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스토리 퀘스트 (17/278)

《스토리 퀘스트》

 사위가 조용해진 것을 확인한 하룬은 싸가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녀석을 소환 대기했다. 마나와 생명력을 회복한 마당이니 자신이 정신을 잃었던 때의 정황이 궁금했던 것이다.

 -야, 싸가지.

 -왜, 주인? 나 힘들어.

 다정한 목소리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싸가지의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다만 힘이 없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져서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가라앉혔다.

 -힘들긴 뭐가 힘들어. 네가 폭주하는 바람에 내가 죽을 뻔했는데.

 -무슨 말이야? 나야말로 자신의 능력도 파악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린 주인 때문에 기껏 모아 놓은 힘까지 다 써 버려서 지금 꼼짝도 못 하겠단 말이야!

 적반하장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되레 힘들다고 난리를 치는 싸가지의 말에 이제까지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이게 정말! 아니, 먼저 뭐 하나 물어보자.

 -뭔데 그래? 빨리 물어봐. 힘을 회복하려면 더 자야 되니까.

 자신이 잘못한 거 같아서 잘해 주려고 했더니 역시나 시건방진 말투에 순간 울컥했지만 참았다.

 -내가 혹시 너에게 명령을 내렸냐? 내 기억에는 그런 명령을 한 기억이 없는데.

 -말로는 안 했지만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말했잖아. 저 워리어를 끝장내고 싶다고. 그래서 하찮은 주인의 마나와 정령력 그리고 생명력까지 다 끌어다 썼지만 부족해서 내 마나와 정령력까지 바닥이 날 정도로 써 버렸다고.

 역시 그랬다. 말투가 좀 건방지고 싸가지없기는 하지만 정령이라 거짓말은 못 하는 싸가지였다. 그 말을 들으니 비수로 오크들을 잡는 재미에 빠져 도망치는 워리어를 향해 그런 생각을 한 것도 같았다.

 -알았어. 하지만 앞으로는 내가 확실하게 말하기 전에는 하지 마라. 마음이란 것은 순간적이라 나중에 후회할 일이 많으니까.

 -주인의 그 말 확실하게 기억해 두지. 나야 그럼 불려 다닐 일이 줄어드니 더 편하지. 그리고 레벨도 그렇고 능력치도 많이 하락했으니까 맛있는 것들 좀 먹여 줘.

 -알았다. 쉬어라.

 싸가지는 처음으로 다정한 하룬의 말을 들으며 다시 휴식에 들어갔다.

 어쩌면 초급 스킬도 마스터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급 스킬이 생긴 것은 그의 의지에 민감하게 반응한 싸가지의 놀라운 능력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게 맞는다면 싸가지는 자신 때문에 능력이 상당 부분 하락되고 골골대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녀석을 위해 마나가 풍부한 아이템을 얻어야겠군.’

 그렇게 마음을 먹은 하룬이 막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희미한 달빛을 받고 있는 데브론의 마차 안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것이 천막 사이로 보였다.

 데브론의 마차는 다른 마차들과 마찬가지로 가죽으로 된 천막이 쳐져 있었는데 연결 부위의 작은 틈으로 사람이 보였던 것이다.

 ‘어, 누구지?’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사이렌 소리와 함께 익숙한 안내음이 들리면서 눈앞에 창이 하나 떴다.

 -스토리 퀘스트를 받았습니다.

『스토리 퀘스트 D-연계

제목: 요인을 호위하라.

내용: 이 상단 행렬에 극히 중요한 신분을 가진 인물이 숨어 이동하고 있다. 열네 살의 어린 아가씨지만 숨겨진 신분은 놀랍다. 그녀를 해치려는 세력이 강성하여 그녀를 지키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다. 예상되는 각종 위험 상황에서 그녀를 보호하는 세력을 보조하라.

보상: 행운 스텟 대폭 증가, 명성 +300, 소울 포인트 30

     자작 영지에 도착하면 누군가 아주 특별한 물건을 줄지도 모른다.

     실패 시 명성이 하락하고 의뢰를 받기 힘들어질지 모른다.』

 -이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퀘스트 등급이 D라면 다른 게임에 비해 상당히 높은데. 스토리 퀘스트라는 게 뭔지 몰라도 그래서 등급이 높은 건가?’

 비욘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보통 게임의 경우 F등급이 가장 낮다. 그래서 D등급이라면 파티 단위로 해결해야 하는 난이도가 높은 퀘스트였다.

