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다가오는 위험 (20/278)

《다가오는 위험》

 노프록스 산으로 오르는 경사면은 완만했다. 체력이 약한 브리엘라와 두 아이 때문에 자주 쉬어야 했지만 그래도 하루를 꼬박 오르자 능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동안 사론 습지의 독무가 바람에 날려 올라왔기에 간간이 해독약을 먹어야 했지만 대신 그 어느 몬스터와도 조우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티노는 편안하고 빠른 길을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나무의 누운 방향과 풀들이 서식하는 것만으로 방향을 찾을 수 있었고, 그냥 지나치는 것 같아도 탁월한 눈썰미로 맹수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의 노련한 안내 덕분에 능선을 탄 일행은 이틀이 채 걸리지 않아 중간 목적지인 휴쥐락이 보이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로템 용병대가 선택한 길보다는 거의 엿새나 시간을 단축한 것이다.

 휴쥐락은 이름 그대로 거대한 바위였다. 마치 나이프의 끝에 꽂힌 감자처럼 날카롭게 솟은 봉우리 위에 거대한 둥근 바위가 만들어 낸 광경은 신비하기만 했다.

 “여기서 자작 성까지는 이제 닷새 거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티노가 수고 많았소. 조금만 더 고생해 주시오.”

 데브론은 땀을 훔치는 티노를 격려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몬스터와 맹수를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티노의 능력을 알 만했다.

 “별말씀을요.”

 티노는 황송하다는 듯 손사래 치며 막 식사를 준비하는 도란과 시린느에게 향했다. 길을 안내하면서도 휴실할 때면 식사 준비까지 돕는 부지런한 티노였다.

 “오빠,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세피가 땀과 먼지로 더러워진 얼굴을, 아까 들렀던 계곡에서 담아 온 물로 닦아 내면서 하룬에게 물었다.

 “닷새 정도만 더 가면 된단다.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아.”

 그래도 이제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세피가 이런 강행군을 견딘 것은 참으로 용했다. 예전의 자신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다리가 아파요.”

 그럴 것이다. 산길이라는 것이 오르막과 내리막이 수시로 바뀌면서 그 경사도 크기 때문에 다리 근육은 물론 관절까지도 상당한 부하가 걸리는 길이다.

 “이리 와 봐!”

 하룬은 특별히 할 일이 없는 틈을 타서 세피의 다리를 마사지해 주었다. 이제 겨우 이 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용병 아카데미에서 보낸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세피는 처음에는 아프다고 눈물을 흘렸지만 이내 시원해지는지 눈을 감고 안마를 즐기다가 곧 잠이 들어 버렸다. 하룬은 녀석의 가느다란 종아리에 어울리지 않는 근육을 풀어주며 안쓰러움을 느꼈다.

 “세페르, 너도 이리 와.”

 “아니, 전 됐어요. 형도 힘든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심 하룬의 손길을 반기는 세페르였다. 방금 세피가 얼마나 시원해하는지 바로 곁에서 느낀 것이다.

 “넌 성장기이기 때문에 더욱 근육을 풀어 주어야 해. 나중에 네가 바라는 대로 멋진 기사가 되고 싶으면 형이 하는 안마법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네 자신에게 수시로 해 주어야 해.”

 “알았어요.”

 녀석의 약점은 기사라는 말이었다. 도란의 꿈이 바로 기사가 되는 것이었고, 자신이 못 이룬 꿈을 세페르에게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녀석 역시 어디서 기사를 보았는지 기사가 되겠다는 다부진 꿈을 꾸며 나름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었다.

 하룬의 안마를 받던 세페르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미소를 띠며 잠이 들었다.

 -안마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하룬은 편안하게 잠이 든 두 남매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느닷없이 들려온 안내음이 황급히 스킬 창을 열었다.

