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의 활약》
로템 용병대와 함류한 지 사흘이 흘렀다. 이제 하루만 더 가면 처음에 계약했던 파슨 남작 성이 나온다. 그동안 소수의 오크들과 고블린들이 계속 나타났지만 하룬 일행이 합류한 이상 그들 정도는 쉽게 상대하며 정상적인 상행을 할 수 있었다.
이미 많은 몬스터들을 상대한 터라 소수의 몬스터는 돌풍 용병대의 차지였다. 하룬은 불만이 전혀 없었다. 실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기회를 이용해서 네 사람에게 파티 플레이를 철저히 연습시킬 수 있었다.
아침 일찍 대원들을 데리고 수련하고 온 하룬을 찾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도란이었다. 지난 사흘 동안 데브론과 도란은 성실한 수련과 험한 전투를 마다하지 않는 돌풍 용병대에 상당한 호감을 가졌다.
“하룬 씨, 할 말이 좀 있습니다.”
“네, 하시죠.”
“잠시만 이리로 오시겠습니까?”
그는 주변을 경계하며 아이들이 앉아 있던 마부석의 옆자리를 눈으로 가리켰다. 왠지 조심스러운 그의 태도에 하룬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옆에 올라탔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언제나 정중하게 하룬을 대하는 도란이었다. 게다가 식사까지 책임져 주는 그의 부탁이라면 꼭 들어주고 싶은 하룬이었다.
“내일이면 예정대로 남작 성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저와 데브론 님은 도착한 후 이 상행에서 빠지려고 생각 중입니다.”
“아니, 왜요?”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그가 받은 퀘스트의 대상자에게 변화가 생긴 것일까.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이 일로 도란 역시 데브론과 함께 퀘스트의 대상자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상행은 평소와 달리 너무 위험이 많았습니다. 비교적 안전한 길이라 다른 때 같으면 상행 내내 조우했을 몬스터들을 여기까지 오면서 다 만났지요. 더구나 며칠 전에 하룬 님과 동료들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하룬이야 초보 용병이니 사정을 짐작할 길이 없었다. 그냥 듣고만 있는 수밖에.
“데브론 님은 대원들이 화합되지 않은 로템 용병대의 힘으로는 상행을 지키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로템 용병대에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데브론 님과 저는 빠르고 안전한 길을 잘 아는 길잡이를 고용해서 소수의 용병들과 함께 소규모로 이동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분과 저는 이번에 물건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파로스 자작 영지에 안전하게 도착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제 열네 살밖에 되지 않은, 데브론 씨의 조카딸 브리엘라가 이 마차에 타고 있는데 일이 있어서 급하게 가야 하는 형편입니다.”
그 순간 안내음이 들리며 퀘스트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퀘스트를 받았습니다.
『데브론 일행을 호위하여 파로스 자작 영지에 도착하라
내용: 데브론 일행은 로템 용병대를 믿을 수가 없다. 또한 모종의 일로 상행에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다. 데브론과 관계된 소녀를 파로스 자작 영지까지 안전하게 호위하라.
보상: 명성 +200, 현급 100골드, 브리엘라의 선물(?)
실패 시 명성 -200과 차후 의뢰 건수의 대폭적인 감소가 예상된다.』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그가 말한 사람이 이미 받은 스토리 퀘스트의 대상이라는 것은 이제 거의 확실했지만 더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저런! 마차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건 전혀 몰랐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워낙 몸이 허약한 데다 사정이 좀 있어서 그런 겁니다.”
도란은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을 곤란해했다.
“그렇군요. 그럼 저 많은 짐들은……?”
“이동에 필수적인 것들을 빼고는 정리할 겁니다. 상행을 포기하려는 상황이니 마차도 정리할 거고요.”
하룬은 마음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퀘스트를 수락했다.
이렇게 퀘스트가 중복될 수도 있는 줄 몰랐지만 자연스럽게 스토리 퀘스트까지 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좋습니다. 일단 제 일행의 능력을 인정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다행히 파슨 남작령까지만 같이 가기로 계약했으니 문제 될 건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룬 님이 우리를 호위해 준다면 정말 안심입니다.”
도란은 기쁜 듯 환하게 웃으며 앞 마차에서 뒤를 돌아보는 데브론에게 눈짓했고,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 짧은 사이 세페르는 지탄과 많이 친해졌고, 세피 역시 시린느와 라트리나를 졸졸 따라다니더니 이제는 귀엣말을 할 정도로 친해졌다.
다섯이 여행할 때와 달리 뭐랄까, 든든한 느낌이 들고 마음이 푸근해져서 절로 부드러워진 하룬은 더 이상 재수 4인방을 괴롭히지 않았다.
좋은 시간은 금방 지나가는 법일까.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길을 나선 상행은 척후의 다급한 소리에 멈추고 말았다.
“대장! 대장!”
급하게 행렬의 선두로 돌아오는 척후의 발걸음에 뿌연 먼지가 딸려 왔다.
척후의 다급한 음성을 들은 행렬은 누구의 지시도 없었지만 한순간에 멈추었다. 그는 웬만한 일에는 그렇게 소리 지를 사람이 아니었다. 늘 조용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충실한 용병이었다.
“필립, 네가 가서 보고 와.”
“알았어, 대장.”
재수 4인방의 맏이이고 모든 면에서 모범생인 필립이 급하게 행렬의 선두 쪽으로 향했다.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역시 이번 상행은 너무 위험성이 많은 것 같은데요.”
마차에서 내려 불안한 얼굴로 두 아이를 안은 도란이 하룬에게 한 말이었다. 도란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향하는 상행의 앞에는 다소 높은 고갯길이 펼쳐져 있었다.
“역시 오크들인가?”
데브론도 어느새 그들 곁으로 걸어왔다.
“이 앞에 있는 다킨 고개에는 몬스터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고개 근처에는 계곡도 없고, 그 너머는 열매도 달리지 않은 나무들이 울창한 숲이라 몬스터들이 서식할 환경이 안 되는데…….”
도란이 대답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곳에 있을 존재는 하나뿐이지.”
데브론이 알았다는 듯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역시 인간인가요?”
“그렇겠지. 아마도 산적일 가능성이 높아. 다만 의아한 것은 이 근방은 황도와 가까워서 몬스터들은 몰라도 산적들은 거의 소탕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하룬은 궁금한 것이 있었다.
“이런 작은 규모의 상행을 뭐하러 털려고 할까요?”
“원래 산적들은 우리같이 작은 규모의 상행을 터는 게 일반적이네. 호위 용병들의 숫자도 적고, 대형 용병단과도 관계가 없어 후환을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털기에 제격이지.”
도란 역시 그것을 아는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데브론의 말에 동의했다.
