이 내려지면 무슨 길이든 뚫고 나가는 강인하 ㄴ기세가 물씬 풍기는 그의 말을 홀은 거역하지 못했다.

 “지금부터 하룬의 말을 경청하고 반드시 그대로 시행하도록. 여기까지 오는 길에도 그가 우리를 구했지만 이번에도 그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브리엘라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어둠으로 덮인 산을 조심스럽게 내려온 하룬 일행은 한창 모닥불을 피워 놓고 순서대로 식사하는 병사들이 포진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보니 마치 체스 판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 피어 있는 모닥불들의 모습이 장관이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하룬은 가벼운 동작으로 숨어 있던 바위 옆으로 움직였다.

 몸을 낮추고 이십 보를 움직인 그는 해독약을 미리 먹고는 싸가지를 소환했다.

 “들었지?”

 “그럼. 내 능력이 간절하게 필요하다 이거잖아.”

 또 자만심이 하늘로 치솟는 싸가지의 말에 하룬의 주먹이 위로 올라갔다. 어둠이 그의 행동을 가려 주고 있어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아주 괴팍하게 정령을 다룬다는 말을 들을 뻔했다.

 “알았으면 후딱 움직여.”

 “알았어.”

 싸가지가 윈드 마법으로 소리 없이 수면 물질을 사방으로 살포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스물을 센 후에 싸가지의 소환을 해제했다.

 ‘어디 세어 볼까?’

 하룬은 혹시 몰라 몸을 낮춘 상태에서 보폭을 유지하며 앞을 향해 움직였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하룬에게 받은 해독약을 미리 복용한 일행도 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그 뒤를 따랐다.

 하룬이 걸음을 멈춘 것은 정확하게 이백이십 보를 간 후였다. 백 보 간격으로 경계를 서고 있던 사방의 병사들은 이미 잠에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호오, 생각보다 살포 반경이 넓구나. 그럼 마나 포션이 많이 남겠네.’

 하급 마나 포션을 하나 마신 하룬은 마나가 가득 찬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싸가지를 소환했다.

 “자, 가자.”

 “아주 신 났군. 고생은 내가 하는데 주인이 왜 기분을 내는데?”

 역시나 일 좀 했다고 그새 주인을 대하는 말투가 건방지게 변했다. 하지만 큰일을 하는데 굳이 건드릴 것은 없다는 생각에 쥐었던 주먹을 슬며시 푸는 하룬이었다.

 하룬이 강둑에 도착한 것은 두 알의 해독약과 일곱 병의 하급 마나 포션을 소비한 후였다. 생각보다 싸가지의 수면독 살포 반경이 넓은 덕분이었다.

 “드디어 강까지 왔군.”

 강둑에 배를 깔고 있는 하룬의 옆으로 일행이 차례대로 도착했다. 데브론과 도란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놀람과 고마움을 표시했다.

 “우리 대장 정말 놀라운 재주가 있단 말이야.”

 “호호호, 그럼 이 시린느가 별 볼일 없는 대장이 아니라면 시답지 않은 일을 하며 돌풍 용병대에 있겠니?”

 지탄과 시린느가 잡담하자 홀이 그들을 제지했다.

 “쉿! 아직 위험한 구역이야.”

 그녀의 말에 두 사람은 인상을 찡그리면서 입을 다물었다. 웃고 떠들 때가 아니라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이젠 어떻게 하죠? 강변에도 보초가 있는데…….”

 강변에 배치된 보초의 존재를 생각하지 못한 도란의 말에 데브론이 씩 웃었다.

 “그건 우리 세 사람이 처리할 테니 자네와 돌풍 용병대 친구들은 티노와 함께 빨리 똇목을 준비하게.”

 고개를 끄덕인 도란이 어깨에 지고 온 통나무 판자를 엮을 준비를 했다. 필립과 지탄도 지고 온 통나무를 내려놓았다.

 역시 손이 빠르고 재간이 많은 티노가 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능숙한 솜씨로 통나무를 연결했다. 그러고는 옆으로 네 조각으로 잘라 만든 판자를 오크의 힘줄로 꼬아 만든 줄로 얽어매기 시작했다.

 데브론과 홀은 위아래로 갈라져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적어도 두 지점을 지켜보는 보초를 처리해야 했다. 하룬은 배를 땅에 깔고 강둑을 마치 뱀처럼 미끄러져 내려갔다.

