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새로운 여행 (19/278)

《새로운 여행》

 하룬과 재수 4인방이 향한 곳은 도란이 미리 알려 준 서문 근처의 작은 여관이었다. 용병들을 상대하는 큰 여관이 아니라 규모는 작았지만 방도 제법 깨끗하고 음식도 괜찮아 여독을 풀기에는 그만이었다.

 재수 4인방은 자신들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의뢰를 받았다는 말에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지만 하룬은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녀석들은 그를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약속한 일 년 동안은 제대로 부려 먹을 작정이었다. 그러고 나면 제대로 사람이 될 것이다.

 하룬과 재수 4인방은 아침 일찍 서문을 나섰다. 이곳으로 들어왔을 때 이용한 북문처럼 삼엄한 검색이 이루어졌지만 마차도 없는 그들이 걸릴 일은 전혀 없었다.

 “왜 이렇게 빡빡해. 레이디의 짐까지 뒤지다니, 버릇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평소라면 영지병 몇 명이 지키고 있을 곳에 기사까지 배치해 세밀한 짐 수색이 이루어지는 것을 본 시린느가 투덜거렸다.

 “무슨 일이 있긴 한가 본데.”

 “내 생각에도 최근에 황도를 비롯한 이 일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 우리 용병단 지부장도 바깥 공기가 수상하다고 내가 여행가는 걸 극구 말렸거든.”

 필립의 말에 지탄도 동의했다.

 다섯 사람은 그런 의견들을 나누면서 발길을 재촉했다. 다른 영지와 통하는 길이 있는 다른 곳과 달리 이쪽은 한산했다. 도란과 약속한 밀밭의 끄트머리까지 가면서 만난 사람들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어르신!”

 “어서 오게. 기다리고 있었네.”

 데브론과 도란 가족이 미리 와 있었다. 그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스토리 퀘스트의 대상인 소녀와 검은색 옷을 입은 홀이라는 묘령의 여인이 더 있었다. 그들은 엄청난 부피의 짐을 메고 든 상태인 하룬 일행과 달리 배낭 하나씩만 멘 간편한 차림이었다. 마차에 실렸던 짐들은 남작 성에서 그새 다 정리한 듯했다.

 “자, 새로운 식구들이 생겼으니 내가 소개하겠네. 이 아이는 내 조카로 브리엘라라고 하네. 그리고 이쪽은 몸이 좋지 않은 브리엘라를 개인 호위하는 홀이야. 어쌔신 메이지라네.”

 어쌔신 메이지라는 소개에 하룬은 물론이고 재수 4인방의 눈에 호기심이 차올랐다.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어쌔신 수련까지 받은 마법사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브리엘라와 홀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대신했다. 홀은 일행에게 차가운 태도를 보였다. 그녀의 차가운 눈빛이 브리엘라에게 향하는 호기심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 같았다.

 브리엘라는 병색이 완연한 창백한 얼굴을 가진 소녀였다. 마른 체구에 특별히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함부로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와 맑고 강렬한 눈빛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런 브리엘라와 검은 옷을 입은 홀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이 무척이나 대비되었다. 홀은 움직이기 편하도록 소매와 바짓단을 끈으로 묶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등에는 검을 그리고 팔뚝에는 마법 완드를 찬 차가운 인상을 풍겼다.

 “호위를 맡은 돌풍 용병대의 하룬입니다. 이 네 명은 제 친구들로, 이 친구가 필립이고 이 친구는 지탄입니다. 여기는 시린느 그리고 이 친구가 라트리나입니다.”

 하룬은 특별히 누구를 지정하지 않고 모두에게 그 자신과 재수 4인방을 소개했다. 이미 둘을 제외하고는 서로 아는 사이였기에 특별히 따로 재수 4인방을 소개할 필요는 없었다.

 “계획이 있다고 들었는데 출발하기 전에 좀 들을 수 있을까요?”

 하룬은 데브론에게 물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노인이 도란보다 한참 윗줄이라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일정에 대해서는 길잡이를 맡은 친구와 만나면 그때 이야기하세. 일단은 사론 습지까지 가야 하네.”

 “사론 습지라면 독무로 가득한 죽은 땅이 아닙니까?”

 들은 적이 있는지 필립이 놀라며 물었다.

 “맞네. 그곳 인근에서 점심을 먹고 길잡이를 맡은 친구와 만나 일정을 의논하자고.”

 “알겠습니다.”

 일행은 사론 습지라는 곳을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창백한 얼굴 때문에 약하게만 보였던 브리엘라는 뜻밖에도 전혀 지치지 않아 놀라움의 대상이 되었다.

 두 번을 쉰 후에 도착해 자리 잡은 곳은 옆으로 쭉 펼쳐진 울창한 숲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언덕이었다. 넓게 뻗은 나뭇가지와 무성한 잎사귀가 제법 넓은 그늘을 만든 곳이었다.

 “이 숲 너머가 바로 사론 습지라네. 티노가 와 봐야 자세한 일정을 세울 수 있겠지만 일단 우리는 이 습지를 끼고 돌아서 저기 보이는 노프록스 산을 올라 목적지까지 갈 생각이네.”

 데브론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높고 거대한 산들이 쭉 이어져 있었다.

 “대장, 난 산 타는 것은 질색인데.”

 시린느는 벌써부터 겁이 나는지 울상이었다. 하긴 그녀는 옷이 엉망이 되는 것을 질색했다. 하다못해 방어구도 몸에 딱 맞게 재단해서 맞추어 입을 정도로 외모와 몸매에 신경 쓰는 시린느의 말에 라트리나가 웃긴다는 듯 피식거렸다.

