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템 용병대와 상행》
점심 식사 후 그들이 막 작은 고개를 넘었을 때였다.
“오크다, 오크야!”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와 앞쪽을 보니 고개 바로 밑의 작은 풀밭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백에 가까운 수의 오크들이 숲을 뛰쳐나와 한 무리의 상행을 습격하던 참이었다. 둥글게 모인 마차의 수는 대충 이십 대 정도 되어 보였고 무기를 든 용병들의 숫자도 불과 이삼십 명에 불과했다.
“우리 앞에 가고 있던 사람들이야. 저 사람들이 우리에 앞서 몬스터들을 처리한 게 틀림없어.”
필립의 말에 지탄이 갑자기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오크 워리어가 왜 이런 곳에……?”
눈에 힘을 주고 자세히 보니 다른 오크들보다 머리통이 두어 개는 더 큰 키에 우람하다 못해 터져 나갈 것처럼 울퉁불퉁한 근육을 가진 거대한 오크가 앞장서고 있었다.
놈들 셋이면 오우거도 상대한다는 타고난 전사, 오크 워리어였다. 용병 아카데미에서 수련 과정 중에 몬스터에 대한 강의도 있어 모두들 잘 알고 있었다.
“파이어 스톰!”
“파이어 볼!”
마차 위에 자리를 잡은 두 여자 마법사들이 마법을 날렸다. 한꺼번에 돌진하던 오크들의 중간 부분에서 거대한 불꽃이 폭풍 같은 기세로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오크들을 삼켰다. 여섯 개의 파이어 볼을 맞은 오크들 역시 징그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땅을 굴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화살이 날아갔다. 활을 가진 몇 명의 용병들은 단숨에 세 번의 연사를 날렸다.
췌에엑!
케엑!
오크들의 비명과 함께 사람들에게 쇄도하던 오크 워리어의 발이 멈추었다. 그들의 가운데에 떨어진 거대한 불덩어리가 사방으로 퍼지며 오크들의 몸과 털을 태우고, 작은 불덩어리를 맞은 오크들이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구르자 기세가 꺾인 것이다.
아쉽게도 제대로 목표를 향해 날아간 것이 아닌 어설픈 화살 공격으로 죽은 오크들은 없었다. 물론 화염이 가시고 드러난 오크들의 진영에는 화살에 맞아 신음하는 오크들도 몇 마리 보였다.
“공격!”
와아!
“죽이자!”
무기를 힘주어 잡은 용병들이 소리를 지르며 일제히 앞으로 달려 나갔다.
“후욱, 후욱.”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되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마치 자신이 저들 속에 섞여 오크들을 향해 달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곁에 선 필립과 라트리나도 흥분되는지 호흡 소리가 커졌다.
다른 게임과 달리 너무나 생생한 전장의 모습이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용병들의 피와 박동 치는 맥박이 느껴졌다. 달려오는 인간들에게 날카로운 어금니를 드러내고 소리를 질러 대는 오크들의 그 야성과 투기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이건 실제야!’
오크들은 인간을 해치고 심지어 식량으로 삼는 몬스터. 그들을 죽이는 것에 가책은 느끼지 않았다. 다만 목숨 걸고 싸운다는 사실에 흥분이 끓어올랐다.
채앵!
“죽어!”
쿠엑! 칙!
전장은 마차에서 이십 보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형성되었다. 마차의 중간 부분에서 맞부딪친 것이다.
두 마법사의 마법으로 죽거나 전투 불능에 빠진 오크들은 불과 열두엇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근접 전투가 시작되어 마법을 더 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용병들과 오크들의 전투는 아주 살벌하고 치열했다.
용병 한 명에 오크 두셋이 달라붙었지만 용병들은 작은 방패와 기민한 회피 동작으로 잘 싸우고 있었다. 모두 중급 이상의 실력에 노련함까지 갖추었기에 가능한 전투였다.
오크 워리어는 오러를 주입한 듯 밝게 빛나는 검을 든 세 용병이 맡았다.
휘잉! 꽈앙!
실력도 있고 노련한 용병들이었기에 잘 상대하고 있었지만 워리어를 상대하는 세 사람은 충돌할 때마다 연방 뒤로 물러나며 힘겨워했다. 워리어의 힘은 정말 엄청났던 것이다.
검과 도끼가 워리어의 두터운 가죽을 뚫지 못해서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몸은 땀에 흥건하게 젖어 갔다. 그나마 워리어를 비롯한 오크들의 무기는 낡은 철검이거나 두꺼운 몽둥이가 대부분이었고 방어구도 조악한 수준이었기에망정이지 용병들과 비슷한 수준이었으면 상대하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전황은 불리해져 갔다. 애초에 실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워낙 숫자가 차이 났기에 시간이 갈수록 용병들은 하나둘씩 위험에 처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이제 놈들 중에는 이쪽으로 향하려는 녀석들까지 나오고 있었다. 용병들이 필사적으로 그런 오크들을 막고는 있었지만 갈수록 힘겨워했다.