 모닥불은 삼십 보 간격으로 피워져 있었고, 불과 불 사이를 두 명의 보초가 교차하며 강변을 지키고 있었다.

 어차피 높은 다리 위에도 지키는 사람이 있을 테니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최대한 빨리 긴 동선의 보초를 해치우고 저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뗏목을 강에 띄워야 했다.

 하룬은 비수를 꺼냈다가 이내 다시 집어넣었다. 이전에 기사들을 죽이기는 했지만 힘없는 병사를 죽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죽이지 않으려면 다시 수면약을 사용하면 된다. 싸가지를 소환했다.

 “싸가지, 한 번만 더 가자.”

 “어지간히 귀찮게 하네. 에잇!”

 하룬은 녀석의 싸가지없는 태도에 이를 갈았다. 에센셜 정령이라서 그런지 다른 정령과 달리 그와는 물리적인 힘이 통해서 맞을 때 아파하기는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놈의 약점을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털썩! 털썩!

 그의 정면을 중심으로 해서 양옆으로 일곱 개의 모닥불을 오가던 보초들이 작은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싸가지의 수면물질이 여지없이 그들을 깊은 잠에 빠지게 만든 것이다.

 “갑시다.”

 그의 말과 함께 시린느와 라트리나가 브리엘라와 두 아이를 데리고 강물을 향해 뛰어 내려갔다. 그 뒤를 따라 조잡하지만 제법 넓은 뗏목을 들쳐 멘 네 사람이 빠르게 뛰었다.

 “누구냐?”

 “누군가 도강하려고 한다!”

 벌써 이웃한 보초들이 쓰러진 것이 발각되었는지 다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백 보 이상 떨어진 곳에서 강물을 향해 질주하는 홀과 데브론의 모습이 보였다.

 하룬은 할 일이 더 있었다. 도란과 티노가 뗏목을 강에 띄우고 아이들과 브리엘라를 태우는 것을 확인한 순간 다시 싸가지를 소환했다.

 “모닥불을 가능한 한 많이 꺼 줘.”

 “에이, 씨.”

 이번에는 알았다는 말도 없이 싸가지가 움직였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울컥하는 것이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으로써는 인상만 긁을 수밖에 없는 하룬이었다.

 불과 몇 초도 안 됐는데 마나가 떨어지는 느낌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몸 상태가 급격하게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황급히 소환을 해제한 하룬은 해독약과 마나 포션을 마셨다.

 “살 것 같네. 이번에는 잘못하면 죽을 뻔했더.”

 강둑에 도착해서 마나 포션을 마셔 두었어야 하는데 그걸 잊어버리고 있었다. 마나가 그다지 많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싸가지를 소환한 것 때문에 순간적으로 온몸에 힘이 빠졌던 것이다.

 하룬이 강을 향해 뛰어갈 때는 이미 상당히 긴 강변이 어둠 속에 잠겨 버렸다. 그 짧은 시간에도 싸가지가 꺼 버린 모닥불의 숫자는 여섯 개였던 것이다. 그만큼의 공간이 어둠에 잠기자 다리 위에서 강을 경계하던 한 기사가 작은 종울 부서져라 두드리기 시작했다.

 땡땡땡땡!

 “무슨 일이야?”

 “적이 나타났다!”

 “어디야?”

 “보초가 쓰러져 있다!”

 “적이다!”

 사방에서 고함과 함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미 하룬을 비롯한 일행은 강물 속에 몸을 던진 상태였다.

 양의 위장으로 만든 물통에 공기를 가득 채운 것을 두 손으로 잡고 헤엄쳐 가던 하룬은 금방 뗏목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보다 먼저 물로 뛰어든 홀과 데브론 역시 뗏목 근처에 와 있었다.

 “하하하, 성공이다!”

 “멋졌습니다!”

 “호호호, 저 녀석들 완전히 닭 쫓던 개 꼴이 됐네요.”

 한 손으로 물을 가르며 다른 손으로 뗏목을 미는 일행은 더 이상 소리를 낮추지 않고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드디어 자작령에 도착하는군요.”

 네 귀퉁이를 비롯해 공기를 가득 채운 물통 열두 개를 매단 뗏목을 밀면서 도란이 감개무량하다는 듯 말했다.

