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전직》
일행은 고심을 거듭했지만 특별히 좋은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휴우, 먹을 것도 다 떨어져 가고 뒤에서 추적해 오는 놈들도 있는데…….”
도란의 말이 지금 일행이 처한 상황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었다.
하룬은 무엇보다도 퀭한 눈에 피로에 지친 세 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어른들이야 그렇다 쳐도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 이렇게 쫓겨야 하는지.
‘아니, 브리엘라는 빼고.’
그녀는 당사자였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그동안 일어난 것들을 생각하면 대충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브리엘라는 적어도 제국의 황실을 흔들 잠재력을 가진 인물이겠지. 그러니까 스토리 퀘스트의 주인공이 되었을 것이고. 그녀가 파로스 자작령으로 들어가는 것에 따라 스토리가 달라지겠지.’
다른 사람들이 의견을 나누고 있는 와중에도 하룬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흘러갔다.
‘데브론과 도란은 아마 브리엘라를 호위하는 기사나 가신 정도 될 것이고, 홀은 개인 호위 그리고 티노는…….’
티노의 정체는 모르겠다. 그의 능력은 산야를 떠돌며 얻은 것이어서 브리엘라와의 연결점을 찾을 수 없었다. 하는 행동으로 보아서는 노예나 하인 출신 같은데 그런 신분으로 그만한 능력을 얻었다는 건 좀 믿기 힘들었다.
“대장, 좋은 생각 없어?”
문득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필립이었다.
“아니.”
하룬 때문에 사론 독지를 무사히 건넌 기억이 있는 사람들의 기대 어린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런 상황에서 뾰족한 의견이 있을 리 없었다.
“저들이 완전히 진형을 갖추기 전에 도강해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도란의 걱정스러운 말에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선 가드 기사단이 병력을 요소요소에 배치하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여기 도착한 이래 벌써 상당한 병력이 충원되어 다리로 향하는 모든 곳들로 분산되었다.
사실 하룬 일행이 나설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호위를 맡았을 뿐이고 이곳까지 오는 데 누구보다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퀘스트라서 문제지. 에효.’
일행은 어느새 중천에 자리한 해를 보며 속이 바싹바싹 말랐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산을 내려가는 것은 고사하고 잘못하면 산 아래와 뒤에서 협공을 당할 판이었다.
“저들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릴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게요. 어두워졌을 때 그런 순간을 노리면 강물로 뛰어들 수 있을 텐데요.”
도란과 필립의 대화를 듣던 데브론의 눈에 기이한 빛이 일렁였다. 깊이 고심하던 데브론이 도란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다음 일행과 약간 거리를 두고 앉아 있는 하룬에게 다가왔다.
“자네는 이곳에서 살아 나간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여전히 용병 일을 할 건가?”
느닷없는 그의 물음에 놀란 하룬이었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제 목표는 강해지는 겁니다. 스스로가 만족할 때까지 강해질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찾아 매진해야겠지요.”
투란이나 로템 용병대와 동행하면서 나름 용병에 대해 느낀 바가 컸던 하룬이다. 사실 용병이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엘저와의 인연으로 NPC나 할 법한 용병이 되었다. 그리고 전직을 위해 선택한 길이 용병이었지 용병이 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전직하면 이제 NPC들에게서 벗어나 진수 같은 유저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이렇게 유저들과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플레이를 하니 자신이 마치 NPC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게 불만은 아니었지만 그의 본분은 유저이니 유저들의 세상으로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어느 정도 육체적인 능력이 올라갔으니 현실에도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빌어먹을 정도로 많은 돈이 들어가는 먹을거리도 마련해야 했고, 양부의 무덤도 찾아가야 했다. 그리고 양부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아우터들을 만나서 은혜도 갚아야 했다.
“내가 강해지는 방법 중 하나를 알려 주지.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던 데에는 자네의 공이 크니 그 대가라고 생각하게.”
“네에? 그게 무슨 말씀인지?”
“잠자코 따라오게.”
데브론은 자신을 주시하던 도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큼성큼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행이 보이지 않는 곳에 도착한 데브론은 그에게 특별한 설명도 없이 제대로 걷는 법과 뛰는 법이라는 스킬과 검술 하나를 눈앞에서 펼쳐 보였다.
“이것들이 도대체 뭡니까?”
“자네에게 전수할 스킬이라네. 이제 세상에서 이 스킬들을 아는 사람은 자네와 나뿐이야. 일단 검술의 형태와 그 흐름을 다시 보여 주겠네. 당장 익힐 생각은 하지 말고 지금은 외우는 데 주력하게. 무엇보다 각 동작에서의 호흡과 유기적인 동작의 연결에 집중하게.”