“대장,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
라트리나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눈앞의 피가 튀는 살벌한 전투를 보면서 투기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광전사의 자질을 가진 녀석이었다.
“여기서 더 지체하면 우리가 끼어들 틈이 없을 거야, 대장!”
평소에는 침착한 필립이지만 검을 쥔 그의 손도 격정으로 힘이 들어간 탓에 핏기가 사라졌다.
돌아보니 지탄은 방패를 힘주어 쥔 채 부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어지간히 겁이 많은 녀석이었다. 겁먹은 것은 시린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두 팔로 가슴을 안은 채 전장을 외면했다.
“두 사람은 여기서 대기해. 필립, 라트리나, 가자!”
하룬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린 두 명이 날듯이 뛰어 전장으로 향했다. 하룬 역시 뛰기는 했지만 방향은 전장이 아니었다. 그가 향한 곳은 천막이 쳐진 한 마차 위였다.
“누구죠?”
근심 어린 얼굴로 전황을 보던 중년의 여자 마법사가 침착하게 물어 왔다. 전장으로 향하는 젊은이들이 막 위급한 상황에 빠진 용병들을 구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우려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돌풍 용병대의 하룬입니다.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위급한 상황 같아서요.”
“고마워요. 난 로템 용병대 부대장 메일란이에요. 그런데 왜 여기에……?”
하룬은 메일란의 의문 섞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암기대에서 단검을 빼 들었다. 이십 보라면 스킬은 필요 없었다. 비록 수련 기간은 짧았지만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터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던 극고의 수련을 거친 데다 그와는 묘하게 상성이 잘 맞는 암기술이었다.
쉬윅!
단검 한 자루가 섬광처럼 빠르게 전장을 향해 날아갔다.
단검은 자신의 바스타드를 오크의 옆구리에 깊숙이 꽂고 나서 힘겹게 빼려는 한 용병의 등을 향해 몽둥이를 날리는 오크의 목덜미에 깊숙이 박혔다.
그 용병은 마차 위에서 이미 다른 단검을 빼 들고 있는 하룬을 발견했다. 그는 고맙다고 미소 짓고는 다시 다른 오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전장에 들어온 이래로 빠르고 날카로운 검으로 오크 두 마리를 해치운 라트리나는 어느 틈에 오크 세 마리에게 둘러싸여 놈들의 무기에 밀려 엉덩방아를 찧고 눈을 질끈 감았다.
낡고 녹슨 도끼 하나를 머리 위까지 쳐든 오크의 흉악한 얼굴이 크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흥분해서 돌아 버리는 바람에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오크가 너무 흉측하고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쉬익!
케엑! 취엑!
눈을 떠 보니 도끼를 든 오크의 이마에 단검 자루가 깊이 박혀 있었다. 다른 두 오크들은 어디에서 단검이 날아왔는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황급히 일어난 라트리나는 마차 위에서 다시 다른 쪽으로 단검을 던지는 하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세 오크의 힘에 밀려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필립의 등을 공격하려던 오크의 뒤통수에 단검이 꽂혔다.
‘대장이 뒤에 있다!’
그 생각이 들자 힘이 솟기 시작했다. 암기술의 달인인 하룬 대장이 자신을 배후에서 지켜 주고 있다고 생각하자 공포에 잠식되었던 라트리나는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더러운 새끼들이 어디서 감히 나에게 덤벼들어! 정의의 검을 받아랏!”
그녀의 검이 암기로 정신이 흐트러진 한 오크의 옆구리를 향해 날카롭게 날아갔다.
하룬의 비수는 오크들의 합공에 머리가 잘릴 위기에 빠졌던 한 용병에게도 도움을 주었다. 한꺼번에 두 개가 날아가 그의 앞뒤에 있던 오크들의 목을 꿰뚫은 것이다. 그는 두 오크들을 떼어 내고 입술에 손가락을 대서 하룬에게 감사의 표시를 날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 전황이 급속하게 안정을 찾아 갔다. 갈수록 쓰러지는 오크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오크들은 강력했던 초반의 기세를 잃어 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바람 소리가 들린다 싶으면 곁에 있던 오크들이 급소에 단검을 맞고 쓰러지거나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오크들은 자신의 상대에게 집중할 수 없었다.
전황이 이렇게 바뀌기 시작한 데에는 하룬의 역할이 컸다. 가장 높은 마차 위에 자리한 하룬은 위험에 빠진 용병들이 보일 때마다 단도를 날려 그들을 보호했다. 상인들과 일꾼들은 그런 하룬의 모습에 연방 감탄성을 터트렸지만 하룬은 그 소리들을 듣지 못할 정도로 전장에 집중했다.
“이크!”
드디어 워리어의 압도적인 힘과 맞부딪친 세 명 중 하나가 강력한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세 용병의 차륜전에 밀려 힘과 야성을 터트리지 못하고 붙잡혀 있던 오크 워리어는 번들거리는 붉은 눈을 빛내며 그 용병을 향해 다시 무지막지하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꽈앙!