순간 하룬은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전투를 앞둔 투기 때문이 아니었다. 비록 게임이긴 하지만 워낙 현실 같은 터라 같은 인간으로 생각되는 도적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상인들과 일꾼들이 모두 마차에서 내려 웅성거리며 테인의 명령을 기다렸다. 아직 회의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때 핀이 하룬을 향해 달려왔다. 체구는 용병에 어울리지 않게 작지만 삼십 대 후반에 경험 많은 중급 용병이었다. 영리한 머리와 상황 판단력이 빠르고 동작이 민첩해서 보통 척후를 책임지는 세 용병들 중 한 명이었다.
“하룬, 빨리 와서 회의에 참석하게.”
“무슨 일입니까?”
“일단 가서 들어 봐. 자네가 할 일이 있어.”
핀의 재촉에 하룬은 선두로 달려갔다. 경계를 위한 인원들을 뺀 나머지 용병들이 테인과 메일란을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모여 있었다.
“어서 오게, 하룬. 요즘 돌풍 용병대 때문에 우리 용병들이 많이 편해졌다는 소리를 들었네.”
테인이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이렇게 어려울 때 많은 도움이 되었어.”
메일란이 정겨운 눈길을 보냈다.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시선에는 푸근한 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왠지 얼굴에 그늘이 져 보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몇몇 용병들도 눈빛을 보내 그에게 알은척을 해 왔다. 그들에게 눈으로 인사한 하룬은 테인 대장에게 주의를 집중했다.
“하룬이 왔으니 다시 상황을 정리하지. 전방의 고개 너머 숲에 도적 떼가 잠복해 있다. 그 숫자는 알 수 없다. 고개와 숲 인근에서 은색 늑대들을 보았다고 하니 최악의 경우 울프 밴디트의 한 무리일 수도 있다.”
테인의 입에서 울프 밴디트라는 말이 나오자 안색이 변하는 용병들이 꽤 많았다.
“울프 밴디트가 뭐 먹을 게 있다고 우리 같은 작은 상행을 노리는 거지?”
누군가의 의문이었지만 거기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거야 털려고 하는 놈들이나 알 문제지 공격당하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다들 알겠지만 울프 밴디트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말살해 버리는 흉포한 놈들이다.”
테인의 말에 용병들의 얼굴에 진한 긴장감이 흘렀다.
“이 상황에서 그런 놈들을 맞이하는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기척을 최대한 숨기고 멀리 돌아서 이동하는 것이다. 물론 놈들도 나름 척후를 운용할 터, 그들을 피할 가능성은 없다. 다만 이 경우 수비가 유리한 지형을 먼저 발견해 방어할 수밖에 없다.”
테인의 말에 몇몇 용병들이 고개를 흔들었다. 적의 숫자도 모르는 상황에서 수비라는 것은 좋은 대책이 아니었다.
“두 번째는 소수의 공격 조를 투입해 놈들의 매복을 흔들고, 혼란에 빠진 사이 급습하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 다른 습격이 없어야 하며 은밀한 움직임과 과감하고 효율적인 공격력이 필수적이다.”
하룬은 두 번째 방안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을 말하는 테인이나 고개를 끄덕이는 다른 용병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얼굴들을 보니 두 번째 방안을 지지하는 것 같군. 맞다,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 보면 비록 수는 적지만 지켜야 할 것이 있으니 당연히 수비보다는 공격이 나을 것이다. 그래서 공격 조를 만들기로 했다.”
이미 마음을 굳힌 듯 테인은 땅바닥에 막대기로 지형을 그리며 설명했다.
“여기가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우리의 양옆은 가파른 경사지이고, 전면에는 고개가 있다. 그 고개를 넘으면 초지가 나오고 그 앞쪽으로는 다시 정상으로 향하는 숲길이 나 있다. 놈들이 잠복한 곳은 바로 그 숲이다.”
테인은 지도를 보며 핀에게 물었다.
“다른 곳에는 없었나?”
“전혀요. 로암과 함께 우리 옆의 경사지를 살펴보았지만 매복된 놈들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핀의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좋아, 그럼 상단은 하룬의 친구 세 명과 남은 자유 용병들이 보호하고 나머지는 모두 출정한다. 일단 핀이 길을 안내하고 매복한 놈들을 찾아내는 역할을 맡는다.”
“알아 모시지요.”
핀이 자신 있다는 듯 용병들에게 미소 지었다.
“팬서스와 오로트, 밀론은 핀을 따라가서 화살 공격을 맡는다.”
“젠장! 화살은 별론데. 알았소, 대장.”
전사지만 그나마 활 솜씨가 좋은 팬서스가 도끼를 쥔 우람한 팔 근육을 움직이며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앞으로 나섰다. 그의 곁으로 활대로 보이는 긴 막대기를 등 뒤에 멘 두 사람이 더 나섰다.
“메일란은 마법으로 적들의 시야를 최대한 가리도록 해.”
“알았어요. 포그 마법이라면 놈들의 눈을 가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예요.”
메일란이 흔쾌히 출전을 수락했다.
“하룬은 그 뛰어난 암기 실력으로 숨어 있는 놈들의 숨통을 끊어 주게. 분명히 매복한 놈들끼리 서로 주고받는 신호가 있을 거야. 놈들이 놀라서 숲을 뛰쳐나올 때까지 최대한 수를 줄여 주게.”
하룬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으로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몬스터라면 모르지만 그들이 비록 NPC이고 도적이긴 하지만 생명을 해친다는 점에서 마음이 답답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이 최상의 대책이라는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좋아, 나머지는 핀이 척후를 제거하면 바로 출발해서 고개 너머의 작은 초지 앞에 잠복한다. 습격이 성공하고 당황한 놈들이 숲을 뛰쳐나오면 내 공격 신호와 함께 일제히 공격하도록. 그럼 다들 준비하게. 일단 핀은 놈들의 척후를 찾아 제거해야 해. 그게 어그러지면 우리의 공격은 수포로 돌아갈 거야.”
“걱정 마쇼, 대장.”
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강한 자신감이 깃들어서 묘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다.
“잠깐 할 말이 있습니다, 대장.”
“무슨 일인가, 필립?”
필립이 막 움직이려는 사람들을 한순간 멈추게 만들었다. 그만큼 그의 목소리에서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며칠 전에 잡은 워리어의 가죽에 대한 권리는 어떻게 됩니까? 중간에 싸움에 끼어든 나와 워리어의 숨통을 끊은 우리 대장이 이제 회복되었으니 확실하게 정리를 하지요.”
“흐음, 그런가?”
테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피하고 싶었던 순간이 온 것이다. 그는 일단 야긴에게 의견을 물었다.
“야긴 조장, 필립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나?”