데브론은 검술을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왜 이런 상황에서 스킬을 전수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의 설명에 주의를 집중했다.
“이 검술은 메신저 검술이라네. 이 검술로 익스퍼트 최상급까지 익힌 기사들이 다수 있으니 등급으로 치면 상급 검술이라네. 지금은 사라진 황실 최강의 그림자 기사단 메신저 기사들의 비전 검술이야.”
깊고 맑은 눈빛으로 자신의 동작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집중해서 바라보는 하룬에게 많은 감정이 섞인 눈길을 보내는 데브론의 설명이었다.
‘혹시 죽음이라도 각오한 것일까?’
자신이 적들의 이목을 붙잡고 나머지 일행을 도강시키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스킬을 전수하는 그의 얼굴이 전에 없이 비장했던 것이다.
하룬은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왠지 데브론의 눈빛 때문에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일단 기억하는 곳까지 한번 펼쳐 보게. 내가 잘못된 부분은 보아 주지.”
“알겠습니다.”
하룬은 사연을 묻거나 고맙다는 말을 하기 전에 혹시라도 기억한 것을 잊을까 봐 짧은 대답과 함께 각각 마흔두 가지의 변화를 가진 세 검식을 펼쳐 보였다.
데브론은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기억한 하룬에게 흡족한 미소를 보내며 각 동작에 맞는 호흡의 길이와 동작의 연결 부분을 다시 설명하고 시범을 보여 주었다.
하룬이 그 형태와 호흡 그리고 발과 팔의 동작까지 완벽하게 머릿속에 기억한 것은 데브론이 다섯 번이나 설명하고 시범을 보인 후였다. 물론 그래도 확실하게 기억하는 것은 설명 뿐 실제 동작은 아니었다.
잠시 데브론이 한숨 돌리는 사이 그렇게 기다리던 안내음이 들려왔다.
-검사로 전직하셨습니다. 보너스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소울 포인트가 충분하게 쌓인 상황이고, NPC의 자의로 스킬을 전수받은 상황이라 전직이 된 것이다.
하지만 기뻐하거나 변했을 상태를 확인할 시간적인 여유는 없었다. 데브론의 말이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검술보다 이것을 먼저 익혀 두게. 오늘 반드시 필요할 테니까 말이야. 이 스킬은 단순히 잘 걷고 뛰는 방법이 아닌 고차원적인 이론과 호흡법이 결합되어 탄생한 것이라네.”
뭔가 물으려던 하룬은 쉼 없이 들려오는 데브론의 음성에 주의를 집중했다. 그가 설명하는 걷는 법과 뛰는 법은 호흡은 물론 주의력을 발에 집중시켜야 하는 까다로운 스킬이었다.
두 번 연속해서 시범을 보이면서 자세하게 설명해 준 덕분에 하룬은 이 스킬들이 어떤 원리로 만들어진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하룬이 이론적인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한 듯 질문이 줄어들자 데브론은 흡족한 얼굴이었다.
“내가 전수한 이 스킬은 걷는 것만으로 마나가 쌓이는 고급 스킬이네. 평생 정진하면 자네에게 무한한 발전을 가져다 줄 거야.”
“감사합니다!”
하룬은 정말 기뻤다. 쉽사리 얻을 수 없는 귀중한 고급 스킬을 NPC에게 직접 전수받은 것이다. 검술도 그렇지만 걷고 뛰는 것만으로 마나가 쌓이는 스킬이라느 정말 놀라웠다.
“그럼 어둠이 내릴 때까지 이곳에서 자네 혼자 수련하게. 제대로걷는 방법은 그 형태는 다 익혔으니 반나절만 수련해도 상당한 발전이 있을 거야.”
“네.”
데브론은 하룬을 남겨 두고 일행에게 돌아갔다. 그가 갑자기 자신에게 이런 스킬을 전수해 주는 이유는 몰랐지만 굴러들어 온 떡을 마다할 하룬이 아니었다. 좀 더 강해질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혼자 남은 하룬은 자신이 방금 전직했다는 사실은 아예 잊고 있었다. 데브론이 전수한 메신저 스킬들의 내용에 흠뻑 빠져든 것이다.
훨씬 더 복잡한 이론과 세밀한 행동이 필요한 뛰는 법은 일단 제쳐 놓고 걷는 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호흡과 일치되는 발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마음속으로 주시하면서 수련했다.
단지 걷는 것에 불과하지만 호흡과 발의 각 부분에 적절한 힘을 주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반경 이십 보 정도의 땅이 하룬의 발로 엉망이 되어 갔다.