몽둥이와 검이 부딪친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큰 충격음이 터져 나왔다.
유난히 인상이 험악한 한 용병은 서로의 무기가 부딪친 순간의 충격으로 마치 술 취한 것처럼 휘청거리며 워리어의 몽둥이를 막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위태로워 보였다.
쉬익!
비수가 날아갔다.
단검은 날 길이가 일반 비수보다 짧은 터라 박혀 봐야 보통 오크보다 훨씬 더 건장한 육체를 가진 워리어에게 피해를 주긴 힘들 것 같았다. 비수라면 더 깊이 박힐 것이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놈이지만 그 움직임은 보통 오크에 비할 바 없이 민활해서 목표로 한 목이 아니라 어깨 깊이 비수가 박혔다.
워리어는 고통에 끔찍한 비명을 지르면서도 화가 났는지 눈빛만으로 주변을 쓸어버릴 것처럼 그 기세가 무시무시하게 변해 소리를 질렀다.
쿠워어어! 취에에!
꼴에 워리어도 보스급 몬스터라고, 약하지만 피어의 효과는 나타났다. 당장 워리어를 상대하던 용병들은 물론 다른 용병들의 움직임이 멈칫거렸던 것이다.
“침착해! 배후에서 암기로 보호할 테니 이제껏 했던 대로만 하면 돼!”
전권을 주시하던 메일란의 외침에 주춤하던 용병들의 움직임이 금방 안정되었다.
살벌하게 전투를 하면서도 하룬의 배후 공격으로 어느 정도 안정되자 필립이 한 오크의 목에 검을 찌르고는 워리어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런! 암기가 떨어졌어.”
정신없이 던지다 보니 용병 아카데미에서 받았던 스무 자루의 단도와 비수가 다 떨어졌다. 세보나에게 받은 비수가 있엇지만 암기대가 아니라 토시에 장착한 것을 그는 잊고 있었다.
비록 인벤토리에 표창 한 자루가 있지만 비수 형태가 아니라 별 모양이고 아직 던져 보질 않아 정확도가 떨어질 것이다.
지금 오크와의 전투에서 하룬이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하는 지는 안정을 찾은 상인들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그를 주시하던 한 상인이 다른 상인들과 일꾼들에게 다급하게 소리쳤다.
“누구 암기 가진 사람? 빨리!”
지금 전황의 중심은 하룬이라는 사실을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 용병들은 잘 몰랐지만 전투를 지켜보는 상인들과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 하룬의 암기는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여기, 여기 있소!”
“여기도! 난 단검이오!”
원거리를 여행하는 상인들과 일꾼들은 항상 위험에 맞닥뜨리는 만큼 단도나 단검 그리고 비수 몇 자루 정도는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닌다. 순식간에 마차 위에 비수와 단검이 수북이 쌓였다.
“아악! 노든이 위험해!”
메일란의 비명에 고개를 돌려 보니 현란한 검술로 오크들을 잘 상대하던 한 젊은 용병이 오크 다섯 마리에 둘러싸여 힘겹게 전투를 하고 있었다. 벌써 옆구리와 어깨 한쪽이 철검에 베였는지 한 팔은 덜렁거렸고, 사슬 갑옷이 피로 젖어있었다.
쉭! 쉬익! 쉬이익!
워낙 급해 감각만으로 비수 세 자루를 연속으로 던지는 하룬이었다.
취엑! 취익!
전광석화처럼 날아간 비수들은 용병 둘의 틈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날아가 아주 멋지게 오크의 머리와 목의 급소에 틀어박혔다.
“휴우.”
던질 때는 워낙 급해서 몰랐는데 비수가 떠나는 순간에는 긴장한 나머지 온몸에서 순간적으로 식은땀이 흥건하게 솟았다. 순수한 자신의 능력으로 목표물을 멋지게 명중시킨 것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이 전류가 흐르듯 온몸에 퍼졌다.
“멋지다!”
“최고야!”
몇 명의 상인은 하룬의 암기술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탄성을 질렀다. 다른 사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직 하룬의 암기는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었다.
더 이상 오크들의 증원이 없는 상황에서 하룬의 암기가 빗살처럼 날아 오크들을 요격하자 전황은 점점 더 유리해졌다.
오크들을 이끄는 워리어는 소드 유저 상급 실력을 가진 필립이 가세하자 서서히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네 사람의 힘과 합공에 밀린 워리어가 주변을 살폈다.
자신이 네 명의 용병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룬의 암기 지원을 받아 경험 많은 용병들이 힘을 내기 시작하자 오크들은 하나둘씩 바닥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틈을 보이는 오크를 찾는 하룬의 눈이 매섭게 양쪽 전장을 쓸어 보고 있을 때 방금 전 비수에 목이 꿰뚫린 오크가 숨을 거두자 그의 귀에 익숙한 안내음이 들려왔다.