“크흐음. 워리어를 잡은 과정을 살펴보면 분배권 운운할 필요가 없는 거 같은데요. 우리 세 사람이 죽을 위기를 넘겨가며 워리어의 힘을 다 빼 놓은 상황에 스푼만 얹었다고 배분할 수는 없습니다.”
야긴이 얼굴이 굳은 필립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쏘아 보내고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스푼만 얹었다고?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우리 대장이 던진 비수로 위험에서 벗어났고, 나도 한몫 거들었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지 않을까요. 더구나 워리어의 상태가 어찌 되었든 도망치는 놈의 숨통을 끊은 것은 우리 대장의 비수였습니다.”
필립 역시 야긴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기세에서는 지지 않았다. 모든 면에서 모범생 같은 녀석이 이제 보니 강한 기세를 가진 다른 용병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주장할 만큼 강단도 있었다.
‘재수 없는 녀석.’
하룬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었다.
“말 같지 않은 소릴! 비수가 어깨에 박히는 바람에 오히려 녀석의 흉성이 폭발해 우리 세 사람이 위험에 빠졌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나? 그리고 우리는 이미 워리어를 거의 다 따라 잡은 시점이었네.”
“그래서 우리에게는 분배할 수 없다 이거요?”
야긴의 능글거리는 얼굴과 말에 필립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당연히.”
야긴의 그 말에 하룬과 필립이 입을 딱 벌렸다. 그렇게 단호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필립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여차하면 일전도 불사할 기세였다.
“허어, 참! 이 양반, 도저히 말이 안 통하네. 결국 100골드가 넘는 귀중한 워리어 가죽을 혼자 드시겠단 말이군?”
“왜 혼자야? 우리는 셋이라고.”
목소리에 날이 서기 시작하자 하룬이 필립의 어깨를 붙잡았다. 반면 야긴의 말과 태도는 도를 넘어 같은 대원들마저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테인과 메일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태도는 야긴이 이 용병대에서 어느 정도의 힘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 주었다.
야긴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필립은 상대를 바꾸어 테인을 붙잡고 늘어졌다.
“테인 대장님도 같은 생각입니까?”
“그, 그건…….”
느닷없는 필립의 질문에 테인은 말을 하지 못하고 당황스러워했다.
“비록 제가 경험이 별로 없는 5급 용병이지만 용병계의 상식이 이렇게 무시되는 것은 처음 보는군요. 이런 식으로 몬스터 가죽에 대한 권리까지 무시된다면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의뢰를 수행하겠습니까?”
“그, 그건 사실과 다르네.”
지금까지 당당한 태도를 견지해 오던 테인이었으나 이젠 말까지 더듬었다.
사실 작은 용병대지만 실력 있는 용병대를 지향하는 테인의 입장에서는 이제 막 익스퍼트에 입문하려는 실력자이자 보스 몬스터 전담 조장인 야긴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제 익스퍼트 초급에 입문한 실력자들은 그의 용병대원이고, 그들이 어느 정도 억지를 쓴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며칠 전 합류한 자유 용병들의 손을 들어 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실력은 좋지만 욕심이 많고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진 세 사람은 그럴 경우 용병대를 나갈 것이 분명했다.
테인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기 싫지만 나름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사실 워리어와 싸우던 사람들을 빼면 다들 오크와 싸우던 와중이라 하룬이 던진 비수가 워리어와의 싸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길이 없는 상황이야.”
하룬은 너무 억울해서 눈을 감았다. 순간적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머리가 뜨거워졌다. 하지만 일단 입술을 꽉 깨물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야긴의 말대로 하룬이 비수를 던졌다고 보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고, 설사 자네 대장이 정령의 힘을 실어 던졌다고 해도 문제가 있어. 워리어가 이미 세 사람에게 부상을 입었을 뿐 아니라 많이 지친 상황이라 비수 때문에 죽었는지 아니면 부상의 결과로 죽었는지는 판정하기 힘드네.”
그래도 끝까지 참고 듣던 하룬에게는 실로 어이없는 이야기였다. 분명 그가 깨어났을 때 찾아와서 위로하던 그때와는 사뭇 태도가 달랐다. 그때는 자신의 비수 실력을 그렇게 칭찬하며 고마워하던 그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올 줄은 짐작도 못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용병들의 눈빛이 대장의 말과 함께 당장에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게 생명을 빚진 사람들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하, 하지만 워리어의 숨통을 끊은 것은 분명히 대장이 던진 비수였는데…….”
필립이 답답하다는 듯 말까지 더듬었지만 테인은 고개를 저었다.
“나름대로 조사해 봤는데 워리어의 머리를 관통한 비수는 하룬의 것이 아니었네. 그것은 본인도 인정한 사실이야.”
어젯밤 한 용병이 와서 비수를 내보이며 그의 것이냐고 물어봤던 것이 바로 그 일 때문이라는 것을 하룬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하긴 4급 용병에게 그런 신기神技가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긴 하지. 더구나 정령의 힘이 실린 비수라니. 그런 것은 머리털 나고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어.”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말이 대부분의 용병이 가지고 있던 의혹을 증폭시켰다. 이제 분위기는 완전히 하룬에게서 돌아서 버렸다.
“내 말이 맞지? 그 거리에서 비수로 도망치는 워리어를 맞히려면 살아서 움직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야. 아무리 정령사라도 그렇지 그게 말이 되냐고. 더욱이 뒤통수도 아니고 옆머리를 관통했으니 더욱더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
분위기를 살피던 야긴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밤새 그런 이론을 설파하며 용병들에게 하룬의 공적을 약화시켰다. 직접 보지 못한 테인 대장도 자신의 범주에서 판단하다 보니 결국 야긴의 말에 손을 들어 주었던 것이다.
하룬은 너무 황당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허탈한 미소까지 떠올랐다.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다더니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좋은 것을 알았네.’
다수가 소수를 어떻게 바보로 만드는지 생생하게 경험했다. 모두를 구한 영웅에서 한순간에 모든 공적까지 무시받는 상황으로 변한 것이다.
개중 몇 사람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하룬을 쳐다보았지만 이제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에게 싸늘하게 변했다. 마치 거짓말쟁이를 보는 눈초리 때문에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하룬은 메일란을 바라보았다. 그녀라면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전장에 뛰어들지 않고 전투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땅에 시선을 고장한 상태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싸가지의 존재를 밝혀 버릴까?’
그럼 된다. 다른 것은 몰라도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하룬이었다.
막 입을 열려던 하룬은 생각을 바꾸었다.
‘이런 사람들을 동료라고 의지하면서 갈 순 없지. 어차피 스토리 퀘스트 대상은 다른 길을 가기로 한 마당에 차라리 여기서 선을 긋자.’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더 편했다. 마음을 버려서 그런지 하룬은 난처해하는 테인과 메일런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한 단체를 이끌어 가는 리더의 비애라고 할까. 수하의 절대적인 충성심이 아니라 인정으로 얽힌 관계에서 나오는 리더의 고민이 느껴졌다.