『안마

레벨: 하급 Lv.1(6%)/Lv.3

정확한 감각과 함께 정성을 다한 안마는 피로를 풀어 주고 생명력과 마나를 회복시켜 줍니다. 더불어 환자의 경우는 자연 치유력이 소폭 증가합니다. 등급이 올라가면 그 회복 속도와 자연 치유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이런 스킬이 있는 줄은 몰랐네.’

 신기하면서도 기뻤다. 다른 생명을 죽이는 스킬이 아니라 살리는 스킬을 가진 것에 이상한 감흥까지 일었다. 안 그래도 생명을 죽이는 데 너무 무감각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는데 안마는 그런 것이 아니라서 너무 좋았다.

 ‘그나저나 심안 스텟이 이런 효용을 가진 줄은 몰랐는데.’

 심안 스텟은 본능 검술에도 필수적이지만 이렇게 안마하며 상대방의 근육을 상세하게 느끼는 데에도 효용가치가 높았다. 심안 스텟으로 하룬은 세피와 세페르의 피로하고 긴장된 근육들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잠자코 쉬던 시린느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대-자-앙!”

 “왜!”

 콧소리가 심하게 들어간 것을 보니 또 쓸데없는 말을 하려나 보다.

 “나도 다리에 알이 뱄는데…….”

 “알아서 풀어!”

 “그게, 팔이 너무 아파서 힘이 안 들어가. 어떻게 안 될까?”

 “아마 될걸.”

 “호호호, 그럼 부탁해.”

 하룬의 말에 만족한 시린느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야, 지탄! 이리 와서 시린느 다리 좀 주물러 줘라.”

 “으응? 무슨 소리야, 대장?”

 필립과 같이 뭔가를 이야기하던 지탄의 눈이 뜻밖의 말에 튀어나올 듯 커졌다. 눈빛까지 변한 지탄이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본 시린느의 눈에서 불길이 솟았다.

 “치잇! 됐어! 누가 저 오우거 자식한테 안마받고 싶다고 했어?”

 시린느가 투덜거리며 돌아갔지만 지탄은 그녀를 따라다니며 제대로 안마해 주겠다고 조르다가 나중에는 애원하기까지 했다.

 ‘지탄이 시린느를 좋아했구나.’

 여태 그런 눈치도 못 챘다.

 ‘그렇단 말이지? 지탄을 부려 먹을 또 하나의 건수를 알았군. 흐흐흐!’

 “이런! 녀석들이 또 신세를 졌군요.”

 돌아보니 언제 식사 준비를 마쳤는지 도란이 와 있었다.

 “쉿! 아이들이 좀 자게 놔두세요. 한숨 자고 나면 피로가 많이 풀릴 겁니다. 저녁은 나중에 먹이세요.”

 하룬의 말에 도란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항상 아이들에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룬 님이 잘해 주신 덕분에 아이들이 예전보다 더 밝아지고 건강해진 것 같습니다.”

 하룬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감사의 빛이 일렁였다. 아이들에게 신경을 잘 쓸 수 없는 그 대신 하룬이 수시로 챙기는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가 본 하룬은 4급 용병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불가사의하고 신비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더구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하룬을 따르는 아이들과 마치 혈연처럼 아이들에게 정을 주는 하룬에게 그는 너무나 감사했다.

 “저녁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네.”

 하룬은 시린느와 라트리나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곳으로 향했다. 데브론과 이야기를 나누던 필립과 지탄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았다. 쉬고 있던 브리엘라와 홀도 하룬과 함께 움직였다.

 하룬이 막 수프 그릇을 받아 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뒤쪽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뭐지?’

 방금 전까지 안마 때문에 계속해서 심안 스텟을 쓴 여운인지 감각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예민해진 하룬이었다.

 사사사!

 분명히 뭔가 그들 쪽으로 이동해 오고 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 아무 위험도 마주하지 못한 일행들의 긴장이 식사 때라는 것과 겹쳐 풀어진 상황이었다.

 하룬은 수프 그릇을 내려놓으며 암기대에서 비수 세 자루를 소리 나지 않게 뺐다. 홀 역시 무슨 기척을 느꼈는지 조용히 등 뒤에서 끝이 뾰족한 검을 빼 들었다.