이런 음성이 가끔이라도 들려오지 않는다면 하룬도 자신이 가상현실 게임을 하고 있다는 자체를 잊을 정도였다.
보통 게임의 경우 몬스터를 사냥하면 아이템이 죽은 그 자리에 나타나는데 비욘드는 그렇지 않았다. 아이템이 최종적으로 사냥한 사람의 인벤토리로 직접 들어오는 방식이었다.
하룬 역시 지금까지 부상을 입힌 오크들을 빼고도 자신이 직접 암기로 죽인 오크만 해도 열 마리는 넘을 것 같은데 처음 듣는 소리였다.
‘아싸!’
용병행을 나선 후 최초로 획득한 아이템이었다. 이렇게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는 것만 해도 가슴이 뛰는 일인데 아이템까지 생기니 얼마나 신 나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아직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쉬익!
또 하나의 비수가 날아가고 여지없이 오크는 피를 뿜어내며 비틀거리다 용병의 무기에 맞아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진다. 어느새 오크들의 숫자는 처음의 반도 되지 않을 정도로 줄어 버렸다.
용병들은 지치기는 했지만 용기백배해 오크들을 더욱 압박했고, 하룬은 이제 위험에 빠진 용병들을 구하기 위해 암기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격하기 위해 암기를 날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서넛 정도의 오크들을 상대하던 용병들이었으나 오크들의 숫자가 줄자 오랫동안 전투를 치르며 자연적으로 익힌 합격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자신감을 얻은 용병들의 기세는 무서웠다. 마치 바싹 마른 갈대밭에 불을 붙인 형국이라 오크들이 쓰러지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취에엑!체엑!
차차창창!
어깨에 박힌 비수와 필립이 가세한 뒤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방어에만 급급했던 워리어는 귀청이 터질 정도의 괴성을 지르더니, 강력한 힘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네 자루의 무기를 쳐서 뒤로 물리고는 순식간에 전장을 이탈했다.
용병들이 다시 자리를 잡으려고 할 때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잔뜩 인상을 쓴 워리어는 저 멀리 마차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하룬을 한번 매섭게 쏘아보더니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질풍 같은 속도로 도망쳐 버렸다.
“쫓아라! 오십 보 거리까지. 벗어나면 지체 없이 돌아온다!”
누군가의 외침이 없었더라도 용병들은 지체하지 않고 등을 보이는 오크들을 향해 무기를 날렸다. 기세를 잃고 도망치는 오크들을 상대하는 것은 밥 먹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쉬이이.
그 순간 하룬의 손에서 비수 하나가 엄청난 빠르기로 이제 나무들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육중한 체구의 워리어를 향해 날아갔다.
작은 비수가 내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파공성을 내며 마치 물고기가 유영하듯 나무와 사람 그리고 오크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날아갔다. 그 비수의 끝에서는 신비하게도 파란 빛무리가 긴 선을 그렸다.
추격하던 용병들의 일부도, 처음부터 지켜본 일꾼들과 상인들도 눈을 부릅뜨고 그 비수의 궤적을 좇았다.
비수가 이렇게 자유자재로 방향을 틀며 날아간다는 것은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기이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그 속도라는 것은 잔상이 보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꾸워어어!
꾸웅!
“맞았다! 워리어가 쓰러졌어!”
“오오!”
오크들을 쫓아야 하는 용병들마저 발걸음을 멈추었다. 경험이 풍부한 네 명의 중급 용병으로도 겨우 막아내는 데 애를 먹은 오크 워리어였다. 세 마리면 오우거도 상대할 수 있다는 그 무시무시한 놈을 비수로 쓰러뜨린 것이다. 그것도 겨우 한 자루로 말이다.
“가 보자!”
대장을 빼고 가장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한 헤알의 말에 용병들이 일제히 워리어가 쓰러진 곳으로 향했다. 워리어를 잃고 공포에 질려 산지사방으로 도망치는 오크들은 이제 관심 밖이었다.
“허억!”
“진짜 죽었어.”
“귀를 뚫고 뇌를 관통했군.”
비수는 워리어의 머리를 관통하고 나무둥치에 꽂혀 아직도 그 기세를 잃지 않았는지 가늘게 떨었다. 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진 오크 워리어는 숨이 끊어지지 않았지만 몸의 경련이 점차 약해졌다.
“도대체 거리가 얼마나 되는 거야?”
한 노인이 마차 위로 올라와 메일란 곁에 있는 마법사에게 물었다.
“적어도 오륙십 보는 될걸요.”
“완전 괴물이군.”
그 노인의 눈에서는 숨길 수 없는 감탄의 빛이 새어 나왔다.
“으으으. 춥다, 추워.”
“도대체 이게 암기로 죽인 거 맞아?”
오크 워리어의 죽어 가는 모습을 보던 용병들은 아까 오크들을 상대했을 때보다 더 오싹한 소름이 끼쳤다. 그 먼 거리에서 그것도 중간에 방해물이 도처에 깔려 있는 상황에서 목표물의 머리통을 정확하게 관통하는 암기 실력이라니.