“그만! 필립,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자.”
“왜? 대장은 그때 전력을 다하는 바람에 정신을 잃고 이제야 겨우 회복되었는데 왜 우리가 양보해야 하냐고? 당장 정령을 소환해서 증거를 보여 줘.”
흥분한 필립을 서늘한 눈빛으로 제지한 하룬이 테인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보여 줘야 믿을 거라면 벌써 그렇게 했지. 넌 모르겠냐? 무슨 일이 있어도 주지 않을 작정을 하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냐?”
일부 대원들이 고개를 돌려 땅을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파슨 남작령까지 동행하기로 했으니 그곳까지는 같이 가지요. 하지만 이런 분들과 더 이상 동행할 수 없습니다. 신뢰를 깨기는 쉬워도 얻기는 어렵다는 말이 사실이네요. 나름대로 칭찬받기에 충분한 활약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우리 일행이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리다니, 안타깝습니다.”
그의 말에 용병들의 얼굴이 복잡하게 변했다. 사실 워리어 건이 아니더라도 재수 4인방의 활약과 하룬이 비수로 여러 사람을 구했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다.
“하룬,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지 말게. 각자 생각은 다 다른 법 아닌가? 자네와 친구들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잖나? 내 따로 보수를 넉넉하게 챙겨줄 테니 마음 풀게.”
급기야 하룬의 단호한 태도에 당황한 테인이 그제야 사태를 진화하기 위해 나섰다.
원래는 하룬 일행에게도 분배권을 주고 싶었지만 야긴 조의 태도가 너무 강경했다. 듣도 보도 못한 신출내기 4급 용병의 실력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당시 현장에 없었던 그로서는 나름 일리가 있는 야긴의 말이었다. 아무리 정령을 부린다지만 일개 4급 용병에게 그런 신기에 가까운 비도술이 있다고는 믿기 힘들었다. 그러나 절대 거짓말을 할 리가 없는 동생 메일란은 그게 사실이라고 하니 헛갈릴 수밖에 없었다.
고심하던 테인은 같이 지내 온 인정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사실 파슨 남작 성에 가면 길드 사무실이 있으니 용병을 더 충원하면 된다. 문제의 소지가 있는 하룬 일행을 더 끌어안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번 임무를 망치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겁니다.”
‘그리고 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줌과 동시에 야긴 조에도 단단히 쓴맛을 보여 주지요.’
가슴속 깊이 칼을 품은 하룬의 말에 테인은 눈을 꽉 감고 깊은 한숨을 몇 번 내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도 어린데 그에게는 어렵기만 한,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한 친구이니 그 말은 믿을 수 있었다.
“서운하지만 자네의 생각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알았네.”
워리어의 가죽 때문에 벌어진 일련의 설전을 지켜보는 용병들은 내심 착잡했다. 특히 하룬 일행처럼 자유 용병인 사람들의 얼굴은 갈등으로 찡그려졌다. 이번의 대화를 통해 자신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확실하게 안 것이다.
테인은 마음속에 든 불편한 것들을 한순간에 날려 보내려는 듯 큰 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자, 모두 준비하도록!”
테인의 명령에 다른 용병들처럼 하룬과 필립은 무기와 장비를 점검하기 위해 마차 쪽으로 돌아갔다. 야긴 조의 세 명도 자리가 불편했는지 그 뒤를 따라 자신들의 짐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휴우, 뛰어난 그의 암기 실력이면 앞으로 닥쳐올 위험에 많은 도움이 될 텐데…….”
테인 대장의 처연한 독백에 메일란이 착잡한 얼굴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빠, 힘내요. 빨리 좋은 사람들을 구해서 오빠가 원하는 용병대를 만들자고요.”
“그래야지. 그나저나 이 일이 도적들을 암습하는 데 지장을 주면 안 되는데…….”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하룬은 그런 셩격이 아닌 것 같아요. 셈이 빠른 투란과는 생각하는 것이 달라요. 물론 저런 사람이 원한을 품으면 더 무섭지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두 사람은 이미 이 일을 과감하게 처리하지 못해 자신들이 아까운 인재를 놓쳤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렇지만 현 상황에서는 이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아이, 씨발! 내가 뭘 어쨌기에 그래, 이 새끼들아! 솔직히 워리어랑 싸우면서 죽을 뻔했던 건 우리잖아.”
“그, 그게…… 형의 말이 좀 심하기는…….”
“지랄! 우리가 다 죽여 놓았잖아. 안 그럼 익스퍼트 초급 실력의 우리 세 사람이 죽을 위기를 넘겨 가며 싸운 무시무시한 워리어가 아무리 정령이 실렸다고 해도 한낱 비수 따위에 죽는다는 게 말이 되냐고?”
“그거야 맞는 말이지만 그냥 비수 따위는 아니던데…….”
“시끄러워!”
짐을 챙기는 야긴 무리가 떠드는 소리는 무척이나 컸다. 아마도 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것일 테지만 그걸 듣는 사람들 중 상인들과 일꾼들의 얼굴이 잔뜩 구겨지는 것을 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쓰레기 같은 새끼!”
상행이라도 용병들과는 눈도 잘 마주치지 않는 한 상인의 낮은 욕설이 테인의 귀에 들려왔다.
“저런 새끼가 우리 호위라니, 이제 로템도 물이 많이 더러워졌어.”
다른 상인의 말이 마치 비수처럼 그의 심장에 틀어박혔다. 평소 다른 용병대와 달리 상인들의 의견도 많이 존중해 왔던 그는 불안감이 들었다.
‘내가 혹시 너무 안일하게 처리한 건 아닐까?’
테인은 나름대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다고 여겼는데 어쩌면 이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장, 정말 이대로 물러날 거야?”
“동료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굳이 신경 쓸 필요 없어. 사나이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해서만 능력을 쓰는 거야.”
확고한 의지가 드러나는 하룬의 말에 필립이 얼굴을 풀었다.
“하긴 그까짓 워리어 가죽이 얼마나 한다고. 난 단지 우리가 제대로 대우받길 원한 거였는데. 아무튼 인정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는 작은 용병대들은 문제가 있어.”
행정을 배운 녀석답게 로템 용병대의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하는 필립이었다.
“그런데 필립, 앞에서 매복하고 있다는 산적들은 도대체 어떤 놈들이야?”
“아주 나쁜 놈들. 한마디로 인간의 탈을 쓴 몬스터지.”
녀석의 대답은 간단했다. 하룬이 아직 만족하지 못한 것을 아는지 녀석이 부언해서 설명했다.