 두 사람의 행동을 보던 데브론과 필립의 눈에 의혹의 빛이 어리는 찰나 하룬이 몸을 돌리며 벼락이 치듯 빠른 속도로 비수를 날렸다.

 쉬! 쉬익! 쉭!

 비수를 잡은 손가락들에 가해진 미묘한 힘과 벌어진 각도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는 비수들이 막 내려앉기 시작한 어둠을 갈랐다.

 “큭!”

 “컥!”

 “으윽!”

 겨우 이십 보밖에 떨어지지 않은 나무 뒤에서 세 마디의 낮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적이닷!”

 데브론은 검을 들고 앞으로 뛰어나가며 소리쳤다. 나란히 앉았던 필립과 지탄이 데브론을 따라 달려 나갔고, 도란은 그제야 수프 그릇을 던지며 황급히 검을 뽑아 들었다.

 홀 역시 레이피어를 들고 브리엘라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그녀의 곁에는 시린느와 라트리나가 자리를 잡았다.

 티노는 황급히 아이들이 자는 곳으로 튕기듯 달려가며 짧은 쇠꼬챙이를 다리춤에서 뽑아 들었다.

 채앵!

 벌써 데브론은 가장 앞서 달려오는 묘령의 인물과 검을 마주쳤다. 상대의 신형이 순간 비틀하더니 금방 자세를 바로잡았다. 데브론에게 밀리기는 했지만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이야기.

 “누구냐?”

 “흐흐! 우리의 이목을 잘도 따돌렸구나. 벌써 이곳까지 오다니. 자칫하면 놓칠 뻔했어.”

 “실버 문인가?”

 데브론은 상대방이 입은 갑옷의 견갑 부위에서 은색 달을 발견하고 물었다.

 “호오. 그것까지 알고 있었나? 정말 정체가 궁금하군. 분명히 대상자에는 아무런 세력이 없었는데 노친네는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어둠 속에만 존재하는 썩은 달이 이곳에는 웬일인가?”

 “후훗! 몰라서 묻는 건가? 우리는 저쪽에 있는 작은 아가씨에게 관심이 있다네.”

 은색 갑주를 입은 사내의 나이는 이제 사십 대 정도로 보였지만 말하는 태도를 보면 오랫동안 사람을 다스려 온 것처럼 위압감이 묻어났다.

 “겨우 그 실력으로?”

 “흐흐, 이 정도면 부족하지는 않을 거야.”

 그의 말과 함께 어둠 속에서 적지 않은 기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을 본 데브론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나무들 사이에서 홀연히 나타난 기사들의 수효는 거의 이십을 헤아렸다.

 그중 셋은 부상을 입었는지 얼굴과 목에서 피를 흘리며 강렬한 기파를 뿌려 댔다. 방심하는 바람에 하룬의 암기에 스친 것이다.

 “실버 문 한 팀이 다 왔군.”

 데브론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수많은 인원이 요소요소에 포진했는데 잘도 피해서 이곳까지 왔더군. 3팀이 로템인가 하는 떨거지들을 박살내면서 휴쥐락이라는 이름을 듣고 소식을 전해 오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거야.”

 “빌어먹을!”

 데브론의 얼굴에 순간 절망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아무리 그들의 전력을 치켜세워도 익스퍼트급 기사 이십여 명을 상대할 전력은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실력자를 구할 시간도 없었거니와 애초에 소수로 빠르게 직할령을 벗어나려고 했던 계획 탓에 기사들을 상대할 전력을 갖추지 못했다.

 더구나 실버 문은 이십 개가 넘는 황실 기사단 중에도 실력이 강한 것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 기사단이고 익스퍼트급 기사 이십 명으로 편성된 팀을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아르포 자작이라고 하네. 만나서 반갑네.”

 상대는 이미 자신들을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했는지 인사까지 하는 여유를 보였다.