 하룬은 산적들에게서 얻은 아이템을 확인하고 싶어 빵 몇 개를 들고 바로 눈앞에 보이는 숲으로 향했다. 그간 재수 4인방이 달라붙은 탓에 도무지 시간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오려는 재수 4인방에게 잠시 생각할 것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숲을 들어선 하룬은 이상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뭐야? 꼭 하수구 안에서 맡았던 것과 비슷한데.’

 싸가지를 얻은 하수구의 중심에서 맡았던 것처럼 지독한 악취가 코를 찔렀지만 호기심이 동한 하룬은 더 안쪽으로 향했다.

 어떤 나무인지 몰라도 양팔로 감싸도 다 안을 수 없는 거대한 나무들이 사람 하나 간신히 빠져나갈 정도의 간격으로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다. 거기다 무성한 잎들이 하늘을 가려 간신히 땅에 닿는 몇 줄기 햇살이 아니라면 어둠이 모든 것을 점령했을 땅이었다.

 중간에 돌아갈까 하다가 이제까지 들어온 것이 아까워 오기가 발동한 하룬은 이내 숲을 벗어날 수 있었다.

 “뭐야, 여기는?”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 있는 그의 앞에는 온통 새까만 색깔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쓰러진 나무들도, 흙과 물도 마찬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죽어 있는 곳이었다.

 “여기가 사론 습지란 말이야? 으으! 냄새 한번 죽인다.”

 이건 용병 아카데미의 하수구보다 더 심했다. 악취도 악취지만 몇 번 들이마신 것만으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주변 공기는 심각하게 오염되었다.

 그나마 중독되었다는 안내음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독 기운은 하수구보다 약한 듯했다.

 습지의 가장자리에는 시꺼멓게 변색된 땅이 보였고, 그 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것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환경을 보니 자연스럽게 싸가지가 생각나 녀석을 소환 대기했다.

 녀석은 대기 상태에서도 썩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주인, 어디서 좋은 냄새가 난다.

 -좋은 냄새라고? 여긴 썩어서 죽어 버린 습지인데.

 -흐흐흐. 흐읍. 황홀해! 이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냄새야. 제법 강력한 독들이 오랫동안 쌓이고 쌓여 뿜어내는 향긋한 냄새가 날 유혹하네.

 역시 하수구 깊숙한 곳에서 악취와 함께 살았던 녀석다운 말이었다.

 -미친! 이게 향긋한 냄새라고?

 -흐흐흐. 내 미각은 주인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다양한 생물들이 썩어서 만들어 내는 각양각색의 부식독들은 물론이고, 저 깊은 곳에서 독들을 먹고 사는 놈들의 그 달짝지근한 육질과 육즙을 생각하니 절로 침이 나와. 더구나 이건 내게는 하락한 능력치를 복구시킬 수 있는 영양식이라고.

 정말 지저분한 놈이었다. 먹을 게 없어서 저런 썩고 오염된 것들이 맛있다고 침을 흘리다니.

 ‘가만! 혹시?’

 아까 데브론이 이 습지를 끼고 돌아서 건너편에 보이는 노프록스 산으로 향한다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야, 싸가지. 혹시 너 이거 흡수할 수 있니?

 -당연하지. 엄청난 양이라 다 흡수하려면 위대한 나의 능력으로도 시간이 좀…… 많이 걸리겠지만 얼마 정도야 간단하지.

 -그렇단 말이지.

 하룬은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너, 이 독들을 흡수할 때 정령력이나 마나가 필요하냐?

 -소환에 필요한 마나야 어차피 필요하겠지만 내 몸에 좋은 걸 먹는데 더 이상의 힘이 무슨 필요겠어? 웬만하면 머리 좀 굴리고 살지, 주인?

 -이게 또 기어오르지?

 당장 하룬의 말이 사나워지자 찔끔한 싸가지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럼 널 소환할 마나만 필요하다 이거네.

 -당연하지. 아니, 거기다 해독약도 있어야지.

 그랬다. 녀석의 독에 중독되면 말짱 헛수고다.

 -네 독 기운을 봉인한 상태에서 흡수하는 게 가능한 거야?

 -그건 안 되는데. 마나가 부족해.

 아무튼 제약이 한두 가지가 아닌 골치 아픈 녀석이다.

 -그럼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네 독에 중독되지 않으려면 얼마나 떨어져 있으면 되는 거냐?

 -한 이십 보 정도 떨어지면 되지 않을까, 주인?

 그 정도라면 문제없었다. 심령으로 연결된 사이이니 웬만한 거리가 떨어져도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혹시 이 습지에 사람이 지나갈 정도로 독 기운이 약한 길을 찾을 수 있겠어?

 -그거야 일단 나가 봐야 알지. 하지만 그 정도는 간단하다고. 없으면 만들면 되니까.

 하긴 독을 흡수할 수 있으니 가능할 것이다. 다만 마나가 문제겠지.

 -좋아. 그럼 일단 나와서 독 기운이 약한 길이 있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의 거리인지 한번 살펴봐.

 -오케이!

 “소환!”

 싸가지를 소환하자 녀석은 기분이 좋은지 평소에는 축 처져있던 붉은 꼬리를 세우고 안개가 자욱한 습지로 날아갔다. 움직이면서 독을 흡수하는지 녀석이 날아가는 곳에는 안개 사이로 아무것도 없는 길이 나고 있었다.

 녀석이 돌아온 것은 마나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안 그래도 부르려 했는데 용케 알고 돌아온 것이다.

 “주인, 여기 정말 좋은 곳이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내가 이야기한 길이 있어?”

 “응, 독 기운이 엷게 퍼진 곳이 있었어. 해독약만 먹으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길이 세 군데 정도 있더라고. 거리는 인간의 걸음으로는 반나절 정도 걸릴 거야. 하지만 중간 중간에 지독한 독 덩어리들이 뭉쳐 있어서 그냥은 못 지나가.”

 “네가 흡수할 수는 있는 거야?”