 “이게 다 하룬 덕분이야.”

 데브론이 하룬을 향해 엄지를 들어 보였다.

 “호호, 이번에도 우리 대장 끝내줬어.”

 라트리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이제 끝난 건가?’

 하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 할 때 그들의 위쪽 하늘에서 커다란 빛 덩이가 터졌다.

 “라이트? 누가 저렇게 큰 라이트를?”

 시린느의 놀란 소리에 주변을 둘러보니 다리 위와 강둑에 어느새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었다.

 “활을 쏴라! 마법사는 마법을 날려라! 무슨 일이 있어도 저들이 강을 건너가게 하면 안 된다!”

 다리 위에서 소리를 지르는 인물은 갑주에 커다란 붉은 원을 새겨 넣은 자였다. 그의 지시에 데브론은 깜짝 놀라 외쳤다.

 “선 가드 기사단장인 막스론 백작이다!”

 그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여간해서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데브론의 얼굴이 변하는 것을 보면 상당한 강자일 터였다. 당황한 사람들과 달리 티노는 뗏목에 매단 공기통들을 풀었다.

 “각자 한 사람씩 맡고 뗏목 밑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둑과 다리 건너편에서 화살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이미 강의 중간까지 이동한 상태지만 아직 화살의 유효사거리를 벗어나지 못한 터라 일행은 다시 위험에 빠졌다.

 데브론은 물통에 힘을 주어 부력으로 자신의 몸을 띄우고는 날아오는 화살을 검으로 쳐 냈다.

 차앙! 창! 채앵!

 하지만 화살들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부력을 잃은 데브론의 몸이 아래로 떨어질 때 이번에는 하룬과 필립이 물 위로 떠올랐다. 그들의 손에 쥐인 검들은 다시 일행을 향해 날아오는 일단의 화살을 쳐 냈지만 홀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잠수해서 뗏목 밑으로!”

 데브론은 그 말과 함께 브리엘라를 안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도란이 세페르를, 티노가 세피를 안고 들어갔지만 홀은 뗏목을 잡고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어깨에는 화살 한 대가 완전히 관동한 상태로 매달려 있었다.

 재수 4인방도 이미 물속으로 들어간 상황이라 홀의 상황은 모르고 있었다. 하룬은 붉은 피가 퍼지고 있는 홀 쪽으로 급하게 움직였다.

 “크윽!”

 따끔한 통증과 함께 뭔가 등판을 파고든 것을 느꼈지만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하룬은 아픔을 참으며 홀의 머리를 잡고 잠수해서 뗏목 아래로 들어갔다.

 놀란 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지만 머리를 놓고 허리를 잡아채는 하룬의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녀 역시 상황을 아는 것이다.

 탁! 탁! 타닥!

 뗏목 위에 꽂히는 화살이 내는 소음이 물속에까지 진동으로 전해졌다. 얼마나 많은 화살을 쏟아붓는지 그 소리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흐릿한 달빛으로 역시 흐릿하게 보이는 물속에서 데브론과 도란 그리고 티노가 아이들에게 공기를 담은 가죽 통을 입에 물려 주는 것이 보였다. 허리를 않은 홀의 입이 불룩해지는 것을 보니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룬은 재빨리 붙잡고 있던 공기통을 홀의 입에 물려주고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안았다. 이제까지의 고고하던 태도와 달리 워낙 상황이 급한 터라 그의 팔에 안긴 홀이 재빨리 가죽 통의 입구를 물었다.

 급한 상황이라 뗏목 아래로 들어오긴 했지만 방향을 조정할 수 없게 되자 뗏목은 강물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설사 목숨을 구한다 해도 자칫 강을 건너지 못하고 떠내려갈 판이었다.

 다들 그걸 염두에 두었는지 어떻게든 뗏목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한 손에 사람을 안고 다른 손으로는 공기통을 잡은 상태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꽈앙!

 고막이 터질 것 같은 강한 진동과 함께 박살이 난 뗏목 파편이 순간적으로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부력에 위로 튕겨 날아갔고, 사람들이 그 충격의 반동으로 물속 깊은 곳으로 쑥 들어갔다.