 하지만 아르포 자작은 데브론이 인상만 쓰고 대답하지 않자 눈초리를 길게 늘였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아마도 평소에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평소에 실력도 없는 주제에 거들먹거리는 놈들의 엉덩이를 멋지게 차 주고 기대도 하지 않았던 우리에게 공적을 주려고 나타난 것이 가상해서 예의를 차렸더니, 이거 완전히 상대할 가치도 없는 천한 놈들이구나!”

 ‘결국 로템이 이끄는 상행은 끝장이 나고 말았구나. 사정이 어떻든 이들이 마지막이구나.’

 하룬은 아르포 자작의 말에서 이들이 브리엘라를 노리는 마지막 포위망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선제공격밖에는 없다.’

 데브론의 결정을 기다릴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우리는 기사. 너희들에게 항복을 권한다. 물론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다 죽어야겠지만 곱게 죽이겠다는 것만은 약속하지.”

 하룬은 데브론과 도란의 몸을 방패 삼아 소리 나지 않게 암기대에서 비수를 뽑아 싸가지를 소환했다.

 중독되었다는 안내음이 들렸지만 지금은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하룬은 행여 소리가 들릴까 봐 입술만 달싹거렸다.

 “싸가지, 비수에 독을.”

 “흐흐흐! 멋진걸. 좋아, 해 보자고.”

 “밖으로 튕기지 않고 옆자리로 튕기도록 힘과 각도를 잘 조종해. 한 놈이라도 놓치면 안 돼.”

 “내가 어디 주인처럼 허술한 줄 알아?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말고 해독이나 하라고. 내 독이 더 강력해졌으니까.”

 “정령 유도 암기술! 가랏!”

 이미 양 손가락에 비수 여섯 자루를 낀 하룬이 양팔을 쾌속하게 흔들었다. 비수들은 그 순서의 차이를 느끼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실버 문 기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이미 소환된 싸가지가 독을 주입했고, 그 궤도를 조종할 것이다.

 하룬의 말과 함께 데브론이 본능적으로 검을 휘두르며 아르포 자작을 공격해 갔다. 자신의 곁을 스쳐 가는 비수를 느낀 것이다.

 답답했던 속이 시원해졌다. 어차피 고민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브리엘라와 두 아이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 답답한 상황을ㅇ 하룬의 급습이 깨준 것이다.

 채앵! 챙!

 역시 익스퍼트급 기사들은 달랐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전광석화처럼 날아오는 비수들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검으로 쳐 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악!”

 “커억!”

 “큭…… 도, 독!”

 일행을 중심으로 크게 반원을 그리며 늘어섰던 실버 문 기사들 중 둘이 비명과 함께 목을 잡으며 쓰러졌고, 한 명은 격렬한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나란히 늘어선 탓에 다른 기사들이 튕겨 낸 비수가 살을 드러낸 부위를 스치고 지나간 재수 없는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하룬과 그들은 비수가 튕길 것을 고려해서 싸가지가 일부러 교묘하게 비수를 조종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말하는 중에 공격하다니. 이 비겁한 놈들!”

 아르포 자작이 분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추켜든 검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금방 서슬 퍼런 푸른 오러가 검을 감싸더니 검첨을 통해 손바닥 길이의 검기가 튀어 나왔다. 무엇이든지 다 베어 버린다는 오러 소드, 즉 검기였다.

 하지만 그를 마주한 데브론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검 역시 누런 오러가 아지랑이처럼 일어나더니 검첨을 통해 비슷한 길이의 오러 소드가 튀어나왔다.

 “가증스러운 놈들!”

 아르포 자작은 분기에 찬 소리를 지르며 데브론을 향해 검을 날렸다.

 채앵! 챙!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요란한 충격음과 함께 아르포 자작이 잠시 비틀거렸다.

 “멍청한 놈! 목숨을 건 전투에 비겁한 것이 있던가?”

 “그래도…….”

 “갈!”