 소울 포인트 30점과 그가 미는 행운 스텟의 대폭 상승은 마음에 꼭 드는 보상이긴 하지만 두 번째의 이상한 보상이 그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아주 특별한 물건을 줄지도 모른다니, 그럼 안 줄 수도 있단 이야긴데 그런 식의 보상도 있는지 의심이 갔다.

 그래도 NPC가 주는 퀘스트가 아니라 비욘드 자체가 주는 퀘스트이고 연계에다 스토리 퀘스트라는 것이 끌렸다. 더구나 호위의 주체가 아니고 단순히 보조하는 것이니 성공 가능성이 높았다. 확실할 수 없지만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나서는 길에 받은 퀘스트이니 느낌은 좋아. 일단 최선을 다해 보자.’

 -퀘스트를 수락합니다.

 ‘저 친구가 퀘스트의 대상이구나.’

 하룬은 확신했다. 마차 안에 있는 인물의 실루엣을 본 다음 퀘스트 창이 떴으니 그것은 당연했다.

 ‘그럼 당분간 이들과 동행해야겠구나.’

 그것은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그와 재수 4인방의 활약으로 강한 인상을 준 덕분에 오히려 테인 대장이 그것을 원할 것 같았다.

 하룬은 낮잠을 잔 것과 퀘스트를 받은 흥분으로 잠이 오지 않았지만 내일을 위해 억지로 눈을 감았다.

 역시 생각대로였다. 아침 일찍 테인과 메일란이 찾아온 것이다.

 “이번 상행은 우리의 생각보다 많이 위험하네. 다른 때 같았으면 그렇지 않은데 이번에는 거의 매일 몬스터들과 격전을 치르고 있네. 이미 세 명이나 죽었고, 다친 숫자는 더 많지. 자유 용병을 열 명까지 고용했지만 불과 스물다섯에 불과한 우리 로템 용병대의 힘만으로는 다음 목적지인 파슨 남작령까지 가는 것이 불안한 상황이라네.”

 “도와줘, 하룬. 친구들도 아주 반듯하고 제대로 배운 사람들 같아서 무척 마음에 들어. 우리 용병대원들은 좀 거칠어서 상인들이 두려워하거든.”

 하룬은 내심 바라고 있었지만 혹시 몰라 조금 빼다가 일단 파슨 남작령까지만 동행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일당은 3골드였는데 곁에 있던 필립의 눈빛을 보면 적은 보수는 아닌 것 같았다.

 “후우, 이제 좀 안심이 되네. 자네들 실력이라면 우리 용병대원들 중에서도 중간 이상은 되니까. 그럼 이동하면서 자네들은 여기 두 마차를 호위해 주게. 이분은 나와 오랜 안면이 있는 데브론 노인이고 이분은 도란 씨네. 두 아이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는 길이니 각별히 신경 써 주게. 아이들이 우리 용병들을 두려워해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파슨 남작령까지는 나흘 거리였다. 선금으로 절반인 6골드를 받아 망설임 없이 품속에 넣은 하룬은 재수 4인방을 데리고 두 마차의 주인들에게 갔다.

 “돌풍 용병대 대장 하룬입니다. 여기는 대원들인 필립, 지탄, 시린느 그리고 라트리나라고 합니다. 저희가 파슨 남작령까지 이 마차들을 책임지겠습니다.”

 “반갑네. 자네들의 솜씨는 익히 보아 알고 있네. 난 데브론일세.”

 데브론은 하룬이 정신을 차렸을 때 좋은 충고를 간접적으로 전해 준 노인이었다. 시꺼멓게 탄 얼굴에는 굵은 주름살이 패 있었고, 가면처럼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도란이라고 합니다. 이 아이들은 세페르와 세피, 제 아이들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우리 세페르가 하룬 님을 많이 좋아합니다.”

 도란은 삼십 대 후반으로 보였다. 상인 같지 않은 부드러운 인상과 정중한 태도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곁에 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소년은 열 살 전후로 보였다. 하룬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뜨거운 열망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오빠의 바지 자락을 잡고 서 있는 소녀는 두 살 정도 어려 보였는데 입을 다문 상태에서 드러난 보조개와 큰 눈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하룬 일행이 로템 용병대와 합류한 것을 가장 반기는 사람은 바로 일행들이었다. 도란이 일행의 식사를 책임지기로 한 것이다.

 도란이 끓여 준 수프를 먹는 순간 다섯 사람은 눈이 번쩍 뜨였다.

 “이 맛이야!”