“우린 전설이 될지도 모를 인물과 같이하고 있는 거군.”
“이렇게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믿기질 않네요. 비수로 오크 워리어를 끝장낼 수 있는 인물이 있다니…….”
용병들은 잠시 말을 잊었다.
그 순간 모두가 보는 가운데 하룬의 몸이 뻣뻣하게 굳으며 마차에서 굴러떨어졌다. 시린느와 라트리나가 비명을 지르며 그를 향해 뛰어왔다.
오크들을 무사히 해치우자 상행은 활기를 되찾았다. 비록 대장을 비롯한 용병들의 소식은 없지만 아무런 희생도 없이 오크 워리어를 포함한 백여 마리의 오크들을 해치웠다는 것은 정말 고무적인 일이었다.
가장 많이 활약한 하룬은 정신을 잃고 한 곳에 누워 있었지만 메일란의 말에 따르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다.
경험이 많은 용병들을 비롯한 사람들은 아주 익숙하게 자신의 일을 찾아 하기 시작했다. 오크들의 가죽을 벗기는 사람들, 공포에 질렸던 말의 눈과 코를 감싼 헝겊을 벗기는 상인들과 일꾼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이 순간만은 상인들과 용병의 구별이 전혀 없었다.
하룬이 정신을 차린 것은 반나절 정도가 지난 저녁 무렵이었다. 막 깨어난 하룬은 완전히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워리어를 향해 비수를 날리고 그 비수에 놈이 죽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 몇 개의 안내음을 듣는 순간 시야가 깜깜해졌던 것이다.
자신이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은 하룬은 상황이 궁금해서 눈을 뜨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곁에서 도란도란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할아버지, 이 형이 날린 비수가 그렇게 대단한 힘을 가진 거예요? 다른 아저씨들이 그러는데 어쩌면 전설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던데요.”
잘 들어보니 나이가 제법 있는 사람과 어린아이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하룬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호기심이 들어 눈을 뜨지 않았다.
“대단하지. 원래 비수도 그렇고 단검도 그 무게가 가벼워서 손으로 던지는 것이지만 이십 보 이상 떨어지면 무기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단다.”
“에에? 아까 그 워리어는 적어도 오륙십 보 이상 떨어져 있었는데…….”
“마나를 비수에 주입했거나 아니면 다른 알 수 없는 힘을 이용했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거리까지 날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거든.”
아이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인자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은 노인이었다.
“그럼 정말 전설이 될 수 있겠네요? 용병 아저씨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비수로 워리어를 죽이는 것은 여태껏 들어 본 적이 없대요. 와아, 이 형 정말 대단하다.”
“흐음, 확실히 대단하긴 하지만…….”
노인의 말이 이상하게 들렸는지 아이가 다시 물었다.
“왜요? 저 형 나이에 저 정도 실력이면 대단한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너무 충동적이고 아직은 한참 부족해.”
“네에? 그게 무슨 얘기예요?”
노인의 말에 하룬은 눈을 번쩍 뜰 뻔했다. 나름 네 사람이 합공해도 잡지 못했던 워리어를 끝장냈는데 그가 너무 충동적이고 부족하다니.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서운하고 화가 났다.
“워리어가 용병들의 합공 때문에 지쳐 있었고, 도망치는 중이 아니었다면 그 비수에 죽는 일은 없었을 거다. 워리어는 물론 사람들이라도 그 정도 거리에서 암기가 날아올 줄은 생각도 못 했겠지. 따라서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 거지.”
“그래도 워리어를 죽인 것은 대단한 거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 굳이 워리어를 죽일 이유는 없었지. 그것도 혼신의 힘을 다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고. 더구나 자신이 믿는 동료들이 지켜 준다는 확신도 없는 상황에서 비수를 던지고 정신을 잃은 것은 공명심을 탐했거나 끓는 피를 억제하지 못한 거야. 누군가 이 친구의 목숨을 노렸다면 아마 그 순간에 끝장이 났겠지. 그리고 만약 사람들이 지쳐 있던 그때 다른 오크 떼가 합류했다면 모두 큰일을 당했을지도 몰라.”
“그, 그렇지만 멋있었잖아요. 다들 형을 칭찬하고 보는 눈도 달라졌잖아요.”
아이는 노인이 하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못내 불만인 것 같았다. 자신의 우상이 된 멋진 용병의 치부를 자꾸 건드리는 바람에 볼멘 목소리로 변했다.
그 순간 대화를 듣고 있던 하룬은 등골이 서늘해지고 소름이 쫙 끼쳤다. 노인의 말대로 누군가 그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로 죽는지도 모르고 죽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리다는 거다. 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어느 정도는 자신의 실력을 감추는 것이 필수다. 무기를 들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은 물론 보통 사람도 능력을 삼 할은 감추고 살아야 하는 거란다.”
“왜요?”