 데브론의 검이 강력한 기세로 아르포 자작의 상체를 향해 날아갔다.

 채앵! 챙!

 처음의 기세등등했던 모습과 달리 아르포 자작은 조금씩 뒤로 밀렸다. 검에 실린 힘과 마나의 차이는 물론 묘하게 흔들리는 데브론의 현란한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하는 그로서는 연방 뒷걸음질 치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이익! 어디서 이런 실력자가……?”

 아르포 자작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물고 전력을 다했지만 데브론의 발과 검은 더욱 빨라졌다. 힘은 물론 빠르기에도 밀리는 아르포는 채 검을 제대로 휘두르기 전에 빈틈으로 날아오는 데브론의 강력한 검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놈!”

 나이와 달리 데브론의 강력한 오러 소드에 조금씩 밀리는 아르포를 돕기 위해 세 기사가 기세했다. 그들의 검첨에서도 짧긴 했지만 오러 소드가 빠져나와 있었다.

 차앙! 채앵!

 하지만 데브론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발을 현란하게 움직이며 바람처럼 가볍게 움직이면서도 강력한 위력을 지닌 검을 날리는 데브론의 공격을 네 명은 감히 감당하지 못했다.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늙은이가 나온 거야!”

 아르포 자작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익스퍼트 초급 세 명과 중급인 자신이 합공을 하는데도 눈앞의 늙은이는 전혀 밀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을 밀어붙이기까지 했다.

 매처럼 날카로운 눈과 미리 검세를 차단하는 안목 그리고 경쾌하면서도 막는 모든 것을 다 베어 버릴 것처럼 흉포한 기세를 가진 검술로 보아 보통 늙은이는 아닌데 이제껏 이런 인물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해가 가질 않았다.

 “데이튼과 내가 자작님에게 합류하겠다. 나머지는 저것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잡아라!”

 상황을 지켜보던 한 기사의 명령이 막 떨어지는 찰나 하룬이 외쳤다.

 “도란, 티노, 아이들을! 필립과 지탄은 뒷길을 뚫어! 시린느와 라트리나는 브리엘라를! 홀, 미스트! 데브론, 숲 속요!”

 창졸간에 외치긴 했지만 일행은 하룬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었다. 필립과 지탄이 숲을 향해 움직일 때 도란과 티노가 급하게 뛰어가 막 선잠에서 깨어나는 두 아이들을 안고 날 듯이 바위와 나무들이 울창한 숲으로 뛰어들었다.

 꽈앙!

 데브론 역시 전력을 다한 일격으로 그를 공격해 오던 네 자루의 검을 튕겨 내고는 그 반동을 이용해 뒤로 날아갔다. 땅을 박찬 그의 몸은 마치 새처럼 날렵하게 한 바퀴 돌며 허공을 날았다.

 “빨리!”

 넋이 빠진 듯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미처 다 파악하지 못한 홀은 데브론의 일갈에 정신을 차렸다.

 “미스트!”

 황급히 마법을 펼친 그녀는 역시 신기에 가까운 하룬의 비도가 만들어 낸 상황에 넋이 빠진 브리엘라를 안고 숲으로 뛰어든 시린느와 라트리나를 따라 몸을 날렸다.

 “이노-옴들!”

 비수에 수하 셋을 잃고 합공했던 자신마저 정체 모를 늙은이에게 밀리는 수모를 겪은 아르포 자작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눈에서는 섬뜩한 독기가 화살처럼 쏘아져 나왔다.

 하지만 복장 터지게도 그는 한 걸음도 떼질 못했다.

 “싸가지, 독을 발라. 정령 유도 암기술!”

 쉬익! 쉬익!

 다시 하룬의 손에서 싸가지가 조종하는 비수 여덟 개가 순서대로 빠르게 기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 때문에 막 추격하려고 도약하던 아르포 자작과 기사들의 몸이 순간 멈칫했다.

 채앵! 챙!