“대장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것은 알고 있었지만 좀 심하네. 잘 들어, 대장. 도적 떼도 여러 종류가 있어. 세금을 내지 못하거나 아니면 농노였다가 죄를 지어 영지에서 도망쳐 무리를 이룬 산적 놈들은 그래도 봐 줄 만하지. 그러나 핀의 말에 따르면 늑대들과 같이 있다고 하는 놈들의 정체는 틀림없이 울프 밴디트가 맞을 거야.”
“늑대 산적?”
“응. 그놈들의 이름을 말하면 우는 아이도 그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진장 잔인하고 두려운 놈들인데, 늑대랑 같이 생활하면서 인간들의 마을이나 상행을 습격하는 놈들이야. 다른 도적 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흉악해서 놈들이 쓸고 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질 않아. 마치 메뚜기 떼처럼.”
“사람들의 목숨까지 상하게 한단 말이야?”
하룬이 깜짝 놀라 물었다.
“당연히. 심지어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이 자자해. 놈들이 기르는 늑대들의 먹이로 준다는 말도 있고. 아마 맞을 거야. 나도 일전에 아버지에게 들었는데 놈들에게 습격당한 마을 어린이들의 뼈가 여기저기 널려 있는 걸 봤다고 하셨어.”
“그런 놈들을 가만히 놔둔단 말이야?”
하룬은 기가 막혔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인육까지 먹는 산적이라니.
“놈들의 근거지는 한 곳이 아니야. 무리도 아주 많지. 먹고살기 위해 할 수 없이 산적이나 도적이 된 것과 달리 대개 흉악한 죄를 짓고 제국의 힘을 피해 산으로 숨어든 놈들이 모여서 무리를 이루었기에 흉포하고 강력한 힘을 가졌지.”
“인근의 영지에서는? 아니, 제국에서는?”
일개 영지라면 힘이 부족할 수 있다지만 제국이라면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을 텐데 그런 무리를 용인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놈들의 뿌리는 깊어. 벌써 삼백 년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몇십 년 전만 해도 놈들의 세력은 아주 미약했지. 한번 나타나면 제국의 기사단이 각 영지와 공조하여 그 뿌리를 말살했으니까. 그 일로 일약 영웅이 되곤 했기에 기사들의 참여도 활기찼고.”
“그런데?”
“알다시피 현 황제가 십 년 전부터 골골하잖아. 죽지도 않으면서 골골하는 바람에 권력 다툼이 치열해지고 황실과 귀족들이 이합집산을 반복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만드는 데 골몰한 탓에 더 이상 기사단의 파견이 없어졌지. 늑대와 함께 생활하면서 인성을 상실하고 야수성을 가지게 된 흉악한 놈들을 상대하다 보면 사실 많은 피해가 발생하거든.”
“으음.”
하룬은 비욘드의 세상에 변화의 회오리가 불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그가 받은 퀘스트도 그 변화의 일환을 보여 주는 것이 확실했다.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놈들이야. 대장도 손에 인정을 두지 마.”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상대할 산적들이 그런 놈들이라면 공연히 심란해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몬스터라고 생각하면 될 터였따.
마차로 돌아온 하룬은 일행을 모아 회의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내가 대장과 같이 갈게.”
필립이 먼저 나섰다. 사실 하룬은 경험도 있고 검술 실력이 가장 높은 필립을 생각했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첫 실전을 겪었지만 이미 어린 시절부터 용병의 삶을 곁에서 보고 들은 세 사람은 첫 살인에도 충격을 거의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필립은 오히려 신 나 하는 기색이었다.
지탄은 겁이 많아 제외였고 시린느와 라트리나는 애초에 예외였따. 피할 수 없으면 모르지만 일부러 피 튀기는 살벌한 전투를 자원할 필요는 없었다. 특히 라트리나가 있으면 암습은 아예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재수 4인방에게 각자 할 일을 나눠 준 하룬은 일단 암기대를 꼼꼼하게 체크했다. 자신이 공격 조로 뽑힌 이유가 바로 이 암기들을 던지는 실력 때문이니 말이다.
그런 하룬을 향해 도란이 슬며시 다가왔다.
“하룬 대장, 울프 밴디트일 가능성이 높다던데 맞습니까?”
“네, 그렇다고 하네요.”
“여기.”
걱정 어린 눈길로 하룬을 바라보며 내미는 그의 손에는 작은 유리병 몇 개가 들려 있었다.
“뭡니까, 이게?”
“마나 포션과 치료 물약 두 개씩입니다. 하급이지만 효과는 좋을 겁니다. 절대로 놈들을 봐주지 말고 상대하기 바랍니다.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흉악한 존재들이니까요. 대신 며칠 전처럼 무리하지는 마시고요.”
하룬은 말없이 그의 손과 얼굴만 번갈아 쳐다보았다.
“우리는 하룬 대장과 친구들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처럼 다치면 안 되니까 드리는 겁니다. 부담되시면 나중에 계산에서 정산해도 됩니다.”
도란이 미소 지었다. 그 웃음 속에 드러난 진심을 하룬은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안전을 염려하는 순수한 마음이었다. 이미 필립과 지탄이 챙겨 온 마나 포션과 물약을 모조리 인벤토리에 챙겨 넣었지만 많아서 나쁠 것은 없었다.
“고맙습니다. 잘 쓰겠습니다.”
도란이 돌아간 마차에서는 데브론과 두 아이가 걱정과 우려 그리고 따듯한 응원을 담아 하룬을 바라보았다.
하룬이 선두로 가자 핀과 메일란이 활을 든 세 명의 용병들과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들이 출발하고 얼마 후면 모든 용병들이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 두고 산적들을 공격하기 위해 따를 것이다.
“자, 갑시다.”
핀이 앞장섰다. 나무 사이에 우거진 풀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 뒤를 세 용병이 따랐고 메일란과 하룬이 차례대로 움직였다.
핀은 앞을 경계하면서도 빠른 속도로 전진해서 그를 따라 잡는 것이 쉽지 않았다.
놈들의 척후를 의식해서 제대로 난 길 대신 거리를 두고 움직이는 길을 선택했고, 제법 경사가 있는 오르막길이어서 얼마 가지 않아 세 용병과 메일란은 숨이 거칠어졌다.
핀은 일행의 거친 숨소리가 신경 쓰였는지 잠시 멈추었다.
“일단 놈들의 척후를 파악해야 하니 네 사람은 여기서 대기하시오. 하룬과 내가 놈으 찾아 제거하고 나서 움직이는 것이 좋겠소.”
“휴우. 알았어요, 핀.”
네 사람은 벌써 옷을 흠뻑 적신 땀을 닦아 내며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자! 가자고, 하룬.”
하룬이 고개를 끄덕이며 핀을 따라 산을 올랐다.