 “당연하지. 내 능력을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이 위대한 능력의 주인공인 싸가지의 주인이 되어 가지고 그렇게 모르면 어쩌겠다는 거야?”

 “알았어. 너 잘났다!”

 또 성질을 건드리는 싸가지이지만 이번에는 참았다. 그의 능력보다 월등한 녀석에게 잠시 질투가 났지만 어쨌든 능력있는 녀석을 부하로 둔 것에 만족했다.

 “좋아. 그럼 이따가 내가 신호를 보내면 나와서 물 밖으로 나온 단단한 땅을 찾아 주변의 독들을 다 흡수해 버려. 어때, 가능하겠어?”

 “당연하지. 내 뛰어난 능력으로 그 정도야, 뭐.”

 “좋아. 이따가 부를 테니 지금은 조용히 해.”

 “쩝쩝! 아, 맛있겠다.”

 돌아가는 싸가지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 차서 들떠 있었다. 해독약을 먹은 하룬은 아쉬웠다.

 “이 녀석을 부릴 수 있는 마나가 충분하고, 중독만 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사기적인 캐릭터가 될 수 있을 텐데. 하긴 그럼 완전히 게임의 밸런스가 무너지겠지.”

 비록 건방지고 싸가지없긴 하지만 겨우 10레벨의 그가 소유하는 것이 희한할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지닌 정령이었다. 비록 그의 마나 때문에 불과 몇 초밖에 쓸 수 없지만 무협 게임으로 치면 이기어검과 같은 놀라운 능력을 가진 싸가지였다.

 하룬은 일단 해독약을 복용해서 종독을 풀고는 다시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사교성이 좋은 시린느는 그새 브리엘라와 붙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여서 식사하고 있었는데 그사이에 못 보던 인물이 생겼다.

 “하룬 씨, 이 친구가 티노랍니다. 검술이나 치료도 어느 정도 할 줄 알지만 특기는 길을 찾아내는 능력이죠.”

 그를 맞는 도란의 곁에서 티노로 추정되는 인물이 일어났는데 외마가 심하게 정상을 벗어나 있었다.

 “하룬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티, 티노라고 부르세요.”

 티노는 난장이에 가까운 단신이었지만 그 키에도 몸은 균형 잡혀 있었다. 거의 세피만 한 키지만 얼굴에는 굵은 주름살들이 있고, 눈동자가 심하게 떨릴뿐더러 상대와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티노가 우리에게 자작 성으로 가는 길을 안내할 겁니다.”

 “부탁합니다, 티노 씨.”

 “네, 네……!”

 황송하다는 듯 말까지 더듬는 티노였다.

 짧은 순간이지만 하룬은 그가 오랫동안 부림을 받았던 처지였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잔뜩 주눅이 든 태도도 그렇지만 사람의 눈을 감히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의 모습에 왠지 측은함과 함께 화가 나려고 했다. 변경인으로 살아야만 하는 자신의 현실이 그를 통해 투영되었던 것이다.

 “일단 티노에게 설명을 듣지요. 그가 이 근방을 미리 정찰했으니 안전한 길로 안내할 겁니다.”

 “네.”

 하룬이 자신 몫으로 남겨 둔 수프 그릇을 들었을 때 벌써 자신의 빵과 수프를 다 먹어 치운 티노에게 도란이 물었다.

 “티노, 살펴본 것과 우리의 예상 노정은 어때?”

 “네. 일단 이 사론 습지를 끼고 있는 숲 외곽을 따라 이틀 정도를 걸으면 사론 강과의 경계인 높은 언덕이 나옵니다. 만 하루 거리의 그 언덕의 아랫부분을 따라 걸으면 이쪽과 반대편이 나오지요. 그럼 다시 사론 습지를 끼고 이틀 정도 걸으면 이곳의 건너편입니다. 그곳에서 저기 보이는 노프록스 산까지는 반나절 정도의 거리입니다. 쭉 직진만 하면 노프록스 산맥에서 가장 완만한 경사를 가진 곳이 나옵니다. 비록 길은 나 있지 않지만 그곳으로 올라가면 산맥을 타기에 가장 좋을 겁니다.”

 티노는 사람들을 대할 때와 달리 이때만은 눈을 빛냈다.

 “예상되는 위험은?”

 데브론이 식사를 마치고 물었다.

 “사론 강과 경계를 이루는 높은 언덕 근처는 갈색 오크들의 영역입니다. 그냥 통과하면 두세 시간이면 되는 거리지만 오크들으 피해야 합니다. 인간에게 배워 농사까지 지을 줄 아는 이 갈색 오크들은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지는 않지만 침입자에게는 잔인한 부족입니다.”

 “으음, 그들을 피하려면 할 수 없이 언덕의 아랫부분을 따라 움직여야겠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위험은 또 있습니다. 그나마 덜 썩은 습지 외곽에는 곳곳에 악어들과 리자드맨들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제길.”

 데브론이 가볍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위험을 피하려고 이곳으로 향했는데 만만치 않은 위험 요소들이 산재한 탓이었다.

 “그럼 차라리 로템이 가려던 길을 선택하는 것은 어떨까?”

 도란이었다.

 “안 됩니다. 그 길은 중간 목적지인 휴쥐락까지 열흘이 걸리는 먼 길입니다. 그리고 이쪽 길보다 훨씬 위험합니다. 제 심장이 그곳으로 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쪽 길만 쳐다봐도 제 심장이 터질 듯 아파 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아예 생각도 하지 말아야겠군.”

 가벼운 한숨을 내쉰 도란은 의아한 하룬의 시선을 마주하고는 바로 설명했다.

 “아! 티노는 위험을 가지하는 본능이 뛰어납니다. 그는 극도의 위험에 직면하면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룬과 재수 4인방은 그제야 티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도 티노처럼 위험 본능이 극도로 발달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불안하다는 표현으로 위험을 피해 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이봐, 키 작은 친구. 습지를 가로질러 가는 길은 없어? 가로지르면 꽤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잖아.”