 지탄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이렇게 맛있는 수프는 처음이야. 오오, 그릇이 비어 가는 것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야.”

 “이 씹히는 감촉과 신선한 버섯의 향기가 날 미치게 만들고 있어.”

 필요할 때가 아니면 말을 하지 않는 필립에 반해 먹을 것을 좋아하는 지탄과 그동안 거의 먹지 못하고 살았던 시린느와 라트리나는 도란이 끓여 준 수프에 아주 환장했다.

 “대장, 확실히 이 정도는 되어야 음식이라고 말할 수 있지?”

 “맞아, 내 생각도 그래.”

 수프에 적신 빵을 먹으며 하룬과 필립도 세 사람의 의견에 동의했다. 시린느 덕분에 먹는 것도 중요한 행복 요소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일행은 훌륭한 음식을 먹은 것을 감사하기 위해 도란의 마차로 갔다. 세페르와 세피가 도란과 같이 불편한 마부석에 있다가 하룬의 말소리를 듣고 다람쥐처럼 날쌔게 뛰어내렸다.

 “수프 맛있게 먹었습니다. 덕분에 빨리 회복됐네요. 감사합니다, 도란 씨.”

 “하하, 별말씀을. 아이들이 많이 걱정했습니다. 아무튼 아무 탈 없이 회복된 것을 보니 저도 기쁘군요.”

 도란이 다람쥐처럼 마차에서 무언가를 안고 하룬에게 달려오는 두 아이에게 시선을 던지며 대답했다.

 “형, 여기요!”

 “저도 있어요!”

 금방 하룬 앞에 도착한 녀석들의 가슴에는 꽤 부피가 나가는 가죽 자루들이 안겨 있었다. 그 자루를 힘겹게 내미는 녀석들의 얼굴이 밝게 빝났다.

 “이게 뭐니?”

 “헤헤! 형이 쓰던 암기들이에요. 아빠와 다른 아저씨들이 돌아다니면서 다 수거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힘을 합쳐 열심히 닦아 놓았어요.”

 세페르의 말에 하룬은 꽤 묵직한 가죽 자루를 받아 안을 살펴보았다. 과연 그의 암기들을 비롯한 수많은 암기들이 깨끗하게 닦인 상태로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끼잉. 오빠, 내 것도요.”

 가죽 자루가 무거웠는지 세피가 앓는 소리를 하며 가느다란 팔을 올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오! 세피, 정말 고마워. 안 그래도 잊어버린 줄 알고 포기했는데 너희들이 내게 귀중한 물건들을 찾아 주었네.”

 하룬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루를 받았다.

 녀석들의 얼굴은 하룬이 기뻐하며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만으로 붉게 상기되었다. 녀석들의 맑은 눈에 기쁨이 가득했다.

 “도란 씨, 정말 감사합니다.”

 도란에게도 인사를 했다.

 “별거 아닙니다. 하룬 님이 우리 상인들을 구해 준 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저와 아이들뿐 아니라 우리 상인들과 일꾼들이 모두 암기를 찾아서 모아 왔습니다.”

 안 그래도 암기 생각을 몇 번이나 했었다. 굳이 암기가 없어도 되지만 그래도 허전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암기들을 보자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만족한 하룬은 단검과 비수들을 암기대에 꽂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신의 암기가 아닌 것들이 보였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닌데…….”

 그 소리를 들었는지 도란이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것들은 우리 상인들과 일꾼들의 성의입니다. 우리를 보호해 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의 선물이지요.”

 암기술 교관에게 선물받은 단검과 비수 세트처럼 동일한 모양에 같은 무게가 아니라 쓰기는 불편하겠지만 각양각색의 암기들을 보는 하룬의 눈에 만족함이 흘러넘쳤다. 개중에는 작은 보석이 박힌 귀중해 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선물로 받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하룬은 그 마음의 선물들을 고맙게 받기로 했다. 어차피 그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용된 용병이다. 이 암기들로 그들을 보호할 수 있다면 받아도 무방할 것 같았다.

 기존의 단검, 비수와 형태, 무게가 비슷한 것들은 암기대에 꼳았고, 다른 것들은 가죽 자루에 담아 인벤토리에 넣었다.

 허리와 어깨를 두른 암기대에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자 왠지 든든해졌다. 특별히 상태 창에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닌데 성장한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마음이 뿌듯했다.

 무능력자로 아무런 할 일이 없는 현실과 달리 이 세계에는 그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자긍심이 그를 기분 좋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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