“지금은 멋있게 보이겠지만 용병이란 존재는 그 근본이 무식하고 거친 족속들이야. 심지어 용병 길드가 창설되기 전에는 호위하다가 깊은 산중에 들어서면 도적 떼로 돌변하는 게 다반사였단다. 지금도 그런 놈들이 많지. 뒤통수를 맞지 않고 현명하게 살려면 자신의 능력을 적당히 감추는 것이 세상을 살아 나가는 지혜란다.”
하룬은 너무 창피했다. 엘저의 아버지 피엘의 질타를 들으며 자만심을 갖지 않겠노라 결심했으면서 오크를 잡는 재미에 빠져 폭주한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당장 저쪽에 있는 녀석들 하는 짓 좀 봐라. 워리어 가죽을 벗겨 자신들의 짐 속에 집어넣었잖아. 내가 장담하마. 저놈들은 이 청년이 깨어나도 결코 감사 인사를 하러 오지 않을 거다.”
“왜요?”
“이 정도 살면 웬만큼은 사람 보는 눈이 생기지. 저런 놈들은 애초에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아. 이 아이가 쓰러지고 나서도 이쪽으로는 한 번도 오지 않은 놈들이야. 아마 워리어 가죽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싸움도 불사할걸. 이미 이쪽은 가진 패를 다 보였으니 무섭지도 않겠지. 암기라는 것은 어둠에 있을 때만 그 효용이 극대화되지. 저놈들처럼 익스퍼트급 초입에 든 놈들은 결코 비수를 두려워하지 않아.”
“그래도 전 이 형이 존경스러워요. 워리어를 잡을 만큼 강하잖아요.”
“허허허! 그래, 강하지. 하지만 진정으로 강한 자는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자란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운과 밑천이 튼튼해야 하는 법이지.”
두 사람은 잠시 더 도란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른 쪽으로 갔다.
‘나란 놈은 정말! 왜 이다지 생각이 짧은 거야. 그래, 노인의 말대로 굳이 도망치는 워리어를 잡을 필요는 없었어. 거기다 내 한계까지 보여 주었으니 만약 나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무리가 있었다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야.’
때늦은 후회가 그를 괴롭혔다. 몸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최악의 상태인 것 같았다.
‘다시는 이런 멍청한 짓을 하지 않겠어. 노인의 말대로 진정으로 강한 것은 살아남는 자니까.’
한참 자책하던 하룬은 기어코 마음을 다잡고 눈을 떴다.
“깨어났어요! 깼다고요!”
한 여자아이가 놀라 호들갑을 떠는 소리에 재수 4인방이 황급히 그에게 다가왔다.
“대장, 몸은 좀 괜찮은 거야?”
묻는 필립을 비롯해 지탄과 시린느 그리고 라트리나의 얼굴에는 그를 많이 걱정한 기색이 완연했다. 그는 사기를 치고 있는데 녀석들이 걱정해 주는 것을 보니 약간은 가책이 느껴졌다.
“어떻게 된 거야?”
이미 상황을 알게 되었지만 지금에야 정신을 차렸다는 듯 필립에게 물었다.
“어떻게 되긴, 대장이 비수로 워리어를 죽이고는 바로 정신을 잃었잖아.”
“으음.”
하룬은 상체를 일으켰다. 그제야 자신이 도란의 마차 옆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깨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는지 목숨을 구한 용병들이 찾아와 감사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유심히 지켜보았지만 노인이 말한 그 몇 명의 용병들은 역시나 찾아오지 않았다.
잠시 후 메일란이 한 용병과 함께 찾아왔다.
“일어났네요. 걱정 마요. 너무 과도하게 힘을 쓴 탓이라니까요.”
“걱정을 끼쳤습니다.”
“아니요, 우리를 돕다가 그렇게 되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수하 분들이 정령의 힘을 사용했다고 알려 줘서 마나가 소진되어 그렇게 되었다는 걸 알았어요. 아, 그리고 이분은 내 오빠이자 로템 용병대를 이끄는 대장 테인이에요.”
메일란의 곁에 있는 남자는 중년의 나이로, 그녀와 비슷한 뚜렷한 윤곽의 얼굴에 중후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용병이라기보다는 기사의 느낌을 많이 풍기는 사람이었다.
테인은 분명 전장에 없었는데 입고 있는 사슬 갑옷이 엉망진창인 것으로 보아 흉험한 전투를 치른 듯했다. 그래도 상처를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자네 대원들에게 들으니 4급 용병이라던데 정말 대단하군. 하룬이라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아무리 힘이 빠진 상태에서 도망치는 중이었다고는 해도 정령을 이용한 비수로 워리어를 죽이다니. 그야말로 처음 듣는 대단한 스킬이야.”
테인의 말이 분명히 칭찬인 것을 알면서도 하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비수로 워리어를 죽이면 뭘 하나.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반나절이나 정신을 잃었는데. 노인의 말이 생각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운 솜씨였습니다.”
테인이 흡족한 얼굴로 그의 손을 잡고 몇 번 두드렸다.