 답답한 것을 잘 참지 못하는 지탄이 물었다. 녀석은 이미 티노는 무시해도 좋을 상대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 마치 제 하인 부리듯 말했다.

 “안 돼!”

 “없어!”

 티노 대신 데브론과 도란이 동시에 소리쳤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데브론이 티노 대신 침착하게 설명했다.

 “사론 습지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땅이다. 이제껏 습지로 들어간 생물체는 그것이 무엇이든 아무도 살아나오지 못했다.”

 “무슨 전설이라도 있나 보네요, 어르신?”

 필립이 흥미롭다는 듯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예전에 이 근방에서 피닉스가 나타난 적이 있었다고 하네.”

 “피닉스요? 불에서 태어나 불을 뿜어내는 전설의 새를 말하는 거예요?”

 이번에는 브리엘라의 호기심 가득한 질문이 이어졌다.

 “물론 진짜인지 아니면 가짜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다들 진짜라고 믿었지. 제국시대 이전이었으니 천 년도 더 지난 지금에선 그 사실 여부야 알 길이 없지. 당시 이 지역을 차지한 왕국 혹은 영주는 피닉스를 이용해 민심을 하나로 묶기 위해 강력한 군세를 동원했다고 해. 전설에 의하면 피닉스를 잡기 위해 이곳으로 여섯 개의 기사단과 한 개의 마법 병단 그리고 이만의 병력을 파견했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이 습지로 들어간 그 누구도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고 해. 그 후로는 감히 이곳에 들어가는 자가 없어졌지. 피닉스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둥지를 튼다고 하니 이런 전설이 있을 법하지. 하나 들어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엄청난 수효의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갔다가 아무도 나오지 못한 일은 역사책에도 기록된 사실이야.”

 가만히 듣고 있으니 완전히 동화 수준의 전설이었다. 아마도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했다.

 아직 나이가 어린 브리엘라와 세페르 그리고 세피의 눈이 몽롱한 것을 보니 머릿속에서 전설이 펼쳐지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 습지를 가로지를 수만 있다면 노정이 며칠이나 단축될 수 있습니까?”

 뭔가를 생각하던 하룬이 티노에게 물었다.

 “그, 그거야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휴쥐락까지는 이틀에서 사흘의 거리이니 저쪽 길과 비교하면 적어도 엿새는 빨라질 겁니다. 더구나 몬스터들을 만날 위험도 현저하게 줄겠지요.”

 “그 말이 맞을 거야. 이 습지의 악취와 독 기운 때문에 습지를 향한 경사지에는 몬스터가 거의 없거든. 악취와 독 기운이 수시로 바람을 타고 산으로 올라가니 당연한 일이지. 인간들이야 머리가 있어 나무들을 빽빽하게 심어 방어 벽을 만들었지만 저쪽은 그럴 수가 없지.”

 하룬은 이제야 바로 앞에 보이는 울창한 숲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 숲은 사론 습지의 악취와 독 기운을 인위적으로 막기 위해 조성한 방풍림이었던 것이다.

 “엿새라?”

 하룬이 심각하게 엿새라는 말을 되뇌자 데브론과 도란의 눈에 기묘한 빛이 흘렀다.

 ‘뭔가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두 사람의 머릿속을 지나가는 생각이었지만 다음 순간 고개를 내저었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니까.

 “데브론 씨, 절 얼마나 믿습니까?”

 “무, 무슨 소리인가, 하룬?”

 뜬금없는 하룬의 말에 데브론은 거의 표정 없는 단단한 가면을 벗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상했는지 하룬을 주시했다.

 “아, 질문이 잘못 되었군요. 아직 믿기에는 신뢰가 덜 쌓였을 테니.”

 “아니, 믿네. 자네와 친구들의 능력을 믿으니까 우리가 이렇게 호위를 부탁하지 않았겠나?”

 데브론은 혹시나 하룬이 호위를 철회하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그의 정령 암기술에 반해 다른 길을 선택했는데 이제 와서 철회하면 정말 방법이 없는 것이다.

 “제게 저 습지를 통과할 방법이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뭐, 뭐라고!”

 하룬의 말에 놀란 사람은 데브론만이 아니었다. 도란은 물론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저에게는 습지를 가로질러 안전한 길을 찾을 능력이 있습니다. 물론 믿고 안 믿고는 여러분 마음이지만요.”

 너무나 뜻밖의 말에 데브론은 표정 없는 얼굴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경악한 표정을 드러냈다.

 “정말인가? 확실히 안전한 통로를 찾을 수 있는 건가?”

 “네, 절 믿는다면 안전하게 습지를 통과할 수 있습니다.”

 거듭된 확인에도 하룬이 자신 있어 하자 좌중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사실의 진위도 그렇지만 그 말이 사실이 아닐 경우는 모두의 죽음만이 있을 뿐이니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난 못 믿겠어요. 비수 실력은 인정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4급 용병 따위의 말이 사실일 리 없잖아요. 안 그래도 저 습지에서 희미하게 풍겨 오는 악취와 독 기운에 벌써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인데.”

 홀이었다. 마차 안에서 브리엘라와 함께 숨어 있던 그녀도 놀라운 암기 실력은 보았지만 그래도 하룬의 말을 믿기가 힘들었다. 그녀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찬가지 감정인 듯 흔들리는 눈빛을 드러냈다.

 “어쩌면 가능할 수도. 우리 대장의 능력 중 발군인 것이 정령술이니 정령을 이용한다면 가능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나마 긍정적인 의견을 낸 것은 라트리나였다.

 “내가 알기로 독과 관련된 정령술은 없는데.”