 강력한 마법 공격이 뗏목을 강타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 충격은 물을 통해 퍼졌고 피해는 심각했다. 그 순간 놀란 시린느와 라트리나 그리고 아이들과 홀이 무의식중에 코로 호흡했는지 고통스럽게 몸을 뒤트는 것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도 충격을 받은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무척이나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들이 물 위로 떠오르는 순간을 적들이 놓칠 리 없었다. 끊이지 않고 날아오는 화살과 마법 공격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하룬은 입술을 꽉 깨물고 싸가지를 소환 대기시켰다.

 -상황은 알지? 해일을 일으켜서 우리 일행을 강 건너로 움직여 줘.

 -안 돼! 주인의 상태가 최악이야.

 싸가지가 비명을 질렀다. 그럴 것이다. 그도 이미 생명력과 마나가 바닥을 기고 있다는 것쯤은 굳이 상태 창을 보지 않아도 느끼고 있었다.

 안고 있는 홀 때문에 손을 움직여 포션을 마실 수도 없었다. 하지만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모두가 이 상태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죽어도 괜찮아. 네 주인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페널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에서 부활할 수 있는 것은 하룬 그밖에 없다. 서둘러야 했다. 벌써 호흡이 가빠지고 의식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알았어. 주인 혼자 여길 벗어나는 것은 간단한 일인데…… 더구나 내 능력도 아직 거기에는 미치지 못하는데. 쯔쯧, 이런 미친 짓을 왜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이 은혜는 잊지 말라고.

 급한 상황인 것을 아는지 여느 때와 달리 싸가지없는 말투 대신 거들먹거리는 투였지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홀을 데브론 쪽으로 민 하룬은 발을 거세게 움직여 물 밖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예상대로 얼굴을 가리기 위해 들어 올린 팔뚝에 화살 몇 대가 꽂혔지만 급하게 숨을 들이마신 하룬은 싸가지를 소환했다.

 “소환!”

 하룬은 그 마을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었다.

 파앗!

 “스톰 웨이브!”

 싸가지의 정령 마법으로 강물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었다. 아래로 흘러가는 대신 강둑을 향해 순식간에 엄청난 높이로 치솟았다. 해일처럼 높아진 강물의 파도는 이내 건너편 강둑을 덮치고 있었다.

 여전히 화살과 마법 공격이 강물을 향해 난사되고 있었지만 빠르고 강력한 파도는 일행을 모두 자작령에 해당하는 강둑 너머로 물과 함께 넘겼다.

 “저게 뭐야?”

 “왜 강물이……?”

 듣도 보도 못한 기이한 현상에 병사들은 물론 마법사들도 뜨악한 표정으로 멍청하게 서 있었다.

 “제기랄! 대단한 실력의 마법사가 숨어 있었구나. 이러면 결국 또 하나를 놓친 건가?”

 막스론이 피가 맺힐 정도로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지요, 백작님.”

 레드 문 기사단장인 샤를 자작은 하룬 일행을 실은 높은 파도가 강둑을 넘어간 곳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싸늘한 눈에 비틀거리면서 일어나는 몇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중에는 막 사춘기에 들어서는 소녀의 모습도 있었다.

 그 소녀를 보는 샤를 자작의 눈에서 불길이 이글거렸다.

 “호호호, 가장 세력이 미미한 계승권자라고 방심했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맞는군요.”

 “뒤통수가 아니네. 저 인원으로 두 개의 기사단과 무려 일 만의 병사가 만든 포위망을 빠져나갔는데 겨우 뒤통수를 맞은 거라고? 이건 저들의 실력일세, 샤를 자작!”

 막스론 백작의 말에 샤를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긴 하네요. 능력도 조력자도 없이 오직 행운만으로 직할령을 벗어났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요. 이 정도의 능력을 지닌 배경이 있다는 건…….”

 그녀의 눈에서 묘한 열기가 흘러나왔다. 막스론 백작은 뭘 생각했는지 눈 주위를 씰룩거렸다.

 “재미있겠군. 아주 큰 변수가 등장했어. 미리 이런 일을 예견한 레니온 님의 혜안은 정말 대단하군.”

 “호호호, 그렇죠. 나름 최선을 다한다고 했는데도 이렇게 빠져나갔으니 레니온 님의 말씀대로 저들이 다크호스인 것이 증명된 셈이에요.”

 그들은 아쉽다는 표정과 함께 닥쳐올 일이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강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