핀은 산길인데도 움직임이 날렵하고 소리도 거의 내지 않았다. 좀 손색이 있긴 하지만 혹독한 수련을 자청해서 받은 하룬도 만만치 않아 핀을 따라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빠르게 움직이다가 잠시 멈추고 그를 돌아본 핀의 눈에 만족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던 핀이 갑자기 멈추더니 바닥으로 몸을 낮추었다. 당연히 하룬도 그를 따라 몸을 낮추고 핀을 주시했다.
핀은 말 대신 손가락을 들어 울창한 나무 사이를 가리켰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님에 따라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길과 함께 큰 나무 몇 그루가 나란히 서 있었는데 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한 나무의 중간이었다.
과연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가죽옷을 입은 두 사람이 보였다. 그리고 더 멀리 보이는 숲으로 천천히 달려가는 은색 늑대 두 마리가 보였다. 이쪽의 지대가 높지 않았다면 그들을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놈들의 위치를 확인하는 사이 로암이 소리를 내지 않고 그들과 합류했다. 로암은 핀과 함께 척후를 도맡은 중년의 3급 용병이었따.
“어때?”
“아직 움직임은 없어. 하지만 우리가 올라가는 것을 알았으니 대기하고 있겠지.”
“역시 울프 밴디트였나?”
“확실해. 저 빌어먹을 실버 울프들도 그렇고, 저 나무 위에 있는 놈들도 실버 울프를 타고 저곳까지 움직이더군.”
두 사람은 이야기하면서 이를 갈았다.
울프 밴디트는 모든 인간들의 적이다. 먹을 것에 만족하는 동물들을 비롯한 몬스터들과 달리 놈들은 살육 자체를 즐겼다. 특히 상행을 호위하는 일이 일상인 용병들은 치를 떠는 상대였다.
“그나저나 거리가 너무 먼데. 대략 육십 보 정도는 떨어져 있어.”
“그럼 하룬이 비수를 던질 거리를 주기 위해 우리가 유인하면 어떨까?”
“좋은 의견이긴 하지만 너무 위험해.”
로암의 말에 핀이 반대했다.
“그럼 좀 더 앞으로 가면 어때? 놈들이 우리를 볼 수 있도록.”
로암의 말대로 녀석들이 훤히 보이는 가장자리까지 가면 하룬의 비수가 닿을 수 있는 사정권에 들어올지도 몰랐다.
“그러다 우리를 발견하고 신호라도 울리면 척후로 나온 놈들을 죽인다 해도 그때는 이미 암습은 물 건너간다고.”
두 사람은 고민했다.
한마디로 진퇴양난이었다. 더 앞으로 가자니 시야가 트인 절벽 가장자리이고 척후들에게 보일 것이다. 그렇다고 저 척후들의 기척을 피할 수 있는 지형을 찾자니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려 습격하는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하룬은 두 사람의 곁을 떠나 나무 중턱에 숨은 놈들의 척후가 잘 보이는 곳으로 올라갔다. 두 사람은 하룬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그가 상황을 제대로 보기 위해 시야가 좋은 곳을 찾아간 것으로 여긴 것이다.
하룬은 말없이 비수를 빼 들고 싸가지를 소환 대기했다.
-싸가지, 들었지?
-귀찮은데 또 불러내네. 알았다고. 그런데 유도 스킬을 쓰기에는 거리가 멀고 중간에 나무들이 있어서 어렵겠는데. 내가 직접 합체해야겠네?
역시 건방진 말투였지만 이번에는 웬일인지 태도가 적극적이었다. 이제 완전히 상태를 회복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심심해서일까.
어쨌든 녀석이 먼저 나서니 다행이었다.
-그래, 시간이 없으니 먼저 앞쪽 나무에 있는 놈부터 해치우자. 떨어지면 다른 나무에 있는 놈이 암습을 눈치 챌 테니 아예 나무 기둥에 박아 버려.
-오케이.
핀과 로암은 하룬이 비수를 꺼내 든 것을 보았지만 던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얼핏 봐도 거리가 오십 보는 넘었던 것이다. 아무리 위에서 아래쪽으로 던지는 거라지만 중간에 나무들이 있고, 더구나 비수가 닿을 거리는 아니었다.
‘남아서 오크를 상대하던 친구들이 저 암기로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그렇고 누구는 오십 보가 넘는 거리에서 워리어를 비수로 죽였다고 하던데…… 에이, 설마. 대장이나 야긴의 말대로 그게 가능할 리 없지.’
핀과 로암은 자신들의 생각이 부질없다고 여기면서도 비수를 던질 준비를 하는 하룬에게 의혹의 시선을 던졌다.
“소환.”
싸가지를 소환하는 동시에 역시 중독을 알리는 익숙한 안내음이 들렸다.
“정령 합체 암기술.”
하룬은 낮은 음성으로 스킬 이름을 외치며 싸가지가 합체한 비수를 힘차게 던졌다.
“뭐, 뭐야?”
“안 돼!”
두 사람은 기겁했지만 하룬이 날린 비수는 시퍼런 빛을 발산하며 나무 위에 잠복한 산적을 향해 날아갔다. 놈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나무들을 통과한 비수는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아래를 향해 떨어졌다.
비수에는 싸가지가 합체된 상태라서 굳이 조정하거나 결과를 볼 필요가 없었다. 하룬은 재빨리 해독약을 먹고는 상태 창을 띄워 그 변화를 주시했다. 마나 소모의 경과를 보려는 것이다.
역시 마나가 쭉쭉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초당 50의 마나 소비량을 필요로 하는 정령 합체 암기술이라 불과 몇 번 호흡하는 사이 벌써 200의 마나가 빠졌다. 정령력은 여유가 있지만 급속도로 소모되는 마나 때문에 긴장되어 입안이 말라 갔다.
한순간 안내음이 들려왔다.
-C급 흉악범을 해치웠습니다. 상대방의 아이템을 모두 획득합니다.
드디어 한 놈을 끝장냈다. 그런데 상대의 아이템을 모두 획득하다니 놀라웠다. 산적이 인간이라 PK 룰이라도 적용되는 걸까?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싸가지가 벌써 돌아온 것이다.
“해치웠어. 근데 한 놈 더 있던데.”
“그놈도 해치워야 해.”
“알았어.”
“정령 합체 암기술.”
하룬은 다시 비수 하나를 더 날렸다. 역시나 순식간에 돌아온 싸가지가 합체한 비수였다.
이번에는 핀과 로암의 입에서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먼저 던진 비수가 놀랍게도 살아 있는 생물처럼 나무들을 요리조리 피해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겨우 보이던 한 산적의 머리통에 박힌 것도.
그들이 정신을 차린 것은 두 번째 비수가 날아간 시점이었다.