 필립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 비록 자신들의 몹쓸 병을 치료할 정도로 치료 분야에 대한 능력은 인정하지만 독은 전혀 다른 분야였다.

 “지금 문제는 가능한지 여부가 이닙니다. 습지를 건너다가 밤이 되면 정말 곤란해집니다.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하룬의 단호한 말에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던 데브론과 도란의 눈에 일순 갈등의 빛이 교차했다.

 “후유, 일단 이 문제부터 매듭을 지어야겠군.”

 “도란, 자네의 의견은?”

 “그거야 어르신이 결정할 문제지요. 다만 제가 겪은 바로는 어린 나이지만 함부로 식언할 사람은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도란의 대답에 데브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더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대장 소리를 듣는 것만 보아도 하룬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좋아, 그럼 자네만 믿겠네. 우리 모두의 목숨을 자네에게 맡겨 보지.”

 마침네 데브론이 힘든 결정을 내렸다. 사람들의 얼굴은 불안해 보였지만 일단 결정이 났으니 부지런히 이동할 준비를 했다.

 “하룬 님, 여기.”

 “뭡니까, 이게?”

 숲 앞에 도착하자 티노가 뭔가를 그에게 내밀었다. 작고 둥근 알약들이었는데 은은한 향기가 났다.

 “혹시 몰라서 준비한 해독제입니다.”

 “해독제요? 흐음.”

 향기를 맡아 보니 머릿속까지 청량해지는 것 같았다.

 약초학과 치료 방법을 전수받은 헥터에게 받은 헤독제에는 없는 성분이 포함된 것 같았다.

 “혹시 시알타노가 들어간 겁니까?”

 “어, 어떻게 그걸?”

 하룬의 입에서 시알타노의 이름을 듣는 순간 티노는 펄쩍 뛸 정도로 놀랐다. 시알타노는 노련한 약초꾼들을 제외하면 거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희귀한 약초였던 것이다.

 그의 태도에 하룬이 미소 지었다.

 “저도 몇 가지 치료약의 비법을 알고 있습니다. 제게 약초학을 가르쳐 주신 스승에게 전수받은 것인데 그중 시알타노라는 약초도 들어 있었습니다. 스승님은 그걸 구하지 못한 것을 무척 아쉬워하셨습니다.”

 헥터는 시알타노가 있었다면 해독제를 복용하는 순간 몸 안에 활력이 차고 청량감을 느낄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하며 아쉬워했었다.

 “누가 만든 겁니까?”

 “부족하지만 제가 직접 만든 겁니다.”

 하룬은 쑥스러워하는 티노를 이제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보았다. 생각보다 티노는 대단한 인물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사론 습지를 끼고 이동할 생각이었기에 혹시 몰라서 준비한 겁니다.”

 “덕분에 위험이 더 줄었군요. 다행입니다.”

 “그, 그게 한 시간 정도밖에는 약효를 발휘할 수 없어서…….”

 그는 마치 죄라도 지은 것처럼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는 정말 순수한 사람이었다.

 “아닙니다. 이걸로 되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티노는 안심했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해독제를 나누어 주었다.

 어두운 숲을 빠져나와 습지를 마주한 하룬은 모두에게 해독약을 복용하도록 했다. 다들 코를 찌르는 악취와 찌릿찌릿한 독 기운에 놀라 황급히 해독약이나 포션을 복용했다.

 “이제 길을 찾을 테니 모두 제가 움직이는 곳만 따라 걸으면 됩니다. 다만 길을 찾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이십 보 정도의 거리를 두고 따라오십시오.”

 하룬은 일행들에게 등을 보인 상태에서 낮은 목소리로 싸가지를 소환했다.

 “싸가지, 나와.”

 “흐읍, 음하하하! 드디어 식사 시간이군.”

 녀석은 전에 없이 기분이 좋은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주름진 얼굴에 미소 지었다. 하지만 하룬은 녀석의 소환과 동시에 중독되었다는 당연한 안내음에 서둘러 해독약을 복용했다.

 “이제 독 기운이 약한 길을 찾아. 그리고 우리 일행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길을 만들면서 그 주변의 독을 다 빨아들여. 어때, 할 수 있겠지?”

 “흐흐. 그거야 당연지사! 이 싸가지의 위대한 능력으로 그 정도도 못 할까 봐. 이참에 에센셜 정령의 힘을 확실하게 보여 주지. 흐흐흐. 이까짓 독들 마음껏 먹어 주지.”

 “그럼 앞장서.”

 싸가지는 네 쌍의 날개를 천천히 흔들며 몇 번 방향을 잡고 코를 씰룩거리더니 드디어 한 곳으로 이동했다.

 “간격을 충분히 두고 천천히 따라오세요.”

 하룬은 비록 싸가지의 독에 대한 능력을 믿고는 있지만 그래도 걱정스러워서 녀석과 충분한 거리를 두었다.

 멀찌감치 떨어져 앞장선 싸가지에게 받는 독 데미지는 거의 없었다. 소환되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중독되었다는 안내음도 들려오지 않는 것을 보면 더 이상 독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싸가지는 독 기운이 엷게 퍼진 곳을 찾아 옆쪽으로 이동했다. 다른 사람들은 악취와 독에 대한 공포로 앞쪽의 상황을 잘 몰랐지만 하룬은 싸가지가 지나가는 곳 주위가 맑게 정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단순히 안개라고 생각했던 것은 실제로는 극독을 함유한 독 안개였다. 독을 잔뜩 함유한 끔찍한 안개 속으로 들어간 싸가지는 독을 마음껏 흡수하며 넓은 길을 냈다.

 바람 한 점 없는 습지여서 그렇게 난 길은 한동안 독 안개의 침습을 받지 않았다.