“아니, 대단했네. 앞쪽을 공격한 오크 놈들의 숫자가 많아 다른 곳으로 유인하느라 안타깝게 그 멋진 광경을 내 눈으로 직접 보진 못했지만 들은 것이 확실하다면 정말 대단하네.”
“감사합니다.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하라면 절대로 못 할 것 같습니다.”
노인의 말대로 그는 능력을 숨기기로 했다.
“이 일은 아마 우리 용병계의 새로운 전설이 될 것이네. 아주 신선하고 놀라운 시도였어. 비수에 정령의 힘을 담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앞으로 또다시 그렇게 비수를 날릴 수 있다면 자네의 발전은 그야말로 탄탄대로일 거야.”
“그 순간 제가 어떻게 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하룬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의 말에 테인은 의외로 선선하게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런 순간이 아무 때나 오지는 않지. 더구나 그때는 아마 무아지경이었을 거야. 가끔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네. 다시 그 순간의 감각을 느끼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할 거야. 만약 그 감각을 깨닫는다면 자네만의 스킬이 되겠지. 어쨌든 자네와 자네 친구들에게 아주 감사하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이제야 확실하게 정황을 알았다는 듯 수긍하는 얼굴들이었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좋겠지만 실상은 싸가지가 그의 몸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폭주한 탓이었다. 수료식 때와 달리 이번엔 한순간에 몸에서 힘이 송두리째 빠져나간 것을 그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일단 식사하고 좀 쉬게. 그리고 너무 조바심을 갖지는 말게. 부단히 노력한다면 전설이 될 엄청난 스킬을 익힐 수 있을 테니까.”
“그래, 좀 쉬어요. 어쨌든 하룬이 큰 활약을 해 준 덕분에 희생자가 한 명도 없었어요. 고마워요.”
메일란은 무척 고마워했다. 나름 경험이 많다고는 해도 무척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하룬이 아니었으면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거라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테인 남매가 돌아간 뒤로도 몇 명의 용병들이 더 찾아와 감사를 표시했다. 그들은 생명이 경각에 달한 순간 하룬이 날린 단검과 비수에 목숨을 건진 용병들이었다.
“아직 얼굴이 창백한 것이 다 낫지 않은 것 같으니 다들 자리를 피해 주자고.”
하룬의 상태를 지켜보던 필립의 말에 재수 4인방을 비롯한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비켜 주었다. 사실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그 맑고 깊던 눈도 흐릿한 것이 정상은 아니었다.
하룬은 한 상인이 끓인 수프로 적당하게 시장기를 달래고는 마차 바퀴에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체력이나 생명력이 극도로 낮아진 탓에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전직만 했으면 레벨 업으로 상태가 한순간에 회복되었을 텐데.’
그 생각을 하니 정말 아쉬웠다. 아무리 워리어가 약해졌다고는 해도 마지막으로 숨통을 끊은 것은 자신이니 레벨 몇 정도는 올라갔을 것이다.
‘근데 이 게임은 강제 접속 해제가 없나? 정신을 잃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면 굳이 시스템이 아니더라도 벨이 강제로 접속을 해제시켰을 텐데. 내가 안전하다고 생각한 걸까?’
나중에 벨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하룬은 문득 뭔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정신을 잃기 전에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하룬은 급하게 상태 창을 열고 생명력과 마나 그리고 정령력을 확인했다.
『이름: 하룬
종족: 인간
직업: -
레벨: 10
칭호: 오크 워리어 슬레이어(외 2개)
생명력: 30
마나: 5
정령력: 1』
“빌어먹을!”
400대 후반이던 생명력은 물론 마나의 수치가 형편없이 떨어졌다. 특히 정령 친화력은 겨우 1에 불과했다. 다른 스텟들도 바닥을 기었지만 위안이라면 워리어를 죽인 덕분에 소울 포인트가 5나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싸가지에게 따로 명령을 내렸던가?’
생각해 보니 특별히 싸가지에게 정령 유도 암기술을 명령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스킬의 위력치고는 너무나 강력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상하네. 그렇다고 내 명령도 없이 싸가지가 마음대로 행동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장 싸가지를 소환해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 상태로는 소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잘못하다가는 소환하다가 마나가 고갈되어 죽을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안내음이 몇 번 들렸었지.’
하룬은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역시 새로운 아이템이 두 개나 들어와 있었다. 이상한 기운이 흐르는 작은 돌멩이 하나와 50센티 정도 길이의 짧은 검이었다. 아이템들을 꺼내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마나석(재료)
등급: 매직(상)
설명: 몬스터들 중에는 가끔 마나석을 주워 먹고 무리들을 압도하는 힘과 지능을 가진 강력한 존재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놈드을 사냥하면 그동안 생체 내에서 키운 마나석을 얻을 수 있다. 채굴하거나 자연계에서 얻은 마나석에 비해 마나의 집적도가 높고, 비우고 채우는 시간이 빨라 마법사들에게 아주 귀중한 물건이다.』
‘대박이다!’