 준비하고 있던 기사들과 아르포 자작은 비록 엄청난 빠르기로 날아오는 비수지만 쉽게 쳐 낼 수 있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비수들은 싸가지의 힘이 개입되어 앞으로 튕겨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옆을 향해 더 빠른 속도로 튕겨 나갔다.

 하룬은 비수를 날림과 동시에 해독약과 마나 포션을 마시고는 마법이 만들어 낸 안개를 뚫고 일행들의 뒤를 쫓았다.

 “아악!”

 “커억!”

 들려오는 비명으로 판단하건대 이번에는 기사 둘이 독이 묻은 비수에 희생된 것 같았다.

 “이게 뭐야? 이 빌어먹을 것들은 대체 뭐냐고?”

 악을 쓰는 아르포 자작을 뒤로하고 안개가 자욱하게 낀 숲으로 뛰어든 하룬은 다시 비수를 던졌다. 안개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아 어림짐작으로 던진 탓에 살상 효과는 전혀 없었지만 추적을 방해하는 데는 큰 효과가 있었다.

 독에 당해 죽은 동료들 때문에 기사들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고, 그 때문에 일행이 도망치는 데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몇 번 더 비수를 던진 하룬이 마침내 본격적으로 도망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없이 도망치는 일행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아르포 자작과 나머지 기사들이 쫓는 소리가 들렸지만 숲에 낀 안개와 갑옷의 무게 그리고 행여 날아올지도 모르는 독 비수의 위협 때문에 점차 멀어졌다.

 희미한 달빛이지만 티노는 용케도 움직이기 쉬운 길을 찾아냈다. 특별히 검술을 익힌 건 아니지만 타고난 본능과 세월을 따라 노련해진 눈썰미가 조화를 이룬 것이다.

 거의 한 시간여를 달린 끝에 일행은 거대한 폭포 근처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하악, 학.”

 “후욱. 후욱.”

 누구랄 것 없이 거칠게 호흡하는 사람들의 몸은 땀으로 목욕한 듯 푹 젖어 있었다.

 “헉헉, 이곳이라면 잠시는 안전할 겁니다.”

 티노의 말에 사람들은 바닥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저앉아 버렸다.

 하룬 역시 터질 듯 박동 치는 심장의 고동 소리를 귀로 들으며 심호흡했다. 놈들이 금세 따라붙는 것 같은 긴장감에 힘든 것도 몰랐지만 이제야 급격한 체력 저하를 느꼈다.

 “홀, 물약 좀 꺼내서 나누어 줘라.”

 “네, 어르신.”

 그나마 홀은 호흡이 금방 안정되었다. 브리엘라를 시린느와 라트리나가 번갈아 안고 뛴 터라 체력 소모가 덜했다.

 그녀는 배낭에서 물약을 꺼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신전에서 만드는 포션과 달리 마법사들이 만든 물약의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가격을 생각하면 순간적으로 체력을 올리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작은 유리병 안에 담긴 물약을 마시자 많이 떨어졌던 생명력과 체력이 금세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뭡니까?”

 필립이 심각한 얼굴로 데브론에게 물었다. 평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가 익스퍼트 중급의 실력자라는 것을 안 하룬과 재수 4인방의 눈에 강렬한 호기심이 떠올랐다.

 “이제는 우리도 사정을 알 때가 된 거 아닌가요?”

 성격 급한 라트리나는 화가 잔뜩 난 것 같았다. 하룬은 말없이 데브론을 쳐다보았다.

 “우리 일행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네. 정확하게 말하면 브리엘라가 그 목표지.”

 데브론은 잠시 하룬 일행의 얼굴을 보더니 말을 이었다.

 “이 자리에서 사정을 다 밝힐 수는 없지만 우리를 노리는 사람들은 꽤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네. 우리가 황실과 관련이 있다는 것 정도와 일단 목적지에 도착만 하면 자네들에게는 아무런 위험이 없다는 것은 장담할 수 있네.”