 온통 회색의 안개뿐인 습지에 마치 굴처럼 이리저리 휘어지는 길을 걷는 사람들의 심장은 죽음에 대한 공포로 미칠 듯 뛰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박동이 느려졌다. 긴장감은 여전했지만 공포는 많이 진정된 상태였다.

 이제 다른 사람들도 하룬이 앞장선 길 주변에 마치 벽처럼 꿈틀대며 아주 조금씩 안으로 좁혀 들어오는 독 안개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공기의 유동이 거의 없었고 길은 폭이 넓어 걱정할 일은 아니었지만 독에 대한 공포로 사람들의 발걸음은 자연히 빨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룬의 십 보 뒤까지 한 덩어리가 되어 따랐다.

 하룬은 마나가 다 소진되기 전에 싸가지의 소환을 해제하고는 마나 포션을 마셨다. 그의 마나로는 9분을 지속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다행이라면 싸가지가 이미 상당한 거리를 움직인 덕분에 한동안은 싸가지가 없어도 움직일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든 하룬은 싸가지가 이미 뚫어 놓은 길을 볼 수 있었다. 어떤 곳은 습지 밖으로 드러난 땅이 없어 발목까지 잠기기도 했지만 그들의 발밑은 깨끗하게 정화되어 맑은 물이었다.

 벌써 두 시간 넘게 걸었지만 습지는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긴장 때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하룬의 뒤만 쫓던 사람들의 얼굴에 피로의 빛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룬이 걸음을 멈추었다. 습지 가운데에 제법 넓은 바위가 하나 보였다.

 “잠시 여기서 휴식하고 가지요.”

 하룬의 말에 다들 긴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독이 없는 길이라고는 해도 벌레처럼 몸을 타고 오르는 긴장감은 어쩔 수 없었다. 이곳이야 워낙 죽음의 땅으로 소문난 곳이 아닌가?

 “자네 정말 대단하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안전한 길을 찾아낼 수 있는 건가? 홀이 말하길 마나의 유동으로 보아 정령을 소환했다고 하던데…….”

 이제는 더 이상 가면처럼 딱딱한 얼굴을 포기한 듯 놀란 표정을 짓는 데브론이었다.

 “정령의 힘도 관련이 있지만…… 설명하기가 좀 그렇군요.”

 하룬은 그에게 배운 교훈대로 자신의 밑천을 드러낼 이유를 찾지 못했다.

 “정령의 힘이 아니라면 대체 뭔가? 자네에게 무슨 대단한 아티팩트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마나를 주기적으로 보충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이렇게 안전한 길을 찾아내는 것을 보니 정말 신기하군.”

 데브로눈 아니라 도란과 티노도 그를 쳐다보는 눈에 경탄의 빛이 역력했다. 마법사인 홀도 놀란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지만, 특히 티노의 경우는 완전히 경외의 눈으로 그를 바라볼 정도였다.

 재수 4인방은 이미 하룬에게 한 번 놀란 적이 있어 덜했지만 그래도 신기하고 궁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마나의 소비가 심한 모양이군.”

 “네, 생각보다 심하네요.”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시간 동안 벌써 하급 마나 포션을 네 병이나 마셨다. 재수 4인방이 챙겨 온 하급 마나 포션은 모두 열 병이었다. 테인에게 선물로 받은 중급 마나 포션이 있긴 하지만 워낙 비싼 물건이라 마실 때마다 아까워하는 하룬이었다.

 잠시 하룬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데브론이 홀을 불렀다.

 “홀, 마나 포션 좀 가져와라.”

 “넷!”

 데브론의 말에 홀은 등에 멘 마법 배낭에서 몇 개의 유리병을 꺼내 들고 다가왔다.

 “중급 마나 포션이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도움이 될 거야.”

 데브론은 홀의 손에서 네 개의 마나 포션을 잡아채 하룬에게 건넸다. 그걸 바라보던 홀은 아까웠는지 빈 손바닥을 부르르 떨었지만 데브론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런 건 절대로 사양하지 않습니다.’

 벨이 준 정보대로 작은 유리병 안에 든 포션의 색깔은 중급을 표시하는 은색이었다. 트롤의 피와 수백 개의 기타 재료 그리고 신성력이 가미되어 만들어진 은급 마나 포션은 3서클 마법사의 마나를 한순간에 회복시켜 줄 정도로 강력한 효과를 가졌다.

 꿀꺽!

 워낙 적은 양이어서 병의 주둥이를 입에 대고 끝을 드는 순간 포션이 모두 목으로 넘어가 버렸다. 입안에 감도는 아주 각별한 향취를 음미하는 사이 청량한 기운이 몸으로 퍼져 나갔다.

 -마나를 모두 회복했습니다.

 반가운 안내음이 들려오며 힘과는 다른 그 어떤 것이 몸과 마음을 충만하게 만들었다. 서서히 마나가 차오르는 하급과 달리 순식간에 마나가 회복되는 것을 보니 역시 중급다웠다.

 “약효가 무척 좋군요. 마나가 벌써 다 회복되었네요.”

 놀라는 하룬의 얼굴을 본 데브론이 가볍게 웃었다.

 “다행이군.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이런 놀라운 능력을 가졌는지 모르겠군.”

 이거야 욕인지 칭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벨의 정보를 보면 마나 포션의 추가 효과는 계속 유지된다고 했다. 즉, 마나가 다시 소모되더라도 포션의 원래 효력만큼은 꾸준하게 소모된 마나를 채워 준다는 말이다.

 하룬은 남은 세 병의 포션이 좀 아깝긴 했지만 선뜻 데브론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자네가 가지고 있다가 요긴하게 쓰게. 용병치고 포션 하나 제대로 챙겨 가지고 다니지 않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을 거야.”

 그의 말에 하룬은 두말없이 포션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고맙습니다. 급하게 출발하는 바람에…….”