기운이 없는 와중에도 하룬은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오크를 잡은 것치고는 대단한 아이템이 떨어진 것이다.
하룬은 다른 아이템의 정보도 확인했다.
『숏 소드
등급: 매직
내구도: 60/60
공격력: 30~35
설명: 검과 암기로 사용이 가능한 숏 소드이다. 절삭력과 공격력이 무척 우수한 숏 소드로 상당한 기술을 가진 장인이 대단한 노력을 다해 만들었다.
제한: 무』
그렇지 않아도 이런 무기가 필요했다. 그가 가진 단검들은 길이가 20센티 정도에 불과했기에 먼 거리를 던지기에는 너무 가볍고 날의 길이가 짧았다. 이런 것이 하나 있으면 위급한 순간에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 외로 오크들과 워리어가 좋은 아이템을 주었다.’
몸 상태는 최악이지만 기분은 뿌듯했다. 살펴본 김에 스킬창까지 살펴보기로 했다.
“스킬 확인!”
『정령 합체 암기술(패시브): 중급 Lv.1(3.20%)/Lv.5
일정 수준 이상의 사고력을 가진 특별한 정령을 암기에 합체시켜 위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습니다. 레벨 1의 경우 그 유효 거리는 50미터이고, 장애물을 피해 목표의 급소를 정확하게 공격할 수 있습니다. 초당 50의 마나와 초당 10의 정령력이 필요합니다.』
역시 새로운 스킬이 하나 등록되어 있었다. 거기다 초급이 아니라 중급이었다. 초급을 거치지 않고 바로 중급 스킬이 생기는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입이 찢어지려 했다.
하룬은 기쁜 마음에 몇 번이고 내용을 확인해 보다가 뭔가를 발견했다.
‘초당 50? 빌어먹을, 이거 때문이었구나!’
자신이 왜 정신을 잃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단검이나 비수의 무게를 아무리 늘려도 사람의 손으로 던지는 만큼 그 유효 거리는 삼십 보에서 사십 보가 고작이었다. 마나를 주입하면 유효 거리가 늘어나지만 적중률은 심각하게 떨어진다.
즉, 에센셜 정령으로 자아를 가진 싸가지가 비수에 합체되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 엄청난 거리를 장애물을 피해가며 도망치는 워리어를 요격할 수 있었다.
‘너무 피곤하네.’
반나절 간 정신을 잃었다는데도 잠이 왔다. 생명력도 그렇고 마나의 수치가 낮아서 그런지 스르르 잠드는 하룬이었다.
밤이 되어 다시 깨어난 하룬은 재수 4인방이 자신을 호위하는 것을 보았다. 녀석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천막을 칠 생각도 하지 않고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대고 쉬었다.
그런 모습에 가책을 받은 하룬은 복잡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눈을 뜬 시린느와 시선이 마주쳤다.
“대장, 일어났네.”
“일어났구나. 이거 마셔.”
그녀의 말에 눈을 뜬 필립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뚜껑이 밀봉된 작은 유리병 두 개였다.
“그게…… 아까는 생각을 못 했는데 지부장이 따로 챙겨준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 중에 마나 포션과 물약들이 있더라고.”
‘크윽! 이런 게 있었으면 진작 줄 것이지.’
갑자기 화가 치밀었지만 그들도 몰랐다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벨이 준 정보에 따르면 비욘드에는 소진된 마나를 보충해 주는 마나 포션과 생명력을 보충시키거나 치료를 위한 물약이 존재했다.
유리병들을 받아 눈앞에 가까이 들어 보니 하급이라는 표시가 있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마법 상점에서 파는 하급 물약이 50실버인 데 반해 신전에서만 파는 마나 포션은 하급이라도 3골드가 넘는다. 주로 마법사들이 사용하기에 희소가치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재료인 트롤의 피를 구하는 것이 힘들어서였다.
마나 포션을 마시자 천천히 마나가 차올랐고, 물약까지 마시자 생명력이 복구되어 몸에 활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는 마치 푹 쉰 것처럼 몸이 거뜬했다.
“다들 걱정해 줘서 고맙다.”
“헤헤. 별말씀을. 대장이 아니었으면 난 벌써 더러운 오크들에게 죽었을 텐데, 뭘.”
“나도 대장 덕분에 살았어. 첫 실전이라서 그런지 뭘 했는지 잘 기억도 나질 않지만 그 비수 덕분에 오크의 녹슨 철검에 이 아름다운 얼굴이 베일 위기를 넘겼지.”
시린느와 라트리나가 배시시 웃으며 감사를 표시했다. 필립과 지탄 역시 엄지손가락을 들어 하룬의 활약을 축하해 주었다.
그 상태로 잠들기가 그래서, 마차를 벗어나 천막을 친 재수 4인방이 잠들 때까지 하룬은 홀로 눈을 뜨고 있었다. 꽤 많이 잔 터라 잠이 오질 않았고, 첫 전투 때문에 흥분된 마음이 아직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