“비, 비수로 저 먼 거리를……?”
“사람들 말이 저, 정말이었어.”
겨우 정신을 차린 그들의 입에서는 숨길 수 없는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사이 다시 200의 마나가 더 빠져나갔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거리가 조금 더 먼 탓인지 50이 더 빠지고 나서야 비로소 안내음이 들러왔다.
-C급 흉악범을 해치웠습니다. 상대방의 아이템을 모두 획득합니다.
‘이 비욘드의 시스템, 정말 마음에 드는구나.’
이 특별한 산적들은 사람들을 해치는 흉악범이라서 그런지 보스 몬스터나 PK범처럼 그들을 죽인 유저가 산적의 아이템을 모두 빼앗는 시스템이었다. 아마 NPC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테지만 유저인 하룬에게는 신 나는 일이었다.
“흐흐흐! 어때, 주인? 끝내주지? 겔겔겔겔, 역시 내 능력은 대단해.”
“들어가!”
칭찬이라도 바라는 듯 으스대는 싸가지와 더 이상 말할 시간이 없었다. 벌써 마나가 450이나 빠져나가서 몸 상태가 다르게 느껴졌다. 어지럽기도 하고 토할 것 같았다. 극도의 집중을 하고 난 후 몸 상태와 비슷했다.
재빨리 하급 마나 포션을 마시자 마나가 풀로 차올랐다. 마나 포션으로 몸이 천천히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느끼자 하룬은 아직까지 넋을 놓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놈들의 척후는 제거했습니다. 빨리 움직이죠.”
“그, 그래, 하룬.”
“난 척후를 제거했다고 신호를 보내고, 밑에 있는 네 사람을 데리고 올게.”
핀과 로암은 여전히 놀란 얼굴이었지만 노련한 용병들답게 각자 할 일을 찾아 움직였다. 핀이 사람들을 데리러 간 사이 하룬은 로암과 함께 그가 발견한 루트를 통해 산적들이 매복한 숲의 한쪽 경계로 향했다.
잠시 후 하룬이 있는 곳에 겨우 도착한 메일란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나머지 세 용병들도 굵은 땀방울을 흘렸다.
핀에게 하룬이 척후 둘을 제거했다는 말을 들은 메일란은 도착해서 제일 먼저 치하부터 했다.
“고마워, 하룬. 척후들을 무사히 해치웠다는 소리를 들었어. 잠시 휴식을 가진 후에 본격적으로 작전에 들어가자고. 대원들이 모두 잠복하고 나면 시작할 거야.”
용병들은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드었다. 세 용병은 활줄을 활대에 연결해 화살을 손보았고, 메일란은 미리 마법 주문을 메모라이즈하기 시작했다.
핀이 하룬의 곁으로 다가왔다.
“일단 부대장이 포그 마법으로 안개를 깔고 사일런스 마법으로 소리를 없애면 우리 셋이 움직이는 거야. 부대장의 마법 실력으로는 이 정도 숲을 모두 커버할 수 없으니 일정한 부분만 가능할 거야. 원래 계획은 우리 둘이 매복한 놈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뛰쳐나오는 놈들을 하룬과 세 용병이 암기와 화살로 1차 요격하는 것이지만 자네의 솜씨라면 우리보다 나으니 당연히 안개 속으로 같이 들어가자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안개 속이라면 우리도 앞이 보이지 않을 텐데 어떻게 암습을 하지요?”
“그건 걱정하지 마. 부대장이 라이트 아이 마법을 걸어 줄 테니까.”
하룬은 그제야 작전의 요체를 알 수 있었다. 다만 포그 마법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놈들이 상황을 파악하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가 문제였다.
핀은 그 말을 남기고 후발대의 도착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산등성이를 내려와 숲이 시작되는 곳까지는 키가 큰 풀들로 가득한 개활지였다. 후발대는 이곳에 잠복했다가 암습을 당한 녀석들이 쏟아져 나오면 당황한 놈들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암기대를 습관처럼 쓰다듬던 하룬은 재수 4인방을 혼내 주고 얻은 것을 떠올렸다. 녀석들이 싸가지가 뿌린 오염 물질에 중독되어 아래위로 쏟아내던 것을 생각하던 어느 순간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쳐 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싸가지의 독이라면? 잘하면 한 방에 끝장낼 수 있겠다!’
하룬은 깊이 심호흡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생각이었다. 이제까지 싸가지의 독이나 오염 물질의 가치를 제대로 활용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중점을 둔 것은 독이나 오염 물질이 아닌 정령 본연의 능력이었다.
하지만 포그 마법이 펼쳐진 곳에 독을 뿌린다면 그 무엇보다 효과적인 공격 수단이 될 것이다.
하룬은 싸가지와 대화하기 위해 일행과 좀 떨어진 외진 곳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은 소변이라도 보러 가는 줄 알 것이다.
“소환 대기.”
-야, 싸가지!
-이 씨! 또 뭐야? 한 번 해주었으면 됐지 왜 자꾸 귀찮게 구는 거야? 능력이 없는 주인이면 능력 있는 나를 알아서 배려해야지. 도대체가 개념이 없어.
-너 자꾸 헛소리 할래? 또 맞고 싶구나.
능력은 있지만 말하는 싸가지가 없어서 애써 일군 것들을 다 까먹는 미운 놈이었다.
-으윽! 알았어, 알았다고.
-꼭 매를 벌어요, 매를.
-왜 불렀는데, 주인? 제발 빨랑빨랑 말해 줘. 내가 무지 귀찮아서. 한창 좋은 꿈을 꾸고 있었단 말이야.
하룬은 녀석의 독으로 살상이 가능한지와 그 범위에 대해 물었다.
-그거야 당근이지. 오염 물질들 중에는 어느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극독들도 많거든. 지금의 내 능력으로는 기껏해야 몇 놈을 해치울 정도밖에 쓸 수 없지만. 그리고 그 범위야 내 능력이 아니라 주인에게 달려 있지. 능력이 있으면 그만큼 범위가 넓어지는 거고 능력이 없으면 범위는 줄어들겠지. 물론 당연히 범위야 좁겠지만.
능력이라는 것은 녀석의 활동을 지원할 마나를 말하는 것이다. 충분한 휴식으로 마나는 가득 채웠지만 그걸로 얼마나 버틸지 모른다.
‘젠장, 좋은 방법을 찾았는데 마나가 턱없이 부족하겠네.’
잠시 고민했지만 다른 방법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싸가지가 끼어들었다.
-에고, 내 신세야.
-또 뭐야?
녀석의 말투가 묘하게 신경을 건드렸다. 마치 보고 있기 한심하다는 투였다.
-명색이 내가 정령인데 윈드를 쓸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주인이 무슨 주인이라고. 에고. 한심하다, 한심해.