 그런 하룬을 쳐다보는 재수 4인방의 시선이 조금 불량스러웠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이런 물건을 공짜로 준다는데 거절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었다. 다시 앞선 하룬은 이십 보 정도 앞으로 나간 후 싸가지를 소환했다.

 “많이 흡수했냐?”

 “흐흐! 배 터지게 먹어서 너무 행복해, 주인.”

 “또 먹어라.”

 “알았어, 주인.”

 싸가지는 정말로 만족스러운지 평소의 그 불량스럽고 싸가지 없는 말투가 아니라 충성심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게 그렇게 좋은가? 정말 더러운(?) 자식이야.’

 하룬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이제는 어느 정도 긴장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힘차게 걸었다.

 중급 마나 포션의 효과는 대단했다. 중간에 두 번을 더 쉬었지만 마나는 여전히 풀로 차 있을 정도였다. 그의 마나량이 워낙 적은 탓도 있지만 포션의 효능이 대단했다.

 미리 준비한 샌드위치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하룬은 아까운 마나 포션을 한 병 더 먹고 나서야 겨우 습지를 벗어날 수 있었다.

 ‘빌어먹을. 아까워.’

 조금만 무리했으면 중급 마나 포션을 먹지 않아도 되었으리란 것을 습지를 벗어나고서야 알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습지를 벗어나 초지에 닿자 사람들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자네가 정말 큰일을 했네. 좀 힘들더라도 산기슭까지 가도록 하세. 조금만 무리하면 자작 성까지는 열흘이면 갈 수 있을 거야.”

 데브론은 만족스러운지 하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의 덕분으로 엿새라는 시간을 단축한 것은 물론 당연히 만났어야 할 몬스터들과의 조우를 피했으니 정말 대단한 공적을 쌓은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야 홀가분하게 호흡하며 가까이 보이는 노프록스 산을 향해 가벼워진 발걸음을 내디뎠다.

 산기슭에 자리를 잡은 일행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두 아이도 그렇지만 독 때문에 잔뜩 긴장했고, 이후에도 쉬지 않고 강행군을 한 터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로가 극심했다.

 ‘이제 겨우 아이템들을 볼 시간이 되었구나.’

 옆에 누운 필립과 지탄이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든 것을 확인한 하룬은 먼저 자신의 상태 창을 확인했다. 산적들까지 처치했으니 상태를 확인하는 마음이 설레었다.

『이름: 하룬

종족: 인간

직업: -

레벨: 10

칭호: 용병대장(외 4개)

생명력: 490

마나: 500

정령력: 350

힘: 48(+15)     체력: 39

지식: 22        지혜: 40

행운: 27        민첩: 33(+12)

지구력: 13      심안: 8

집중: 16        S.P.: 83

명성: 600       통솔력: 250

화염 저항력: +10%

마법 저항력: +10%』

 싸가지를 소환해서 장시간 독을 흡수한 덕분인지 정령력이 100이나 올랐고, 산적들로 인해 소울 포인트도 이미 전직 조건을 충족시켰다. 일일이 안내되는 보스급들과 달리 1포인트씩 올라가는 경우는 안내가 되지 않아 소울 포인트는 생각보다 많이 쌓여 있었다.

 “스킬 창.”

『[패시브 스킬]

센스 소드: 초급 Lv.1(92.00%)/Lv.10

정령 유도 암기술: 초급 Lv.1(7.23%)/Lv.5

정령 합체 암기술: 중급 Lv.1(51.02%)/Lv.5

응급 치료: 초급 Lv.1(2.50%)/Lv.3

치료약 조제: 초급 Lv.1(2.30%)/Lv.5

함정 설치 및 해체: Lv.1(3.00%)/Lv.3』

 싸가지를 몇 번이나 소환한 덕분에 두 암기 스킬의 경험치가 꽤나 올랐다.

 살벌한 실전으로 센스 소드의 경험치가 상당히 올라 곧 레벨이 오를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진 하룬은 이번에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보상금으로 받은 100골드가 들어와 있었다. 다음으로 테인에게 받은 마나 포션이 든 주머니를 기분 좋게 만지던 하룬은 눈을 돌려 새로운 아이템들을 찾았다.

 역시 새로운 물건들로 나머지 칸들이 가득 차 있었다. 하룬은 그것들을 하나씩 꺼냈다. 아이템을 확인한 하룬의 얼굴이 어느 순간부터 심하게 일그러지더니 급기야는 내심 비명까지 지르고 말았다.

『볼일을 본 후 사용하는 넓적한 마른 나뭇잎들

몇 년간 빨지 않아 지독한 악취가 나는 속옷들

악성 무좀균이 대량 서식하는 발 덮개들

바람나서 나간 늑대의 목줄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누렇게 변색된 여자 속옷

사망한 산적의 유언장(글을 모르는 산적이 썼기 때문에 절대 번역 불가)

부서지기 일보 직전인 내구력 0의 낡은 단검

대머리 산적이 사용했던 반쪽짜리 가발

첫눈에는 누구나 금덩이로 오인하는 10kg짜리 바위

돼지도 먹지 못할 곰팡이가 핀 딱딱한 빵

치질약(사실은 변비약)

어제 사용한 불쏘시개

말라붙은 늑대의 중요 부위(사실 이것 때문에 몇 명이 죽기도 했다)

말라붙었지만 살점이 약간 남은 정체불명의 뼈다귀들…….』

 “이게 다 뭐야?”

 황당했다. 어떻게 이런 것들이 나오는지 기가 막혀서 한동안 멍한 상태로 정신을 놓았던 하룬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더러운 산적 놈들. 겨우 이딴 거나 가지고 다니다니. 빌어먹을.”

 졸개들이야 그렇다 치고 분명히 보스를 둘이나 잡았다. 하지만 쓸 만한 아이템은 아예 없었다.