‘대지에서 솟아나는 마나를 빨아들여 발의 각 부분을 유기적으로 움직여라!’
그것이 데브론이 전수한 스킬들의 이론을 관통하는 키포인트였다.
끊임없이 그것을 암송하며 온 의식을 발가락과 발바닥 그리고 뒤꿈치에 집중하고, 들이마신 공기를 발의 각 부분에 보낸다는 이미지를 구현한 하룬은 서서히 자신을 잊어 가고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강한 집중이 또 한 번 발휘되고 있었다.
그렇게 두 시간여가 흘렀을 때 갑자기 안내음이 들려왔다.
-집중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민첩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지혜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메신저 워킹 스킬을 익혔습니다.
『메신저 워킹(패시브)
지금은 사라진 전설적인 존재인 메신저 기사단 비전의 워킹 스킬을 익혔습니다. 메신저 워킹은 단순한 걷기가 아닙니다. 무려 천 년이 넘는 장구한 시간 동안 수많은 검사들의 수련과 착오를 통해 만들어진 고급 스킬입니다. 이 메신저 워킹을 익히면 쌓는 경험치에 해당하는 마나를 몸에 축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역대 황실 기사단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났다는 메신저 기사단의 비밀입니다.』
하룬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나를 쌓을 수 있는 스킬이었다. 안 그래도 마나가 부족해서 싸가지를 다루는 데 애를 먹은 그였다.
더구나 익히는 과정에서 스텟 다섯 개를 얻다니,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정말 마음에 드는 스킬을 배우고 익힌 것이다.
잠시 딴생각을 하던 하룬은 땀에 젖은 얼굴을 한번 옷으로 닦아 내고는 다시 수련에 들어갔다.
제대로 걷는 것에 성공한 덕분인지 아니면 기분인지 몰라도 그렇게 오래 걸었음에도 지치기는커녕 오히려 샘처럼 솟아오르는 활력에 몸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수련은 데브론이 부르러 왔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제 해가 지려는 시간, 데브론은 하룬을 부르러 왔다가 넋을 잃고 말았다.
‘저게…… 내가 분명 메신저 워킹을 전수한 게 점심 무렵이 맞나?’
순간적으로 헷갈릴 만큼 하룬의 진전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땅에서 뗀 그의 발 아래에는 미세한 움직임이지만 밟혔던 풀들이 그의 발바닥을 향해 솟구치는 것이 보였따.
‘극히 적은 양이지만 진짜 발바닥으로 마나를 빨아들이고 있어!’
비록 전수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스킬의 요체를 파악하고 익혔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그가 수련할 때 가장 어려워했던 부분을 하룬은 별 무리 없이 터득한 것이다.
발바닥으로 마나를 빨아들인다는 것은 의념이지 실제로 가능한 일이라고 믿지 않았던 그는 발로 마나를 빨아들이기까지 10개월도 더 걸렸다. 피부로도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몰랐던 것이다.
모종의 결심을 한 데브론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일행 중에 가장 큰 전력인 하룬의 능력을 조금이라도 더 올려 주기 위해 고심 끝에 비전 스킬을 전수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스킬에 입문할지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발의 각 부분을 유기적으로 움직이는것만으로 빨리 걸을 수 있기에 전수했지만 하룬은 이미 그가 전수한 메신저 워킹 스킬에 완전하게 입문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인재로군. 내가 아는 그 누구도 이런 진경을 보여 준 이가 없거늘…….’
데브론은 고개를 흔들었다.
도대체 하룬이 가진 능력의 끝이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양파를 까는 것처럼 그 한계를 파악했다 싶으면 새로운 면모를 끊임없이 보여 주었다. 일전에 정신을 잃은 하룬 앞에서 세페르에게 능력의 삼 할은 감추라고 충고했던 것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독으로 가득한 습지에서 독이 없는 길을 찾아내는 것도 불가사의한 능력인데, 연원을 알 수 없는 두려운 정령 암기술까지 가졌어. 거기다 이곳까지 오면서 보여 준 순발력과 지휘력 그리고 상황 판단력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고. 무엇보다 이렇게 강력한 집중력이라니!’
데브론은 하룬을 부르러 왔지만 한참 동안 그를 깨우지 못했다.
같은 스킬을 익힌 사람으로서 너무나 놀랍고 흐뭇해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 키워 보고 싶은 인재구나! 황실의 일만 아니면 전력을 다해 키워 보고 싶건만…… 휴우.’
흐뭇한 시선으로 수련 과정을 지켜보던 데브론은 한참 만에야 방해하는 것이 미안한 얼굴로 하룬을 부를 수 있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