 데브론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더 이상은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기세가 단단하게 다물린 입에서 느껴졌다.

 “좋습니다. 다소 과한 보수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진작 알려 주었다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정말 많이 놀랐거든요.”

 하룬의 말에 데브론이 미안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세한 사정을 알면 자네들도 좋을 것이 없기에 말하지 않은 것뿐이네. 자네들을 속이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네.”

 그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이제껏 동행하면서 그들이 일부러 뭔가를 속이려고 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런데 어떤 분입니까? 오러 소드의 길이로 보았을 때 익스퍼트 중급은 넘어 보이던데요.”

 필립의 질문에 데브론이 살짝 눈을 감았다. 사실 기사들 중에서도 그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기사들을 제외하고 실버 문처럼 황실 십대기사단 중 하나의 팀장을 능가하는 검력을 가진 야인은 별로 없었다. 이 정도 실력이면 용병으로는 일급 이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많은 용병들을 보아 온 필립으로서는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이야기해 주지. 그때까지는 알아서 좋을 것이 없으니 궁금해도 참게.”

 하룬 일행은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각자 흩어져 자리를 잡고 쉬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에도 자네 덕을 많이 보았네.”

 데브론이 땀을 훔치며 다가왔다.

 “놈들이 방심한 탓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의 비도 솜씨는 이상한 데가 많아. 정령의 힘이 개입되었다곤 하지만 검에 맞아 튕기는 비수가 어떻게 그런 각도로 꺾일 수 있지? 그리고 독을 바른 비수를 어떻게 맨손으로 던질 수 있나?”

 데브론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나저나 이젠 어떻게 할 겁니까?”

 하룬이 화제를 돌리자 데브론의 얼굴이 순간 경직되었다.

 “흐음. 일단 티노를 믿는 수밖에. 그가 위험 요소가 덜한 길을 찾아내야만 해.”

 이 인원수를 가지고 정면 돌파는 무리수였다. 역시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아마 연락을 받고 근처를 광범위하게 포위할 겁니다. 이 근방의 영지는 전부 황제의 입김이 직접 닿는 직할령들이니까요. 단지 우리가 유리한 점은 우리와 저들 모두 소수라는 점과 현재 있는 곳이 험준하기로 소문난 노프룩스 산맥의 한가운데라는 점 정도죠.”

 어느새 다가온 도란의 의견에 다들 동의했다.

 “이제 밤이 깊었으니 놈들의 추적도 멈추었을 겁니다. 일단 우리도 좀 쉴 필요가 있습니다.”

 티노의 말에 데브론이 명령을 내렸다.

 “티노 말대로 몇 시간이라도 눈을 붙인다. 놈들에게도 추적이 가능한 인물이 있겠지만 이런 밤에는 무리겠지.”

 일행은 먹기도 전에 식사를 망친 탓에 배가 고팠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불을 피울 수 없었다. 대신 빵과 육포로 식사를 대신하고 저마다 나름 편안한 자리를 찾아 잠을 청했다.

 일행은 동이 트기 전에 폭포를 벗어났다. 브리엘라는 그래도 괜찮은 얼굴이었지만 두 아이는 긴장과 공포로 잘 자지 못했는지 하룻밤 사이에 적잖이 초췌해졌다. 하지만 아이들의 상태를 챙길 상황이 아니었다.

 티노는 눈앞에 보이는 거라고는 나무와 바위들밖에 없는데도 거침없이 길을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기 가는 길은 야생동물들이 이용하는 곳으로, 비록 맹수와 조우할 가능성은 컸지만 안전한 길이었다.

 제대로 된 길이 아니라 지나가기가 무척 힘들었지만 아무도 힘든 것을 내색하거나 티노를 탓하는 사람은 없었따. 묵묵히 티노를 따라 걸으며 위험에 대비할 뿐이었다.