 “이건 사기야! 이럴 순 없어! 분명히 좋은 게 있을 거야.”

 다들 잠에 곯아떨어졌기에 망정이지 하룬이 발광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앞으로 그를 상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벤토리를 열고 다른 아이템을 찾는 하룬의 손길에 죽은 듯 가만히 있던 싸가지의 몸이 심하게 떨렸다.

 “에이, 재수 없어!”

 분을 이기지 못한 하룬의 눈에 떨고 있는 싸가지의 모습이 들어왔다.

 ‘혹시?’

 하룬은 싸가지를 소환 대기시켰다.

 -너!

 -주, 주인. 미안해.

 사색이 된 목소리였다. 혹시나 싶었는데 싸가지가 중간에 무슨 짓을 한 것이 맞았다. 눈에서 불길이 솟아났다. 싸가지없는 것은 그렇다 치고 이제는 아이템까지 건드리다니. 녀석을 잡다가 중독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소환!”

 소환된 녀석의 몸이 사정없이 떨렸다. 자신이 한 짓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일단 맞고 나서 이야기하자.”

 “자, 잠깐! 주인아, 분명히 나 준다고 해 놓고 이, 이렇게 무섭게 굴면 어떡해?”

 녀석의 목소리는 닥쳐올 무자비한 폭력을 예감하듯 공포에 질려 떨리고 있었다. 하룬은 주먹 쥔 손에 잔뜩 힘을 주었지만 싸가지의 말이 걸려 잠시 멈칫거렸다.

 “분명히 아까 이 녀석들 것은 나 준다고 했잖아.”

 “내가 언제?”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까 싸가지와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하니 녀석이 맛있는 것들이 있다면서 자기 달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분명히 그랬단 말이야.”

 녀석이 안 그래도 징그러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억울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거야…… 에잇!”

 욕이 터져 나오려고 했지만 하룬은 그 대신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분명히 녀석에게 허락한 것은 자신이었다. 하룬의 태도가 약간 진정되는 것처럼 보이자 싸가지는 여전히 떨면서도 말을 늘어놓았다.

 “난 에센셜 정령이라 모든 만물의 본질인 마나를 흡수해야만 성장할 수 있다고. 안 그래도 갇혀 살다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능력도 별로 없는 상태에서 주인 때문에 스킬까지 억지로 진화시키는 바람에 내 능력이 현저하게 하락했다고. 나도 이젠 아공간도 있어야 하고, 멋있는 스킬도 쓰고 싶어.”

 녀석의 말에 하룬은 분노를 누르고 자세한 설명을 청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녀석의 입을 통해 자세하게 듣고 싶었다.

 “스킬을 억지로 진화시키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정령 유도 암기술을 마스터해야만 스킬이 정령 합체 암기술로 진화하는데 주인의 의지가 너무 강력해서 내 능력을 모두 끌어다 써서 억지로 스킬을 진화시키는 바람에 능력이 너무 약화됐단 말이야.”

 하긴 너무 쉽게 사기적인 스킬을 얻었다는 생각은 이미 하고 있었기에 그것이 녀석의 말에 신빙성을 더했다.

 자신의 레벨이나 평균치를 상회하는 스텟치를 고려해도 사기적인 경향은 있었던 것이다. 그래 봐야 몇 초밖에 사용하지 못할 뿐이지만 남들이 알면 어떻게든 얻으려고 할 위력적인 스킬이었다.

 “그래서 만든 이의 정성과 노력으로 물질의 본질적인 마나가 잘 배도록 제작된 아이템을 통해 순수한 마나를 보충했던 거야. 물론 사론 습지에서 독도 흡수했지만 그것으로는 많이 부족하다고.”

 하룬은 속이 쓰려서 더 이상은 말할 수 없었다. 녀석의 말을 듣고 보니 모든 게 자신 때문이었던 것이다.

 굳이 도망치는 워리어를 꼭 잡을 필요가 없었는데 왜 그 순간 모든 의식과 의지를 집중해서 잡겠다고 욕심을 부렸는지 후회가 되었다. 그 일 때문에 이 사단이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이제 보충은 했냐?”

 “그, 그게 조금만 더 보충하면 될 거 같아. 독은 충분히 흡수했는데 다른 종류의 마나들이 더 많이 필요해. 아이템으로 치면 유니크로 두어 개만 흡수하면 될 거 같은데.”

 입이 떡 벌어졌다. 레어도 아니고 유니크급 아이템이라니.

 벨이 준 정보에도 유니크 아이템은 아직 유저들 사이에 출현한 적도 없었다. 녀석이 흡수한 아이템들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지만 속이 쓰려서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알고 나면 전후 사정을 다 아는 상황이라도 싸가지를 가만히 둘 것 같지 않았다.

 “나도 전직은 해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 아공간도 열지.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위력적인 스킬을 쓸 수 있을 거야. 능력이 있는 내가 항상 옆에 있어야 아직 능력도 부족한 주인을 잘 보살피지.”

 “에라이! 들어가!”

 하룬은 욕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싸가지의 뒤통수를 오지게 갈기고는 녀석의 소환을 해제했다.

 불길처럼 솟았던 분노는 어느새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허탈함과 씁쓸함만이 남았다. 역시 공짜로 얻는 것은 없다. 조금 재수가 있고 없고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빌어먹을! 살기 위해서는 돈도 벌어야겠고, 이 사기꾼 같은 녀석을 위해서는 아이템도 지속적으로 얻어야 하는데…….’

 사실 싸가지의 경이적인 능력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그는 없었을지도 몰랐다. 늘 구박은 했지만 그것은 녀석의 태도가 영 싸가지없어서였지 다른 것은 없었다. 오히려 고마움이 더했다.

 ‘그래도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지. 전직과 진수 형의 복수를 하고 나면 던전이라도 찾아다녀야겠다.’

 참으로 허망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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