녀석의 말에 한순간 머릿속이 밝아졌다.
‘그래, 그거야. 녀석의 독을 윈드로 퍼트리면 끝이지.’
-이미 생각하고 있었어. 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알아? 단지 내 마나가 부족해서 고민하고 있었단 말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입맛이 쓴 하룬이었다. 눈치가 백단은 넘을 싸가지가 그걸 믿으리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기세에서 밀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윈드는 고유 정령술이기 때문에 마나는 소환에 필요한 양만 있으면 되고 정령력을 쓰면 되는데 뭘 그리 고민하나? 이거 원, 무슨 주인이 하나하나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니까.
-그래, 너 잘났다, 자식아! 일단 들어가 있어.
그사이 생명력이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자 하룬은 황급히 소환을 해제하고 해독제를 먹었다. 생각하느라 생명력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때 핀이 돌아왔고 그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활동할 시간인 것이다. 하룬도 재빨리 합류했다.
“자, 내가 저 바위 옆으로 가서 포그 마법을 펼칠 테니 이곳에서 대기해요.”
“네.”
그녀의 지시에 다들 긴장된 얼굴로 낮게 대답했다.
“저어…….”
“무슨 일이야, 하룬?”
메일란이 주저하며 할 말이 있는 표정의 하룬에게 물었다.
“혹시 모르니까 내가 부대장을 호위할게요.”
“좋아. 그럼 나야 고맙지.”
사실 마법 주문을 소리 내어 외우는 순간이 마법사에게는 가장 위험하다. 그 순간에는 작은 충격이라도 있으면 마법이 깨지거나 심하면 마나가 역류해서 죽을 수도 있다.
메일란과 하룬이 그들이 있던 장소에서 이십 보 정도 높은 곳에 위치한 거대한 바위의 그늘로 숨어들었다. 설사 숲에서 산적들이 쳐다보아도 바위가 만든 사각과 그늘로 그들의 몸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자리를 잡은 메일란이 메모라이즈한 포그 마법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거짓말처럼 서서히 바닥부터 차오르는 안개가 숲을 감싸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메일란은 눈을 지그시 감고 마법 지팡이에 집중했다. 포그 마법의 범위를 최대한 확장시키기 위해 룬어에 공명하는 심장의 마나 고리로부터 지속적으로 마나를 빼내고 있었다.
4서클 마스터답게 포그 마법의 범위는 점차 확장되어 갔다. 어느새 숲의 오분의 이가량이 안개로 뒤덮인 것이다. 숲에서 작은 소란이 들려왔다. 녀석들이 당황한 것이리라.
하룬은 입술을 달싹여서 싸가지를 소환했다.
“싸가지, 지금이야.”
“알았어. 포이즌 스캐팅! 윈드!”
하룬의 명령과 함께 독을 살포한 싸가지는 윈드를 써서 그 독들을 포그 마법이 펼쳐진 숲으로 날려 보냈다. 이제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는지는 지속적으로 살포된 독을 멀리 날려보내는 윈드에 달려 있기에 하룬은 상태 창을 띄워 놓고 생명력과 마나 그리고 정령력이 소모되는 상황을 주시했다.
너무 많은 생명력과 마나를 소비하면 차후의 상황이 어려워진다. 그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만!”
정령력이 정확히 30 남은 시점이었다. 싸가지가 돌아와 주절거렸다.
“흐흐흐. 비록 얼마 안 되는 적은 양이지만 놈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날아갔으니 아주 볼만할 거야, 주인. 그런데 저놈들이 제법 뽑아 먹을, 맛있는(?) 것들을 가지고 있던데 나중에 꼭 먹게 해 줘. 주인 때문에 하락한 내 능력을 되찾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거야.”
“알았어.”
싸가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일단 소환을 해제한 하룬은 급하게 해독약과 마나 포션을 삼켰다. 절반 이상의 마나와 거의 모든 정령력을 한꺼번에 사용한 후유증인지 피곤함이 느껴졌지만 곧 정상으로 돌아와서 몸을 움직이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자, 이제 가자고.”
눈을 뜬 메일란은 생각보다 더 멀리까지 안개가 피어오른 것을 확인하고는 흡족한 웃음과 함께 하룬을 재촉했다. 하룬이 보니 바람이 안고 있는 숲 전면의 일부는 검은색이 안개를 잠식해 가고 있었다.
일행이 있는 곳으로 온 메일란은 마나 소비가 많았음에도 핀과 로암 그리고 하룬에게 사일런스 마법을 펼쳐 주었다.
“지속 시간이 최대 5분에 불과하니 빨리 움직여야 할 거예요.”
그 말에 세 사람이 서둘러 숲으로 달려 내려갔다. 5분 안에 최대한 많은 산적들과 늑대들을 해치워야만 하는 것이다.
메일란과 활을 든 세 용병도 조심스럽게 움직여 숲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구덩이로 들어갔다.
막 숲으로 뛰어들려던 핀이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멈추고는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독이다! 멈춰. 독이야.”
그 소리에 그를 지나쳐 가려던 로암과 하룬은 급정거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무슨 소리야?”
“독이 펼쳐져 있어. 벌써 중독되고 있어. 굉장히 강력한 독이야.”
“그게 무슨……? 어억! 정말이야. 나도 중독됐어.”
핀과 로암의 팔은 어느새 시퍼렇게 변하고 있었다. 하룬의 팔은 아직 괜찮았지만 손은 이미 변색되었고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세 사람은 급하게 화살 공격을 위해 잠복한 세 용병의 구덩이로 들어갔다. 다행히 숲 속에도 한창 난리가 난 터라 일행의 움직임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슨 일입니까, 핀?”
“어? 도, 독이닷!”
세 용병은 깜짝 놀라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굉장히 강력한 독입니다. 벌써 어깨까지 올라왔어요.”
메일란을 바라보는 핀의 음성이 다급했지만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치료 마법이라면 몰라도 해독 마법을 펼치기에는 마나가 모자랐다. 해독 마법인 카운터 액팅은 4서클 마법이라 전력으로 포그 마법을 펼친 그녀의 현재 상황으로는 펼칠 수가 없었다.
“여기 해독제가 있어요.”
하룬이 급하게 품에서 해독제를 꺼내 두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도 삼켰다. 헥터가 만든 해독제답게 약효는 굉장해서 금방 세 사람의 팔이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그 순간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안내음이 연속으로 혹은 중첩되어 들려오기 시작했다.
-D급 흉악범을 해치웠습니다. 상대방이 가진 아이템들을 모두 획득했습니다.
-C급 흉악범을 해치웠습니다. 상대방이 가진 아이템들을 모두 획득했습니다.
그 소리는 쉴 새 없이 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