 그런 길을 택해서인지 아니면 일행의 흔적을 찾지 못한 것인지는 몰라도 다행히 실버 문 기사단이나 다른 무리의 추격은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가는 길에 몇 번 오크들과 샤벨타이거 같은 맹수를 만났다. 오우거라면 몰라도 그 정도는 심기가 날카로워진 일행의 검을 피할 수 없었다. 쌓인 것이 많았는지 홀은 호위라는 자신의 신분도 망각한 채 몬스터와 맹수들을 무섭게 도륙했다.

 그렇게 길도 없는 깊은 산속을 사흘간 더 걸어간 일행은 마침내 파로스 자작 성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봉우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기가 마지막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소르단 강과 소르단 평원입니다.”

 티노의 말에 행색이 말이 아니게 변한 사람들의 눈빛이 밝아졌다. 그들의 시야에 폭이 백 보 이상 되는 넓은 강과 그 너머로 펼쳐진 광활한 초원이 들어왔다. 그리고 나무로 만든 긴 다리와 그 다리를 향해 나 있는 대로가 보였다.

 “파로스 자작령에만 들어서면 안전할 겁니다.”

 도란의 설명에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이 안전한 이유까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저기 보이는 초소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포진해 있을 기사들입니다.”

 도란이 가리키는 곳은 파로스 영지와 이어지는 긴 다리가 시작되는 곳에 자리한 초소였다. 먼 거리지만 상당한 인원이 그곳을 지키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시선을 조금 더 돌려 긴 강안江岸을 살펴보니 그곳에도 도강을 감시하는 걸로 보이는 병사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었다.

 “선 가드? 저건 선 가드 기사단의 문양인데.”

 필립의 놀란 소리에 시선을 둘러 보니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태양을 상징하는 황금 원이 새겨진 방패를 든 일단의 기사들이 다리 인근에서 숙영을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맙소사! 실버 문으로도 모자라 선 가드까지 합류하다니.”

 지탄이 한숨을 쉬었다. 용병인 아버지와 달리 한때 기사를 꿈꾸었던 그가 유명한 기사단을 모를 리 없었다.

 선 가드 기사단의 이름을 모르는 하룬은 태연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 선 가드 기사단은 어둠의 검이라고 불릴 만큼 은밀한 행사로 유명한 실버 문과 달리 강력한 무력으로 집단전에 특화된 공식 서열 세 번째의 기사단이었다.

 “인원을 보니 선 가드가 모두 동원됐군요.”

 도란이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실버 문이 그동안 우리를 적극적으로 쫓지 않았던 이유를 알겠군. 우리가 추격을 따돌린 것이 아니었어. 이미 로템을 통해 우리의 목적지를 알고 있는 상황이라 우리를 독 안에 든 쥐로 만들 의도였어.”

 데브론 역시 목소리가 심각했다.

 빨리 온다고 왔는데도 이미 기사단들이 병력을 배치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휴쥐락에서 만난 실버 문 기사들이 마법 통신으로 상황을 전달했음이 틀림없었다.

 “흐유.”

 사람들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런 상태에서 틈을 노려 도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돌아서 한참 아래로 내려가면 어떨까요?”

 이제까지 오면서 많이 힘들었는지 별말이 없던 브리엘라의 말이었다.

 “강을 따라 내려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내려가면 강폭이 더 넓어지고 엄청난 높이의 절벽 지대가 나타납니다. 그 절벽 지대가 끝나면 다시 초원 지대가 나타나는데 그곳은 마물의 세상으로 알려진 데몬랜드라서 건너갈 수 없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강을 따라 올라가는 길을 택해야 하는데 우리 위치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시도라고 보입니다.”

 도란의 설명은 자세했다. 근처의 지형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감탄하는 하룬의 시선이 쑥스러운지 낮게 속삭였다.

 “이곳이 제 고향입니다.”

 어쩐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도란과 아이들은 이곳에 가까워질수록 움직임에서 활력이 느껴졌었다.

 “일단 오늘은 이곳에서 쉬면서 방법을 의논해 봅시다.”

 데브론의 말에 일행은 쉴 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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